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과학의 화해
생과 사의 문제는 어쩌면 지극히 종교적인 주제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영혼의 세계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다. 실제로 이 세계가 어떤 법칙으로 운행되며 어떤 원리로 이루어졌느냐에 대한 설명 없이는 접근할 수 없는 문제다.
우리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여러 가지 의문을 안고 있다. 창조주의 존재, 천국과 지옥, 귀신과 영혼의 존재, 사후 세계 등등. 이런 의문들을 풀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찾고자 해왔지만 아직까지 뚜렷하게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 과학이 더욱 발달한다 해도 천국과 지옥을 발견해 낼 가능성은 없어 보이고, 인격신의 존재는 갈수록 부정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 대신 종교는 아니지만 초월적인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UFO라든지 ESP(extrasensory perception 초감각적 지각 현상), 초현상, 초능력, 심령 과학 같은 것들이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는데 게으른 기존의 종교들을 대신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종교에 대해서도 과학적인 증거를 요구하고 있으므로 이미 발견되고 입증된 과학적인 결론들과 배치되는 교리를 고집하는 종교는 그 전도(前途)에 상당한 불안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제는 과학의 도전으로부터 안전한 종교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떠한가? 인연법과 윤회는 불교의 대표적인 교리 체계인데, 불교는 이런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로 과학적인 대답을 준비하고 있는가? 나는 불교의 선(禪)의 종지(宗指)인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불성(見性弗性)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러한 불립문자의 선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고 체험한 바 있다. 하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세계 속에 머물 뿐, 그 깨달음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길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연꽃 한 송이를 내밀어서 그 뜻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경을 수백 번 읽어도 이해하기 힘들다. 나 역시 불경을 수없이 읽었지만 그 뜻을 명확하게 깨닫지 못하는 게 너무나 많았다. 물론 뜻이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지만 과연 어떤 이유로 그리 되는지를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인연은 왜 생기는가? 전생과 윤회가 사실이라면 전생의 나와 지금의 나는 도대체 어떤 관계에 있는가? 전생의 ‘그’가 죽고 지금의 ‘내’가 태어나기까지 나(또는 그)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했던 걸까? 그 동안에 나는 극락에 있었을까? 기억을 못할 뿐이지 끔찍한 지옥에서 벌을 받다가 온 것은 아닐까? 부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 걸까? 내가 불전에 엎드려 간절히 빌 때 부처님은 나의 원망(怨望)을 듣고 계실까? 만약 듣고 계시다면 나는 언제 그 대답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대답은 어떻게 나타날까? 여러 가지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생겨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애초에 논리나 말로는 설명될 수 없는 걸까?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인간이 우주의 경계까지 넘나드는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선문답만으로 만족해야 하나? 정말 이심전심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걸까?
부처님께 삼천배를 해도, 암자에서 몇 달 동안 화두면벽(話頭面壁)을 해도, 그리고 고통뿐이었던 단식(斷食)으로도 나는 그 의문부호들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 의문의 빗장을 조금씩 풀 수 있었던 것은 우주물리학과 양자론을 배우면서부터였다. 그 공부는 내 마음의 의문들을 씻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남에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주었다.
나는 마치 음계도 모르고 작곡의 이론도 배우지 못한 채 피아노 건반만 두드려온 셈이었다. 피아노 앞에 10년을 앉아 침식을 잊고 건반을 두드린다면 그것도 한 경지에 가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음악의 이론을 배우고 음계의 법칙을 배운다면 같은 시간에 훨씬 빨리 목적지에 갈 수 있고, 더 높은 차원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불교 해설서는 선사들의 어록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물리학과 양자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도 그래서였다. 염불을 하고 화두를 붙잡고 면벽수행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승려들도 물리학을 공부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명의 법칙을 설파한 부처님의 말씀은 생물학의 도움을 받아 더욱 풍부하게 해명될 것이고, 유식설(唯識說)을 아는 데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포함해 심리학 전반에 대한 이해가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다른 많은 비종교적 초월주의의 주장들이 겉으로는 입증주의(立證主義)를 표방하고 나름의 방법으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를 보여주려는 것은 사실이지만 엄격한 실험 환경을 견뎌낼 정도의 객관적 방법론을 가지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럼 불교는 과연 어떠한가? 전생과 윤회는 어떠한가?
좀더 넓어진 과학의 지평은 우리가 품어온 많은 의문들에 대해 어떤 면에서는 종교보다도 더욱 확실한 대답을 주고 있다. 우주물리학과 양자론을 통해서 과학자들은 이 세계를 설명하는 여러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들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불립문자의 세계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물론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등 진전된 과학의 도움으로도 생과 사의 문제를 온전히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리적인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또 하나의 세계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상 한쪽 세계의 결론만으로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이 아직 ‘모든’ 대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영혼과 사후세계에 대한 종교의 대답이 이미 밝혀진 과학적 사실들과 양립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둘 중 어느 하나는 틀렸다고 보아야 하는 것인가? 과학과 종교 사이의 이 풀기 어려운 대립은 서로에 대한 외면이나 회피를 통해 더 강화되어 왔다. 그러나 외면이나 회피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이 세계에 대한 과학의 해명에 충분히 귀기울이는 것, 그래서 과학을 종교적 의문을 푸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주물리학이 이 우주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우주물리학이 설명하고 있는 두 가지 우주론과, 물리학자는 아니지만 이 책의 주제와 비슷한 문제를 다룬 《우주심(宇宙心)과 정신물리학》의 저자인 이차크 벤토프가 설명한 우주론을 살펴보기로 한다.
세 가지 우주론
1. 정상상태의 우주론
금세기에 들어와서 가장 그럴듯한 우주의 모형으로 제시되었던 것은 1940년대 허먼 본디(Hermann Bondi)와 토마스 골드(Thomas Gold), 프레드 호일(Fred Hoyle)이 제안한 ‘정상상태 이론(steadystate theory)’이었다. 이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무한하게 존재하는 우주를 말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정상 상태의 우주는 시작된 시점이란 게 없으며, 무한한 과거로부터 무한한 미래까지 현재의 모습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물질의 창조는 어느 한순간에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늘 새로운 물질이 창조되어 끝없이 넓어져가는 우주의 빈 공간을 채움으로써 우주는 언제나 지금과 같은 밀도와 성질로 존재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연속적 창조 이론’이나 ‘고정론’ 또는 ‘완전 우주의 원칙’이라고 불리는 이 우주론이 논리적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팽창에 따른 물질의 평균 밀도가 감소하지 않도록 매초마다 1㎤의 공간에서 10의 -43승 그램
(우주 전체로는 1초마다 약 5만 개의 별이 새로 생김)의 비율로 새로운 물질이 창조되어야 한다고 했다. 특히 프레드 호일은 음(陰)에너지란 개념을 도입하여 물질이 창조됨으로써 우주 내에서 감소하는 양(陽)에너지를 보상하는 이론을 창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이론은 1965년 우주 탄생의 초창기에 발생했던 에너지의 잔해인 배경열복사(background heat radiation)가 발견됨으로써 가치가 사라진 고전적인 우주론의 한 모형으로만 남게 되었다.
2. 대폭발의 우주론
오늘날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는 우주의 모형이 바로 대폭발(big bang : 빅뱅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영국의 물리학자 프레드 호일Fred Hoyle이다. 빅뱅설에 찬동하지 않았던 그는 야유하는 뜻으로 ‘빅뱅’이란 우스꽝스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의 우주론이다. 우주가 하나의 특이점에서 시작된 대폭발의 결과로서 나타났다고 보는 견해이다. 대부분의 우주 관측 결과들이 약 150억 년에서 200억 년 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대폭발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대폭발의 우주론은,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Edwin Hubble)이 별빛의 적색편이(별빛의 적색편이를 발견한 사람은 베스토 슬라이퍼)가 그 천체와 지구 사이의 거리에 비례함을 알게되어 우주가 팽창하고 있음을 알아낸 후, 1965년에 미국의 벨 전화 회사(Bell Telephone Company)의 두 물리학자가 대폭발의 증거인 배경열복사를 발견함으로써 오늘날 우주 물리학의 가장 광범위한 지지를 받게 된 이론이다. 다만 ‘우주 알(cosmos egg)’이라고 부르는 특이점의 성격과 물리적 법칙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이 우주 알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는 중이다.
대폭발로 비롯된 ‘팽창하는 우주’는 정상 상태의 우주와는 달리 필연적인 종말이 예고되어 있는 ‘끝이 있는 우주’이며, 그 종말이 어떤 법칙에 의해 어떤 모습의 최후가 될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또한 대폭발 이전과 마찬가지로 대수축 또는 최종적인 열사망(熱死亡) 이후에 이 우주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몇 가지 대립되는 설이 있다. 우주의 최후 다음에 다시 새로운 시작(new big bang)이 있으리라는 ‘끝없이 순환하는 우주’가 가장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아직 과학에서는 태초의 이전과 최후의 이후는 가설의 단계이거나 불가지(不可知)의 세계로 남아있다. 만약 ‘끝없이 순환하는 우주’가 사실이라면, 매 시기에 존재하는 우주는 ‘시작과 끝이 있는 우주’이지만 전체적인 입장에서는 또다시 시작과 끝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시작과 끝이 있는 우주가 끝없이 탄생과 죽음을 되풀이하므로…).
3. 연속적 순환 우주론
이것은 물리학적으로 인정된 우주론은 아니다. 이차크 벤토프가 《우주심과 정신물리학》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저서에서 설명한 다소 독창적인 우주론이다.
이차크 벤토프는 빅뱅이 하나의 구심점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폭발이 아니라, 최초의 핵으로부터 제트 분사 방식으로 방향성을 갖는 폭발이었다고 설명한다. 이 분사되는 방향의 반대편에는 분사되어 팽창하는 모든 우주가 흡수되어 저장되는 핵의 반대편이 있어서 연속적으로 우주를 빨아들이며, 한편으로는 흡수한 우주를 지속적으로 분사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전체 우주는 마치 도넛과 같은 원환체를 이루는데, 바로 여기서 분사되는 출구가 화이트홀이고 우주를 흡수하는 입구가 블랙홀인 것이다. 우주의 핵은 화이트홀과 블랙홀이 등을 맞대고 붙어 있는 모양이며 우주의 창조와 파괴는 동시적이며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개념이다. 즉 어떤 특정시기의 대폭발이 아니라 연속적인 분사 형식의 창조와 아울러 지속적인 흡수와 소멸이 이루어지는 무한 동력 기관과 같은 우주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화이트홀로부터 깔때기 모양으로 퍼져나가므로 당연히 최초의 분사 지점에서 멀어질수록 팽창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진다. 결국 블랙홀로 돌아가는 반환점 부근(깔때기의 가장 넓은 부분)에서는 폭발에 가까운 급격한 팽창을 가져온다. 그런데 우주의 밀도가 균일하며 우주의 각 부분의 팽창률이 고르다는 증거들이 계속 발견됨으로써 이 이론은 다소 상상적인 우주모형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차크 벤토프는 우주물리학자가 아니므로 그의 우주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실히 철학적인 직관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우주론은 창조와 소멸의 동시성이라고 하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의 동양 철학의 우주관을 하나의 모형으로 도식화했다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주론과 세계관의 관계
이 우주는 시작과 끝이 없는 무한 존재인가, 아니면 시작과 끝을 가진 유한 존재인가 하는 것은 종교 문제의 근본 토대를 이룬다. 생명과 죽음, 영혼과 사후 세계의 실상은 우주론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즉 우주가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라면 신의 존재도 시작과 끝이 있을 것이고, 윤회라는 것도 시작과 종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우주가 무한히 존재한다면 창조주로서의 신은 의미를 상실한다. 창조라는 것은 어떤 시점에서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윤회도 무한히 반복되는 것일 뿐, 윤회의 끝을 말하는 해탈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시작과 끝이 없는 우주에서는 인연 역시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히 영속되므로 시작이 없는 인연을 끝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작이 없는 것은 끝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해탈로써 인연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것은 인연은 최초의 시작이 있었다는 논리 위에서만 성립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최초의 시작’이란 것은 인연법과 모순을 이룬다. 인연법이란 과학 용어인 인과율과 같은 의미인데, 모든 것은 선행된 어떤 이유의 결과로 일어난다는 법칙이다. ‘최초의 인연’이란 선행하는 어떤 원인도 다른 인연도 없이 생겼다는 얘기이므로 인연법 자체가 모순으로 보인다. 우주가 무한히 영속하는 것이라면 인연 역시 무한히 영속하는 것이므로 해탈이란 불가능한 개념일 것이며, 만약 시작과 끝이 있는 우주라면 불교의 인연법은 출발부터 모순에 빠진다.
대비되는 또 하나의 종교인 기독교도 마찬가지의 패러독스를 지니고 있다. 우주가 무한영속의 것이면 창조주가 개입할 틈이 없어진다. 반면에 시작이 있는 우주라면 ‘시작 이전에 존재했던 신’이라는 모순에 빠지고 만다. 이는 창조주가 무한영속의 존재라는 뜻인데, 이 무한영속의 존재인 신은 우주를 창조하는 특정 시점을 갖지 못할 것이다. 시공간의 존재 이전에 창조를 결심하거나, 창조할 순간을 선택할 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계획을 했든 결심을 했든 창조라는 것은 모두 시간적인 사건이며, 시공간 탄생 이전에 선행해서 존재한 신은 시간적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이 그 원인이 된다고는 하기 힘들다. 이러한 우주론에 따른 종교의 모순이 해결될 수 있는지, 아니면 모순된 가정에서 출발한 교리들이어서 부정되어야 할 것인지를 고찰해보는 게 이 책의 중요한 논지 가운데 하나다.
출처 : 마음의 여행 - 이경숙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