영성BOOK/도인(道人)

도인(道人) 1 - 4. 장난꾸러기 학생

기른장 2025. 3. 2. 15:21

4. 장난꾸러기 학생

「작은 주인님. 선생님을 뵈러 가야 할 시간에 늦겠는데요.」

바위로 꾸며진 정원에 있던 사이훙은 이 말에 온몸이 굳었다. 사이훙은 종복 비운이를 향해 돌아섰다. 비운이는 사이훙의 친구이자 놀이 동무인 열두 살 난 아이다. 사이훙과 비운이는 관가보의 외진 곳을 찾아다니며 놀기를 좋아했다. 만약 할아버지가 아시면 얼마나 야단을 치실까?

할아버지는 동남아산 마이너 새를 대나무 새장에 넣고 사이훙이 있을만한 곳을 찾아다니며 마당을 산책했다. 할아버지는 검은색의 우아한 깃털을 가진 마이너 새를 두 마리 갖고 있었으며, 다른 중국 신사들처럼 아침이면 새를 데리고 산책을 나오곤 했다. 새들이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야생 새들의 노랫소리를 배우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섭섭하게도, 그 마이너 새들이 잘하는 말은 「배고파! 배고파!」라는 말처럼 들렸다.
 
산책을 하던 할아버지는 사이훙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한 손엔 새장을 높이 들고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매부리코에 하얀 머리칼을 길게 땋아 늘어뜨린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할아버지의 성품은 손에서도 풍겨 나왔다. 할아버지의 손은 강하고 묵직하며 굵은 마디에 독수리 발톱 같은 손톱을 가지고 있었다. 그 손은 응조권법(鷹爪拳法)을 익힌 무술가의 표징이었다.

「사이훙, 선생님께 가거라.」

할아버지가 단호하게 말했다.

「네, 할아버지.」

「그리고 비운아.」

「네, 보주(堡主)님.」

「사이훙이 선생님께 가는지 따라가서 알아보거라.」

 
깡마른 사이훙의 늙은 선생님은 반색을 하며 제자를 반갑게 맞았다. 그 선생님에겐 자신이 높이 받들던 고전을 이 아이를 가르치며 다시 공부할 기회를 갖는다는 게 대단히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이훙은 고전 강의나 그 선생님에게서 별다른 감동을 받지 못했다. 한 마디로 연로하신 그 선생님은 사이훙이 존경할 만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대부분이 학자가 아니라 무사였던 집안 식구들과 비교해 보면, 노 선생님은 신체에 대해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의 작은 체구는 의복을 걸치기 위한 옷걸이 정도로, 혹은 머리를 지탱하기 위한 골격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정말 순수한 의미로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이훙의 선생님은 해골의 윤곽이 그래도 드러날 정도로 얇은 살가죽에 핼쑥하고 주름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거의 다 빠져 버린 희끗희끗한 머리칼은 변발이었고, 뾰족한 턱에는 얼마 안 되는 턱수염이 힘없이 달려 있었다. 선생님이 짓는 얼굴 표현 중에 가장 정열적인 것은 두 눈을 둥그렇게 떠보이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철테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푹 꺼져 내려간 코끝에 걸려 있기가 어려운 듯 자꾸만 아래로 흘러내렸다.

단조로운 일과로 매일 아침이 시작되었다. 강의는 언제나 경문들을 암송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필기시험과 서예로 이어졌다. 선생님이 가진 유일한 지식의 원천은 유교의 기본 경전인 사서(四書)였다. 고전은 어린아이가 이해하기 쉬운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은 도덕을 함양하는 군자의 덕목들과, 사회와 가정의 위계질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동들, 그리고 효도를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사이훙에게 강조하면서, 쉬운 문장들을 선택해 가르쳐 주었다.

강의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지루했을 뿐만 아니라, 사이훙의 마음속에 경멸까지 불러 일으켰다.

 
선생님의 강의 중에 하나를 예로 들어 보면, 어떤 아이는 부모님이 모기장속에서도 매일 밤마다 모기에게 물린다는 것을 알고는 먼저 모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아이는 모기를 몇 마리 잡기는 했지만 모기가 너무나 많아서 다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이는 모기들이 부모님을 물지 않도록 자신의 피를 충분히 빨아먹게 했다는 것이다. 아이의 희생 덕택에 부모님은 편안히 잠을 잘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이훙은 그걸 바보 같은 짓이라고 여겼다. 그 아이는 지나치게 부모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이훙은 그런 예들은 모두 무시해 버렸다. 정작 사이훙의 행동방식에 영향을 미쳤던 것은 선생님이 가르쳤던 이 같은 세부사항들이 아니라, 유교의 가치관에 따른 조부모님들의 인격적 태도였다.

 
사이훙은 강의를 듣고 경문을 암송하는 일보다는 서예를 더 좋아했다. 비록 고전을 다시 한번 복습해야 했고, 확실하게 암송하기 위해서 반복해서 써야 했지만, 사이훙은 글씨 쓰는 것을 그림 그리는 것처럼 생각했다. 먹물을 흠뻑 머금은 붓을 휘두르는 것은 일종의 미술적 탐험이었던 것이다.

늙은 선생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사이훙에 붓 쥐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손에 힘을 빼고 손 안에 작은 호두 하나가 들어갈 만큼의 공간을 남겨 둔 채 붓을 수직으로 가볍게 잡아야 했다. 먼저 먹물에 붓을 담가 적신 다음 벼루에 붓끝을 다듬은 뒤 수직으로 세워서 써야 했다. 글자는 한 획 한 획씩 써야 하며 각각의 획은 순서에 따라 정확한 위치에 비례를 맞춰 가며 긋는다. 운필에는 일정한 속도가 가장 중요했다. 너무 빨리 붓을 움직이면 먹이 골고루 종이에 묻혀지지 않고 붓이 그냥 끌려왔다. 반대로 운필의 속도가 너무 느리면 먹이 변져 종이가 부풀어 올랐다.

 
서예를 배우는 시간이면 사이훙은 항상 사건을 일으키고 싶었다. 그 시간에 늙은 선생님은 자주 잠이 들었다. 오늘도 평상시처럼 노선생님은 무슨 생각에 잠긴 듯 천장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의 명상은 낮잠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사이훙은 24개의 획으로 된 복잡한 글자를 다 썼다. 늙은 선생님이 잠들 때마다 사이훙은 공부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놀러 나갈 것인가 갈등에 빠지곤 했다. 중국의 전통에서 학습을 끝내고자 할 때는 예의와 형식을 갖추고 헛기침을 해서 선생님을 깨워야 했다. 그러나 사이훙은 오늘따라 유난히 강한 유혹을 느꼈다.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들자 유혹이 점점 더 커졌다. 기회는 곧 행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조심스럽게 선생님 뒤로 살금살금 기어갔다. 늙은 학자의 변발이 사이훙을 유혹하듯 축 늘어져 있었다. 사이훙은 그 변발을 살그머니 붙잡아서 의자에 묶었다.

 
문간으로 가서 바깥을 살펴보았따. 비운이가 밖에서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노선생님, 노선생님!」

사이훙은 문간에서 선생님을 불러 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선생님은 성인들을 만나고 계신 게 틀림없어.」

사이훙은 비운에게 속삭이고는 돌아와서 두 손을 입에다 대고 다시 한번 선생님을 불러 보았다.

늙은 선생님의 눈꺼풀이 망설이듯 껌벅거렸다. 하지만 곧 제자의 좌석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한 그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노선생님!」

사이훙과 비운은 노한 늙은 선생님의 호통을 들으면서도 계속 선생님을 부르며 정원으로 뛰어나갔다.

「작은 주인님, 벌 받는 것이 겁나지 않으세요? 선생님께서 분명히 할머님께 말씀드릴 텐데요.」

비운이 사이훙과 함께 낄낄거리다가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사이훙은 사탕을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면서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내가 할아버지 옆에 있는 한 할머니는 나를 때리시지 못해.」

 
그날 하루는 놀이와 관가보의 재미난 곳들을 돌아다니는 일로 다 지나갔다. 두 소년은 딱지치기를 하고, 소녀들을 놀려먹고, 군신인 관우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서 숨바꼭질을 하였다. 사이훙과 비운은 숨바꼭질을 하며 관우 신상과 조상님들의 축문이 새겨진 위패들을 모두 밀쳐 넘어뜨릴 뻔하기도 했다. 사이훙의 애완동물인 팬더 새끼에게 먹이를 주고, 할머니의 애마인 흰 갈기를 가진 검은 색 말도 구경했다.

정신없이 뛰놀고 웃던 그들은 턱까지 차오른 숨을 가다듬으며 할머니의 연무장 앞 돌층계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안에서 뭘 하고 있을까?」

사이훙이 물었다.

「할머님께서 여자들을 훈련시키고 계십니다.」

「한번 보자. 우리도 몇 가지 무예들을 배울 수 있을 거야.」

비운은 반대했다. 사이훙에게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돌보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의기양양하게 공자님의 말씀을 외운 뒤 비운은 위엄 있게 말했다.

「그것은 허락되지 않은 일입니다, 작은 주인님.」

 
사이훙은 비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마치 안경을 끼고 수염을 기른 말라 비틀어진 늙은 학자처럼 보였다.

「할머님께서 방문을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작은 주인님.」

비운은 평탄한 어조로 낮게 말했다.

사이훙은 웃었다.

「물론 그럴테지. 그러나 할머니께서 눈치채지 못하신다면 괜찮지 않아?」

비운의 공자님 같은 표정은 곧 놀란 어린아이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렇군요, 작은 주인님.」

사이훙은 웃었다. 비운의 학자적인 벽을 조금이나마 깨뜨려 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얄팍한 학자적 태도가 남아 있었다.

「저 지붕 위로 올라가자.」

사이훙은 장난꾸러기답게 말했다.

「작은 주인님!」

사이훙은 〈저 샌님 좀 보게나. 그래도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로구나.〉하고 생각했다.

 
연무실 정원으로 통하는 문들은 잠겨 있었고 격자무늬의 창틀에 끼워져 있는 유리창에는 성에가 끼어 있었다. 지붕 꼭대기로 올라가 기와를 들어낸 뒤 그 틈새로 훔쳐보는 수 밖에 없었다.

사이훙은 근처에 있는 나무에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한편 비운은 금지된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판단과, 사이훙이 가는 곳엔 어디든 따라가 그에게 변고가 생기지 않도록 돌봐주어야 한다는 의무감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비운은 사이훙을 따라 낮은 행랑 지붕을 조심스럽게 가로질러 높은 지붕위로 올라갔다. 지붕 위의 오래된 기왓장들은 그리 단단하지 못했고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붕 꼭대기의 열지어 있는 기왓장들을 붙잡고서 약간 평평한 곳으로 움직여 갔다. 비운은 떨고 있었으나, 사이훙은 지붕의 높이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들은 지붕 꼭대기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몇 장의 기와를 들어 냈다. 할머니는 대타(對打)를 연습하고 있는 여자들을 감독하고 있었다.

재상의 따님이었던 할머니는 쓰촨성(四川省)의 어메이산(峨眉山)에 있는 불교 사찰의 비구니로부터 무술을 배웠다. 중국 역사를 돌이켜 볼때, 고립된 산간에 살며 수도하는 불교의 승려들은 산적과 맹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무술 동작들에 형이상학적인 해석을 덧붙여서 절묘한 무예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독특한 무예 기법들을 문파의 전통으로 전수하면서 실용적 체험을 쌓았으며, 드물게는 속가(俗家)의 제자들을 받아들여 기법을 전수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절에서 지내면서 권법뿐 아니라 적을 붙잡아 뼈를 비틀어 꺾는 기술인 「금나수법(擒拏手法)」, 그리고 공중으로 솟구쳐 몸을 유연하게 하여 마음대로 몸을 가볍게 할 수 있는 「경공(輕功)]과 병기술까지도 모두 통달한 분이었다.

할머니의 기술은 여성에게서 여성에게로 전해지면서 발전된 것이었다. 어메이산의 비구니들은 여성의 약한 저항력과 유연함을 항상 염두에 두고 신체 내부의 힘을 이용하는 독특한 훈련 방법을 개발해 냈다. 그 방법들은 여성의 신체 내부의 화학적 특성에 입각하여 정교한 내공법(內功法)으로 발전했다. 남자들은 절대로 볼 수 없도록 금지되어 있는 이 훈련을 받은 여성은 강철 같은 힘과 기예를 지니게 되어 아무 두려움이 없이 어떤 난폭한 공격자와도 맞서 싸울 수 있었다.

 
할머니의 병기는 여성적 특징을 보여 주는 것이었지만, 대단히 무서운 것이었다. 할머니의 병기는 23개의 마디로 된 긴 날가죽 채찍이었다. 채찍의 마디마디에는 작고 둥그런 칼날이 달려 있었으며, 그 칼날들은 서로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즐겨 사용하는 또 다른 병기는 할머니의 허리에 감긴 띠였다. 강철선을 섬유처럼 짠 것으로, 양쪽 끝에는 쇠로 만든 공이 달려 있었다. 매우 유연하여 언제든 사용할 수 있었으며, 조르거나 채찍처럼 후려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머리 장식은 표창으로 사용할 수 있었고, 예리한 단검은 소매 속에 숨겨져 있었다.

사이훙은 훈련생들의 대부분이 소녀들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는 한밤중에 하녀들이 침입자들과 격투 끝에 강철 섬유 끈으로 그들의 목을 졸라 죽였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었다. 이제 그는 권법형의 연무와 대타, 모래주머니를 차거나 나무 인형들을 가지고 연습하는 소녀들의 훈련 방식을 상세하게 볼 수 있었다.

 
연무실 한가운데에는 경공을 공부하는 훈련 기구가 있었다. 작은 질그릇 밥공기들을 5개씩 묶어서 이층으로 쌓아 놓은 것들로, 모두 108개가 있었다. 그 각각의 훈련 기구들은 4개의 밥공기를 바닥에 사각형 모양으로 뒤집어 놓고, 그 위에 1개의 밥공기를 엎어 놓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 108개의 그릇 묶음은 한 걸음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보면 연무실 바닥에 꽃송이가 크게 그려져 있는 것 같았다.

두 명의 소녀가 경공을 연마하기 위해 그 밥공기 기둥 위에 올라가서 걸음을 내딛거나 뛰어오르면서 기예를 겨루고 있었다. 작은 밥공기 위를 밟아야 했으므로, 서로 몸의 균형을 맞추느라 다리에 한껏 힘을 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급소만을 노리며 공격과 수비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경공 실력이 대단했기 때문에, 밥공기들의 위치를 흐트러뜨리거나 깨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한순간 실수를 저지르자 연무실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던 할머니는 대나무 회초리를 휘두르면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5미터가 넘는 거리를 단숨에 날아가 크게 호통을 쳤다.

수련이 끝나자 수련생들은 모두 해산했다. 사이훙은 할머니의 연무 광경을 구경하기 위해 열심히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다른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가 버렸다. 할머니가 연습하는 것은 누구도 보아서는 안되었다.

 
저녁이 되자 사이훙은 할아버지가 머무르는 누각으로 갔다. 어스푸레하던 초저녁의 하늘은 곧 진한 암청색으로 물들며 점점 암흑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점점 커져 가는 달 주위에는 분무기로 뿜어 놓은 듯 별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밤공기는 쌀쌀했고, 잔잔한 바람은 노랗게 물든 단풍잎을 조용히 흔들고 있었다.

호수 가운데에는 연꽃으로 뒤덮인 작은 섬이 있었다. 거기에는 경치를 감상하며 휴식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정자가 있었다. 붉은 칠을 한 나무 기둥에 첨탑이 있는 기와 건물로, 창문은 없이 창틀만을 내놓은 정자였다. 관가보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건물의 윤곽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미했다. 정자 안에는 등불 하나만이 켜져 있었다.

사이훙은 깜박이는 등불 속에서 홀로 정자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보고 있었다. 할머니 옆에는 비파가 놓여 있었다. 혼자 앉을 만한 좁은 공간에 앉아 있는 할머니는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사람처럼 보였다. 할머니의 짙은 갈색 비단옷에는 거북이와 낙엽들이 수놓아져 있었는데, 주위 배경과 메아리처럼 잘 조화되고 있었다. 할머니는 일과에서 벗어나 조용히 휴식을 취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음미하고 있었다. 이윽고 할머니는 상아로 깎아 만든 듯한 그 고운 손으로 조용히 비파를 들었다.

 
할머니는 악기의 현을 손 끝으로 퉁겨 보며 음을 조절했다. 이어서 할머니의 노랫소리가 조용한 정원의 밤공기를 흔들었다. 날카롭게 끊는 짧은 음들이 단검처럼 밤공기를 찢는가 하면 낮고 부드러운 선율이 호수의 수면 위로 잔잔히 퍼져 나갔다. 끝날 때는 현 하나가 곡조의 끝을 알리듯 길게 떨리며 여운을 남겼다.

할아버지는 자택의 서재에서 소동파의 얇은 시집을 읽고 있었따. 마침 비파의 곡조는 시의 운율과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평화로웠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든간에, 저녁에는 조용히 홀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때로 아내와 시를 짓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썼다. 무예에 관한 지식을 서로 교환하기도 하고, 같이 책을 읽기도 했다. 무슨일을 하든 그는 아내와 손자와 함께 하는 시간을 무척이나 귀중하게 여겼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옆에 앉아 있는 사이훙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해주세요, 할아버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으냐?」

사이훙은 할아버지의 손을 바라보면서 「혈창(血槍)」을 연무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혈창은 할아버지가 스스로 창안해 낸 창술이었다.

「백미도인(白眉道人)에 대해서 듣고 싶어요.」

사이훙은 재빨리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웃으시면서 책을 내려놓았다.

「사이훙, 잘 들어 보아라. 지난번엔 하얀 눈썹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백미도인에 관해서 막 이야기를 꺼냈을 뿐이었단다. 그는 훌륭한 도사였다. 훌륭한 내공을 몸에 지녔기 때문에 주먹이나 병기로는 그의 몸을 상하게 할 수가 없었지. 그는 또한 독특한 권법을 창안해 냈는데, 그것은 철학적 사상에 바탕을 둔것도 아니었고 동물의 동작을 본떠서 만든 것도 아니었단다. 그의 무술은 인간의 동작에 입각해서 만들어진 것이었지.

 
백미는 진정으로 세상을 떠나 출가한 사람이었으나 세상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가 어디를 가건, 사람들이 그를 쫓아갔지. 그 이유는 모두 백미 도인이 갖고 있는 무학(武學)에 관한 지식 때문이었단다. 한 무리는 청조의 통치자들이었고, 또 다른 무리는 그 청조를 무너뜨리려는 모반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백미를 자기편에 두고 그에게 무술을 배우려고 하였지. 양편 모두 그에게 자기 편에 들어오도록 압력을 가했고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백미는 그 어느 편에도 관심이 없었지. 자존심과 신념을 가지고 있던 그는 마침내 자금성을 직접 공격함으로써 권력자들의 압력에 정면으로 맞섰단다. 백미는 72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황제의 자금성을 기습공격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로 끝났지. 미리 정보를 입수한 황제의 친위대가 매복해 있다가 그들을 함정에 몰아넣은 것이다.

 
하지만 현명한 황제는 백미와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에게 복종한다면 사면해 주겠다고 말했지. 거기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리하여 백미는 황제의 개인 수행원이 되었단다.

황제는 자기가 암살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단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뛰어난 무사였고, 사람들을 이용하는 조종술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백미보다도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을 궁 안에 많이 거느리고 있었단다. 그들 중에는 외국인들도 많았는데, 티베트와 페르시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한편, 모반자들은 청조를 전복시킬 계획을 짜고 소림사(小林寺)에 숨어 있었단다. 승려로 변장하고 소림사에서 무술을 닦고 있던 그들은 기회만 노리고 있었지. 그들은 모두 뛰어난 무사였기 때문에 황제는 그들은 모두 섬멸하기로 작정했단다.

 
황제는 백미와 황제의 친위대를 소림사로 보냈지. 그리하여 소림사의 주지는 백미와의 대결에서 패하여 목숨을 잃었고, 소림사는 불타고 거의 모든 승려들이 살해되었단다.

그때 살아 남은 승려가 둘 있었는데, 소림 백학권법(白鶴拳法)의 사범과 후권(候拳)의 사범이었다. 그들은 복수를 하기 위해 10년간 무공을 연마한 뒤 백미를 추적했단다. 두 승려는 무공을 쌓으면서 백미에게 한가지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단다. 백미의 갑옷 같은 신체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었지. 그러나 그 문이 있는곳은 사람마다 다르단다.

결투가 벌어졌을 때 두 승려는 그 문을 발견할 수가 없었단다. 백미를 협공해 사타구니를 걷어찼지만 백미는 음낭을 하복부 속으로 빨아들이는 흡음법(吸陰法)이라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 백미의 눈을 찔러 봤지만 그의 눈꺼풀은 마치 강철처럼 단단했다. 그러는 동안에 백미는 두 사람 모두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지. 그 두 명의 고수들은 심한 부상을 당해 피를 토하고 있었다.

마지막 필사적인 공격에서 후권사는 백학권사가 공중으로 높이 뛰어올라 솟구칠 수 있도록 그는 받쳐 주었지. 백학권사는 내려오며 백미의 정수리를 힘차게 내려쳤다. 그러자 백미의 방어망은 사라졌단다. 그곳이 백미의 급소였던 거지. 그리하여 세 사람은 용호상박의 결전을 벌였다.

백미는 아직 그 두사람을 물리칠 정도의 여력은 충분했기 때문에 용케 도망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며칠 뒤에 죽고 말았단다. 그 소림사의 두 고승들 역시 중상을 입었지. 백미가 그들의 육체를 못쓰도록 망가뜨려 놓았던 거지. 그들은 죽는 날까지 10년간을 침대에 누워 고통을 받으며 살아야만 했단다.」

 
사이훙은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정신을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도 백미 도인처럼 무림의 영웅이 되고 싶어요.」

할아버지는 사이훙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사이훙, 인생에는 그런 것들보다도 가치 있는 일들이 참으로 많단다. 너는 단순하게 무사나 군인이 되겠다고 결정하면 안 된다. 진정한 영웅이 되려면 먼저 교양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단다. 너는 반드시 도(道)를 배워야 한다. 명예라든가 행운은 다 팔자가 정해 놓은 것이란다. 권모술수나 부리는 마음씨를 어디다 쓸 수 있겠느냐? 언제나 진리를 찾고, 자신의 원칙을 준수하며, 위엄을 잃지 말도록 해야 한다.

도를 닦아라. 물을 역류해 가려 하지 말아라. 물의 흐름을 타며 헤엄쳐야만 재난을 피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은 모두 팔자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 험한 세상의 생리란다. 때로 사람은 동쪽으로 가고 싶어도 반대로 서쪽으로 휩쓸려 갈 수도 있고, 북쪽으로 가고 싶어도 남쪽으로 밀려갈 수도 있는 것이란다. 선택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지. 이 진리를 찾는 것이 곧 도란다. 길이 곧 도인 것이지.

 
도는 우주의 흐름이며, 신비로운 것이다. 그것은 평형을 뜻하는 데, 평형 상태란 깨지기 쉬운 것이란다. 악에 의해 방해 받을 수도 있는 것이지. 악은 우리가 때로 머리를 맞대고 싸워 이겨야만 하는 것이다. 악은 반드시 파멸되어야만 하는 것이고, 도를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악과 맞서 싸워야만 한단다. 만약 네가 도와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운다면, 그리고 악과 맞서 싸우는 일에 너의 재주를 사용한다면, 그때 너는 진정한 영웅으로 칭송받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사이훙의 어깨를 다정하게 다독거려 준 뒤에 일어섰다. 사이훙은 말없이 그대로 있었다. 가르침을 받을 때는 그 가르침에 관해서 명상하고 깨달음이 올 때까지, 때로는 깨달음이 온 뒤에도 오래도록 그 선물을 음미해야 한다. 사이훙은 조부모님들의 지혜를 믿었다. 그들의 세계는 자연의 맥박과 가까웠으며, 과거와 현재가 이음매 없이 연결된 것이었다. 기억의 혼합체요 신화였으며, 경험이자 전통이었다. 그것은 사이훙이 보기에 완전한 세계였고, 거인의 세계였다.

할아버지는 대나무로 만든 퉁소를 집어 들고 문가로 걸어갔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퉁긴 비파 소리가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자 할머니는 소리없이 정자를 빠져 나갔다. 할머니의 비단 옷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호숫가로 걸어갔다. 백발을 날리며 걸어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하얀 눈이 쌓인 나무 같았다.

 
할아버지가 퉁소를 들어 입술에 대자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제비처럼 노랫가락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박자가 점점 느려지는가 싶더니 음정은 낮게 떨어졌고,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떨림이 수면 위를 떠돌았다.

어두운 하늘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던 호수의 조용한 수면이 퉁소 소리에 응답하듯 잔잔히 흔들렸다., 동심원의 잔물결이 호수 건너 편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물고기들이 할아버지 앞에 나타나서 수면 위로 머리를 들고 최면술에 걸린 듯 춤을 추었고, 관가보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