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BOOK/기타 자료

세계 여러 수행법들의 소개 및 비교분석-박석 교수

기른장 2021. 3. 12. 22:02

출처 : 정신과학 학회지/박석 교수

 

요즈음 수행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80년대 초 인도 명상 붐을 통해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한 수행에 대한 열기는 그 뒤 단학 붐이 일면서 더욱 가열되었다. 각종의 다양한 수행 방법들이 서적을 통하여 혹은 수련원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소개되면서 수행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크게 늘어났지만 이와 아울러 사람들의 혼동도 증가되었다. 각양각색의 수행 단체들이 제각기 자신이 최고라고 선전하고 있고 어떤 경우에는 서로 상충되기도 하여 초보자는 물론이거니와 상당한 경지에 이른 수행자들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어떤 경우에는 보다 나은 건강 상태와 깊은 정신의 경지로 이끌어주어야 할 수행 방법들이 잘못된 운용으로 인해 도리어 사람들을 황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폐단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수행의 과학화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과학은 크게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으로 나누어진다. 과학이 추구하는 바는 객관성과 보편성인데, 이를 위하여 자연과학은 실험과 측정을 중시하고 인문과학은 대신에 논리적 정합성을 중시한다. 사실 과학과 수행은 서로 상극인 것처럼 보인다. 수행의 세계는 실험과 측정은 물론 논리적 정합성으로도 접근하기 어려운 주관의 세계요 특수한 세계이다. 최근에 와서 과학기기의 발달로 인해 수행의 세계와 자연과학의 접목이 활발히 시도되고 있다. 뇌파측정기나 킬리안 사진기 등을 통하여 수행한 사람들의 뇌파를 측정하거나 오로라를 촬영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너무나 초보적이고 단편적이어서 그저 사람들에게 이러한 세계가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약간의 호기심을 끄는 정도에 그치고 있어 다양하고 깊은 수행의 세계에 대해 일관성있는 체계나 법칙을 세우기에는 아직 요원한 일이다. 더군다나 수행의 목표인 깨달음의 세계는 과학은 물론이거니와 어떠한 언어나 형상으로도 표현될 수 없는 고원한 세계이다. 얼마나 많은 學者들이 자신들의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하는데 있어 언어와 개념의 무용함을 절실히 느꼈던가? 그 때문에 그들은 늘 '도를 가히 도라고 한다면 이미 영원불변의 도가 아니다'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 '언어의 길이 끊어졌다' (언어도단言語道斷), 마음으로 마음을 전한다(이심전심 以心傳心) 등등의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깨달음을 목표로 행하는 수행의 정신세계에 대해서는 과학이라는 용어는 물론이고 논리와 상식조차도 감히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 그것이 객관적으로는 오류를 낳는 경우가 있음을 종종 보아왔다. 필자는 십오년 전에 수행의 세계로 입문한 이후로 많은 수행자들이 자신의 체험이나 자신이 속한 수행 방법을 너무 섣불리 확신하면서 자신의 길만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아만에 빠지거나 심한 경우에는 정상적인 생활에서 이탈하여 자신과 남을 그르치는 것을 보아왔다. 그래서 수행을 하면서 항상 미세한 주관적 착각 속에서 나도 모르게 객관적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늘 주의하였다.

 

수행이 좀 된 사람들은 대부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천차만별이지만 깨달음은 하나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면 표면적으로 다양하고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수행 체계나 심신의 현상 너머에 보다 단순하고 통일된 그 어떤 원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노력한 끝에 마침내 그 단순하면서도 질서있는 원리를 알게 되었다. 깨달음 그 자체는 어떠한 언어나 형상으로도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인 수행에 대해서는 우리는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수행을 더 이상 과학이나 논리의 손이 닿지 않는 신성한 영역에서 끄집어내어 보다 객관화하고 보편화 할 때가 되었다. 그 조그마한 시도의 하나로서 우선 세계 여러 곳의 전통적인 수행법들을 소개하면서 각 수행법들의 특징과 장단점들을 비교 분석 하고자 한다. 세계의 수많은 수행법들을 일일이 다 소개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에 우선은 필자 자신이 적접적으로 수행을 해보았거나 간접적으로나 접해보았던 것 가운데서 비교적 우리와 관련이 밀접하고 역사적 전통이 깊은 수행법들을 중심으로 지역별로 종교별로 적절히 안배해 보았다.

 

소개는

첫째로 동북아시아권의 단학,

둘째로 인도티벳권의 요가,

세째로 동남아 불교권의 비파사나,

넷째로 동북아시아권의 화두선,

다섯째로 카톨릭의 묵상관상과 이슬람의 수피즘

여섯째로 새로운 패러다임 등의 순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각론에서는 먼저 각 수행법들의 전반적인 특징을 소개하고, 그러한 수행을 할 때 나타나는 심신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섯째로는 이들 여러가지 수행법들과 이 수행법들을 통해 얻어지는 심신의 변화를 보다 종합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이 패러다임에 의거하여 각 수행법들이 어떠한 장점과 어떠한 한계를 지니고 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지나친 주관성에 빠질 우려가 많은 수행의 노정에서 자신과 자신의 수행을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닐 수 있을 것이고, 이 안목은 수행자로 하여금 더욱 완전하고 깊은 경지로 이끄는 데 일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단학(丹學)

 

丹學이란 동북아시아권을 중심으로 발달한 수행법으로서 단전호흡법(丹田呼吸法)을 중시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북아권의 주요한 학술과 사상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그 원류는 중국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나, 최근에는 민족주의적인 기류에 상승하여 그 기원이 우리나라라는 설도 많이 나와 있다. 그 기원이야 어찌 되었던 간에 단학에는 수 많은 문파가 있고 각 문파에 따라 수행의 체계도 조금씩 다르다. 여기서는 그 핵심적인 개념과 수련법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면서 여타의 수행법들과 비교하고자 한다.

 

단학에 있어 제일 중요한 개념은 역시 단전과 정기신(精氣神)이라고 할 수 있다. 요가도 그러하지만 정신집중을 동반하는 호흡법을 위주로 하는 이러한 수행 체계에서는 주로 보다 근원적인 생명에너지(중국에서의 氣, 인도에서의 프라나)의 각성을 추구한다. 단학의 도인술 및 호흡법이나 요가의 아사나와 프라나야마는 모두 이것을 각성시키기 위한 것이다. 단전은 바로 이 생명에너지의 가장 중요한 집결지라 할 수 있다.

 

단전에는 상중하의 세 가지가 있지만 흔히 우리가 말하는 단전은 하단전이다.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배꼽의 세치 아래라고 하면 무난할 것이다. 정기신에 대해서 보면 기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근원적인 생명 에너지라면, 정은 그 생명에너지가 유형화되고 구체화된 것을 말하고, 신이란 우리의 마음 내지는 의식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기보다 근원적인 그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고 여기에 선천(先天), 후천(後天)의 개념이 들어가면 더욱 복잡해진다.

 

단학수련의 단계는 크게 정을 기로 바꾸어 이 기를 온 몸에 돌리면서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연정화기(練精化氣)의 단계와 이 기를 다시 신으로 바꾸어 이 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연기화신(練氣化神)의 단계로 나누어진다. 연정화기는 다시 의식을 단전에 집중하여 기를 모으는 단계인 축기(築基), 모여진 氣를 경락(經絡)에 따라 순환시키는 소추천(小周天) 및 대주천(大周天), 소주천과 대주천을 통하여 형성된 기의 결정체를 다시 단전에 모으는 채약(採藥) 등의 과정으로 나눌 수 있다. 연기화신는 채약을 완성한 뒤 하단전에서 그것을 보다 순수한 형태의 양신(陽神)으로 만드는 시월도태(十月道胎 : 임산부가 열달 동안 애를 배는 것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의 과정과 이를 완성한 뒤 백회혈을 통하여 몸 밖으로 끄집어내는 출신(出神)의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출신의 단계에 이르면 자유자재로 물질계와 영계를 여행할 수도 있고 육체는 죽어도 이 양신은 영원히 남아 신선이 된다고 한다. 어떤 문파, 예컨대 오류종(伍柳宗) 계통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연신환허(練神還虛)라는 단계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양신을 면벽구년(面壁九年)을 통하여 본래의 허공으로 돌이킨다는 뜻으로서 선종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역력하다.

 

단학수련을 하면 수행 도중에 따뜻한 느낌, 뜨거운 느낌, 시원한 느낌, 짜릿한 전기의 느낌 등의 여러 형태로 기감(氣感)을 체험하게 된다. 이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 기를 운용하여 병을 치료하고 건강과 활력이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일부는 기의 각성에 의한 몸의 진동이나 자발적 동작을 체험하기도 하고 환영이나 투시, 예시 등의 초현상들을 체험하기도 한다. 또한 극소수이지만 양신을 만들어 출신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일부는 무리한 수행과 잘못된 운용으로 인하여 도리어 건강이 악화되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폐인이 되기도 한다.

 

모든 문파들은 자기들의 수행법이 가장 안전하며 가장 높은 경지로 인도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체험한 기감과 초의식의 세계를 객관적 실재인양 믿어서 신중한 검토의 여과를 거치지도 않고 성급히 공표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주관적 착각 속에서 행해지는 객관적 오류인 것이다. 단학수련을 통하여 평소 물질세계가 전부라고 여겼던 한계를 넘어 보다 미묘한 기의 세계와 의식의 세계를 체험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체험한 세계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체험한 세계를 마치 절대적인 세계로 알고 다른 사람들이 이 체험을 공유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수련 방법이 잘못되었거나 근기가 낮아서 그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 중심적이고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전세계의 다양한 수행법 속에서 이 수행법이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이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체험은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수행법은 대략적으로 생명 에너지의 각성을 보다 중시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의식의 각성을 보다 중시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단학과 요가(여기서는 하타요가 및 쿤다리니요가 부류를 말함)는 전자에 귀속된다. 우선 서로 비슷한 단학과 요가를 비교해보자. 일단 기와 프라나는 거의 같은 것을 지칭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단학에 있어서의 정과 신에 적확하게 대응시킬 수 있는 것은 요가에는 없다. 하단전 또한 요가의 스와디스타나 차크라에 대응시킬 수 있으나 엄밀하게는 서로 다르다. 그리고 기를 임맥과 독맥을 따라 순환시키는 소주천에 대한 개념이 요가에는 없다. 요가는 척추를 중심으로 하여 일곱 챠크라 밖에 없기 때문에 돌릴 수가 없다. 사치다난다가 쓴 <kundalini tantra>에 보면 소주천과 비슷하게 프라나를 앞으로 뒤로 돌리는 수행법이 있기는 하지만 이 또한 소주천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단학의 양신이니 출신이니 하는 것은 요가에는 없다. 대신 쿤다리니라고 하는 것은 요가에는 있으나 단학에는 그에 대응하는 것이 없다. 왜 그럴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각 지역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수행 방법이나 체계는 다양하지만 그 궁극적인 체험의 세계는 결국 서로 같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러할까? 이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상 다음 회에 요가를 소개하면서 같이 논하고자 한다.

 

 

둘째. 요가(yoga)

 

요가는 인도 티벳권을 중심으로 발달한 수행법이다. 요가는 단학에 비해 수행 방법이 다양하고 폭이 넓은 편인데,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냉철한 지혜의 힘으로 무지와 집착을 끊어 깨달음에 이르는 지나나 요가이고, 둘째는 신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에고를 소멸시켜 깨달음에 이르는 박티 요가이고, 세째는 행위의 결과에 대한 어떠한 기대나 집착을 끊고 순수한 행위를 함으로써 행위의 구속력으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에 이르는 까르마 요가이고, 네째는 효율적으로 육체와 정신을 다스리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신체 정화법 및 명상법을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라자요가이다. 이 라자 요가에는 수행 방법의 특징에 따라 진언을 위주로 하는 만트라 요가, 도형에 대한 집중을 위주로 하는 얀트라 요가, 자세와 호흡법을 위주로 하는 하타 요가, 쿤다리니의 각성을 전문으로 하는 쿤다리니 요가, 요가수련의 단계를 여덟단계로 나눈 아쉬탕가 요가 등의 다양한 이름의 요가가 있다. 이 중 단학과 가장 유사한 것은 쿤다리니 요가이므로 여기서는 이것을 중심으로 논하고자 한다.

 

요가에 있어 중요한 개념은 단학의 氣에 해당하는 프라나, 프라나가 흐르는 통로인 나디, 프라나가 집중적으로 모이는 센터인 7개의 차크라, 그리고 우리 몸 속에 내재해있는 우주 창조의 원초적인 힘인 쿤다리니라고 할 수 있다. 이 쿤다리니는 쿤다리니 요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요가 수행에서 중시되는 것으로서 척추 맨 아래에 있는 챠크라인 물라다라 차크라에 숨어있다고 한다. 요가 수행의 핵심은 물라다라 차크라에 있는 쿤다리니를 정수리에 있는 사하스라라 차크라에까지 끌어올리는 데에 있다. 물라다라 차크라에 숨어 있는 우주 창조의 힘인 샥티, 즉 쿤다리니는 음에 해당하는데 이것이 사하스라라 차크라에 숨어 있는 우주의 절대 정신이자 양에 해당하는 시바와 만날 때 진정한 우주적인 음과 양의 합일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때 사하스라라 차크라는 완전히 열리고 수행자는 우주적 삼매에 든다. 그리고 수행자는 개아의식을 여의고 우주의식과 하나가 된다. 이것이 바로 요가수행의 완성의 경지이다. 그런데 쿤다리니를 중심으로 하는 요가 수행 또한 단학과 마찬가지로 수행 방법이 복잡하고 여러 갈래의 길이 있어 스승의 지도없이 혼자서 행하는 경우 상당한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요가와 단학은 수행 방법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수행을 통하여 나타나는 현상도 서로 다른 점이 많다. 그러나 그보다는 요가와 단학에서 말하는 미세한 몸(subtle body, 즉 육체보다 섬세한 몸으로서 피와 살 뼈 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프라나 내지는 氣, 나디 내지는 경락으로 이루어진 몸) 자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지난 번에도 이야기했듯이 프라나는 단학의 기와 거의 비슷한 개념이지만 7개의 차크라는 단학의 3개의 단전이나 임맥 독맥의 52경혈과 대응하지 않는다. 그리고 요가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쿤다리니라는 것은 단학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 서로 차이가 날까? 사실 단순한 수행 방법상의 차이라고 한다면 별 문제가 안되지만 아예 미세한 몸 자체가 다른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 그럴까? 인도인이나 동북아시아인 중에서 어느 한 쪽이 잘못 보기 때문일까? 이것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러면 미세한 몸이라는 것 자체가 환각이나 착각일까? 이에 대해서는 수행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필자 또한 당연히 그럴 수는 없다고 확언한다. 氣니 經絡이니 하는 것은 심리적인 소산물이 아니라 분명히 실재하는 것이다. 다만 현대 과학이 아직까지도 이것들을 확실히 규명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면 인도인의 미세한 몸과 동북 아시아인의 미세한 몸이 원래 서로 다르게 되어 있는 것일까? 이것 또한 설득력이 없다. 원래 미세한 몸 자체가 서로 다르다고 한다면 동북 아시아인은 처음부터 요가 수행을 할 수도 없고 한다고 해도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다.

 

그러면 답은 무엇인가? 원래 미세한 몸 자체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각기 자기가 속해있는 문화권의 집단주관이라는 색안경을 통해 서로 다르게 보고 있을 따름이다. 집단주관이란 이름 그대로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집단적인 주관이다. 우리의 의식을 잘 들여다보면 개개인이 각기 다른 주관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서는 집단적으로 거의 비슷하게 인식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이 바로 집단주관인 것이다. 우리의 의식 전반에는 크게는 인류 전체의 공통적인 집단주관이 깔려 있을 뿐만 아니라 인종, 민족, 문화, 종교 등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의 크고 작은 집단적인 주관이 다층적으로 깔려 있다. 우리는 개인적인 주관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어도 이 집단주관은 쉽사리 간파하기가 힘든다.

 

요가나 단학의 수행을 통하여 우리는 평소 이 물질계만이 세계의 전부이고 육체만이 나라고 고집하는 좁은 시야를 깨고 더 깊은 세계와 나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세계는 분명 단순한 환각이나 주관적 착각이 아니라 한 차원 더 깊은 곳에서 분명히 실재하는 세계이다. 그런데 수행을 통하여 체험하는 세계, 예컨대 기감이라든지 초의식 등은 보다 내면적인 것이기 때문에 주관적 색안경의 지배를 더욱 많이 받는다. 이 경우 그러한 현상 가운데 순전히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쉽사리 그것이 개인적인 착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인정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공유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것이 주관적 착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엄연히 실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그 체험의 세계는 대부분 객관적 실재에 집단주관적 착각이 겹쳐 있는 것이다. 프라나 내지는 기와 그것이 흐르는 통로인 나디 내지는 경락, 그리고 그것이 모이는 센터인 차크라 내지는 경혈 등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우리는 대부분 여러 형태의 집단주관의 색안경을 통하여 그 모습들을 보기 때문에 그 실재적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래서 지역과 문화권에 따라 다양한 수행 방법이 생기고 한 지역이나 문화권 내에서도 또 여러 파로 다양하게 나뉘어지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의식의 구조는 자기중심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히 자기가 속한 집단의 것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따라서 서로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수행이란 세계와 자아의 실상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요가나 단학을 통하여 표피의 세계에서 심층의 세계로 다가가는 것은 좋으나 여러 가지의 주관적 색안경을 끼고 보는 세계를 실상으로 착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층의 세계로 다가서는 수행을 계속 하되 우리의 색안경을 벗어버리는 작업도 같이 병행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관적 색안경을 어떻게 벗어 버릴까에 대해서는 이 강좌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논하기로 하고 다음 번에는 기 내지는 프라나로 이루어진 미세한 몸의 각성보다는 직접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다루는 것을 더 중시하는 수행법들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셋째. 비파사나

 

비파사나는 석가모니가 가르쳤던 행법으로서 흔히 사마타와 한 짝으로 거론된다. 사마타는 하나의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산란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한역(漢譯)으로는 '지(止)' 혹은 '적정(寂靜)'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모든 정신 집중법을 가리킨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내면의 빛이나 진언(眞言) 등의 어느 특정한 대상에 의식을 집중하여 내적 황홀경이나 지고의 평화와 고요를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석가모니 이전의 인도의 수행법들은 전반적으로 이 사마타 위주의 수행법이었다. 석가모니는 이 사마타로는 최후의 궁극적인 경지에 들어갈 수 없다고 여겨 비파사나라고 하는 새로운 양식의 수행법을 개발하였다. 비파사나라는 말은 여러 가지 현상들을 관찰하는 것을 뜻한다. 漢譯으로는 '관(觀)' 혹은 '종종관찰(種種觀察)'이라고 한다. 마음을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하여 고요를 얻기보다는 여러 현상들을 관조함으로써 통찰력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사마타와 비파사나는 둘 다 마음을 각성시키는 것을 위주로 하는 수행법이다. 물론 앞에서 거론한 丹學이나 쿤다리니 요가도 모두 마음을 중시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마타와 비파사나는 보다 본격적으로 마음을 각성시키는 것을 강조한다.

 

초기의 소승불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남방불교에서는 사마타에 대한 비파사나의 우위를 강조하거나 혹은 사마타를 본격적인 비파사나에 들어가기 위한 초입단계 정도로 여겼다. 예를 들면, 숨의 출입을 관찰하는 호흡관에 있어 초기에 호흡에 의식을 집중하는 것을 사마타 단계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후기의 대승불교에서는 이 둘을 대등하고 상보적(相補的)인 관계로 파악하였다. 그래서 이 둘을 합쳐서 흔히 지관법(止觀法)이라고 부른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도 지법(止法)과 관법(觀法)이 두루 갖추어져야 수행이 완성된다고 하면서 서로 상보적인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 대승불교 가운데서는 천태종(天台宗)이 止觀法을 가장 중시하는 편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止觀法은 일반적인 대승불교가 다 그러하듯이 너무 지나치게 관념화되어 실제 수행에는 적합하지 않는 면이 많고 그 수행의 맥도 별로 이어지지 않고 있는 데 비해, 동남아권의 소승불교에서는 구체적인 행법을 강조하기 때문에 실제로 수행하기에 좋고 또한 수행의 맥도 잘 전수되고 있는 편이다. 여기서는 소승불교의 비파사나를 살펴보기로 한다.

 

남방불교의 비파사나는 사념처관(四念處觀)을 위주로 한다. 四念處觀이란 몸, 감각, 마음, 法을 대상으로 하여 거기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그 속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 一切皆苦)의 세가지 진리를 체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남방불교에서는 대부분의 승려들이 이 四念處觀을 위주로 수행을 해왔으며, 최근에는 미국을 위시한 서구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 비파사나를 배우고 있다. 우리나라 불교는 종래 화두선이 주종을 이루어왔으나 최근에는 젊은 승려들 사이에 남방불교의 비사파나를 배우는 사람도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필자도 십여년 전부터 비파사나의 중요성을 알고 꾸준히 수행해왔다.

 

四念處觀은 먼저 몸에 대한 관찰로부터 시작되고, 이것은 보통 호흡관(呼吸觀)으로 시작된다. 호흡관은 코끝에 의식을 집중하여 숨이 들어오고 나감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면서 숨을 들이마실 때 자신이 숨을 들이마신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숨을 내쉴 때 자신이 숨을 내쉬는 것을 알아차리는 수행법이다. 이 방법은 처음에는 지극히 단순한 것 같지만 수행을 할수록 점차 의식을 각성시키고 깊은 통찰력을 가져다준다. 근래의 남방의 대선사 마하시 사야도는 호흡에 따른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방법을 개발하였는데, 그 원리는 비슷하다. 의식을 배에 집중하여 숨이 들어와 배가 팽창하며 자신의 배가 팽창되는 것을 알아차리고 숨이 나가면서 배가 수축되면 자신의 배가 수축되는 것을 알아차리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알아차림'이 코끝이나 배에만 머물지만 점차 자신의 몸 전체로 확산된다. 즉,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그간 간과하였던 몸의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해서도 점차 알아차리게 된다. 더 나아가 여러 가지 감각의 변화와 마음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점차 예민하게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게 되면 안과 밖의 여러 현상의 미묘한 법칙들까지도 알아차리게 된다.

 

비파사나 수행을 계속 하다보면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많은 현상들이 나타난다. 눈 앞에 강한 빛이나 여러 가지 환상이 나타나는 것을 체험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아름다운 악기나 사람의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황홀감과 환희심이 터져나오기도 하고, 지고의 평화와 고요를 체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특별히 氣를 각성시키는 도인술이나 호흡법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氣의 각성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드물게 사람에 따라서는 무서운 환영이나 환청, 혹은 섬뜩한 공포심이나 우울감 등의 부정적인 현상을 체험하기도 한다. 비파사나 수행에서는 어떠한 현상을 체험하더라도 그 현상에 얽메이지 않고 단지 그 현상들을 알아차림으로써 자신의 마음 전체에 대한 통찰력을 기르는 것을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마음의 본질을 깨달아 궁극적인 해탈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간단하여 필자도 처음에는 과연 이것을 통하여 심오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 의심하였다. 그러나 수행을 하면 할수록 더욱 깊은 맛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보아 비파사나는 조기(調氣) 위주의 수행법에 비해 훨씬 안전하다. 물론 여기서도 스승의 지도가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혼자서 수행을 하더라도 調氣 위주의 수행법에 비해 큰 위험에 빠질 염려는 없다. 調氣 위주의 수행을 하는 경우 수행을 통해 나타나는 부분적인 현상에 집착할 위험이 많이 있지만, 이 비파사나 수행은 전체를 바라보는 통찰력을 길러주기 때문에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나더라도 거기에 얽메이지 않도록 해주며 나아가 불필요한 여러 가지 현상들을 덜어주는 작용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별한 스승이 없었던 필자는 동서양의 여러 수행법 가운데 이 비파사나 수행법을 가장 중시하였다. 그리고 필자의 체험에 의하면 비파사나 수행을 통하여 어느 정도 통찰력을 지니게 되면 이 비파사나 수행법이 다른 여러 수행법들과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경지에만 이르면 비파사나 수행법을 근간으로 하고 거기에 다른 수행법을 병행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수행의 효율성은 더욱 커질 수 있다.

 

그런데 남방불교의 비파사나를 통하여 얻은 깨달음의 세계도 자세히 관찰해보면 거기에도 미세한 집단주관의 색안경이 있음을 알 수 있다. 丹學과 쿤다리니 요가의 기신(氣身)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집단주관의 색안경을 거론하였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氣身의 차이에서는 집단주관의 색안경을 인정할 수 있지만 깨달음의 세계에 무슨 집단주관의 색안경이 있을 수가 있을까 하고 반문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흔히 깨달음의 세계는 언어와 형상은 물론이거니와 어떠한 틀도 넘어서는 세계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깨달음의 세계에도 엄연히 집단주관이 존재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것을 간과하였을 뿐이다. 필자는 오랜 수행을 통하여 그것을 알게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서 화두선을 논하면서 다시 거론하도록 하자.

 

 

넷째. 화두선(話頭禪)

 

화두선은 선종의 수행법 가운데 하나이다. 선종의 수행법은 크게 묵조선과 화두선으로 나누어진다. 묵조란 말은 고요히 비추어본다는 뜻으로 묵조선은 내 마음을 고요히 비추어보아 내 마음의 당체를 확연히 깨우치는 것을 강조한다. 화두란 사전적인 의미로는 말의 실마리 내지는 화제 등의 의미이지만 선종에서는 수행의 주제 거리를 가리킨다. 화두선에서는 하나의 주제를 집중적으로 의심하여 그것을 풀어냄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이다. 화두의 내용은 주로 전대 선사들의 기이한 언행들이다. 묵조선 수행법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기존의 불교의 수행법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 이에 비해 화두선 수행법은 이전의 불교적 전통에는 전혀 없던 새로운 수행법으로서 중국의 선사들이 새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화두선의 원리와 특징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화두선의 원리를 말하기 전에 먼저 화두선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 세 가지 조건을 살펴보자. 그것은 신심(信心), 의심(疑心), 분심(憤心)이다. 화두를 통하여 깨치려면 반드시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 먼저 화두선의 전제조건은 신심이라고 할 수 있다. 외양상으로 볼 때는 화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심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이 신심이 더욱 본질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화두선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일단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 화두선이 굉장한 수행법이고 이 화두선을 통하여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신심이 저변에 깔려있다. 이러한 신심이 없으면 처음부터 화두선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심이 없이 화두를 보면 그것은 단순한 언어의 유희나 수수께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신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 된다.

 

화두선의 두 번째 관건은 의심이다. 예로부터 선사들은 화두선의 가장 큰 관건을 의심이라고 보았다. 의심 덩어리가 커야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어떤 사람이 조주선사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냐고 물었다. 조주는 '無'라고 답하였다. 원래 불교에서는 위로 부처로부터 아래로 개미 새끼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조주는 '無'라고 답하였을까? 이것이 바로 선종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애용하였던 무자화두(無字話頭)이다. 이것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면 이미 화두선으로부터 한참 벗어난 것이다. 선가에서는 머리로 이해하여 답을 끌어내려고 하는 것을 가장 큰 금기로 삼는다. 머리로 푸는 길이 막힌 상태에서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가슴으로 온 마음을 모아 의심하는 것이다. 마치 닭이 알을 품듯이 고양이가 쥐를 노리듯이 온전히 화두에 대한 의심으로 일념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바로 분심이다.

 

분심이란 발분하는 마음이다. 한 가지 의심이 가슴에 사무치기 위해서는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냥 이런 저런 잡생각 다 하고 남는 시간에 간간이 의심해서는 몇십 년을 해도 깨칠 수가 없다. 반드시 이 의심을 풀고야 말겠다는 사생결단의 분심이 있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을 제치고 오로지 화두에 대한 의심으로 사무칠 수 있고 이렇게 화두에 대한 의심이 사무쳐야 밥을 먹으나 길을 걸으나 항상 화두를 잡을 수가 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잠을 자나 깨어 있으나 항상 화두만 잡고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렇게 신심, 의심, 분심이 서로 조화가 되어 행주좌와 오매지간(行走坐臥 寤寐之間)에 오직 화두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때 어느 순간 화두가 풀리면서 깨치게 된다.

 

그 원리는 이렇다. 우리는 보통 일상적인 이미지와 관념의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 이 이미지와 관념의 틀을 통해 비치는 세계가 실상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미지와 관념은 우리 의식의 표피에 불과하고 그것을 통해 비치는 세계 또한 표피의 세계에 불과하다. 이 표피의 세계 너머에 보다 근원적인 세계가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에 이를 수가 없다. 그러다가 한 가지 화두에만 온전히 몰두할 수 있을 때 평소 여러 가지 잡다한 이미지와 관념들에 의해 분산되어 있던 마음이 오직 한 가지 의문에 집중된다. 화두는 대개가 자아와 세계의 근원에 대한 의문이다. 한 가지 화두에 완전히 몰두할 때 수행자는 자신도 모르게 점차 표피의 세계를 뚫고 근원적인 마음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를 통하여 오랫동안 잡고 있던 화두마저 놓여지면서 이미지와 관념에 가려 보지 못하던 근원의 세계를 알게 된다. 이 세계는 어떠한 이미지나 관념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세계이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다.

 

화두선은 단도직입적이다. 대부분의 수행법들은 수행 과정에 여러 단계가 있고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도 여러 단계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여러 가지 신비적인 체험을 거친다. 그러나 화두선은 곧바로 우리의 마음의 근원을 깨우칠 것을 강조한다. 화두선에서는 수행 중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초상 현상이나 심신의 변화에 대해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 요가의 황홀경 내지는 삼매경이나 단학의 태식이니 출신 등도 화두선에서는 지엽 말단의 자질구레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화두선의 깨달음의 목표는 생사의 근원이자 모든 삼라만상의 근원인 그것을 곧바로 체인하는 데 있다. 그러나 비파사나의 깨달음이 그러하듯이 화두선의 깨달음 또한 집단주관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요가의 깨달음이나 수피즘의 깨달음이나 기독교의 영성 체험 또한 마찬가지이다. 각기 집단주관의 엷은 베일을 지니고 있다.

 

요가의 삼매와 선의 깨달음을 비교해보자. 이 둘은 공통점이 많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서로 다른 세계이다. 다른 깨달음 또한 마찬가지이다.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초월적 감각의 열림, 지고한 정서적 고양, 심오한 우주적 통찰력의 열림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보통 사람들은 체험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문화권에 따라 미세한 차이가 있다. 선사들의 깨달음의 양상과 요가 수행자들의 깨달음의 양상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다른 깨달음들도 마찬가지이다.

 

깨달음의 양상은 왜 이렇게 다양할까? 그것은 문화권에 따른 집단주관의 틀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깨달음이 어떠한 형태로든 표현되었을 때에는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깨달음 그 자체는 어떠한 언어와 형상을 넘어서는 세계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요가, 단학, 비파사나, 참선, 수피즘, 묵상 관상 등의 수행법을 통하여 얻은 깨달음이 밖으로 표현될 때는 제각기 자신의 문화권의 틀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지만 그 속의 내용은 한결같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그렇지가 않다. 밖으로 표현될 때에만 집단주관의 틀이 작용할 뿐만 아니라 깨달음의 체험 자체가 집단주관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은 어떠한 궁극적인 체험을 하여도 주관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절대 객관의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 이것은 결코 기존의 깨달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한 차원 높은 패러다임을 제시하기 위한 전제일 따름이다.

 

 

다섯째. 묵상관상과 수피즘(Sufism)

 

하나의 종교에는 그 종교의 성격을 규정짓는 경전, 교리, 의식 등의 외적 틀과 아울러 그 종교의 힘을 유지시켜 주는 내적 수행법을 지니고 있다. 겉으로 아무리 좋은 경전, 완벽한 교리, 장엄한 의식이 있어도 내면적 힘이 없는 종교는 오래 갈 수 없다. 수행은 의식을 고양시키고 믿음을 더욱 심화시켜 주기 때문에 그 종교의 체제를 유지하는 데에도 매우 주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묵상관상은 기독교의 신비주의 수행법이고, 수피즘은 이슬람 신비주의 수행법이다. 먼저 묵상관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묵상은 관상에 나아가기 위한 준비 단계이다. 묵상에도 두 단계가 있는데 하나는 추리 묵상이고 하나는 감성 묵상이다. 초기에는 주로 추리 묵상을 많이 하다가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감성 묵상으로 넘어간다.

 

추리 묵상은 주로 우리의 이성과 상상력을 사용하여 성경에 나와 있는 어떤 주제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의 이성이나 상상력을 동원하여 묵상을 하지만 이것이 점점 깊어지면 이성이나 상상력은 점점 사라지고 묵상의 주제가 마음속에서 저절로 감성적으로 느껴지게 된다. 이 단계가 바로 감성 묵상의 단계이다. 추리 묵상에서 감성 묵상으로 나아가면 이성적인 사유나 추리 활동은 점점 정화되어 감성적인 느낌이 주로 활동한다. 이 단계에서는 감사, 기쁨, 경탄, 봉헌, 사랑 등의 감성적인 활동이 수행자의 가슴에 넘쳐흐르게 된다. 여기까지는 보통의 신앙인 들도 체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성 묵상의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감성마저도 점차 정화되면서 묵상보다 한 차원 높이 올라간 관상의 단계에 이른다. 관상이란 성령의 작용 아래 하느님과 보다 내적이고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관상은 크게 수득관상(修得觀想)과 주부관상(注賦觀想)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수득관상이란 닦아서 얻는 관상이란 뜻으로 수사가 개인적인 의지로 수도를 함으로써 얻는 관상의 경지를 말하고, 주부관상이란 물을 붓듯이 주는 관상이라는 뜻으로서 수사의 노력과 무관하게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관상을 말한다. 전자가 능동적인 관상이라면 후자는 수동적인 관상이다. 카톨릭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두 가지를 동등하게 보지 않고 전자보다는 후자를 더 깊고 본질적인 관상으로 본다.

 

관상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떠한 이성이나 감성의 작용도 거치지 않고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영혼이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에 이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둘은 사실 하나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이성이나 감성의 작용도 거치지 않고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그대로 인식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하느님을 외적인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자기와 완전히 하나임을 알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피의 수행법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지크르(Zikr)라고 하는 명상법이다. 지크르란 '기억하다'는 뜻이다. 즉 항상 신을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수행자는 매순간 '알라 외에는 없다' 라고 소리친다. 그 소리는 처음에는 입으로 하는 소리이지만 나중에는 마음의 소리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끊임없이 알라를 기억함으로써 수행자는 일상의 마음으로부터 점점 더 깊은 내면의식의 세계에 들어갈 수가 있다.

 

이 지크르는 수피춤이라고 하는 춤을 추면서 행하면 더욱 강렬한 효과를 볼 수도 있다. 수피의 행법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독특하게 보이는 것은 수피춤이다. 수피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춤은 한 손을 땅으로 향하고 한 손을 하늘로 향한 채 하늘과 땅을 축으로 하여 몸을 빙글빙글 돌리는 춤이다. 음악에 맞추어 빙글빙글 도는데 이 때 수피들은 끊임없이 '알라 외에는 없다'를 외치는 것이다. 빙글빙글 돌면서 계속 지크르를 행하다 보면 어느 한 순간 황홀경의 상태를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이슬람의 수피들은 매순간 지크르를 행함으로써 산만하고 외부의 쾌감에 젖어 있는 마음을 일깨우고 그 깊은 곳에 있는 신을 자각하려고 한다. 끊임없이 신을 찾다 보면 어느 순간에 신이 자신과 함께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상태가 온다. 이것을 큐브르(Qubr)라고 한다. 이것은 오로지 신을 향한 사랑으로 세속의 모든 욕망과 쾌락을 버린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지에만 이르러도 상당한 경지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야 한다. 꾸준히 수행을 계속하면 큐르브 상태가 어느 정도 지속되다가 신을 찾는 행위와 신을 찾는 자와 찾는 대상인 신이 하나가 되는 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이것을 마합바(Mahabba)라고 한다.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객체가 하나가 되는 것은 세계의 여러 수행법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이 마합바 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인식의 주체가 사라지는 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이 상태를 화나(Fana)라고 부른다. 화나 상태는 신 속에서 에고가 완전히 죽어버렸다는 뜻이다. 이 화나 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자신이 항상 신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상태를 바카(Baqa)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수피들이 추구하였던 최고의 상태였다.

 

묵상관상과 수피즘에서 얻어지는 최고의 경지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신의 현존을 인식하거나 또는 그 신 속에서 자신의 에고가 사라지는 경지이다. 이것은 결국 그 신과의 합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절하게 합일하기를 원하는 그 신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과연 이들은 서로 다른 신인가? 아니면 하나의 신인데, 이름만 서로 다른 것인가? 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중의 하나는 가짜라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이 우주를 창조한 신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제각기 자기들이 믿고 체험하는 신만이 이 우주의 유일한 창조주라고 주장한다. 이들 종교의 배타성은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이 믿는 신만이 유일한 창조주라고 주장하는 것은 앞에서도 여러 번 강조하였듯이 집단주관적 믿음에서 나온 착각이다. 이제 우리는 집단주관적 믿음에서 나온 배타성은 극복해야 한다.

 

후자의 입장은 하느님과 알라가 서로 이름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절대진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럴 경우 기독교와 이슬람교 외의 다른 종교의 신에 대해서도 인정을 해야 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입장을 종교다원주의라고 한다. 종교 다원주의는 지독한 배타성을 주장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이것 또한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각 종교의 신은 이름만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성격도 너무 다르다. 알라나 야훼는 사후에 영원한 지옥이나 영원한 천국에 살게 하는데, 시바신은 사람을 윤회시킨다. 불교에서는 스스로의 무명에 의해 윤회한다고 한다. 도데체 어느 것이 진짜인가? 사실 제각기 서로 다른 세계관을 고수한 채 외적인 공존만을 추구하는 종교다원주의는 어정쩡한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다. 수행자와 종교인들은 여전히 집단주관적 착각 속에서 자신들의 믿음과 깨달음이 절대적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수행생활과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절대 객관적인 진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종교와 수행은 영원히 집단주관적 믿음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면 집단주관적 믿음에서 벗어나 좀 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수행법과 깨달음을 찾을 수가 있다.

 

 

여섯째. 새로운 패러다임

 

지금껏 우리는 단학, 요가, 화두선, 비파사나, 묵상관상, 수피즘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비교 고찰해보았다. 그런데 모든 수행법들은 제각기 그 수행법을 탄생시킨 그 지역의 세계관적 배경과 문화적 배경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 단학에는 동북아시아 사람들의 세계관과 문화가 깃들어 있는 것이고 요가에는 인도 사람들의 세계관과 문화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각 지역의 세계관이나 문화에는 세계 공통적인 부분들도 있지만 그 지역만의 특유한 부분들도 있다. 그러므로 수행의 과정상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에 있어서도 공통점이 있는가 하면 서로 다른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인도의 프라나나 동북아의 氣는 서로 언어는 다르지만 그 가리키는 내용은 공통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도의 요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쿤달리니는 단학에는 존재하지 않고 단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소주천이니 대주천이니 하는 것들은 요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수행의 현상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깨달음 또한 그 지역의 세계관적 문화적 배경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요가, 단학, 비파사나, 화두선, 이슬람 수피즘, 기독교의 관상의 깨달음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부분도 많다.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일단은 보통 사람들이 체험하기 힘든 초월적 감각의 열림, 지고한 정서적 고양, 심오한 우주적 통찰력의 열림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각 지역의 여러 깨달음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거기에는 문화권에 따라 미세한 차이가 있음을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어떠한 깨달음이 완전한 절대 객관의 진리인가?

 

이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깨달음만이 절대 진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의 양상은 문화권에 따라 다양하지만 깨달음 그 자체는 어떠한 언어와 형상을 넘어서는 절대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깨달음이 밖으로 표현될 때는 제각기 자신의 문화권의 틀에 따라 여러가지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깨달음 그 자체는 서로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물론 이전의 자기중심적 태도에 비해서는 훨씬 성숙된 견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것 또한 완전한 것은 아니다.

 

기존의 패러다임에서는 인간은 수행을 통하여 절대객관의 진리를 체험할 수 있다고 상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행을 통하여 일상의 오감이나 사유작용을 완전히 넘어선 절대 근원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수행을 열심히 하면 수행법의 체계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오감이나 사유 작용의 범주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세계를 체험한다. 그들은 에고의 좁은 틀을 벗어나 우주의 무한성을 체험하거나 에고의 느낌이 사라지는 무아지경을 체험하거나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벗어나는 상태 등을 체험한다. 이러한 체험들은 굉장한 것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인간은 어떠한 체험을 하여도 주관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절대 객관의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지고하고도 초월적인 체험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인식 주체가 있는 한, 즉 살아있는 한, 그 속에는 주관성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사변이 아니라 필자 자신의 실제적 체험과 직관을 바탕으로 나온 결론이다.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경지, 혹은 무한성의 바다에 개체의식이 완전히 녹아버리는 체험을 하였다 하더라도 주관성이 100 퍼센트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무리 궁극적인 본체를 체험하는 순간에도 주관적 틀을 완전히 벗지는 못한다. 이것은 마치 현대 물리학에서 아무리 완벽한 실험기구와 측정방법을 갖추어도 관찰자의 입장을 100 퍼센트 배제한 객관적인 관찰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요기들의 사마디, 선사들의 깨달음, 남방선사들의 닙빠나, 수피나 카톨릭 수사들의 신성의 체험들은 그것이 아무리 굉장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절대적이고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깨달음에도 그가 속한 문화권의 집단주관적 틀과 개인 주관의 틀의 흔적이 약간씩은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깨달음이라 불러왔던 그 체험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저 주관적 착각에 그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원래 모든 유한한 개체는 본질적으로 무한한 전체성을 지니고 있다. 이 무한한 전체성을 종교에 따라 佛性이라고도 하고 神性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하나의 개체인 동시에 거대한 전체인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성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전체성을 알지 못하고 유한한 개체성이 자신의 전부이자 원래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가 어떠한 계기를 통해 수행의 세계에 입문하면 여러 가지 초상적인 체험을 하게 되고 나아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무한한 전체성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경지에서 자신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종점에 가까운 것은 틀림없지만 결코 종점은 아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완전한 깨달음인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 순간 인식의 주체가 소멸할 때 완전한 깨달음이 이루어진다. 아무리 초월적인 깨달음을 얻어도 살아있는 동안은 인식의 주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육체는 죽어도 인식의 주체는 소멸되지 않는다. 요즈음 사후세계의 비밀을 밝히려는 노력들이 많이 시도되고 있으며 이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려는 노력을 하는 분도 있다. 나의 견해로는 육체는 죽어도 우리의 인식 주체는 소멸되지 않고 영계의 다른 곳에 일정 기간 머물다가 다시 육체를 입고 이 물질계로 돌아온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윤회는 불교에서 말하는 밑도 끝도 없는 윤회와는 다르다. 그것은 나선형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사후세계의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차후에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윤회를 통하여 인식이 점차 확장되면서 개체성보다는 전체성에 점점 더 가까워진다. 전체성에 가까워질수록 무한성이나 무아의 체험들, 소위 말하는 깨달음의 체험을 많이 하게 된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완전한 전체가 된다. 왜냐하면 모든 개체성 속에는 원래 전체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완전한 전체성을 얻는 순간 오랜 세월 윤회를 거듭해온 인식주체는 완전히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깨달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인식의 주체가 완전히 소멸되고 나면 어떠한 앎도 불가능하고 아울러 어떠한 전달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완전한 깨달음이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굉장한 체험을 하였더라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보다 더 깊은 깨달음을 향하여 다시 묵묵히 그리고 겸손하게 나아가야 한다.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 지금 이 순간 완전한 깨달음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깨달음을 찾아 끝없는 여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목적지는 아무도 모른다. 왜냐하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이미 길을 가던 그 자는 바로 지금 현재의 이 순간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최선을 다하여 나아갈 따름이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과 수행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패러다임이 바뀌면 세부적인 규칙이나 법칙들을 전혀 새로운 각도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새로운 패더다임으로 기존의 수행법들을 비판해볼 필요성이 있다. 많은 수행법들이 제각기 자기들이 최고라고 주장하지만 그 가운데는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효과에 집착하여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오히려 부작용을 낳는 것들도 있다. 그리고 다른 것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효율적인 수행법이라 하더라도 그것 또한 여전히 낡은 패러다임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수행하면 보다 효율적이고도 안전하게 완전성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마지막 회에서 논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