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못 외우는 암기사항
지금까지 외웠던 다른 군인 수칙보다 길게 연결된 혁명공약은 6가지나 있었고 점호 시간 때마다 소대원이 복창을 하며 외우게 하더니, 며칠이 지나자 점호 시간이 되면 한 사람 한 사람 지적을 하면서 강압적으로 암기상태를 확인을 하였다.
다른 훈련병들은 잘도 외워대었고 금방 암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왜 혁명을 한 높은 군인들이 철학과 실천을 통하여 목적을 행하려 하지 않고 문장을 통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는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아무리 애써 봐도 이런 암기사항이 머리속에 외워지지 않았다.
나는 지적을 받을 때마다 외우지 못했고 이런 나 한 사람 때문에 소대원들은 집단기합을 받았다. 이런 일이 생기니 소대원들은 점호시간만 되면 아예 내가 지적을 받을까 봐 모두가 함께 걱정을 했다.
원산폭격이라는 기합을 오래 받을 때에는 그 고통 때문에 나를 원망하는 훈련병도 있었다.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나는 같은 훈련병인 소대원들한테서도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나에게는 고문관(拷問官)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애가 탄 소대원들이 나를 두고 곧잘 이런 말로 핀잔을 주었다.
그럴 때마다 조국의 앞날에 대한 어떤 염려가 내 가슴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혁명공약 6가지의 말처럼 국가 재건 최고위원이란 군인 출신들이 조국을 힘차고 올바로 일으켜 세워 주길 바라면서도 군인으로보다 정치인으로서의 능력과 철학을 아직 알 수가 없었기에 성공한 자를 위한 찬양의 노래인 혁명공약이 나의 머리속에서는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무언의 일편단심으로 졸병신세에 있으면서도 그 속에서 내가 고문관이란 별명을 가지게 된 것이 다음날 부끄러운 일이 안 되길 바랄 뿐이었다.
나의 이러한 행동 때문에 몇 번씩이나 죄 없는 소대원들을 단체로 기합을 받게 하였다. 그런 후에야 6주의 훈련을 마쳤다.
그렇게 지루하게만 느껴지던 초여름의 하루하루가 훈련소라면 신물이 날 것같이 싫어지던 훈련병들의 마음도 퇴소식을 하는 날에는 모두 밝은 표정으로 보인다.
새 군화와 군복으로 차려 입고 연병장에 모여 훈련소를 떠나야 하는 퇴소식을 가지고 나니 처음으로 우리 일행들은 작대기 하나의 이등병 계급장을 받으면서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또 퇴소식이 끝나자 군용 트럭들이 와서 우리들을 배출대까지 차에 태워 옮겨다 준다. 잠시 머물게 되는 이곳에는 날이 새면 떠날 사람들뿐이었다.
어떤 약삭빠른 사람들은 좋은 부대로 배치 받기 위하여 교제를 하는 자도 있었고 얼마를 쓰면 어디에 떨어진다는 루머들이 공공연하게 나돌았지만 나는 나 자신의 신상을 위해 아무런 힘도 쓸 수가 없었다.
나와 같이 훈련을 받고 배출대로 넘어온 동기들이 자기들이 가야 할 곳으로 명령을 받고 떠나는 것을 볼 때마다 나 자신도 궁금증을 가지면서도 그동안 친분을 느껴온 사람들과 함께 떠나게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졌다.
남은 사람끼리 서로 병과를 묻게 되었고 초조한 마음속에서도 뒤에 힘써 줄 사람이 없는 나는 상급부대에서 내려올 특명에 의하여 정해질 나의 행선지에 대해 궁금증을 느끼면서도 행여나 하는 또 다른 기대뿐이었다.
그러던 날 오후였다. 주위에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 왔다. 우리가 기거하던 내무반에서 대기병들의 행동이 분주해졌다. 개인 사물을 정리하고 집합하라는 연락이 전달되어 왔다. 나의 이름도 있었다.
우리는 떠날 준비를 하고 집합 장소에 모였다. 5일 동안 대기하던 같은 병과의 일행은 부산에 소재한 모 특과학교(特科學校)로 특기교육 이수차 떠나야 하는 명령이 내려진 사실을 알았다.
나의 마음속에서는 행선지를 알고 나니 아무도 반겨줄 사람이 없는 부산이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생활해 본 도시의 이름이었기에 알 수 없는 안정감을 마음속에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배출대를 나온 우리 일행은 인솔자의 지시에 따라 연무역에서 준비된 객차에 올라가 자리를 잡고 나니 그렇게도 마음에 부담을 주던 논산이 차츰 뒤로 멀어지면서 기차가 열기를 뿜으며 달리기 시작하였다.
군용 열차는 조그마한 역에까지 정차를 하는 완행이기 때문에 목적지인 부산진역에 도착했을 때에는 하루 저녁이 지나가 버린 다음날 이른 아침녘이었다.
의자에서 잠들었던 일행들은 고함소리에 모두 긴장하며 일어났고 기차에서 내리게 한 인솔자는 우리를 한 곳에 모아 머리 숫자부터 세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에 대기하고 있던 군용 트럭을 가리키며 우리 일행더러 각자 자기 이름을 호명하며 트럭으로 올라가게 하더니 숫자 파악을 했다. 그리고 나서야 트럭은 시내를 질주하며 달려갔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정이 도착지인 특과학교에도 기다리고 있었다. 한나절이 지나서야 소대원이 편성되고 내무반의 막사가 정해졌다. 그러고 나서 온종일 긴장과 이곳에서 지켜야 하는 요식절차가 지시되어 왔다.
이곳에서의 교육은 훈련소와는 달랐다. 이론과 기술교육뿐이기 때문에 며칠이 지나게 되니 처음 들뜨며 긴장하던 마음도 잠시요. 긴장이 온 몸에서 풀리며 여름이라는 계절 탓인지 학과시간이 되면 졸음을 쫓기가 힘들어 또 고통이 생겼다.
이곳 특과학교에서는 6주의 기간이 지나면서 교육생들한테도 주말이면 외출을 신청하게 해서 허용해 주었다. 그런데 나는 이곳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혁명공약을 아직 암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외출 신청이 처음으로 거절된 것이다. 부대마다 군인들한테 혁명공약을 억지로 암기 시켰다.
나는 이러한 악조건에서도 여섯 줄의 혁명공약을 암기해야 한다는 사실에 주의하지 않았다. 또 일주일이 지나갔다. 그런 주말에 나는 외출신청을 하였다. 교육중대의 본부에서도 딱했던지 이번에는 외출이 허용되었다.
이등병 계급장을 잘 닦아서 광이 나게 하여 모자와 군복에 붙이고 신나게 길거리를 오래간만에 자유롭게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헌병의 검문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복장과 행동에 아무런 지적사항이 없음을 알고 그들이 부르는 쪽으로 걸어갔다. 헌병들의 요구로 외출증을 제시하였다.
순찰 중인 헌병은 어떤 지적도 하지 못한 채 외출증을 돌려주지 않고 한 곳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헌병이 나를 데리고 간 곳에는 나처럼 외출증을 뺏긴 군인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헌병들은 무조건 길가에 나다니는 졸병인 군인들을 찾아내어 통제하는 것이었다. 금방 헌병부대의 트럭이 와서 길가에 멈추어 선다.
트럭 위에는 여러 명의 헌병들이 무섭게 눈을 굴리며 이유를 몰라 하는 군인들을 무조건 짐짝처럼 트럭에 싣고서는 차를 달리게 하는 것이다.
나의 마음은 모처럼의 신나던 기분이 불쾌해졌다. 트럭이 도착하여 멈춘 헌병대의 뒷마당에는 여러 부대에서 외출 나온, 나와 같은 신세로 보이는 졸병들로 수백 명이 웅성거렸다.
한 사람의 헌병이 급히 걸어오더니 고함을 질러댄다. 십 열 종대로 열을 세웠다. 중위 계급장을 모자에 단 위관장교를 앞에 세운 여러 명의 헌병들이 몰려와서 주위를 에워싼다.
그리고는 우리한테서 빼앗아간 외출증을 가지고 한 사람씩 호명을 한다. 모두가 다 모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줄의 앞 사람부터 차례차례로 혁명공약을 외우게 하였다.
대부분의 군인들은 혁명공약을 외웠다. 다 외우는 군인에게는 외출증을 주면서 헌병대에서 내보내 주는 것이었다.
나는 끝내 혁명공약을 외우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헌병대에서는 나의 소속부대인 특과학교로 통보를 보냈고 소속 부대에서는 차편을 보내서 부대로 싣고 들어가는 대신 주었던 외출증을 취소해 버린 것이다.
나는 군대 입대 후 처음 받은 외출을 이런 일로 취소당한 것이다.
나는 그 후 여러 번 부대 안에서 저녁 점호 시간마다 지적을 받고 혁명 공약을 암기 못한 이유 때문에 기합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소대원 단체 기합까지 받게 했다.
그런 일이 자주 생기던 중 하루는 교육중대의 중대장이 나를 보고 학과장에 나가지 말고 남게 한다. 나는 나 혼자 남으라는 것에 궁금증을 느끼면서도 중대본부로 찾아갔다.
중대장과 기간 사병들은 신기한 눈동자로 나의 부동자세로 굳어진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교육중대 인사계라는 사람이 무슨 공문 같은 것을 읽어주었다.
「암기 불량으로 2일간의 중노동에 처함.」
특과학교의 징계위원회에서 명령서를 내려 보낸 것을 알려 준 것이다.
나는 중대장의 지시대로 한 자루의 삽을 들고 중대 본부의 인사계를 따라 부대 옆 공지로 나갔다. 인사계는 나한테 흙구덩이를 파게 하였다.
한 여름의 무더운 날씨는 잠시 만에 땡볕 아래서 삽질을 하는 몸을 금세 땀으로 범벅되게 해 버린다. 그런데도 마음만은 간간히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을 때처럼 오래간만에 나의 가슴 속에도 답답한 마음이 삽질을 할 때마다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런 나를 두고 땡볕에 서 있기가 어려운지 감독을 하고 있던 교육중대 인사계가 쉬지 말고 열심히 구덩이를 파라는 말만하고 그만 자리를 빠져나가는 것이다.
나는 주말마다 외출이 거절되었다. 텅 빈 내무반에 혼자 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그 사람들은 혁명공약처럼 정말로 실행할 것인가.
자기네들은 약속을 지킬 의무나 사명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그냥 우리 졸자들에게 찬사의 문장이나 외우게 하는 것이 그 사람들 취미인가 묻고 싶었다.
3개월간의 교육 기간 중 마지막 일주일이 남은 주말에야 나에게도 외출이 허용되었다. 나는 나를 반겨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의 마음속에 고통의 추억이 쌓인 거리로 군복을 입고 마음껏 호흡을 하며 걸었다.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만나고 싶은 심정이다.
이제 우리들은 마지막 일주일을 이곳에서 남겨두고 있었다.
1군과 2군을 두고 모두 교육생들의 마음은 후방에 떨어지길 원하는 모양이었다. 간간히 내무반 안에서 듣게 되는 이야기 속에서 누가 어디에다 줄을 대고 있다고 하는가 하면, 누구누구는 어디에 떨어진다는 말이 나돌았다.
배경도 없고 돈 대줄 사람도 없었던 나에게는 숫제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내가 1군인 전방부대에 떨어질 것이라는 것은 뻔한 사실이라는 생각이 누구보다도 내 마음을 안정시켰다.
나의 이런 생각은 특과학교의 교육이 끝난 다음부터 경험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강원도로 호송이 되었다. 또 며칠을 기다리니 이번에는 경기도였다. 신기한 것은 이렇게 돌아다닌 끝에 떨어진 곳이 1군 관할의 직할 기술대대였다.
그러나 이곳의 신기한 생활도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반년이 못가서 딴 곳으로 또 옮겨가야 했다.
보충대를 거치고 거친 끝에 내가 간 곳은 최전방 사단의 소총대대였다. 나는 비로소 내 신분에 맞는 곳에 오게 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도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부대의 TO만큼 들어오고 나갔다.
나는 먼저 배치되어 온 병사들과 함께 어울려 근무하는 동안 이곳의 사병들이 좋아졌다. 배경이 있다는 자랑을 하는 병사도 없었으며 부잣집 아들이라고 뽐내는 사람도 없었다. 계급의 존엄성에 의해서 규율은 지켜지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우리나라의 영토로는 최북단인 삼팔선 이북 지역에서 근무하는 병사들 속에는 다른 부대처럼 탈영병도 간간히 생겼으나 대부분은 같은 처지끼리 그래도 주위에서 전우애를 느끼면서 병사로서의 사명을 지켜가고 있었다.
나의 계급이 고참 일등병이 될 때쯤에는 나는 소속부대 안에서 제법 강한 군인이 되어 있었다.
부대 안에서는 나보다 한 등쯤 높은 상등병 정도 군인들은 나의 요령 앞에 도전하지 못했다. 다른 졸병처럼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양껏 밥을 먹었다.
중대 취사병들이 나한테서 골탕을 먹은 후부터였지만 나는 제법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나의 상사인 부대 선임 하사나 인사계, 또 중대장은 장난기 섞인 마음으로 부대의 궂은 일이 있으면 꼭 나를 차출하여 내보냈지만 그것은 나중에 알고 보니 나를 골탕 먹이려는 상사들의 짓임을 알았다.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나는 나보다 졸병인 후임자들에게는 인기가 늘어갔다. 반면에 중대에서 계급이 높은 사람들 앞에서는 골치거리였다.
이런 속에서도 세월이 지나자 상등병으로 올라갔다.
나의 몸에서는 오래간만에 힘이 샘솟는 것을 마음으로 느꼈다. 군대생활이 나에게 있어서는 태어나서 처음 느껴본 행복한 곳이었다.
그런 어느 날 나는 휴가 특명을 받았다.
날씨는 제법 쌀쌀한 아직도 살얼음이 끼는 늦은 겨울이었던 것이다. 보급품의 사정이 좋지 않던 당시의 전방부대 사정은 몇 벌의 사지군복을 보급 창고 안에 보관시켜 두고 휴가병한테만 잠시 입고 갔다 오게 했다.
나는 그 소중한 옷을 받아 입고 부대에서 지급해 준 얼마 안 되는 휴가비였지만 제법 돈까지 타고는 군용 열차를 이용한 휴가를 보내기 시작했다. 당장 떠오른 나의 기억 속에는 갈 곳이란 부산뿐이었다.
그래서 부산행 군용열차를 이용했다. 부대를 떠난 후로는 아무 것도 먹지 못했던 데도 허기를 느끼지 않았다.
이른 새벽, 기차에서 내려 부산의 낯익은 거리를 보면서 오래간만에 형제들을 생각하고 영도 쪽으로 찾아가기 위해 길을 걸어갔다.
평소 모아 둔 몇 봉의 건빵과 한 보루의 화랑 담배를 선물인양 손에 들고 형의 집을 찾아 간 것이다.
남의 땅 위에 지어진 무허가인 4평짜리의 판자집은 지금은 썩은 나무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흔들거렸고 바깥바람이 방안에 들어오는지 덜덜 떨며 군용담요를 감고 있는 가족들의 표정이 측은해 보였다.
근 2년 만에 나를 보는 그들의 모습은 그래도 얼굴에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무엇인가 당장 걱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가방 안에서 내놓는 건빵을 보고는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다. 어른들은 아이들 보고 삼촌도 좀 먹게 하라고 말을 했다.
나는 이곳의 처지를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동안 모았던 돈과 휴가비로 받은 돈 전부를 내어놓았다. 가족들은 웬 돈이냐고 사양하는 척 했지만 그것은 그들에겐 퍽 소중한 것이 되었다.
나는 형의 가족들이 측은했다. 이런 것이 정이라는 것일까.
20여 일간의 휴가기간 중 옛날처럼 굶주리게 되었고 아는 집에서 무슨 일거리가 생겼을 때는 서슴없이 잡부 일을 도맡아 해주고, 그렇게 해서 받는 적은 돈은 형수한테 건네주었다. 그러던 나는 다시 부대로 돌아가야 하는 날을 맞았다.
국제시장에서 낡은 군복 한 벌을 샀다. 나는 부대로 들어가야 하는 날 나의 가장 가까운 혈육인 형제를 위해 내가 휴가 복으로 부대에서 입고 왔던 새 군복을 벗어주고 낡아서 헤어진 군복을 다려 입고서, 부대에 돌아갔을 때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귀대 길을 서둘렀다.
추운 계절도, 어려운 일들도 견디려는 마음속에는 하나의 옛 이야기처럼 희미한 추억을 남기면서 지나갔다.
나는 고참 병장이 되었다. 신기한 것은 군대의 급식 때문에 더욱 강해진 나의 뚝심이었다.
사단 체육대회에서는 각 부대에서 뽑혀 온 다른 연대의 씨름 선수를 넘기고 여러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개인 1등을 한 사실이었다. 군대에 지원하던 때만 하더라도 그렇게 허약하던 내 신체가 군대의 급식으로 몇 년 만에 건강하고 강해진 것을 느꼈다.
비로소 내가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정말 이 시기에는 나의 젊은 마음은 조국에 대한 애정과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부대 내에서는 병사들의 눈이 이런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게 했다. 나는 주위에서 강한 자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나는 이즈음 부대 연대급 웅변대회에서도 당당히 1등을 하였다. 나의 웅변과 뚝심은 장병들 속에서 대단했다.
내가 어린 시절 나 자신을 지켜왔던 싸움 실력은 나를 얕잡아 보던 연대 내의 제일의 유단자였던 태권 4단짜리와의 대결을 통해서 상대의 입을 봉하고 나서부터는 나의 또 다른 신화가 부대 내에 알려졌다.
어떤 허풍을 친다 해도 연대 안에서는 병사들이 아무도 나를 두고 거짓말을 한다는 사람은 없었다. 사단 내의 다른 부대에도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알려졌다.
배짱 좋고 뚝심 세고 말 잘하며 머리 좋은 사나이라는 이런 소문은 인근의 도시나 민간인이 사는 동리에도 알려졌다.
나의 가장 활기 찬 젊음을 병영생활로 보내면서도 나는 군대생활에 만족할 수가 있었다.
부대 내에서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는 병사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를 걸어 준 덕택에 어떤 문제도 잘 처리하게 되었다. 군기가 문란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연대 내에서는 내가 소속된 대대를 두고 카투사라고 부를 정도로까지 분위기가 좋았다.
그리고 우리 소속 대대의 수백 명 장병 중에서는 큰 문제가 나오지 않게 됐으며 탈영병도 줄고 있었다.
나의 신분은 안면이 있는 지휘관이나 장교들로부터 열외사병(列外士兵) 대우를 받았다.
전우들은 나를 그만큼 뛰어난 사람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12. 고참 하사
나는 하사로 진급이 되었다.
나와 같은 연도(年度)에 입대하였던 사병들은 제대를 하여 부대를 떠났다. 그럴 때마다 정들었던 그들을 보내는 것이 마음속에서 외로움을 만들었다.
낯익은 얼굴들이 떠난 후면 낯선 보충병이 오고 같은 숫자의 부대원들을 보면서 나는 새로 오는 전우와 부대에 남았다.
세월은 나를 성숙한 군인으로 키워주고 있었다.
또 몇 년이 지나자 나는 고참하사가 되었다. 같은 계급장을 붙인 하사들이 나를 보면 하사님이라고 불렀으니 고참인 셈이다. 그리고 해를 넘기니 하사들은 중사로 진급한다. 나도 중사가 되겠지 하고 기다렸다.
몇 년 후배가 중사진급을 하였다. 나는 그 원인을 궁금히 여겼다. 진급 기회만 오면 해당자들은 진급을 위해 손을 쓰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군대행정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진하기만 했던 내 마음에 실소가 생겼다.
중사들이 하사 앞에서 쩔쩔매는 행동을 보는 신병들의 눈은 신기했지만 나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나한테는 분노가 생겨났다.
근무성적표는 양호한데 그리고 '통솔력이 매우 뛰어남' 이란 지휘관의 고과(考課) 점수는 어떻게 된 것일까, 이런 생각들을 할 때마다 나는 자신만이 느끼는 서글픔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나 자신을 두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생각한 것이 중이 절을 떠난다는 속담을 생각하며 제대를 하는 것이 상책이라 여겨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하여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할 곳도, 풀 길도 없는 내 마음은 더욱 심란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처신할 방도를 찾아 머리를 쥐어짰다. 그러다 지난날들을 생각했다. 굶주리다 지쳐 허기에 쓰러진 옛날의 일들이 떠올라 왔다.
부대 안에서만은 불가능한 것이 별 없었던 나는 정말 나의 앞에 있는 어려운 문제를 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궁금했다.
나는 당장 나 자신에게 지워진 운명에 도전할 결심을 했다. 그동안 몇 년 동안의 군대의 편한 생활에서 나 자신에 대한 장래를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노동력을 가진 어른이 된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다. 군대는 나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지 않더라도 나는 이제 그 기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럴 즈음 나에게는 휴가 특명이 내렸다. 나는 휴가 기간 동안 군용 열차가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마지막 무임승차가 될 기회를 충분히 이용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제대 후의 일들을 생각하며 나는 여기저기를 찾아다녔다.
휴가의 부대 복귀날짜를 이틀 앞두고 새벽녘에 나는 군용 열차로 용산역에 닿았다. 특별히 찾아가야 할 목적지나 할 일이 없는 나는 시간을 허비하기 위해 남산공원까지 걸어갔다.
희미한 전등불이 꺼지고 햇살이 밝게 비추니 시간은 한낮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남대문시장으로 찾아 가서 싸구려 식당에서 값이 싼 음식으로 아침 요기를 하고 이태원 쪽을 향해 걸었다.
걸음을 멈춘 곳은 육군본부 정문 앞이었다. 일선에서만 근무해 온 한 사병이 4성 장군이 있는 건물의 입구에서 위압감을 느끼게 된 것은 위병소 앞에서였다.
정문에는 헌병들이 눈을 부라리며 경계 근무를 하고 있는가 하면 영관 장교들이 일선부대의 사병들 마냥 정문을 드나들고 있었다.
망설여지는 발걸음을 옮겼다. 정문의 헌병이 증명서 제시를 요구한다. 나는 휴가증을 정문 헌병한테 보관을 시키고 본관 건물 앞으로 걸어갔다.
육군 본부 본관 건물 앞에서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얼떨떨했다. 마침 그때 여군 사병 1명이 옆으로 지나간다. 당황하면서 나는 급히 여군 사병의 뒤를 따르면서 그를 불러 세웠다. 나의 목소리에 지나치던 여군이 발걸음을 멈추며 뒤로 돌아보았다.
예쁘장한 얼굴을 가진 하사 계급장을 단 여군이었다. 상대는 당당하게도 나의 아래 위를 훑어본다. 그러니까 더욱 나의 마음에 당혹감이 생긴다. 온몸과 말소리가 그냥 떨렸다.
여군은 참모총장실을 찾는 나의 아래 위를 이상한 눈으로 보며 본관 건물의 2층을 가리키면서 출입구와 복도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나는 걸어가는 여군의 뒤를 넋 나간 사람처럼 쳐다보다가 시선을 되돌려 조금 전 여군이 일러준 대로 본관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의 복도는 꽤나 넓은 편이었다. 나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복도의 중간쯤에서 참모총장실이라는 팻말을 보았다. 그 순간 긴장감과 당황감이 온몸을 위축되게 했다.
기대와 망설임이 한참이나 내 행동을 붙잡았다. 어떤 길이든 새로운 것을 찾기를 원하는 나를 생각하다 노크를 하기 시작하였다. 노크소리에 안에서 문이 열렸다.
과연 오늘 4성 장군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복도에서 발을 옮겨 놓은 곳은 비서실이었으며 총장실은 또 하나의 문을 지나야 했다.
깨끗한 차림을 한 중령과 사병 두 사람이 나의 거동을 살폈다. 나는 군인답게 '필승'하며 경례를 했다. 그런 후 차분하게 중령을 보며 말을 끄집어내었다.
총장님을 만나려고 찾아온 동기부터 이야기했다. 용건이 나의 개인 신상 이야기임을 알아챈 중령은 전화기를 들더니 교환대에다가 육군본부 주임상사를 호출하는 것이다.
얼마 후 나이든 상사 한 사람이 뛰어왔다. 나의 이야기가 무엇인가 알아보고 될 수 있으면 선처를 하라고 내가 있는 데서 지시를 한다.
나에게서는 이 순간이 나의 생애에 있어 중요한 순간임을 느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길이 있다는 어릴 때 들은 속담이 머리에 떠올랐다.
나는 육군본부의 총장실 부속실장과 주임상사 앞에서 그들이 납득하게끔 또박또박 말을 시작했다.
나는 고아출신이며 무의탁 병사라는 것과 군은 나에게 있어 가장 훌륭한 직장이며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거처라고 말했다.
내가 이런 말을 늘어놓자 그들은 영문을 몰라 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나 스스로도 억제할 수 없는 병이 있다고 일러 주었다. 누가 큰소리만 치면 총을 쏘고 싶어진다는 말도 꾸며댔다. 그리고 대남 방송이 괴롭다고 했다.
나는 나의 활기 찬 젊음을 군대에 바친 나의 뜻이 명예롭게 군대에서 물러나야겠다고 엄살을 떨었다. 나의 이야기를 듣고 두 사람은 측은해 하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나의 말 못하는 이런 사실들을 자신과 국가를 위해 더 숨겨 둘 수가 없어 군의 최고 책임자이신 총장님께 상의하고자 한다고 찾아온 동기를 그럴 듯하게 말했다.
부속실장과 주임상사는 나의 소속부대와 계급성명을 메모했다. 부대에 복귀 즉시 전역 상신을 서면으로 올려 보라고 일러 주었다. 나는 내 신분이 장기복무 지원자인데 쉽게 되겠느냐고 암시를 주었다.
육군본부에서는 나의 상급부대에 연락을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내가 서 있는 앞에서 그곳 사람들은 육군 교환대로 군단과 사단을 불러 댄 것이다.
나는 육군본부의 건물을 빠져 나와 가벼운 걸음으로 한강 쪽을 향해 걸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내일 일은 또 내일 생각하면 될 것이라고 믿으며 오늘은 행복해야지 하는 생각이었다.
부대에 복귀하고 휴가가 끝난 다음날 행정반 서무계 계원더러 전역 상신 용지 한 장을 가지고 오게 했다. 그래서 아무도 몰래 전역 상신을 자필로 작성했고 중대 행정반에 문서의 발송을 의뢰했다.
중대 서무계 행정원이 나를 찾아와서 이런 서류를 올릴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상급부대에 발송만 하면 된다고 말해도 병사인 중대 행정원은 믿지를 않았다.
사단 사령부 인사처에 전화로 확인해 보라고 하였더니 그때서야 서무계 계원은 당장 사단인사처 전역계에 전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나의 면전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내가 없는 곳에서는 나의 행동을 두고 군대를 모르는 짓거리라고 비웃었다.
이런 날들 속에서도 나는 내가 제대하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날짜가 지나가자 지금까지 군대 생활을 통한 안일한 일들을 기억하면서 한 달을 넘겼다.
궁금하고 초조한 시간을 보내던 나는 참지를 못하고 부대에서 하루 동안 외출을 얻어서 서울로 찾아갔다.
한 달 만에 다시 만나게 된 육군본부의 부속실장과 주임상사는 나에게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바로 그 문제가 궁금하여서 찾아왔다고 얘기했다.
두 사람은 하사의 전역은 1군 사령부에서 명령이 내려간다고 하면서 지시를 했는데 하면서 1군 사령부 전역계를 전화로 불렀다. 언제라는 날짜는 말하지 않으면서도 특명이 났다고 전갈이 왔다.
나는 궁금증 때문에 원주행 군용 열차를 타고 1군 사령부로 찾아갔다.
군 사령부는 넓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담당 계원을 찾아가니 계원은 사병이었지만 나 같은 하사 따위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대했다.
나는 나의 소속부대를 대면서 언제부로 난 특명인가 날짜를 물었다. 사병은 금방 나의 이름을 기억해 내고는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2.3일 후면 부대에 특명이 도착한다는 것이다. 빨리 돌아가는 대로 출발 준비를 서두르라고 귀띔을 해준다.
나는 급히 소속부대가 있는 지역으로 가는 차를 탔다. 그 날 저녁 늦게 부대로 돌아온 나는 다정했던 사람들에게 제대특명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상한 것은 아무도 나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다음날 나에 대한 소문은 대대 안에 퍼졌고 나의 행동에 대한 조소가 장병들의 입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런 날이 3일이 지나서야 사단 사령부에서 특명이 아닌 전통이 내려왔다. 제대 특명이었다.
다음날 부대 안에는 비상이 걸렸다. 나는 떠나야 할 사람이니 좀 일찍 떠나겠다고 지휘관들 앞에서 말을 하였더니 아무도 내 얘기를 거절하지 않았다.
대대장이 비상출동을 하면서 손을 잡아 주었다. 시간이 있었으면 회식이라도 해주고 보낼 텐데 하며, 사회에 나가면 열심히 해서 성공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나는 간단한 개인 사물을 가방에 챙겨 넣고 부대원들이 출동해 버린 텅 빈 대대를 빠져 나와 연대본부로 갔다. 평소부터 나와 친분이 두터웠던 연대부관은 일반 관례보다 앞서 부대를 떠나려는 나를 위해 소지해야 할 문서와 특명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직접 연대장실로 안내하며 마지막 부대 생활을 마치는 전역신고를 시켜주었다.
연대장은 나의 전역을 아쉬워하면서도 병사로서는 아까운 인물이었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사회에 나가면 큰 사람이 되라고 격려해 주는 것이 아닌가.
연대장과의 작별인사로 군인으로서 근무하던 부대에서의 모든 수속을 마치고 정들었던 얼굴들, 정들었던 기억들을 뒤로 하면서 서울행의 차편에 몸을 실었다.
이제 사회로 나가지만 나의 제대를 반겨줄 사람은 아무 곳에도 없었고 또 나를 필요로 하는 직장도 있을 턱이 없었다. 건장한 육체를 가진 나는 입대하던 때와는 달리 가슴 속은 담담한 마음뿐이었다.
자신의 노력과 투지만이 나의 밑천이며 기대의 전부였다.
나는 서울을 거치면서도 여행 시간을 위해 급행열차의 승차권을 구입하지 않았다.
마지막 무임승차의 기회인 군용 열차를 이용하여 밤새도록 피곤해지는 몸과 마음을 빽빽이 들어 찬 객차 속의 병사들과 함께 밤을 새웠다. 열차는 새벽녘에 부산진역에 도착했다.
늦은 여름철이라 그런지 금방 먼동이 틀 것 같다. 역전 주변은 아직 조용하였고 간간히 달리는 차량의 불빛과 빛을 잃어가는 하늘의 별들이 나의 시야에 들어 왔다.
한참이나 나의 행동은 생각을 하다가 버스가 오는 데도 타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여름날의 새벽은 무척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어제 오후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은 뱃속에 허기가 생기게 했다.
내가 무의식중에 자석(磁石)에 끌린 것 같이 걸어 간 곳은 단 한 사람의 형제인 가난한 형의 집 앞이었다. 아직도 형의 생활은 비참한 형편에서 풀리지 않았다.
나는 그의 가족과 함께 아침을 먹으면서 내가 제대하였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나는 며칠을 쉰 후 예비사단에서 제대수속을 완전하게 마치고 일거리를 찾아서 분주하게 뛰어 다녔다.
군대 생활 중에 생긴 돈을 쓰지 않고 모은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중엔 상당한 돈이 있었다. 나는 그 돈을 이용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을 하면서도 적당한 일거리를 찾아내지 못했다.
어떻든 놀 수는 없었다. 닥치는 대로 수입이 생기는 일이면 하려 했고 보다 나은 일거리를 찾았다. 내 자신이 성숙한 이상 내 자신의 독립생활을 위해 형의 집에서 나갈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이즈음의 어느 날 아침이다. 형과 형수는 망설이는 나를 붙잡았다. 지금 자기들 처지가 딱하니 같이 기거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수중에 있는 돈은 믿을 만한 곳에 이자 돈으로 놓아 줄 것이니 그렇게 하자고 자꾸만 권한다.
언제나 정에 약한 나는 형제의 청을 뿌리치지 못하였다. 지난날들은 생각도 못한 채 내 수중에 지닌 돈을 두 사람의 말만 듣고 맡겨 버린 것이다.
우리는 당장 살기에 불편하지 않은 집을 구해서 이사를 하였다.
처음 한두 달은 형의 가족은 친절했고 우리는 사이가 좋아 보였다. 3개월이 넘어 가면서 형과 형수는 점점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 갔다. 처음 이자를 든든한 곳에 놓아 준다고 가져간 돈은 이자는 그만 두고라도 원전 이야기도 없었다.
때때로 형수가 무슨 일 때문인지 기분만 언짢으면 네 형제가 내 신세를 망쳤다고 도전적인 말을 걸어왔고 형은 내가 맡긴 돈이 옛날 먹여준 밥값도 안 된다고 생트집을 잡아 왔다.
자기들만 믿고 무일푼이 된 나를 이제는 집 안에서 몰아내려고 애를 썼다.
나는 당장 딱하게 된 신세를 어디에 가서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가슴 속에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이 눈앞이 캄캄해지고 있었다.
13. 냉정한 사회
나의 입장은 딱하게만 변해 갔다.
이거 속은 것 아닌가 하는 의심도 생겼고 처음으로 세상에서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도 생겨났다.
막연하게 형님 내외분이 마음을 바꾸어 주길 기다려 보았으나 모든 기대는 부질없는 생각에 불과하였다. 나의 처지가 더욱 딱하게 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마음이 두 사람을 대하기가 여간 거북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비관이 더 먼저 생겼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이런 나한테 위로되는 말 한 마디 하는 사람이 없었다.
반복했던 지난날의 운명을 두고 생각만 해도 서러움이 생겨나고 있었다. 나의 마음은 그만 자신을 지키기에도 의욕을 잃었다.
그런 나한테 어느 날 아침에 일이 또 생겼다. 금방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는 나를 두고 형님은 옆에 와서 생트집을 잡기 시작하였다.
들어서 참기 어려운 말들만을 골라서 윽박질러 댔다. 그래도 가만히 있으니깐 병신자식 꼴값한다고 말을 하며 발길로 얼굴을 차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나 상상 못한 행동에 기가 막혔다.
날아오는 발길과 주먹을 맞지 않으려고 피했다. 형님은 더욱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다. 그러다가 부엌칼을 들고 들어와 죽여 버리겠다고 휘둘렀다. 나는 칼끝을 피하여 우선 방 밖으로 나갔다.
더욱 심하게 나의 몸 쪽으로 칼을 휘두르며 따라 나왔다. 형수는 이런 일을 보고도 말리질 않았다. 나는 다급한 김에 신도 못 신고 골목길로 뛰어나갔다.
형님은 이번 참에 나를 그 집에서 내어 보낼 양인지 끝까지 죽이겠다면서 칼을 든 채 따라왔다. 간신히 먼 길까지 뛰어가서 형님을 떼어 놓고 내 몰골을 보니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맨발로 뛰다가 돌부리에 채인 발끝이 퉁퉁 부어 있었고 찢어진 발가락 사이에는 피가 흘렀다. 점점 긴장이 풀리니깐 통증이 머리끝까지 전해져 왔다.
급한 김에 맨발로 인근에 살고 있는 누나 집으로 찾아 갔다. 나를 동정하기에는 힘이 없는 누이도 나의 몰골과 이야기를 듣고는 왜 그런고 하면서 한탄하며 눈물만을 흘렸다.
나는 국민학생인 누나의 아들한테 형님 없거든 집에 가서 신발과 옷가지를 가져오게 하였다. 누나 집에서 차려준 아침을 몇 술 뜨고 가방에다 간단하게 짐을 챙겨 넣었다.
가야 할 목적지도 없는데 나의 신세는 떠나야 했다. 이런 행동을 보면서도 누나는 한숨만 지을 뿐 어떤 말도 못 끄집어낸다.
다시금 가슴 속에는 서러움과 비관이 쌓이기 시작했다. 양 볼에는 눈물이 흘렀고 이번 기회에 죽어 버릴까 하는 극한 생각까지 떠올랐다. 힘이 빠진 발길을 의식적으로 옮겼다.
이럴 때 내가 찾아가야 할 곳은 세상에서 한 군데도 머리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당장 느끼게 된 것은 마음속에서 생기는 풀 길도 없는 분노뿐이었다. 부산을 떠나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나는 기차가 있는 역 쪽으로 걸었다. 어디로 떠나는 행렬인지 역 앞에 오니 광장에는 차를 타려는 줄이 길게 늘어 서 있다. 매표소 쪽으로 걸으며 생각한다. 어느 쪽 차표를 구할 것인가. 당장 행선지부터 정해야 했다.
먼 도시의 이름들이 급하게 머리에 떠올라 온다.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대전까지의 보통급행 표 한 장을 구입하였다. 길게 늘어진 줄을 따라 들어갔다. 역전에는 떠나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들의 눈길이 있었다.
기차는 제시간에 맞추어 기적을 울린다. 창가에 자리를 잡은 나는 스쳐가는 들녘을 바라보는 것으로 모든 것을 잊으려고 애를 썼다.
짓궂은 운명이여, 그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사나이여! 지금 너는 어디로 가고 있느냐? 부질없는 걱정으로 오늘을 보내지 마라. 내일이면 또 밝은 태양은 떠오르니라. 하는 생각이 자신을 타이른다.
그때 옆 좌석에 앉은 사람이 나한테 말을 건네 왔다. 50이 될까 하는 시골 여인이었다. 건너 쪽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말이 없는 나를 심심찮게 쳐다본다.
「총각은 어디 사우? 어디 가우? 얼굴이 부자상이여.」
하고 50대의 여인은 내가 대답을 안 하는데도 자꾸 물어왔다. 여인은 또 삶은 계란 한 개를 건네주며 나한테 먹으라고 권한다. 세상에는 이렇게 좋은 사람들도 있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 형님 내외분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겨울철의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 기차는 대전역에 도착하였다. 난방이 들어 있던 훈훈한 객차 안을 빠져 나와 차가운 기운이 가득 찬 낯선 도시의 역 광장에 서고 보니 생소한 도시가 나에게는 더욱 냉정해 보였다.
나는 동서남북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무엇인가를 찾았다. 어느 쪽으로 발길을 옮길까. 행선지가 당장 떠오르지 않는다. 먼 곳에서 시외버스가 기차에서 내린 손님을 부르느라고 어떤 젊은이가 고함을 질러댄다.
역전 한쪽에는 가까운 유적지를 소개하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속리산, 공주, 부여, 망설이던 나는 마음속에서 공주에서 오늘 저녁을 쉬며 생각들을 정리하기로 하고 우선의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서 공주행 버스를 타게 된 것이다.
어두운 밤길을 버스는 불빛을 비추며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힘차게 달린다. 한참 지루함을 느끼게 한 후 공주의 한 정류장에서 버스가 멈추었다.
차에서 내려 보니 생각보다 초라한 공주 시가지가 눈으로 들어왔다. 우선 가까운 여관의 간판을 찾았다.
볼 품 없는 여관방은 연탄 불 덕택인지 구들목만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이 생각 저 생각이 피로를 쫓아 버린다. 잠이 오려고 하지 않는다. 오만 가지 생각들을 다한 끝에 내린 결론은 우선 인근의 절을 찾아가 보자는 뿐이었다.
부모 덕 없는 사람은 형제 덕도 없다고 박복한 운명을 지니고 세상의 시비나 치르느니 차라리 중이나 되어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기억을 버리고 싶었다.
동화책에서 읽은 어떤 주인공의 팔자가 나와 같았다고 느꼈다. 날이 새면 또 어느 쪽 절을 찾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들이 자정이 다 될 때까지 나의 머리속에서 사라지지가 않았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에는 아침 햇살이 창문을 밝게 비추고 있었고 여관에는 별 손님이 없는지 조용했다. 우물가를 찾아 차가운 냉수로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여관을 바쁘게 나왔다. 당장 느낄 수 있는 것은 어제 점심부터 거른 배속에서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나의 눈동자가 열심히 근방의 식당을 찾았다. 아침나절이라 손님이 없든 탓인지 장터 근방에 있는 식당에는 별 준비된 음식이 없었다. 손님이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 집에서 뜨거운 국물에 밥을 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해 국밥 한 그릇을 억지로 시켜서 먹었다.
식당 주모가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나는 주모한테 먼저 말을 걸었다.
「이곳에서 가 볼만한 절이 어디 있습니까?」
나의 말을 들은 주모는 자기대로 생각하다가 '갑사' 지요 하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절 이름을 가르쳐 준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길어졌다. 주모는 재미있게 말을 받아 주면서 갑사 가는 길은 버스를 타면 된다고 일러 주고 또 곧 떠나는 버스 편까지 일러준다.
국밥 값을 주고 주모가 일러준 정류장으로 버스를 타기 위해 걸었다.
들은 말처럼 갑사행 버스가 시동을 걸어 놓은 채 금방 떠날 차비를 하고 있었다. 버스에 올라 차장인 듯한 아가씨로부터 갑사까지의 차표를 끊었다. 시간에 잘 맞추어 온 탓인지 얼마 후 차는 출발하였다.
금방이겠지 싶은 마음과는 달리 터덜거리며 꼬부랑길을 버스는 한 시간이 넘게 달린다. 얼마 후 숲이 우거진 산비탈에서 버스는 멈추었다.
다 왔다는 차장의 말에 차에서 내리니, 갑사까지는 제법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고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이 또 말을 했다.
혼자서 산을 거슬러 올라갔다.
눈앞에 <계룡산 갑사>라는 절의 현판이 들어온다. 담담한 마음속에 내가 여기까지 온 사실에 대해 의문과 쓸쓸함을 느꼈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절의 웅장한 자태가 시야에 들어왔다.
머리를 깎고 승복을 걸친 나의 초라한 모습이 거울에 비친 것처럼 눈앞에 선하게 보였다.
이제는 나에게도 세상의 시비는 끝나는구나 생각하면서 절의 경내로 발길을 옮겨 갔다.
우선 어디부터 찾아가야 하는지 이것저것 생각하는 동안 발길은 대웅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인자한 부처상의 모습이 나의 눈에 보였다. 부처상이 무엇이라고 말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네 팔자를 몰라 이제 오느냐고 나무라는 것만 같다.
가방을 문 앞에 놓아둔 채 불상 앞으로 걸어 들어갔다. 2천원을 제단 앞에 놓고 절을 했다. 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불상을 보며 나의 마음속으로 말을 했다.
법당을 막 돌아서서 나오려는데 그 절의 스님이 걸어온다. 나는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스님은 습관인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절을 한다.
나는 그에게 승려가 되는 길을 묻고자 벼르다가 그의 표정과 행동 때문에 주지 스님 계신 곳으로 좀 안내해 달라고 하려던 생각과는 달리 엉뚱한 말로 표현을 바꾸었다.
「이곳에 조용한 암자는 어느 곳에 있는지요?」
꼭 휴양 온 사람처럼 말을 꺼낸 것이다.
승려는 더욱 굽실거리며 구름이 걸려 있는 산 정상을 가리키면서 저 곳에 올라가면 '등원암'이라는 암자가 있다고 가르쳐 준다. 친절하게도 승려는 등원암으로 가는 산길 입구까지 안내를 해 주다가 더 못 바래다 드려서 미안하다고 인사까지 했다.
나는 혼자 산을 오르며 등원암이란 암자가 나를 반겨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런 생각과 함께 가파른 비탈길을 숨을 헐떡이며 기어 올라갔다.
단풍이 들고 있는 계룡산은 나의 눈에도 명산이구나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갑사를 빠져나와 산을 오르고 있는 자신이 우습다. 당장 중이 될 팔자마저도 못되는가 싶어 더욱 애꿎은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모든 것은 전생에 있었던 인연인가 생각하면서 두 시간이나 걸려 가파른 정상까지 올라갔다. 승려가 일러주던 쪽의 산 정상에서 등원암을 찾을 수가 있었다.
암자의 법당을 찾아 들어가서 불상 앞에 절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빌었다. 저의 앞날을 인도해 주옵소서.
나는 당분간 이 곳에서 휴양을 하기로 했다. 좀 더 자신의 신상 문제를 냉정하게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어떤 길이든 확실하게 정하고 싶었다.
암자의 주지 스님을 찾았더니 한 사람의 중이 나를 맞는다. 너무 외진 곳이어서 그런지 그곳 사람들은 초면인데도 좋은 인상으로 무척 반긴다. 첫 대면 인사를 나누었다.
당분간 이 절에서 휴양을 하고 싶다고 나의 심중에 있던 말을 끄집어내며, 될 것인가 물어 보았다.
암자의 중은 한 달에 쌀 25되를 받겠다고 먼저 의식주 문제를 말한다. 나는 즉석에서 2개월간 있겠다며 쌀 한가마 값을 돈으로 내어 놓았다. 그로써 당분간 나는 그 암자의 식구가 되었다.
500년 전에 세워졌다는 그 암자는 신도안 쪽을 향해 서 있었으며 그 암자에는 전설이 서려 있었다. 옛날의 절 이름이 압정사였다고 한다. 그곳에서만 십 년이 넘게 일을 해온 김 노인이란 동학교도인 절간 인부가 친절하게 귀띔을 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오면서 300년 전부터 등원암이란 암자로 이름을 바꾸었고 당시 암자의 현판을 쓴 사람의 이름이 나의 이름과 같은 사람이란다. 오늘까지 이어온 절의 내력을 듣고 나니 신기한 마음마저 생겨났다.
여름철에도 서리가 내릴 때가 있다는 산 위는 세찬 바람이 계속 불었다. 나는 나를 위해 치워준 빈 방에 어둡기 전에 군불을 지폈고 칠흑같이 어두워진 밤을 촛불 한 자루로 방안을 밝히면서 오래간만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잠을 청할 수가 있었다.
며칠 동안은 같은 생활이 편안하다고 느꼈는데 시간이 경과하면서 사람에 대한 향수 같은 것을 느낀다.
주말이면 간간히 등산객이 산의 능선을 따라 지나가는 것이 보일 뿐 어쩌다 먼 곳에서 명산에 기도를 하러 왔다는 사람들이 절에 들릴 적이면 무척이나 반가웠다.
금방 변하는 것은 욕망도 희망도 산 생활이 빼앗아 가버린다. 먹고 자고 그리고 향수를 느끼며 하루를 보냈다. 아무 것도 변하는 것이 없는 하루를 넘기면 어제 생각했던 기대에 미소를 지었다.
단조로운 생활과 싸워 보는 외에 나에게는 산을 헤매는 버릇이 생겼다. 가파른 산의 능선을 넘으면 계룡산 골짝마다 간간히 초라한 토담집이 한 채씩 나왔다.
평범한 도시 사람이 이해하기 힘드는 일이 이런 곳에서는 아직도 행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자도 없는 유사종교의 교주라는 사람이 보이는가 하면 기인이 되겠다고 산신께 기도만 하는 사람, 신통력을 받겠다고 토담집에서 기거한지 10년이 되었다는 자칭 도인도 있었다.
나는 마음이 내키는 날이면 이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어울리면서 꽁꽁 언 계룡산의 겨울을 외롭지 않게 견뎌내려고 애썼다.
대전과 서울에서 왔다는 불공 손님을 만나는 날은 세상 이야기가 듣고 싶어 여자이건 남자이건 손님 옆에서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어느덧 절 생활을 한 지 50여일이나 지났다. 섣달 그믐날을 얼마 앞둔 날 나는 어떤 그리움 같은 것을 느꼈다. 마지막 결정을 짓기 전에 한 번 산을 내려가 보고 싶은 충동이 생긴 것이다.
알 수 없는 정이 마음속에 충동질을 했다. 어머니의 얼굴이 왠지 머리속에 떠올랐다. 그런 일이 자꾸 산을 내려가게 생각을 갖게 한다. 나는 그런 어느 날 새벽, 부산을 한번 다녀오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날따라 밤새도록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절의 주변에서 들렸다. 새벽녘에는 절의 마당 앞 길목에서 큰 부엉이 두 마리가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사람이 바로 지척에 가도 짐승들은 길을 막고 피하지를 않았다. 내가 짐승들의 털을 잡자 비로소 부엉이는 허공을 향해 날아갔다.
나는 길을 따라 산을 내려와 아침나절에 대전역까지 와서 부산행 기차에 올랐다.
공연한 짓을 했다는 후회도 생겼고 다음 역에서 내려버릴까 하는 마음도 가져보며 딱 한 번 어리석고 못난 혈육들의 얼굴이나 확인하고 정말 중이 되어버릴 결심으로 마음을 붙잡았다.
기차가 종착역에 도착하고 나는 망설이면서 누나 집으로 찾아 갔다.
두 달 가까운 시일이 지나고 다시 보게 된 서로의 얼굴 속에서 누나는 떠나오던 때의 나의 사정을 너무 잘 알고 있어 혹시 무슨 일을 저지르지 않았는가 생각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멀쩡한 나를 보자 반가워하는 표정보다도 염려하는 눈치였다. 내가 산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이번에 산에 들어가면 출가를 하겠다고 말을 하니 누나는 울기 시작한다.
누나의 눈물을 본 탓인지 냉정하려고 애쓰는 마음도 찡하며 나의 눈에서도 눈물이 맺힌다.
누나가 먼저 눈물을 닦았고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내가 떠난 다음, 형님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더라 면서 제발 마음을 한 번 바꾸어 보라고 타이른다. 그러면서 이틀 뒤인 어머니 제사만은 지내고 떠나든가 말든가 하라고 권하였다.
아무리 괴로운 날과 설움의 날이 많았을망정 이 넓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형제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동안 누나가 나의 이야기를 형님한테 한 모양인지 제삿날 그는 나를 보고 싱겁게 웃는다.
오늘만은 참기로 결심하였는데도 지난 일을 생각하면 점점 순간들이 거북하게만 느껴졌다. 자정을 알리는 싸이렌 소리가 울리고 나서 제사상이 차려졌다.
나는 음식이나 좀 먹고 가라는 형님의 말을 들으면서도 통금이 된 시간인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누나의 말 때문에 나는 산으로 떠나지 못했다.
설날을 누나 집에서 보내고 새로운 결심을 시작했다. 출가하는 것은 언제라도 마음먹으면 되는 것, 어떤 욕망 때문인지 다시 한 번 도시에 머물고 싶었다.
나 자신의 노력 하나 만에 나를 걸고 도박을 벌리기 위해 서둘러 계룡산으로 들어가서 짐을 챙겨 가지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형제들과 접촉을 줄이기 위해 영도가 아닌 대청동 산비탈에다가 다다미 한 장짜리 방 하나를 구하여 살았다.
일이 생기면 무슨 일이든지 망설이지 않았다. 10원짜리 하나가 귀한 것 같아 먹을 때보다 굶고 버틸 때가 더 많이 생겼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나는 조금씩 마음속에 안정감을 쌓아가고 있었다. 또 한 해가 많은 문제들을 추억 속에 묻히게 하면서 흘러갔다.
그런 어느 날 나는 어두운 밤을 맞았다. 전등불을 꺼버린 작은 방안에서 잠이든 때였다.
나의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확인을 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점점 똑똑하게 들리는 소리는 '너의 용기와 양심을 동포에게 바치라' 는 그런 소리였다.
나는 누가 나에게 지금 이런 소리를 하는가 알아보기 위해 주위를 살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나는 더 크게 눈을 뜨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나의 눈에는 어두운 방안의 그림자만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잠이 깨어버린 귓가에 계속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참으로 나는 딱한 마음이 생기기도 하였다.
나하나 뻗대기도 힘든 세상에 나의 양심과 용기를 또 바치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때 알지 못할 일들이 일어났다. 나의 마음에 흥분이 생기는가 하면 가슴 속이 더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자꾸만 엉뚱한 생각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나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생각이 생겼다.
이런 일이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나는 비로소 더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고 젊은 나의 애정을 바칠 곳을 찾기 시작하였다.
나의 마음속에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행복하게 보이던 사람들의 겉 얼굴보다 그들의 내면을 생각했다. 또 불행한 사회의 원인들이 나의 머리속에 떠올랐다.
나는 점점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남의 불행을 구하는 일이 가장 큰 행복이라는 뜻과 사명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가슴 속에서는 동포여 하는 외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나의 가슴 속에 이런 일을 숨긴 채 빵을 구하기 위해 거리로 뛰어 다녔다. 그런데 그 비밀이 가슴 속에 담아 두기에 거북할 만큼 급진적으로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밤마다 담요를 뒤집어쓰고 외치기 시작했다. 기필코 나의 용기와 양심을 동포에게 바칠 결심을 하였다. 그런 나의 마음은 언제나 누구에게 인가 꼭 사기를 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누가 패가망신을 했다는 이야기나 누가 금방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퍼져도 사람들은 놀라지를 않았다.
국민들은 정치를 중요시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장차 세상은 어떻게 변해 갈 것인가? 조급한 생각들이 나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였지만 나는 나의 할 일에 대해 엄두조차도 가져 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어느 순간 어두운 방안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신을 찾으며 간구의 말을 끄집어내었다.
「신이여 저의 국민들을 구해주소서!」
나의 마음은 그 순간 점점 아찔해 갔다.
나는 그 날부터 시간이 나면 열심히 독서에 몰두했다. 어려운 것을 스스로 이긴 위인들의 자서전 같은 걸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확실한 결심을 했다. 동포들의 빵과 자유를 위해 자신을 바치겠다고 나는 이런 생각을 정리하면서도 만약 내가 무슨 말을 끄집어낸다면 나를 보고 사람들은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것만 같았다.
어처구니없던 나의 형편, 딱하기 만한 이 사회의 장래가 나의 가슴 속에서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어쩐다 어쩐다 하면서도 주위에서 알아주지 않으니 말을 끄집어내기가 무서웠다.
사랑을 알면서 사랑을 지킬 줄 모르는 사람들을 두고 무슨 말을 할까 하는 자포자기 적인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는 더욱 어지러웠다.
대청동에서 방을 구해 열심히 일한 보람이 1년 만에 나타났다. 수중에는 약간의 돈이 모였다.
그때 영도의 누나가 생활이 쪼들리는지 혼자 지내는 내가 안타까워 그러는지 남매간에 같이 한 집에 있자고 한다. 내키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청동에서 다시 영도의 누나 집 작은 방으로 하숙을 옮겼다.
국민학생인 생질들과 같은 방을 쓰면서도 과거보다 나아진 내 자신을 느낄 수가 있었다.
철이 든 때문일까. 가슴 속에서는 사명감이 담긴 불길이 계속 타올라 피를 끓게 하였다.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무엇이든 이념을 가진 행동의 길을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우선 서울에 한 번 다녀오면 무슨 일이건 알게 될 것 같은 마음이 생겼다. 약간의 돈을 수중에 지닌 채 차비가 가장 싼 서울행 야간 보통급행 열차를 탔다.
기차는 출발부터 만원을 이룬다. 요금이 싼 만큼 힘이 많이 드는 여행이었다. 세 사람씩 앉는 좁은 의자에 운 좋게 앉아 졸다보니 밤이 바뀌고 새벽이 되면서 기차의 창밖에 보이는 무수한 불빛들이 서울에 왔음을 알려 주었다.
이른 아침에 역전 근방에서 싸구려로 파는 해장국 한 그릇을 시켜 먹었다.
밀리는 차와 새로 생기는 빌딩들을 쳐다보니까 이방지대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이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사전에 계획된 여행도 아니요, 누구와 약속을 하고 올라온 서울 길도 아니었다. 나의 행동에는 엉뚱한 곳이 많았다.
나는 버스가 닿는 정류장 쪽으로 걸었다. 기억을 더듬어서 모래내행 버스를 탄 것은 순전히 몇 년 전에 만났던 한 사람의 얼굴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추풍회의 오재영 씨 소개로 알게 되었던 당시 그곳의 임시 대변인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던 구좌석이라는 청년을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언제인가 그가 가르쳐 준 번지도 생각나지 않는 주소를 찾아 북가좌동 일대를 두어 시간이나 헤맨 끝에 겨우 그의 거처를 찾기는 찾았으나 그 사람은 외출 중이었고 그의 부인인 듯한 여인이 약국에서 언제쯤이면 돌아올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할 일없이 그곳에서 그냥 기다릴 수만 없어서 다시 시내 쪽으로 나왔다. 온종일 종로1가에서 3가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하루해를 보냈다. 무수한 빌딩 숲속에서 높이 달린 간판을 쳐다보면서 하루를 보낸 것이다.
한 그릇의 짜장면으로 점심과 저녁을 겸해 때우고 나니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싸구려 여인숙의 방뿐이었다. 희미한 전등불, 때 묻은 이불, 퀴퀴한 냄새가 나는 서울의 여인숙이 숙박비가 비싸다고 여기면서도 금방 잠들지 못한 채 밤이 새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하루 저녁을 넘긴 나는, 이른 아침 어제 한 번 다녀온 모래내 길을 묻지 않고 찾아갔다.
먼 산에 떠오른 햇살이 세상을 점점 밝게 비춘다. 내가 구좌석씨의 집을 방문하자 그는 자기의 아내에게서 들은 어제 찾아왔던 방문자에 대해 궁금증을 느꼈는지 나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의외인 듯 느끼면서도 방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이야기가 오고 가는 동안 더욱 친근감과 신뢰감이 두 사람한테서 생긴다. 그의 아내가 내 아침까지 차린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자 나는 너무 일찍 그를 찾아오게 된데 대하여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우리는 밥상을 물린 다음에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나의 포부를 이야기 해 보았고 그는 나와 외출을 할 준비를 서둘렀다.
나는 그와 지낸 시간 속에서 그가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신념이 강한 청년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종로 2가에서 버스를 내린 두 사람은 제법 이름이 알려진 정치인들을 만날 참이었다.
마침 그 시기에 종로에 있었던 사법서사 회관의 건물 안에 국민당 창당 발기위원회의 사무실이 있었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장준하 씨를 구좌석 형이 소개해 주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국민당의 창당준비 위원회가 있는 건물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 할 때 그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장준하 씨를 만났다.
구좌석 형이 아는 척을 하면서 인사를 하였다. 장준하 씨는 그의 일행과 함께 바쁘게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금방 엘리베이터의 신호가 밑으로 내려감을 나타낸다.
나는 내가 만나고자 원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우리도 다음에 올라 온 승강기를 탔다. 두 번째로 찾아가게 된 곳이 서민호의원의 사무실이었다.
14. 정당에 입당하다
종로 2가의 큰길가에서 찾은 대중당의 간판이 붙어 있는 한 정당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구좌석 형은 망설임 없이 당수실이란 팻말이 붙은 앞에서 노크를 한다. 비서인 듯한 사람이 처음 보는 두 사람을 두고 용건을 물어왔다. 구좌석 형이 나를 대신하여 모든 사정을 말한다.
나는 처음으로 호남아로 소문이 나 있던 노정객인 서민호 의원을 만날 수가 있었다. 구좌석 형은 전부터 아는지 자기 이야기와 근간의 안부를 그곳 정당의 대표이자 국회의원인 선생께 물었고 선생도 구좌석 형의 말에 쉽게 대답도 해주었다.
특히 그 분은 처음 본 나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준다. 선생은 또 선생의 전 비서관이었으며 그곳 당의 조직국장인 장재철 씨를 불러 나에게 소개를 시켜주었다.
나는 그 곳에서 젊은 청년지사들을 장재철 씨로부터 소개를 받았다. 그곳에 모이는 젊은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하는 동안 나는 많은 공감과 친근감을 느꼈다. 나도 그들과 사귀며 좋은 뜻을 같이 찾아보고 싶었다.
나는 그때서야 서울에 온 것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로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중당에 입당원서를 내니 금방 내가 유명한 정치인이 되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신 앞에 맹세까지 했다.
「저는 앞으로 제 행복보다 민족의 영광을 위해 제 몸과 마음을 바칠 것입니다.」
나는 그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이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애국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처음으로 사나이다운 포부가 생겨났다. 조금 전까지만 하여도 모르던 사람들이 내가 당원으로 입당 원서에 서명을 했다는 사실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마치 10년 지기처럼 처음 만난 나에게 흉허물 없이 대하여 준다.
나는 그곳에 있었던 젊은 당 간부들과 잠시 동안의 시간이었지만 내가 궁금하게 여기던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또 내가 그곳 사무실을 나올 때는 모두 나의 손에 악수를 해주며 건투를 빈다는 인사까지 받았다.
한낮의 종로 길은 사람들로 길을 메웠다. 나 혼자 같으면 건너버릴 점심을 나를 위하여 시간을 내어 안내까지 해 준 구좌석 형을 생각하며 청진동 해장국 집에 들러 소주 1병과 해장국을 시켜 점심을 먹었다.
남자들끼리 마음이 통하다보니 금방 백년지기 같은 우정을 느낀다.
거리에 나선 두 사람은 서울역 방면의 차를 탔다. 서울역 광장에서 지방으로 떠나고자 하는 사람,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으로 한창 북적대었다.
나는 부산행 보통급행 열차의 승차권 1매를 구했고 구좌석 형은 떠나는 나를 보면서 작별인사를 하였다.
객차의 좁은 공간에서 입석손님으로 만원인 사람들 틈에서 운 좋게 의자에 엉덩이만 낀 나는 스치는 창밖을 내다보면서 가슴을 활짝 폈다.
머리속에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의 쇳바퀴 소리가 가슴 속에서 고동치는 젊음의 한처럼 느껴졌다.
밤이 깊어갈 무렵, 기차는 부산역에 도착했고, 다음 날부터 나는 지구당을 창당하려고 한 사람 한 사람 동지를 모았다.
관록과 금력, 권력이 없는 나의 출발은 한 마디로 고난의 길이었다.
애기가 커서 어른이 된 사실만 믿으며 언제인가 이런 일들도 성숙할 것이란 생각을 했다.
하루는 10여명의 세상살이에 지친 순박한 사람들을 나의 하숙집인 누나 집 작은 방에다 불렀다.
소주 한 병과 막걸리 주전자를 방 가운데 놓아둔 채 그 주위에 사람들을 앉게 해서 지구당 창당을 위해 요식 절차를 서둘러 댄 것이다.
서로 권한 술로 몸에 술기운이 도는지 아무도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인 사람들은 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 나의 행동이 신기한지 그저 놀라는 눈치들이다.
나는 이때부터 사람들한테 주민등록증을 내어 놓게 하여서 창당 준비 위원회에 필요한 서류를 만들면서 도장을 받아 내었다.
내가 하는 행동이 나쁜 짓이 아닌 줄을 안 사람들은 안심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당을 만든다니까 혹시 무슨 연줄이나 잡힐까봐 스스로 협조하는 형태를 취해 준 것이다.
별 어렵지 않게 내가 만든 서류를 선거 관리위원회 정당과에 접수까지 시키고 접수증을 받았다.
나는 다음에 남은 요식 절차를 서둘렀다. 우체국을 다니면서 서울의 대중당 중앙당 조직담당 국장한테 장거리 전화를 걸었고 구좌석 형한테도 전보를 쳤다.
이런 일은 내가 서울에서 헤어질 때 그곳 사람들과 약속된 일들이었다. 모든 일은 순조롭게 되어갔다.
창당대회 날도 받았고 정해진 날짜에 대회장으로 쓸 예식장 1실을 예약도 했다.
대중당 중앙당에서는 지구당 창당대회에 사무총장을 내려 보냈고 구좌석 형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참석을 하였다.
꽤 넓은 예식장 안에는 가난한 동리 사람들과 친구들, 그리고 나의 창당대회에 협력해 준 노무자들로 좌석을 메웠다.
짜여진 식순에 따라 순서가 연결되며 대회가 진행된다. 나는 난생 처음 청중이랍시고 동리 사람뿐인 낯익은 얼굴들을 보며 연설을 시작한 것이다.
미리 문구를 작성하여 외어둔 것이 없었기에 약간 두근거리는 마음과 상기된 얼굴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부담감을 느꼈다.
웅변대회의 연사로 나갔을 때처럼 청중을 보며 인사를 했다.
한 사람이 박수를 치니 따라서 박수를 친다. 열려진 창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를 만들기까지 수고해 주신 당원 동지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를 더욱 빛내 주신 내빈 여러분!
지금 이 순간 여러분과 나 자신을 위해 무어라고 인사의 말을 올려야 할지 제 마음이 자꾸 당황해집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이러한 저를 앞으로 이끌어 주시고 채찍질을 해 주셔서 이 땅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도록 키워 달라고 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제가 오늘 이런 일을 통해 여러분 앞에서 약속드릴 수 있는 분명한 말은, 어떤 일이든 더 열심히 임할 것이며, 바라는 것이 있다면 고난과 역경 속에서 살아온 제가 앞으로의 일을 통해서 제 자신을 여러분과 여러분의 친구들에게 알리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저는 신의 뜻을 믿으며 진리를 믿는 쪽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오늘 부족한 것이 있다면 과거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뿐입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앞으로는 고쳐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매우 어렵게 생각되어 왔으나 그 일을 하는 사람에 따라 매우 쉬운 일입니다.
위선과 거짓을 일삼는 자는 일생을 통해 이루지 못할 것이나 행동과 실천을 통하여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땅에 생명을 가진 자 중에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렇지만 그 세대를 위해 불의와 싸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은 게 세상인심입니다.
이런 일들이 신의 뜻일까요? 분명한 것은 축복받는 사회, 축복받는 민족의 길을 위해서는 진리가 통하는 쪽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제 소신입니다. 이 소신만으로 저의 인사를 대신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의 인사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힘차게 박수를 쳤다.
모두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식순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중앙당의 사무총장이었던 이 몽 선생께서는 대중당의 당수였던 서민호 선생이 바쁜 일정 때문에 이 대회장에 참석 못한 사실을 설명하고 치사를 해 주셨다. 만세 삼창에 이어 창당대회는 끝이 났다.
모였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갔다. 험난한 앞길이 길게 길게 뻗쳐 있는데도 나는 마냥 즐거운 마음이었다.
씨름판에서 상대를 내동댕이치던 때를 생각하면 자부심도 생겼다.
이렇게 해서 양심과 자신의 용기만으로, 저 하나 살아가기에도 급급한 판국에 국가와 사회 민족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현실 속에서 분노와 비애를 느끼는 자신의 시간을 만들어갔다.
인간의 생존에는 꿈과 현실이 엄연히 존재한다.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나의 인생이었다.
누구처럼 나에게도 삶의 원칙은 있기 마련이다. 허기진 뱃속을 채우기 위해선 투쟁이 아니라 노동을 하여야 했다. 힘드는 일이거나 위험이 따르는 일도 거절하지 못하는 것은 현실에서 피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소에서 어깨에 철판을 메고 먼 곳까지 날라야 하는가 하면 용접기에서 불똥이 튀어와 살에 닿는데도 몸을 털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들이 고통보다는 미래에 대한 애정으로 느껴져서 그런대로 자신을 위로했던 것이다. 시간은 계절을 바뀌게 하였고 한 해를 넘겼다.
나는 내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있었지만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선한 사람들이 권력 밑에서 피해자로서의 슬픈 일들을 당하는 때였다.
세상을 보는 나의 마음속에는 허탈과 허무가 쌓였고 생각과 생각 때문에 잠 못 드는 밤을 맞이해야 했다.
민족의 비애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자기 자식이 씩씩하고 용기 있게 크기를 원하는데 이 땅의 왕들은, 오늘의 권력자들은 제 자식은 사랑할 줄 알면서 남의 자식은 사랑할 줄 모르는가.
무조건 억누르며 인간의 가장 숭고한 용기와 개인의 투쟁을 말살하려는 비겁한 수단은 수 천 년의 역사 속에서 변변한 영웅 한 사람을 길러내지 못한 왕조의 포악성과 절대 복종의 전통을 오늘날에 와서 꼭 지키겠다는 것인가.
이렇듯 비애에 빠져버리는 슬픈 감정 속에서 나는 나의 사명감이 무엇인가고 마음속에 물었다. 비로소 번민하던 중에 내가 할 일을 처음 결정한 것이다.
내가 정당에 입당하여 정당인이 된지 반년이 된 겨울이었다. 나는 현실을 잊고 사는 동포들에게 무서운 미래가 닥쳐오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강연회를 주선하게 된 것이다. 그 이름을 민주시민 단합대회라고 붙였다.
15. 처음 느낀 사명
이곳저곳의 우체국을 드나들며 서울에다 장거리 전화를 자주 신청하였다. 처음으로 나는 현실에서의 정의감을 억제하지 못해 단독으로 민중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시민 단합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서둘렀다.
연사들을 좀 보내 달라고 대중당 중앙당 당사에다 전화를 걸었다. 몇 차례의 통화 끝에 참석자 명단을 통고 받았고 나의 결심이 실천으로 바뀌는 문제들이 남았다.
먼저 장소를 예약해야 했다. 2000명 정도가 들어올 만한 장소였다. 600석의 의자까지 준비했다. 벽에 붙일 포스터도 인쇄소에 부탁하여 만들었고 30여명의 대회준비위원을 구성하였다.
이런 경험이 없는 나로서 혼자 주관을 하는 일들이라 실수도 많이 생겼다. 모든 진행과 계획을 혼자 세워야 했고 준비위원 전부가 이웃 동리의 건달들이거나 공사장의 인부들뿐이었다.
이들이 한 곳에 다 모인 날이면 각자 생각하는 의견이 달라 시비거리가 생긴다. 당장 옆에서 지쳐버릴 것 같은 형편이 되는 것을 그들을 달래서 일을 추진해야 하는 것이 나의 사정이었다.
어쩌다 술기만 몸속에 들어가면 선배 후배 따지느라고 소란을 피운다. 어떤 날은 나에게 의리를 지킨다고 제법 굽실거리며 열성을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도 도저히 남을 이해하려고 들지 않을 때가 있다. 자기들 말마따나 의리 때문에 나를 따라 다녔다.
대회를 3일 앞두고 인쇄소에 맡긴 벽보가 나왔다. 누나 집의 조그마한 방에서 흰 종이를 사다 놓고 동리에서 한문께나 쓴다는 이발사를 청해다가 대회장의 아치를 쓰게 하였고 풀통을 들린 건달 친구들한테는 눈에 잘 띄는 길목에다 선전벽보를 붙이게 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청중이 모일 것인가 하는 문제뿐이었다. 이런 심정을 물어 볼 곳이란 건달과 노동자들로 구성된 주위에 있던 준비위원들뿐이었다.
30명 전부가 문제없다고 말은 한결같이 잘하는 데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모래 아침 대회를 위해 내일 오후에는 나의 말만 믿고 서울에서 연사들이 내려오는 날이었다. 대중당의 당수였던 서민호 의원도 내려온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이곳에 오는 연사들에게 조금이라도 경의를 표하기 위해 기차 도착시간 보다 두 시간 전에 대회장으로 쓸 영도 예식장 4층 강당에 준비위원 격인 노동자와 동리의 건달들에게 모여 달라고 부탁을 하고 밤이 늦어서야 소주 한 잔씩을 먹여 돌려보내었다.
긴장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약속된 오후 두 시가 되니 대회장으로 쓸 강당 내에는 삼십육 명이나 안면 있는 사람이 모여 들었다. 노파심에서 잘 해 달라고 인사를 했다.
모두 대답하나는 시원하게 저희들만 믿으면 된다고 떠든다. 그때의 형편은 정말 나는 그들의 행동을 믿고 싶었다.
몇 대의 시내버스에 분승을 해서 역전으로 출발했다. 기차시간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남았다.
처음에는 조심하던 일행들이 한 시간이나 남은 시간 때문인지 초조해 하였다. 한 사람 두 사람 보이질 않는다. 마음속에 낭패감이 생긴다.
남은 사람을 통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찾아오게 하니 추위 때문에 그렇다고 구차한 변명을 하면서 술 내음새를 풍겼다.
삼십 분쯤 후면 기차가 도착하는 시간인데 일행 중에서 두 사람이 실랑이를 해 댄다.
한 사람이 나를 보고 돌아가겠다고 했다. 또 다른 사람도 돌아가겠다고 한다. 이제는 숫제 모두 웅성거리는 형편이다. 그들을 달래면서도 당장 속이 상하고 손에 땀이 묻어나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바로 그때 스피커에서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관광호가 곧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온 것이다.
안내방송 덕택에 싸우며 간다고 떠들던 자들도 입을 다물었다. 37장의 입장권을 구하여 역 안으로 모두 들어갔다.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며 기차가 도착할 플랫폼에 간격을 두어 줄을 세웠다.
정시가 되니 역구내로 특급열차가 들어온다. 사람들이 내리고 낯익은 얼굴들이 차에서 내려온다.
나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 쪽에서도 나의 마중을 알아보고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아침나절 사정사정하여 돈을 깎아서 산 꽃다발을 대중당의 당수인 서민호 의원의 목에 걸며 내미는 손을 잡았다. 나는 나와 함께 마중 나온 사람들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모두 나의 선동에 소리를 내어 만세를 따라 부른다.
역 구내가 소란하였고 열차에서 늦게 내린 사람들이 놀라는 표정들을 지으며 돌아본다. 어설프게 해낸 연기였지만 그래도 부딪치니 넘어갔다.
무슨 일이나 있는가 호기심에서 기를 쓰며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이르고 몇몇 사람만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나의 마음은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들을 버스에 태울 수가 없어서 역 광장에 대기 중이던 영업용 승용차 한 대를 영도까지 대절하였다.
숙소를 어디다 정하면 좋겠느냐는 물음에 당수인 서민호 의원께서는 영도에 적당한 곳이 있으면 식장 가까운 곳에다 정하자고 하였다. 마침 생각나는 곳이 있어서 영도시장 가에 위치한 동원여관이란 곳에 방 두 칸을 잡아들게 되었다.
어떻게 알았던지 역전에 나왔던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여관 앞에 모여들었다. 나는 오늘 그들이 나의 체면을 세워준 것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면서 당에서 내려온 연사들한테다 일일이 인사를 시키고 소개도 시켰다.
그렇게 해서 보내 놓고 나니 한참 후 여관 앞의 골목길에서 어슬렁거리는 그림자가 보인다. 분명히 돈이 없는 그들이 어디서 술을 마셨는지 통금 시간이 될 때까지 골목에서 떠들어댄다.
어떤 자는 내일 어떻게 되는가 보라고 숫제 공갈까지 친다. 이런 것을 두고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나였다.
열 두 시가 넘어서야 나는 하숙집인 누나 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청했다. 이 생각 저 생각 때문에 머리속은 더욱 말똥말똥 해졌다.
결국 잠이 들지 못한 채 교회당의 종소리에 오늘 생긴 일을 걱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던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견딜 수 없는 피로가 몰려온다.
나는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찬바람이 부는 거리를 뛰어야 했다.
우선 해야 할 일은 전차종점 옆에 있는 마이크 대여업을 하는 무선사를 찾아 갔다.
문도 열지 않은 집에 찾아가서 자고 있는 집 주인을 깨웠다. 여덟시까지 마이크를 식장 내에다 몇 개 설치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당원 간부의 집을 쫓아다니며 자는 사람들을 깨워 대회장의 아치 설치를 하기 위해 서둘렀고 또 청중 동원에 가슴을 졸여야 했다.
여덟시가 가까워서 무선사에서 사람이 나와 대회장에 마이크를 설치한다. 서너 사람의 당원 간부가 식장을 꾸미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점점 불안한 심정이 되었다. 아침 아홉 시가 지나자 나는 당황하며 앞뒤 가리지 않고 설치기 시작했다.
아무도 청중에 관한 자신 있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때까지 건달과 노동자인 준비위원들의 얼굴이 한 사람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비통하게 변하는 마음은 설치가 끝난 마이크를 손에 잡았다.
이제 마이크 소리가 흘러가는 곳까지 안내방송을 내보낼 참이었다.
입 가까이에 마이크를 대었다. 막 입술을 떼려는데 그때 누가 나한테 명함 한 장을 내밀며 손님이 왔다고 전한다. 평소 적은 접촉 속에서도 마음이 서로 통하던 당 선전국장인 이경식 동지였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가 있다는 인근의 이발소 쪽으로 뛰어갔다. 이발소에는 이경식 동지가 얼굴에 비누칠을 한 채 면도를 하면서 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그의 특이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발사한테 독촉하여 서둘러 면도를 끝내게 했다.
밤새도록 기차여행에 시달려 온 그에게 아침식사도 먹이지 않고 9시 30분의 시계 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대회장으로 데리고 들어온 것이다.
텅텅 빈 넓은 공간과 빈 의자를 보면서 도저히 청중 동원이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었다.
나는 나의 옆에 서 있는 이경식 동지한테 마이크를 억지로 건네며 안내방송을 부탁하였다.
그는 나의 행동을 보며 나보다 당황하지 않았다.
나의 계획 없이 서둔 것 같은 대회장이 걱정이 되어서 여비를 빌려서 개인자격으로 내려 왔다는 말을 전하면서 시장기도 잊은 채 마이크를 잡은 손을 입 가까이 가져가서 입을 열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꽃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사 울고 간다.
여기는 ○○○입니다. 오늘 오전 10시부터 마이크 소리가 퍼지고 있는 이곳에서는 불의와 불법·부정과 싸워온 월파 서민호 선생님과 함께 독재와 싸우는 용기 있는 사람들의 대강연회가 개최되겠사오니 시민 여러분께서는 마이크 소리가 나가는 이곳으로 모여 주실 것을 알려드립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꽃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사 울고 간다. 여기는 ○○○입니다.」
안내방송은 계속 마이크에서 흘러 나갔다. 구슬프게 애처로움마저 띤 목소리가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한 것인가.
처음으로 사람들이 식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낯이 익은 얼굴들이다. 일행은 사복차림의 경찰관들이었다.
그들은 텅 빈 대회장을 둘러보며 겸연쩍은 얼굴을 한다. 그러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나는 불길한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혹시 일이 틀려 지지나 않는 것인가 걱정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10시가 되고 한 사람 두 사람 청중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금방 출입구가 줄로 이어졌다. 좌석이 찼고 통로가 사람으로 메워졌다.
안내방송은 장내의 정리방송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의 가슴 속에서 안도의 한숨이 튀어 나올 때쯤 나는 급히 여관으로 뛰어갔다.
서울에서 내려온 일행들한테 아침 인사 겸 준비사항이 다 되었음을 알렸다.
그들은 대회장에 사람이 모였느냐고 걱정인지 위로인지 말을 끄집어낸다. 나는 대성황이라고 현재의 상황을 보고 하였다.
10시 20분, 사회자의 낭랑한 음성에 따라 식순은 이어져 나갔다.
「왕권과 독재자에 의해서 우리의 역사는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느낌 속에서 불의는 정의를 압박하고 사람들은 올바른 곳에 나타나기를 꺼리는 요즈음 이곳의 이삼한 동지는 이 땅에서 용기와 지혜를 구하자는 구국애로 모든 시민의 단합과 민주 민권 수호의 의지를 이루고자 오늘 이 장소를 가진 것입니다. 먼저 이삼한 동지를 위해 격려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사회자의 인사 소개에 장내에서는 긴 박수소리가 이어져 나왔다.
나는 손을 들며 연단 쪽으로 걸어갔다.
청중들의 눈이 나를 주시할 때에는 나도 한 사람 한 사람 청중 속의 얼굴을 향해 나의 눈길을 보냈다.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나는 마음속에서 당황감이 생긴다. 몸과 마음이 피로해진 것을 느낀다.
조금 전까지만 하여도 할 일에 밀려서 가장 중요한 개회사를 준비하는 것을 잊고 있었다.
청중이 보는 곳에서 서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머리를 짜 보아도 금방 뾰족한 수가 없다.
장내가 다시 술렁술렁 하는 분위기로 변한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말들을 머리속에서 찾아내려고 애쓰며 입을 열었다.
「억울한 사람은 있어도 억울한 마음을 풀 길이 없으니 어찌 사람들이 자기의 장래를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불안하고 답답하고 울분이 치솟는 마음을 참고만 살자니 제 본분이 의심스러워 오늘 여러분을 이곳에 오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노예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의 동등한 주인입니까?
권력의 주변은 비대해 지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경우는 여위어만 가니 도대체 오늘의 인심을 알 길이 없습니다.
더욱 의심이 생기는 것은 사람들의 상식이 남을 위해서도 도움이 못되고 자신을 위해서도 도움이 못되는 것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이런 일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결과를 두고 기다리라는 것입니까? 짐작해서 알아라 하는 것입니까.
침묵이 흐르는 현장은 새로운 반성의 역사를 원하기 때문입니까. 단순히 민족정기의 파괴를 보기 위해서 입니까.
남을 믿지 않아야 자기가 사는 그런 시대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인가 나는 묻고 싶습니다.
세계는 지금 모든 나라가 정의를 근본으로 여겨 정치의 기본이 되고 있으며 약속도 생명과 같다는 조례에 의해서 남을 믿고 자신을 의지하며 모든 사람들이 위로를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다른 나라와 같은 근본을 갖추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잘못했고 여러분이 잘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생기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사람을 너무 믿었고 권력을 너무 두려워하기만 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대접을 받으려 할 때는 주인노릇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주인노릇을 못할 때 그 사회는 위계질서가 파괴되고 상식이 사라지고 스스로의 권위는 도전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깨닫고 분통이 터질 때는 이미 외로운 자신을 보게 되며 불행한 세계에 살게 된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내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건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생명과 희망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여러분을 청한 것입니다.
진리는 변할 수가 없습니다. 진리를 따라 가면 불행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인인 줄 알면 주인의 권위를 위해 싸워야 하는 것이며 믿음을 구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의 시대를 구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시대를 위해 두려움을 버렸습니다. 일을 잘 하는 일꾼은 우리의 보배이지만 나라를 망칠 일꾼은 우리의 적인 것입니다.
조그마한 위협이나 가소로운 협상 앞에서 스스로 노예가 되겠다는 어두운 마음만은 과거를 생각하더라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권력의 횡포는 진리가 아닙니다. 양심이 부족한 자의 행동일 뿐입니다.
저는 내 자신이 왜 불행한 세계에 살고 있느냐고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내 자신이 행복해질 것이라는 진리가 있는 편으로 가겠습니다. 그 때는 여러분 모두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때까지 불편한 점이 많더라도 참으시고 용기를 내어서 현명한 판단으로 오늘의 현실에 임해 주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사회자는 또 다음 연사를 소개하였다.
「반독재 투쟁의 기수, 민주주의의 기수, 대중당 당수이신 월파 서민호 선생님을 소개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장내는 숙연해진다.
선생님의 늠름한 모습이 마이크 앞에 서서 입을 열기 시작한다. 청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답례를 해 왔다.
탁월한 선생의 웅변이 열을 더하자 누구의 짓인지 마이크의 줄이 끊기는 일이 생긴다.
선생은 칠십의 고령인데도 육성으로 장내의 분위기를 사로잡았다. 오후 한 시가 넘어서야 대회는 끝이 났다.
군중들은 헤어지고 우리끼리만 남게 되니 서울의 연사들과 부산 시내의 지구당 위원장 후보들을 합쳐 십여 명의 일행만이 시내의 남포동 번화가로 나와서 당수인 선생께서 사게 된 설렁탕을 점심으로 먹으며 이야기들로 피로를 풀었다.
모두가 대회가 잘 되었다고들 칭찬해 주었다. 당수인 월파 선생께서는 비서더러 열차 시간을 묻더니 우리 일행더러 부산에서 제일 큰 다방에서 차나 한 잔 하자고 말을 꺼낸다. 우리 일행은 지나가던 인근의 길가에 있던 남포동의 향촌다방에 들어가서 커피를 시켰다.
다방 안의 손님들은 우리 일행 중에서 노신사가 당시 사람들의 기억에서 너무나 이름이 나 있던 서민호 의원인 것을 알고 모든 시선이 우리 일행 쪽으로 옮겨온다. 일행은 선생께서 떠날 기차 시간까지 그 분을 붙잡고 대화를 가졌다.
우리는 또 부산역까지 배웅을 나갔다. 기차가 출발하자 나는 혼자가 되었다.
영도로 돌아온 나는 방안에 들어가자 금방 자리에 쓰러지면서 잠이 들었다. 낮에 있었던 나의 행동이 대견해 보였던지 누이가 아이들을 떠들지 못하게 이르더니 몸 위에 담요를 덮어주고 나간다.
분주한 생활 속에서 겨울의 한낮은 빨리 넘어 갔다.
나의 가슴 속에는 누구에게도 느끼지 못해 본 연민의 정을 조국이란 이름 밑에 쌓아 놓고 애정을 키워 갔다.
또 한 해가 나의 나이를 올려놓고 만다.
세찬 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봄이 오고 있었다.
금년이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 해라는 것이 머리에 떠오를 땐 이제 정치 지망생인 나의 심중에는 환희와 걱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나를 두고 외쳤다.
「나는 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 자신을 두려워 할 뿐이다.」
봄이 가까운 새해 늦은 겨울에 중앙당에서 연락이 왔다. 대중당 전당대회의 개최 통고장이었다.
나는 대의원이랍시고 두 사람의 친구인 당원과 함께 서울행 기차를 탄 것이다.
전당 대회장인 시민회관의 별관에서 치렀던 대회에서 대통령 후보에 당수인 서민호 의원이 지명되었다. 선생은 당원의 절대 지명에 수락연설을 했다. 그러나 개인의 용기나 능력이 각광받지 못하던 시대는 한 사람의 인재 앞에는 불행한 시대였다.
전당대회가 끝나고 나서 얼마 안 된 기간에 당수였던 선생은 정권교체라는 시대의 열망 때문에 후보를 포기할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했다.
사람의 기대는 현실을 위해 한 사람에게 스스로 아픔의 순간을 맞이해 주어야 했던 것이다. 당시의 법률관계 때문에 선생은 당수직과 당을 떠나야 했다.
그 순간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동포의 희망이었다. 그 분은 마지막 순간 자기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을 두고 걱정을 했다.
신문의 뉴스가 선생의 거처를 관심 있게 기사화하였고 그의 반대자들은 그를 비웃었다.
선생의 사상은 모든 사람은 위선과 싸워야 한다는 궁극적인 이유 때문에 혼자 힘으로 지키던 대중당을 그때까지 가장 가까운 동지요 측근인 사람들한테 넘겼다.
아쉬운 정을 나누면서 떠나야 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오랫동안 손때가 묻은 당 인장을 가져 오게 하여 두 장의 국회의원 후보 공천장에 도장을 찍고 사무실을 나간 것이다.
두 장의 공천장에는 경북 지역의 청송 영덕의 김동현 형과 부산 영도구의 이삼한이었다.
선거를 앞에 둔 대중당은 긴급 정치회의에서 사무총장인 이 몽 선생을 새로운 대표 서리로 선출하고 20여일 후에 닥쳐 올 국회의원의 공천을 내고 있었다.
4·27 대통령 선거가 봄날의 기운과 함께 열기를 더해 가기 시작했다. 어느 쪽이 이길 것인가?
권력과 민심의 대결, 도시 사람이면 아무도 낙관할 수 없었다. 한 번도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없었던 민족의 전통이었기에 도시인들 속에는 선거 중에 이미 촌놈 때문에 망했다고 성패를 좌우하기도 했고 순박한 시민들은 가슴 속에 혼자 마음으로 정권교체를 갈망하였다.
오월이 되었다. 극성이 심했던 대통령 선거도 끝이 났고 국회의원 선거 후보 등록 마감일이 신문에 발표되었다. 공천장을 남보다 앞서 손에 쥐었던 나는 고민을 해야 했다.
벽보의 비용만 근 십만 원 돈이 넘어 드는데 나는 단돈 십만 원이 수중에 없었다. 순박하기만 한 나의 마음속에는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출마하라고 단돈 만 원도 보태 줄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염치없이 남에게 이런 꼴을 내 보이고 싶지도 않았으며 담담한 심정 속에서 5월의 그 날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출처 : www.natureteaching.com/TATHAGATA/tujaeg/tujaeng_mai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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