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삼한(李三漢)

외로운 투쟁(26~30)

기른장 2021. 1. 5. 17:03

26. 무서운 경험 속에서

 

주위에서 불안한 일들이 눈에 띠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건들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나의 운명에는 편안함이란 잠시도 머물 수 없는 것인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이지고 있었다.

 

이런 일들을 겪을 때마다 세상에서 고립된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곤 하였다. 하루하루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어두운 그림자로 하여 질식할 것 같기도 하였다.

 

나의 점포에서 일을 보는 여자아이가 속이 상해서 엉엉 우는 날이 많아졌다. 세무서의 직원들이 이틀 걸러 한번쯤 나의 장사 집을 다녀간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반복되니까 어떤 의심이 생긴다. 설마 하면서도 모르던 일은 구멍가게처럼 조그마한 점포에 4명씩이나 떼를 지어 찾아왔을 때는 마음에 집히는 것이 있었다.

 

장사 시작한지 한 달 밖에 되지 않는 집에 찾아와 약점을 찍어내려는 사람들이 더욱 딱했다. 온통 책상 안을 다 뒤져 놓는가 하면 자물쇠가 채워진 서랍은 아예 부수어 놓았다.

 

그리고서는 가게에 진을 치고 위압감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한 번은 대들며 한바탕 말씨름을 벌였다.

 

「세상에 이런 불공평한 사례가 어디 있단 말이요. 외형도 얼마 되지 않는 집에 이틀에 한 번씩 문안을 오니 대접이요, 위협이요. 소문을 들으니 큰 장사 집에도 1년에 한 번도 안 들리는 집이 있다는데 도대체 나를 무얼로 생각하기에 이렇게 대한단 말이요. 차라리 이 지경이라면 당신네들 사정 보아서 내가 장사 그만 두겠소. 솔직히 말합시다. 행정지도 나오신 거요. 약점 캐러 온 것이요.」

 

내가 하도 떠드니까 나이든 선임자는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언제 또 나왔더냐 고 묻는다. 그저께 나온 사람은 누구며 그전에 온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다.

 

관내 세무서에서 나오고 국세청에서 나오고 요즈음 무척 신경 쓰인다고 말을 하니 듣는 사람들도 입을 다문다.

 

하늘에는 노을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점심나절에 찾아왔던 국세청 직원이라는 사람들이 자리를 털며 일어나면서 겸연쩍은 얼굴이 되어 말을 내어 놓는다. 통보가 오거든 국세청으로 좀 들어오란다.

 

나는 그 말을 듣고는 참지 못하고 떠들었다. 내가 대한민국 어디엔들 못갈 곳이 있을 상 싶소. 안심하고 돌아가라며 열을 올려 말대꾸를 했다.

 

웬일인지 이런 일이 있고 난 후부터는 세무공무원은 장사 집에 잘 나타나지 아니했다. 무엇인가 꺼림칙한 자신을 두고 걱정이 풀리지가 않는다. 그런 어느 날이다. 또 눈에 거슬리는 일들이 눈앞에서 벌이지기 시작하였다.

 

도로가를 지나다 보면 교통순경들이 법규위반 차량을 단속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지만 그러나 이런 현상은 처음 보는 일이다.

 

교통지도 백차인 코티나 승용차에 교통순경이 6명이나 타고 나와서 장사 집 길목 좌우에서 흩어져서 아예 한나절을 채우며 단속을 실시한다.

 

처음에는 당연한 일로 보아 넘겼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이틀에 한 번씩 반복되는 정기적인 행사에는 납득하기가 어려워진다.

 

나는 어떤 일이 생기나 보려고 그때마다 재미있는 현장을 쳐다보며 장사 집 길가에 의자를 내어놓고 아예 관람자가 되었다.

 

이상한 것은 이런 일이 있으니까 더욱 장사가 잘 되었다. 얼마가 지나자 백차와 교통순경들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내 마음 속에 이상한 동요가 생긴다. 웬일일까 나의 예감에 더 무서운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런 다음 날이었다. 측량기사 한 사람이 나와서 열심히 땅의 측량을 했다.

 

나의 장사하는 곳 출입구의 대문 쪽 땅에다가 말뚝을 박았다. 하도 이상한 것을 많이 본 우리 집 일꾼들이 걱정을 하였다.

 

나는 당장 측량기사더러 당신 지금 무얼 하느냐고 따졌다. 측량기사는 간단하게 누구를 찾아가 물어보란다. 나는 이틀간이나 알 만한 사람들을 통해 수소문을 하여서 측량 기사를 내어 보낸 사람을 만날 수가 있었다.

 

처음 만난 사람은 납득이 안가는 소리만을 골라 편리한대로 말을 하였다. 나는 꼭 내가 놀림을 당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콘테이너 명함을 내민 이×× 이라는 사람은 용도도 분명치 않는 이유로 항만청에서 그냥 임대를 받았단다. 6개월에 50만원을 내기로 하고 계약을 체결했다는 서류를 내어 보였다.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딱한 사람뿐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남의 집 담장 안에 들어있는 출입구를 임대받겠다는 사람이나 임대해준 사람들의 심리보다도 우리나라의 법 규정에 위배된 도시계획에 들어있는 땅은 불하나 임대가 불가능했는데도 임대해 주었고 임대 받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한 마디로 심보 나쁜 사람들에게 엄포를 놓았다. 악인과 싸울 준비는 되어 있다고.

나는 이×× 씨의 사무실을 뛰쳐나와 항만청으로 찾아갔다. 아무리 죽을 운수라지만 이럴 수가 있을까 생각하며 당하는 일보다 나를 겨냥한 괴상한 일뿐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부산지방 항만청장을 찾아가서 나의 사정을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몇 번이나 벼른 끝에 항만청장을 만나 경위를 이야기하니 자기는 빠지면서 항무국장을 만나보라고 또 아랫사람한테다 떠 넘겨 버린다.

 

그날따라 항무국장은 어디에 출장 나간 것인지 자리에 없었다. 나는 미친 사람 꼴이 되어서 기다린 끝에 저녁나절에야 항무국장과 억지로 만날 수가 있었다.

 

나는 국장이란 사람을 보고 내가 찾아온 용건을 끄집어내니 그 사람은 당장 얼굴에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관계된 부하직원을 부르더니 하는 말이 걸작이다.

 

처음에 무엇이라고 말했느냐는 것이다. 도장만 찍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냐고 말 안했느냐 면서 나를 데리고 나가서 처리하란다. 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이 일 때문에 드나든 기억이 있는 사무실로 끌려갔다.

 

계원은 불쾌한 표정으로 나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윽박질렀다. 국가기관에서 하는 일에 불평을 한다고 불순분자 취급까지 한다.

 

나는 세상에 대해 무서운 고독감을 느꼈다.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분노가 터지기 시작하였다. 입 속에서는 고함 소리가 올라왔다.

 

「야, 이 강도들아, 피도 눈물도 없는 자들아. 세상에 이런 꼴이 어느 시대에 있었느냐, 멀쩡한 놈 병신 취급하는 것이 네 놈들 취미냐?」

 

나는 책상을 치며 통곡을 하였다. 사람 살리라고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먼 곳에 있던 사람들이 나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바쁘게 자기소개를 하면서 사람들은 나의 손을 잡고 항만청 밖으로 끄집어낸다.

 

세상이 점점 살기가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느꼈다. 나의 앞날에 대해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하였다.

 

겁나는 세상에서 양심이 맥을 출 수가 없구나. 정의가 없는 세상에서 억울하다고 누굴 찾아가서 호소할 것인가 하는 생각만이 나를 울렸다.

 

뒷날 항만청에서 어제 만났던 직원이란 자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들어왔다 가란다. 그곳 사람들은 개구쟁이처럼 단순히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 사람들을 대해야 할 것인지 머리에는 엄두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쉽게 사정도 해보고 종용도 했다. 그들은 나의 약점을 집요하게 찾았지만 나에게는 그들이 찾을 수 있는 약점이 없었다.

 

항만청의 관계직원들은 이제는 콘테이너 사장이라는 이×× 씨에게 다 떠넘겼다.

 

이×× 씨는 정말 웃기는 사람이었다. 비굴하게 변명을 해대었다. 마음 같아서는 어떤 행동이라도 저지르고 싶었지만 과격한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사용허가증에 명시된 돈을 낸 영수증을 보자고 다그치니까 외상으로 계약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또 한 번 놀랐다. 대한민국 정부의 봉급을 받는 사람들의 상식이 우스웠다. 꼭 이×× 씨와 같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면 나는 내 이름으로 임대 절차를 마치려고 하였다.

 

내가 언젠가 본 책 속에는 도시계획에 들어있는 국유지는 불하나 임대가 금지된 걸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새삼 임대를 해가라고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또 조건도 먼저 번 서류와는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420만원을 미리 불입을 하라는 것이었다. 너무 심하지 않느냐니까 그렇지가 않다는 대답이었다.

 

당시의 그 금액은 사유지의 임대료보다 5배가량 비싼 가격이었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통로를 막는다는 바람에 돈을 준비하였다. 전화는 하루에도 두 세 번씩 걸려왔다.

 

나의 억울한 사정은 그들에게 통하지가 않았다. 내가 물건을 적재하는 것도 아니요 단순히 차량의 출입에만 사용되니 주위의 민간인 토지사용료와 같게만 조정해 달라고 애원을 해도 통하지가 않았다.

 

생업터전을 버리지 않으려고 계약을 하겠다고 구비서류를 작성하니 이번에는 딴말이 나오는 것이다.

 

주위에 있는 지주들의 동의서를 받아 오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사용했던 길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사용해도 좋겠느냐는 승낙을 받아오라는 것이다.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처럼 이런 엄청난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노리개 감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몇 년간에 걸쳐 힘들여 이룩해 놓은 사업장은 당장 위기에 처해졌다. 항만청 관계자는 통로의 입구 쪽에 있는 지주들을 불러서 자기들 쪽은 자기들이 쓰라고 종용을 해댔다.

 

그런 어느 날 옆집에서는 장사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자기 앞을 자기가 사용하라더라 며 항만청 관계자의 말을 끄집어내었다.

 

나의 마음은 분노와 슬픔에 휩싸여 있었지만 고함이나 눈물은 사라졌다.

 

세상에 없는 일들을 스스로 보고 느끼는 것이 나의 운명일까?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항만청 관계자의 시달림을 받았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하소연을 해 보아도 이 땅에 이미 불행한 자의 친구는 없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이런 세상에서 지쳐 버렸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남의 불행에 대해서는 참관하여 않는 것인지......

 

이상한 것은 나 말고도 땅(국유지)을 점유하고 있었던 집이 여러 집 있었는데 그 집들 보고는 돈을 내어 놓든지 그렇지 않으면 땅을 비우라는 소릴 안하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출입구가 계획되었던 음모인 것처럼 점점 봉쇄되어 갔다. 이제는 장사를 정리하는 길만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더 버틴다면 어떤 화가 또 떨어질 것인지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나의 마음은 무겁고 침울해져 갔다. 나는 내 자신의 힘으로 이젠 더 버틸 방법이 없었다. 배 선주들은 또 나한테는 물건을 팔 수 없다고 없는 이유를 만들어 대었다.

 

나는 비통해진 마음으로 다음에 닥칠 내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며 간구하기 시작했다.

 

<신이여 저를 도와주소서!>

 

맑게 개인 하늘과 푸르고 잔잔한 바다의 물결이 나의 이야길 듣는 것만 같았다.

 

통로가 막히고 물건을 살 수 없어 바닥이 드러난 점포의 현장을 쳐다보는 마음은 더욱 안타까웠다.

 

 

27. 분노한 하늘과 바다

 

우연이었을까, 신의 뜻이었을까.

 

맑게 개인 하늘에서는 그 날 오후가 되면서 구름이 끼기 시작하였다. 후텁지근한 날씨가 금방 비를 뿌릴 것 같았다.

 

잠잠하던 바다에서 물결이 일기 시작하였다.

 

그런 다음 라디오에서 지금까지 없었던 태풍주의보가 발표되었다. 하루가 지나니 바다의 파고는 5미터에서 10미터로 변했다.

 

물기둥이 옹벽의 축강에 와서 부딪힌다. 또 다음의 물기둥이 몰려왔다. 물의 힘은 단 이틀 만에 이변을 일으켰다. 파도에 의해 바다 쪽 항만청 도로의 콘크리트 조각들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며칠 전 나의 출입구에 억지로 쌓고 배짱을 부리던 옆집 사람의 고기상자들이 바다 속으로 쓸려 나갔다.

 

내가 장사하던 땅들도 떨어져서 물속에 잠겼다. 나의 장사 집 좌우 100여 미터가 물에 의해 처참한 형상만 남았다. 나의 마음속에는 허탈이 생긴다.

 

물기에 젖은 몸이 7월인데도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나의 머리속에는 이제 모든 시비는 끝났구나 하고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 시간부터 하늘은 점점 개이고 바다의 물결이 위력을 잃어 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장사하던 곳 여기저기에 물기둥에 의해 깨어진 콘크리트 조각이 지나간 태풍에 의해 일어난 일들을 알게 해 주었다.

 

그런 일이 있은지 3일이 지나지 않아 또 잠잠하던 물결이 바다를 덮으면서 태풍 경보가 내린 것이다.

 

이번에는 무한정의 비를 뿌렸다. 태풍의 피해는 내가 태어났던 고향인 하동 지구를 물로 뒤덮어 버렸다. 고향 사람들은 큰 물난리를 겪게 된 것이다.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연관시켜 보면서 누구의 뜻일까 하고 의문을 품었다.

 

먼저 온 남자 태풍인 어빙은 나의 장사 터전이었던 부산의 남항 일부만을 심하게 강타했고, 뒤따라 온 여자 태풍인 주디는 나의 출생 비밀이 있는 고향 하동을 제일 심하게 강타했다.

 

예년보다 일찍 온 태풍을 보고 또 이상했다. 나는 아직 이런 것이 예보 없이 순간적으로 생긴 일이 없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문의 지면과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연일 수재민 기사로 떠들썩했다. 어떤 마음 좋은 사람들이 성금을 내었다고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하도 떠들어대니까 이제는 무슨 수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가 생겨났다.

 

정부의 높은 분들이 수해지구 현황을 시찰한답시고 왔다 간다. 피해가 생긴 곳엔 재해대책 본부가 설치되었다고 방송과 신문이 떠든다.

 

높은 사람들은 정말인지 그냥 하기 좋은 말을 하는 것인지 긴급복구라는 말을 듣기 좋게 해댄다. 나는 처음으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릴 듣고 의심 없이 믿고 싶었다.

 

그런데도 시간이 흘러가면서 나한테는 사람들의 말에 의심이 생겼고 실망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수재민 돕기 운동은 있었는데 도와주는 것은 고사하고 한 마디 위로의 말조차 전하는 사람이 없었다.

 

중장비가 나와서 파괴된 도로를 복구한다고 서두는 것이 눈에 보였지만 어떤 불안한 예감에 또 의심이 생겨난다. 나는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전에 한 높은 분들의 공약이 실제인가 싶어 확인하여 보았더니 또 난감한 일이 생겼다.

 

항만청 소유의 도로를 복구하면서 나의 장사 터 앞 도로에 대한 복구계획은 빠졌단다. 나의 땅을 경계로 좌우측에 우선순위를 정해 건설회사에 도급을 주었는데 나의 소유대지 앞 도로 변만 좌측 한 집 우측 두 집은 방치하겠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좋게 생각을 하려고 노력을 해도 나의 마음속에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섭섭한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참으로 살기 어려운 세상이라고 느껴졌다. 나는 세상에서 이런 억지를 왜 자주 보아야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누구의 도움을 조금 얻는 것은 고사하고 나 자신의 자비에 의한 자력 복구마저도 방해를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속이 상하고 현기증이 일어났다.

 

그런 어느 날 자신을 위로하고자 혼자서 술잔을 들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시내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했다는 것과 많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사실인가 하는 의아심도 생기지 않았다.

술잔을 팽개친 채 시내 쪽으로 나갔다. 광복동 거리에 들어서니 당장 눈이 따갑고 눈에서 눈물이 나려고 했다.

 

길거리에는 안면 있는 사복경찰관들이 골목마다 서성거렸다. 밤이 되려는 남포동 거리에서 젊은 대학생들의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유신은 물러가라.」

 

참으로 오래간만에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들은 것이다.

 

밤이 새고 나니 길거리에는 요소요소에 무장한 군인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안겨 준다.

 

그들은 백주에 사람들이 많이 보는 데서도 서슴없이 자기들 눈에 거슬리는 사람한테는 난폭한 짓을 했다. 이런 것을 보면 세상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두렵기만 하였다. 가슴에는 피가 엉켜 붙고 있었다.

 

어떤 이변이 일어날 것인가.

 

그러던 중 10월 26일을 맞았다.

 

저녁 텔레비전 화면에서 중대뉴스가 발표된 것이다.

 

「대통령 서거.」

 

영문을 몰라 하는 사람들한테 다음날이 되면서 사건의 내막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사람들 속에서는 서서히 어떤 이변이 곧 뒤따라 올 것 같은 느낌이 생겼다.

 

나는 18년 동안 권력의 자리에서 국민에게 빚과 불신을 남기고 죽은 지난날의 대통령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다. 이제 이 땅에는 민주주의가 시작되는가. 나는 또 앞으로 닥칠 어떤 예감 속에서 불안하기만 하였다.

 

죽은 대통령은 이 땅에 양심과 정의와 인재를 남겨두지 않았다. 그러했기 때문에 우리의 주위에는 잘못하다가는 혼란의 와중에 빠질 우려도 있었던 것이다. 과도정부가 구성되고 그 겨울이 해를 넘긴다.

 

혜성처럼 등장한 세 김 씨의 출현을 보면서 조국의 장래가 나의 머리속에서 어두움으로 차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 땅에 소망의 민주주의를 건설할 수 있을까. 의심과 의아심이 남는다. 지도자로서의 새 시대 인물로는 어디인가 아쉬움을 남기는 사람들.

 

나는 세 김 씨에 대해 혼자서 생각을 해 본다. 나의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떠올랐다. 그 사람들은 앞으로의 닥칠 운명에는 대처하려 하지 않고 아이들 소꿉장난처럼 막연하게 여론 속의 여운을 남기기 위해 설친다.

 

신은 우리 민족을 시험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눈에는 세 김 씨에 의해 자꾸만 새로운 역사가 뒤따라옴을 느꼈다.

 

나는 내 자신이 확신하지 못하는 두려움 때문에 나의 행동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외출을 삼가기 시작했고 온종일 사무실이나 집에서 사람들을 피했다.

 

지루한 시간을 메우기 위해 세상에 대한 어떤 믿음을 걸고 하루 종일 화투 패를 뜨면서 궁금한 마음을 풀 때도 있었다. 그때가 나의 생애에 가장 한가한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주위에는 더러 나의 활동을 권고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코웃음을 쳤다.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날뛰면 무엇하느냐는 심정이었다.

 

나는 세 김 씨 중 어느 편에 붙어도 상당한 예우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세 김 씨에게만은 마음을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심경 속에서 나는 다른 어떤 사람과의 대화도 피했다.

 

두려운 마음이 감추어진 1980년도의 봄이 무르익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시대를 공약한 과도정부의 내각이나 그 속에서 일어나는 하루하루의 조짐 속에서 소망보다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알 수 없는 예감 속에서 세 김 씨의 장래에 대해 실망하기도 했다.

 

이 땅에 하늘의 뜻은 위대한 지도자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은 것이다.

 

또 어떤 조짐일까. 학생들의 시위는 이 땅에서 영원한 민주주의에 대한 포기 선언 같았다. 신문에서 노동자의 쟁의가 실린 것을 보고 이제 나는 다음 세대를 준비했다. 다음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오직 나에게는 그것만이 궁금한 것이다.

 

한 인재가 참고 살아가기에 너무나 큰 고통이 따르는 도시의 장래를 피하기 위해 준비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는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고향 땅, 내가 태어난 산속,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나의 운명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나는 나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육신이 요구하는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나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밤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가슴 속이 텅 빈 것 같고 허전한 마음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 단 하나의 방편은 알콜에 온몸이 절어 녹초가 되면 그 날 하루만은 나 자신의 고통을 덜 수가 있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허탈상태를 느끼며 복덕방을 찾아 다녔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을 시가보다 좀 싼 가격으로라도 팔아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주위에서 나의 마음을 몰라 왜 집을 파느냐고 듣기 좋은 소리로 만류를 한다. 그런데도 나의 마음에는 변화가 없었다.

 

내 자신의 운명 때문인지 복덕방에 내어 놓은 집을 사겠다고 흥정을 하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아무렇게나 무너져 버리려는 자신을 붙잡기 위해 마음속에서 처절한 투쟁을 시작했다. 그런 나날 속에서 희미하게 힘겨운 자신을 찾아내고 있었다.

 

머리속에 한 수의 시가 떠올랐다.

 

세월은 불러도 돌아오지 않고

인생은 늙으니 죽음뿐이네.

욕망을 가진들 영원한 것 아니니

후세에 남길 것은 추억뿐이로다.

 

나는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본다. 나의 마음속에 오래간만에 뜨거운 감동이 생겼다.

 

나는 자신을 보며 네가 죽을 때 떳떳한 영혼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지난날의 추억이 영상에 비친 화면처럼 비쳐지면서 행복감이 되어 마음에 와 닿는다.

 

안목 때문에 더욱 고독해야 했던 일, 용기 때문에 미움의 대상이 된 일, 양심 때문에 모략을 받던 일들을 후회해 버리고 싶지만은 않았다.

 

고달팠던 지난 일도 보람되게 느껴졌다. 세상을 생각하는 마음에 불신과 불안이 떠올라 온다.

 

왜 나는 다른 사람들과 생각하는 생리가 다를까. 조국은 나에게 은혜를 베풀지도 않았는데 나 혼자 그 조국을 짝사랑하고 스스로 거기서 생기는 괴로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나의 운명은 영원히 슬픈 사연을 지니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의문과 의혹을 느꼈다.

 

1980년 5월 18일 정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격한 아나운서의 목소리에서 나는 오랫동안 예견한 자신의 예감이 적중한 것에 대해 감격을 하고 있었다.

 

세 김 씨의 운명이 금방 변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에서 나는 우리의 꿈이 종착역에 닿지 아니하게 해 달라고 신에게 간구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계의 적응과 그 시대의 개척을 위해 나는 깊은 환상에 빠졌다.

 

앞으로 펼쳐질 정국에 대한 관심도 컸었지만 머리속에 떠오르는 예견은 새 시대의 주역들이 당황하며 일을 시작하려 한다면 양심과 정의감과 안목을 가진 자를 다시 내쫓게 되리라고 판단해 조국의 앞길에 대해 두려움을 가져본다.

 

나는 미칠 것 같은 마음속에서 술병을 찾았다. 나의 모든 생각을 술잔에 띄워 보내기 위해 잔을 들었다. 의식이 멀어지고 하루를 힘겹게 넘겼다.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어제와 표정이 달라 보인다. 사람들은 그들의 표정에서 침묵을 지키려고 애를 쓴다.

 

괜히 이럴 때 아는 체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나는 경험하고 있었다. 곳곳에서 생기는 일들이 시간마다 흘러나오는 뉴스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최대한으로 위축했다.

 

우리의 가정은 생활이 쪼들리고 있었다. 복덕방에다 내어 놓은 집이 흥정되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나날을 보낸다. 고독을 느끼며 술잔을 들이킨다. 더욱 조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끼며 빨리 취하려고 애를 쓴다.

 

띵해 진 머리속에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나만 이런 것일까. 딴 사람도 이런 것일까. 점점 의식이 멀어진다.

 

 

28. 답답한 사람들

 

나의 마음속에 또 답답함을 갖게 하는 일이 생겼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랬고 눈앞에 보이는 것이 또 그러했다. 점점 상식을 가지고는 살기가 힘든 일들이 생긴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남의 일 따위에 입을 떼는 일이 없어졌다. 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었고 자신에 대한 고통을 만들게 했다.

 

그런 어느 날 나의 장사 터 앞의 해안도로를 복구한다는 소문이 퍼져서 나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그러나 그 소리를 내가 다시 한 번 확인하였을 적에는 나는 나의 귀를 의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의 집과 옆에 붙은 한 집의 앞길만은 방치해 두겠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에 납득이 가지 않았다. 주위에는 이상한 소문들이 퍼지고 있었다.

 

도로복구 공사를 맡게 된 하청회사 노무자들이 일을 떼 준 관청의 행동에 더 답답한 마음이 생기는지 나를 보고 관계 관청에 찾아가서 교제를 좀 해보란다.

 

우둔한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이 나의 무능한 탓이라고 믿었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런 일을 보며 나를 동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남항의 수해 자국이 전부 복구가 되었는데 축항도 아닌 도로부분을 2년씩이나 방치해 오다가 막상 공사를 시작한다면서도 불과 40여 미터를 끊어두고 억지로 버티는 것은 무엇인가 뜻이 담긴 것도 같았다.

 

눈앞에 보이는 일들 때문에 나라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하기를 모두가 좋아한다면 하고 생각을 해 보니 장래에 닥쳐 올 조국의 앞날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어리석게도 나는 이런 일에 대하여 정부의 높은 사람들에게 탄원도 해 보았다. 회답을 받아보면 지난 행동은 나 자신을 이젠 자학에 빠뜨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일도 나의 운명 속에 담긴 일이라 생각하면 당장 또 신의 뜻인가, 악마의 짓인가 하는 두려움이 그 생각이 없어질 때까지 나를 고문한다. 나는 스스로 위안을 찾기 위해 별의별 생각도 다 찾아보았다.

 

쓸데없는 짓이 많았던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제5공화국이 탄생할 앞날에 기대도 걸었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할 때는 안주 없는 술로 나의 정신을 잃게 하였다. 그런 나의 앞에 또 슬픈 일이 생기고 말았다.

 

나를 억지로 사위를 삼았고 나의 일을 위해 헌신해주던 처가의 장인이 1980년 추석을 넘긴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나는 장인의 장례를 처가 식구들과 함께 치르고 보니 평소에는 느껴지지 않았던 진실들이 나의 가슴 속에 움트고 있었다.

 

주위에서 좋은 사람으로 소문도 나 있었지만 사람을 보는 안목이 높았던 장인의 행동이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얼마나 의지가 되어 왔는가 하는 사실을 죽은 다음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때서야 나의 가슴 한 구석이 빈 것처럼 허전해져 왔다.

 

그런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나는 세상에 대해 외로움을 느꼈고 점점 늘어가는 주량 앞에서 멍청한 사람처럼 변하여 가고 있었다. 당장 외모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의 코는 항상 붉어져 있었고 얼굴이 타고 있었다.

 

아내가 나를 볼 적마다 건강에 대한 충고를 했지만 나는 그런 소리는 한쪽 귀로 흘러 버렸다.

 

나는 그때 내 자신의 몸마저 주체하기가 점점 힘이 들 정도로 약해져 갔다.

 

엉뚱하게도 한 번 멋있게 타락해서 세상에 태어난 재미가 어떤 것인지 시험해 보고픈 느낌도 들었다. 이런 나에게 설상가상이랄까 엉뚱한 일이 또 생겼다.

 

친구라고 소개해야 할지 감시인이라고 소개해야 할지 모를 사람이 나타나 나의 주위에서 그림자처럼 나를 지켰다.

 

K라는 사나이는 술자리에서는 술벗이 되었고 타락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밖으로 내보일 때마다 어떤 장소건 동행자가 되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만나 정치적인 문제나 앞으로 정치무대로 나설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는 그는 나를 괴롭게 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형편 속에서 나의 무기력함을 정리하면서 어찌 되었던 영도다리 가에다 열어두고 있던 사무실을 폐쇄시키고 집으로 그 짐을 옮겼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끊어 버리고 혼자 집에 틀어박힌 것이다. 이런 나의 집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은 K뿐이었다.

 

K는 우연한 기회에도 사람들을 만나면 나의 신상과 연결된 장래의 선거 문제나 나의 정계진출 문제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눈알을 부릅떴다. 어떤 장소에서건 분위기를 고의적으로 망치는 짓을 했고 연방 적대적으로 대해 왔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그런 그의 행동에 그가 누구인지 몰라 궁금해 하는 눈치를 보이면 K는 선수를 쳤다. 상대 앞에서 이삼한이 친구라고 인사소개를 자신의 입으로 하는 것이다.

 

이런 순간 나의 마음은 세상 덕분에 좋은 친구 하나 사귀게 된 것인지 모를 일이지만 K의 행동에 불쾌해지는 것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엉뚱한 생각들로 그 해의 가을이 지나가면서 나의 귓가에는 별의 별 소문이 다 전해져 왔다. 또 매스컴이라는 곳에서는 거짓말인지 정말인지 모를 새로운 화제를 전한다.

 

사람들은 그냥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새로운 문제들을 그저 그렇겠지 하는 정도로 받아들였다.

 

옳고 그른 것은 알 바가 아닌지 알려고 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지금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바라고 있는 것일까.

 

오랜 역사 속에서 그렇게 힘들었던 대중 장치가 실현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려웠던 역사 속으로 다시 돌아갈 것인가? 하는 생각들이 오래간만에 나에게 무슨 책임이 있는 양 나의 마음을 안절부절 하게 했다.

 

신문과 텔레비전에서는 그때부터 뉴스의 초점을 정치 규제자 대상을 두고 특종을 만들고 있었다. 세상의 사람들은 구구한 억측들을 했다.

 

이런 시간에 K는 아예 한낮 동안은 나의 집에서 기거하듯이 했다. 그리고 헤어질 때는 내일의 계획을 묻는다. 나는 자꾸만 K의 행동 앞에서 지쳐가고 있었다.

 

주위에서 사람들은 나를 보고 때가 왔다고 부추겼다. 그런 순간이 생기면 나의 옆에 있던 K는 화까지 내면서 상대와 나의 대화를 끊으려고 노력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의문은 K는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어떤 일이 그의 사명인가?

 

세상의 돌아가는 상태를 볼 때 의심이 가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도 달라지기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마음속에 숨긴 기대는 어처구니가 없게 된다.

 

내 집을 무상출입하는 K라는 남자는 나의 의중을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 무조건 나의 정계진출은 포기시키려고 애를 썼다.

 

주위의 사람들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격려와 지원을 약속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도 이해관계가 없을 때는 공명정대한 것에 기대를 걸게 되는가 보았다.

 

어떤 믿음 속에서도 불안하기만 한 나의 앞길을 두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건 그건 신경이 별로 쓰이지 않았다. 나 자신의 애정을 자신의 조국에 바칠 곳이 없음을 원통해 하고 싶었다.

 

그런 어느 날 규제 대상에 있던 인사들의 명단이 발표되었다.

 

가슴을 조이며 신문에 난 이름 속에서 나의 이름을 눈을 크게 뜨고 살폈지만 내 이름은 없었다. 2차가 발표되어도 나의 이름은 또 없었다.

 

이젠 주위에서 사람들은 이번 선거에 내가 출마하게 될 것이라는 것과 당선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도 있었다. 나의 가슴 속에는 불길이 타기 시작했다.

 

조국을 가지기 위해 조국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도 정신을 차리면 안타까운 마음만 앞에 있었다. 오늘의 주역들이 가진 생각을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과거를 경험한 나로서는 어떤 일도 상식만으로 장담은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새장 속에 들어 있는 새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했다. 허공을 날아보고 싶은 마음이야 오죽하리요마는 튼튼한 날개가 있는 데도 허공을 날지 못하니 당하는 자 아니면 누가 그 마음을 알까 보냐고 혼자 생각했다.

 

나의 마음속에는 시간과 함께 일어나는 부담이 쌓이기 시작했다.

 

겨울은 추워지는데도 나의 체온은 열기를 내뿜었다.

 

또 그런 날 새로운 시대를 구하겠다는 공약처럼 브라운관의 저녁 프로에서는 선거 꾼의 이야기가 방영이 되고 있었고, 물질 속에서 뛰고 있는 비정한 인간사가 마음을 아프게 화면을 만들었다.

 

시중에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이 유행이 되어 사람들 입에서 흘러 다녔다.

 

정부가 제시한 시간은 선거까지 3개월이 남아 있었다. 왜 이렇게 큰일을 빨리 서두르는지 모를 일 뿐이었다. 신문의 정치면에서는 정당 이야기가 실려 나오기 시작하였고 그런 며칠 후부터 우후죽순처럼 정당의 윤곽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나의 마음속에는 또 고민이 쌓이기 시작한다. 조국에 대한 희망을 거느냐 내 가족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느냐 하는 문제였다.

 

나는 짧은 시간 동안 나 자신의 지독한 운명을 생각하면서도 새로운 희망을 제5공화국에 걸어보기로 결심했다. 언론매체에서 더욱 요란스럽게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12월 7일은 나에게는 부산시 반공연맹 대강당에서 열린 웅변대회의 대회장 직을 맡은 날이었고 K는 최근에 죽은 자기 어머니의 삼우제의 날이었다.

 

나는 그 날 시상식의 자리를 빼어 먹은 채 서울을 향해 특급열차에 몸을 실었다. 눈앞에는 나를 의심하고 원망할 주최 측의 얼굴이 떠올랐다. 열차는 신나게 달렸다.

 

멍청한 마음속에 기대에 찬 새로운 애정을 담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 대한 가치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 어떻게 하더라도 자신에 대한 사명을 찾아야 한다는 기대를 잊지 않았다.

 

기차가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나의 마음속에는 흥분이 일어났다.

 

제5공화국은 실패가 남지 않는 동포들의 희망을 지켜줄 수 있는 정치를 탄생시켜야 한다고 하는 기대감뿐이었다.

 

한스럽던 지난날들이 생각이 났다.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 핍박받던 민중의 생활을 생각하면서 사랑을 느껴 보지 못하고 자라 온 나였기에 이런 일에는 더 큰 야망이 생기는지도 모른다.

 

나의 행동이 동포들의 앞날에 행복을 구해 줄 수만 있다면 나의 영혼은 어떤 고통이라도 감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의 약속은 나의 한스러운 지난날의 경험을 바쳐 민족을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행동에 깊은 애정을 느꼈다. 달려온 기차가 정시에 도착하자 나의 마음은 또 바빠진다.

 

만날 사람들을 위해 교통편이 비교적 좋은 삼각동에 있는 우석호텔에다 한실로 방을 구하고 알 만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와 통화가 된 사람들도 시기 때문인지 흥분을 하며 금방 달려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나의 숙소인 호텔방 안은 이내 소란스러워 졌다. 이번에는 아무도 나의 이런 뜻을 만류하기 위해 말을 끄집어내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끝없는 대화가 우리들에게 어떤 희망을 찾게 했다. 나는 비로소 18년간의 지루했던 기억들을 더듬으며 이제야 나의 능력을 바칠 수 있는 시기를 만난 것이 아니냐는 착각에 빠진다. 당장 취해야 할 행동을 주위로부터 들으려고 했다.

 

그 시간 나의 앞에 있던 사람들은 정신적인 면이나 능력 면에서 이 땅에 남은 인재들 중에서 우리가 빼어놓을 수 없는 필요로 해야 할 사람들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자만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다음날부터는 새로 생기는 몇 개의 정당으로 인사를 가기로 정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모른 채 의욕이 생긴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같은 정당에서 일을 하자고 말을 끄집어내는 사람도 있었다.

 

뒤늦게 정당을 만들겠다고 발기인 대회에 참석을 하라고 숙소의 전화벨을 울리게 하는 쪽도 있었다.

 

좌우간 서울은 흥청거렸고 전국에서 올라온 정치 지망생들이 불황에 허덕이던 서울의 숙박업소에다 오래간만에 호경기를 맞게 했다.

 

신문의 기사는 더욱 열기 있게 정치 지망생들의 가슴에다가 불을 붙여 댄다. 나는 나 자신의 최종 결심을 찾기 시작했다.

바로 그 날 정오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가칭 자유민주당의 정당결성을 포기한 선언 때문이었다. 나의 머리속은 뜻밖의 시기에 생긴 일들에 의문점을 갖게 됐다.

 

나의 옆에 있던 사람들이 구구한 억측을 끄집어낸다. 그러나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로서는 그 사람들의 포기 사정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나는 이제 나의 몸을 담을 곳을 찾아 새로 생기는 정당을 순방했다.

 

그런데 어제와 다른 것은 나의 조직생활 12년 만에 처음 보는 일이 생긴 것이다.

 

정당을 만들겠다고 발기를 했던 다수 사람들은 반가워하는데 조직문제를 담당한 실무자들이 당장 나를 대하길 부담스러워하는 인상을 주었다. 최소한 4당 정도까지가 그랬다. 나는 이런 일들이 철모르고 꺼떡대던 내 마음에 부담감을 주었다.

 

왜 그럴까. 이유 모를 사연에 자꾸만 마음이 꺼림칙했다. 무엇인가 나에게 잘못이 있는 모양인데 그걸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진리와 양심과 희망 때문에 나는 모순과 싸우기 위해 자신을 내어 놓으려던 사명적 철학이 점점 상처를 입어갔다.

 

세상을 보는 데도 사람마다 차이점은 있기 마련이다. 신은 아직까지 나에게 뜻을 전할 수 있는 시기를 만들게 해 주지 않는 모양이라고 느꼈다. 포기냐 참전이냐 하는 마음속의 결단을 기다리고 싶지도 않았다.

 

서울에서 하루 더 묵으면 하루 분의 숙박비만 손해가 생겼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의 마음은 씁쓸했다.

 

나의 상식 속에서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뜨겁던 가슴이 식으니까 온 마음이 허전하다고 생각이 들며 무엇인가 다른 생각을 끌어다가 이런 가슴을 메워야 했다.

 

당장에 떠오르는 생각에는 서울에서 더 구경할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주위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조용히 서울을 빠져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아직도 서울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정치 지망생들로 열기가 넘치고 있었고 신문은 이런 사람들에게 보다 넓은 지면을 할애했다.

 

나는 그런 현장에서 도망치듯 서울역을 향해 바삐 걸었다. 구좌석 형이 가방을 든 채 바쁘게 나를 따라왔다. 나는 주위를 쳐다 볼 여유조차도 없었다.

 

부딪칠 것만 같은 사람들을 피하며 바쁜 마음이 되어 차를 타는 것마저 잊고 서울역까지 걸어왔다. 경부선 승차권을 팔고 있는 매표소 앞에는 사람들이 창구마다 줄을 잇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창구 앞에 가서 금방 떠나는 차표를 돈으로 바꾸려고 했다.

 

나는 그 사람한테서 부산까지의 차표임을 확인하고 그 차표를 대신 사주었다. 그리고는 이 순간까지 나를 도우려고 행동을 같이해 주고 있는 구좌석 형으로부터 가방을 건네받으며 작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이제 기차의 출발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역전에 걸린 시계가 가리키고 있었다. 개찰을 받는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뛰어간다. 구좌석 형이 먼저 입을 떼며 어서 들어가라고 나를 재촉했다.

 

나는 바쁘게 개찰구를 통과하며 열차의 좌석번호를 찾아갔다. 금방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이유 모를 부아가 자꾸만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온다.

 

창밖에 스치는 풍경을 보면서도 여느 때처럼 감동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갑갑하고 답답한 마음뿐이었다. 나는 나의 머리속에서 40년이 되어가는 나의 인생에 대해 지나온 추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운명은 뜻을 남기려는 나에게 실패만을 줄 것인지 앞일에 대한 궁금증이 나의 생각을 두려움 속으로 끌고 간다. 나는 견딜 수 없게 된 나의 생각 속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하여 기차가 서는 역에서 소주 한 병을 샀다.

 

한낮의 열차 속에서 혼자서 마시는 소주의 맛은 씁쓸했지만 취하려고 마시는 술이기에 억지로 입에다 부었다. 얼마 있지 않아 속이 메슥거렸고 얼굴에 열기가 올라왔다. 술기운이 나의 몸을 부대끼게 했다. 몽롱한 의식이 다행스럽게 나를 잠들게 해 버렸다.

 

기차가 부산에 도착을 한 시간은 오후 늦게 였다. 곧장 집으로 들어갔더니 나의 표정 속에서 아내가 무엇인가 알아내려고 자꾸만 나의 거동을 살핀다.

 

오나가나 인덕이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며 투정이 생기려는 데도 아내는 나의 무거운 표정을 밝게 하려고 어떤 확신에서인지 싱글벙글 웃음기마저 얼굴에 띄운다.

 

성질나는 대로라면 소갈머리 없는 여편네라고 쥐어박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오죽이나 나한테 애가 쓰이면 저렇게까지 할까보냐 싶어 또 한 번 나 자신에 대한 순간의 외로움을 느꼈다.

 

사람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 그 세상에 대해 궁금증을 느끼면서도 며칠 동안 나는 집안에 박힌 채 바깥나들이를 하지 않았다.

 

괴로운 생각도 슬픈 생각도 술로 기분을 달랬다. 선거꾼들이 간간히 나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들은 나의 의중을 알려고 했다. 그들의 가장 큰 관심은 나에게 또 돈이 얼마쯤 준비가 되겠느냐는 것뿐이었다.

 

며칠 전 방영을 끝낸 드라마의 선거 꾼을 본 어리석은 사람들이 한 밑천 잡아 보겠다는 꿈을 간직한 채 돈 있는 사람에게 붙기 위해 미치고 있는 꼴들이 보였다.

 

이런 꼴을 보아야 하는 나는 내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점점 많은 양의 술이 필요했고 몸에 퍼지는 술기가 몸과 정신을 허탈상태에 빠지게 했다.

 

이런 나날의 같은 행동 속에서도 술로 세상사를 달래지 못해 밖으로 나오면 오가는 사람들이 내어 놓는 이야기 속에서 의외의 말들을 들을 수 있었는가 하면 조국의 앞날이 나의 마음속에 걱정을 부채질했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연일 각 정당에서 발표한 조직책의 이름이 신문에 실려 나왔다.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의 이변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런 것을 보고 입을 열어야 하는가 입을 닫아야 하는가. 이제 사회에 진실을 확인할 사람이 몇이나 남아 있는지 그런 것이 의심스럽기만 하였다.

 

유언비어나 무고죄는 엄벌에 처하겠다는 포고문을 읽을 때 느끼던 섬뜩함에 입을 떼고 싶지가 않았다. 모든 것은 하늘이 알고 있는 것, 내가 어떻게 이 시비를 가늠할 수 있겠는가 싶었다.

 

하루하루가 지루했다. 시간을 보지 않고 술을 마셨다. 마음속에는 희망을 잊은 채 허탈상태였다. 안타까운 마음을 지니고 말할 상대를 찾지 못해 비틀거리며 거리를 쏘다녔다.

 

또 봄이 왔다. 출세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 판에도 많았다. 나는 입가에 혼자 미소를 머금었다. 어떤 사람들은 보기에도 불쌍하게 여겨졌다. 그 가족들을 생각하면 동정이 가기도 했다.

 

3월은 나의 앞에 있어서는 견디기가 힘이 들었다. 국회의원 후보들은 정치적인 어떤 대안이나 소신을 밝히지 않은 채 질서만은 잘 지켰다.

 

나는 이런 것을 보면서 어느 때보다 선거에 대한 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나의 마음만이 생각하기에 따라 어둡고 두려웠다.

 

나의 코가 딸기코가 되어서 붉은 색깔을 내면서 부어 있었다. 몸을 술에 절인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주독이 들어 있었다.

 

아내는 세상일에 너무 신경을 쓰는 나를 두고 걱정을 하였다. 남들처럼 살면 되지 무슨 애국자가 되겠다고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투정도 내놓았다. 일제 때 독립 운동하던 사람치고 지금 한 사람이라도 출세한 사람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아내의 말을 들으면서도 이제는 그런 것을 나무랄 여유마저도 잊고 멍청해졌다. 허탈하게 변하는 마음속에서 현실의 고통을 피하려고 눈을 감지 못하는 정의감은 소리 없이 혼자 울었다.

 

그런 어느 날, 드디어 총선은 끝이 났다. 나의 마음속에는 당락에 대해 약간 씁쓸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좋아서 뽑아 놓은 걸 가지고 또 이의를 달고 싶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이 풀어지지 않는 속에서 시간은 또 며칠이나 흘렀다.

 

어느 날 오후 배달된 일간신문의 지방 난에는 서구 암남동 95의 18 일대의 46미터의 끊어져 방치되어 왔던 해안도로가 복구공사를 실시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러고 나서 1개월이 지난 다음에는 어느 건설업체가 공사를 맡았는지 깨어진 콘크리트 조각을 기중기로 들어내는가 하면 지면을 고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의 가슴 속에는 오랜 만에 새로운 생각들이 꿈틀거렸다.

 

세상의 모든 뜻은 하늘이 정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내 자신의 앞날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보았다. 오래간만에 차츰 생기가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여름철이 되면서 수해지역에는 다시 도로가 생겼다. 공사를 맡은 건설회사가 철수를 했다. 열심히 장사나 해 볼 참이었다.

 

나는 우리 소유의 남은 땅을 고르면서 도로와의 옹벽공사를 내손으로 처리하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은 씁쓸한 데가 있었다.

 

관청에서 감독한 부분의 공사를 마친 자리가 어쩐지 마음에 자꾸만 걸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런 것을 두고 다음에 닥쳐 올 재난을 생각하니 마음만 고달팠던 것이다.

 

어떻든 나는 나의 일을 위해 빚돈을 내어 와서 공사를 시작한 것이 며칠이 지나자 옹벽공사도 끝이 나게 되었다.

 

무더운 여름의 날씨는 계속 더웠다. 공사를 다해놓고 살펴보니 이젠 지난번에 하던 모래장사 같은 것은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엉성하게 한 도로 쪽은 옹벽공사가 지반을 제대로 조성을 못한 탓으로 아무렇게나 큰 돌이 물 밑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세상 사람들이 일하는 것이 답답하였다. 태풍이 온다면 저런 것이 견딜 수가 있을 것인가? 하는 의심이 자꾸만 나의 마음에 의문을 남겼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의 물결이 거칠어졌다. 태풍이 올 것이라는 기상대의 예보였다. 그 다음날은 바다가 뒤집히기 시작하였다. 파고는 점점 높아졌다. 기상대의 발표는 시간마다 달라진다. 태풍이 우리나라의 근해를 스치며 지나간단다.

 

약간의 안정이 되기도 했지만 어쩐지 바다 쪽이 안심이 안 되는 마음이었다. 그 날 오후, 2년이나 걸려 완성을 시킨 도로가 힘없이 깨어지면서 새로 복구를 했던 부분들이 물 밑으로 떨어져 나갔다.

 

나는 이런 과정을 보면서 기가 차기 시작했다. 잠시 나에게 머물던 안정 같은 게 금세 허물어져 버린다. 나의 손해 본 부분보다 당국에 대한 불신으로 가슴이 더 아팠다. 왜 세상은 이래도 되는 것인가? 억울한 자가 동정을 받지 못하는 세상이 정말 나에게는 싫었던 것이다.

 

이런 나의 마음을 또 아프게 하는 것은 수재민을 돕자는 구호였다. 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연일 떠들어 대는 보도기관의 내용들에 대해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기막히는 사연을 말한 곳조차도 잊어버린 슬픈 감정을 술이 아니면 주체할 수 없어 나는 끝내 미치고 말았을 것이다.

 

긴급복구라는 것을 두고 질질 몇 년을 끌어 온 것은 무슨 사정 때문인지 모르지만 억지로 공사를 마치는 기분으로 끝을 낸지 며칠되지 않아 또 그 자리만 터져버리니 이번에는 수해지역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까지도 나름대로 공사자체의 불신보다 당국에 대한 원망이 쏟아져 나왔다.

 

파도 때문에 터진 것인가, 대비성 없는 부실에서 생긴 일인가 하는 의문들이었다.

 

이쯤 되니까 관계되었던 관청에서 입을 열었다. 그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었는데 워낙 파도가 세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주위의 파괴된 부분 전부가 관에서 감독한 그 공사구간만 손실이 있었던 것이다.

 

가슴이 답답하고 억울하기만 하던 나와 같은 사람들한테는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말할 곳도 없었다.

 

연거퍼 수해를 당하다 보니 지난번에도 경험한 바가 있었기에 아예 이번에도 나와 같은 수재민을 도와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생기면 그것도 무슨 연중행사라고 학생들까지 거리에서 날뛰는 야박한 행동에는 불행한 현실에 대한 걱정만 생겼다. 그런 나에게 어떤 사람이 우리 집까지 찾아왔다.

 

자발적인 행동인지 누가 모르고 시킨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웃의 안면이 있는 영감님은 날 찾더니 수재민을 돕겠다는 것이다. 나는 금방 눈이 크게 떠진다.

 

이번에는 진짜구나 생각하고 영감님이 우리가 수해 당한 것을 신문에도 나지 않았는데 아무리 이웃의 일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알았을까 생각하니 반가웠다.

 

그래서 금방 나의 얼굴이 어느 구세주라도 만난 듯 기분이 좋았는데 나중에 영감님의 본 심중을 알고는 기가 막혔다.

 

날보고 기부금을 내라고 억지를 썼다. 나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왜 이럴까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장 감출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지닌 채 도대체 내가 돈을 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수재민 도와주자고 그런단다. 그래서 돈이 거둬지면 누굴 가져다 줄 것이냐고 계속 물었다. 나에게 성금을 요구했던 영감님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비로소 내가 태풍의 피해로 파산지경에 이른 이야기와 연거푸 수해의 피해를 입었지만 지원은 고사하고 말이나마 정답게 한 번 말하는 사람이 없더라고 푸념을 하니 그 사람은 도망치듯 나의 앞을 떠나갔다. 다시 나는 역시 세상이 큰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생긴다.

 

이러한 사실은 어디 떠들 것도 못된다. 신문에 하도 유언비어를 단속한다고 하는 기사가 자주 실리니 사실을 말해도 사실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일을 증명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니 이런 것이 희극인가 비극인가 구분이 안 되었다. 나는 속이 타고 답답했다.

 

술로 시간을 메웠다. 자신이 자신의 육체를 박해했다. 참으로 힘드는 세상일을 보며 산다고 느끼니 삶이란 자체가 어느 절의 중이 이야기했던 말처럼 고해인가 싶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마음을 느끼고 죽을까, 나만 느끼게 되는 것일까. 나는 내 자신 앞에 있던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예견은 했었지만 정말 무서운 세상이라고 느껴졌다.

 

허무하고 고독한 자기 자신을 보아야 하는 슬픈 비애가 말조차 내어 놓을 곳이 없었다. 술에 의해 뱃속의 간과 창자가 시달림을 받다가 병이 되는 것 같은 데도 가만히 시간을 보낼 수 없어 또 술을 마셨다.

 

그런 늦은 여름의 밤이었다. 1981년 8월 14일 저녁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전화벨 소리가 나의 신경을 괴롭힌다.

 

끊기지 않는 신호 소리에 나는 힘들게 수화기를 들었다. 다급하게 전화의 저쪽에서 나를 찾는다. 나는 전화를 받고 있는 본인이 나인 것을 저쪽에다 말했다. 금방 목소리가 변하면서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한 사람은 서울에 살고 있었던 최희수 동지였다.

 

그가 나한테 전해준 말은 슬픈 내용이었다. 구좌석 형의 죽음을 알려 주면서 밤차로 올라오라고 부탁을 하였다.

 

나는 엉망으로 마셨던 술이 금방 깨어버린 것이다. 얼떨떨하던 기분이 허탈로 변했다.

 

나의 급한 성질은 이럴 때 또 본색을 드러내었다. 시계를 보면서 마지막 서울행 밤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 댔다.

 

아내를 닦달하여 여비를 구해오게 하였고 미친 사람처럼 집을 뛰쳐나왔다.

 

피서 철이어서 그런지 역에 도착해 보니 역전에는 서울 쪽으로 올라갈 젊은 인파들로 매표소 앞이 붐비고 있었다. 길게 늘어선 줄 뒤에 붙어서 입석표 한 장이라도 사야겠다는 마음으로 자꾸만 시계의 바늘에 신경을 썼다.

 

당일 부산을 떠나는 마지막 열차 안은 입석표를 지닌 사람들은 서 있기에도 괴롭게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열기가 일어났다.

 

큰 덩치인 몸을 아무 곳에나 좌석표를 산 의자에 끼일 수도 없고 남의 의자 옆에 잠깐 기대어 서면 젊은이가 엉덩이를 밀어버린다. 몸이 고단해지니깐 시간은 더욱 느리게 갔다. 지루한 마음과 싸우기에는 정신도 지쳐버린다.

 

급한 마음속에서는 투정이 나온다. 죽은 자를 두고 산 사람 고생시킨다고 욕을 해 놓고 비로소 웃었다.

 

지루한 시간 때문에 지난 15년간 그와 나 사이에서 생겼던 일들을 생각하면서 얼마간은 감회를 느꼈다.

 

할 일이 많은 나를 두고 가다니, 또 누구와 사귀어 진실한 동지라 믿고 세상에 대한 꿈과 뜻을 논한단 말인가. 새삼 운명을 달리해 버린 그를 두고 아쉬움이 일어났다.

 

어둠 속을 뚫고 밤새 달려 온 기차가 서울 시가지를 항해 들어갔다. 나는 열차 안 세면장에서 물로 얼굴을 닦으면서도 오늘 하루 동안에 겪을 일들을 생각했다. 다행한 일은 열차에서 내리니 그 시각에 서울역의 그릴이 문을 열어두고 있어서 이용할 수가 있었다.

 

최희수 동지의 집에다가 내가 상경한 것을 알렸다. 최희수 동지는 곧 나오겠다며 내가 건 전화를 끊는다. 급한 대로 서울에서 알 만한 다른 동지들한테도 연락을 취해 주어야 하겠는데 8.15라는 날짜 때문에 연락하는 것이 힘이 들었다.

 

내가 구좌석 형을 위해 마지막으로 지켜야 하는 일들을 머리속에서 찾으며 최 동지를 기다렸다. 만난 지가 서로 제법 된 최희수 동지는 생각보다도 빨리 반가운 얼굴로 역 그릴에 나타났다.

 

그런 그가 나를 자기 차에 태워 안내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병원에 안치된 초라한 구좌석 형의 빈소를 찾아간 것이다.

그 집 가족들이 나의 얼굴을 알아보고 오열을 터뜨렸다.

 

나는 그의 빈소 앞에서 제단 위에 놓여진 사진을 대하자 비로소 그가 죽었구나 하는 실감이 났고 지난날의 그의 행적을 생각하면서 양심과 정의감 때문에 고생을 하던 그를 생각하게 되어 눈물을 흘렸다.

 

경주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심봉섭 형이 빈소의 호상을 보고 있었다. 우린 구좌석 형의 지난날에 대한 이야기와 장례 문제에 대한 이야길 했다. 고인의 동생이나 자매들도 나와 심봉섭 형의 의견에 의지하려는 눈치였다.

 

나는 밤새도록 눈 한번 감아 보지 못한 몸이었기에 피로가 생겼다. 저녁때가 되니 다음 날 치를 장례를 두고 장지 문제 때문에 실랑이가 일어났다.

 

고인의 동생들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선산 쪽에 묻자는 것이었고 또 처는 서울근교인 기독교 공원묘지에 묻자는 의견이었다. 양쪽 다 고집이 대단하여 양보가 없었다.

 

또 고인이 생전에 다니던 교회목사가 와서 묘지에 관한 모든 비용은 자기네가 책임을 지겠다고 까지 했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들이 서울 근교인 일산으로 정해졌다.

 

나는 고인의 동생들을 설득하여 그렇게 하도록 권했다. 고인의 동생들도 내 말을 들었다. 시간은 저녁나절이 다 되었다. 그때서야 나를 보고 사람들이 어디 가서 좀 몸을 쉬게 하라고 권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네 집으로 가자고 권했다.

 

평소 고인과 친하게 지내왔던 몇 사람의 일행은 병원의 빈소에서 유족들만 남겨두고 내일 있을 장례식을 생각하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최희수 동지를 따라 천호동으로 갔다. 죽은 사람을 생각할 때 한없이 쓸쓸했다. 어디서이든 나의 허전한 마음을 위로받고 싶었다. 피로하던 생각들이 점점 사라진다.

 

참 좋은 벗이었는데 하는 생각이 자꾸만 머리에 생긴다. 최희수 동지는 이런 나한테 약간의 술을 먹였다.

 

8월 16일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병원으로 들렀다가 어떤 소리에 충격을 받았다. 구좌석 형의 죽음은 병사가 아니고 자살이었던 것이다.

 

병원 측에서 끊어 준 진단서에서 확인을 하면서 그의 죽기 전 고통을 생각하였고 금세 숨 가쁜 고통이 나한테서도 느껴졌다.

 

세상을 다 살지 못하고 죽은 젊은이의 한이 나의 가슴에 쌓였다.

 

왜 죽었어. 말 좀 해 봐. 아무리 물어도 나의 귀에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죽음의 원인을 모르니깐 더 답답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갖가지 억측들을 하였고 그때서야 그 당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하였다.

 

유족들 속에서는 분위기가 험악했다. 나는 죽은 자를 더 욕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흥분한 사람들을 타이르며 서둘러서 장례절차를 추진했다.

 

영구차가 서울특별시의 경계를 넘어서자 비포장 도로 위를 덜컹거리며 달렸다. 나의 머리속에는 지금까지 고인과의 사이에 있었던 조그마한 일까지도 떠올랐다.

 

나라를 위해 생명을 버리겠다던 그가 이유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자살로 끝내었다는 사실은 납득이 안 갔지만 그의 죽음에 이유가 있었다면 상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 두려움이 감추어지지가 않았다.

 

공동묘지에서는 이미 시신이 누워 있을 묘 자리를 그곳의 인부들이 미리 알고 시체의 관이 들어갈 구덩이를 파두고는 우리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런 현장을 보며 목이 메어왔다.

 

친구여, 동지여, 고이 자거라. 너의 최후의 비극이 슬펐더라도 나 또한 너와 닮은 곳이 있으니 조국을 위해 네 몫까지 다해 놓고 죽을 것이다. 하는 말들이 약속처럼 목에서 올라 왔다.

 

서울에 다녀온 나를 두고 아내는 더욱 나의 건강에 신경이 곤두서는 모양이었다. 나는 점점 삶 그 자체에 대해 허무한 것을 느꼈다.

 

하루하루는 세상에서 생기는 일 때문에 허탈상태에 빠지는 마음과 이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고독 속에서 염세적인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고 자신에 대한 절망을 느끼기도 했다.

 

정말로 하루하루가 지루하였고 현실에 대한 의욕이 상실되고 있었다. 또 다시 나의 생활은 술에 의해 위로를 받기 시작하였다. 나는 염치 좋은 얼굴로 나와 함께 술을 마셔줄 사람을 찾아 길거리를 헤매며 찾아다녔다.

 

얼굴은 수척해져 갔고 코가 점점 또 붉게 빛을 냈다. 아내는 이런 나를 두고 언제나 그랬듯이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죽어버리기라도 했음 하는 내 마음을 알고 그러는 것일까.

 

나는 내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선이 무엇이며 악이 무엇일까.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추억뿐인데 사람들은 왜 같은 것을 똑같게 이해하지 못하는가.

 

영혼은 자기를 구하기 위해 육신을 받아 세상에 태어났는데 육신 때문에 욕망의 유혹 속으로 떨어지고 만다.

 

나는 누구인가. 왜 다른 사람과 다른가. 끈질겼던 생명력, 기적처럼 이이지는 사연들, 고통뿐인 운명 속에서 아름다운 추억들을 간직한 삶.

 

모든 것에 대해서 의문이 생겼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런 문제에 누가 대답을 해주길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신체적 결함을 발견하였다.

 

온 몸에 맥이 풀렸다. 가까운 거리를 걷는 데도 힘이 들었다. 이러다가 죽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면 무엇인가 미련이 남는다. 삶에 대한 아쉬움이 나에게 남아 있구나 하는 것을 느껴본다.

 

나의 건강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내과 전문의의 진단은 술 때문에 간이 많이 상했다고 겁을 준다. 입원을 하라고 권했지만 입원 수속에 따른 치료비를 생각하니 또 금방 죽을병이 아니라고 모호한 대답이 튀어 나왔다.

 

의사의 말 때문인지 술이 싫어진다. 약국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간 치료제 몇 알을 사서 복용하기 시작하였다. 하루하루 지남에 따라 나의 몸에는 생기가 다시 돋아나기 시작하였다.

 

가슴 속에 죽어가던 정의가 되살아났고 조국에 대한 새로운 애정으로 아쉬움 같은 걸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또 다시 나의 사명을 찾기 위해 깊은 생각과 어떤 이론을 열심히 구상하기도 한다. 인간이 당하는 문제는 스스로 마음속에서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내가 이 땅에서 해야 하는 일은 동포들의 앞에 나의 양심과 용기 그리고 노력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은 오늘의 정치적 현실이란 문제 때문에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이 땅 위에는 권력의 집단이 있었고 악이 있었고 육신의 욕망이 있어 나의 행동이 거부되고 있었던 것이다.

 

신은 이런 나를 위해 기적을 보여 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답답한 것은 나의 마음뿐이다. 우리 주변에는 여러 가지 여건 때문에 어려운 것이 많다. 그런데도 어떠한 진리를 그 누구도 다시 내세우지 않는다.

 

내일의 문제를 위해 지금 죽으려는 자는 없는 것이다. 뻔한 사실을 두고 속고 속이려고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배운 사람들은 논리일까.

 

입으로 말하는 것이 수월하다고 함부로 사실을 오도하는 이 엄청난 사실을 숨기는 데에는 어떤 자신감이라도 두고 하는 일일까. 영원히 속일 수 없는 것은 진리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장래가 염려되기만 했다.

 

자신을 위해서는 먼저 자신과 싸워야 하고 동포를 위할 줄 아는 사람은 먼저 동포와 싸워야 하는 진리가 떠오른다.

 

나는 조국을 위해 자신을 바친다는 일이 얼마나 힘드는 일인가를 머리에 떠올려 본다.

 

괴로움과 함께 할 양심, 위험과 함께 할 정의, 굶주림 속에서 찾아야 할 외로운 용기.

 

나는 지금 이러한 나의 생각 때문에 누구보다도 더 오래 살고 있다는 현실의 지루함을 느꼈다.

 

정말 딱한 세상만 보게 되니 눈앞에서 자신의 고독함을 위로하려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나의 이론을 전하면 현실에서 살아야 하는 눈치만 남은 사람들이 옳은 말을 해도 시치미를 뗀다.

 

나는 이런 일을 보면서도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세상의 일들을 한탄만 할 수가 없었다.

 

양심, 자신을 괴롭히는 이 양심에 의지하여 살려고 하니 더욱 힘들 뿐이었다. 자학과 자책이 나를 가만히 두어도 지치게 해 버린다. 이제 정말 기다려 볼 것도 찾아볼 수도 없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 고독하게 살았지만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는 추억을 생각했다. 고집스럽게 지킨 양심이 어떤 때는 위로가 된다.

 

누가 오늘의 우리를 구할 것인가. 하늘이여 축복을 주소서. 사람들이 진리를 깨우치게 도와주소서. 나는 내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1981년 12월 26일 세상에 대한 실망을 느끼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배반만 하는 사회에서 또 한 번 당해야 하는 운명이 남아 있었다.

 

 

29. 잘난 바보

 

나의 아내가 나를 찾더라는 이야길 들었다.

 

나는 집에다가 무슨 일인가 전화를 걸었다.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것 보도 났습니다 했다.

 

나는 그 소릴 듣고 눈앞이 캄캄했다. 설마 하면서도 의심이 생겼다. 세상에 대한 허탈감이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평소에 보던 친분만 믿고 남을 도운다고 내 딴에는 거짓말까지 해서 얻어다 준 돈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수표를 보고 믿어도 되느냐고 말까지 했고, 또 두 사람이 지급지 은행에다 조회까지 해 본 어음이었다.

 

그때 수산업 협동조합 부산시 다대지점 소장이라는 신분까지 밝힌 사람이 전화를 받은 것이다.

 

수표 이야길 하자 그 물건 같으면 자기가 책임을 질 수 있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 소릴 듣고 잠시나마 사람들과 사회를 의심한 내 마음에 부끄러운 마음까지 느낀 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생각을 할 때마다 죽일 놈들 하는 격한 감정이 속에서 위로 올라왔다. 배반이 상식이라고 믿어 온 속된 자들을 찾아서 거리를 헤매기 시작했다.

 

금방 눈이 뒤집혀질 것만 같았다. 12월의 쌀쌀한 기온을 피부에 느끼면서도 골목길에 숨어서 잠복까지 하며 기다린 끝에 돈을 가져간 영감님을 만났다.

 

나를 본 영감님은 처음에는 당황하는 척 하더니 곧 태연해진다. 자기도 받은 것이라고 시침을 떼었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는지 나를 데리고 발행회사라는 곳까지 찾아 갔다.

 

나는 당장 그곳에 가보고 사기 당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계획적인 것이 눈에 보였다. 나는 영감님을 놓치지 않고 계속 다그쳤다.

 

나의 성질을 아는 영감님은 부산 땅에서 이삼한을 사기꾼 조직정도가 감히 손을 정면으로 대고 싸울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쩔쩔 매었다.

 

뒷날은 금융기관의 소장이라는 자를 좀 혼을 내어 주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며 점포 소재지로 찾아 갔더니 일주일 전에 사표까지 내고 급히 퇴직금까지 챙겨서 도망친 후였다.

 

나는 다시 억장이 무너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양심을 두고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믿어주는 자를 배반해야 하는 딱한 행동을 재주처럼 여기는 사람들보다 이러한 것을 두고 언제까지나 방치해 버릴 것인가 하는 사회의 양심에 분노가 치솟았다.

 

나는 비로소 이런 일이 흥분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하나하나 사람들의 이야길 들으면서 정리를 했다.

 

3,000만원이나 되는 부도 난 어음 뒷면에는 수협 다대지소 소장의 배서날인이 되어 있었다. 지능만 가지고 몇 개월에 10억 정도는 챙겼구나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은 씁쓸했다.

 

돈은 10 원도 변상을 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나 일당들이 수습을 잘 하는지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멍멍하게 김이 빠져 갔다.

 

나는 발행자의 뒷조사를 했다. 발행자는 여러 번 사기전과가 있었으며 전에도 이런 일을 한 부정수표 전과자로 그의 앞으로 된 재산은 없었다. 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전과자의 수단 치면 놀라웠다. 아니, 양심이 중히 여겨지지 않는 이 땅의 이야기였다.

 

수협의 소장이라는 자 역시 돈 씀씀이로 소문이 나 있었고 뒤에는 여자가 몇이나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두 사람의 연극이었을까 나는 의심이 생겼다.

 

이야기 뒤에는 서울에 두목이 있다고 들렸지만 더 추적할 수가 없었다. 더 알아도 아무런 해결책이 나에게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일이 나 개인한테도 문제가 있었지만 사회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여러 날이나 시간을 두고 생각했다. 이런 일을 법률에 호소하면 될까. 법이 사회정의를 대변하느냐가 의심이 생겼다.

 

이런 이야길 하면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다음 세대 사람들이 생각할지 모르지만 민사사건 수사개입, 불개입의 원칙은 지능범이 저지른 일을 그가 붙잡혀서 고백하기 전에는 정의를 아는 수사관인들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것이다.

 

고소장에다가 내력을 다 써서 납득이 가게 하려면 며칠 써야 할 것이고, 그렇다고 그 효과조차도 분명치 않았고 이런 사회에서 항상 높은 분들의 훈계가 비방하기 없기로 되었는데 사실대로 내가 먼저 판정을 해가지고 이 자들이 사기꾼이요 하고 써 낼 수도 없었다.

 

또 발행자가 조직을 가진 전과범이요 하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한 놈은 여자를 셋씩이나 먹여 살리기 위해 수표용지, 어음용지 꺼내어 주고 점포에 드나드는 고객들 돈 네다바이한 자요 하고 고함을 칠 수도 없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더 기가 막힌다.

 

우선 정의를 살리겠다는 사명을 가진 곳이 있어야 찾아가서 이야길 해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면서도 그냥 덮어두고 넘어가기에는 내 양심이 허락을 안 했다.

 

방송국과 모 신문사의 사회부에다가 전화를 걸었다. 이러이러한 일이 있으니 취재해 보면 재미난 것이 드러날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저쪽에서는 알았다고 한다.

 

나는 그 날 내내 뒷날까지 이틀간이나 뉴스 시간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앞에서 귀를 기울여도 결코 그 사건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신문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못해 직접 아침 9시경에 방송국에 찾아갔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 대한 충격과 실망만을 느껴야 했다. 기자들은 사건을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내가 사기꾼들의 다음 음모를 막기 위해서라도 이 사건만은 너무 엉터리가 많으니 취재를 해서 세상에 알려줄 것을 요구해 보았지만 기자들은 매우 불쾌한 인상까지 보여 주었다. 세상이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언론의 사명이 무엇인가며 따지자 그때서야 경찰서로 가보자며 더욱 불쾌한 얼굴로 나를 두고 말을 하였다. 세상이 나를 웃겼다.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주위는 나의 생각과는 너무나 많이 달라진 것이었다. 그래도 내 마음 한 쪽에서는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기자가 일러준 경찰서의 한 부서로 약속된 시간에 찾아갔다. 방송국의 기자도 그 시간에 경찰서로 들어왔다.

 

그는 나를 보고 아예 사람 취급도 하지 않은 채 경찰서의 경제담당 형사를 보고 내가 방송국에 찾아와서 따지더라고 항의 비슷하게 말했다.

 

경찰관이 나를 확인하고서 인사를 한다. 이 선생, 나를 알지 않소. 이리 찾아오면 되지 방송국에는 무엇 하러 갔소? 하면서 상세하게 고소장이나 한 장 써서 내라고 했다.

 

그때 부산에서 발행되던 모 일간 신문사의 기자가 말을 붙인다. 당신이 우리 회사에 전화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을 하였다.

 

그는 나를 두고 모욕적인 말로 무안을 준다. 돈놀이하는 사람이냐고. 나는 사기꾼보다도 이제는 기자라는 사람들의 행동이 불쾌했다.

 

또 그는 서슴없이 함부로 말을 한다. 한 번 혼을 내어 줄려고 했는데 만나보고 참는다는 말까지 했다.

 

나는 당장 기자의 말을 받아

 

「여보, 나는 사회를 밝히기 위해 15년간이나 투쟁했던 사람이요.」

 

하니, 나이가 나보다 어려 보이는 기자는 나는 25년간 나라를 위해 일했다는 것이다.

 

나는 도대체 내가 이런 자들과 말대꾸를 한다는 사실에 수치감을 느꼈다. 나는 그곳을 어른 나와 버렸다.

 

혼자 길을 걸었다. 사회의 장래가 걱정으로 변해갔다. 용서할 수 없는 놈들하고 이가 갈렸다. 주위에는 아무 곳에도 믿을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걷고 있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날이 갈수록 양심이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팻말을 길거리에서 보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사실은 사실대로 말해주어야 착한 자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마음속에는 앞으로 더 살아가야 할 장래가 걱정이 되고 있었다. 억울한 사람은 있는데 억울한 사람의 친구는 없다.

 

한 마디로 이 땅에 정의가 죽은 것이다.

 

이 슬픈 사실을 사람들은 확인하지 않고 살아갈 뿐이다.

 

봄이 되니 또 충격적인 사실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골 하동(河東)땅에 살고 있는 우리 남매 중에 제일 큰 누님께서 한 번 다녀가라고 연락이 왔다. 또 다음날이 되니 빨리 올라오라고 전화통에서 성화를 댔다.

 

나는 누님의 사정이 급함을 알고 급히 고향인 하동으로 올라갔다. 오래간만에 나를 만난 누님이 살았다는 듯 한숨을 내어 쉰다. 나는 누님이 내게 올라오기를 독촉한 사정 이야기를 들었다. 시골구석에서도 기막힌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책임감 없는 몇 사람이 구획 정리위원인가 하는 꼭두각시가 되어 입지 조건이 도저히 합당하지도 않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경지작업을 한답시고 무지한 사람들을 울리는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처음부터가 웃기는 일이었다. 세 동강 난 논을 두 동강을 만든다고 50여만 원 가까이 부담금을 물란다. 무엇이 그렇게 많은 돈을 내야 하느냐고 물으니 모두 다 동의한 일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 동네 구장이라는 사람은 돈만 내면 모를 심기 전까지 다 해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국을 믿고 건설 회사를 믿고 그곳 꼭두각시 노름을 하는 구장 말을 믿었다.

 

그러나 정의가 부족한 곳에서 믿음이란 언제나 낭패를 몰아왔다.

 

공사가 끝나고 나니 50cm의 논두렁이 2m로 변한 것 외에는 우리 소유의 땅 주위에는 파괴뿐이었다.

 

멀쩡한 수로를 새로 만든다고 깊게 파서 용수로마저 끊어버렸다. 남의 토지 위에서 파괴행위를 한 것으로 인해 우리에게는 엄청난 일거리가 생겼다.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해 항변할 곳이 없는 사람이 되어 참고 있자니 이젠 서서히 수작이 드러난다. 파괴된 논두렁은 개인더러 자기부담으로 하란다.

 

토지의 12%는 유지들을 위해 그럴듯한 명목으로 빼앗아 버린다. 1,025평이라고 받은 논은 실제 750평뿐이다.

 

싸움 싸움하여 항의를 하니 온갖 욕설을 하며 군청 직원은 측량기사와 상의하여 나머지 모자라는 토지 부분을 떼어주긴 했지만 이것도 잠시 입을 막기 위한 수작이었다.

 

이젠 경지 작업을 하기 전보다 논의 지형이 더 나빠졌다. 세 동강은 여전히 세 동강이었다. 오히려 불도저가 파괴시킨 논두렁을 다시 만드는데 공사비다 60여만 원이나 더 들게 된 것이다.

 

또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우리를 도와준다고 국고 보조가 우리 앞으로 약 200만 원 정도 나왔다는 것이었다. 우둔한 나의 머리에도 떠오르는 생각은 몇 놈 돈푼께나 만지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또 며칠이 지나고는 가한지를 해준 논에다가 말뚝을 박았다. 우리에게는 약900평만 가지라는 말이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번에도 또 당하고 보니 하자에 책임질 놈은 세상에 하나도 없었다. 항변을 하면 도리어 협박을 했다. 계산을 해보니 기가 막혔다.

 

1158평에서 258평은 강제로 빼앗길 형편이고 부담금과 논두렁 만든다고 들인 작업비만 근 110만 원 정도다 또 당국에서 농민 도와준다고 보태 주었다는 200여만을 합치면 310여만 원이 된다 하더라도 돌려받은 900평이 얼마나 땅 값이 나갈지 몰라도 땅 위로 불도저가 4시간 지나간 대가가 땅 1/2을 날린 형편이 되었다.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고 세상을 보면 딱하기만 하였다.

 

이런 일이 국가가 국민을 돕는 사업일까?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이렇게 해도 무사하기만 한 세상이 한심하기만 했다. 억울해도 항변할 곳이 없는 세상이고 또 당할까봐 입을 다물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아팠다.

 

책임을 자질 줄 모르는 사람들, 정의를 박해하고 양심을 미워하는 사람들, 이 땅에 그런 자들이 살기에 우리는 희망을 빼앗기고 말았다.

 

나는 모든 사실을 알고 나서 정의를 찾아 헤매었다. 하동군수를 찾아갔고 또 도의 농정국장을 찾아가 보았다. 결국 나는 없는 살림에 차비만 날린 결과 외에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억울한 자가 억울하다고 말을 하면 양심을 잃어버린 자들은 도리어 불순하다는 눈치다.

 

내가 도청의 높은 사람을 찾아가서 최후로 한 말은「담당자들은 바보 천치인가? 부정과의 결탁인가? 국가지원 사업을 통해 국민의 불신을 조작하려는 반역행위인가?」 하는 것들이었는데, 나의 항변을 들은 상대방의 대답은 언제나 침묵 속의 조소였다.

 

억울하다 억울하다. 그러나 이 억울한 자를 도우려는 친구가 이 나라에는 분명히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런 일은 또 일어난다. 외쳐도 외쳐도 메아리조차 없는 외침이 되었다.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지쳐 감을 느꼈다.

 

용기와 양심 따위는 최소한 이 시대에는 아무 가치가 없는 어리석은 자의 사치품인가. 솔직히 말해서 나는 허탈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가슴 속에서는 피가 식어버린 느낌이 들도록 싸늘한 기분을 일게 했다. 억지뿐인 사방을 둘러보면서 사람의 양심이 어디에 필요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말 못하는 사연들이 가슴에 쌓여서 답답했다. 나는 내 자신을 위해 이럴 때 필요한 말을 찾기 시작했다. 동화 속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눈 두 개 가진 원숭이가 외 눈 가진 원숭이 동네에 갔다가 병신 취급을 받았다는 이야기에 웃음이 나왔다. 세상이 재미있어졌다.

 

하루 종일 우리 속에 갇힌 돼지를 생각하면 내가 불평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파멸과 큰 일이 금방 닥칠 것만 같았다.

 

이때부터 주위 사람들이 하는 흉내를 내기 위해 돈을 좀 쓰니 술과 엉뚱한 생각들이 나의 모든 것을 잊어가게 했다.

 

일부러 자신을 타락시키기 위해 이런 생활을 되풀이하는 동안 나는 하루하루 주위가 희미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점점 눈이 보이질 않는다. 이제 나는 세상을 다른 사람처럼 살게 되는가 생각했다. 눈은 더 희미해졌다.

 

그런데 불안한 마음이 생긴다. 나의 발길은 병원으로 찾아가게 됐다.

 

안과의 전문의사가 진찰을 하더니 큰일 날 뻔했다고 겁을 준다. 3일만 늦었어도 완전히 보이질 않았을 것이라며 조금이라도 술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를 했다.

 

봉사가 되어서는 안 되지 하는 마음 때문에 쉬지 않고 치료를 하였더니 시력은 회복되어 갔다.

 

술을 끊으니 멍청해지던 자신이 점점 생기를 되찾으며 소생해 간다.

 

나는 비로소 나의 삶 속에서 용기와 양심이 설 땅을 찾기 위해 상식이 사라진 거리를 헤맸다. 별의 별 궁리를 해도 무슨 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시골 도둑놈들의 음모를 사회에 고발하기 위해 진정서를 쓰기 시작하였다. 무고죄는 엄벌에 처한다고 매스컴에서 자주 떠들어 대니까 사실을 쓰는데도 손이 떨렸다.

 

얼마 후 높은 분한테서 회신이 왔다. 자주 주위에서 들은 이야길 생각하며 이제는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술 때문에 욕을 당하고도 또 술을 들며 견딜 수 없는 순간들을 이기려고 노력했다.

 

최종적인 진정서의 회신을 받아보고 고함을 쳤다.

 

도둑놈들이 나라 망친다고 하는 생각뿐이다.

 

관이 개입한 곳에서는 언제나 주위에 좋지 못한 내음새가 났다. 진정서의 회신에는 계수 맞추기에 천재들이 법률 몇 개를 적어 보냈다.

 

기가 차고 가슴에 피가 응어리지는 기분밖에 나지 않았다. 약속이 깨어져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자들이고 보니 더 시비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나는 국회나 당국에 호소하기로 마음을 단단히 가졌다.

 

우선에 정의를 버리지 않은 사람을 찾아 나의 이런 일에 후원자를 구할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내가 당하더라도 이 일을 묵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30. 절망과 축복

 

나의 생각 속에서는 내가 찾기만 한다면 나의 주위에도 우리의 사회를 구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동지가 있을 줄로만 믿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찾아 길을 헤맸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의 마음은 외로움을 느꼈다. 마음에 안달이 생기고 가슴이 답답했다.

 

몇 년 동안 따라 다니는 우환 때문에 집안의 가계가 어려워진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이제는 서울에 올라가서라도 일을 벌여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여비를 구해오라고 아내를 보고 채근했다.

 

나의 생각은 오직 옳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이겨야 한다는 양심뿐이었다.

 

개인을 괴롭혀 사회에 불신을 만들고 국가를 기만하여 어려운 재정을 축내는 악질들을 사회에 고발하여야 한다는 사실만이 나의 가슴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내의 충고 따위는 재수 없는 여자의 소리로 여기면서 서울에 올라갔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곳에 가면 억울한 양심을 구해줄 사람이 있을 줄 믿었다.

 

그렇게 믿고 서울까지 올라갔는데도 이젠 나의 계산에 완전히 착오가 생기기 시작했다.

 

알 만한 국회의원을 찾아가 보아도 사회의 정의나 국가의 현실에 대해서는 말대꾸조차도 하지 않았다.

 

답답한 김에 정당이란 곳을 찾아다녀도 나의 투쟁에 대해 말이나마 지원을 받아보려고 했지만 당장 느낀 것은 모멸과 비웃음뿐이었다.

 

나와 절친했던 옛 동지들조차도 어찌된 일인지 이런 나를 피했고 또 억지로 출세를 한자들은 더욱 상대조차 해주지 않으려고 했다.

 

정말 세상이 이럴 수가 있을까 나의 마음은 안타까움을 지나 미치려고 하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나를 타이르기만을 하였고 답답한 세상일들은 외면하려고 했다.

 

나는 사람들의 꼴을 보고 기가 막혔다. 그 많은 서울 사람들도 이젠 앵무새가 되었다는 말인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행동에 분노보다 웃음이 섞여 나왔다. 생각을 바꾸어 바라보니 무대 위에 펼쳐진 희극으로 보였다.

 

나는 지금까지 고집스런 자신이 우스워졌다. 이런 곳에 찾아와서 무엇을 기대했단 말인가.

 

나의 몸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죽음과 그 죽음보다 더 괴로운 마음뿐이었다.

 

장차 세상은 어떻게 되어갈 것인가. 도적을 보고도 잡지 못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생각했다. 그러한 속에서 나의 마음은 점점 절망의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나는 나의 그런 머리속을 정리해 버렸다. 나의 기억을 죽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쓸모없는 사람들을 잊어버리라는 것이다.

당했던 일들을 씻어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늘부터 다시 인생의 첫 길을 시작해 보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비로소 내 자신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의 마음속에도 세상을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그리해서 나는 지금까지 나 자신을 얽어매었던 자만을 풀기 시작했다.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기가 더 고독하고 더 힘들어도 나는 이 땅에서 제2의 나의 인생을 구해야 한다는 판단이 되살아났다.

 

바로 그 순간 가슴 속에서 다시 생명의 강한 불길이 머리로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뜨거워진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온 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몸이 떨리고 뜨거워졌다.

 

나는 이 순간 높은 곳을 향해 축원을 시작했다.

 

저는 적으로부터도 존경을 받도록 자신을 지켜나갈 것입니다.

 

비로소 나는 남을 위해, 내 자신이 걸어왔던 운명을 뒤돌아보며 인생기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지나온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었다. 나의 정신이 점점 맑아지고 손이 떨렸다.

 

미래의 젊은이를 위해 또 조국의 앞날을 생각하며 원고지에다 글을 적었다.

 

나의 몸 속에서는 두려움이 없어졌다. 대신 커다란 감동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때까지 지니고 있던 여러 가지 몸 속의 질병들이 한 가지씩 사라져버린 것이다.

 

누구라도 들으면 믿지 못할 일이 생기고 있었다.

 

극심했던 해소 기침이 멈추었고 붉은 코가 제 색깔을 내었다. 답답한 가슴 속의 병들이 나아 버렸다.

 

멀쩡하게 달라진 나를 보고 아내는 신기해했다. 내가 사실을 이야기하니 귀신이 붙은 거 아니냐고 중얼거렸다.

 

나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나의 가슴 속에서는 우렁찬 소리가 퍼졌다.

비겁한 자신과 싸워라.

 

 

 

 

 

믿음이 흐려진 사회에서 답답하고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글을 보인다.

 

나는 40년 동안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신한테 주어지는 운명이 있었는데도 행복과 감동을 얻으려는 양심과 용기만으로 천대와 멸시, 학대와 박해 속에서 자신을 지켰던 이야기를 적었다.

 

이제 당신도 이 책을 보시는 순간,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자기를 축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게 될 것이다.

 

무엇이 행복일까, 어떤 것이 불행한 것인가 하는 힘든 운명을 지닌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깨닫기 전에는 진정한 행복을 얻지 못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나는 나의 희생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생명에 축복이 얻어지기를 진심으로 기대해 보고자 한다.

 

 

 

-끝-

 

'인물 > 이삼한(李三漢)'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깨달음의 길  (0) 2021.01.06
인생(人生)  (0) 2021.01.06
외로운 투쟁(21~25)  (0) 2021.01.04
외로운 투쟁(16~20)  (0) 2021.01.04
외로운 투쟁(11~15)  (0) 2021.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