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이경숙

반야심경(般若心經) - 구름 이경숙 해설

기른장 2022. 3. 4. 20:22

《마음의 여행》 벽운(碧雲) 이경숙著

일곱 번째 여행 …… 마음의 귀향, 반야

지금까지 나의 마음은 물질과 생명, 시공간과 영계, 전생과 현생, 사후 세계의 실상을 찾아 과학과 종교와 내면의 많은 곳을 돌아다닌 여행자였다. 그 길고 고단한 여행의 끝에 결국 돌아가 쉬고자 귀향(歸鄕)을 결심하게 되었다. 바로 이 여행을 처음 떠날 때의 그곳인, 내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고향에 돌아오기까지 긴 여행의 이야기를 써왔다. 이제 마지막으로 고향의 이야기를 할 차례다.

내 마음의 고향은 ‘반야(般若)’다. 반야는 원래 범어(梵語)인 ‘prajna'의 음(音)을 한문으로 옮긴 것이다. 파야(波若) 또는 발야(鉢若)라고도 한다. 뜻을 풀이해서 지(智), 혜(慧), 명(明)으로 말하거나 지혜(智慧)나 청정(淸淨) 또는 원리(遠離)라 하기도 한다.

《대지도론(大智度論》 47권에는 반야에 대한 설명이 있다.

"반야는 지혜이며, 모든 지혜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지혜여서 무상(無上), 무비(無比), 무등(無等)한 지혜이며, 이보다 더 높은 지혜는 없다."

그래서 반야를 부처님의 삼덕(三德)의 하나이고, 육바라밀(六波羅密)의 제일로 치는 것이다. 《대지도론》 18권에서는 ‘제법의 실상을 아는 것이 반야’라고 하였고, ‘만유의 실상을 실험하여 증명하는 것을 반야’라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진실무상(眞實無常)한 지혜를 성취한 자를 부처라 하는 것이다.

이 반야는 《오부반야경(五部般若經)》이나 《팔부반야경(八部般若經)》등 수많은 경전에서 설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반야경》으로는 당(唐)의 현장법사(玄裝法師)가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密多經)》 6백 권이 있고, 그 밖에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 《소품반야바라밀경(小品般若波羅密經)》 등 대단히 많다. 전체 불경 중 약 1/3을 차지할 정도로 방대한 경(經)이다.

《반야경(般若經)》은 불경 중에서 가장 내용이 방대한 경전이면서, 동시에 그 밖의 어느 경도 가지지 못한 반야의 정수(精髓)를 별도로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密多心經)》이며, 줄여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반야심경》은 260 글자에 지나지 않는 짧은 경이지만, 이 《반야심경》이야말로 팔만대장경의 진수(眞髓) 중의 진수요, 석가세존의 80년 설법의 결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사바 중생들이 이 경을 마음의 안식처로 삼아 심경(心經)이라 하였고, 나 역시도 이 심경을 내 마음의 고향으로 삼는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불교는 수많은 경전을 가지고 있다. 율(律)이 있고, 논(論)이 있고, 소(疏)가 있으며, 어록집과 수행기와 문답집이 있다. 이 방대한 경해어림(經海語林)을 뒤지다 보면 길을 헤매기 십상이다.

8만 권의 대장경을 언제 다 볼 것인가? 법화경(法華經), 화엄경(華嚴經), 금강경(金剛經), 천수경(千手經), 아함경(阿含經), 관음경(觀音經) 등…. 수많은 불경 중에서 전생과 윤회를 아는데 반드시 필요하며, 이 세계의 실상을 압축하여 설명해 놓은 최종적인 결론이 바로 《반야심경》이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불경 중에서 가장 짧은 것이 《반야심경》이며, 가장 어렵다고 하는 것이 《반야심경》이다. 이 반야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 세계의 실상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전생과 윤회의 비밀도 엿볼 수 있으리라.

대부분의 불교 경전들은 거의가 일정한 격식과 틀을 갖추고 있다. 석가세존 당시에는 필사(筆寫)의 관습이 별로 없었고,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 적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했다. 따라서 주로 제자들의 기억력에 의해 보존되었고, 암송(暗誦)을 통하여 구전(口傳)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부처님 생전의 말씀을 생생히 기억하던 제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남에 따라 그 가르침들을 기록으로 남겨야 할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그래서 사문(沙門)들이 모여 서로의 기억을 정리하고 다듬어서 문자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니까 모든 불경은 부처님의 친문(親文)이 아니며, 제자들이 기억을 모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불경의 첫머리는 언제나 여시아문(如是我文)으로 시작된다. 즉,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로 시작되는 것이다. 결코 부처님은 이러이러하게 말씀하셨다가 아닌 것이다. 혹시라도 잘못된 기억으로 부처님께 누를 끼칠까 두려워한 기록법이다.

그 다음에는 기록자가 그 말씀을 들은 당시의 상황에 대한 배경 설명이 나온다. 대개의 경우 이 부분은 읽는 사람이 질릴 정도로 장황하게(황당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과장이 섞여 있다) 쓰인다. 어느 날 어느 장소에서 부처님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자리에 어떻게 앉아 계실 때…로부터 시작해서, 그 자리에 누구누구가 있었고, 누구는 어디서 왔으며, 또 누구는 무슨 일로 왔으며… 등등 읽는 사람의 인내심을 시험해 보는 것 같은 동일 구조의 글들이 한없이 반복된다. 즉, 불경은 도입부의 사설이 너무 길어서 읽는 일 자체에 희열을 느끼지 않으면 그 속으로 들어가기가 어려운 책인 것이다.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지겨워서 참아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불교를 알고자 하면 이런 불경을 끝까지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수없이 되풀이 읽을 수 있는 인내력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다 보면 처음에는 지겹던 그 끝없는 반복들이 되풀이 읽는 동안 영혼에 울리는 음률이 되고 음악이 된다. 아마 옛날의 인도인들은 이러한 지리한 경문의 독송(讀誦)에서 법열(法悅)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에는 부처님께 설법을 요청하는 청설의식(請設儀式)이 나온다. 대개는 부처님을 찬탄하고 숭상하는 경배(敬拜)의 노래이며, 부디 어떤 내용을 설해주십사 하는 간절한 청원의 게송(偈頌)들이다. 그 게송들 역시 경탄할 만큼 끝없이 이어지는데, 고대 인도인들의 어휘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페이지들을 다 넘기면 이번에는 부처님의 답가(答歌)가 나온다. 이것 역시 길고 길어서 나 같은 사람은 듣다가 자게 될 정도다.

그런 다음에나 그 경전의 알맹이인 부처님의 설법이 나온다. 어떤 경우 그 설법은 실로 몇 마디가 채 안 되는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불경은 과대 포장된 상품처럼 포장지를 수백 번 벗겨낸 후에 남는 조그만 물건 같다는 느낌을 줄 때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많은 포장지들은 자체로 훌륭한 그림이어서 한장 한장 음미해 간다면 그것만으로도 소중한 선물이 된다.

이렇게 불경의 일반적인 형식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반야심경》의 파격성 때문이다. 《반야심경》은 다른 불경들과는 달리 서두의 도입부가 생략되어 있다. 처음부터 대뜸 불교 철학의 정수와 요체를 곧바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몇 종류의 범어본(梵語本)과 한역본(漢譯本)이 전해지고 있다. 전체적인 의미는 같으나, 형식과 문장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중 우리 나라에서 표준으로 쓰이는 것은 당대의 삼장법사 현장의 번역본이다. 나도 이 글에서 현장본을 중심으로 삼고 있음을 밝힌다.

현장 번역본 《반야심경》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시어 오온이 모두 공인 것을 살펴보셨으며, 일체가 고액인 것을 깨달으셨다.)

이 문장만으로 본다면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의 깨달음에 대한 기록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이 경은 관자재보살이 부처님의 제자인 사리불(舍利佛)에게 반야바라밀을 설명한 것이다. 즉, 이 경의 화자는 관자재보살이며, 상대는 사리불이다.

몇 종의 다른 번역본을 종합하여 관자재보살이 이경을 설하게 된 연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왕사성(王舍城) 영취산(靈鷲山 : 혹은 기사굴)에 계실 때 광대심심(廣大甚深)이라고 불리는 깊고 높은 삼매경(三昧境)에 드셨다. 그 자리에는 문수사리(文殊師利), 관세음(觀世音), 미륵(彌勒), 관자재(觀自在)와 같은 일체지(一切智)를 체득한 대보살들이 함께 있었다.

그 중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수행하여 마침내 오온이 모두 공한 것을 깨닫고 일체의 고액을 벗어나 있었으므로 부처님의 제자 중 ‘지혜 제일’이라고 불렸던 사리불이 관자재 앞으로 나아가 "만일 수행자가 반야바라밀다를 올바로 수행하고자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대해 관자재보살이 사리불에게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방법을 일러준 것이 바로 이 《반야심경》이 된 것이다. 현장의 번역본은 이와 같은 전후 사정을 모두 삭제하고 오로지 반야바라밀다의 정수만을 곧바로 던지고 있는데, 현장은 나머지를 군더더기로 생각한 것 같다.

구마라집의 역본에는 관자재보살이 관세음보살로 기술되어 있기도 한데, 여기서 이 경을 설한 사람이 관세음이냐 관자재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 경은 석가세존이 직접 설하신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 경이 석가세존의 가르침을 초극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깨달음을 빌려 석가세존의 가르침을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초월해버린 것이다. 석가세존이 직접 말하기 어려웠던 것을 관자재라는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자신의 방편(方便 : 중생의 이해를 위하여 설했던 낮은 단계의 가르침)들을 짧은 사자후(獅子吼)로 허공에 날려보낸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첫 문장으로 돌아가서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수행하시어 오온이 모두 공인 것을 살펴보셨으며, 일체가 고액인 것을 깨달으셨다'는 뜻을 살펴보자.

문장의 구조로 볼 때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수행하여 깨달은 내용은 ‘오온이 모두 공(空)한 것'이며 이것을 알고 나서 '일체의 고액'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온개공(五蘊皆空)'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반야바라밀의 수행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문장 속의 오온은 무엇인가? 부처님이 사람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를 설명한 것이 오온이다.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다섯 가지를 이름이다.

여기서 '색(色)'은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 요소들을 총칭한 것이다. 완성된 인체의 전체상일 수도 있으나 수조 개에 달하는 세포들을 비롯해서 그 세포들의 단위가 되는 원소들의 개념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두 번째의 '수(受)'는 물질적 요소가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모든 유형의 힘(압력, 열, 빛, 소리, 인력 등), 정보, 관계를 포함한다. '색'이 있음으로써 당연히 외부 세계로부터 영향받는 모든 것, 또는 그 영향을 받아들이는 작용과 그 기관들을 말한다. 대표적인 것이 '눈, 코, 귀, 혀, 신체, 의식'의 여섯 가지 문으로 불교에서는 육근(六根)이라고 말한다. 이때 수정체와 각막 등으로 이루어진 신체 조직의 일부로서 눈은 '색'에 들어가지만, 빛을 받아들여서 상을 맺고 그것을 뇌로 전달하는 작용으로서의 눈은 '수'에 포함되는 개념이다. 세포로 구성된 하나의 유기체적 결합일 때 육근은 '색'에 들어가는 물건이지만 그것들이 외부와의 관계를 통해 육경(六境 : 빛, 소리, 냄새, 맛, 감촉, 육감)을 받아들이는 작용은 '수'이다.

예를 들어 회로판, 반도체, 케이스의 결합체인 라디오는 그 자체로 물체인 '색'이지만, 라디오를 켜서 전파가 수신되어 음악이 흘러나오고 말소리가 나는 과정 및 그에 따르는 각 부분의 작동(전기의 흐름과 제어)은 '수'이다. 원자핵은 '색'이지만 두 개의 원자핵이 끌어당기거나 밀쳐내는 작용을 하여 서로 간에 미치는 영향은 '수'가 되는 것이다. 나무라는 물질에 열을 가하면 빛을 내고 타는데, 나무 자체는 '색'이고 불에 타서 빛이 나고 형태가 변하여 마침내 재가 되는 과정은 '수'인 것이다. '색'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없으며 반드시 외부와 '수'를 일으킴으로써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

'색'과 '수'는 모든 물질계의 법칙이며 우리가 물질이라 할 때는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에너지는 '색'이고, 정보와 관계가 '수'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물질은 '색'과 '수'의 결합체인 것이다.

물질인 '색'과 '수'가 오온의 다음인 '상(想)'을 가지고 있을 때 '생명'이 된다. 즉, 생명은 '색+수+상'의 결합체인 것이다. 여기서 '상'이란 무엇인가? '색'이 받아들인 '수'를 감지하여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 단백질이 햇빛을 받아들이는 것은 '색'과 '수'이다. 그런데 받아들인 햇빛으로 광합성을 하는 것은 이미 생명이다. 광합성처럼 '수'에 대한 '색의 반응'을 '상'이라 한다.

불 속에 한 장의 종이와 살아 있는 벌레 한 마리를 넣었을 때 불에 타면서 종이가 오그라드는 것과 뜨거워서 벌레가 발버둥치는 것은 결코 같은 움직임이 아니다. 열이라는 외부의 힘은 동일해도 종이가 오그라드는 것은 단순한 '수'지만, 벌레가 몸부림치는 것은 뜨겁다고 느끼는 '상'이 있기에 그 차이는 하늘과 땅 보다 크다. 물론 종이(펄프)가 아닌 살아 있는 나무를 태운다면 거기에는 '상'이 있어 뜨거움을 감지할 것이다. 그런데 벌레처럼 몸부림치지 않는 것은 식물에게는 아직 '행(行)'이 없기 때문이다. '행'이 없이 '색'과 '수'에 '상'이 더해져 있는 생명을 '미생물로부터 식물까지'로 보면 된다.

여기에 '행'이 더해지는 생명체가 바로 동물이라 이름하는 것들이다. '행'은 '상'으로 말미암아 나타난다. 배고프다는 느낌은 '색'인 육체가 '수'인 어떤 느낌을 받아 '상'으로 감지하는 것이다. 배 주변에서 오는 정보가 배가 고프다는 신호인지, 배탈이 나서 아프다는 신호인지 감지하여 구별하는 것이 '상'이다. '상'이 이 정보를 배가 아픈 것으로 감지하면 아픈 배 위로 손을 가져가 쓸어내릴 것이다. '상'이 '행'을 일으키는 것이다. 만약에 '상'이 그 정보를 배가 고픈 것으로 감지하였을 때는 무언가 먹을 것을 찾아 몸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행'은 '상'을 따라 일어난다.

'상'에 무조건 반응하여 일으키는 '행'을 우리는 본능적 행위라고 말한다. '상'은 '색'이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모든 것(受)에 대하여 선악(善惡)과 호오(好惡)의 판단을 하지 않으며 그 반응에 예외를 두지도 않는다. 모든 짐승은 배가 고프면 무조건 먹는다. 배가 고픈데도 먹이를 앞에 두고 참는 짐승은 없다. 발정기에 짝을 만나면 무조건 결합하지 망설이거나 주저하는 짐승은 없다. 짐승의 행위는 '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응이다. 따라서 '색+수+상'에 '행'이 더해진 것이 짐승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오온의 마지막 요소인 '식(識)'이 더해질 때 그 생명체를 우리는 인간이라고 부른다. 즉, 인간은 '식'을 가진 존재이다. '짐승만도 못한 놈', '인간도 아닌 놈' 등의 욕을 듣는 사람들은 '식'이 없어서 그저 '상'의 일으킴대로 '행'이 나타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식'은 오온의 다섯 가지 중에서 가장 독보적인 존재이다. 왜냐하면 '행'은 '상'을 쫓아 일어나며, '상'은 '수'를 받아 일어나고 '수'는 '색'이 있음으로써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식'은 '행'으로부터 나오지 않으며 오히려 '행'을 일으키는 '상'의 내용을 검증하고, 그 타당성을 판단하며,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여러 '상'들의 우선 순위를 자의(自意)로써 정하여 그 '상'이 일으키는 '행'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물질에서 생명체로, 최초의 생명체에서 동물로의 발달 과정은 순차적이지만, 동물에서 인간으로의 발달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의 도약임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개념이다. '식'을 가진 인간만이 선악을 판단하며, 본능의 요구에 대해 타당성을 검증한다.

이와 같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단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오온이다. 그런데 이 오온이 모두가 공임을 깨닫게 되면 일체의 고액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가르침은 무슨 뜻인가. 역으로 말해 일체의 고액은 오온이 공임을 모르는데서 비롯된다는 의미다. 인간 자체가 공이라고 할 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집착할 아무 것도 없다. 그리하여 집착하여 구할 것이 없을 때 일체의 고액도 없다는 가르침이다. '이 세상에 진실로 나라고 할 것이 없다'라는 깨달음만이 일체의 고액을 벗어나는 길임을 밝히고 있다.

오온이 공일 때 나는 공일 것이며, 내가 공이라면 내가 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공일 것이다. 이것을 알면 구할 것이 없고, 구할 것이 없으면 집착할 것도 없다. 집착할 것이 없으면 고액 역시 없을 것이리라.

《반야심경》의 다음 대목을 보자.

사리자(舍利子)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아 색이 곧 공이며 공이 즉 색이며 수상행식 역시 이와 같으니라.)

여기서부터 관자재보살의 사리자에 대한 대답이 시작된다. 색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물질 세계(현상계)의 비생명계를 말한다. 이 비생명계는 현상계의 일부로서 현상계를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오온의 하나이다. 오온은 '색, 수, 상, 행, 식'으로 '색'은 비생명인 물질, 수는 색계(色界) 내에서의 개체간의 관계로서 아(我)와 타(他)와의 관계에서 받게 되는(동시에 주게 되는) 모든 것이다. 흔히들 사람의 느낌이라고 풀이하지만, 오온에서의 '수'는 사람의 느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만물의 '수'를 뜻한다. 즉 두개의 원자가 서로 만나서 깨지거나 합칠 때의 작용과 반작용도 수에 포함된다.

'상'은 물질이 특정한 순간 특정한 조건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모습이며, '행'은 '색'이 '색'에 대하여 '색'의 세계 속에서 '색'에 대하여 작용하는 모든 것이다('수'는 수동적 관계이며 '행'은 능동적 관계다). '식'은 앞의 사온(四蘊)을 인지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오온 중 '색'(물질 그 자체, 재료)과 '상'(물질이 이루어 놓은 형태, 구성물)은 유형의 세계이며, '수'(수동적 관계)와 '행'(능동적 관계)은 무형의 세계이며, 마지막의 '식'은 이 유무형의 세계(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를 인식하는(실제로 존재하는 것일 수 있게 하는)것이다.

오온이 모두 공임을 깨달은 관자재보살이 오온 중의 하나인 '색'만을 들어 '색'이 곧 공이라고 설명한 까닭은 무엇일까? 오온은 그 자체로 유형인 물질계와 무형인 관계, 그리고 형태를 논할 수 없는 의식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그 모두가 공이라고 설명하기 전에 우선 오온의 첫째이며 물질계의 근본인 '색'이 공임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색즉시공'은 오늘날 철학적, 종교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에 따라 설명하는 것이 더욱 적합하리라 생각된다. 이 경이 설해지던 당시에는 물질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신비하고 비유적인 설법으로 대신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이 이룩한 업적은 더 이상 모호하고 비현실적인 설명이 필요없도록 해주고 있다.

즉, 모든 물질은 과학적 증거로 보아서 공인 것이다. 앞의 여행에서 본 것처럼, 양자역학이나 우주물리학은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물질이 존재하지 않음을 밝혔고(측정의 불확정성과 비인과론적 존재성, 그리고 반물질에 의한 소멸이라는 물질의 세 가지 측면에서), 현재 존재하는 모든 물질조차도 비존재의 잔해임을 알게 해 주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세계는 나타나지 못하고 소멸된 세계의 10억분의 1이라는 잔해에 불과한 것이다. 소멸되어 버린 세계에 비교할 때 한 알의 모래와 같은 작은 규모의 세계일 뿐이며, 이것 역시 찰나에 소멸될 필연적인 운명에 놓여 있다. 그리고 사라지기 전이라 할지라도 그 본질은 이미 소멸되어버린 세계와 같이 무(無)인 것이다.

물론 부처님이나 관자재보살은 물질이 공인 것을 과학적 증거를 가지고 설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한마디, '색즉시공'을 말하기 전에 팔만의 경을 설해야만 했다. 그러나 과학이 증거를 제시해 주는 오늘날에는 이 구절을 설명하는데 굳이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비유가 필요하지 않다. "물질의 본질은 무(無)이고 이 세계의 실상은 공(空)이다. 이것은 과학적 관찰의 결과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수상행식도 이와 같다'라는 말은 물질이 모두 공이므로 그 물질이 모여서 이루고 있는 모든 형상도 공이며, 물질 사이의 모든 관계 역시 공이며, 따라서 공인 것을 인지하는 의식 역시 공이다라는 의미다. 《반야심경》의 이 구절이야 말로 허상의 실체인 세계를 극명하게 정의 내린 한마디다. 그 다음의 대목들은 이 한마디에 대한 부연에 지나지 않는다.

사리자(舍利子)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

(사리자여 모든 법이 공한 것이어서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더해지지도 줄어들지도 않느니라)

여기서 제법이라 함은 불법을 포함한 모든 세계의 원리와 원칙 일체를 포함하는 것이다. 제법이 공하다는 것은 불법조차 공하다는 것이며, 부처님의 깨달음, 가르침, 가르침을 좇고자 하는 노력, 깨달음으로의 구도(求道), 이 모든 것이 다 공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모순에 부딪히게 된다.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하면 오온이 모두 공인 것을 깨닫는데, 그것을 깨닫게 되면 제법이 모두 공상임을 알게 되므로 반야바라밀다 역시 공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야바라밀다는 공상인 제법을 초월하는 법인가? 아니면 그것 역시 공상이라고 하는 제법에 속하는 것인가?

불교의 위대함은 바로 이 궁극의 차원, 지고의 깨달음조차도 모두 공임을 인정하고 있다는데 있다. 제법무상을 가르치는 교설은 교설 그 자체가 제법으로서 무상한 것에 포함되므로 무상한 것이 무상을 가르치는 무상함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은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그 본질이 공이어서 존재하고 있다고 증명할 수 없는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는(?) 인간의 세계를 파악하는 데 따르는 필연적인 모순(근본 모순)인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모순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솔직함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공이고 모든 것이 무상하며 일체가 무인 이 세계에서 불교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깨달음이 가지는 가치는 무엇이며, 깨닫고자 하는 노력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을 불교는 가지고 있는가? 계속해서 《반야심경》을 읽어보자.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더해지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이 세계는(제법이라고 할 때 법이란 말 속에는 이 현상계의 모든 삼라만상-물질과 물질이 이루어낸 형상과 그것들을 그 자리에 있게 하는 원리와 법칙-이 포함되어 있다) 공상이어서 생겨남이 없고 멸하지 않는다고 관자재는 말한다. 만약 이 세계가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어서 공상이라고 한다면 없어질 때까지는 존재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 세계는 언젠가 없어질 무엇이 아니다. 왜냐하면 없어질 무엇이 생겨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 영구불변한 것이 없고 인연법에 따라 잠시 나투어 난 것이라 헛되고 헛되다고 가르쳤는데, 여기 《반야심경》을 설한 관자재보살은 영구불변하지 않고 언제나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헛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헛되고 말고 할 것이 생겨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 세계는 멸할 것이기 때문에 헛된 것이 아니고 생겨난 적이 없기 때문에 멸할 것도 없다는 것이며, 이 불생불멸의 개념 앞에는 헛되다는 생각이 자리잡을 여지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다. 생겨나서 스러져가는 존재가 헛되고 무상한 것이지 생겨나지 않은 것이 무상할 리 없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제법무상을 말하고 있지만, 제법조차 불생이며 불멸인 까닭에 무상할 턱이 없는 것이며 무상하고 아니하고 할 제법이 생겨나 있지도 않은 것이다. 있지도 않은 제법을 무상하다고 말하는 이 반야의 마음 역시 생겨나 있지 않고 멸할 이유가 없는 것이어서 우리는 혼돈에 빠지게 된다.

있지도 않은 오온을 모두 공이라 말하고, 있지도 않은 제법을 무상하다 하고, 있지도 않은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수행하라고 하고, 있지도 않은 부처가 있지도 않은 광대심심이라는 삼매에 빠져 있고, 있지도 않은 사리불이 있지도 않은 관자재보살에게 있지도 않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법을 묻고, 있지도 않은 관자재 보살이 있지도 않은 사리불에게 모든 것은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있지도 않은 내용이 바로 이 《반야심경》이라 할 것이다.

제법공상이라 할 때 제법공상을 말하는 관자재보살도, 그것을 듣고 있는 사리불도, 제법공상을 깨닫는 반야바라밀도 역시 공상인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더해지지도 줄어들지도 않느니라." 뒷구절은 사족에 다름 아니다. 불생(不生)!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시고(是故) 공중무색(空中無色)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무안계(無眼界) 내지(乃至) 무의식계(無意識界) 무무명(無無明)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 내지(乃至) 무노사(無老死)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그래서 공 안에는 색이 없고, 수상행식이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의식이 없는 것이며, 색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법이 없으며, 눈으로 보는 세계가 없으며, 의식으로 감지하는 세계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하는 일도 없으며, 늙고 죽는 일도 없고, 늙고 죽는 일이 다함도 없으며, 고집멸도의 사성제도 없고, 알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으며, 얻으려고 애쓸 것도 없느니라)

《반야심경》은 계속해서 14가지에 대한 없음(無)을 열거하고 있다. 그런데 《반야심경》이 무로 단정짓고 있는 이 14가지는 석가세존이 팔만의 경을 통해서 누누히 설법해온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반야심경》을 두고 석가세존의 모든 가르침을 송두리째 뒤엎고 있는 파천황(破天荒)의 궁극설이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 가운데는 물질이 없고 수상행식(여기까지 오온의 전부)이 없으며 눈, 귀, 코, 혀, 신체, 의식의 육근과 육근이 외부와 작용하는 보이는 것, 즉 소리, 냄새, 맛, 촉감, 인지의 육경(이 육근과 육경을 이 세계가 넘나드는 12처라고 한다)이 무이며, 보이는 세계도 무이며, 인지하는 세계(의식의 세계)도 무이며, 인연이 시작되는 최초의 시발점(무명)도 무이며, 그 인연이 다하는 종착점(무명진)도 무이며, 늙고 죽음도 없으며(무노사), 늙고 죽는 것을 초극하는 것도 없으며(무노사진), 사성제도 무이며(무고집멸도), 깨달음도 없으며(무지), 따라서 얻을 것도 없고(역무득), 따라서 얻으려고 애쓸 것도 없다(역무소득고)"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것의 부정이다. 완전한 부정이며, 티끌 하나 그 속에 포함될 것을 허락치 않는 진공(眞空)의 가르침이다. 석가세존이 수십 년 동안 설했던 교리에 대한 가차없는 파괴이며, 부처니 깨달음이니 하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부정이다. 석가세존이 이 세계의 구성 요소로 설명했던 오온이 없음, 그것이 있음으로써 실체가 없는 세계가 실체로써 존재할 수 있다고 설명했던 12처가 없음, 이 세상 모든 것이 그것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던 인연이란 것이 없음,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제가 없음, 불교의 목적인 깨달음이 없음,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없음을 말하고 있다.

즉, 《반야심경》은 불교의 모든 것들, 인연법, 유식론, 사성제에 의한 수행, 깨달음, 해탈에 대해서 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보리살타(菩提薩唾)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波羅密多故) 심무가애(心無佳碍) 무가애고(無佳碍故) 무유공포(無有恐怖)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구경열반(究境涅槃)

(모든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울 일이 없으며, 허망한 세상을 실체로 여기는 몽상에서 멀리 비켜나게 되므로 생사를 초월하는 높고 밝은 경지를 이루는 것이니라.)

불도를 닦는 모든 보살들은 이 반야(지혜)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에 걸림이 없다는 말은, 반야의 진리란 앞에서 본 것처럼 일체가 공이며, 어떤 것도 구할 수 없고, 구하려 들 필요조차 없음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가애(자신을 옭아매고 마음의 자유를 구속하는 집착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의미다. 마음을 자유롭지 못하게 구속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이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낄 것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의 모든 두려움은 죽음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인데, 나고 죽음을 이미 초탈한 대진리광명의 경지에서는 어떤 일도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태연한 척할 수 있는 사람은 있겠지만, 진실로 삶과 죽음의 실상을 꿰뚫어보고 그 모든 게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던 꿈이었음을 알고 마음에 한점 가애가 없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이런 생사초월의 열반 경지에 갈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삼세제불(三世諸佛)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波羅密多故)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耨多羅三貌三菩提) 고지(故知)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多) 시대신주(是大神呪) 시대명주(是大明呪) 시무상주(是無上呪)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 진실불허(眞實不虛) 고설반야바라밀다주(故設般若波羅密多呪) 즉설주왈(卽設呪曰) 아제(褐帝) 아제(褐帝) 바라아제(波羅褐帝) 바라승아제(波羅僧褐帝) 모지사바하(菩堤娑婆訶)

(과거의 모든 부처들과 현세의 모든 부처들과 미래의 모든 부처들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니, 그와 같은 이유 때문에 반야바라밀다가 가장 지극하고, 가장 밝으며, 가장 높으며, 비교할 바 없는 것이어서 능히 일체의 고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며, 진실되고 거짓이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며, 때문에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외워야 하는 것이다. 이 주문을 말하자면, 바로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이니라.)

여기서 삼먁삼보리는 범어(梵語)인 '삼먁삼보리(Samyaksambodhi)'라는 말을 소리나는 그대로 한문으로 옮긴 것이다. 한자를 우리 식으로 읽으면 '삼모삼보제'가 되어버리는데, 이것은 중국 사람들이 읽었을 때 '삼먁삼보리'라고 발음되도록 현장이 번역한 것이므로 한자 원문을 따질 필요없이 그냥 ’삼먁삼보리‘로 읽으면 된다. 뜻은 앞에서 나온 구경열반이나 해탈의 경지와 같은 '무상성등정각(無上性等正覺)'으로, 더 이상 위로 올라갈 경지가 없는 가장 높은 경지의 깨달음을 말한다.

불교의 많은 교리는 그 목적을 중생의 계도에 두고 있다. 그래서 불교의 지혜를 말하는 바라밀다에는 수없이 많은 종류가 있다. 여러 바라밀다는 모두 그것을 구하는 자와 구하는 목적에 따라 바라밀의 성격이 다르다. 사바세계의 중생이 구하는 지혜가 따로 있고, 부처의 길을 가는 보살들이 구하는 지혜가 따로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 이 반야바라밀다를 삼먁삼보리로 칭한 이유는, 반야의 정신이 바로 부처가 되고자 하는 보살들의 의지처이고 열반의 정상에 오르는데 필요한 자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바라밀들과는 그 성격이 다른 것이다.

중생들의 삶에서 필요한 것은 사성제요, 팔정도요, 삼학이지 반야가 아니다. 오온을 배우는 정도면 충분하지, 오온이 공임을 아는 지혜가 일상의 삶에 도움을 주지 못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물며 십이연기도 헛것이요, 사성제라는 것은 있지도 않으며, 불법조차도 공이라는 일체개공을 깨닫는 지혜는 잘못하면 허무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 때문에 반야는 정각을 추구하는 보살들이 반드시 깨닫고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하는 최고 경지의 각(覺)이다.

부처가 되는 순간은 부처란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부처가 되고자 하는 자기 자신이 사라져버리는 경지이다. 해탈을 하겠다는 정진과 일념조차도 공으로 돌아가 버린 다음이라야 열반의 문은 열린다. 티끌 하나라도 존재하는 자리에는 삼먁삼보리의 꽃이 피지 않는다. 그것은 일체공, 일체무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화엄의 세계다.

중생은 나무관세음을 외울 때 원력의 가피를 얻을 수 있고, 천수경을 읽어 지혜의 문을 열 수 있다. 그러나 부처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관세음보살에 의지해서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관세음보살이나 삼세의 제불보다 위에 서리라 결심한 사람이 천수경을 외워서 얻을 것은 없을 것이다. 석가세존의 손에 의지한다면 석가모니불의 아래 자리까지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계단일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서 갈 수 있는 경지는 부처 너머일 수 없다. 부처를 초월하는 유일한 지혜가 바로 이 반야바라밀이다.

불교는 석가세존 80년 설법의 모든 것을 의미 없고 쓸데없으며 불필요한 공론(空論)으로 돌림으로써 부처의 길을 열어놓고 있다. 삼세제불의 모든 가르침에서 얻을 것이 없고, 얻으려할 것도 없으며, 제법이 공상이어서 불법조차도 공상이라는 극한의 부정을 넘어서는 극한의 긍정을 반야바라밀은 보여주고 있다. 이 반야가 아니었다면 불교는 부처라는 신과 그 신에 머리를 조아려 복을 비는 수억만의 중생으로 나뉘는 유신론적 종교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직 반야의 횃불이 있어서 그 전도몽상의 암흑에서 나아갈 한줄기 길을 비추고 있음이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이 주문은 속세에 몸담고 살아갈 중생이 외우는 주문이 아니다. 부처가 되고자 결심한 구도자가 외우는 주문이다.

뜻을 풀이하면, '가세 가세, 어서 가세, 저 피안(彼岸)을 향해서, 열반의 세계로…'이다. 그러나 이런 주문은 구태여 뜻을 옮길 필요가 없다. 소리나는 대로, 노래 자체에서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화엄의 바다에 배를 띄우고, 저 피안을 향하여 떠나려는 모든 사람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이다.

이제, 저 영혼의 노래를 부르면서 오랜 시간 떠났던 마음의 여행에서 돌아와 쉬려고 한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