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삼한(李三漢)

외로운 투쟁(21~25)

기른장 2021. 1. 4. 16:46

21. 고독한 양심

 

나의 머리속에는 이제 자신에 대한 아무 생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대답뿐이었고 자신의 양심을 구하기 위해서는 불의와 싸우든가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는 두 가지 결정뿐이었다.

 

어려운 조국을 외면하지 않는 일만이 젊은이의 양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서울로 가야하며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든 찾게 될 것으로 믿었다.

 

이런 나의 결심이 확실해진 날 아침에 아내는 가방에다 나의 옷가지를 챙겨 넣으면서 몇 번이나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눈물이 고인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자기는 지금 아기를 가진 몸이니 나 혼자 생각만 하지 말고 태어날 아기와 자기 생각까지 하면서 어떤 행동이든 신중히 하라고 애원을 했다.

 

나는 나의 앞에 있는 그런 아내가 한없이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집을 나서는 나를 시내버스가 서는 곳까지 따라 나왔다.

 

나는 아내의 얼굴을 외면하면서 달려오는 버스 위로 올라갔다. 떠나는 버스를 넋 나간 사람모양 쳐다보던 아내의 얼굴이 어느 틈에 보이지 않는다.

 

아기를 가진 몸이란 말이 고독하게 살아온 나의 머리속에 맴돌았다.

 

나는 다시 부산을 떠나는 고속버스를 탔다. 버스는 속력을 높여 서울 쪽으로 달린다. 창밖에 스치는 풍경을 보면서도 마음속에서는 어떤 불안한 생각을 쫓을 수가 없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 버스에 탄 것인가 나는 또 무슨 일을 당장 할 것인가 내가 하려는 일들이 나의 가족이 고생하는 것만큼 보람 있는 일인가 자꾸만 의문이 쌓인다. 머리속이 생각과 그 생각을 짓누르는 또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찼다.

 

모든 것은 사람의 팔자인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자신의 냉정한 마음도 자책할 수가 없었다.

 

한 인간의 젊음. 그 젊은 인생에는 뜻이 있는 것이다. 이 땅에 태어났기에 그 땅의 모순과 싸우다 죽어간 사람들의 행동을 다음 세대의 사람들은 무어라 평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났다.

 

자기 조국을 사랑하고 그 조국에 대해서 애정을 바치려는 것은 결코 외로운 행동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느껴졌다.

 

자기를 버리고 자신을 위한 일을 포기하고 집을 나온 나의 행동이 잘못한 것만 같지는 않았다.

 

나의 가슴 속에는 아내의 가엾은 얼굴도 처음 세상에 태어날 아기의 얼굴도 어쩌면 조국에 대한 애정만큼 클 수가 없었다.

 

형극의 길을 앞에 두고 나는 조국에 대한 더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나의 심중에는 아내나 자식보다도 조국을 더 사랑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때 고속버스는 서울의 터미널에 닿았다. 나는 나의 심중을 우선 누구와 먼저 이야길 해 볼 것인가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머리에 떠오른 것은 구좌석 형의 얼굴이었다.

 

한낮의 서울 시내에서 시내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헤맨 끝에 서부경찰서 근방에서 구좌석 형을 만날 수가 있었다.

 

자기의 일하는 곳까지 찾아온 나의 행동에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우리 두 사람은 인근의 대포집으로 들어가서 해가 지기 전부터 소주병을 비우기 시작했다. 뱃속에 술이 가득 차자 몸이 부담을 느낀다. 두 사람은 밤이 어두워서야 택시를 잡아탔다.

 

구좌석 형 집 근처인 모래내의 한 여관에 방을 정했다. 나는 서울에 상경하게 된 동기를 여관에서 이야기하였다.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는 밤을 새웠다. 나의 이야기 속에서 그는 술이 깨어버리는지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긴급조치에 관한 법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한참이나 생각해보던 그는 입을 연다. 자기의 우정은 나의 뒤를 따라 가겠으나 세상의 인심이 변하고 있으니 어디 나의 뜻이 이루어지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진리를 따르려 하며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 살기 위한 양심으로 지금이야 말로 나를 조국의 문제에 바칠 때라고 나의 결심을 말하였다.

 

그는 듣고만 있었다. 나의 심중은 이 사람도 지금 긴급조치라는 법을 생각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미운 자들을 20년 동안 감옥으로 보낼 수 있는 법.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한테 있어서 오해를 남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그런데도 구좌석 형은 나의 국가에 대한 깊은 애정을 알고 있었다. 그도 나와 같은 한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3년 한일회담 반대를 위한 행동으로 그 자신은 전남 광주의 모처에서 군중이 운집한 집회장에 나가 사람들의 시선을 보면서도 준비해 간 칼로 배를 가르며 창자가 몸 밖으로 빠져 나오는 순간 의식을 잃으면서도 한일회담을 반대하자고 외치며 국가 장래에 대한 애정을 간직했던 사나이다운 행동파였었다.

 

나는 그의 그런 단순한 기질을 생각하며 우리는 조국을 위해 죽을 기회를 마련하여야 한다고 언제나 되물었고 그는 죽음을 각오한 순간만이 자기 손으로 자기 배에 칼을 꽂고 배를 가를 수 있다고 경험을 말했다.

 

삶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그 다운 이야기.

 

나는 그런 그의 마음에 공감을 느꼈고 나의 어떠한 생각도 그에게 상의를 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서로 양심과 정의감이 일치함을 알게 되었고 더욱 친밀해졌던 것이다.

 

아침이 늦어서야 우리는 헤어졌다. 그는 직장으로 나는 종로 방면의 버스를 탄 것이다. 반년 만에 올라온 서울은 많이 변해 있었다.

 

그렇게 건강을 나한테 자신하던 월파 서민호 선생도 그가 가진 꿈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난 후였다.

 

또 나를 서글프게 한 것은 어제까지 애국자인양 법석을 떨던 사람들이 권력 밑의 사랑을 얻기 위해 변질해버린 사실들이다. 이런 모든 현실을 보며 세상만을 탓할 수 없었다.

 

각박한 인심 속에서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해보자는 나의 뜻은 산 위에 가서 물고기를 잡겠다는 어리석음보다 더했다.

 

나의 주변으로는 서울 사람들의 뜻을 한 순간에 살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뿐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마음을 지니고 통사당의 김 철 위원장을 찾아갔다.

 

김 철 위원장은 통사당 사무실에서 삐걱거리는 고물의자에 앉아 있다가 나의 얼굴을 대하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언제나처럼 웃으며 나의 손을 잡았다. 나는 그 순간 의지를 느끼며 내가 서울에 올라오게 된 동기를 말했다.

 

김 철 위원장은 나의 이야길 들으면서 신중히 생각하라는 말을 해주면서도 얼굴의 표정이 금세 동요한다.

 

나는 오래간만에 말 상대를 만난 것 같아 분연히 나의 뜻을 표현했다.

 

「오늘과 같은 조국의 사정이 하늘의 뜻이었다면 내가 하고 싶어 하는 행동도 하늘의 뜻입니다. 진리는 간단한 것입니다.」

 

나는 나의 뜻을 이해시키기 위해 지난날의 절망에서 이겨 온 나의 생활을 처음으로 남에게 이야기했다. 한 사람 두 사람 내 얼굴 앞에 모인 그곳 당원들도 나의 이야기를 같이 들어주었다.

 

상식이 소멸되는 사회야말로 내 일생에 있어 가장 고통스러운 절망이라고 말한 것이다.

 

김 철 위원장은 나를 위로하는 말을 해주었다. 힘을 가지라는 것, 그래서 나의 힘으로 그곳에 소속된 민사청을 먼저 재건해보라는 제의였다. 당장 옆에 있던 통일사회당의 젊은 간부 당직자들이 호응을 해주었다.

 

나는 새로운 용기를 얻은 채 서울 시내를 헤매며 대중당 시절의 동지들과도 접촉을 하였고 민주통일당 내에서도 나와 개인적으로 마음이 통하던 젊은 당원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재야인을 자처하는 목사나 전직 교수, 전직 언론인들과도 만난 것이다. 서울 시내에 거주하는 군대생활을 할 때 알게 된 전우들의 소재를 찾아 헤매기도 했다.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국가에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것과 정권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반성을 위해 나의 행동을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동조세력이라기보다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서울 시내에서 40여명이나 생긴 것이다. 이제 적당한 날을 선택하여 민사청의 재건을 결성하고 결과를 확인하는 합법적인 절차만 거치면 무슨 얘기든 말이 통할 것 같았다.

 

어두워지는 사회를 젊은 정열로 밝혀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 때문에 나의 일을 빨리 완성시키기 위해 쉴 새가 없었다.

 

서울역전 근방인 염천교 다리 부근에서 일명 번개라 부르는 옛 전우로 하여금 힘깨나 쓸 건달들 4명을 모이게 한 자리에서 한 번쯤 세상에 나온 김에 보람찬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설득을 하였더니 공짜 술을 먹을 때는 무슨 일이든 따라하겠다고 하더니 내가 민사청을 재건할 것이라는 대목에서는 옆에 있던 자들은 금방 공포를 느끼는 겁먹은 얼굴들로 바뀌었다.

 

나는 순간 이들의 앞에서 나의 열변으로 현실을 안심시킬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많은 양심인 들을 감옥으로 끌고 간 긴급조치에 관한 법은 나뿐만 아니라 조국의 장래를 한번쯤 걱정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심경을 거슬렸던 모양이다.

 

어떤 도전이나 정당한 비판도 이 법을 피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런 현실에 도전하기 위해 나의 정열과 애정을 불 태우려는 것이다. 그럴 때 나의 주위에는 이런 나에게 용기를 가지게 격려해주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못마땅해 하는 자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일이 생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를 만났던 사람들 몇 사람이 그날따라 통 얼굴들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들이 이제 나를 피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마음속에는 그래도 겁나는 세상인심에서 믿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후가 되면서 내 쪽에서 그들을 찾아 거리를 헤매며 다녔다. 그러다가 우연한 장소에서 나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김 교수(전직 홍익대학 학생처장)를 만나게 되었다.

 

김 교수는 나의 소문을 들었다며 손을 잡고 무척이나 반겨준다. 그리고는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남아 있는 하늘을 보면서 길가에 있는 조그마한 가게로 나를 끌고 갔다.

 

두 사람의 주변에는 금방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무리를 이룬다. 소주가 담긴 잔들이 이 사람 저 사람 손에서 나에게로 건너왔다. 여러 사람으로부터 받는 술잔이 빈 속인 나를 취하게 했다. 나는 점점 술 때문에 이성을 잃기 시작한다.

 

날은 이미 어두워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술기를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사람들과 헤어져 혼자 거리를 쏘다녔다.

 

나는 한없이 외로움을 느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비틀거리는 나의 어깨에 부딪힌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정말 나의 마음은 그때 미치고 싶었다. 조국을 생각하는 나의 마음은 안타까워서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목적도 없이 쏘다니다 보니 12시가 되었다. 통금 때문에 숙소인 여관으로 돌아왔다. 혼란스럽던 마음도 깊은 잠 속에서는 잠시나마 잊을 수가 있었다.

 

누군가가 심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깨었다. 누굴까 하는 생각을 하며 문고리를 땄다. 왈칵 문이 밀리며 들이닥친 사나이들이 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흔들어도 모르는 얼굴들뿐이다. 그 사람들은 우악스럽게 나를 노려본다. 그런 그들이 이젠 능숙한 행동으로 다음 일을 서둘렀다.

 

방안의 구석구석을 다 뒤진다. 멍청해 있던 내가 당신들 누구요 하고 물었는데도 대꾸도 않는다.

 

무슨 짓이냐고 항변을 할 참인데 그 중 한 사람이 나한테 동행을 요구하였다. 나는 그 순간 무엇인가 느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절한다고 나를 대접해 줄 사람들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따라 나섰다.

 

어두운 새벽의 아스팔트길 위로 우리가 탄 차가 불빛을 비추며 달려간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자동차가 멈추고 보니 처음 와보는 건물 속이었다. 나는 곧 넓은 사무실을 지나 심문실인 것 같은 작은 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큰 테이블을 앞에 두고 혼자 앉아 생각해 본다. 내가 이곳에 들어와야 할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9시쯤이나 되어서야 일행 중에서 부장이라고 불리던 자가 심문실로 들어왔다.

 

어저께 하루 종일 식사를 거르고 술만 마신 빈 속이 쓰리고 아팠다.

 

나는 내 자신이 처해 있는 꼴이 우스워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먼저 말을 끄집어내었다.

 

무엇을 알아볼 참인지 사람을 데리고 왔으면 아침이나 먹여주는 것이 예의가 아니요 하고 말을 내뱉으니까 부장이라는 사람은 대꾸도 않은 채 금방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얼마 있지 않아서 양이 좋은 곰탕 두 그릇이 들어왔다. 또 조금 전에 나갔던 부장이라던 사람이 들어온다.

 

나한테 처음으로 하는 말이 식사를 하라고 권한다. 두 사람은 마주 앉은 채 곰탕을 열심히 먹기 시작하였다. 한 그릇을 비우고 난 나는 시중의 식당보다 고기가 많이 들었다고 느꼈다. 제법 살 것 같이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젠 다음에 일어날 일들이 궁금하고 답답했다. 자꾸만 불길한 마음이 일어난다. 나의 시선은 조그마한 방 안을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몇 시나 된 것일까. 시간을 생각해 보다가 밖을 향해 소변을 좀 보고 싶다고 말을 하였다. 조금 있으니까 어깨가 떡 벌어진 사람이 옆에 붙어 동행을 한다. 그는 아무도 없는 통로에서 관심 있는 질문을 하였다.

 

「선생 운동하셨다지요?」

 

나는 정색을 하였다.

 

그는 다 알고 있다면서 서울역 앞에서 힘깨나 쓰는 번개 이야길 해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어저께 종로바닥을 그렇게 찾아 헤매던 얼굴들이 이곳 사무실에서 보였다.

 

그들은 눈이 충혈된 채 지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심문실로 들어가면서 그들한테 눈인사를 보냈다.

 

한낮동안 아무 질문도 못 받고 혼자 앉아 있었다. 정오가 되었다.

 

또 먹음직스러운 곰탕 그릇이 들어왔다. 오래간만에 때맞추어 고기 국물과 음식을 뱃속에 다 집어넣으니 더욱 생기가 났다.

 

나의 머리속에는 오만 가지의 생각이 떠올라 왔다. 이 사람들이 나를 어쩔 셈인가 불길한 생각이 머리속에서 계속 사라지지 않는다.

 

아내의 얼굴과 태어날 자식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자 아이일까 여자 아이일까. 나는 무엇 때문에 이런 곳에 끌려온 것일까. 그런데도 상대는 아직 묻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는 것이다.

 

나를 초조하게 만든 다음, 무엇인가 음모를 만들 것인가 싶었다. 새장 안에 갇힌 새를 생각하며 이곳에서의 반항에 대한 무모함을 느꼈다. 내가 머리속에서 섬뜩함을 느끼며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오후였다.

 

아직 순진했던 내 마음은 세상을 믿는 쪽이었고 사람을 믿었다. 내가 무사하리라는 것을 믿으면서도 이곳 사람들의 태도를 보아 석연치가 않았다.

 

그런 내가 운이 좋았던지 밤이 늦어서야 나를 연행했던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의 인사까지 받으며 꺼림칙한 그곳을 나올 수가 있었다.

 

다음날 타의 반 자의 반에 의해서 가방을 챙겨 동대문 고속버스 터미널로 갔다. 아무에게도 서울을 떠난다는 말을 알리지 않았다.

 

아침 일찍 나의 근황이 걱정이 되어서 찾아왔다는 이동열 동지와 민주회복 국민회의 운영위원을 지낸 김상석 동지가 가방을 터미널까지 옮겨주면서도 못내 섭섭한 마음을 서로가 숨겼다.

 

우리 세 사람은 터미널 근방 리어카 앞에서 소주 한 병과 삶은 계란 두 개로 이별을 담은 술잔을 권했다. 화끈화끈 하게 술기운이 올라왔다.

 

부산행의 버스가 떠나기 위해 시동을 걸었다. 나는 버스로 올라왔고 두 사람은 두 사람이 갈 곳으로 가 버렸다. 달리는 차 속에서 마음속으로 축원을 시작했다.

 

신이여 이 땅에서 저주를 거두고 축복을 내리소서.

 

정말 나의 마음은 동포들의 조그마한 행복이나마 신의 뜻에 의해 얻기를 원했다. 고속버스는 오후 늦게 부산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동안 아무 연락도 없다가 불쑥 집으로 들어가니 아이들을 한방 가득히 모아놓고 과외지도를 하던 아내가 눈에 눈물이 맺히며 아이들에게 내일 오라고 하면서 시간보다 빨리 돌려보내고 나서 고생은 없었느냐고 말을 걸며 나의 얼굴을 훔쳐본다.

 

방에다 요를 깔아주고 좀 누워서 피로나 풀라고 권하면서 부엌이 있는 곳으로 나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는 나의 심정은 괜히 장가들어서 죄 없는 여자만 고생시킨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아팠다.

 

이제는 가난한 우리 두 사람의 생활에 좀 신경을 써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세상의 인심은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변해갔다. 나는 어디 적당한 사업이나 없나 싶어서 거리를 쏘다니기 시작하였다.

 

영도에서 서면까지 걸어갔다가 걸어서 되돌아오기도 했다.

 

그렇게 애를 쓰는데도 나에게는 적당한 일거리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엇인가 시작은 해야겠는데 머리속에는 무슨 일을 할까 엄두가 나지 않는다.

 

서울 소식을 모른 채 반년이 흘렀다. 1975년 음력 설날을 맞이하였다.

 

만삭의 몸이 된 아내가 출산준비를 하느라고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장모가 자주 우리가 세 들어 사는 집을 찾아왔다.

 

그런 어느 날 아내는 순산을 하였다. 아기는 사내아이였다. 웬일인지 반가워야 할 마음은 반갑지가 않았다. 생활능력도 없는 나에게 입만 하나 더 늘어난 셈이었다.

 

좁은 방은 이제 아기의 잠자리까지 만들다 보니 더욱 불편해졌다.

 

아내와 나는 좁은 방에서 세 식구가 견디기 위해 잠자리로 들 때에는 서로 반대방향으로 누웠다.

 

나의 발끝이 언제나 아내의 머리맡에서 놀았고 아내의 발끝이 나의 코 밑에서 놀았으며, 아내는 내가 발을 안 씻어서 발냄새가 난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위해 신경을 썼다.

 

겨울은 또 봄으로 변했다. 아기는 100일이 되었다. 제법 방긋방긋 웃기 시작했다.

 

수입이 없는 세 사람의 가계를 꾸리기가 아내는 점점 힘드는 표정이었다. 말은 못해도 남자인 나는 자존심이 엉망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결심을 해본다.

 

좋다. 나를 찾아보자. 그 날부터 가난은 나의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는 노력을 서둘렀다. 사람들을 뻔질나게 만났다. 그래도 뾰족한 수는 아직 찾아지지 않았다.

 

하루는 시청 앞의 남도다방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하였다. 시간을 정하지 않았던 나는 막연하게 그를 여러 시간이나 기다렸다.

 

나의 옆 테이블에 두 사람의 손님이 와서 앉는다. 두 사람은 옆 테이블에 들릴 정도의 음성으로 이야길 나눈다. 이야긴 사업이야기인 듯 했다.

 

무료했던 나는 자연히 그 이야기에 관심이 쏠린다. 옆 자리의 사람들은 열기까지 내뿜으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도 한번 그런 사업을 벌려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은 한창 신이 나서 떠들다가 밖으로 나갔다. 나의 머리속에는 금방 엿들은 이야기가 머리속에서 맴돌았다. 그때 기다리던 친구가 다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오래 기다렸지 하면서 나의 맞은 편 자리에 앉는다.

 

나는 자꾸만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맴도는 조금 전에 들었던 이야길 농담 삼아 그 친구한테 물었더니 그는 자기가 좀 아는 사람이 그런 장사를 하고 있는데 부산시내에 어디 적당한 장소가 있겠느냐고 했다.

 

나는 뒷날부터 들은 이야기와 친구의 조언을 밑천으로 생각하고 바닷가를 혼자 헤매었다. 정말 친구 말처럼 장소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이다. 남부민동과 암남동의 경계 지점에서 배를 댈 수 있는 곳을 발견하였다. 내가 본 장소는 당시 상황으로는 외진 곳이었다.

 

그 날 집에 돌아와서 아내와 상의를 했다. 행여 도움이 될까봐 누나와 형을 찾아가서도 이야길 하였지만 이 일만은 실수였다.

 

돈 좀 구할 수가 없겠느냐고 말 좀 했다 해서 형은 뒷날 아침 나를 찾아와서 화적 같은 놈이니, 분수를 모르는 놈이라고 주위사람들이 듣도록 고함을 지르며 기를 꺾었다.

 

천하에 날고 기는 사람도 많은데 네 까짓 게 날개도 없이 날려느냐고 괜히 성질을 부리며 아내 앞에서 얼굴에 침까지 뱉으며 나간다.

 

형은 다음날 아침에도 찾아와 나를 보고 욕을 했다. 그러나 결코 상황이 어렵다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포기하는 그런 나는 아닌 것이다.

 

뱃길을 알기 위해 뛰어다녔고 또 그런 일에 관계되는 사람들을 찾아 다녔다. 그리고는 열심히 혼자 궁리를 하였다.

 

돈을 구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떠올랐다. 아내는 아내대로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 하나라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라더니 엉뚱한 일만 하던 내가 마음을 잡고 장사를 해보겠다니 그래도 기대가 큰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돈 때문에 걱정을 하면서도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22. 빵을 구하기 위해서

 

아내는 어디서 구한 것인지 내가 필요로 했던 돈 40만원을 융통해 가지고 왔다.

 

나는 그동안 생각해둔 대로 망설이지 않고 행동을 서두르며 일을 시작했다.

 

40만원의 돈은 모래 값과 부선비, 외선비, 그리고 육지의 양륙비까지는 절대 부족한 돈이었으나 부딪쳐 보아야 하는 것이 나의 사정이 되었다. 끝내 나는 배를 빌려가지고 섬진강으로 올라갔다.

 

부산 시내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었던 건달인 내가 모래장사를 시작한다니까 금방 섬진강에 소문이 퍼졌다.

 

밤새도록 크레인이 물 밑의 모래를 부선에다 싣는 동안 나는 한잠도 자지 않고 조금이라도 모래를 배에다 더 싣기 위해 배 옆에서 서성거렸다.

 

뒷날 잠에서 깨어난 부선 선주가 배에 실린 모래를 보더니 짐이 너무 많이 실려서 항해를 못한다고 길길이 성질을 부린다. 나는 그를 잘 타일러서 배를 끌고 나왔다.

 

외선 선장도 나의 얼굴 때문인지 상당히 협조적이었다. 내일 한낮이면 부산에 배가 도착을 할 수 있다는 외선 선장의 말만 믿고 육지 쪽에 올라 차편으로 부산에 먼저 내려왔다.

 

나는 배가 도착하면 모래를 즉시 양륙하기 위해 모래 하역용 크레인을 구하려고 여러 곳을 쏘다녔다.

 

처음 당해 보는 일이라 어색한 것이 많았지만 결과는 다 처리가 된다.

 

내가 장사를 한다고 소문이 나니 나를 아끼던 동지들과 주위의 사람들이 20명이나 구경을 나와 바닷가에다 술자리를 만들었다.

 

약속된 예정시간에 바다 위에 배가 보였다. 바닷가에서 기다리던 선주도 나도 안심이 되었다. 부선이 축항에 닿게 되고 준비한 크레인이 모래를 땅 위로 퍼 올리기 시작하였다.

 

그때 땅 관리인이라는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나를 찾아와서 따지기 시작한다. 누구 승낙으로 이곳에 모래를 양륙하느냐고 서슬이 시퍼랬다. 그 사람은 작업을 방해하기 시작한다.

 

20여명이나 모여 있던 주위의 친구와 동지들이 영문도 모르고 그 관리인을 나무랐다.

 

길길이 뛰던 관리인이 지주회사에 전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시비가 생겼으면서도 주위 사람들의 도움과 나의 배짱으로 다음날 아침에는 완전하게 작업을 마칠 수가 있었다.

 

모래 무더기를 보고는 인근에서 일을 시켜 달라고 그 동리에 살던 사람들이 찾아왔다. 나는 가까운 곳에 산다는 세 사람을 인부로 쓰기로 했다.

 

현장책임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가 없어서 처가의 장인을 보고 물건을 좀 지키기 위해 나와 달라고 간청을 하여서 도움을 받았다.

 

처음 하루 동안에는 아무도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답답해져서 공사장으로 주문을 받기 위하여 뛰어다녔다.

며칠간은 내가 맡아온 주문 외에는 팔리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한 군데 두 군데 단골도 잡히기 시작하였다.

 

나는 장사를 위해 새벽 3시 30분이면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강 얼굴을 닦고 국에 말은 밥을 한 그릇쯤 먹고 나면 4시가 된다. 어느 날이건 그 시간이면 집을 뛰쳐나와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른 시간 때문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에서 주위에 흩어져 있는 나무조각을 주워서 불을 지피며 일꾼을 기다렸고 손님을 기다렸다. 효과가 나타났다.

 

일꾼들도 주인이 서두니까 다른 집 일꾼보다는 일찍 나왔다. 새벽 일찍 물건을 구하려면 차들이 다른 집에 사람이 없으니까 우리한테 와서 물건을 사갔다.

 

장사가 기틀이 잡히면서 나는 해가 지고 일이 끝날 때까지 현장에서 착실히 감독을 했다.

 

점심때가 되면 인부들이 보는 앞에서 라면을 한 개 끓여 점심으로 때웠고 저녁은 꼭 집에 와서 먹었다. 시작한 장사는 생각하던 것보다도 수월하게 일이 풀려 나갔다. 처음 한 배를 판 것이 생각보다도 흡족한 이문을 남겨 주었다.

 

그때부터 내가 직접 섬진강까지 모래를 사러 갈 필요가 없어졌다. 부선 선주들이 모래를 싣고 와서 받아 달라고 찾아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모래를 적재해 둔 땅 지주회사의 직원들이 나타났다. 예상은 하였지만 괴로운 말을 한다.

 

나는 손발이 닳도록 사정도 하고 임대료를 형편껏 낼 것이니 도와 달라고 애원도 했고 어떤 때는 배짱도 부렸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가니까 지주 측과도 시비가 적어졌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인근 해양고등학교가 운동장으로 매립을 한 토지를 비싼 임대료를 받고 4군데나 모래장사를 하도록 다른 사람들한테 장소를 빌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장사의 경쟁은 치열했다. 약하면 망하고 강하면 버틸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속에서 경쟁을 해야 했다. 이럴 때는 나의 얼굴이 유리한 점도 많았다. 안면 때문인지 단골도 늘어갔다.

 

경험이 쌓일수록 마음속에는 자신이 넘치고 있었다. 뚝심과 웅변은 한 사람의 착실한 인부 몫과 사장 역할을 해내기에 별 부족한 것이 없었다.

 

인부들이 혀를 내둘렀다. 점심 도시락을 싸와서 먹던 인부들은 라면을 끓여 먹고 있는 나를 보고 기가 차는 모양이었다.

 

또 점점 일이 많아지니까 수입보다 고된 일을 견디지 못해 처음 인근의 어설픈 인부들이 더러는 일을 그만두고 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새로 바뀌는 사람들은 모두 삽질에는 능숙하였다.

 

어릴 때부터 중노동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노동판에서 사람을 다루는 나의 재질은 천부적이라 할만 했다.

 

일하러 나오던 나이든 사람들도 나의 앞에서는 죽는 시늉을 하였다. 나는 언제나 일과 사정을 구분해서 처리했다.

 

드디어 나의 앞에는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불과 수개월 만에 우리가 짊어지고 있던 빚을 청산하고 나의 밑천으로 모래 무더기가 점점 커져간 것이다.

 

처음으로 처가 쪽 사람들이 나를 신뢰하기 시작하였다. 단순히 건달로만 보았다가 장인의 이야기에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경험 없이 장사를 시작한 것이 6개월도 못되어서 기틀이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내 행동을 두고 그때부터 또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다.

 

돈을 벌 것이냐 조국을 구할 것이냐 하는 기로에서 고민이 생겼다. 다급하고 배고팠던 일들이 자꾸만 보였다. 또 한 쪽에서는 약속이 깨어져도 책임을 지지 않는 사회가 나의 눈에 괴로움을 더했다.

 

슬픔과 어두움 속에서 자란 나는 내 가족을 울리더라도 어두워오는 사회를 구해야겠다는 강력한 양심을 깨달았다.

 

비로소 나는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 알게 되었다. 나의 가슴 속에 잠재해 있던 불길이 다시 일어나 나의 마음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나는 우선 진실한 사람들을 규합하여 병들고 있는 사회를 구해야 한다고 결심을 했다.

 

눈앞에는 세상이 불신으로 인해 점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불의에 의해 매를 맞는 양심이 법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을 볼 때는 안타까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 정의가 보이지 않고 힘이 정의를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더 무서운 사실은 수사기관 민사사건 불개입 원칙이란 법률해석을 알고 나서부터이다.

 

양심인 들에게는 독약처럼 쓸모가 없었고 협잡 성질이 있는 악인들한테는 보약처럼 효능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뻔뻔스러운 악인은 닥치는 대로 빼앗고 사기를 치고 협잡을 하면서 민사라고 했다.

 

법은 공평한 것을 주장하면 된다. 선한 자가 욕을 본다. 뺏은 자를 뺏긴 자가 증오한다.

 

사람들은 점점 사회에 대한 애정을 잃어갔고 그놈이 그놈이라고 하여 세상을 바로 보려 하지 않고 속단하는 습성이 생겨났다. 이런 것을 보는 나의 마음은 분노와 슬픔이 뒤엉켜 가슴을 저민다.

 

나는 소멸되어 가는 정의를 구하는 것과 파괴되고 있는 민족정기를 구해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이 나의 가정생활보다도 더 급하다는 사실을 느꼈다.

 

며칠이나 이런 일로 고민하던 끝에 장사 밑천 중 반을 떼어서 이런 일에 쓰고자 서둘렀다. 제일 처음 시작한 일은 사무실을 구하는 일이었다.

 

이곳저곳 복덕방을 헤맨 끝에 부평동 사거리 쪽에서 5평짜리 사무실을 보증금 10만원에 월세 2만원으로 계약을 하였다.

 

남의 전화를 빌려 왔고 아는 사람들로부터 헌 집기도 얻어다 들여 놓았다. 이제 또 결심이 필요하였다.

 

어떤 일이든 정열을 쏟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었다. 사업장으로 나가느냐 동지를 찾아 거리를 헤매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더 생각을 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 사람들을 찾아 거리를 헤맸다. 만나는 사람마다 나의 뜻을 전하였고 설득을 해보았다.

 

또 어떤 방법으로 나의 애정을 이 땅의 사람들에게 바칠 것인가를 골몰이 생각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사회부조리 추방 청년협의회를 구성할 것을 결심하였다.

 

 

23. 정의를 찾는 행동

 

나는 불의와 싸울 하나의 사회단체를 만들기 위하여 먼저 취지문과 정관을 만들어야 했다. 또 이번일 만은 부산에서 시작해서 그 세력을 북상시켜야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그 조건에 따르는 것을 찾기도 했다.

 

입회원서를 만들어 주위에서 만나는 사람들한테 나누어 주면서 사회를 구하자고 설득을 해 나갔다. 이러한 행동은 일주일도 안 되어서 40여명이나 발기위원이 되어 호응해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나는 초안이 다 된 취지문과 정관을 인쇄소에다가 맡겨서 수천 부나 찍어오게 하였다. 비로소 협의회를 발족시키기 위해 입회원서를 내어 준 사람들을 소집했다.

 

비좁은 사무실에는 35명의 발기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행동을 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추진해 왔던 일인 사회부조리 추방 청년협의회의 집행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발기위원으로 참석했던 불교 웅변인 협의회장 정갑덕 동지의 제청에 의하여 그 날 저녁 만장일치로 나는 그 회의 회장으로 뽑혔다. 나의 제청에 의하여 부서별 책임자가 회원 사이에서 인준이 얻어졌다.

 

참석자들은 업무와 행동을 토론하게 되었고 모여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굳은 결의까지 생기기 시작하였다. 젊은 사람들이 조국의 사회문제를 위해 앞장서겠다는 행동은 당연한 것으로 알았고 정의를 보급하는 것이 보람된 일인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느끼게 된 것은 젊은 사람들이 조국을 위해 양심을 구하는 행동이 얼마나 힘겨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당황해하는 얼굴로 찾아 왔다. 나는 그 사람한테 취지문과 정관 일부를 내어 주었다. 또 내가 하고자 하는 일도 설명해 주었다. 그 사람들은 나를 두고 겉으로는 잘 해보라고 했지만 예감이 이상했다.

 

결국 나의 희망은 출발도 못해보고 주위의 냉대와 절망에 처한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사회단체 등록을 서둘고 보니 주위에서는 생각조차 못해본 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행정에 밝은 사무국장인 정갑덕 동지더러 관계부처에 등록서류를 접수시켜 법적지위를 갖추게 하라고 나는 성화를 부려 보았지만 며칠 뒤 어떻게 된 일인지 전해오는 소식은 등록절차가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소리뿐이었다.

 

나는 비로소 어떤 젊은 양심도 조국과 사회를 위해 양심을 바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예감했다. 그때부터 나에게는 또 시련이 생기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이랄까. 불운은 연속해서 일어났다.

 

배를 가진 자들이 우리 하치장에 모래를 실어다 주지 못하겠다는 통보였다. 계약이 되어서 우리 하치장에 모래를 싣고 왔던 배가 하치장에 대기를 하다가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 돌아가야 하는 일이 생겨났다.

 

나는 영문을 몰라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애를 태웠다. 도대체 주위에서 생기는 일들이 납득이 안 갔다.

 

또 어떤 동지의 신변에 위험한 일이 생겼다. 자꾸 불행한 일이 보이기 시작하니 한 사람 두 사람 겁을 먹고 나를 만나는 것을 피했다.

 

나는 그때서야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며칠이 못가 결국 나 혼자 남아 사무실을 지키게 되었다. 수천 장이나 인쇄가 되어 있는 취지문과 정관을 훑어보며 이상한 마음을 느꼈다.

 

도대체 세상을 알 수 없어 고개를 흔들었다. 도적을 잡겠다고 나섰다가 매를 맞은 격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나는 취지문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오늘날 우리는 역사적 전환기에 임하여 격동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미래의 영광과 희망을 찾아서 투쟁하고 있다.

 

혁명, 경제, 개혁, 유신체제 등을 절규하는 것도 모두 격동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조국과 민족의 영광과 발전을 슬기롭게 이룩하려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사회는 나날이 변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고도 엄연한 사실이다. 이것을 어떤 자는 위대한 성과라 하며 또 어떤 자는 실패라고 단정한다.

 

이것은 비판하는 자들의 세계관, 민주주의에 대한 해석여하에 따르는 견해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여기에 관여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묵과해서는 안 될 중요하고도 시급히 해결하여야 할 중대사가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 제거이다.

 

격동하고 있는 오늘날 언제 어디서든지 폭풍이 몰아치고 강토를 진동하는 분화가 화산에서 폭발할지도 모르는 이 절박한 시기에 사회의 부조리가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해서 깊이 뿌리박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민족의 장래에 불길한 암영을 던져주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이와 같은 사회의 부조리가 깊숙한 폐부에까지 뿌리박고 있다는 이 엄청난 사실은 민족의 앞날에 치명적인 결정타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무릇 사회의 부조리는 민족의 영광과 발전에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광된 조국의 역사에 자랑과 자부심을 갖고 있는 민족의 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사회의 부조리를 깨끗이 우리 사회에서 청소할 것을 열망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의 부조리는 너무나 깊이 뿌리박혀 있다. 따라서 이것을 일소한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국가의 행정력을 동원해서도 쉽게 해결될 수 없는 것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회의 부조리 일소에는 국가의 권력으로도 될 수 없고 말로만 호언장담해서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유일한 방법이란 새로운 차원에서 새로운 각오로써 국민적 정풍운동을 전개하는 길 밖에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대 국민운동은 너무나 거창한 과업이며 용이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의중을 깊이 살펴서 우리의 역량에 합당한 범주를 설정하며 젊은이다운 열정과 깨끗한 심정에서 뜻있는 청년들의 뜻을 모아서 사회부조리 추방 청년협의회를 결성코자 하는 바입니다.

 

1975년 월 일

정관 내용

제1장 총칙

제1조(명칭) 본 회는 사회부조리 추방 청년협의회라 칭한다.

제2조(목적) 본 회는 각 분야의 부정부패 및 사회 부조리를 제거하기 위한 과감한 사회운동 전개를 그 목적으로 한다.

제3조(사업) 본 회는 목적달성을 위한 다음과 같은 사업을 한다.

1. 공명한 사회 건설을 위한 캠페인 운동.

2. 성실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 건설을 위한 배가운동.

3 사회 부조리 부문의 경고 폭로 고발운동.

제4조(소재) 본 회의 중앙회를 부산에 두고 필요에 따라 서울특별시 지부 및 각 도청 소재지에 지부를 둔다.>

정관을 읽어 내려가는 나의 눈동자에 글자가 희미해진다. 눈물이 고인 것이다.

 

나는 짓궂기 만한 자신의 운명 앞에서 정말 나 자신은 가치 있는 행복을 위해 어느 곳에서도 일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져본다.

 

눈치껏 살려고 하는 주위 사람들의 처세를 보면서도 무슨 운명의 사나이라고 손해 보는 일만 골라 서두는지 자신도 알 길이 없었다.

 

밤이 되면 사람들은 똑같이 어둠을 보는데 나 혼자 애타하는 행동은 무슨 빌어먹을 팔자란 말인가.

 

아내에게 걱정을 안겨주고 자식의 여윈 얼굴을 보는 것이 사나이의 양심이란 말인가. 세상에 대해서도 화가 치밀었지만 내 자신에 대해서도 한탄이 생겨난다.

 

장사길이 막혀 빈둥빈둥 놀게 된 나를 보고 아내는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나도 내 앞에 닥친 예사롭지 않은 일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사실은 어떻게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뛰어도 나에게 물건을 팔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동안 개척해 놓았던 단골도 물건이 떨어지니 끊어지고 말았다.

 

나의 행동 하나만 믿고 일도 없는 일터에 나온 일꾼들이 내용을 모르니까 순진하게 뱃사람들만 두고 욕을 했다. 나는 누구를 원망하는 마음마저도 포기했다.

 

한 달이 지나가고 또 한 달이 지나가도 좋은 일은 생기지 않았다.

 

답답하던 가슴이 타고 녹아 적개심으로 변했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가소롭고 웃기는 일들뿐이었다.

 

나는 다시 서울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모순과 싸워야 하는 것이 나의 사명임을 느끼면서 이판사판이란 생각을 했다.

 

그런 어느 날 장사를 쉰 지 3개월이 지난 후의 일이다. 어느 선주가 모래를 실어다 줄까 하고 장난 같은 말을 했다.

 

그날부터 나는 자식과 아내와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다시 장사판을 벌였다.

 

한 번 호되게 당하고 난 뒤라 그런지 다른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우리는 열심히 일을 시작했다. 전번보다도 더 많은 단골이 잡히기 시작했다. 주위로부터 차츰차츰 성실성과 신용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나는 행동을 통해 나보다 나이가 더 먹은 일꾼들을 이끌고 나갔다. 서로의 사이에 생기는 정을 떼기 위해 온종일 필요이상의 대화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처음 만날 때와는 달리 일꾼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행동을 신뢰하게 되었고 나는 완벽할 정도의 장사꾼으로 변해갔다. 나에게는 불과 몇 개월 만에 다시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

 

아내의 권고 때문에 은행에다가 부금을 하나 부었다. 그러고 나서 몇 달이 못 되어 내가 장사를 하는 땅의 지주회사가 그 땅을 분할해서라도 팔겠다는 통고를 하여 왔다.

 

나는 당장 엄두가 나지 않아 또 고민이 되었다. 이런 일을 아내와 상의하였더니 새로운 돌파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지주회사에 사정을 하여서 잔금 기간을 충분하게 여분을 얻어서 150여 평을 계약을 하였다. 내가 계약한 땅은 입구 쪽이었으며 그곳에는 마침 국유지가 200여 평이나 붙어 있어서 나의 장사에는 지장을 받지 않았다.

 

남의 빚돈으로 땅의 등기가 우리 앞으로 넘어왔다. 또 그 땅을 잡히고 부금을 타서 개인 빚도 청산을 하였다. 나의 마음속에는 다른 마음을 가질 여유가 없어졌다.

 

빚으로 생긴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남보다 일찍 일어나 더 열심히 뛰고 돈이 벌리면 은행에다 적금을 붓고 필요할 때 그 적금을 또 이용하는 것을 되풀이했다. 이렇게 하니까 가진 게 없어도 재산 증식이 가능했다.

 

1977년 여름에는 은행의 적금 대부로 제법 넓은 정원이 달린 내 집 마련에 성공도 하였다. 나는 한 사람의 상인으로 성공해 가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상인의 생활은 나에게 많은 만족을 줄 수가 있었다. 내가 이렇게 착실하게 장사꾼이 되었을 때도 나와 친하던 동지들은 긴급조치에 의해 옥중을 드나들고 있었다.

 

나는 나에게 생긴 은행 빚 때문에 이젠 몸을 뺄 수가 없었다. 나의 집에서는 또 하나의 아이가 태어났다. 딸이었다. 이번만은 불어난 식구를 두고 별 마음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가정은 화목했고 남들은 우릴 보고 성공했다고 경이에 찬 눈으로 칭찬을 했다. 나의 생애에 있어 가장 경제적으로 성공한 한 해였다.

 

나는 가난에 짓눌리는 형제들도 도와주었다. 손위 누님의 남편인 자형은 나의 밑에다 일자리를 만들어 주었고, 형제들을 돕기 위해 많이 생각도 했다.

 

시골에 사는 가난한 누님한테도 논을 좀 사 주었다. 고향 땅에는 내가 성공했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정말 바쁘게 돌아가는 나날이었다.

 

겨울이 가고 봄을 맞이하였다. 나는 영도다리 입구에다가 나의 개인 사무실을 차렸다.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업상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 다른 일 때문에 만나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이런 하루하루 달라지는 자신을 보면서도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운명적인지 또 고민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조국과 동포들을 위해 일할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고민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오늘까지 양심과 정의감 때문에 당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국을 구해야 한다는 애정만은 언제나 가슴 한 구석에서 사라지지가 않았다.

 

하루하루 달라지고 있는 각박한 인심이나 상식을 멀리하는 사회의 현실성을 보면 더욱 충동이 생긴다.

 

양심을 잊은 무서운 사람들의 행동을 받아 들여야 하는가 거부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양심을 구해야 한다는 절규였다. 가치 있는 행동을 위해서는 세상을 통탄만 하고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는 것이다.

 

추석을 넘기면서 열기가 차오는 마음속에는 점점 아내나 자식의 얼굴보다 조국의 장래가 더 안타까웠고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이런 형편을 두고 변명을 만들어 주고 싶지가 않아서 나의 결심을 몇 번이나 번복을 했다.

 

유신헌법 속에서 관제선거 양상이 될 선거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선거법만 믿고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설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면서도, 또 동포들에게 현실 속에서 위험한 장래가 우리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기 위해 행동을 개시해야 한다는 결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달력이 금방금방 넘어갔다. 길거리의 담벼락에는 큰 종이에 인쇄된 경고문과 담화문들이 나붙기 시작하였다.

 

세월은 어느덧 10월을 알리고 있었고 나의 마음속에서는 일을 시작함에 앞서 먼저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힘 앞에 괴로움을 당할 양심을 생각하면 지금까지의 마음들이 또 뒤로 물러난다. 그래서 나를 또 질책했다.

 

망설임을 가지면 할 일은 끝난 것이라는 마지막 말로 나를 지켰다. 나는 비로소 나의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다. 10여명의 사람들을 주위에 불러 모았다.

 

찾아온 사람들을 시켜서 선거구내 투표소 파악, 선거인 수 파악, 주민생활 상태 등을 분류해서 계획을 잡기 시작했다.

 

이런 일도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사전 선거운동이란 말 때문에 나와 같은 신분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서도 나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급한 김에 서울에 편지를 띄웠다. 며칠 후 구좌석 형과 최희수 동지가 서울에서 같은 날 내려왔다. 두 사람은 극구 나의 행동을 만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의 인심이 이럴 때는 가만히 있는 것이 나를 위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타이른다.

 

나는 두 사람의 충고 속에서 진정한 우정을 느꼈다. 실은 나도 많이 망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또 조금만 권해도 나는 행동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신의 뜻만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다시금 나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구좌석 형이나 최희수 동지도 이런 날 보고 어쩔 수 없는지 조언을 하며 이제는 행동을 같이 했다.

 

모순과 싸우지 않는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과 또 싸우기 위해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소속 후보가 겪어야 하는 현행 선거법을 두고 구좌석 형과 최희수 동지는 나와 함께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했다. 새로운 세력을 만들 것인가. 그냥 이대로 무방비 상태에서 외롭게 싸울 것인가. 나는 두 가지의 이론을 놓고 의견을 구했다.

사람들의 말은 새로운 세력을 만들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촉박해 있었다.

 

그런 어느 날 구좌석 형이 신문에 난 1단짜리 기사를 눈앞에 내어 민다. 기민당의 창당준비 위원회의 신고서 제출에 따른 기사였다. 전화를 걸어서 중앙선거관리 위원회 정당과로부터 기민당의 창당준비 위원회 연락 전화번호를 알 수 있었다.

 

나는 기민당 창당준비 위원회에 전화를 내었다. 한 번 상경하여 만나보자는 그 쪽의 전화를 받고 구좌석 형을 기민당의 사정을 알아보고 오라고 대신 서울로 올려 보냈다. 이틀 만에 구좌석 형이 서울을 다녀왔다.

 

그의 이야기는 나에게 상당한 위안이 되었다. 목사들이 있었고 신부도 있었고 때 묻지 않은 청년 동지들이 호응을 하고 있으며 어느 시기에 가서는 재야의 양심 세력과 기존 정당 속의 양심 세력들이 합류할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나는 구좌석 형이 전해 준 말만 믿고 무소속보다 단순히 편의와 활동이 나은 정당공천을 위해 지구당 창당에 따르는 요식행위를 서둘렀다.

 

해당기관에 당일로 준비서류를 제출하고 지구당의 창당대회에 따른 날짜를 잡았다. 장소 사용은 사람을 시켜 영도에 있던 모 극장을 예약하게 하였고 인쇄소에다 의뢰하여 간행물과 벽보를 찍어오게 하였다.

 

이런 나를 두고 당장 관할 경찰서 정보과에서 데리러 왔다. 나를 보는 그곳 책임자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괜히 나의 행동 때문에 자기네들이 귀찮아졌다는 이야기다.

 

그 날 오후에 장소 사용을 위해 돈까지 지불하고 영수증까지 끊어준 극장 측에서 전화가 왔다. 당일 날 장소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통고였다. 날짜는 내일 모레이고 벽보는 장소가 어디라고 거리에 나붙었는데 곤란한 일들이 생기게 되었다.

 

극장 지배인은 우리 때문에 사장이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는 것이다. 나는 또 경찰서로 찾아갔다. 정치 담당 책임자를 만났다.

 

극장 측의 이야길 전하고 내가 무엇이 대단하다고 이런 일을 겪어야 되느냐고 슬슬 구슬렸다.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해가며 잠깐 조용하게 끝내겠다고 사정을 하였다.

 

그 날 오후 사무실로 돌아온 나한테 극장 측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서와 양해가 되었다고 사용하라는 것이다.

 

나는 주위의 동지들과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청중동원과 창당대회 진행방법이었다. 우리는 워낙 급박하게 서둘고 있는 일들이라서 나는 모든 일에 대해 마음속에 염려가 쌓이기도 했다.

 

대회 전날, 중앙당 창당준비 위원회에서는 젊은 청년지사 세 사람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나를 찾아왔다. 어떻게 소문이 퍼졌는지 나와 사이가 가까운 재야의 동지들이 5명이나 서울에서 나의 대회를 보기 위해 내려왔다.

 

타당인 민주통일당에서도 전 선전국장이며 당내 청년 당원들을 통솔하던 이경식 동지가 친구 자격으로 서울에서 나의 대회식에 참석을 하였다.

 

1978년 10월 27일 이른 아침이 되니 하늘은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9시가 넘으면서 가랑비를 뿌렸다.

 

9시 30분 10여명의 외지 손님들에 싸여서 나는 극장으로 들어갔다.

 

10시의 대회식에 맞추어 준비는 다 되어 있었는데 텅 빈 극장 안은 싸늘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날씨 때문에 청중이 없다면 얼마나 쓸쓸할까 생각하며 빈 의자들이 눈동자 속으로 들어온다.

 

10시가 다 되었을 때 7,8명의 남자들이 극장으로 들어왔다. 이제부터 사람이 모이는가 싶어 얼굴을 돌려 바라보니 어디에서 낯익은 얼굴들이다. 텅 빈 극장 안으로 들어 온 한 무리의 사람들은 재미있어 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붙인다.

 

오늘 청중이 얼마나 올 것 같으냐는 질문이다. 정말 그때 그 말을 들으니 걱정이 되었다. 날씨도 이러하니 한 200명 정도 안 오겠는기요 하는 나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수긍인지 부인인지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때부터 극장 입구에는 한 사람 두 사람 줄을 지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얼마 있지 않아 좌석이 차고 통로가 메이고 공간이란 공간은 사람들의 열기가 꽉 찼으며 좁은 극장의 면적에 2,500여명의 청중은 극장 밖에서 극장 안으로 들어오려고 밀어 붙였다.

 

나도 상상 못했던 일이지만 당황한 쪽은 사찰을 위해 나온 기관원 쪽이었다. 누가 무전을 친 것인지 금방 경찰서의 기동타격소대가 출동을 해왔고 나의 행사를 위해 백차가 배치되는가 하면 경찰의 고급 간부가 주위에 나와서 교통질서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극장 안에서는 식순이 진행되었다. 사회자의 엄숙한 목소리가 수천의 군중을 침묵시키려 했다. 간단한 요식행위를 통해서 나는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극장에 모인 사람들은 나를 보며 박수를 쳤다.

 

 

24. 내가 해야 했던 일

 

사회자가 흥분된 목소리로 나의 소개를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중앙에 있는 연단을 향해 걸어 나갔다. 수천 개의 눈동자가 그런 나의 표정을 따라 움직인다.

 

나는 나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의 눈동자를 나의 시선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마이크에다 대고 입을 열었다.

 

「오늘날 조국이 처한 현실을 바라보며 나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젊은 양심을 숨길 곳이 없어 지금의 정치현상을 알면서도 속고 있는 사람들의 억울함을 깨우치기 위해 나와 나의 가족의 행복을 바치며 생명까지도 걸어야 할 비정한 현장에 신을 믿고 여러분을 믿으며 뛰어 들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정의의 소재를 찾지 못해 외로움을 느끼며 자신의 운명에 도전한 고집스런 저의 행동에 이 순간 뜨거운 박수를 보내준 내외 귀빈 여러분, 그리고 당원 동지 여러분에게 먼저 감사하다는 인사부터 드립니다.

 

지금까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기민당을 이 사람이 선택하여 이곳에서 창당을 하게 된 것은 이 나라의 기존 정당이 시대와 그 시대의 국민들 앞에 사명감 같은 걸 내어놓지 않고 당리 당책과 자신들의 이익에만 치중하는가 하면 또 자신들에 의해서 생긴 모순에 억울한 사람이 생겨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괴상한 버릇을 보고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은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해 나는 오늘 양심 있는 사람들 편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의 주위에는 교회의 목사님과 신부님이 있습니다. 또 자기를 속일 수 없는 양심인 들이 기민당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권을 탐내지도 않고 권력을 탐내지도 않으며 부귀영달을 탐하지도 않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원하며 밝은 사회를 원하며 동포들의 앞에 희망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수치심을 잊은 채 계속 남을 속이는 자나 기대 가치가 없는데도 그것을 지키려는 역사에 반역하는 악인과 싸우기 위해 목적을 가졌고 또 진리에 따르는 정치를 소생시키기 위해 민족의 양심을 직결시키겠다고 그 뜻을 밝혔습니다.

 

존경하는 애국 시민 여러분!

 

어떤 사회이든 양심이 지켜질 수 없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입니다. 우리가 행복한 사회에 살고 있느냐 불행한 사회에 살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여러분 개인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행한 사회에 살고 있다면 그 책임은 마땅히 이 나라 안에 존재한 정권과 그 주변이 책임을 져주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들이 그런 것을 몰라라 한다면 그 행동은 양심이 없는 사람들의 행동으로 밖에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상식이 떠난 사회는 위험한 사회입니다. 그래서 이 참에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구해야 되겠다고 떠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릴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저의 가족은 걱정이 생겼고 저는 다리를 펴고 잠을 자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위험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조국에 바치려는 나의 애정입니다.

 

더 많은 젊은 양심들을 형무소로 보내느니 보다 내 생명을 바쳐서라도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나의 용기가 양심을 포기하라는 선언에 맡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장래는 여러분의 심판에 의해서 앞으로 결정될 것입니다.

 

아직도 이 나라에는 상식을 살리고 양심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말뿐입니다. 자신이 박해 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안일을 생각하는 쪽으로만 기운다면 그것은 두려운 세상에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사는 행위이며 이런 짓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짓으로써 자신에 대한 자기 책임마저도 부인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또 장차는 스스로 멍에를 멘 노예생활의 시작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정말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자손들의 앞날에도 삶의 수단이나 행복이 될까요? 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동포 여러분!

 

나는 오늘 이 자리를 빌어 이 땅의 모든 사람들한테 외치고자 합니다. 비겁한 자신과 싸워주실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 길이 이웃을 진실로 사랑하는 길이며 조국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방관적인 나약함은 이 땅에 양심과 정의를 침몰시키는 길이며, 정의와 양심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영원히 어둠 속에 잠긴 그런 세상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세월이 좀 더 흘러 살기가 어려워지고 억울한 일이 생기고 나서 후회하고 반성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의 현상은 전적으로 국민 전체가 책임질 것이 많습니다. 주인노릇을 안 하려고 하니깐 당연한 벌을 받는 것입니다.

 

좀 더 정신 차리고 살자며 호소하는 사람을 보고 손가락질이나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나라의 살림살이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또 거짓말 잘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고 그런 말이 불신을 낳고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딱한 사정을 저마다 지닌 채 가슴을 치고 후회할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남의 출세나 부러워하고 자기 자신을 포기하던 나약한 시대적 배반 행위에서 탈출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스스로가 자기의 희망과 자유를 얻기 위해 침묵을 버릴 때가 온 것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조국을 위하여 지킬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용기와 노력과 자신에 대한 투자만이 위대한 결과에 기다림이 될 것입니다.

 

스스로 주어진 권리를 행사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가치관을 지니는 것만이 이 땅에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상식이며 조국에 대한 의무라고 나는 판단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상이나 꿈을 찾기 위해서는 자기에 대한 도전이 꼭 필요한 시기입니다. 그 하나의 예를 보십시오.

 

가난했던 스위스 사람들은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는 곳에서 진리 하나만을 지킨 용기에 의해서 세계에서 제일 소득이 높은 국민이 되었습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서구의 영국은 의지 하나만으로 간단한 법률로 이루어진 헌법만으로 오랜 세월을 두고 흔들리지 않고 세계 제일의 민주주의를 지켜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이런 주위의 사정과 내력을 배우면서도 현실을 해결하지 못한 것은 인재를 멀리하고 있으며 국민의 주인의식 포기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속이는 자가 있고 속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무 일도 지켜질 수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양심보다는 욕망이 지켜지는 사회는 스스로 그 고통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분명히 희망을 제시하였습니다.

 

정치가 잘 되는 나라나 경제부국으로 발전을 이룩한 나라들은 대부분 먼저 그 나라 국민 속에 믿음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며 개인의 창의력이나 용기가 숭상된 데서 생긴 것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들보다도 못한 것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봐도 별로 빠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자 국민이 되고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못하는 사람들의 억지가 무섭기만 합니다.

 

나는 이런 자리에서 누구를 욕하려 들고 싶지도 않습니다. 한 마디하고 싶은 말은 오늘의 고통스러운 조국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제 가족들한테 못난 남편, 못난 아비가 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오직 부족한 것을 찾으려 도전했습니다.

 

주위에 계신 동지 선배 여러분!

 

험난한 앞길에 격려와 충고를 보내주어 이 사람이 다른 길로 가지 못하게 지켜주고 오직 젊은 양심을 조국에 바칠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의 말씀을 올리며 오늘 이 자리를 통해 저의 인사에 대신합니다. 감사합니다.」

 

극장 안에 있던 사람들은 흥분했다. 박수와 환호가 폭발했다. 싸늘한 날씨였는데도 실내가 열기로 가득 찼다.

 

행사에 참석했던 중앙당 연사들의 축사가 있었고 친구의 자격으로 구좌석 형이 축사를 했다.

 

「젊은 사람이 험난한 세상에서 생명을 바치려고 하여도 바칠 곳이 없으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을 두고 죽어도 얼굴을 들지 못할 수치를 느끼면서 그래서 자신을 위로하고자 오늘 이삼한 동지의 양심적 선택에 조금이라도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제 집에서는 내려가지 말라고 붙잡는데도 고집부리며 이 곳에 찾아왔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부산 시민여러분, 여러분이 아직도 양심과 정의를 구하고자 하는 이곳의 열기를 보고 나 또한 나라를 위해 시비를 가려보고 싶은 심정뿐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시집살이 석 3년이란 말이 있습니다.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봉사 3년을 시집살이에서 겪으라는 말로 전해 온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정치하시는 높은 분들은 우리 국민을 보고 시집살이를 시킬 모양입니다. 엊그저께 신문을 보니깐 무고죄는 엄벌에 처하겠다는 담화가 발표되었는가 하면 국민들이 중상모략을 심하게 한다고 해놓았습니다.

 

험난한 세상에 살다 보면 그런 일도 더러는 있을 것입니다마는 왜 그런 말씀을 그분들이 자주 신문에서 대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침묵이 강요되고 있는 사회에서 울고 있는 동포가 얼마나 되는지 그런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국민의 위에서 권력을 휘두르던 자가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는, 10억에서 수백억까지 재산을 모았다는 소문은 사실인가 거짓인가 밝혀보겠다는 의사는 한 번도 밝혀 본 바가 없습니다.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입에다 재갈을 물리며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엄포를 주면 국민은 누굴 믿고 살며 사람의 양심을 두었다가 어디에 쓰라고 배고픈 사람한테 시집살이만 시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또 이런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지 살기가 죽기보다 더 지루합니다. 나는 우리 사회가 짊어지고 있는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양심과 용기가 있는 사람을 정치현장에 내몰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찾아왔습니다.

 

부산에서 살고 계시는 여러분이 저보다 더 잘 아시는 일입니다만 이삼한 동지야 말로 이 땅에서 자기와 싸울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인물이며 그분의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도 이 땅에 살고 있는 동포의 사명자로서 손색이 없다고 본인이 생각하였기에 고민이 많은 정권이나 고달픈 민족이나 영광이 없었던 조국을 위해 이런 분께 십자가를 지워야 한다는 사실이 저의 심중에 확신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거듭 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이삼한 동지가 불의와 싸워 좌절하지 않도록 격려와 또 스스로 채찍이 되어주실 것을 당부 드리오며 상식이 숨어버린 사회에서 상식을 되찾고 축복이 멀어진 곳에 축복을 구하며 역사 앞에서 진실을 되찾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축사에 대신합니다.」

 

청중이 가득 찬 장내는 요란스러운 박수소리가 넘쳤고 사회자가 다음 연사를 소개할 때까지 흥분과 감동이 사람들의 얼굴에 넘쳤다. 시간은 정오를 넘겼다.

 

그 장소에 파견되어 있던 기관원들의 당부는 긴급조치로 복역한 사람은 축사를 시키지 말라고 부탁을 했지만 서울에서 일부러 나를 보러 온 이경식 동지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사실들을 설명하고 너무 정권에 대한 성토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경식 동지는 당시 민주통일당의 당직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자는 이경식 동지를 청중들한테 소개했다.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주시한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깨끗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민주통일당의 당적을 가진 이경식입니다.

 

긴급조치인가 무엇인가 하는 것 때문에 감옥에 갔다가 최근에 석방되어 오늘 부산 영도에서 이삼한 동지가 기민당을 창당하고 양심과 용기를 조국의 장래에 바치겠다는 장한 결의를 불초 이 사람이 격려나 좀 해주고자 이곳에 찾아왔습니다.

가까이에 계신 주민 여러분!

 

나라를 위해서나 여러분을 위해서 이삼한 동지 같은 젊은 양심이 조국을 위해 싸울 수 있게 힘이 되고 보호자가 되어 같이 행동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특히 요즈음에 와서 어떤 문제든지 사실을 알고 행동해 달라고 거듭 부탁을 드립니다. 지나고 나서 속았다고 한탄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슬픈 일을 당하기 전에 예방할 수 있다면 예방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엊그제 감옥 구경을 갔더니 별의 별 사람을 다 만났습니다. 세상인심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들은 사실 다 털어 놓으면 이곳에 오신 분들 마음 소란해질 것이고 이곳에 나와 있는 경찰관들 입장이 곤란할 것 같아 꼭 해야 할 말만 골라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조국이 바라는 지도자, 여러분이 바라는 지도자는 여러분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경식 동지의 축사는 사람들의 폐부를 찌른다. 그는 다시 목청을 높인다.

 

나의 마음이 자꾸만 불안해진다. 간단하게 마무리 지으라고 전달을 했다.

 

창당대회는 예상외로 성대하게 끝마쳤다. 앞으로 자신의 운명이 궁금하기만 했다. 세월은 시간을 쫓는다.

 

11월이 되었다.

 

이제 나는 무엇을 생각해야 한단 말인가. 무언가 한 가지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도 온갖 걱정과 괴로움이 나를 괴롭힌다. 나 자신의 뒤를 돌아보면 자꾸만 꺼림칙한 생각들이 따라다녔다.

 

아내 역시 걱정되어 보이는 얼굴을 드러내며 눈치껏 살자고 애원을 한다. 사무실에 나오면 나를 돕겠다는 사람들이 나의 마음에다 채찍질을 했다. 누군 어떻고 누군 어떻단다. 집에 들어가면 망설여지고 밖에 나오면 해야 되겠다는 사명감에 빠진다.

 

그런 어느 날 아침이다. 우리 집에 웬 낯선 사람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의 저쪽에서는 나를 찾았다. 이야길 하다 보니 전화를 건 사람은 부산 제3지구당 창당준비 위원장이었다.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의 전화인데도 동지의 입장에서 반가움을 느꼈다.

 

전화의 내용은 오늘 오후 1시에 주례의 모 예식장에서 창당대회를 여니 꼭 참석해 달라는 전화였다.

 

서울에서는 구두서 목사(전 침례교회 총회장)가 참석한다고 했다. 나도 그 시간에 참석하겠다고 말을 전해주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몸에는 심한 피로가 일어났다. 술 때문인지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인지 머리가 무겁고 골이 쑤시는 것 같은 피로를 느꼈다.

 

나는 오전 중 나의 사무실에 나가 대강 나의 할 일에 대해 그곳에 나온 사람들한테 지시를 하고 정오가 되어서는 부산 제3지구당 창당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나의 사무실에서 출발을 하였다.

 

내가 탄 자동차는 길가에 있었던 건물인 대회장을 힘들이지 않고 찾아냈다. 창당 대회장인 조그마한 예식장에는 벌써부터 사복 경찰관들이 여럿 보였다.

 

나는 그곳 대회장을 위해 일하는 사람 같은 안내자를 붙잡고 나의 명함을 내어 놓았더니 금방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중년의 신사가 와서 인사를 했다.

 

그 사람은 오늘 대회를 주관한 준비 위원장이 본인이라고 자기소개를 먼저 했다. 나는 처음으로 그 사람과 악수를 나누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구 목사도 나와는 초면이었지만 나를 만나보고 매우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창당준비 위원장은 나와 구 목사를 중앙에 설치된 좌석으로 안내를 했다. 나의 옆 자리에는 구 목사가 앉았다. 나는 양심을 위해 교회를 나온 원로목사에게 시국에 대한 문제와 양심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걱정을 했다.

 

호걸풍인 구목사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나를 격려해 준다. 그때 시간이 다 되었는지 사회자가 장내를 정리한다.

 

창당준비 위원장이 나한테 와서 부탁을 했다. 축사를 좀 해달란다. 준비해간 말이 없어서 당황하기도 했지만 대답은 그러마고 했다. 나는 머리속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조금 후에 있을 축사의 내용을 찾기 시작했다.

 

사회자는 식순에 따라 대회를 진행시켜 갔다. 요식절차를 치르니 손용규 선생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오랫동안 교단에서 일해 왔다는 그분의 용모를 볼 때 경력보다는 험난한 오늘의 세대를 생각해 보면 걱정이 생긴다. 금방금방 식순이 진행되었다.

 

위원장의 인사말이 끝나고 구 목사의 축사가 끝나자 사회자는 나를 청중들 앞에 소개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앙의 연단으로 걸어 나갔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붙든다.

 

나는 마이크에다 입을 대고 침착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험난한 세상에서 자신을 돌볼 기회도 어려울 때 조국을 사랑하고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오늘 이 자리를 만들고 또 이곳에 나와 준 손용규 위원장의 애국적인 자기 양심에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지의 한 사람으로서 고마운 마음으로 나의 뜻을 전해드리며 오늘 이러한 출발을 위해 도와주신 당원동지 여러분의 열성에 뜨거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어 간다고 느껴지는 현장에서, 누군가가 이 자리에 뛰어들어 사실을 확인하고 희망을 심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순박한 양심에 자기희생을 동의했습니다마는 험난한 세상의 인심이 정의를 찾으려는 노력에 두려움과 외로움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뜻은 있어도 말은 못하고 알고는 있어도 행동을 하지 못합니다. 바로 우리들 주위에 긴급조치가 선포되어 있습니다.

 

가족을 생각할 때 이 땅에 태어난 자신을 슬퍼해야 했습니다. 자신이 두려운 사람들은 남을 편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고통은 또 고통으로 이어져가고 있는데 그것을 치료해 주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절망적인 문제에 대해 해결을 해보겠다고 병드는 사회를 고쳐보겠다고 정치해 보겠다고 손용규 위원장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곳에 자리를 같이 해주신 당원동지 여러분 또 내빈 여러분!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손 위원장이 도맡아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오늘 널리 알려주시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셔서 이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 힘이 되어주시길 간구하는 바입니다.

 

제가 오늘 손 위원장을 처음 이 자리에서 보았습니다만 관상을 보니깐 완전히 진짜였습니다.

 

세상에는 가짜가 많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면 많이 기억해 내실 것입니다. 이씨 세상에는 이씨 것이요, 윤씨 세상에는 윤씨 것이요, 박씨 세상에는 박씨 것이요, 또 다음 세상에는 다음 사람의 것이 될 줏대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웃을 속이고 사회를 속이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속이고 줄을 잡는 사람들, 그들이 오늘날 우리의 세대를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일꾼이라고 골라놓으면 일은 안하고 감독한테 잘 보이기 위해 아양만 떠는 이런 게 일꾼입니까. 기생이지.」

 

박수와 웃음이 장내를 소란스럽게 한다. 나는 다음말로 또 청중을 침묵시켰다.

 

「농사를 망치면 핑계는 하늘에다 둡니다. 속은 사람은 말도 못합니다. 이런 세상에는 그래서 인지 이유가 많습니다.

 

쉬운 말로 제가 여러분에게 하나 물어 보겠습니다. 대한민국 법률 제1조에 보면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조문이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바로 여러분이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그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여러분이 주인 대접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잘못 보였다가는 천덕꾸러기 대접도 못 받습니다. 왜 세상이 요지경으로 변했습니까.

 

줏대 없는 작자들 때문이요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고 직무를 유기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래서 답답한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애국심만 믿고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패가망신은 그냥 두고 생명까지도 걸어야 하는 이런 자리로 뛰어 나왔습니다. 바로 잡아야 한다. 바로 잡아야 한다. 그 마음으로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 집에는 한숨소리뿐입니다. 제 행동이 안타까워 제 여편네가 죽을 지경이랍니다.

 

동포가 무엇이며 조국이 무엇이냐고 나를 타이르는 여자의 마음, 남들처럼 살아가자고 절규하는 자식을 키우는 여자의 변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목석이 아닌 사람의 심중으로는 애간장이 녹을 때도 있습니다. 자식의 애처로운 눈물을 볼 때마다 못난 애비의 변을 느낍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양심을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로 고집을 부리며 버티고 있습니다. 저희는 양심을 이 땅에 바칠 것입니다. 어떤 어려운 점이 있어도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당원동지 여러분 그리고 내빈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손 위원장의 처지와 심정을 깊이 아시고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이 땅에서 양심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유의하시고 이끌어 주시고 채찍질해 주시길 간곡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속담에 아기가 크면 어른이 된다 는 진리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희망을 키우면서 현명하게 살아 갈 국민이 될 것을 같이 다짐해 보면서 오늘 이 식전에 나와 축사에 갈음합니다. 감사합니다.」

 

장내의 박수소리가 나의 띵하던 머리속을 씻어 버린다.

 

앞에서 어떤 사람이 선생님께서 연설할 때 기관원 같은 사람들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더라는 귀띔을 해주었다. 나는 구 목사와 함께 식장을 빠져 나왔다.

 

손용규 위원장이 우리 두 사람의 옆으로 뛰어왔다. 나는 그냥 떠나려고 하는데 손 위원장은 식사라도 같이하고 가라고 권한다. 부산 제3지구당 간부들과 타 지구당 조직책 희망자들이 10여명이나 있었다.

 

우리는 엄궁동에 있는 모 음식점에서 점심을 시켰고 식사가 끝난 후 일행들은 헤어졌다.

 

손 위원장은 그의 부인과 함께 영도다리 입구인 나의 사무실까지 구두서 목사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왔다. 나는 차 한 잔씩을 시켜서 대접을 하고 보냈다.

 

시간에 쫓기는 바쁜 일정들을 보면서 또 오늘 하루가 지나가는구나 생각해 본다. 마음속에서는 부담감이 더욱 커진다.

 

솔직히 말해 나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안정이라는 유혹이 자꾸만 내 마음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에게는 따로 정해진 운명이 있었다.

 

이 운명은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하룻밤을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지샌다. 언제나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머리가 아팠다. 전화의 벨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이른 새벽에 누가 전화를 걸었을까. 생각하면서도 수화기를 들었다. 어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친다. 나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어제 창당대회를 한 부산 제3지구당 위원장인 손용규 선생의 부인이었다.

 

당장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쉰 소리는 예사롭지 않을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어저께 저녁 한밤중에 웬 낯선 사람들이 집에 와서 사람을 데리고 나갔는데 소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자꾸 내 마음에 걸렸다. 어찌 되었던 당장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알아보겠다는 대답 하나로 전화의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았다.

 

아침을 먹은 후에 나는 사무실로 출근하면서 10시경이나 되어서 경찰국 정치담당한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손용규 씨가 실종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당신들 소관이요 하고 물었다.

 

그런데 그 쪽에서 전하는 이야기는 북부경찰서에 연행되어 있다며 어제 내가 한 연설은 무사하게 넘어가게 되었다고 다른 말까지 했다.

 

나의 마음은 어처구니가 없고 허탈상태에 빠진다. 나는 나의 바쁜 일정은 뒤로 밀쳐두고 사정이나 알아보아야 되겠다고 북부경찰서로 달려갔다.

 

정보과장을 찾아가 나의 신분을 밝히면서 어떻게 된 내용이냐고 물었더니 이번 일은 자기네들 소관이 아니라고 상부의 지시만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때 어떤 형사가 손 위원장을 데리고 들어왔다.

 

손 위원장은 나를 보자 계면쩍은 웃음을 띠우면서도 어떤 기대감을 갖는 모양인지 천진하게 행동한다. 나는 그의 마음을 실망시킬 수가 없었다.

 

곧 풀려나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말로 잠시나마 안심을 시키고 형사들을 보고는 잘 부탁한다는 필요 없는 말을 하고 나와 버렸다.

 

경찰서밖에는 진작부터 와 있었던 손 위원장의 부인과 그 측근 한 사람이 정문 앞에 힘없이 서 있었다.

 

나는 사실대로 일이 잘못된 것 같으나 아직 문제가 확정된 것이 아니고 어느 곳의 지시를 기다린다 하니 이만쯤의 일이면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말을 했다. 그리고 돌아오는데 나의 머리에는 오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른다.

 

어제만 해도 밝은 표정이었던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어두운 얼굴을 하고 경찰서 앞에서 발을 굴리며 서 있는 측은한 부인의 모습이 지워지지가 않는다.

 

나도 일을 당하면 나의 아내가 저런 모습으로 서성대겠지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왜 남들처럼 살지 못하느냐는 아내의 괜한 투정 같은 말들에 대해 여자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였다. 나는 내 자신의 뒤를 돌아본다.

 

태어나면서부터 천대를 받고 이웃에서 멸시를 당하던 일, 형제로부터 학대까지 받으면서 동물처럼 생명의 삶을 지켜왔던 성장기를 생각할 때 이제 또 정권으로부터 박해받기를 자초하고 있는가 생각하면 자신의 운명을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다.

 

신은 나한테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가 양심과 정의감 때문에 받는 고통을, 또 그 고통을 아무에게 이야기조차 하지 못하는 큰 고통을 간직하면서 나는 부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서울에 있는 당에다가 전화로 알려주었다.

 

이것이 내 주위의 일들을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나는 한심함을 느낀다. 이래가지고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남들처럼 자신을 즐길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위험에 부딪치려는지 도무지 자신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었다.

 

부딪쳐야 하느냐 물러나느냐 하는 망설임에 지구당을 창당해 두고도 10여일이나 손을 쓰지 않은 채 등록절차를 방치하고 있었다.

 

11월 10일이 넘어 가니깐 서울에서 뻔질나게 독촉전화가 왔다. 지구당 등록 서류를 만들어 보내 달라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그때야 결심을 하게 되었다. 20여명이나 되었던 나를 돕는 당원들한테 입당원서 및 인감 증명을 떼어오게 하였다. 그런데 예상은 했던 일이지만 이틀이 지났는데도 30여장 정도의 입당원서와 인감증명서만 들어왔다.

 

정의를 부르짖고 나온 기민당이란 정당이 양심 세력의 집단이란 소문이 퍼지니까 하도 시달려온 세상 사람들은 혹시 무슨 일이나 생기지 않을까 아예 외면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임박한 날짜가 마음에 걸렸다. 이제 내가 스스로 나설 차례였다.

 

지구당 사무국장인 김 동지한테 등록서류를 뒷날 정오까지 만들게 하였다.

 

다음날 아침 신선2동 사무실 앞에는 9시가 되자 4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민원을 맡아보는 아가씨가 땀을 흘린다. 40여장의 입당원서와 인감증명을 받아내는데 별 어려움이 없이 처리한 것이다.

 

나의 동지들과 지구당 사무국장은 경이에 찬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13일 오후 등록서류를 선거관리 위원회에 들고 갔던 사무원이 등록증을 그 날 늦게 받아왔다.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내고 말았다.

 

15일은 중앙당에서 창당대회를 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다음날로 다가오는 행사를 위해 분주하게 서둘렀다.

 

14일 오전, 두 사람의 동지들과 함께 나의 승용차로 서울을 향해 달렸다. 자동차는 오후 4시경에야 서울 시내의 낙원아케이드 앞에 닿을 수가 있었다.

 

내가 처음 찾아오는 창당준비 위원회의 사무실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의 지구당 창당대회에 참석한 바 있던 어떤 동지가 나의 얼굴을 알아보고 무척이나 반기면서 여러 사람들 앞에 나를 소개한다. 주위의 눈들이 나를 살핀다. 금방 악수하기가 바빠진다.

 

나는 대강 주위가 잠잠해지는 순간을 기다려 나의 서류 봉투에서 지구당 등록서류의 사본이 든 봉투를 조직 위원회에 넘겨주었다. 그러고서야 나의 개인 사정 때문에 행사의 일정만 듣고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숙소를 정하면 연락을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두 사람의 동지가 기다리는 나의 자동차 쪽으로 향했다.

 

나는 잠시 후 창당준비 위원회의 사무실과 가까운 곳인 청계천에 있는 센추리호텔에다 방을 구하여 놓고 나를 따라 온 두 사람의 동지한테는 서울에서 볼일이 있으면 보고 내일 아침 8시까지 오라고 했다.

 

나는 두 사람의 동지가 방을 나가자 금방 온몸에 피로를 느꼈다. 창당준비 위원회 사무실에다 호텔 객실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오래간만에 서울에 올라온 김에 옛 동지를 생각하면서 전화기를 들었다. 어떤 사람은 전화가 되지 않았고 어떤 쪽에서는 반갑다고 금방 달려왔다.

 

소주병과 오징어다리를 들고 온 사람들이 구김살 없이 옛날처럼 대하는 얼굴들을 보면서 술잔을 주고받는다. 밤은 깊어갔다. 술기운은 얼굴에까지 올라온다. 한 사람 두 사람 마지막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호텔을 나간다.

 

나는 옛 동지들이 떠나면서 남긴 위로의 말을 되씹으면서 잠자리를 잡았다. 눈을 감으니 금방 피로가 밀려왔다.

 

그때 전화기에서 벨소리가 울린다. 신호는 끊기지 않고 계속 왔다. 나의 마음은 당장 술기운 때문에 짜증스러워 질려고 한다. 억지로 수화기를 들었다.

 

상대 쪽에서 먼저 나를 찾는다. 나는 대답을 했다. 전화기의 저쪽에서 금방 반가운 음성으로 변한다. 전화를 건 사람은 신학 대학을 나온 사람으로 천주교회의 예비신부였다.

 

내일 창당대회에서 나를 정치위원에 뽑을 것이니 승인해 달라는 전화였다. 나는 적당히 말을 얼버무리며 수화기를 놓았다.

 

내가 잠에서 깨었을 때는 아침이었고 두 동지가 호텔로 돌아온 뒤였다. 대강 나의 몸가짐을 갖춘 뒤에 우리는 인근인 낙원동을 향해 출발을 했다.

 

창당준비 위원회의 사무실은 복잡했다. 나는 아직도 창당대회의 장소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궁금증이 발동을 한다. 창당준비 위원회의 조직책임자를 붙잡고 도대체 오늘 어느 곳에서 대회를 하느냐고 계면쩍은 얼굴로 물었다.

 

한참이나 망설이던 그는 지금까지 장소결정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했다. 돈을 주어도 구할 길이 없다는 딱한 변이었다.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사람들이 분주하게 설쳤다. 서울의 변두리에 있었던 터밭골이란 곳에 있는 장로교회에다가 장소를 정했단다.

 

자동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앞차를 따라 서울의 지리에 서툰 내 차의 운전수가 기를 써가며 따른다. 나는 이 순간에도 현실의 저쪽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비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만한 일에 이렇게 한다면 다음 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한 가지 두 가지가 아닌 부딪칠 다음 일들을 생각하면 나의 훗날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차는 변두리까지 나왔는데도 또 산동네를 넘어간다. 그런 후에 교회가 있는 곳에 멈추었다. 또 그곳에서도 일을 벌리기 전에 말썽이 생긴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소속된 교회의 상부 층에서 내려온 연락은 교회 안에서는 정치집회를 열 게 해서는 안 된다는 압력이었다. 이젠 그곳 교회 목사의 결정만이 남은 것이다.

 

목사는 오히려 우리 쪽에 대해 미안해하면서 하층인 지하실 쪽을 쓰라고 했다.

 

일개 정당의 중앙당의 창당대회가 비닐 장판이 깔린 지하실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야박한 인심과 공포가 곁들인 위협 속에서 양심과 정의감에 불타는 결의가 진행되는 순간이었다. 식순이 진행될 때마다 당 지도부가 구성되고 12명의 정치위원이 선출되었다.

 

대회장은 쌀쌀한 날씨였는데도 열기를 품으며 순조롭게 폐회식까지 끌고 갔다. 대회를 치루는 모두의 얼굴은 어떤 결의 때문인가 숙연했다.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 우렁찬 성가가 공간을 향해 퍼져 나간다. 대회는 순조롭게 끝을 낸 셈이다.

 

대표 최고위원과 12명의 정무위원은 오늘 남긴 문제들을 협의하기 위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귀가하지 말고 낙원동 당사까지 가서 기다려 달라고 집행부에서 통지를 한다.

 

나는 나의 일행과 함께 나의 자동차 쪽으로 걸었다. 자동차 안에는 웬 낯선 사람이 조수석에 벌써 타고 있었다.

 

어떻게 문을 따고 앉아 있었을까 하는 의심보다 나의 앞길이 점점 불안해진다. 내 차를 태워 달라던 사람한테는 양해를 구하고 시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운전석 옆에 앉은 뱃심 좋은 사나이는 자기소개도 하지 않은 채 단 한 마디도 입을 떼지 않는다. 나의 차가 결국은 목적지인 낙원동에 도착을 하여 멈추었는데도 사나이는 차에서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당사를 향해 들어갔다. 나는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중앙당 사무실에서는 곧 정치위원회를 열겠다고 하더니 우리를 안내해간 곳은 인근에 있던 어느 호텔의 넓은 한식 방이었다. 방 중앙에는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고 열세 개의 방석이 우리들을 맞이했다.

 

12명의 정치위원 중 나는 나이가 제일 연소했지만 정치적인 경험만은 제일 많은 편인 것 같기도 했다. 회의의 속개 중 나에게는 어떤 이야기도 이곳에서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회의는 나의 발언에 의하여 진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회의를 간단하게 끝내는 방법을 선택하였고 모든 안건은 총선 후까지 보류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여 통과시켰다. 당을 꾸밀 수 있는 실무진 몇 사람만 인준을 하고 더 유능한 인재를 영입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의견 충돌 없이 회의를 끝내게 하였다.

 

그 날 저녁 창당대회에서 아무 요직도 맡지 못한 도봉 지구당위원장인(청년 실업가였던) 임창진 위원장이 정치위원들과 함께 저녁식사나 하자는 초청에 내가 제의를 해서 응하게 되었다.

 

오후 6시쯤 되어 각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내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때까지 낯선 사나이는 조수석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부산에서 같이 올라온 동지들을 보고 이제 볼 일이 끝났으니 부산으로 출발한다고 말을 하니 그때까지 자동차의 조수석에 목석처럼 앉아 있던 사나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처음으로 입을 열며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시라고 또 손을 내밀며 악수까지 청한다. 나는 얼마쯤 차를 운전기사한테 몰게 했다.

 

그리고는 인근에 차고가 딸린 여관을 잡았다. 두 동지한테는 저녁식사를 시켜 주고 나는 회식장으로 달려갔다.

 

초대된 좌석에는 당 정치위원 말고도 지방으로 떠난 줄 알았던 지구당 위원장급 인사들도 배석하고 있어서 방 안에는 20여명이나 사람들이 있었다.

 

나의 마음속에는 이번 일로 처음 만난 사람들이라 서먹서먹하기도 하였지만 또한 어떤 사람들인지 그 인물 자체에 궁금증을 느꼈다.

 

처음에는 분위기가 서먹서먹했으나 술이 들어오고 술잔을 돌리면서 약간의 취기가 몸에 오르자 사람들은 긴장을 풀려고 애를 쓴다.

 

누군가가 이런 제의를 했다. 돌아가면서 자기 내력에 대한 소개를 하자는 것이다. 모두 다 동의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 자기소개를 멋있게 해댄다. 내가 듣기에는 모두가 훌륭한 인물들이라 여겨졌다. 소개가 끝나면 경이에 찬 눈초리와 박수가 나왔다.

 

나는 자랑스럽지 못한 나의 지난날을 이야기해야 하는 분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끝에서 두 번째인 나의 차례가 오게 되었다.

 

나는 주는 대로 받아 마신 술에 정신이 흔들렸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나를 주시했다.

 

연소한 나이보다 당당한 태도,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두고 더 궁금했는지 모른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의 아버지는 석수장이로 화전을 일구던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기억에 담을 수 없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혼자된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나를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달픈 여인의 힘에 부담을 준 짐이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분도 아홉 살 적에 돌아 가셨습니다.

 

열 살 때부터 세상의 인심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냉정한 사회에서 살려고 하다 보니 별 것 다 겪은 사내입니다.

 

남루한 내 꼴이 이웃으로부터 멸시를 받았지요. 어떤 때는 동리에서 성질이 사나운 아이들의 분풀이 대상도 된 적이 있었습니다. 형제조차도 나를 학대하였습니다. 나는 힘없는 동물처럼 세상을 두려워하며 살아왔습니다.

 

13살 때에는 신문장사, 아이스케키장사, 중국인 주물공장의 노동자, 좌우지간 궂은일은 무엇이든지 해보았습니다.

 

지금 저는 너무 복잡한 나를 다 소개는 못합니다. 너무 기니까요. 군대라는 곳엘 갔다가 제대해 보니깐 성인이 되었지요.

 

빵 문제 때문에 취직을 하려고 하였더니 보증인이 없어서 몇 번이나 직장을 못 구하고 질식할 것 같은 감정을 느끼던 날, 나는 세상에서 어떤 사명을 느끼고 정치를 해 보겠다고 뛰어 다녔습니다. 비로소 내 적성에 맞는다는 걸 느꼈습니다.

 

조직 속에 들어가니깐 난생처음 사람대접을 받았습니다. 대중당에 입당해서 지구당위원장, 청년국장, 사회단체 회장, 준비위원장 같은 것은 열 번도 더 맡아 보았습니다.

 

간이 커진 제가 1971년 5월 25일 선거에 출마를 했더니 나를 아는 사람들이 입을 딱 벌립디다. 나는 내 자신의 무지 때문에 언제든지 참모를 필요로 했고 한 번도 '부'자 붙은 자리에는 앉아보지를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당 대표나 한 번 해 볼까 했더니 정치위원밖에 못 됐습니다마는 우리들이 있는 곳이 양심세력이라는 데 매력을 느끼며 나의 양심을 통해 자신의 발전을 기대합니다. 앞으로 잘 이해하고 지내봅시다. 나에게도 소개의 기회를 주어 감사합니다.」

 

연설조로 내어 풍긴 나의 소개에 좌중은 숙연했다. 이번에도 경이에 찬 눈동자들이 나를 향해 주시된다.

 

다음 사람이 또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했다. 대강 좌중의 인물들에 대해 우리는 서로가 근본을 생각할 수가 있었다.

 

나는 어지간히 배가 부른 것을 느끼며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양해를 구했다. 구 목사가 같이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회식을 열어준 임창진 씨가 문밖까지 따라 나오며 자기 차를 타고 가라고 권한다. 염치가 좋았던 나는 그러자며 자동차로 먼저 올라타면서 구 목사한테 타기를 권했다. 자동차는 얼마 안 되는 나의 숙소 옆을 지나 구 목사의 다음 행선지를 향해 달려갔다.

 

나는 왠지 나의 마음속에서 걱정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앞으로 우리가 같이 해야 할 일은 예삿일이 아닌 것이다.

 

정상적인 당의 출발을 첫째 정권이 양해를 할 것인가 궁금하였다.

 

그들이 우리의 양심을 양해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운명은 행동하기에 앞서 불운을 맞게 될 것이다.

 

새장에 갇혀 있는 새를 생각했다. 허공을 날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날지 못하는 신세가 훤히 눈에 보인다.

 

정의는 총알을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잘못 되었다가는 하고 생각하면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신을 학대해야 하는 무서운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잠이 드는가 마는가 하는 속에서 날이 새었다. 두 사람의 동지와 함께 나는 서울을 떠났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자동차는 부산을 향해 속력을 내었고 16일 오후 나는 나의 사무실에 돌아왔다.

 

서울까지 같이 동행하였던 두 사람의 동지들은 사무실에 모인 다른 동지들을 보고 내가 중앙당의 정치위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통고했다. 이곳 사람들은 다시 나를 신임하기 시작한다. 나는 걱정과 우려가 나의 마음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시간이 가면서 이런 마음을 더욱 확인하게 되었다. 중앙당을 정식등록을 시켰느냐는 질의전화를 하면 중앙당의 조직 부서에서는 내일된다 모레된다 시간만 끈다.

 

정당이 등록되면 200만원의 공탁금 절약과 선거 운동원의 활동에 큰 차이가 있었다. 정당등록으로 등록의 효력이 발생되는 23일이 지나서야 통보가 왔다.

 

도저히 불가능했다는 서글픈 통보였다. 나는 24일을 얼마나 지루하게 망설이며 보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또 25일의 아침을 맞이한 것이다.

 

운명은 시간만이 결정할 수가 있었다. 나의 마음속에서는 격렬한 대립이 시작되었다.

 

나가느냐 주저앉느냐 빨리 좀 시간이 가주었으면 하는데 이날따라 왜 시간이 이렇게 긴지 모르겠다.

 

주위에서 여러 사람이 마지막 나의 결정을 주시한다.

 

 

25. 어려운 결정

 

몇 시간만 지나면 고민은 풀릴 수가 있다. 변명조차 할 건덕지가 없어서 시간은 더욱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의 행동을 지켜보며 동정만 살피던 주위의 사람들이 충동질을 했다. 그때 사무장인 김 동지가 나의 이런 행동에 눈치를 챈 것인지 시간을 넘길 것이냐고 다그친다.

 

나는 죽을 지경이 되어서 결정을 기다리는 사람들한테 어쩔 수 없는 답변을 했다. 운명은 기어이 나를 어려운 일에서 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등록 마감시간을 마지막 두 시간을 남겨 놓고 사무장 앞에다 도장을 내어 주고 집에다가 전화를 하여서 500만 원짜리 보증수표를 끊어오게 하였다. 주위에서 지겹게 나의 동정만 살펴보던 사람들의 얼굴에 활기가 솟기 시작한다.

 

사무장이 준비하였던 서류를 챙겼다. 몇 사람이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조금 후에 사무실로 돌아온 사람들은 후보등록 접수증을 내 책상 위에 내어 놓았다. 사정이야 어떻든 당장 마음이 바빠진다. 억지로 힘을 내었다.

 

그런 나의 앞에는 다음에 닥칠 일들이 두렵고 괴롭게 떠올라왔다. 어떻든 이제 물러설 수는 없었다. 현실을 아는 나로서는 나의 행위가 자신의 가치를 조국에 바칠 수 있는 행동 중에서 가장 큰 수단이라고 여겼다.

 

양심과 용기만으로 현시점에서 권력의 배후 인물과 대결하는 자체가 얼마나 나를 멍청한 놈이라고 느꼈는지 모른다. 그런 마음속에서도 나는 다음 세대의 용기를 위해 위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시작했다.

 

나는 나의 눈앞에 떠오르는 자식과 아내 그리고 나를 아껴주신 사람들의 환상을 더듬으며 괴로운 마음을 억지로 쫓아 버렸다.

 

선거가 끝난 후 찾아오게 될 보복이나 후유증을 생각하면서도 나는 당장 국회의원 후보로서의 나의 소신을 꿋꿋이 지킬 결심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하나하나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옆에 있던 사람들을 독촉하면서 서둘렀다.

 

현수막을 주문하였고 직접 내 손으로 선거 공보의 원고를 작성하였다. 어제의 하루와 오늘의 하루가 달라져 버린다. 시간은 말도 못하게 빨리 달아난다. 나의 머리속은 온통 내가 찾아내어야 할 여러 가지의 일들로 계속 차 있었다.

 

당장 선거운동원을 동리마다 구해야 하였고 합동정견 발표장에 들고 나갈 연설문 문안도 구상해야 했다. 이런 나한테는 언제나 잠이 부족했다. 당장 자금 사정이 또 걱정이었다. 무소속이란 핸디캡은 계속 발표되는 당국의 엄포 속에서 기가 죽어 갔다.

 

눈만 뜨면 골이 쑤시고 머리가 무거웠다. 속수무책이란 말이 이런 것을 두고 생긴 말 같기만 했다. 생각하면 기대어볼 데는 아무 곳에도 없었다. 이런 지독한 현장에서 단 하나 가질 수 있는 생각은 합동연설회에다 막연하게 기대를 두는 것뿐이었다.

 

1978년 11월 28일은 겨울철인데도 하늘에서는 비가 뿌리고 있었다. 바로 그 날이 합동연설회가 실시되는 첫날이었다. 그러나 오후가 되니 비가 그치면서 날씨가 개인다. 그때부터 기온이 갑자기 내려갔다.

 

시간이 되어 청학국민학교 운동장인 연설장에 나가니 지금까지 느끼지 못하던 당황감이 자꾸만 생기는가 하면 또 머리가 괴상한 생각들로 산란했다. 걱정과 피로가 쌓여 왔다. 몸마저 추위를 느끼는지 유난스럽게 떨린다.

 

그때 운동장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연설 순위의 추첨을 하겠으니 빨리 나오지 않는 후보자는 기권으로 알고 추첨을 하겠다고 처음부터 방송을 하는 사람들은 수월하게 말을 했다.

 

나의 일행 중에서 사무장이 나의 도장을 가지고 마이크가 설치된 자리 쪽으로 나갔다. 얼마 후 추첨을 하고 돌아온 그 사람이 좀 민망스런 얼굴을 하며 10번이라고 일러준다.

 

날씨와 시간을 생각할 때 걱정이 되었다. 혹시 또 빈 운동장을 보며 연설을 하게 되는 것이나 아닌지 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런 나에게 겨울해가 서쪽 산에 걸릴 때쯤 차례가 돌아왔다. 선거관리위원 측의 마이크에서 나의 이름을 호명했다. 나는 자신 만만했던 생각과는 달리 두려워진 마음으로 연단 위로 올라갔다.

 

기온 때문에 더 추위가 느껴진다. 정해진 시간을 기억하면서 넓은 운동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10대 총선에서 10번의 기호를 타고 10번 째 연설을 하겠다고 이곳에 나온 이삼한입니다.」

 

하면서 허리를 구부렸다. 사람들은 나의 인사말에 대접을 해주는 것인지 박수를 쳤다. 나는 다음 말을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이번 지역선거에서 한 사람에게 십자가를 세 번씩이나 지워준 것은 나의 요술이 아니고 신의 뜻일 것입니다. 추운 날씨에 기다려 준 여러분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제가 왜 국회의원에 출마하게 되었는가 하는 말씀부터 해보겠습니다.

 

저의 가슴 속에는 답답한 것이 많습니다. 정치하는 사람은 있는데 정치가 우리 주변에 없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들으면 애국자는 많은데 실제는 나라꼴이 말이 아닙니다. 국민들은 정말 믿을 데가 별로 없습니다.

 

사기당하고 억울하다고 가슴 치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많이 사는 곳이 우리가 사는 땅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왜 이런 세상이 가면 갈수록 고쳐지지 않고 더해 가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우리가 뽑아 보낸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나가서 도대체 어떤 일을 했기에 이렇게도 억울한 사람 슬픈 사람이 생기는가 알아봐야 하겠고, 또 방치할 수 없는 우리들 주변의 사정을 반영해 보고자 꽤 까다로운 선거에 출마하고자 여러분 앞에 나섰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처럼 돈이 많아서 명성을 얻으려 나온 사람도 아니요. 관록이 좋아서 자랑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요. 학벌이 좋아 누굴 가르치겠다고 나온 사람이 아닙니다.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는 세상 꼴과 걱정스러운 나라의 장래를 두고 참고 견딜 수가 없어서 나 같은 사람이 나와서는 요런 세상에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젊은 양심은 조국을 그냥 외면할 수가 없어서 나라를 구해 보겠다고, 죽어가는 정치를 구해 보겠다고 아까운 목돈을 구해서 공탁금까지 실제 두고 보면 알 일이지만 저 같은 것은 기부금이 될 것이지만 500만원이나 내어 놓고 나왔습니다.

 

이번 선거가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나라나 우리 개인이나 중요한 선거이기 때문에 저 또한 결심이 다른 사람 같지 않고 특별히 대단하였던 것입니다.

 

이 중요한 선거에서 이 땅의 주권자인 여러분들께서는 안면이나 물질의 유혹이나 협박과 회유에 속지 말고 여러분 자신이 입후보 등록은 안 했더라도 한 사람의 후보자로서 임해줄 것을 부탁드리는 바이며 또 주위에다가 이번 선거야 말로 중요한 선거이니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 용기가 있는 사람, 양심이 있는 사람, 정의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선거 풍토를 조성함으로 해서 정말 나라의 장래를 구하는 일에 같이 힘써 주실 것을 한 사람 국민 된 양심으로서 여러분에게 부탁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오늘 기온이 갑자기 내려가서 날씨가 쌀쌀한데도 마지막 사람까지 연설을 들어 보겠다고 남아 주신 유권자 여러분, 여러분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나는 여러분의 심중을 헤아릴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나 또한 지금 심정은 앞에 나와 이곳에서 연설은 하고 있어도 실제 제 심정은 여러분의 심정 바로 그것과 같습니다.

 

나는 법률과 양심을 보호하지 않는 모순된 오늘날의 정치와 싸울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나는 정의를 외면한 무능하고 용기 없는 사이비 정치인과 싸우겠습니다. 바로 그 이유로 오늘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여러분 그놈 괜찮은 놈이라고 생각하시는 분 박수 좀 치십시요. 오늘 날씨가 추워 그런지 저의 마음이 차갑습니다.」

 

하고 말을 끝내니 사람들 속에서는 웃음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는 다음 말을 끄집어내었다.

 

「요즈음 세상을 보니 보는 것마다 기막히고 답답한 일 뿐입니다. 긴급조치다 뭐다 해서 남의 양심에다 수갑까지 채우는가 하면 가진 것을 일구어서 저축은 고사하고 외부에서 빚내어다가 흥청거리는 것 보고 정치 잘 한다고 줏대 없는 소리나 씨부리는 자들을 지도자 만든다고 떠드는 것을 볼 때 눈물까지 나옵니다.

 

인재가 그 사회에서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회 이런 일은 역사책에도 없습니다. 양심을 버린 사람들을 보고 순진한 사람이 걱정을 한다고 어떤 일이 생기겠습니까.

 

장사 한 번 안 하고도 수백억 원을 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깨비 부자인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방망이의 요술이냐 그렇지 않으면 협잡이란 요술이냐 궁금합니다. 사실은 모르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생활을 부러워하게 됩니다. 또 그런 나머지 세상에는 별의 별일이 많습니다.

 

억울한 자가 많이 생길 것은 엄연한 이치이지만 이 억울한 사람들이 호소할 곳이 없어 가슴을 치는 것을 볼 때 양심을 가진 자의 힘없는 가슴에 그 고통이 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슬픈 사연들의 종식을 위해 우리 동포의 모두는 비겁한 자신과 투쟁해야 한다는 원칙을 보이기 위해 나는 출마를 했습니다.

 

이곳에 나오신 분 중 저보다 여건이 못한 분은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조국을 위해 행동을 보이지 않는 한 우리의 앞날은 어둠 속에 묻히게 될 것은 구태여 예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책임을 질 수가 없다고 발뺌을 한다 해도 가까운 앞날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일어나기에 힘이 들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일을 방관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 땅에 태어나서 누구보다도 충분히 고생을 경험했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미래에 대한 행복으로 오늘까지 살아왔습니다.

 

지금 그 미래가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을 구할 수 있는 자는 여러분과 나입니다. 여러분이 하겠습니까. 제가 할까요, 누가하든 각오는 단단히 하고 대들어야 할 일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후보 상대자들은 내가 무슨 이야길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을 위해서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특히 정계로 관계로 두루 돌아 다녀보신 분들은 자기들 의견을 그 동안 많이 반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꼴이 요즈음 보니까 요 모양 요 꼴입니다. 조금치라도 그런 사람들은 아직 양심이 있다면 오늘의 사회에 대해 변명 같은 것 구태여 생각하려고 하지 말고 새로운 시대를 위해 스스로 용단을 내려 줄 것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께는 이 자리가 웅변 대회장 같이 변하는 자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또한 제 주장입니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인재의 앞길을 막는 행위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자랑이 되는 그러한 시대가 지금은 아님을 경고하겠습니다. 현재의 어려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지 못하겠다 싶은 분들은 미안하지만은 오늘 이 자리에서 사퇴해 달라고 제의하겠습니다.

 

나라가 중요하고 희망이 중요하고 사실이 중요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아야 할 현실인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하겠다고 후보자와 유권자 여러분 앞에 자신 있게 공약하는 바입니다.

 

나는 평소 우리나라 정치인 김두한 선생과 서민호 선생의 의회 활동을 존경해온 사람으로서 그분들과 같은 길을 걸어 갈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때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나는 마지막 당부의 말을 이었다.

 

「여러분 오늘 동리로 돌아가시거든 저의 말씀 좀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고장의 명예를 빛낼 것은 물론 나라의 장래를 빛나게 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의 연설은 끝을 내었다. 다른 후보의 박수부대까지 손뼉을 쳤다. 해가 넘어간 연단 위로 마지막 연설 순위자가 올라갔다.

 

땅거미가 지는 운동장 연단 위에서는 마지막 사람의 연설회가 시간을 맞추어 끝을 냈다. 나는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몸과 마음을 지닌 채 힘든 행군을 시작하였다.

 

고민과 아쉬운 문제들은 점점 많이 불어났다. 무소속이란 입장 때문에 나의 행동은 집과 선거 사무실로 왔다 갔다 했다. 까다로운 선거법을 지키려 하다 보면 아는 사람도 찾아갈 수가 없었다.

 

새장 속의 새가 오직 바깥쪽에 있는 사람들한테 표정으로 동정을 구하는 길밖에 없었다.

 

선거 사무실에는 별의 별 사람이 다 찾아왔다. 대부분 끝에 가서는 솔직하게 표와 돈을 바꾸자고 요구했다. 절박한 현장에서 내 마음은 쓰리고 아팠다.

 

선거방법은 관제선거 같은 기분이 들었고 유권자는 내일의 현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차 이 나라는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가 생각하면서 99%의 불가능 보다 1%의 희망을 위해 나 자신을 버티었다.

 

사법부와 행정부에서는 걸핏하면 선거사범을 엄벌에 처하겠다고 경고문을 실은 종이를 자주 길거리에 붙였다.

 

세상에서 제일 까다로운 선거법 속에서 믿는 데도 없이 선거에 참여해서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나의 꼴이 우습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후보들은 잘못된 정부의 P·R만 하고 유권자들한테는 박수만 받는다.

 

나는 이런 게 선거냐고 자신에게 항의를 했지만 대답이 나올 리 없다. 이런 답답한 마음속에서 두 번째의 합동정견 발표회가 영주동의 봉래국민학교에서 실시되었다.

 

날씨는 청명했고 기후는 풀려 따뜻했다. 청중은 작은 학교의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나의 연설 순위는 다섯 번째였다. 4사람의 연설을 듣고 나니 나의 차례가 왔다. 나는 연단으로 올라갔다.

 

그 동안 신경을 너무 많이 쓰고 말을 많이 한 탓인지 목이 꽉 잠겨 있어서 안타까움은 절정을 이루었다.

 

청중들은 박수를 치며 나의 연설을 재촉한다. 나는 천천히 힘을 들여 목을 틔우며 입을 열었다.

 

「그저께 청학국민학교에서 있었던 연설회에서 열 번째 연설을 하였습니다. 내 차례까지 기다리다 보니 아홉 사람의 연설을 듣게 되었습니다.

 

모두 한결같이 국민학교 학생 때 하던 웅변대회에서 연사들 인양 유신 정부의 대변인처럼 대안도 없이 참으라고 하는 식의 소위 오늘날 권력 쥔 사람들에게 아부하는 것 같은 말만 하고, 목마른 사람들 보고 언제 비가 올 것이라는 말은 빠뜨리고 문자 타령만 하는가 하면 저희가 일당 주고 끌고 온 사람들 보고 박수 치기나 시키는 것을 보고 그 사람들의 웅변이 하도 딱해서 제 마음 속에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때 내 차례가 되어서 죄 없는 마이크에다 대놓고 고함을 좀 질렀더니 이렇게 목이 꽉 잠겨서 제 말을 듣기가 여러분들께서는 거북하실 줄 믿습니다. 하지만 저 또한 사회와 조국의 장래를 생각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 올라왔으니 주어진 시간 동안 이해와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나의 주장은 언제나 핑계 잘 대는 사람만 속아서 뽑아 더러운 꼴만 당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하고 있는 괴롭고 어려운 일을 하나하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지지하며 뽑아주어야 한다는 주장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자식대대로 유신이나 할 것이며 부족한 희망 속에서 한국적인 민주주의나 이해하며 속아주고 또 속아주고 억울해도 입 닫고 참고 또 참고 하는 지루한 일만 되풀이하지 않고 좀 똑똑하고 용기 있는 사람을 뽑아서 세계적인 민주주의를 하도록 해 보고 일등 국가를 한 번 만들어 보자 하는 것이 나의 소신입니다.

 

말 잘 하는 사람의 말만 믿고 살지 말고, 안 되는 일의 원인을 하나하나 확인하여 바로 잡도록 하고, 답답한 사람들 답답하지 않게 하는 사회 풍토를 개선해 보자는 것이 제 정치적인 주장입니다.

 

한 나라의 국회의원이란 일꾼을 뽑는 것이 선거인데 여러분께서는 상전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을 뽑게 되는 그런 곤란한 일을 저지르지 말자는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이번 선거에 나온 사람 중에서 현재의 선거법 덕분에 1등 2등만 하면 된다는 기대에서 나온 사람 중에는 1등 2등할 만한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악법도 법이라는 이유 때문에 법을 내세우는 현장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가슴에 새기면서 저의 생활에서는 대단히 큰돈인 500만원을 공탁금으로 내놓고 조국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출마는 했습니다마는 여러분에게 제 자신을 알리기에는 너무나 답답한 일들뿐입니다.

 

공개적으로 선거운동을 하는 보장된 방법이란 것은 고작 4번의 합동연설 기회뿐인데 그것도 짧은 20분 동안이니 4번 다 합쳐보아야 80분입니다.

 

장소도 제 마음대로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지정해 주는 곳에서 그것도 제비뽑기로 운수를 잡아야 하는 순위 결정에는 난감할 뿐입니다.

 

잘못 뽑았다가는 사람 다 나가 버린 운동장만 보고 가슴 속에 울부짖는 애국심을 호소해야 하는가 하면 잘 잡았다 해도 돈 많은 사람 권력주변에서 노는 사람들이 데리고 오는 박수부대 앞에서 제 신세 생각하고 울어야 하니 도대체 이 딱한 남자의 사정을 어떻게 해야 옳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돈을 쓰면 안 되는 선거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돈을 막 뿌립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7사람 달리기를 하는데 완전 자유로운 사람과 손이 묶인 사람, 발이 묶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 같은 사람은 지금 손발 전부 묶인 채로 모든 규칙 다 지켜야 하는 형편입니다.

 

이게 무슨 장애물 경기입니까? 여러분께서는 공평한 심사를 할 수만 있다면 확인해 보십시오. 제가 1등입니다.

 

그런데 이게 장애물 경기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 사람 욕심에 다른 사람들이 위반을 하는 것 아닙니까.

 

이유는 알 수 없고 이유를 몰라 심판한테 물어보면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그 사람들 말이 더 근사합니다. 웃기는 경기 같지요. 이번에는 꼭 공명선거를 하겠다고 신문에서 떠듭니다마는 그래 이런 방법이 공명선거입니까?

 

제가 지금 국회의원이 못될 것 같아서 이렇게 떠드는 것이 아닙니다. 조국을 생각하고 동포들의 입장을 생각하고 역사를 생각할 때 안타까워서 외치는 것입니다.」

 

금방 잠겨 버릴 것 같은 목청을 억지로 유지하며 얼굴에 경련까지 일어나는 힘든 장면을 확인하면서도 주위에다가 마음속에 쌓인 사실들을 고백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사실의 현장으로 돌리려고 힘을 더할 때마다 군중 속에서는 계속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내가 연설을 마치고 밖으로 나올 때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나의 발길 앞으로 에워쌌다. 나는 현실을 똑바로 분별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내 자신의 고통과 희생을 위해 안간 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투표일이 가까워지면서 사람들 속에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금전이 난무하는가 하면 공포 분위기마저 조성되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나 자신은 기댈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느낄 뿐이다. 그런데도 동지들은 자금을 풀어야 한다고 선거운동원들의 투정을 부추기기만 했다. 나는 고민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도 또 어려운 일들은 여기저기에서 생기기만 한다.

 

선거 조직원인 한 여자가 저녁에 내 집에 와서 눈물을 흘리며 딱한 사정을 호소했다. 남편의 직장에서 남편더러 마누라 단속을 잘 하던지 직장을 떠나던지 양자택일을 선언했단다.

 

성난 남편의 행동을 말하면서 자기는 어떻게 되느냐고 울었다. 나는 그 여인을 위로했다.

 

나의 출마는 양심과 정의의 구현은 힘들었고 양심과 정의를 가진 자를 학대하는 결과를 만들고 있었다.

 

서울에서도 대중당 시절에 만났던 5명의 동지들이 나를 돕겠다고 부산까지 왔다. 또 생면부지의 양심인 들이 서울에서, 대구에서, 대전에서 찾아왔다.

 

나에 대한 여론과 인기가 좋다고 모두 한결같은 과장을 해대었지만 나의 마음은 우울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예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두려움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파산이냐 순진한 사람들을 실망시키더라도 장차의 조국에 봉사하기 위한 자기 방어냐 하는 양 갈래의 기로에서 결심을 위한 결단을 내리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다 보니 최종 선거일은 3일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 3일이 나에게는 죽음보다도 더 큰 고통이었다. 나의 마음에는 어느 정도의 냉정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조직세포로 열심히 뛰어준 핵심 멤버들을 두고 나는 어떻게 하더라도 반발만은 무마하여야 했다. 그래서 나는 같은 시간에 모두를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나의 현재의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나는 여러분을 속이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후보와 나와는 입장이 좀 틀립니다.

 

다른 후보들은 대부분 저쪽에서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지금 그 반대입니다.

 

내 자신의 파산은 각오한 일이지만 이런 일이 남기게 될 분명한 사실만은 나한테 앞으로 어떤 변명도 주지 못할 것입니다.

 

나의 진정한 마음은 여러분이 기대하는 곳에 서 있고 싶습니다. 선거 운동하는데 별 경험도 없는 여러분이 짧은 기간 동안 나를 생각하며 만들어 놓은 조직의 맥과 줄기는 상당하다는 것을 압니다.

 

당선은 못되더라도 세상의 이목이 나를 따른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막바지에 접어들어 선택하여야 할 행동에 대한 어떤 문제가 뒤따라 올 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후회 없이 짊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결정이 안 된 상태입니다.」

 

한 곳에 모인 핵심 멤버들은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서로의 얼굴에는 침묵이 흘렀다.

 

다른 사람들도 선거법을 알았고 본인들이 일하고 있는 후보자가 당시 정권이 가장 두려워한 양심인 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시 나의 뜻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여러분을 어떤 경우에서도 이해하고 싶습니다.

이 순간 이후 다른 후보자와 손을 잡더라도 결코 원망하지 않을 결심입니다.」

 

나는 나의 참다운 마음을 밝힌 것이다.

 

어떤 기대감을 가진 채 모였던 사람들은 실망한 얼굴로 힘없이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고통을 안고 있는 시간이 무척이나 천천히 흐르기 시작한다.

 

들어오는 소식마다 하부 조직의 이탈이었다. 우리 일행에게 이제 최선이라는 말은 남지 않았다.

 

나는 투표가 시작되던 날, 나의 일을 사무실에 남게 될 사무장한테 일임을 하고 서울에서 내려와 마지막 날까지 나의 옆에 있어 주었던 이동열 동지와 부산을 떠나는 시외버스 정류장 쪽으로 나갔다. 나의 마음은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 방향조차도 생각해 보지 않고 금방 떠나는 버스에 오르고 나서 차의 행선지를 살피기 시작했다. 시내를 벗어난 버스가 양산 쪽으로 뻗은 자갈길을 달렸다. 두 시간쯤 지난 후에야 양산 통도사 근방에서 내렸다.

 

맑은 물이 흐르는 통도사 입구에서 도로를 따라 걸으면서도 자꾸만 텅 빈 마음속에서 서글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의 지난 행동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았다.

 

쓸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이 필요했다. 이 동지와 나의 앞에는 빈 소주병이 하나 둘 늘어갔다. 우리가 술집을 나올 때는 몸을 가누기에 힘이 들었다. 지나가는 택시가 우리를 인근의 통도사 호텔까지 실어다 주었다.

 

두 사람이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술 취한 다음날의 아침이었다. 방 안에 있었던 텔레비전의 화면에서는 아직도 전국적인 개표 현황이 중계되고 있었다. 다행한 일은 내가 나왔던 부산의 중구 영도구의 개표는 종료되어 있었다.

 

나의 무겁던 마음이 개운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성을 되찾으면서도 다음 행동에 대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호텔을 빠져 나온 두 사람은 시골의 장터 근방에서 국밥을 시켜서 아침 겸 점심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무슨 일이든지 저질러 버릴 것 같은 마음을 두고 몇 군데나 술집을 전전하며 알콜로 비애가 쌓인 감정을 씻어야 했다.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걱정을 하고 있던 아내가 나를 보자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북적거리던 집안은 조용했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아내는 정성을 다하는 듯 했지만 방안에 들어가자 이내 쓰러지고 말았다. 아내는 나의 몸 위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다음날 나는 몸을 단정하게 가꾸고 선거 후의 마지막 마무리를 하기 위해 사무실로 나갔다.

 

정오가 되자 그 동안 핵심동지였던 여러 사람들이 나왔다. 그 사람들은 나를 보고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고 위로의 말을 찾아야 했다.

 

술을 몇 병 사오게 하여 그 동안 맺혔던 마음을 깨끗하게 잊으려 했다. 얼마큼 준비해 나간 돈이든 봉투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이제 선거는 끝났습니다. 이 봉투는 나의 성의입니다. 작은 봉투지만 여러분들에게 양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좌중에 모여든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화기애애한 빛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앞에 놓인 술잔 앞에 술을 따르며 비로소 나의 속마음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 땅에는 아직도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세상을 바로 보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과 친척도 아닌 사람들이 돈 봉투나 어떤 물질에 대한 기대나 대가없이 표를 던져 준 순수한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나는 나의 행동에 대해 보람을 느낀다 고 말을 이었다.

 

세상의 이목을 얻기 위해 돈을 쓰고 표를 샀다면 나는 상당한 표를 비용만큼이나 얻을 수 있었겠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내 자신의 양심 속에서 영원히 나를 고문하는 결과로 남았을 것이라는 마음을 전한 것이다.

 

나에게 남아 있던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고 앞으로 내가 찾아야 할 조국에 대한 나의 사명이었던 것이다. 정말 나는 힘겨웠던 모든 일을 신속하게 마무리했다.

 

술이 취하는지 한 사람씩 사무실을 나간다. 나중에는 텅 비어 버린 사무실에 혼자만 남게 되었다. 선거가 끝나고 3일이 못되어서 나는 선거 기간 동안에 생긴 일들을 말끔히 잊었다.

 

나는 새로운 나의 일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간간히 나와 함께 선거일을 했던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정말 어려운 뒷마무리를 깨끗이 했다고 칭찬들을 했다.

 

12월 한 달이 무척이나 허전했고 쓸쓸했다. 순간과 순간 속에 권태와 잡념이 밀려왔다.

 

나는 나의 감정 속에 사치와 허영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생명이 남아 있는 순간까지 보람 있는 행동을 조국에 바치기 위해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새롭게 나의 가슴 속에는 한없는 꿈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지루해서 참을 수 없었던 긴 겨울밤을 덧없는 망상 속에 시달렸고 아침이 될 때에는 언제나 잠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1980년의 봄이 되면서 나는 새로운 출발을 했다.

 

지난해까지 하던 장사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사업자등록증도 새로이 교부받았다.

 

다시 시작한 장사 집에는 전에 거래하였던 사람들이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일을 통해 나의 지난 행동에서 생긴 모든 일을 잊고 일 년 전의 상인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주위의 사람들 중에는 나의 결단과 성실성에 칭찬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나의 행동을 자기 일 인양 마냥 대견해하며 용기를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시 개업한 장사가 한 달을 넘긴다.

 

출처 : www.natureteaching.com/TATHAGATA/tujaeg/tujaeng_mai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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