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칼의 狂人' 한정욱, 신라刀劍을 부활시키다

기른장 2010. 2. 21. 10:24

 

"가슴속에는 '책임'이란 칼 한 자루 있어야죠"
불덩어리 강괴 4096겹 만들고 몇백 번 망치질로 칼날 형태…
800도로 달궈 찬물에 담그면'쩡!'하며 우리 옛 칼 재탄생

 

#1. 해변의 두 사내

2005년 12월 경북 경주시 감포(甘浦) 해변에 두 사내가 나타났다. 그들은 이틀 동안 대형 유리관을 모래밭에 박았다 뺐다. 겨울바람이 얼굴을 때려도 둘은 말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뒤 두 사내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보름 동안 모래를 파내더니 여자 스타킹을 '체'삼아 거르기 시작했다. 모래는 서서히 검은색으로 변했다. 며칠째 그들의 괴상한 짓을 지켜보던 촌로(村老)들이 못 참겠다는 듯 나섰다.

"예끼, 지금 도대체 뭐 하는 짓들이오?" 그제야 사내들이 고개를 들었다. 나이가 더 들어보이는 이는 동산불교대 김익홍 교수(2008년 사망), 옆의 남자는 서울 인사동 '나이프(Knife) 갤러리' 관장 한정욱(韓晶旭·56)이었다.

감포는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 때 설화 만파식적(萬波息笛)의 고장이다. 동해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용(龍)이 대나무를 꺾어 피리로 만들기를 권했다는 내용이다. 해룡(海龍)이 됐다는 문무왕의 수중(水中)왕릉도 지척에 있다.

놀라운 것은 이 모래밭이 사철(砂鐵) 산지였다는 것이다. 여기 사철로 신라군은 창검과 화살촉을 만들어 대당(對唐)전쟁에서 이겼다. 한반도에 웅크린 외세를 몰아낸 산실(産室)이 이곳이었음을 기억하는 이는 지금 별로 없다.

두 사내는 동네 사람들에게 소주잔을 건네며 이렇게 설명한 뒤 본론을 꺼냈다. "지금은 사라진 우리 삼국시대의 옛 검을 복원하려 합니다. 그러려면 이곳에서 나는 사철이 필요합니다. 어르신들, 부디 도와주십시오."

그제야 최연장자인 80대 노인이 입을 열었다. "기억나. 일본놈들도 이 해변에서 이 이들과 비슷한 짓을 했어. 몇날 며칠 동안 모래를 파내더니 검은 사철을 가져갔어. 총신(銃身)을 만드는 데는 이것만한 게 없다고…."

40년 가까이 몸에 칼을 지니고 살았다. 그게 없으면 불안해진다는 한정욱이다.“ 검을 여러 자루 차보라”고 하자 그는“우습게 보일 것 같은데…”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칼을 들자 슬며시 미소가 배어 나왔다. /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 동영상 chosun.com

#2. 경기도 양주

양주시 어둔동 허름한 공장에 높이 160㎝의 제련로(製鍊爐)가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상단, 중단, 하단의 3단으로 제작된 로는 직경 60㎝인 둥근 옹기 같았다. 안에는 백토, 황토, 석회석이 꼼꼼하게 발라져 있었다.

제련로가 완성되자 이번에는 1500~1800도의 열을 내기 위한 숯이 필요했다. 보통 참숯보다 더 순도 높은 소나무 숯을 강원도 양구에서 실어왔다. 소나무 숯은 한 트럭에 400만원씩 했다. 숯이라기보다 금(金)에 가까웠다.

감포 해변에서 퍼온 사철이 황토·백토·석회석으로 만든 옹기에 부어졌다. 그걸 소나무 숯으로 24시간 구워댔다. 하루가 지난 뒤 제련로를 파쇄(破碎)했다. 70㎏의 사철이 축구공만한 불덩어리로 변해있었다. 강괴(鋼塊)였다.

인부들이 그 불덩어리에 도끼를 대고 파워해머로 내리쳤다. 하나를 둘로, 둘을 넷으로, 넷을 여덟 토막…. 강괴는 2의 제곱으로 나뉘었다가 붙더니 마침내 4096겹이나 됐다. 그 과정을 통해 강괴는 질기고 강인해졌다.

두들겨맞고 또 두들겨맞은 강철이 마침내 폭 3㎝, 두께 1㎝, 길이 1m의 바(Bar)형태로 변했다. 또다시 몇백 차례의 망치질이 인간의 땀과 함께 가해지니 비로소 칼날 같은 모양으로 바뀌었다. 이른바 직도(直刀)다.

그 직도의 칼날에 얇게, 칼등에는 두껍게 진흙을 발랐다. 그리고 800도로 달궈 다시 불덩어리가 된 칼을 순식간에 찬물에 담갔다. 천성적으로 금속을 싫어하는 게 물이다. 뜨거운 쇠를 받아들인 물은 '쩡!'하고 울음을 토했다.

그 반탄력(反彈力)에 직도가 휘어 곡도(曲刀)가 됐다. 한정욱의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혔다. 그 옛날 대륙을 가르고 한반도를 종횡하던 신라와 가야의 옛 칼이 재탄생한 것이다. 일본도의 원조가 된 그 칼이 이렇게 되살아났다.

외아들

한정욱은 위로 누나만 넷을 두고 있었다. 건설부에 다니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이가 여자처럼 클까 걱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경복중학교 1학년에 다니던 아들이 당시로선 거금인 800원을 들고 남대문시장에 놀러간다고 나갔다.

돌아올 때 그의 손에는 칼 두 자루가 들려있었다. M1소총에 끼우는 대검과 군용 과도였다. 원래 집안에 칼을 들일 때는 조심하라고 했다. 어머니는 오히려 남자답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아이고, 우리 아들 장하네!"

―칼과의 인연이 그때부터 시작된 겁니까.

"제가 보이스카우트를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나무 꺾어 밥 짓고 젓가락도 나무를 깎아 만들던 때였습니다. 칼이 필요했지요."

―그 이후 칼을 모으기 시작한 겁니까.

"당시 동대문과 남대문시장에는 없는 게 없었습니다. 군수품이 그대로 시장에 쏟아져 들어왔지요. 돈이 생길 때마다 칼을 사 모았습니다. 경복고를 졸업할 때쯤에는 200개 가까이 됐습니다."

―차고 다니기도 했나요?

"고등학교 다닐 때도, 대학(성균관대 교육학과)에 다닐 때도 항상 차고 다녔습니다. 지금도 있는데, 한번 보실래요?(갑자기 그가 허리춤에서 단도(短刀)를 쑥 빼들었다. 미국 콜드스틸제 나이프였다.)"

―칼을 가지고 다니면 교사들에게 혼나지 않나요.

"교복 소매 쪽에 하나 넣고 발목에 하나 차면 밖에선 잘 보이지 않습니다. 가끔씩 선생님께 걸려 혼나기도 했지만, 왠지 칼을 지니지 않으면 불안해서요."

―원래 칼을 소지하고 다니면 불법 아닌가요.

"전 세계적으로 칼을 흉기로 분류하는 나라는 우리와 일본밖에 없습니다. 지금 있는 도검법(刀劍法)이 일제시대에 생긴 겁니다. 총도 소지하는데 칼을 흉기로 보는 건 조금 그렇지요. 원래 조선시대 문인들은 작은 칼을 소장했습니다."

―왜요?

"사악한 기운(邪氣)을 몰아낸다고 본 거지요. 호랑이해가 되면 사인검(四寅劍)이라는 걸 만들잖아요. 옛날 왕들은 사인검을 수백 자루씩 만들어 왕족과 공신, 아끼는 신하들에게 주기도 했습니다."

―오리콤과 금강기획에서 직장생활을 했지요? 마지막은 문화일보에서 1년을 보냈고. 그때도 칼을 차고 다녔나요.

"차고 다녔지요. 상사들이 신기하게 여기더군요. 전 이렇게 생각했어요. '남자의 가슴에는 한 자루 칼이 있다'고. 칼은 책임감을 상징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미팅이나 선도 봤을 텐데 여자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나요.

"이상한 눈으로 보긴 하지요. 아내도 처음에는 놀랐고요."

―사용도 해봤습니까.

"칼은 안 뽑고요, 길이가 70㎝ 정도 되는 봉(棒)을 씁니다. 제대로 배우려면 3년 정도 수련해야 하는데, 이거 하나만 있으면 무적이지요. 몇년 전에 타계한 무술고수(高手)의 아드님께 배웠어요."

―봉만 있으면 몇명이 와도 자신있다는 말인가요.

"수를 가릴 필요가 없지요. 당구를 치다 시비가 붙은 적이 있어요. 5대1로 싸웠는데도 제가 다 제압한 적이 있습니다."

―이사할 때는….

"어휴, 그때는 전부 가려야죠. 사람들이 진짜 이상하게 볼 게 아니겠어요."

그의 박물관엔 일본도, 중국검, 다마스커스검, 유럽검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은 칼날이 매서운 눈을 뜨고 있다. 이번엔 중세 유럽의 기사 같은 자세를 취했다. /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제2의 인생

직장생활을 끝낸 한정욱은 2001년 3월 8일 인사동에 나이프 갤러리를 오픈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 칼을 좋아하더니 제 길을 찾았네" 하고 빙그레 웃었다고 한다. 나이프 갤러리를 오픈할 때 그는 허가가 나오지 않아 고생했다.

법적으로 도검은 격자로 된 철창에 보관해야 한다. 그런 이유를 들어 서울경찰청은 두 차례나 그가 낸 갤러리 신청서를 반려했다. 그때 그를 도운 건 성매매와의 전쟁으로 유명해진 김강자 당시 총경이었다.

―그분과 평소 알던 사이입니까.

"나중에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요, 김강자 총경이 그랬답니다. '요즘 세상에 칼 가게가 뭐가 위험하냐. 나가서 살펴보고 별 문제 없으면 허가내주라'고요. 경관이 2명 왔는데 반응이 달랐어요. 한 경관은 '보기 좋다'고 하는데 다른 경관은 '조폭(組暴)무기고 같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나이프 갤러리를 만들기 전까지 모은 게 5000~6000자루 가깝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칼뿐 아니라 창, 도끼, 철퇴 같은 무기를 전부 합쳐 그 정도 됐습니다. 칼도 일본도, 중국검, 다마스커스검, 유럽검 등으로 종류가 많았습니다. 칼을 많이 모으다 보니 제가 칼날 세우는 법도 배우게 됐어요. 숫돌로 칼날 가는 데는 우리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힐 겁니다."

―외국 칼은 어떻게 수집했나요.

"제가 직접 구해오기도 하고, 해외 출장 가는 친구들에게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갤러리에서 전무를 맡고 있는 이 친구(김석집)가 제 고교 동창입니다. 동아건설 계열사에서 일했는데 이 친구도 몇 자루 제게 선물했고요."

―초기에 반응이 폭발적이었지요.

"이 갤러리가 규모는 100평 정도지만 인사동의 5대 갤러리 안에 포함됩니다. 지금은 경기가 나빠져서 약간 줄었지만 어린이날 같은 때는 관람객들이 200m 가까이 늘어선 적도 있습니다."

―입장료는 왜 1000원씩 받습니까.

"안 받으면 찬찬히 살펴보질 않아요. 돈 내고 들어오면 본전 뽑으려 열심히 보지요. 제가 평생 모은 건데 휙 보고 나가면 섭섭하잖아요. 1000원은 갤러리 전기료 정도밖에 안 됩니다."

―칼을 팔기도 하지요? 진짜 조폭들이 와 사간 적도 있습니까.

"원래 전과(前科)가 있으면 도검 소지 허가를 내주지 않습니다. 두목으로 보이는 분들은 부인이나 전과가 없는 부하를 데리고 옵니다. 주로 일본도를 사가는데 값을 이야기하면 '비싸네'하면서도 대부분 현금으로 사가지요."

―저쪽에 속칭 '사시미'로 불리는 회칼도 있고 부엌칼도 있는데 혹시 조폭들이 와서 단체로 구입한 경우는….

"우리 갤러리에 있는 칼은 조폭들이 사서 쓰기에는 너무 비쌉니다. 회칼과 부엌칼은 한번 만들어 본 건데 한식 조리사들이 와서 구입해 가기도 합니다."

―외국에서 들여올 때 모두 허가를 받았습니까.

"대부분이 합법적으로 들여온 거고요. 아주 일부는 편법으로 가져온 것도 있긴 해요. 제가 검도가 4단인데 외국에 나가 죽도(竹刀)를 산 뒤 그 사이에 끼워넣으면 잘 보이지 않지요. 창도 그런 식으로 가져왔어요."

―창은 길지 않나요.

"원래 길이가 2m가 넘는 물건은 기내 반입이 안 됩니다. 페덱스 같은 회사에서도 2.3m 이상은 취급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시만 해도 세관원들이 그리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창은 대부분이 나무이고 끝 부분만 금속이잖아요. 슬쩍 빼보다가 끝까지 다 살펴보지 않고 그냥 넣어버리더군요."

―만일 법대로 한다면요.

"까다로워요. 창의 경우 해당국가에서 트럭을 빌려 제일 가까운 항구로 보내고 거기서 다시 배편으로 한국에 들여옵니다. 한국의 항구에선 다시 트럭으로 제 집까지 배달되고요. 5t트럭에 창 한 자루 달랑 싣는 경우도 있어요. 한번은 300만원짜리 창을 구입했는데 운송비만 150만원이 나온 적도 있습니다."

―칼도 가격이 다양하지요.

"중동칼은 좋은 게 1만달러 정도 하고요, 일본도는 한화로 2000만원쯤 합니다. 물론 그보다 더 비싼 것도 있습니다. 일본도의 장인들은 전국에 있는데 저는 주로 나고야(名古屋)에 가서 사옵니다."

운명 같은 만남

그에게 어느날 운명 같은 인물이 나타난다. 북촌(北村) 김익홍 동산불교대 교수였다. 한국전승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지낸 그는 민속학의 보고(寶庫)로, 그의 사후 '우리 문화의 절반이 날아갔다'고 탄식한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김익홍이 갤러리를 한번 휙 돌아보더니 그의 앞에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우리 철기문화 수준이 대단했는데 다 사라지고 이제 은장도 만드는 기술밖에 남지 않았어. 지금 있는 도장(刀匠)들도 전부 사철은 쓰지 않고…."

―어느 나라 칼이 제일 좋은가요.

"아무래도 품질은 일본도가…. 중국은 무기 종류가 많고요. 병장기 종류가 수백 종은 될 겁니다. 인도, 페르시아 칼은 특이한 게 많지요. 이 인도칼 보실래요? 이렇게 팔뚝에 끼우고 쓰는 겁니다. 이쪽으로 와보세요. 이건 서양에서 기사(騎士)들이 쓰던 칼입니다. 오래됐는데도 날이 살아있지요."

―저쪽에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보던 칼이 있던데, 영화 '스타워즈'에서 본 것 같은 칼도 있고요.

"영화제작사들은 마케팅 전략으로 영화에 등장하는 칼을 한정 생산해요. 대개 3000~5000자루 정도요. 가격은 400~500달러 정도 합니다. '반지의 제왕'에서 간달프가 쓰던 칼도 있고 악당 두목 사우론이 쓰던 칼도 있습니다. 영화 'GI조'에서 이병헌이 쓰던 칼은 30만원 정도 하고요, '스타워즈'에 나온 광선검(光線劍)은 25만원 정도 합니다. 영화가 히트치면 덩달아 기념소품값이 5~10배 뛰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칼값에 관심이 많으세요?"

―북촌선생의 말이 무슨 뜻입니까.

"국내에 칼을 제작하는 곳이 15곳인데 2~3곳은 포스코에서 나온 탄소강으로 칼을 만들고 나머지는 철판을 레이저로 가공해 만듭니다. 원래 옛 칼은 사철을 녹여 만든 강철로 만들어야 합니다. 일반 제철소에서 만드는 것을 선철(銑鐵), 즉 무쇠라고 합니다. 무쇠는 아무리 가공해도 강철이 되지 않습니다."

―김익홍 선생의 말을 듣고 칼 제작을 결심했다는 겁니까.

"고구려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칼을 다섯 자루씩 가지고 다닌 걸 두고 일부에선 폼 잡으려 했다는 식으로 해석하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당시 칼은 잘못 부딪치면 부러졌거든요. 그럼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잖아요. 그래서 다섯 자루를 들고 다닌 겁니다. 강철을 만들려면 제련을 해야 해요. 바로 그 기술을 서기 600년대 우리, 신라, 백제가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게 일본으로 넘어가 지금의 일본도를 만드는 바탕이 된 거지요. 김 선생의 말을 듣고나니 이런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국가를 유지했을까 하고요."

―국가를 어떻게 유지했다는 겁니까.

"기본적으로 강철을 만들 수 있어야 칼이나 창, 쇠 화살촉을 만들었겠지요? 그게 바로 국가유지의 기본인데, 지금까지도 남아있어야 할 첫 번째 유산인 그 귀중한 기술이 왜 없어졌는지 아쉬워졌어요."

―그래서 감포로 내려간 겁니까.

"제가 평생 칼을 모으며 살았잖아요. 이제 우리 칼을 만들어보고 싶었지요. 그러려면 사철 산지(産地)를 알아야 하는데 그게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이 돼 있더군요. 감포가 그 중 한 곳이고요."

―앞서 설명을 들으니 강철을 계속 접던데 그건 철을 강하게 만들려는 이윤가요?

"포스코에서 만든 쇠에는 불순물이 거의 없습니다. 자연적으로 얻는 쇠에는 불순물이 많아요. 그 불순물이 접히는 과정에서 점점 걸러지는 겁니다. 불에 달궈 두드리는 것을 단조, 접는 걸 접쇠라고 하는데 합해서 '단접(鍛接)'이라고 하지요. (단접한 쇳덩이를 내보이며) 이거 보세요, 아주 멋지지요?"

―꼭 나무의 나이테 같네요.

"맞습니다. 일부러 보여드리려고 이렇게 만든 겁니다. 이게 4000겹이 넘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칼등에 황토를 바르는 건 무슨 까닭입니까.

"두껍게 바르느냐 얇게 바르느냐에 따라 물에 들어가 식을 때 미묘한 온도 차(差)가 생기지요. 그러면서 칼이 휘는 거고요. 담금질을 할 때 물 외에도 식물성 기름을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름은 물보다 금속 친화적이어서 휘지 않습니다. 사인검 같은 경우 기름에 담금질을 하는데 그때는 칼을 위에서 아래로, 이렇게 수직으로 집어넣지요."

―왜 칼을 휘게 하나요.

"물체를 벨 때 휘어진 칼이 더 잘 베어지거든요. 기병(騎兵)이 쓰기에도 유리하고요. 원래 우리 환두대도(環頭大刀)는 직선입니다. 고려 때부터 완만한 곡선으로 칼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2003년 양주에 제련소를 차렸지요. 부인이 뭐라던가요.

"나이프 갤러리나 제련소는 돈이 되지 않아요. 아내가 제게 그러더군요. '이것들만 아니면 내가 지금 공주(公主)처럼 살고 있을 텐데'라고요."

쇠 내림

대화 도중 한정욱이 갑자기 생각난듯 말했다. "2월 9일이 인일(寅日)인데, 2월21일, 3월 5일도 그렇고…." 그는 한 달에 한번 반드시 사철을 제련로에 넣는다고 한다. 간단한 제사를 지내고 참관인도 모집해 양주로 데려간다.

그러면서 "그날 양주에 함께 가자"고 했다. 저녁 6시쯤 인사동에서 출발하면 24시간 동안 가마에서 달궈진 사철이 불덩어리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진짜 그 모습을 기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전통 방식으로 만든 검이 몇 자루나 됩니까.

"실패한 것 제외하면 10자루 정도 됩니다. 강철 덩어리도 10개쯤 있고요."

―사철로 제작한 검을 사간 사람도 있나요.

"무속인들이나 기공(氣功)하는 분들이 다섯 자루 정도 사갔습니다. 특별한 기감(氣感)을 느끼는데 좋다고. 평균 2000만원쯤 하지요."

―지금도 매년 감포 해변에 갑니까.

"작년까지는 1년에 두 차례씩 갔습니다. 한 번에 500㎏씩 퍼왔는데 올해는 서울로 올려 보내달라고 그쪽 어촌계장님께 부탁했어요. ㎏당 800~1000원씩 쳐주겠다고 하니 좋아하시더군요."

―돈도 안 된다면 이런 일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전 명장이니 인간문화재니 이런 것엔 관심이 없어요. 일본도의 뿌리가 우리나라잖아요. 그걸 살려보고 싶은 생각뿐이에요. 이 땅의 역사를 새로 쓴다고나 할까…."

―원래 일본에서는 한 선생처럼 장인 혼자 모든 작업을 하지는 않지요.

"그렇습니다. 일본에 등록된 일본도의 장인이 700명쯤 됩니다. 그 중 활동하는 장인은 200명 남짓이고요. 보통 칼을 제작하는 건 5단계로 나뉩니다. 강철을 만드는 사람, 단접하는 사람, 갈아주는 사람, 칼 장식하는 사람, 모든 것을 세팅해주는 사람 이렇게요. 전 장식만 빼곤 다합니다."

―올 3~4월쯤 지금까지의 경험을 묶어 책을 낸다면서요.

"'고대 사철 제련 작업의 복원과 도검의 제작 연구'라는 책입니다. 물론 팔리지는 않겠지만요."

―매그넘의 한국에이전시 소속 사진가가 그동안의 과정을 전부 촬영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그분이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했다가 나중엔 정말 진지하게 했어요. 제가 책을 내고 싶어도 500만원밖에 낼 수 없다고 하니 나머지 비용은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다더군요."

―나이프 갤러리에 가져다 놓은 것 말고 소장하고 있는 건 몇 개나 되나요.

"판매할 생각이 없는 건 500점에서 700점 정도 될 겁니다. 중요한 게 많은 데 관람객들이 별 관심이 없어 창고에 처박힌 것도 많아요."

―그 검과 창들을 다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지방자치단체에서 협조만 해준다면 박물관을 차리고도 싶은데. 하드웨어(부지)만 제공해주면 전 소프트웨어(무기류)를 내놓을 수 있어요. 육사박물관과 전쟁박물관에서도 관심을 표한 적이 있어요. 제가 갤러리 접으면 기증을 고려하겠다고 했습니다."

―자제들도 검에 관심이 많나요.

"별로 안 좋아하던데요."

―그렇게 평생을 검과 함께 살아왔으니 혹시 특수부대 출신?

"전 방위 다녀왔어요. 독자(獨子)여서 5년 동안 예비군훈련받다 방위로 복무했는데 어린 고참들에게 무지하게 얻어맞았어요."

칼 이야기를 하는 내내 한정욱은 신이 난 듯했다. 뭔가 더 보여주고 싶어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어찌 보면 50 넘은 그가 철이 없어 보이기도 했고 어찌 보면 그런 순수한 열정이 잃어버린 삼국시대 검의 부활을 가져온 것 같았다.

어둑해진 인사동 거리로 나섰다. 뒤에서 한정욱의 소리가 들렸다. "제련하는 거 꼭 보러 가야 해요. 칼국수로 식사도 하시고요." 기자가 돌아보며 "칼국수도 직접 만드느냐"고 물었다. 그가 말했다. "근처에서 주문해오는 거예요.

"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2/19/2010021901080.html?srchCol=news&srchUrl=news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