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삼한(李三漢)

외로운 투쟁(1~5)

기른장 2021. 1. 1. 18:52

출처 : www.natureteaching.com/QnA/qna_20190305.htm

화전민(火田民)의 아들 이삼한(李三漢)

외로운 투쟁

신사륙판 380페이지

인 쇄 / 1983년4월30일

발 행 / 1983년5월7일

지은이 / 이삼한

펴낸이 / 서재삼

펴낸곳 / 부산문예사

인 쇄 / 태화출판사

 

외로운 투쟁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특별난 인생을 살면서 자신을 알고자 한 희망 하나로 너무나 긴 시간을 허비했다고 느낀 사람이다.

 

자기의 양심이 고통을 받을 때마다 고독한 사람들을 생각했고, 스스로 불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움도 생겼다. 불가항력의 사회 이 속에는 두려움과 고독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고민은 가지게 되어 있다. 이런 일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미래에도 남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인간은 짧은 자기 일생에 절망과 싸우며 행운과 불행을 선택하는 운명을 지니고 왔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의 약속, 그 약속은 자기가 자신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이다. 나는 아직도 자신이 자기를 구하기에 판단과 용기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이 글을 내어 놓는다.

 

천대와 멸시, 학대와 박해를 받아 본 나 자신이 경험해 보았던 현장을 글로써 고독한 운명을 지니고 절망하는 사람들한테 나 자신을 비교 삼아서 보여 주고 싶다.

 

배고픔과 질시, 추위와 외로움, 두려운 것과 억울한 마음, 나는 이런 일을 겪고서야 진정한 소망을 알게 된 것이다. 남을 위해 스스로 고통을 받는 양심이 행복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아름다운 추억이야말로 영원히 자기의 마음을 즐겁게 해 준다고 생각되었다.

 

어떤 자도 무력이나 재주만으로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수 없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추억과 영원히 같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할 수가 있다.

 

이런 것이 진리이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누구도 이 진리를 바꿀 수가 없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신에게 자신의 양심을 구해 달라고 빌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그런 곳이 되어 왔고, 사찰이 그런 곳이 되었다. 신의 이름이 알려진 곳이면 어느 곳에 가도 그런 곳이 있다.

 

지극한 사람의 정성이 영혼의 일부를 씻을 수 있을 줄은 모르지만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지 않고 구원을 받겠다는 것은 어리석음 이지 진리가 아닌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양심이다. 어떻게 살아왔건 어떻게 죽었건 그것은 문제가 안 된다. 영혼은 죽을 때 부담이 없는 양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의 삶을 통해 신의 약속을 느끼고 있다. 스스로 구하는 자를 축복한다고.

 

이 말은 인류의 존재 가치가 있을 때까지 지켜 질 것으로 믿는다.

 

아직도 축복이 없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 길을 알리고 싶다.

 

세상의 외로운 사람은 비겁한 자신과 싸워라.

 

 

 

차 례

1. 숲속의 비가(悲歌)

2. 축복받지 못한 아기

3. 입학 통지서

4. 어머니의 죽음

5. 빼앗긴 집과 땅

6. 단돈 10원의 밑천

7. 가을의 바다

8. 신문 배달원

9. 나이 어린 노동자

10. 소년 지원병

11. 못 외우는 암기사항

12. 고참 하사

13. 냉정한 사회

14. 정당에 입당하다

15. 처음 느낀 사명

16. 남을 두려워 할 수 없는 사연

17. 여분 없는 인생

18. 유신이란 혁명

19. 화려한 혼담

20. 나 장가갑니다

21. 고독한 양심

22. 빵을 구하기 위해서

23. 정의를 찾는 행동

24. 내가 해야 했던 일

25. 어려운 결정

26. 무서운 경험 속에서

27. 분노한 하늘과 바다

28. 답답한 사람들

29. 잘난 바보

30. 절망과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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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실물 '자서전 외로운 투쟁' 책과 '시집 한탄' 책을

모든 사람들에게 배부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렇게나마 웹페이지를 통해서 전달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두 권의 책은 여래가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집필한 글입니다.

단 한 번도 자신이 여래일 것이라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던 이삼한 시절의 글입니다.

단 한 번도 깨닫거나 여래가 되겠다는 시도를 해 본 적이 없던 이삼한 시절의 글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이삼한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고 여래로 출현하였습니다.

 

자서전 「외로운 투쟁」 을 두고 여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 대해 궁금하거나 나의 깨달음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읽어보면 된다. 또 자신이 큰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읽어보면 된다.”

 

이삼한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며, 그가 어떻게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고 여래로 출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그 의문을 풀고 싶은 분이 있다면,

이 두 권의 책을 읽어보시면 속 시원하게 알아보실 수 있습니다.

 

만약 귀하께서 상급 분류에 속하는 분이시라면,

이 두 권의 책을 각각 두세 번 정도 정독하시면 어렵사리 알아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글쓴이는「외로운 투쟁」과 「한탄」책을 1992년 3월에 처음 받아 보았습니다.

이후로 종이책으로 두 번 이상 읽었습니다.

그리고 「외로운 투쟁」380페이지,「한탄」145페이지,「나그네」130페이지를

키보드로 직접 타이핑하여 전자문서로 만들고 웹페이지에 올렸습니다.

이번에 「외로운 투쟁」「한탄」「나그네」「깨달음」책의 원문을 재교정하고

재편집하여 각각의 내용을 book· html· txt 전자문서로 만드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이 4권의 책 중에서 「깨달음」소개서는 기안(起案)부터 초안·교정·편집·발행까지

모든 과정을 글쓴이가 직접 수행했으므로 100번 이상 보고 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그네」내용은 그동안 50~60번 정도는 보고 읽었을 것입니다.

「외로운 투쟁」내용은 그동안 20~30번 정도는 보고 읽었을 것입니다.

「한탄」내용은 그동안 10~20번 정도는 보고 읽었을 것입니다.

 

이번에 다시「외로운 투쟁」과 「한탄」을 편집하면서 몇 번을 또 읽게 되었습니다.

「외로운 투쟁」과 「한탄」을 읽을 때마다

그동안 제 자신의 시간이 끊임없이 지나고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한 번 읽을 때마다 새삼스럽게 새로이 알아보게 되는 이삼한의 실상을 통하여

자연스레 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꼼꼼히 돌아보게 되고,

여래가 시집「나그네」에서,

아무런 잘못한 일도 없는 사람에게조차

왜,「회개하는 마음을 자신을 축복할 수 있는 첫째 조건」으로 말했는지

이제야 겨우 그 뜻을 헤아리고 수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의 다섯 가지 축복

 

하나는 회개하는 마음이요.

하나는 기도하는 마음이요.

하나는 진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요.

하나는 섬기는 마음이요.

하나는 그 뜻을 전하는 마음이다.

 

글쓴이의 의식수준으로는 이제 겨우 「회개하는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나머지 네 가지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서 「외로운 투쟁」과 「한탄」을

얼마나 더 정독해야 사람구실을 할 수 있게 될 지 아득하기만 합니다.

 

「외로운 투쟁」·「한탄」·「나그네」·「깨달음」

이 네 권의 책을 제대로 소개하기에 앞서서

글쓴이 제가 과연 인간들이 쓴 수많은 책들과 그 모든 내용들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간략하게 설명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글쓴이는 한글을 읽게 되었을 때부터 밥상 밑에 책을 펴놓고 읽으면서 밥을 먹는 아이였습니다. 밥상머리에서 밥 먹는 시간보다 책 보는 시간이 더 길었으니 야단도 많이 듣고 머리에 책 얹고 벌도 섰습니다. 초등학생 5~6학년을 교내 도서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문학전집, 위인전, 우리나라 역사, 동화와 고전, 탐정소설 등 어린이가 읽을 수 있는 책은 거의 대부분 읽었습니다. 도서관 도서구입을 핑계로 남포동 문우당서점, 부전동 청학서점에 가면, 책장에 꽂혀있는 책은 분류에 상관없이 시간제한 없이 무작정 읽었습니다.

글쓴이는 중·고등학생 시절을 모회사 사무실에서 사환으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사무실에서 숙식을 모두 해결했으므로, 학교를 다녀오면 바로 사무실에서 잡무를 했습니다.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시간이 없는 덕분에, 사무실에 배달되는 조간 동아일보·한국일보, 석간 부산일보·국제신문을 정치·경제·사회면뿐만 아니라 연재소설까지 모두 읽었습니다. 한자(漢字)는 신문을 읽는 동안 저절로 모두 깨쳤습니다. 사무실에서 구독하는 월간잡지 신동아·여성동아·주부생활도 낱낱이 읽었습니다. 어쩌다 은행에 심부름을 가면 객석에 비치된 신문·월간·주간잡지를 전부 읽어야 나왔습니다. 가끔 시내 서점에 들르면 신간을 제외하고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었습니다. 한국·세계 장·단편문학은 기본이고, 천문학·양의학·한의학·건축·공예등 관심이 가는 기술서적도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보수동 헌책방 가게에 가면 책을 사지도 않으면서 읽기만 하는 녀석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한 권을 구입하는 척하면서 열 권 스무 권을 읽으며 헌책방도 모두 거쳤습니다. 결국 부산시립도서관까지 모두 섭렵하고 나니 중·고등학생 신분으로는 더 이상 가볼 곳이 없었습니다.

짧은 머리였던 고등학생에서 머리를 기르는 사회인이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대학교 도서관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대학교 도서관에도 마땅하게 읽을 책이 없었습니다. 서울 국립중앙도서관과 교보문고, 종로서적을 찾아갔지만 별 다르지 않았습니다.

글쓴이의 글 읽는 방식은 다독(多讀)과 속독(速讀)입니다. 그리고 무분류(無分類)입니다. 길거리 간판·광고부터 부적·주문(呪文)까지, 수수께끼 책부터 백과사전까지, 음악·미술부터 고우영·강철수의 만화까지, 종교·철학부터 안동민의 심령과학까지, 도대체 읽지 않는 분류가 없는, 눈에 보이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모조리 읽었습니다.

1991년 8월 17일, 글쓴이가 여래를 처음 만났을 즈음, 제가 소장했던 서적들은 등산 관련 월간지와 전문서적들 그리고 국내외 산악인들의 단행본들이 주종이었습니다.

 

글쓴이는 네 권의 책 중에서 제일 먼저「나그네」를 1991년 6월에 처음 만났습니다.

책 제목이 하도 놀라워서(이유는 따로)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중간쯤을 살짝 펼쳤는데

 

교훈

한 사람의 죄 없는 이를 죽인 자들은

그 자손들로 하여금 6백만 명의 목숨을 바치게 했다.

 

저는 글을 보자마자 바로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책「나그네」를 보고, 이 글을 읽기 전에, 얼마나 많은 책과 글을 읽어 보았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과연 이 글과 유사한 글이나 내용을 본 적이 있는지, 유사한 표현이라도 본 적이 있는지, 도저히 제 머릿속에서는 어떤 자료도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글쓴이는 네 권의 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외로운 투쟁」·「한탄」·「나그네」·「깨달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을 읽었다 해도

이 네 권의 책을 읽지 않았다면

귀하는 결코 아직까지 한 권의 책도 읽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귀하께서 이 네 권의 책을 읽어 보신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책을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귀하는 기필코 큰 성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어떤 책이라도 펼쳐보는 순간

그 내용의 진실에 대해 바로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단단히 소개를 드려도 읽지 않으시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번 쯤은 읽어봐도 크게 손해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우연히 시간이 나서 한 번 쯤 읽어 보았는데,

그 일이 자기 자신에게 건강과 행복을 가져다주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양식이 되는지 누가 아니라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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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숲속의 비가(悲歌)

 

인적이 없는 숲속에는 한낮에도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먹을 것을 구할 길이 없었던 화전민에게는 산나물과 나무껍질(초근목피)로 하루의 끼니를 끓이는 참담한 일이 생겨나고 있었다.

 

계속된 기근과 전쟁에 대한 일들이 세상의 인심을 바꾸어 버려 산골에서까지 사람들이 낯선 사람들을 경계했고, 타민족(일본인)의 지배를 받아오던 동족끼리도 생명에 대한 경시풍조가 생기고 있었다.

 

1941년 여름철이었다.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우동부락 안우동골이란 작은 산들로 둘러싸인 외진 산골에는 누가 살다가 버리고 간 집인지 모르는 오두막 한 채가 있었다.

 

해만 지면 오두막집은 숲속의 그림자에 가려 밤을 더 어둡게 하였고 음침한 기분은 꼭 무서운 일이 금방 생길 것만 같았다.

 

어설프게 바람구멍만을 때운 단간 방 안에는 여덟 명의 생명이 움츠린 채 밤을 새워야 하니 달리 찾아갈 곳도 없었던 일가족이 당장의 고달픈 생활을 꾸려보려고 머문 곳이다.

 

병든 남편과 철나지 않은 자녀를 여섯 명이나 거느린 여인의 생각은 그래도 남편이 건강할 때는 지리산 계곡을 찾아다니며 주인 없는 산에 불을 놓고 땅을 일구고 하던 화전민 생활을 할 때가 행복했다고 여겨졌다.

 

이제는 큰 딸애가 뜯어 오는 산나물과 자신이 벗긴 나무껍질로 하루의 끼니를 짓다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허기진 사람들은 조그마한 더위에도 땀을 흘렸다. 이곳의 가족은 아침이 되면 같은 생활을 두고서도, 어제 있었던 하루를 지날 때보다 오늘을 견디기가 더 힘이 들었다. 이런 비극은 계속되었다.

 

성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이나 다 같이 머리속에는 세상의 여느 집안사람들과는 달리 절망이라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한다. 언제나 다급한 생활뿐이다.

 

아버지는 점점 더 심해지는 속병이 빨리 나아서 자리에서 일어나 가족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갔으면 싶었고, 어머니는 죽은 조상이 남편의 병을 고쳐주길 바랬다.

 

열네 살짜리 큰 딸은 이야기 속의 공주님 생각을 하며 어서 자기를 데려가 줄 사람을 기다렸다. 나머지 어린 자식들은 한결같이 쌀밥을 한 번 배부르게 먹어 보았음하고 침을 삼킨다.

 

참으로 산다는 것은 힘이 들었고 고달팠다. 감았던 눈을 뜨면 당장 암담한 현실이 눈앞에 보였다. 누렇게 뜬 얼굴, 앙상한 서로의 모습, 이런 가족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더 많은 고통을 느꼈다.

 

온종일 먹을 것만을 찾아 허둥대는 철없는 아이들의 행동이 너무 측은해 자신을 잊게 했다. 세상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금방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어머니는 이런 현실을 바꾸어 보기 위해 신을 믿기 시작했다.

 

오직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옛말을 믿고 싶었고 그런 생각들이 생활에 큰 용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육체는 가족들을 위해 내몰았고 정성은 신을 찾는 몸부림뿐이었다.

 

남이 하는 백일기도도 드려보았고 또 정성이 부족할 것 같은 생각이 들 땐 추운 날씨에도 냉수로 목욕을 하고 어두운 밤중에도 밖에 나가 혼자 산신님을 부르며 기도를 했다.

 

또 어떤 때는 용왕님을 부르기도 했고 칠성님께 빌 때도 있었다. 부처님을 보고 빌었고 조상님을 찾기도 했다.

 

어머니는 시간이 생기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신을 찾았다. 어머니의 모은 두 손 끝에는 인간의 모든 정성이 담겨져 있었다.

 

아버지는 이런 일을 보면서 세상을 한탄했고 아이들은 그냥 자신들의 머리속에 생기는 공포나 불안 같은 것을 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 속에서도 생각지 않은 일들이 닥친다. 어떻게 소문이 퍼졌는지 외진 안우동골 숲속에 긴 칼을 차고 총을 멘 사람들이 찾아왔다.

 

일행들은 겁에 질린 아이들의 얼굴을 외면한 채 엄포를 놓았다. 사상범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따지면서 숲속까지 모두 뒤진 것이다.

 

일본인 순사가 크게 보아 주는 척 순박한 어머니를 두고 따로 듣는 사람도 없는데 훈시를 했다. 그러면서도 이 집에 남아 있던 놋쇠로 된 대접(조상의 유물) 몇 개를 챙기더니 징발이란 말을 내뱉고 뺏어갔다.

 

조상님의 제사 때 밥을 담아 놓던 귀한 그릇을 빼앗기면서도 힘이 없는 사람들은 분한 마음도 잊고 있었다.

 

사람 무사한 것만이 죽은 조상이 도와 준 덕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인지 어머니는 이런 일을 당한 날은 더욱 신의 은총을 믿으며 기도에 정성을 쏟았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저희네 가문이 일어나게 축복을 내리사 소망성취 이루어 주소서.

 

이렇게 기막힌 기도는 날마다 계속되었고 지칠 줄을 몰랐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었던 것일까. 어느 날 밤이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어머니 앞에 신의 모습이 나타났다. 백발이 성성한 인자한 모습으로 말을 전했다.

 

너의 정성이 하도 지극하여 일러 주노니 내일 날이 밝거든 내가 이르는 대로 하거라. 너희가 사는 곳에서 청암 쪽으로 들어가면 지리산 어느 지점에 큰 나무가 있을 것이다.

 

그 나무 앞에 찾아가서 정성을 드리고 나면 훗날 좋은 일을 알게 되느니라.

 

그런 후 잠을 깨니 신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어두운 적막 속에서 어머니가 느낀 것은 너무나 생생한 꿈이었다.

 

아버지가 한숨을 내어 쉬며 자리에서 인기척을 했다.

 

어머니는 호롱에다 불을 붙였고 두 사람은 심상찮은 얼굴로 서로를 살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조금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니 아버지 역시 그런 환상을 보았다며 신기해했다.

 

두 사람은 금방 부풀어 오는 희망을 가지며 밤을 새우면서 상의를 했다.

 

어머니는 이른 새벽에 깨끗한 개울물로 목욕을 하고 신에게 더욱 정성을 모으며 축원을 했다. 그리고는 꿈을 찾으러 이른 아침, 허기도 잊은 채 바쁘게 집을 나섰다.

 

왕복 백여 리가 넘는 신령이 가리킨 지점까지는 여인의 하룻길로는 무리가 되는 거리였지만 기를 써서 걸어갔다.

 

내를 건너고 작은 산을 넘으며 또 숲을 지나면서 갈증과 허기를 참았다. 한 번도 다녀보지 못한 현장을 찾아가는 어머니는 한낮이 넘어서야 꿈속에서 본 현장과 같은 곳을 찾은 것이다.

 

수백 년을 묵은 것 같은 거목을 바라보며 두렵고 반가운 마음으로 기도를 올리는 손이 떨렸다.

 

산신령님 산신령님 은혜를 내려 주십시요.

 

어머니는 온갖 정성을 다해 자신의 가슴 속을 뜨겁게 하는 애원을 했다.

 

마음속에는 밀려오는 기대 때문에 피곤한 것도 배고픈 것도 잊고 있었다. 벅찬 감동 때문에 그때까지 모든 것을 잊은 어머니의 시야에 산의 능선에서부터 그늘이 지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당장 어둡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왔던 길로 되돌아섰다. 오랜 만에 몸도 마음도 훨훨 날 것 같은 가벼운 기분이었다. 복이 복이 축복이 온다.

 

정말 실감이 나지 않는 기분을 느끼면서 서둘러 오는 길은 잠시 후엔 어두움 속의 험한 길이 되었지만, 희망에 부푼 발걸음은 외진 길에서도 두려움을 이길 수가 있었다.

 

흠뻑 땀에 젖은 몸으로 집에 돌아오니 자정이 다 된 시간이다.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로 인해 속을 태우던 아버지의 마음도 어머니가 돌아오는 기척이 나자 금방 반가운 마음이 생겨 오랜 만에 밝은 표정을 지었다.

 

먼 길을 다녀온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더욱 신기했다.

 

얼마 동안은 두 사람의 마음속에 행복 같은 것이 있었고 기대감 속에서 스스로 위안을 받아 보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계절은 바뀌었고 다시 짜증스러운 일들이 하나, 둘 숲 속의 빈가에서 생겨났다. 다급한 현실들이 자꾸 눈앞에 나타나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은 기대 같은 걸 잊고 다시 옛날로 되돌아갔다.

 

어머니는 언제나 열심히 기도를 했지만 어떤 기적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더욱 난감해진 것은 어머니의 배가 점점 불러 오는 것이었다. 하루하루를 움직여야 살아갈 수 있는 어머니의 행동은 불편해진 몸으로 가족들과 함께 허기진 배를 참는 일로 힘들게 일 년을 견뎌갔다.

 

 

2. 축복 받지 못한 아기

 

1942년 봄, 유난히 날씨가 따뜻한 날이었다.

 

아침부터 나무가지 위에서 까치와 산새들이 날아와서 오두막을 에워싸고 울기 시작했다. 이런 것을 보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길조라도 생길 것인가 하는 기대가 생겼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날 어머니는 몸을 풀고 아들을 낳았다. 세상을 처음 본 아기가 울기 시작했다.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는 여느 집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보다 몇 배나 컸다.

 

허기진 배로 지쳐 있던 사람들은 이런 일에 짜증만 일어났다. 병석에 누워 있던 아버지가 제일 먼저 몸을 떨면서 기어이 한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더욱 부담감을 느꼈다.

 

그들의 현실은 정말 태어난 아기가 짐스럽기만 했다. 철부지 아이들도 이런 것을 아는지 더욱 기가 죽어버린다.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았기에 하며 어머니는 자신의 운명을 기막혀 했다.

 

아이는 하루하루 더욱 심하게 울었고 그때마다 잘 나오지 않는 말라버린 젖꼭지를 물리는 어머니는 속이 탔다. 정말 이 아기가 죽어 버렸음 하고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렇다고 아기를 어디에 가져가서 버릴 곳도 없었다. 아기가 울면 어머니의 딱한 마음도 울었다.

 

그럴 때면 역정을 참지 못하는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터지고, 옆에 있던 다섯 살 배기 여자아이가 두려운 마음 때문에 갓난아기를 들쳐 업고 산속으로 내빼곤 하였다.

 

적막한 산골짜기에서도 울음을 그치지 않은 아기의 떼쓰는 소리가 들려 올 때마다 아버지는 자식이 아니고 원수라고 누운 자리에서 혼자 한탄을 했다.

 

허기로 지쳐 있는 사람들은 따뜻한 말 한 마디를 주고받는 것도 힘이 들었다. 서로가 바라보면 상대의 얼굴들이 삭막하게만 보였다.

 

그런 속에서도 아기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배고픔을 못 참는지 울어대었다. 아버지의 성격으론 이런 일을 참는 것이 힘이 드는지 결국은 아기의 울음소리만큼이나 역정도 늘어갔다.

 

때로는 자신의 성질을 억제하지 못해 태어난 지 한 달 남짓한 아기를 방 밖으로 던져 버린다. 놀란 아기가 더 크게 울어대었다.

 

아버지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아기더러 저 자식은 죽지도 않는다고 성질을 부렸다. 그때마다 다른 아이가 아기를 떼어 안고 멀리 피했다.

 

안우동골 골짜기에도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병석에서 하루하루를 짜증스럽게 견디어 가던 아버지가 눈을 감았다.

 

어머니는 이런 일을 당하고 나니 그때서야 이제 자신이 여러 명의 자녀들과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걱정이 자꾸만 자신을 두렵게 했다. 하늘이 무심하고 죽은 조상이 무심하다고 생각되었다.

 

어머니는 자기의 신세를 생각하며 통곡을 했다. 그렇게 쉽게 가족들을 남겨 두고 눈을 감은 아버지가 무심하기도 했다. 슬프게 울고 있는 어머니 옆에서 말이 없는 아버지의 시체를 두고 아이들도 울었다.

 

산 너머 먼 동리에까지 소문이 퍼지자 친척이라는 사람들이 오고 죽은 아버지와 면식이 있었던 사람들이 찾아와서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토록이나 간절한 마음으로 어머니는 신에게 빌었는데도 결국은 더 어려운 일들만 생겼다. 단 하루도 이 가정에는 희망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살아서 짜증을 부릴 때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가족들의 마음속에서는 밤만 되면 어두움 속에서 공포가 생겼다.

 

짐승들의 울음소리에도 불길한 마음이 일어나는가 하면 날이 궂어 비라도 뿌릴 땐 귀신들의 울음소리가 귓가에서 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낮이 되어도 적막한 산속은 허기와 절망이 가득 찬 곳으로 변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배부르다고 느껴보지 못한 쌍둥이 형제가 네 살을 채우지도 못한 채 약속이나 한 것처럼 영양실조로 그 해에 죽어갔다.

 

숲속의 오두막집은 줄어드는 식구만큼이나 더욱 적막하게 변했다.

 

어머니는 신이 자기를 버리는 것이나 아닌가 싶어 두려워했다. 이러한 생활을 한 여자의 힘으로 지켜나가기에는 힘이 들었다.

 

열다섯 살이 된 딸을 입을 덜기 위해 산 너머 동리에 김씨 성을 가진 나이 많은 사람의 후처로 주어 보내니, 떠나기 싫어 우는 딸을 붙잡고 너 하나만이라도 배를 채우며 살아보라는 말로 어머니가 딸의 등을 밀었다.

 

나이든 신랑을 따라 떠나는 어린 딸의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졌다.

 

뒤에 남아 쳐다보는 동생들을 몇 번이나 돌아보며 작은 산의 고개를 넘어갔고 철들지 않은 동생들은 누나가 이제부터는 어머니 말처럼 배고픔을 면할 것이라는 생각에 부러움을 느끼기까지 하였다.

 

이런 날들이 또 지나가 버리니 숲속은 더욱 적막하게 느껴졌다. 열 한 살짜리 아들과 여섯 살 된 딸과 돌이 지난 아기와의 생활은 어머니의 마음속에 새로운 공포를 생기게 했다.

 

어머니는 남은 자식들과 함께 어떻게 하면 이 적적한 곳을 떠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밤이 되면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더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것만 같은 마음이 생겨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머물렀던 이곳에서의 생활을 지탱해 보겠다는 의욕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런 어느 날은 어머니도 결심을 했다. 외가의 주선으로 우복골이란 동리로 옮긴 것이다. 이사를 온 집은 누가 살던 집인지 오래된 초가로 주위에서는 가장 초라하고 작은 집이었다.

 

어머니는 이곳에 온 첫날부터 일거리를 찾아 분주하게 동리의 여러 집을 찾아 다녔다. 밤이면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언제나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인기척을 느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행동이 따랐다. 세상 사람들은 제 살기가 바쁜지 어느 집에서도 이 불행한 가족들을 두고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어머니와 아이들은 다른 사람의 눈치까지 보며 살자니 고달픔이 더욱 심해갔다. 동리의 궂은 일이 생기면 어머니는 그런 일을 도맡아 얻으려고 애썼으며 남자들 못지않은 노동도 척척 해내었다.

 

네 식구는 어머니가 얻어 오는 곡식으로 끼니를 끓였다.

 

세 살 배기 막내는 지친 어머니를 볼 때마다 때를 가리지 않고 칭얼거렸다. 어머니는 세 자식의 얼굴을 보면서 고달픔을 달랠 수 있었지만 일거리가 생기지 않을 때는 무척이나 마음을 태웠다.

 

겨울이 되면서 어머니는 함지박을 들고 아침이면 집을 나가는 일을 되풀이했다. 바다가 있는 진교의 포구에 나가 생선을 받아서 이 동리 저 동리를 다니며 파는 장사 길을 나선 것이다.

 

어떤 날은 얼마나 먼 길을 쏘다녔는지 만신창이가 되어 어두워서야 집에 들어오기도 했다.

 

막내는 몇 번이나 마을을 뒤집어 놓은 돌림병에도 별 탈 없이 자랐다.

 

세월은 사람들에게 생활의 변화를 가져다준다.

 

막내는 네 살 배기가 되었고 장남인 형과 누이가 국민학교가 있는 장암으로 가버린 한낮이 되면 혼자 남아 있는 막내는 어린 마음에도 외로움 같은 것들을 느끼곤 하였다.

 

동리 사람들은 누구도 타성인 막내를 귀여운 아이라고 보아 주든가 혼자 노는 것을 보고 측은하게 여겨주는 사람이 없었다. 막내는 이런 환경 속에서도 어리광이 마음속에 쌓이기 시작하였다.

 

그런 세월이 얼마쯤 계속 되었다. 일본 사람들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했고 조선이 독립을 했다는 소문이 온 마을에 퍼졌다. 들뜬 며칠이 지나갔다.

 

세상일을 모르는 어머니와 세 남매는 나라가 독립을 했다는 소리에도 아무런 감동을 느껴보지 못했다. 사람들의 말 속에서 무섭던 일본 순사들이 떠난다는 얘기는 단순히 세상이 좋아질 줄만 믿었다.

 

그래서 해방된 나라 안에서 생선이 더 잘 팔리고 일거리가 많아지길 어머니는 원했고 세 남매는 누군가 조금만 도와주었으면 하는 기대도 해보았다.

 

막내는 단순히 어린 마음 때문에 세상일 보다는 어머니의 젖꼭지가 그리웠고 의지할 곳 없는 가족들의 생활은 해방된 자기 나라 안에서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고달픈 생활을 계속했다.

 

또 막내의 작은 가슴 속에서는 왜 우리들에게는 가까운 친척이 없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할아버지나 아버지마저도 없는, 모르고 있는 자기 사정에 대하여서는 어린 소견에는 누구에게 물어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집 앞에 있는 바위에서 혼자 놀다가도 새벽에 행상 길을 나간 어머니가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먼 곳을 지나가는 것을 보면 어머니의 정이 그리워 소리 내며 떼를 썼다.

 

동리가 떠나가라고 힘껏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동리 밖까지 퍼져 나간다. 어머니는 이 집 저 집 생선을 사지 않겠느냐고 기웃거리다가 결국은 생선 함지박을 머리에 인 채 막내가 우는 집 쪽으로 달려온다.

 

어머니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떼를 쓰는 막내를 회초리로 때리지만 막내는 더욱 극성을 부렸고 언제나 어머니가 먼저 지쳐 막내를 달래곤 하였다.

 

응석을 부리려는 막내를 보면서도 함지박 속에는 생선이 아직도 가득 담겨져 있어 어머니의 마음은 더욱 애가 탔다.

 

동리 사람들이 이런 광경을 보고 어머니의 사정을 측은하게 여겼는지도 모른다.

 

막내는 철도 들기 전부터 외로움을 느끼며 자랐다. 세상에는 아무도 어린 막내의 마음을 몰랐다.

 

막내는 또 하루의 시간을 상대할 사람이 없는 가운데 혼자 보내야만 했다. 제 또래 동리 아이들이 자기 부모 앞에서 응석을 부리는 것을 보면 어린 마음에도 핏줄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왔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어머니를 붙잡는 막내의 응석이 늘어갔고 어머니는 막내의 떼쓰는 소리에 무신경 해져 갔다. 이제는 어지간히 울며 떼를 써도 어머니의 발길은 막내 쪽으로 달려오지 않았다.

 

어머니를 보고 부르는 막내의 떼는 더욱 기승이 높았고 어머니는 냉정하게 발길을 딴 곳으로 돌려버린다. 막내도 이럴 땐 어머니를 그냥 보내진 않는다.

 

'굴로 간다. 굴로 간다.'하며 물이 고여 흐르는 굴 쪽으로 악을 쓰며 뛰어 가는 막내의 두 뺨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었다.

 

이런 일을 지켜보던 동리 사람들이 수다스럽게 다섯 살이 갓 된 막내의 행동에 혀를 차며 어머니한테 귀띔을 했다.

 

이 마을에는 일본인들이 만들다 돌아간 경전선 철길을 닦던 곳에 북천과 양보를 이은 굴이 있었다. 굴속에는 수심이 2미터나 되는 물길이 길게 잇고 있었으며 물은 내를 만들고 바깥쪽으로 흘렀다.

 

막내의 발길은 깊은 수면 앞에 멈추어 울기 시작한다. 굴은 막내와 함께 운다.

 

동리 사람들이 막내의 이런 행동에 고개를 저었고 어머니가 달려온다. 어머니는 급한 김에 막내를 부둥켜안고 굴 밖으로 나온다.

 

조금 전에 냉정해 보려던 어머니의 마음도 막내의 투정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막내를 등에 업고 함지를 인 채 집에까지 올라와서는 응석을 받아주며 막내를 달래 놓고 또 장사 길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 해 내내 한낮이 되면 어머니를 그리는 막내와 한 번만이라도 냉정해 보려던 어머니의 마음은 필사적으로 대립을 했지만 끝에 가서는 어머니가 자식의 울음소리를 귀를 막아 외면하지 못했다.

 

여느 아이들이라면 생각조차 못할 '굴로 간다. 굴로 간다' 하는 억지스런 행동에 어머니의 마음은 세월이 흘러 막내가 철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런 어머니의 마음은 당장 허기와 싸워야 하는 네 식구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주어진 운명에 충실하기만 하였다.

 

그런 어머니한테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세 남매가 자라 불행하게 살지 않기를 원했고, 특히 세 남매 중 장남한테 거는 기대는 컸다.

 

날이면 날마다 거르는 날 없이 정성들여 소반 위에다 정한수 대접을 올려놓고 여러 신께 축원을 올렸다. 어머님의 축원은 시간만 생기면 되풀이됐다. 그때마다 장남의 사주를 입 속에서 되뇌며 무엇인가 주문처럼 외운다.

 

막내도 이즈음에는 어리광만 부리는 것이 아니라 제법 집안일을 거들려고 하였다. 어머니가 구해 온 지게를 지고 뒷산에 올라가 나무도 해왔다.

 

어머니도 막내의 행동을 대견해 하면서도 또 언제 떼를 쓸 것인지 몰라 마음을 놓지 못했다.

 

어느 날 동리에 낯선 중이 나타났다.

 

동리를 돌고 난 중은 동리에서 가장 작은 집에도 찾아왔다. 그때 마침 어머니가 집에 있었다.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는 제사에나 쓸 양으로 천장에 메어 둔 쌀 봉지에서 얼마쯤을 그릇에 부어서 중의 염낭에 부어 주었다.

 

염불을 외우던 중은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물끄러미 막내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저 아이의 사주를 아십니까?」

 

어머니는 아이의 생년월일을 일러주며 늙은 중을 마루로 안내했다. 어디서 왔느냐는 어머니의 인사에 중은 쌍계사에서 나왔다고 대답을 했다.

 

얼마 동안 손가락으로 무엇인가 헤아리던 중은 또 한참이나 아이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넋이 빠진 사람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마음은 왠지 동요한다. 더 이상 참기 힘들었던지 어머니가 입을 떼었다.

 

「어떠신지요?」

 

중은 씁쓸하게 웃으며 한참이나 있다가 말을 했다.

 

「저 아이를 우리 절에 맡길 수 없겠습니까?」

 

무엇 때문인지 중은 그런 말을 하였다.

 

어머니는 중의 그런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농담으로 받아 넘기는지 장남의 사주를 보아 달라고 졸랐다. 어머니의 성화에 중은 몇 마디 대답을 하였다.

 

얼마 후 자리에서 일어난 중은 대문 쪽으로 걸어가다 다시 막내를 바라보며

 

「큰 그릇이야.」

 

하는 의미 있는 한 마디를 남기며 다른 마을로 가버렸다.

 

시간이 바뀌면서 막내도 동리에서 제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리며 어머니를 찾지 않고도 하루해를 넘겼다.

 

이런 날들이 많아질수록 막내의 가슴 속에는 무엇인가에 대한 그리움을 느꼈다. 막내와 어울린 아이들의 성바지가 김씨들뿐이었고 이씨 성을 가진 아이는 그 속에서 막내뿐이었다.

 

원래 이 동리는 김씨 성바지의 집단 부락이었지만 막내는 그런 것을 알 턱이 없었다. 동리 어른들이 길을 가면 같이 놀던 애들이 인사를 했고 인사를 받는 사람 또한 무슨 말이든 하고 간다.

 

다른 애들이 인사할 때 보면 아저씨도 많고 할아버지도 많았다. 이런 것이 막내는 내심 부러워서 어린 마음에도 핏줄에 대한 그리움을 느꼈다.

 

김씨 성의 아이들이 얼마나 부러운지 이씨 성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자신이 꼭 죄 지은 사람처럼 느껴져 어린 막내의 마음은 못내 섭섭한 것이다.

 

왜 우리 가족은 친척이 없을까, 세상이 얼마만큼 큰지, 또 사람들이 얼마만큼이나 살고 있는지 그것을 모르는 막내로서는 어머니를 붙잡고 의문스럽게 물어보지만 언제나 어머니의 대답은 이가도 김가보다 더 많이 살고 있다고만 말을 했다.

 

어머니의 말에 막내는 섭섭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그곳이 어딘데?」

하며 어머니가 가리키는 하늘 저편을 바라보면서도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아 짜증을 내며 정말 그런 곳이 있었으면 하고 혼자 기대를 했다.

 

마을 사람들은 가난하고 타성바지인 막내에게 호감을 보여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막내는 세상에 태어나 어떤 아이보다도 먼저 배고픔을 느꼈고 외로움을 느꼈다.

 

철부지인 아이들은 누가 가르쳐준 소리인지 모르지만 그즈음 막내를 보면 '호로자식' 이라고 놀렸다. 처음에는 그 말의 뜻을 몰랐다.

 

짓궂은 아이들이 손가락질까지 해가면서 '애비 없는 호로자식' 이라는 말에 직감적으로 자기에 대한 좋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막내는 알아 차렸다.

 

막내는 그런 일이 생기면 집을 향해 뛰었다. 눈물이 가득한 얼굴을 어머니에게 들이대며 더듬거리는 말로 따지듯이 말을 했다.

 

「다른 애들이 나보고 호로자식이라고 놀려, 애비가 없으니깐 호로자식이라 그래!」

 

하며 어머니에게 대어 들었다. 주름진 어머니의 얼굴은 잠시 화를 내는 척 했지만 정작 놀린 애들을 보고는 그러면 안 된다고 좋은 말로 타이르곤 할 뿐이었다.

 

머니가 이러니 막내가 아이들과 어울리다 무슨 실갱이라도 생기면 애비 없는 호로자식하며 극성스럽게 놀렸다. 이런 순간에는 꼭 죄 지은 사람처럼 막내의 얼굴이 붉어지고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곤 했다.

 

감정을 참지 못해 달려가는 막내의 뒤통수에 대고 동리 아이들이 합창이라도 하듯 신나게 외쳐대면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막내는 끝내 울어버리곤 했다.

 

어머니가 막내를 놀려대는 동리 아이들 집에 다니며 일도 해주고 생선도 팔고 하기 때문에 이러한 수모를 참고 견디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리 꼬마들이 놀려대는 소리가 듣기 싫어 여러 날을 혼자 집 앞의 바위에서 친구 없이 놀 때는 왜 나는 아버지가 없을까 하며 아버지의 필요성을 느꼈다.

 

아버지가 저 세상에 계신다면 금년의 제사 날에는 꼭 살아서 돌아오길 빌어보기도 했다.

 

막내는 여섯 살이 되면서 몸에 맞는 지게를 지고 야산을 오르내리며 나무를 해왔다. 제법 땔 나무를 해다 나르는 막내가 어머니 눈에는 다 큰 애처럼 보였다.

 

누나가 가르쳐 준 노래를 부르고 먼 산과 산 사이에 이는 봄철의 아지랑이 속에서 그는 자신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면서부터 알 수 없는 그리운 마음이 몰려들 때에는 뺨 위에 눈물이 저절로 흘렀고, 혼자서 알아낼 수 없는 의문이 생길 때에는 시간이 좀 빨리 흘렀음 하고 지루함을 느꼈다.

 

무덥던 여름, 무척이나 추웠던 겨울이 가고 개울가의 얼음이 녹는 봄이 왔을 때 막내의 집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맏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일거리를 찾아 부산으로 떠났다. 어머니는 집을 나간 맏이를 위해 언제나 축원을 하였다.

 

부처님, 용왕님, 칠성님, 산신님, 조상님에게 자식을 위한 축복을 비는 일이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한테는 위안이 되고 있는 것 같았다.

 

 

3. 입학 통지서

 

우리는 이제 세 식구가 집에 남게 되었다.

 

한낮이 되면 집에는 사람이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삼십 리 길인 포구로 생선을 받으러 나가고 누나는 학교에 가 버린다.

 

막내도 이때는 제 몫을 하기 위해 땔감을 구하러 작은 지게를 지고 산으로 갔다.

 

마을 사람들의 입방아 속에서 이런 일이 박석골 우동골 댁도 살게 되었다는 말들처럼 어머니의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또 그 해 봄에 막내한테도 국민학교의 입학 통지서가 날아왔다. 막내가 들어가야 할 학교는 형이 다녔던 장암의 국민학교였다.

 

이런 사실을 안 막내는 책보를 어깨에 메고 뛰어가는 다른 아이들의 행동을 생각해 보며 머지않아 그리 될 자신을 그려보곤 했다.

 

이런 생각이 며칠간 계속 되다가 막내는 정말로 국민학교 3학년짜리 누나를 따라 10리가 넘는 길을 걸어가서 입학을 하게 된 것이다.

 

같은 또래의 낯선 아이들과 줄에 끼이고 보니 막내의 모습은 금방 표가 났다. 허약한 체구, 남루한 의복이 그곳에 모인 아이들과 차이가 나는 생활을 말하는 듯 했다. 그러나 막내는 아직 어린 탓에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린 막내가 느낀 것은 여러 명의 같은 반 1학년 아이들의 성바지가 김씨가 아닌 다른 성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막내는 이가라는 성도 괜찮은 성씨라는 것을 학교에서 알게 된 것이다.

 

하루하루 등교길은 낯이 익어갔고 혼자서도 그 길을 뛰어 다니게 되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이즈음에 와서는 어머니의 얼굴에 생기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모든 걸 참고만 살아왔던 어머니의 마음에 환희를 가져다 준 일이 생겼다. 부산으로 보내놓고 걱정을 했던 장남한테서 소식이 전해 온 것이었다.

 

생전 처음 자기에게 부쳐 온 편지를 받아 놓고 문맹이라 봉투의 글자 한 자도 알지 못하면서도 어머니는 우체부가 아들한테서 온 편지라는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흥분을 하였다.

 

어머니의 마음속에는 별의 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편지를 보낸 아들이 그냥 대견할 뿐이었다.

 

두근거리는 가슴 속에다가 한 장의 편지를 감춘 채 용하게도 한나절을 넘겼다.

 

들판에 해가 지고 일하던 사람들이 어두움을 피해서 집으로 돌아갔을 때 어머니는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정신없는 사람처럼 집을 나갔다.

 

막내나 누나는 오늘따라 어머니의 행동이 이상했지만 영문을 몰랐다.

 

어머니는 평소 자주 품을 팔던 노서기(盧書記)의 집으로 달려갔다. 노서기는 이 동리에서 가장 유식한 전직 면서기였다.

 

노서기 집의 가족들은 마루에서 저녁을 들고 있었다. 노서기 부인이 자기 마당에 들어서는 어머니를 보고 인기척을 하며,

「우동골 댁이 웬일이오.」

하고 정색을 한다.

 

「뭘 좀 봐 달라고 부탁하러 안 왔는기요.」

하는 말소리는 여느 때 와는 달랐다. 노서기집 식구들이 마루로 올라오라고 권한다.

 

손에 쥔 봉투를 보고 누구한테서 편지가 왔을까 하고 노서기 집 가족들은 우동골 댁 집에도 누가 편지를 보낼 사람이 있나 싶어 궁금해 하는 눈치들이었다.

 

머니가 먼저 큰 자식 놈한테서 편지가 왔다는 말을 끄집어내었다. 노서기 집 가족들은 그때야 그 아들이 생각되었다.

 

촌사람들이라 편지 한 장에도 모두들 대견한 눈치였다. 저녁상을 물린 노서기 가족들은 편지의 내용이 궁금한지 모두 마루에 엉거주춤 앉아 있었고, 희미한 호롱불의 심지를 돋우게 한 노서기가 돋보기안경을 끼고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어머님 전상서... 」

 

노서기가 읽어 내려가는 편지의 첫 서두부터 어머니는 감격했다. 연방 고개를 끄덕거리며 안절부절이다.

 

노서기가 편지를 다 읽고 나니 그게 다냐고 어머니는 확인을 하고는 다시 한 번 읽어 달라고 청을 했다. 노서기는 여러 사람 앞에서 한 번 더 편지를 읽었고 어머니는 아들보고 따지듯 편지 내용을 캐묻고 하였다.

 

노서기 마누라가 우동골 댁은 아들을 잘 두었다는 말을 하자 어머니는 지금까지의 고생이 금방 다 사라지는 기분이 됐다.

 

온몸이 뜰 것만 같은 그런 마음은 생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처음으로 행복을 느꼈다. 이제껏 이렇게 자식 키우는 보람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집에 돌아와서도 막내와 딸을 보면서 이것들은 언제 커서 자기 마음을 이렇게 기쁘게 해 줄 것인가 하면서도 이것들은 힘들 것이라는 마음이 들어서 어머니의 마음속에는 장남이 더욱 대견했고, 그 놈이 애미한테 편지까지 부치게 된 것은 죽은 조상님이 보살핀 덕분이라고 밤이 깊어 잠이 들 때까지 혼자서 조상님 치하의 말씀만 했다.

 

다음날부터는 틈만 나면 장남의 이름을 외우며 신에게 더욱 간절한 축원을 드렸다. 어머니의 기도는 온 정성을 손끝에 모아 빌고 또 빌었다.

 

편지 속의 잘 있다는 말들은 자신이 지극히 기원했기 때문에 용왕님이나 칠성님, 산신님께서 도와주어서 된 일인 줄 알았고, 또 죽은 조상이 보살핀 덕이라고 믿게 되었다.

 

장남에 대한 어머니의 기대는 오직 하나의 희망이요 자신의 전부였다. 막내나 어린 딸이 있어도 두 남매한테는 기대 같은 것이 생기지가 않았다.

 

산골의 동리에는 또다시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부는 겨울이 왔다.

 

막내는 이렇게 날씨가 추워지면 설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벌써부터 동리의 같은 또래의 아이들은 손가락을 꼽으며 밤을 세고 있는 것이다.

 

떡도 먹고 제사도 지내는 날, 막내가 설날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 날만은 아무 음식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기다림 속에서 시간은 흘렀고 애를 태우던 아이들의 설날은 눈앞에 다가왔다.

 

그믐날 오후에는 돈을 벌어 오겠다고 집을 떠났던 장남이 시골에서는 흔치 않은 근사한 옷을 입고 과자 나부랭이와 과일 바구니를 들고 집을 찾아왔다. 어머니는 정말 자식을 보고 신바람이 나는 듯 분망하게 설쳤다.

 

막내는 형이 들고 온 보따리에 신경이 써졌다. 어머니는 보따리를 풀어 막내더러 내일 제사를 지내고 많이 준다며 박하사탕 한 알을 집어 주었다.

 

막내는 어머니가 건네 준 사탕 한 알을 입에 넣지도 못하고 한참 동안이나 아끼다 살짝 혀에다가 대어 보았다. 달콤하고 싸아 하는 박하냄새! 어린 막내는 보물처럼 사탕을 아꼈다.

 

입술에 침이 모이면 또 혀를 내밀어 사탕을 핥아보았다. 지금까지 먹어본 엿보다는 훨씬 맛이 좋았다.

 

어머니는 막내의 눈치를 알았는지 사탕 꾸러미를 막내의 손길이 닿지 않는 높은 선반 위에다 올려놓았다. 막내의 머리속에는 입 속에서 녹는 박하사탕 생각으로 가득 찼다.

 

왜 이렇게 그믐날 밤이 긴지, 잠이 잘 오지 않는 막내의 머리속은 지루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하룻밤을 힘겹게 지내고 나니 설날 아침에는 동리에서 가장 가난하고 초라한 박석골의 초가집에도 조상들을 위해 제사상이 차려졌다. 오래간만에 푸짐한 음식들이 상 위에 올랐다.

 

형이 부산에서 사온 과일과 과자가 상 위에 놓여 있었다. 평소에 자주 허기를 느끼던 막내는 곧 제사만 지내면 저 음식들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그 날은 여러 가지 음식들로 배가 부르게 포식을 했다. 또 어머니의 말에 따라 날씨가 추운데도 여느 때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사탕 몇 개가 든 호주머니를 만지며 형의 뒤를 따라 성묘 길을 나섰다. 막내에게는 즐겁고 신나는 설날이었다.

 

막내는 자고새는 설날이 안타까웠고 그래서 하늘 위의 해를 붙들어 두고 싶었다. 일 년에 설날이 몇 번 더 있었음 하고 바라기도 했다.

 

설을 고향 집에서 보낸 형은 부산으로 떠나버렸고, 어머니는 동리에 일이 없는 날이면 진교의 포구로 생선을 받으러 아침 일찍 나갔다.

 

막내는 십 리가 넘는 길을 뛰어다니며 시골 국민학교에서 생기는 일들에 익숙해져 갔다.

 

어느 날 수업시간에 선생님은 우리나라 대통령이 이 승만 박사라고 아이들한테 이야기를 했다.

 

막내는 우리나라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분이 이 승만 박사라는 선생님 말씀에 박사라는 소리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지만 성씨가 이씨인 것에는 가슴이 뛰었다. 김씨끼리 일가가 된다면 이씨인 그분도 일가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사연 때문에 선생님께서 들려주는 이승만 박사의 이야기는 어느 시간보다도 재미있고 신이 났다. 지금까지 김가가 더 좋은 성씨라고 부러워하던 마음속에 이가 성이 이젠 더 좋은 성씨라고 믿었다.

 

대통령의 성씨가 이씨라는 사실이 어린 마음에 용기가 돋아나게 했다. 김씨 성을 가진 동리의 아이들 앞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대통령 자랑을 했다. 괜히 우쭐한 기분에 동리 아이들한테는,

 

「대통령이 우리 할아버지래, 우리 어머니가 그랬는데 언젠가는 우리 집에 올 거래.」

 

지금까지 신나는 이야기가 없어서 언제나 시무룩해 있던 막내는 오래간만에 허풍을 쳤다.

 

사실을 모르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은 대통령이 할아버지라는 막내의 말에 모두들 부러운 눈치였다.

 

이런 것을 느낀 막내는 정말 이가 성을 가지게 된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김가 성을 가진 아이들에 대해서 지금까지 부러워하던 마음을 씻어버렸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정말 신이 나는 순간들이었다.

 

나는 이가여, 나는 이가여 하며 자꾸만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소리를 삼키며 아이들 앞을 뛰어갔다. 다른 때는 막내를 놀리던 아이들이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막내의 행동에 기가 죽었다.

 

한동안 막내는 배고픈 것도 참으면서 행복해 했고 어떤 일에도 짜증이 나지 않았다. 나무 짐도 커졌고 어머니를 성가시게 하지 않았다. 영문을 모르는 동리 사람들은 삼한(三漢)이가 철이 들었다고 입방아를 찧었다.

 

하늘은 더욱 높고 푸르게 보였으며 세상은 막내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 이때는 막내도 처음으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희망과 포부를 가져보았다.

 

생각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머리속에 담으면서 산촌아이의 가장 큰 꿈을 찾아보았다. 순경, 국민학교 선생, 면서기, 시골 동리에서 보는 인기 있고 높은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국민학교 1학년짜리의 희망은 작은 것들뿐이었지만 어린 생각에는 동리 사람들도 자신이 그쯤만 되면 삼한이를 위로 쳐다볼 것이고 어머니도 그때는 형보다 더욱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우쭐댔다.

 

이러한 가운데 시간은 변하여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한참 무덥던 때 동리에는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어른들의 얼굴에는 걱정이 있는 것 같이 보였고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날마다 달라지는 이야기는 어느 쪽이 이겼고 어느 쪽이 졌다는 소문들이다.

 

칠월이 지나면서 전선은 이제 우리 마을로 점점 가까워지는 모양이었다. 먼 곳에서는 천둥소리 같은 포성이 은은하게 울려왔고 굉장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비행기를 볼 수도 있었다.

 

동리의 나이 많은 사람들은 걱정들을 하였고 전선의 이야기는 온통 어느 쪽에서 죄 없는 사람들을 많이 잡아다가 죽였다는 무서운 소리가 퍼지기 시작하였다.

 

부산으로 갔던 형도 전쟁 때문에 집으로 올라 왔다.

 

하동읍에 빨갱이가 들어 왔다는 소문이 퍼지던 날 우리 마을에도 낯선 사람들의 피난 행렬이 지나갔다. 그런 다음날 저녁나절이 되면서 드르럭 드르럭 동리 뒤의 국도 변에서 총소리가 났다.

 

전쟁이 어떤 것인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과 궁금증 많은 사람들이 국도가 보이는 산의 언덕으로 올라가더니 얼마 있지 않아 겁먹은 얼굴을 하고 돌아왔다.

 

모두 하는 말이 미군들이 부산 쪽으로 밀려가고 있는데 자동차가 끝없이 신작로(국도)에 줄을 잇고 있다는 이야기들을 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지서의 순경들이 도망을 가고 지서가 비어 있다는 소리들이다.

 

들리는 이야기마다 어른들한테는 우울하고 불안한 말뿐이었다.

 

동리사람들은 모두들 그런 이야기에 더 귀를 곤두세우며 확실한 것을 알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다음날 한낮에 우리 동리에는 낯선 사람들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 순간 어저께까지의 산골인심이 뒤바뀌고 있었다.

 

하루 밤이 새고 나니 동리에서 기세가 당당하던 유지들이 맥을 못 추고, 남의 집 머슴을 살던 사람 중에서 어떤 젊은이가 완장을 차고 동리를 다니면서 모두 해방이 된 것이라고 떠들었다.

 

간간히 비행기가 날아와서 국도 변에다 폭탄을 떨어뜨릴 때는 그 소리가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들려와 처음 이런 일을 당해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두렵게 했다.

 

비행기는 밤낮 없이 우리 동리의 상공을 지나갔다. 어떤 날은 아침이 되면 동리의 사람들이 무슨 소문을 들은 탓인지 피난을 서두르지만 오후가 되면 집으로 돌아왔다.

 

누구의 입에선가 흰옷을 입고 다니면 비행기가 총을 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은 모두 흰옷을 입고 피난을 다녔다.

 

그런데도 어느 동리에서는 비행기에서 쏜 총격에 여러 명의 양민이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사람들은 비행기 소리만 들어도 두려움을 느꼈다.

 

어느 날 우리 가족도 처음으로 피난길에 나섰다. 목적지도 없이 나선 길은 갈 곳을 정하지 못해 온종일 쏘다니다가 종래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인심은 점점 흉흉해졌다. 누군가가 그 전날 지서 자리로 잡혀 갔다는 소리고, 또 어떤 사람이 매를 많이 맞아서 반죽음이 되었다는 말들이 나돌았다.

 

연일 지서자리에서는 붙잡아 간 사람들을 장작개비로 사정없이 팬다든가 고춧가루 물을 먹인다는 것이다. 시골 사람들은 이런 소문을 듣고 자기도 잡혀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공포에 떨기 시작하였다.

 

동리 부자들은 소를 마구 끌고 가는 사람이 있어도 평소와는 달리 말 한 마디 못했다. 완장을 찬 사람들은 힘이 있어 보였고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죽을상을 짓고 있었다.

 

부락의 회관에는 연일 무슨 모임이다. 무슨 회의다 하고 사람들을 모았다. 김씨 동리의 철부지들은 누가 가르쳐 준 것인지 붉은 군대의 노래를 신나게 불러대었다.

 

노래의 가사가 나의 마음을 외롭게 했다. 인민위원이니 하는 북쪽 편을 드는 사람들은 그런 철부지들을 대견하게 보았다. 나의 마음속은 무더운 여름의 날씨만큼이나 덥고 거북해 있었다.

 

어느 집의 젊은 아들이 의용군에 지원을 했다는 소문과 젊은 사람들은 의용군에 나가야 한다는 소문이 동리에 퍼진다.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인민군의 선전과는 달리 전쟁은 달이 지나도 끝나는 기미가 없었다. 부산까지 밀어붙였다는 소문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무더위가 한 풀 꺾인 듯한 어느 날 새로운 소문이 동리에 퍼지면서 또 세상의 인심이 변했다. 빨갱이들이 도망을 갔다는 소리가 마을에 퍼졌고 지서 자리에는 예전에 자취를 감추었던 순경들이 돌아왔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때부터 다시 누가 맞아서 똥물을 넘겼다는 말이 나돌았다. 누가 잡혀가서 죽었다는 소문들은 순박한 촌사람들을 겁부터 나게 했다.

 

전쟁 통에 가장 피해가 적은 집은 동리에서는 우리 집이었다. 우리 집은 어떤 쪽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 힘없는 것도 이럴 때는 복이 되었다. 어머니는 이런 것이 조상님의 보살핌 때문이라 했다.

 

인민군이 물러간 동리에는 비행기에서 총을 쏘지 않았다.

 

전쟁을 치른 자리에는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전선은 점점 북쪽으로 멀어지면서 시골의 인심은 옛날로 되돌아갔다.

 

장성한 자식을 둔 부모들은 그들의 자식들이 군대에 징집되어 가는 것을 보고 걱정들이었고 그런 와중에 우리 집에서는 형이 다시 돈을 벌어 오겠다고 부산으로 떠났다.

 

어머니는 전쟁이 나기 전처럼 포구로 생선을 받으러 다녔고 나와 누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의 작은 일들을 도맡아 했다. 우리 가족은 전쟁의 기억을 씻고 옛날처럼 일들을 시작했다.

 

금방 그 해가 지나갔다. 북쪽에서는 전쟁이 한창인데도 설날을 맞이했다.

 

형이 다시 고향을 찾아왔다. 이번에는 미군들이 먹는다는 과자인 초코렛도 사가지고 왔다. 우리 가족의 얼굴에는 모두 생기가 살아나고 있었다.

 

박석골의 우리 집에 1951년의 달력이 걸린 것이다.

 

금방금방 날짜들이 넘어 갔다. 형편이 조금 나아진 탓인지 하루의 해가 점점 짧아지는 것 같았다.

 

그런 봄에 어느 날, 우리 집에 편지가 왔다. 어머니는 먼저 번처럼 편지를 받고서도 어떤 예감이 있었던지 반가운 마음이 보이지 않고 침울해 있었다.

 

이번에도 저녁 무렵에 노서기 집을 다녀온 어머니는 이제 수심이 가득 찬 표정 속에서 한숨만 간간히 토하며 혼자 애를 태웠다.

 

어쩌면 곧 군대를 가야 한다는 노서기의 말과 부산에서는 검문검색이 심하여 건장한 학생들은 무조건 입대한다는 편지 내용 때문이었다.

 

그 날부터 어머니는 더욱 광신적으로 신들 앞에 자신의 소망을 드러내 놓고 애원을 했다. 그러다가도 가끔 씩 초조해 한다. 정신 나간 사람마냥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는 일들이 잦아졌다.

 

모든 희망을 장남한테 걸어 놓고 살아 온 어머니에게는 형의 편지는 곧 어머니에게 절망을 가져다주었다. 전쟁을 경험한 어머니의 마음속에는 징집 그 자체가 죽음이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젊은 아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전쟁터에서 죽는 꿈을 자주 꾸었고 산촌의 순박한 여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상들이 눈만 감으면 어머니를 괴롭혔다. 어머니의 얼굴이 수심으로 수척해져 갔다.

 

어머니는 부산에 다녀오겠다고 두 남매를 남겨두고 어느 날 집을 나섰다.

생전 처음 도시에 나간 어머니는 아들을 보기 전에 수많은 인파와 피난민을 보았다. 어머니는 이런 부산에서 보게 된 광경 때문에 마음속에는 더욱 공포가 생겼다. 어머니가 장남을 만났을 때는 이 자식을 꼭 전쟁터에서 잃을 것만 같았다. 자식의 마지막 임종을 보는 것 같은 장면이 눈만 감으면 떠올랐다.

 

부산을 다녀온 다음부터 어머니의 마음속은 근심이 깊어져 얼굴이 수척해져 갔다. 어머니는 자식을 생각하게 되는 고통 때문에 자신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리던 어머니가 급기야는 자리에 눕고 말았다. 어머니의 몸에 병이 생긴 것이다. 그것도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병이었다.

 

 

4. 어머니의 죽음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어린 두 남매는 어머니가 하던 집안일을 꾸려 보기 위해 열심히 일하였지만 아이들한테는 어려운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곧 일어날 것 같은 어머님의 병은 점점 더 심해 갔다. 누나는 학교를 그만 두었고 아홉 살이던 나도 결석을 많이 하였다. 비로소 우리는 어머니가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병이 깊어 고통을 참지 못해 괴롭게 몸을 떨어대는 어머니를 보면 옆에 있는 철부지의 생각에도 어머니의 병을 빨리 낫게 해야 되겠다고 걱정을 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안 볼 때 굴뚝 뒤에 가서 두 손을 모아 절을 했다. 우리 어머니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럴 때는 이전에 어머니가 하던 모습을 생각하며 용왕님, 산신님, 조상님을 다 불러보곤 했다. 이렇게 정성을 다하면 나의 생각에는 어머니의 병이 금방 다 나아서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현실은 생각하는 반대 반향으로 나타났다. 어머니는 잘 먹지 못하는 데도 배는 바가지처럼 불러왔다.

 

가까이서 이런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면 세상을 모르고 살아오던 어린 나까지도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대로 두면 죽을 것이라는 동리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우리는 어떻게 하더라도 어머니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동리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고 먼 곳에 있는 한약방에 가서 배 아플 때 먹는 약을 지어와 먹여도 어머니의 병은 나을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계속 가쁜 숨을 쉬었다. 이제 대소변도 우리 남매의 손으로 받아 내어야 했다. 우리는 남이 하라는 대로 그대로 다 했다.

 

아랫마을인 하성부락에서 제법 소문이 난 여의사도 데려왔다. (실제로는 어느 곳에서 간호원을 지냈다는, 주사 정도는 놓을 수 있는 여자였다.) 병원이 없는 산촌에서는 무당만큼이나 소문이 난 의사다.

 

그 여자는 나의 안내로 검은 가방에 도구를 챙겨 들고 어머니를 진찰하러 왔다. 그녀는 요상하게 생긴 물건인 청진기를 몸에 대고 진찰하는 흉내를 내었다.

얼마 후에는 가방에서 큰 주사기를 끄집어내더니 어머니의 치마끈을 끄르게 한 후 자리에 앉히고는 우리에게 붙잡게 하여 바가지처럼 튀어나온 어머니의 배에다가 사정없이 주사바늘을 꽂아 버렸다.

 

주사 바늘구멍에서는 맑은 물이 쪼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나온 물이 한 요강에 차고도 남음 직했다. 그리고는 주사 한 대를 어머니 팔뚝에 놓았다. 그러자 어머니의 얼굴은 금방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어머니도 이젠 살 것 같다고 말을 하였다. 바가지처럼 불렀던 배도 점점 가라앉았다. 옆에서 이런 것을 지켜보는 우리 남매는 어머니의 병이 다 나은 줄만 알았다.

 

그 날은 미음을 조금 먹기까지 하였지만 그것도 그 날뿐 다음날이면 어머니는 또 괴로워하였다. 며칠이 못되어 배는 다시 불러오고 그전처럼 고통스러워하였으며 어머니의 얼굴은 점점 여위어만 갔다.

 

이즈음에 설날이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다른 때처럼 즐거운 마음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병이 나아서 빨리 일어나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긴긴 겨울, 설날을 5일 앞둔 날이었다.

어머니는 맑은 정신이 드는 듯 하더니 이런 말을 했다.

죽은 할머니가 와서 자꾸 가자고 한다고 하면서 한참이나 멍청하게 우리들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눈을 감았다.

얼마 되지 않아 몸에서는 제법 큰 소리가 났다. (숨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누나가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어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누나는 어머니의 몸 위에 쓰러져 마구 울어댔다. 나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큰 소리를 내어 울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구슬픈 울음소리는 이웃의 잠을 깨게 하였고, 한 사람 두 사람 동리 사람들이 어머니가 죽은 것을 눈치를 채고 찾아왔다.

 

별로 친척이 없는 우리 집 일을 동리 사람들이 주관이 되어 일을 치렀다. 설날이 며칠 남지 않았기 때문에 장례는 더욱 서둘러져야 했다.

 

제일 먼저 사람들은 부산의 형님에게 전보를 쳐 주었다. 그리고 알 만한 곳에는 부고장도 내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집 안에서 왁자지껄하였으나 나는 나이 때문인지 어머니의 죽음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설날 때문에 더욱 서둘러진 장례는 3일 후에는 어머니의 몸이 초라한 상여에 떠메어져서 동리 뒤의 작은 산에 묻혔다.

 

북적거리던 사람들이 돌아가고 나서부터 나는 어머니가 안 계신 고아임을 느끼게 되었다.

 

설날이 와도 즐겁지가 않았다. 모든 것이 쓸쓸하고 외로웠다. 아무도 나의 응석을 받아줄 사람이 없었다.

 

그때 나의 나이는 겨우 10살 난 어린아이였다.

 

날마다 서러운 일만 생겼다. 당장 나의 꼴이 초라해졌고 기가 죽어버렸다. 어떤 일을 당해도 의지해 볼 곳이 없으니 어린 마음에도 고독한 생각뿐이었다.

 

동리의 힘센 아이들은 아무 곳에서나 나를 동네북처럼 차고 쥐어박았다.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보호자가 없는 아이, 친척이 없는 아이는 억울해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던 것이었다.

 

동리의 아낙네들조차도 내가 지나가면 저희끼리 혀를 찼다. 서럽고 배고프고 천대받는 세월이 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동물처럼 주위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어머니와 아버지의 생각을 자주 하게 됐다.

 

명절이 되어도 쓸쓸했고 이제는 영영 내 마음 속에서 즐거운 날들이 사라진 것 같았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발길을 옮기기가 싫었다. 학교도 자주 결석을 하였다.

 

이제는 조그마한 꿈마저도(국민학교 교사가 되고 싶었던) 사라져 버렸다. 나의 몸이 자라서 동리에서 가장 일을 잘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나는 이런 형편으로 하여 국민학교 6학년 무렵에는 더욱 학교 공부를 소홀히 했다.

 

봄이 가고 또 여름이 왔다. 나의 꼴은 더 초라해져 갔다. 하루하루 늘어나는 것은 눈치뿐이었다. 밤이 되면 공부방이 아닌 동리의 사랑방 머슴들 속에 끼었다.

 

나는 나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다.

 

가을이 와도 나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조금 짓던 농사일을 위해 온종일 지게를 져야 했고 견딜 수 없는 고된 일을 하면서도 투정조차 부려 볼 곳이 없었다.

 

겨울이 왔다.

 

나는 홑바지만 걸친 몸으로 추위를 느껴야만 했다. 양말조차 신고 다니지 못하는 발은 때가 끼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손이 트고 피가 흘렀다. 어린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겨울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나는 스스로 나의 곁에 온 겨울을 방어할 방법이 없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이제 나에게는 희망이라는 것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스스로를 위해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방법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 우리의 앞에 지금까지보다 더 큰 시련의 날들이 닥쳐오고 있었다.

 

건너 마을에 살던 김 영감이라는 사람이 우리들한테 전갈을 보내왔다. 누나보고 꼭 건너왔다가 가라는 것이었다. 저녁나절 누나는 김 영감이 왜 우리한테 전갈을 보냈을까 의아해하면서도 그 집으로 찾아갔다.

 

김 영감은 누나를 자기네 방안까지 들어오게 해서는 긴 담뱃대만 빨았다.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무척이나 거북한 표정을 지어 대었다. 입 속에서 담배 연기를 내 뿜었다. 그런 다음에야 어렵게 말을 끄집어내었다.

 

우리 남매가 살고 있는 집과 밭뙈기 그리고 논을 내어 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큰 인심이나 쓰는 듯 두어 달이란 기한까지 부쳤다.

 

누나는 영문을 몰랐다. 김 영감은 어떤 증서를 누나 앞에 내어 보였다. 그건 오빠가 부산에서 김 영감 아들한테서 돈을 가져가고 집과 전답을 양도한 양도증서였다.

 

누나는 오빠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영문을 몰라 당황했다. 동리에서는 딱한 우리를 도와 줄려는 사람은 한 집도 없었다. 당장 들리는 소문에 스물 두 살짜리 형이 노름을 해서 날렸다는 말뿐이었다.

 

이제 우리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한 시간 한 시간 새로운 공포가 가슴을 쥐어짰다.

 

 

5. 빼앗긴 집과 땅

 

세상에는 어린 나를 위안할 수 있는 말은 한 마디도 찾을 수가 없었다. 두 달이라는 말미 때문에 시간이 흐르는 것이 두려웠다.

 

이런 우리 남매 앞에는 또 기막힌 일이 생겼다. 제법 인물이 괜찮은, 16살 난 누나를 동리 사람들이 외가 쪽 사람을 충동질해서 시집을 보내기로 의견이 나왔으나 누구 하나 어린 나를 거두어 줄려는 사람은 없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꿈을 지니고 있던 누나는 이제 자기 처지를 생각하며 그 꿈을 잊어갔다. 신랑감이 누가 되건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 앞에 닥치고 있는 운명에 따를 뿐이었다.

 

나는 이런 누나의 처지가 딱했다. 그런데도 누나는 또 나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남자니까 어디에 가서 밥을 얻어먹더라도 길거리에라도 혼자 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나 혼자 언제이건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처지는 더욱 딱해지기 시작했다.

 

운명과 부딪칠 엄청난 그 날을 기다리면서 온 몸이 축 늘어진 채 외롭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무도 없는 고향 땅,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고향을 생각하며 또 하루를 그냥 보내게 되었다.

 

나에게는 이제 슬픈 날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이 판에 소식이 끊긴 형을 만나보기 위해 찾아 나서야 되겠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열 두 살이던 나는 언제인가 우리 집을 다녀간 적이 있는 부산에 산다는 단 한 집의 친척집 주소를 누나한테 물어서 받았다.

 

동리의 어떤 아주머니가 부산에 볼 일을 보러 간다는 날짜에 누나는 그 아주머니를 찾아가서 나를 부산까지만 같이 좀 데려가 달라고 부탁을 했다.

 

내가 고향을 떠나기 하루 전날 밤에는 두 남매가 참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누나는 나를 생각했고, 나는 어느 집 머슴 살던 총각과 혼담이 오고 가는 누나를 생각하며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었다. 어린 남매는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서로의 눈이 부어 있었다.

 

누나는 더 이상 어떤 표정을 감춘 채 아침을 지어왔는데, 흰 쌀밥과 계란으로 만든 반찬까지 있었다.

 

누나는 자기 밥은 먹으려 하지 않고 나만 자꾸 먹으라고 권했다. 나는 자꾸만 목에서 넘어가지 않으려는 밥을 삼키면서 억지로 이런 일이 즐거운 것 같이 신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제 집을 나설 시간이 되었다. 누나가 준 여비 몇 푼과 주소가 적힌 종이를 입고 있던 속옷의 고무줄 속에 감춘 채 부산에 간다는 옆 동리의 아주머니를 따라 마을 뒤 고개로 올라갔다.

 

발을 옮길 때마다 집들이 멀어져 갔고 어머니의 무덤이 멀어져 갔다.

 

멀리 동리 밖에서 누나가 눈 가장자리를 수건으로 훔치고 있었다. 나도 왈칵 눈물이 솟았다. 그러나 앞에 가는 아주머니에게 그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재를 넘어 가니 우리 동리는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내가 찾아 가는 신작로가 발을 옮길 때마다 가까워졌다. 나는 외로움을 느꼈다. 앞서 가는 아주머니는 어린 나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 사람도 너무 나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이다.

 

시간을 맞추어 온 때문인지 얼마 기다리지 않아 자갈길 위로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가 타야 할 버스가 달려 왔다. 나는 속옷의 고무줄 속에 끼워 두었던 돈 주머니에서 여비가 될 만큼 돈을 꺼냈다. 차는 승객들을 태우고 다시 달렸다.

 

대부분이 시골 사람들이라 차멀미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차의 맨 뒷좌석에 앉아 죄인처럼 쪼그리고 있었다.

 

차가 심하게 자갈길을 달릴 때마다 멀미가 생겨 어지러움을 느꼈다. 차 안은 이야기 소리로 시끄러웠지만 어린 나에게는 말을 걸어오는 상대도 없었다.

 

차가 중간 도시의 큰 정류장에 설 때마다 먹을 것을 든 장사들이 차 안에 올라왔고 사람들은 모두 먹을 것을 사서 요기를 했다.

 

나도 시장기를 느꼈다. 누나가 내가 집을 나올 때 차 안에서 무엇을 사 먹으라고 돈을 준 것이 있지만 나는 그 돈을 끄집어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보다 대여섯 살 위인 것 같은 장사치가 코앞에 내미는 빵과 과자가 눈앞에 들여졌을 때에는 정말 먹고 싶었다.

 

입가엔 슬슬 침이 고여 들고 배 속에서는 나를 보고 사라고 재촉을 했다. 자꾸만 내어 밀며 권하는 장사 앞에서 말도 못하고 고개만 흔들었다.

 

여섯 시간이나 달린 차가 종착지인 부산의 충무동에 닿았다.

 

버스에 탔던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모두 자기가 갈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갔다. 옆 동리 아주머니와 나도 헤어져야 했다.

 

나와 같이 왔던 아주머니는 나에게 혼자 찾아가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할까 망설이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아주머니는 급히 자기가 갈 곳으로 떠나 버렸고 혼자 남게 된 나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속옷 속에 감추어 두었던 친척집 주소가 적힌 종이를 끄집어내었다. 그리고는 그 종이를 주머니에도 넣지 않은 채 한 손에 꼭 쥐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대신동이 어느 쪽이냐고 물었다. 전차길을 가리키며 따라 가면서 물으라고 일러 주었다.

 

길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고, 자동차가 연속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길가의 2층집을 신기하게 쳐다보며 구덕산 쪽으로, 전차의 레일이 깔린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자꾸자꾸 길을 확인하였다.

 

얼마쯤 지났을까 전차들이 모여 있는 곳까지 갔다. 그곳엔 전차의 차고가 있었고 조금만 더 가면 산이었다. 길을 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대신동이 어디냐고 다시 물으니까 질문을 받은 사람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한참 나의 행색을 확인한 후

「어느 대신동이냐, 여기도 대신동인데.」

나는 비로소 한 손에 꽉 쥐고 있던 주소를 내보였다. 이 길로 따라가 어느 곳에 가서 물어 보라고 하였다.

나는 그 사람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갔다. 그리고 또 물었다. 얼마 묻지 않아서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친척집은 가난하게 살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좋은 인상이었는지 모두 잘 가르쳐 주었다.

 

골목길을 돌아가 보니 작은 대문이 있었다. 망설이다가 대문을 두드렸다.

내 또래의 사내아이가 나오더니 아래 위를 한참이나 확인하고 문을 열어 주었다. 이상해 하는 그 사내아이에게 나는 하동에서 왔다고 말했다. 그곳의 식구들은 모두 낯설었고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맞이하였다. 마침 집 안에는 몇 년 전 하동의 우리 집에 찾아온 적이 있는 형수뻘 되는 여인이 있었다.

 

그 분은 나를 상상 외로 반갑게 대해 주었다. 그리고 그곳의 식구들한테도 아재라고 나의 촌수를 소개하며 내가 어색하지 않게 말을 해 주었다.

 

나는 서먹서먹한 기분으로, 도시에 온 첫날밤을 보냈다. 그 날 저녁에는 촌수로 형님뻘 되는 그 집의 주인과도 인사를 했다. 마음씨 좋은 친척 형님은 나의 이야기에 무척이나 동정하는 눈치였다. 나는 내가 당한 모든 일을 그곳에서 털어 놓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우선 형을 만나야겠다고 말을 끄집어내었더니 친척 형님은 내가 찾아갈 곳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다음날부터 형을 찾아, 낯선 도시의 거리를 헤매며 다녔지만 형은 쉽게 만나지지 않았다. 나는 한편으로는 형이 내가 부산에 온 것을 알고 친척집에 찾아와 주길 기다리기도 했다.

 

나의 마음속에서는 형을 만나야 무슨 일이든 해결이 날 것만 같았다. 나는 아직도 어린 남매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든 형을 미워하기에는 모든 것이 어렸다.

 

아침나절이 되면 내 또래 동리 아이들은 학교에 가버리고 상대해 줄 사람마저 없는 낯선 곳에서 할 일없이 혼자 길거리에서 소일했다.

 

나를 처음 만난 도시의 아이들은 내가 하동에서 왔다는 소문에 나만 보면 촌놈이라고 놀렸다. 그 놀림을 피해 다른 곳으로 옮겨가도 다른 쪽 골목의 아이들이 또 놀렸다. 촌놈 합바지, 촌놈 합바지하며 심하게 놀릴 때는 나는 화가 났지만 점점 참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내 또래 아이들은 이런 나를 좀 모자라는 아이로 취급을 했다. 내가 그들을 쳐다만 보아도 폼을 재며 한 번 싸울 수 있겠느냐고 시비를 걸어 왔다.

 

이럴 때면 나보다도 더욱 애가 타는 것은 이런 것을 보는 친척집 아이였다. 이 골목에서 내 편을 들어주는 아이는 그 뿐이었다.

 

어느 날은 그 친척집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더니 나를 보고 물었다. 한 번 싸워 보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나를 심하게 놀리던 골목 안의 내 나이 또래인 어떤 중학교의 1학년짜리 아이의 도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골목 안에서 놀던 다른 애들한테까지 퍼졌다. 촌놈이 결투한다는 소리에 할 일이 없었던 옆 동리 아이들까지 관람하러 왔다.

 

나는 친척집 아이의 운동화를 빌려 신었다. 그리고 행여나 하며 걱정을 하는 친척집 아이와 함께 마을 뒤 공터로 올라갔다. 골목 안 아이들은 싸울 장소를 만들어 주었다.

 

나와 상대는 서로 주먹과 발길질이 오갔다. 나와 중학생의 주먹은 막상막하를 이루었다. 이윽고 내가 부딪치면서 씨름할 때처럼 다리를 걸어 상대를 쓰러뜨리고 배를 깔고 앉았다. 친척아이의 얼굴표정이 밝아졌다.

 

나는 중학생의 얼굴에다 주먹을 날렸고 그의 얼굴에 코피가 흘렀다. 중학생이 불리하게 되자 골목 안 아이들이 뜯어 말렸다. 중학생은 그때서야 겁먹은 표정으로 달려들지 않았다.

 

나는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는 골목 안의 대장이 된 기분이었다. 이때부터는 아무도 날 놀리지 않았고 골목 안 아이들과도 어울릴 수 있었다.

 

하동에서 살 때처럼 나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할 일없이 남의 집에 얹혀사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어린 마음에도 큰 부담을 느꼈다.

 

그런 어느 날 형이 친척집을 찾아왔다. 반가운 마음에 나는 싱겁게 웃었고 형도 나를 보고 웃었다. 스물두 살 된 형은 나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세워 주지 않은 채 하루 저녁을 나와 같이 자고 다음날 그냥 나가 버렸다.

 

형이 나에게 남긴 말은 중앙동 낙원다방에 오면 자기를 만날 수 있다는 말뿐이었다.

 

그럭저럭 시간은 흘러 부산에 온지 한 달을 넘겼다. 가련한 나의 신세는 열 두 살짜리답지 않게 눈치만 늘어갔다.

 

내가 지금 묵고 있는 친척집은 무던히 마음씨가 좋은 사람들이었기에 어린 나를 당분간은 거북하게 만들지 않았지만 그들도 생각하면 너무나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친척 형님은 술만 좋아하고 생활력이 없었다. 많은 식구들은 묵장사를 하는 형수님의 함지에만 기대고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나는 어지간하면 형이 어디든 있을 곳을 정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으나 형은 별다른 얘기가 없었다.

 

대신동 쪽의 골목들이 머리속에 익숙해 갈 무렵 내 또래 할 일없는 아이들과 사귀면서 제법 먼 길인 하단까지 논고동을 잡겠다고 놀러 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난처한 문제가 생겼다. 친척집이 지금까지 살던 집을 비워 주고 이사를 가게 되었다.

 

새로 얻은 집은 대문도 없고 현관도 없는 집이었다. 가재도구를 정리하니 친척집 식구가 같이 앉아 있기에도 비좁은 방이었다.

 

친척 형님은 장의사에 운전기사로 다녔는데 이사 온 이후로는 집에 잘 들어오지 않고 사무실에서 잤다. 식구들이 모두 누우면 다리를 뻗을 수 없는 방이었기에 나는 친척집 식구들의 발밑에서 웅크리고 숨소리마저 감추면서 잤다.

 

친척 형님이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그동안 사귄 동리 아이들 집을 찾아다니면서 잠자리 동냥을 하였다.

 

나에게는 밤중에 소변이 누고 싶으면 가장 곤란했다. 어떤 경우에는 날이 샐 때까지 참았다.

 

나는 나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어떤 곤란한 일이 있어도 표시를 내지 않았다.

 

어느 날은 장사가 잘 되지 않더라 면서 친척 형수님은 묵이 남은 함지박을 그대로 이고 들어오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죄인처럼 마음이 쓰여 힘이 들었다.

 

이런 거북한 일을 보면서도 나는 도시에 나온 지 3개월째 접어들게 되었다.

 

나는 제법 먼 곳까지 혼자 다녔다. 중앙동까지 걸어서 형을 찾아 이 다방, 저 다방을 기웃거렸고, 사람들이 모인 길가의 이집 저집 들을 기웃거렸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엉뚱한 곳에서 형을 보았다. 형은 어떤 사람과 당구를 치고 있었다.

 

나는 창밖의 유리를 통해 당구대만 주시했다. 붉은 공, 흰 공이 굴러 다녔다. 형은 자꾸만 상대에게 돈을 건네주었다. 나는 창밖에서 발을 굴리며 안타까워했다. 한참 시간이 흐르자 형은 돈이 떨어진 모양인지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온 형을 나는 멀찍이 따라가다가 불렀다. 형은 퉁명스럽게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일가 집에서 빨리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다고 했다. 형은 그냥 며칠만 더 기다리면 데리러 갈 것이니 기다리라는 말만 하였다.

 

나는 힘없이 형과 헤어졌다. 찢어진 고무신이 자꾸만 벗겨졌다. 오늘 저녁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걱정이 되었다.

 

이런 나한테는 참기 어려운 순간이 자주 생겼고 겨울이 한참 지난 어느 날, 형의 연락을 받았다. 영도에 있을 곳을 마련해 두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형이 얻은 것이 아니었고 시골 김 영감의 아들이었던 사람이 영도에 살면서 방 한 칸을 삭월세로 얻어준 것이었다. 어쨌든 당장 나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내가 대신동 친척집을 나올 때 친척집 식구들의 얼굴에서 반가운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영도로 갔다. 형과 형수 되는 사람이 웃으며 반겨주었다. 그런데 방 안에는 가재도구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의 마음에는 이곳에서도 별 뾰족한 수가 생기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당장 오늘 저녁 잠자리 동냥을 나가지 않는 것이 커다란 위안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다음날부터 해만 뜨면 동리의 골목에 나와 서 있게 되었다.

 

양지쪽에 서 있으니까 처음 본 동리의 아이들이 슬슬 접근해 왔다. 어느 동리에서 왔느냐고 묻는 그들한테 대신동에서 왔다고 했다. 이 동리 아이들도 나한테서 어떤 구실을 찾으려고 했다.

 

이곳에서 나는 촌놈대신 키다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영도 아이들은 대신동 아이들보다 더욱 하는 짓이 짓궂었고 영도에는 나의 편을 드는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

 

제대로 먹지 못하여 심하게 여위고 그 대신 나이에 비해 키만 커 보인 나를 두고 동리 아이들은 당장 얕잡아 보기 시작했다.

 

양지쪽 벽에 붙어 서 있는 나를 보고 앞을 가로 막으며 그늘을 지우는가 하면 폼을 잡으며 한 번 싸우자고 시비를 걸어오는 아이들뿐이었다.

 

나는 옆에서 재미있어 하는 다른 관람자들을 위해 싸워야 했다.

 

맞지 않으려면 내가 때려야 했고, 싸움을 걸어오던 애들의 대부분은 결국 나의 밑에 깔리게 되고 코피를 흘려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부모나 형들한테 매를 맞았다. 차츰 나를 놀리는 아이들이 적어졌다. 이런 속에서 시간이 가니까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사귀게 되었고 불행한 환경 속에서 사는 다른 동리의 아이들과도 어울렸다.

 

나는 언제쯤 괴로운 운명에서 벗어나게 될지.

 

모질지 못한 형은 남에게 잘 이용당하고 돈이 생기면 도박으로 날려버리고 아예 생활비를 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신동에 있을 때에는 지내기는 거북해도 하루 두 끼는 얻어먹었고 어떤 날은 점심 요기도 하였는데 이곳에 와서는 하루 두 끼를 먹기가 힘들었다.

 

밥을 먹을 때 보다 죽을 먹을 때가 많았고 한 번도 배가 부르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점점 더 여위어 갔다.

 

이런 형편에 나에게는 입을 옷이란 따로 있을 수 없었다. 열 살이나 위인 형이 입다가 못 입게 된 옷을 고치지 않고 입으니 병아리에 우의 씌운 것과 같았다.

헐렁한 바지가랑이를 몇 번이나 걷어 올렸고 허리춤은 단단하게 졸라매어야 내려가지 않았다. 윗옷은 단추를 끼운 채 뒤집어쓰면 몸에 자연적으로 걸쳐졌고 엎드리면 자연적으로 벗겨졌다.

 

누구에게 선가 내가 하동에서 온 것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국민학교에 다니는 동리 어린 꼬마들이 나의 우스운 꼴을 재미있으라고 합바지, 합바지하고 놀렸다.

 

내가 인상을 쓰면 애들이 웃어대며 더 아우성을 쳤다. 내 또래의 다른 애들도 덩달아 재미있어 하는데는 괴롭기만 했다.

 

동리의 덩치 큰 아이들은 일부러 다른 동리의 아이들을 불러다가 나한테 싸움을 붙인다. 그들은 단지 구경을 하기 위해 나의 괴로움을 모르는 척했다. 결국 내가 알게 되는 것은 이겨도 득이 없고 지면 손해였다.

 

싸우다 두들겨 맞게 된 애들의 부모는 나를 나쁜 아이라고 욕했다. 나는 내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을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이 세상에는 아무도 나의 딱한 처지를 도와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길거리에 싹을 내민 야생초처럼 메말라도 짓밟혀도 혼자 일어나야 하는 운명인가. 어쩌면 세상의 고통은 골고루 경험해야 하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목구멍으로 침을 넘겼다. 동리의 내 또래 아이들은 딱지치기나 구슬놀이로 시간을 보내도 나는 그 자리에 어울리지 못하고 누가 그것을 잃고 따느냐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느 마음씨 좋은 아이한테서 개평을 얻었다. 나는 그렇게 생긴 딱지나 구슬을 소중하게 모았다.

 

영도의 골목들도 점차 낯이 익어갈 즈음, 개평으로 모은 구슬과 딱지를 동리의 어떤 애가 졸라서 10원에 팔았다.

 

길거리에서 팔던 제법 큰 풀빵 하나가 나의 호주머니 속에 있게 되었다. 정말 나는 오래간만에 돈을 가진 것이다.

 

나는 이 10원을 어디에다 긴요하게 써야 할 것인가 생각하면서 금방 부자가 된 기분을 느꼈다.

 

날씨가 봄기운을 재촉하면서 따뜻해지자 나 혼자 동리에서 먼 곳까지도 나다니게 되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전차 종점에 있는 민주당 사무실에 설치한 스피커가

「못살겠다. 갈아보자......」

라는 선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목적지도 정해두지 않고 그냥 걷고 있었다.

 

사람들이 붐비는 길을 신문사의 깃발을 단 짚차가 바쁘게 달리면서 호외를 뿌렸다. 그때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웅성거렸다.

 

나는 어느 새 남포동 거리를 걷고 있었다.

눈앞의 어느 건물 옆에서 나처럼 초라해 보이는 소년들이 담에 기대거나 맨 땅에 주저앉아 있었다. 간간히 저희끼리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곤 한다.

나도 호기심 때문에서였는지 아무 생각도 없이 그들 속에 끼었다.

 

얼마 후 주위에서 <국제신문>이라는 신문사의 간판을 보았고 건물의 옥상에 나부끼는 신문사의 깃발을 보았다.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바쁘게 들려왔고 신문사에서 일하는 듯한 젊은 사람이 육중해 보이는 나무책상 하나를 담 옆에 세웠다. 앉아 있던 아이들이 책상을 두고 밀고 밀리면서 줄을 섰다. 나도 엉겁결에 줄 속에 끼었다.

 

아이들마다 손에 돈을 쥐고 있었다. 나도 호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10원짜리 지폐를 손에 꼭 쥐고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기다렸다.

 

얼마 있지 않아서 신문뭉치가 책상 위에 쌓였고 덩치 큰 사람이 돈을 받으면서 순서대로 신문을 넘겨주었다. 나는 줄이 짧아지면서 나의 차례가 가까워지자 야릇한 감정을 느꼈다. 금방 나의 차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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