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남을 두려워 할 수 없는 사연
5월 5일의 아침이 되었다.
나의 가슴 속에는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안타까운 마음이 쌓였다. 나는 이런 순간 지구당 당원이며 이웃에 살았던 친구 두 사람을 불러 상의를 해 보았다. 그리고서야 등록을 서둘게 됐다. 승패에 관계없이 내가 갈 길은 가야 한다는 사명감이 가슴에 생긴 것이다.
결단을 내리고 보니 타고난 운명적인 기질이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는 소리가 내 가슴을 쳤다.
언제 내가 돈 가지고 살았으며 누구의 도움으로 살았더냐 하는 배짱뿐인 마음에 운명의 신은 결국 내가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6일 가까스로 마감시간 전에 벽보 대금을 맞추어 내고 등록을 마쳤다. 그 날 저녁 평소 당내에서 나와 접촉이 있던 대중당 대덕, 연기지구당 위원장이었던 최희수 동지가 뜻밖에 찾아왔다.
전직 고등학교 사회 담당교사였던 모씨를 선거 사무장으로 기용하고 노동판의 십장 몇 사람과 이발관을 하던 친구 유무종을 참모진으로 갖추고 선거전에 임하게 되었다.
7일에는 선거에 경험이 없는 몇 사람이 의견을 내어서 선거공보를 만들어 지역선거 관리위원에 제출을 했다.
생각하면 연속해서 할 일은 태산 같은데 피로가 쌓여 금방 지친다.
8일 아침 9시 온몸이 천근처럼 무겁고 눈가에는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선거 사무실인 나의 하숙방에서 두 다리를 펴고 누워버리니 단번에 깊은 잠에 빠진다.
10시 30분이나 되었을까, 소란스러움으로 눈을 떴다. 사무장과 참모들 그리고 최희수 동지가 당황해 하고 있었다. 바로 오늘 오후에 합동정견 발표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연설문을 준비하는 것을 보지 못한 그들이라 당장 닥칠 일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없이 태평스럽게 코를 고는 나를 보고 당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좀 더 잤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모두들의 심각한 표정에 나도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최희수 동지가 기막힌다는 표정으로 어처구니없이 웃으며 합동연설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망설이는 나를 보고 대가도 없이 선거운동을 해주러 왔던 여러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성토를 한다.
오후의 문제는 오후에 해결하더라도 당장의 이 소란은 수습해야 했다. 당의 정책 자료를 적어 보낸 책자를 뒤적이고 읽지도 못하는 외국서적을 읽는 척하며 슬슬 상대방의 눈치들을 살폈다.
12시가 넘어 누님이 준비해 준 점심을 먹고 나니 다시 나의 눈꺼풀에는 졸음이 왔다. 만사 제쳐두고 눕고 싶지만 옆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애써 표정을 바꾸었다.
그때 최 동지가 어서 나가자고 앞장을 서며 서둘렀다. 미리 연설 장소에 나가서 사람들한테 얼굴을 익혀야 한다고 했다. 그런 말을 하니 옆에 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도 일어났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나의 마음은 죽을 지경이다. 그런데도 모두들 고맙게도 나를 에워싸고 전차종점 근처에 있는 남중학교 운동장까지 따라왔다.
낯선 사람들과 시선이 마주치니 점점 정신이 맑아진다. 연설 시간을 30여분 남긴 학교 운동장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다른 후보들은 이미 나와 있었다.
점잖게 행동을 하라는 최 동지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젊은 나에게 충고를 했다.
나는 우선 무게 있게 보이기 위해 일행과 함께 한쪽 담 옆에 사람들의 눈에 잘 띠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비로소 나는 초조하게 다가오는 시간을 보면서 내 정견에 대해 머리속에서 말을 찾아 만들었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연설순위만 뒤에 되었음 하는 기대뿐이었다.
사실 나는 연설회를 두고 정리한 원고가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의 선거참모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신념 하나만 가지고 뛰어든 선거전이었기에 쉽사리 어떤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자신의 소리가 억지로 나를 힘들게나마 버티게 한 것이다. 일각일각 자신에게는 시간을 견디어 내어야 하는 투쟁이 이어졌다.
그런 시간에 안내방송이 스피커에서 흘러 나왔다. 선거관리 위원회 직원이 몇 번씩 마이크로 되풀이하며 알리고 있었다.
「곧 연설회가 시작되겠으니 후보자는 연단 옆의 참관석으로 나오시고 후보자 대리인인 경우는 후보자의 도장을 가지고 나와서 연설순위를 추첨해 주시길 바랍니다.」
내 주위에 모였던 동지들이 흥분을 하기 시작했다.
최 동지가 내 도장을 가지고 연설순위 추첨에 나갔다 돌아오더니 미안한 얼굴을 하면서 1번이라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마음은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당황하며 주저할 시간도 없었다. 이것도 운명의 소치인가. 나의 마음은 당장 어디에든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후보자가 운동장 밖으로 도망칠 수도 없으며 연설을 기피할 수도 없었다.
즉시 나의 이름이 스피커를 통해 불려졌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람처럼 되어 배에다 든든히 힘을 주고 연단으로 올라갔다.
많은 청중들이 나를 주시했고 나는 그런 현장을 보고 여기서 망신을 당할 수 없다고 다짐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또렷하게 눈을 뜨고 청중을 주시하며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사방에서 박수가 터지니까 웬일인지 그 순간 나의 몸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마이크를 얼굴 가까운 곳에 맞추어 입을 열었다.
「제가 기호 4번인 대중당의 후보 이삼한입니다.
제가 이번 5·25 선거에 출마하게 된 것은 이때까지 살아오는 동안 느꼈던 답답함을 풀어보고 싶었고 또한 저처럼 살아오면서 답답함을 가슴에서 풀지 못하고 있는 다른 분들을 위로해 주어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억압과 복종만 강요했던 왕권정치를 모방만 하고 있는 오늘날의 정치적 독선과 그들만이 진정한 조국의 수호자인양 떠벌리는 정권의 억지에 대항하고자 출마를 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양심이 있고 지혜가 있으며 용기가 있는 자가 조국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외치고자하며 저와 같은 뜻을 가진 분을 찾아 나라의 앞날을 구하고자 이 자리에 나섰습니다.
양심과 정의를 먼저 구하고 희망과 용기를 심어 번영되고 자유로운 조국을 가질 수 있는 이상적인 기회는 바로 지금이라고 여기면서 이러한 중대한 시기에 금력에 매수되고 권력에 억눌려 자신의 행사를 뜻대로 못한다면 우리는 희망을 잃게 되고 자유를 버리게 되는 사실을 경고하기 위해 저의 행동이 필요하다고 믿었으며 부패자와 싸우기를 원하는 젊은 기개를 가진, 여러분 같이 가난하고 순박하며 우직스런 저를 국회에 보내 주심으로 해서 여러분이 이 땅의 확실한 주인임을 확인시키기 위해 오늘 제가 이 자리에 나선 것입니다.
주인이 주인 구실을 못할 때, 질서는 파괴되고 정의는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고 맙니다. 자신이 받는 고통이 아프다고 빌기만 하고 지낼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자에게는 신의 축복이 내리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여 온 사실입니다.
다음에 이 자리에 올라올 다른 후보들은 저를 두고 어떻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가난하며 학식도 없고 명성도 없습니다만 언제나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며 당당하게 조국과 민족을 걱정하면서 소신과 양심을 지킬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사실을 거짓으로 바꾸어 말하는 것은 웅변이 아니며 사기꾼의 행동입니다. 위선을 일삼는 자는 인재가 될 수 없으며 협잡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후보가 있다면 누구든지 자기의 영달보다 사회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으로 이 자리에서부터 행동으로 임해주길 제의합니다.」
그때부터 나는 나의 공약과 신념을 발표했고 대중당의 정책을 설명했다. 청중들은 나의 이야기에 어떤 때는 상당히 열광했고 음성을 높일 때마다 힘찬 박수를 쳤다.
나에게 주어진 연설시간이 잠시 만에 지나갔다. 시간을 알리는 벨소리가 울렸다. 나는 비로소 해방감을 느끼면서 연단을 내려왔다.
내가 연단을 내려오니 나의 일행들이 무척이나 반갑게 나의 손에 악수를 했다. 그들은 정말 가슴이 조마조마 했는데 태연하게 말을 잘 했고 반응도 좋았다고 칭찬을 했다. 다른 면식 있는 사람들도 연설을 잘 한다며 나를 새롭게 인식하는 듯 했다.
나는 처음 실시되는 합동연설이기 때문에 다른 후보들의 정견을 다 들어 보았다. 그러나 사실 전문가인 듯한 그들의 연설도 진실성이 없는 듯 신통하지 못했다. 하늘에는 저녁노을이 펼쳐지고 연설회는 끝이 났다. 나는 개인연설을 위해 자리를 떠났다.
돈도 권력도 조직도 없었던 나의 선거운동이란 내 가슴 속의 진실과 목소리에만 너무 의지하다 보니 어려움도 많았다. 언제나 고달픔에 지쳐 있었으며 정신은 피로를 이기려는 나의 억지에 더욱 만신창이가 되어 갔다.
어떤 곳에서도 연설만은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도 결과에 대해서는 기대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나의 행동이 어느 세대이든 한 사람이 걸어야 하는 사명의 길이라고 생각하며 시간을 견뎌가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하루도 쉬지 않고 고달픈 육신을 이끌며 악을 쓰고 거리를 누비고 이것이 곧 내가 걸어가야 하는 숙명이라 생각했다.
견디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점점 목이 잠기고 있었다. 나는 날계란과 용각산을 먹어가며 안타까운 마음은 목소리라도 살려 대중의 가슴 속에 자신의 외침이라도 남겨 두기 위해 애를 태웠다.
다행한 일은 하루도 변함없이 나를 위해 자기들의 일마저 그만두고 나의 뒤를 따라다니며 협조해 주는 몇몇 동지들이 외로운 나의 투쟁에 의지가 되었으며 특히 멀리서 와서 나를 위해 노력하는 최희수 동지의 정은 정말 고마웠다.
한 차례도 빠뜨리지 않고 깨끗한 목소리로 안내방송과 찬조연설을 도맡아 해 주는 최 동지의 목소리는 항상 차분해서 나의 부족함을 메워 주었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그는 하루에도 몇 차례의 안내방송을 했고 나는 몇 사람의 청중이 모인 곳에서도 허공과 거리를 향해 현실을 절규하고 외쳤다.
「존경하는 유권자 여러분! 타 후보들은 정당정치가 어떻고 살기가 좋아지고 경제가 발전했다고 떠들어 대는 것을 보고 저는 심히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내일을 외면한 위선의 소리일 뿐입니다. 정말 이런 정도가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환경이라 생각합니까?
정당정치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쥐를 잡지 못하는 고양이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권력의 횡포에 말도 못하고 부화뇌동하며 민중을 기만하면 그것이 어찌 우리들의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치는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까? 대통령을 위해서 입니까? 국민을 위해서 입니까?
저는 오늘날 너무나 상식을 벗어나서 전개되는 상황에 대해 답답함을 참을 수 없어 여러분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양심도 없는 자가 위선과 거짓을 보태서 말한다고 똑똑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엄청난 외국의 빚을 얻어 빌딩 몇 개 짓고, 쓰지도 못하는 공장을 계획 없이 짓는다고 발전이며 건설이라고 함부로 자랑하는 것은 조국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 빚은 누가 갚아야 합니까? 대통령이나 정당이나 국회의원이 갚는 게 아니라 그 빚과 이자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이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계획적으로 엄청난 빚을 얻어 즉흥적으로 발전이라 떠들고 보면 그 덕은 극히 일부들만 보고 우리는 무거운 부담만 얻고 빚 때문에 허덕여야 할 날이 멀지 않은 장래에 다가올 것입니다.
오늘의 정부나 집권층은 상식 밖의 일을 너무나 잘 하고 말도 비단결 같이 잘 하는데 그것을 확인해 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이 젊은이가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출마를 결심했습니다. 그런데도 항간에는 저를 말 잘하는 위선자 정도로 보는 경우가 허다하니 참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다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오늘을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지켜야 하는 것이 우리들 공동의 책임입니다.」
이렇게 절규하다 보면 나의 가슴은 정말 격해지고 금방 터질 것 같았다. 얼굴에는 땀이 흠뻑 흘렀으며 그럴수록 무언가 이 나라에 불안한 문제가 터질 것 같은 마음이 가슴을 떨리게 했다. 이야길 하다보면 목소리도 격해져서 고함이 되었고 절규로 변했다.
「자기 것은 자기가 차지해야 합니다. 위협한다고 굴복하고 기만한다고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밝은 것을 버리고 어둡게 살려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소치이며 영원히 후회해야 할 일이 될 것입니다.
자유와 행복은 신의 선물이며 이 귀중한 선물은 여러분의 양심 속에서 지켜져야 할 것으로서 결코 망각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내일의 밝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나와서 진심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자유와 행복은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말이 옳다고 보시면 주저하지 마시고 지지하여 주십시요.
저는 분명히 약속드립니다.
조국을 위해서 생명을 바칠 것이며 사회의 정의를 찾기 위해서는 어떤 매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겠으며 굶주림도 고달픔도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외로운 나의 절규가 허공에 퍼져 되돌아 와도 나는 절실한 마음으로 쉬지 않고 외치고 또 외쳤다.
내가 연설을 마치고 마이크를 놓으면 최 동지가 다시 나의 지지를 호소했고 하루에도 4∼5번씩 자리를 옮기며 개인정견을 발표했다. 상대편 운동원들은 나의 호소를 지나치다고 욕을 했다.
나는 그런 속에서도 마지막인 5번째의 합동정견 발표회를 맞이하였다. 자금도 조직도 부족한 나의 기대는 언제나 진실을 토할 수 있었던 웅변뿐이었다.
오후 3시부터인 동삼국민학교의 연설회를 위해 점심때가 지나면서 서둘렀다.
그 날의 연설순위는 5번째였으며 마지막이었다.
후보들의 연설이 끝날 때마다 청중이 줄었다. 마지막으로 연단에 오른 나는 넓은 운동장에서 띄엄띄엄 보이는 청중을 향해 목청을 올렸다.
「오늘 시간보다 일찍 여러분을 뵈옵고 제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리고자 동삼국민학교, 이곳 연설회장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제가 타고 오던 버스는 정류장마다 서면서 타는 사람과 내리는 사람을 위해 멈추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교통법규를 위반해 가면서 질주하는 승용차들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장 제 처지와 그분들의 처지가 너무나 하늘과 땅 같은 차이를 느꼈습니다마는 안타까운 마음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고 연단에 올라오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주위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예감에서 우리 사회의 앞날을 두고 좀 진지하게 의논도 하고 진실된 말로 내일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나의 사명을 찾아 조국에 바치고자 결심하고 나왔습니다.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또 오늘의 어두운 사회 현실에서 밝은 것을 찾으려는 애국적 유권자 여러분, 저는 오늘 이곳 연설회장에서 다른 후보들의 정견을 여러분과 함께 들었습니다. 제가 느낀 것은 그분들은 말씀도 수월하게 잘 했습니다만 도저히 그분들의 웅변 속에서 수긍이 안 가는 것이 많이 느껴졌습니다.
출세를 하기 위해 국회의원에 출마한 분인지 조국의 어려운 문제 때문에 사명감이 생겨서 출마하시 분들인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저의 반대자들은 저를 조소하고 저 자가 누굴 비방하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도 있을 줄 압니다마는 저는 결코 어떤 쪽을 비방하기 위해 이런 말을 끄집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분들은 정당정치가 어쩌고저쩌고 하며 우리들을 가르치려고 하고 있습니다마는 정말 ○○당이나 ××당을 믿고 우리의 행복과 이상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까?
오늘의 세상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의심이 생기는 문제들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나쁜 것을 무조건 덮어두려는 행위가 정당정치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현실에 대한 문제들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젊은 제가 오늘의 이런 쟁점에 뛰어들었습니다. 저의 용기나 저의 지혜가 여러분에 의해 이 땅에서 봉사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이든 잘 알고 행세를 한다면 낭패를 당하는 일이 적을 줄 믿습니다.
오늘 이곳에 마지막까지 남아 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여러분들께서는 지난날 대통령 선거에 대한 기억을 아직도 잊지 않은 줄 압니다.
저는 당시 두 분의 연설회장에 나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대통령후보의 연설과 찬조연사로 나온 쟁쟁한 분들의 말씀 속에서 아연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분들은 대통령 선거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선거에서까지 우리 부산 시민에게 당부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전직 국무총리의 말씀부터 들은 대로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전하겠습니다.
제1야당이라는 곳에서 공천 받고 후보로 나온 사람들을 국회에 뽑아 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합디다. 낮이면 국회의원 행세를 하지만 밤만 되면 장사꾼으로 변한다는 이 말의 의미가 납득이 안 가 저의 머리속에서는 몇 날이나 저를 괴롭혔습니다마는 현명하신 여러분들께서는 이 말이 무슨 의미에서 나온 말인지 짐작하실 줄 믿습니다.
제가 모략을 하는 것이 아니냐 의심하는 분들은 그 날 조방 앞에 가신 분을 붙잡고 물어 보세요. 다른 분들도 들은 것이 사실입니다. 나는 그 날 백만이다. 60만 명이다 하는 군중 앞에서 똑똑한 발음으로 웅변한 그들의 직위나 태도로 보아 거짓이 아닐 것이라는 심증을 확인했습니다.
이젠 김 모 후보의 당부말씀도 전하겠습니다. ○○당 국회의원 후보들 국회의원에 뽑아도 여러분 위해 별 소용이 없다. 그들은 하나같이 행정부의 시녀 노릇이나 하니 오히려 민주정치를 하려는 역사에 역행이나 하는 짓이다 하는 말씀에는 왜 우리 사회가 밝지 못하고 점점 음침해지는가 하는 의심이 더욱 나를 괴롭혔습니다.
존경하는 유권자 여러분!
우리의 생활 속에는 안면도 좋고 의리도 좋은 것입니다마는 더욱 중요한 것은 밝은 사회이며 활기 찬 조국인 것입니다. 이런 일을 위해 준비 없이 이번 선거전에 뛰어든 젊은 저에게 그놈 괜찮은 놈이다 여기시고 표 좀 모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는 언제든지 여러분과 조국을 위해 나의 양심과 용기를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각오 때문에, 제 어려움보다 조국의 어려움에 더 슬픔을 느끼며 양심을 버린 자들의 조소 속에서도 떳떳이 제 자신을 지키려고 버팁니다.
오늘 마지막까지 남아 제 연설에 귀를 기울여 준 여러분의 양심에 기대를 걸며 시간관계상 연단을 물러갑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다섯 번째 차례였던 합동정견발표를 다 마친 셈이었다.
나의 심신에는 피로가 몰려왔다. 그러나 나를 위해 보수 없이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쉴 여유가 없었다. 대중 앞에 서기만 하면 말이 저절로 나왔다.
26살인 나를 사람들은 대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바로 선거를 하루 앞둔 날 마지막 나의 개인 연설을 하였다. 그 날은 웬 우연인지 사람들이 제법 모였다. 나는 마음속에 가장 염려시 되던 앞날의 문제들에 대한 호소를 했다.
그러나 나는 5차례의 합동 정견발표와 54회의 개인 연설회를 통해 내 가슴 속에 응어리진 한을 전했지만 정치를 유희처럼 느끼려는 사람들의 마음은 돌리지 못했다.
결국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은 애국심만으로는 불가능했으며 이 땅에선 금력과 권력이 무기였던 것이다.
5·25 선거는 끝이 났고, 나는 예상보다 더 외롭고 쓸쓸함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동지들이 개표장에 나가 있는데 나는 안주도 없는 깡소주로 허탈을 달래며 고달픈 육신을 잠재우려고 노력했다.
날이 샌 다음날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내 주위에는 그동안 열심히 나를 도왔던 동지들이 둘러 앉아 연민의 표정으로 잠든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니 그들은 나를 위로했고 나는 오히려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위로했다.
「여러분 고마웠소. 모든 결과는 내 탓이었소. 인물도 못났고 돈도 권력도 없는 나를 끝까지 따라다니며 협조했던 당신들로부터 나는 다시 많은 힘을 얻었소.
사실 나도 내 자신의 이름에다 표를 찍으면서 이 땅에 인물이 없음을 깊이 한탄했다오. 애기가 크면 어른이 되는 것 아니오. 우리는 지금부터 경험을 살리며 시작하는 것이오. 정말 신세 많이 졌소.」
순박하고 우직스러운 동지들에게 형식이 아닌 깊은 감사의 마음을 느끼며 말을 했다.
금방 방안의 분위기가 달라졌으며 나는 주머니를 털어 됫병 소주 한 병과 오징어 두 마리를 사서 술상을 벌였다. 얼큰하게 취하여 지난 일들과 앞으로의 일들을 토론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모두가 돌아가고 나니 술기운이 몸 전신에 퍼지며 다시 피곤이 엄습해왔고 급기야는 그냥 쓰러져 잠이 들었다.
누나가 저녁밥을 지어 놓고 하루 종일 술만 먹고 취하여 쓰러져 있는 나를 두고 걱정을 했다.
시간이 흐르니 또 세월이 변하여 갔다. 나는 언제까지 감상 속을 헤매며 세월을 먹고 있을 팔자가 못되었다. 이제 또 내 앞에는 방 문제를 비롯한 많은 일들이 쌓여 있었던 깃이다.
조금 모아두었던 돈은 선거를 치르느라 바닥이 났고 막노동으로 여러 식구의 생계를 책임진 자형한테 하루라도 나를 더 맡길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예견된 결과였지만 선거의 충격은 한동안 나를 공허하게 했으며 마음을 방황하게 만든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새로운 결정을 했다.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헌 옷가지를 챙겨 누나 집을 빠져 나와 곧장 부산역까지 걸어 나가서 서울행 완행열차표 한 장을 샀다.
정거장마다 쉬어가는 완행열차는 내 빈 창자를 더욱 자극했다. 그리고 역을 지나면서 차안은 또 복잡해져 왔다.
피로한 기색으로 앉지도 못하고 서 있는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몹시 아파왔다.
저들도 돈이 없어 나처럼 이렇게 지루하고 복잡한 여행을 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주를 마시는 사람, 의자에 기대서서 졸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내 옆에 앉은 어느 촌 노인이 쉴 새 없이 싸구려 담배를 피우고 있어 나를 질식할 것 같게 했지만 내색도 못한 채 참아야 했다.
드디어 열 시간을 넘게 달린 열차가 용산역에 도착했다. 낮이 긴 계절이었지만 새벽 4시는 아직 어두웠고 전등불이 역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역 광장에 나온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를 생각하며 서성거리고 있었고 「○○ ○○」를 외치며 여자들이 따라와 옷소매를 끌었다. 정말 어디 들어가 쉬고 싶었으나 도저히 형편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끈질기게 달라붙는 여인들을 뿌리치고 새벽 공기를 들이키며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얼마쯤 그냥 걷다보니 먼동이 터오고 있었고 나의 발길은 남대문 시장 통으로 가고 있었다.
한쪽 편에 허수룩한 차림을 한 사람들이 모여 무엇인가 먹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의 발걸음이 그 쪽으로 향했다. 노동자 풍의 사람들은 새벽녘 길가에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꿀꿀이죽인 짬뽕을 10원에 한 그릇씩 사서 먹고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 속에 비비고 들어가서 10원짜리 한 닢을 죽을 떠주던 여자 앞에 내밀었다. 제법 뚱뚱한 여자가 돈을 보더니 꿀꿀이죽 한 그릇을 떠서 내 손에 건네준다. 비로소 배 속의 시장기가 느껴진다.
잽싸게 숟가락질을 해대었다. 꿀꿀이죽 한 그릇을 금방 먹어치우니 몸에 생기가 나서 제법 살 것 같은 기분이 생긴다. 가진 게 별로 없어서 인지 그 죽 맛도 별미로 느껴졌다. 한 그릇쯤 더 했음 하는 기분을 억제하면서 남산의 길을 걸어 올라갔다.
새벽의 찬바람을 오래 맞으니 피로도 사라져 버린다. 약수터에 들러 갈증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약수물을 떠 마셨다. 공짜는 무엇이든지 우선 먹어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먼동이 터오는 서울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식물원 쪽을 향해 걸으면서 생각해 본다. 햇빛에 비친 아침 안개가 한 폭의 그림 같은 느낌을 준다.
마음껏 숨을 들이 마시고 내뿜으며 광장의 벤치에 주저앉아 젊은 나의 꿈과 이상을 어느 곳에서 찾아야 할지 모르는 부질없는 공상을 했다. 시간을 좀 수월하게 보내려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니 그런 일도 힘이 들었다.
한 사람 두 사람, 산책 나온 사람들이 주위로 지나갔다. 나의 눈길은 할 일없이 지나가는 사람의 발길을 따라 움직인다. 눈을 붙인 발길이 멀리 사라지면 또 가까이서 다른 사람의 발길을 붙잡게 되고 또 그 발길을 따라 눈동자는 움직였다.
붐비던 사람들이 잠시 뜸했다. 시계의 바늘이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허공을 쳐다보는 시선에는 외로움이 느껴졌다. 몸을 의자에서 일으켰다. 남대문까지 걸어가는 시간이 한 시간만 걸려주었으면 했다. 시간을 소비하기 위해 무턱대고 걸었다.
남대문으로, 시청 쪽으로, 광화문 쪽으로, 10시가 될 무렵에는 종로 쪽을 걷고 있었다.
대중당 당사로 들어갔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텅 빈 사무실에는 사환 아이만이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나는 사무실의 소파에 기대며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시간이 흘러가니까 한 사람 두 사람 낯익은 얼굴들이 나타난다.
모두다 나의 얼굴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찾으며 굳게 손을 잡아 주었지만 그런 그들의 얼굴은 한 사람도 신색이 좋아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이 속에서 나 자신이 좀 더 의젓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정오가 되어도 주위에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 사람이 없었다. 또 점심을 먹자는 말을 꺼내는 사람도 없었다. 해가 넘어가고 나서야 모두 서로의 눈치만을 살피며 돈타령이다.
잠시 후에 누군가가 막걸리 집으로 가자고 제의를 했고 여섯 사람이나 되었던 일행은 관철동의 싸구려 술집을 찾았다.
사람들은 막걸리 두 되를 안주도 없이 마시면서도 호기들은 대단하다. 술집 주인은 이런 우리 일행을 좋은 눈치로 보아주지 않았지만 홀 안의 큰 테이블을 차지한 일행은 술기 때문인지 떠들어 대었다.
빈속에 술이 더 잘 취한다는 말처럼 모두의 얼굴에는 주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온종일 먹은 것이라곤 새벽에 꿀꿀이죽 한 그릇을 사먹은 것뿐인 나의 몸이 금방 술기로 머리가 띵하였다.
누군가의 입에서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고 팔자타령을 시작한다. 가게의 일하는 아주머니마저 이런 우리 일행들의 이야기에 건달 취급이다. 점점 정신이 흐려져 갔다. 애써 의식을 붙잡으려고 노력을 해야 자신을 지탱할 것 같다.
우리 일행은 좌석에서 일어났다. 내일 만나자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내밀며 뿔뿔이 제 갈 곳을 찾아 흩어져 버린다.
나는 혼자가 되어 큰길 쪽으로 걸으며 생각하였다. 어디로 간담! 생각을 하면서도 몇 잔 마시지 않은 술기 때문에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를 써야 했다.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린 것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상도동쪽에 있는 단 한 집 알고 있는 친척집을 찾아가 보자는 생각이었다.
제법 촌수가 멀어 그냥 배짱을 부리며 찾아가기에는 염치없는 짓이었지만 당장 뾰족한 수가 없었다. 군대생활을 할 때 한두 번 들른 기억을 가지고 용케 길을 찾아 갔다.
잠을 잘려고 준비하던 사람들이 놀라며 나를 그래도 친척이라고 외면으로는 반겨준다. 저녁을 어떻게 했느냐는 질문에 미안해서 먹었다고 억지로 대답을 했다. 술기운이 나를 더욱 피로하고 괴롭게 했다.
누가 나를 흔드는 기척에 눈을 뜬 나는 새로운 아침을 확인하였다. 식사를 하라는 말에 급히 서둘러 세수를 하고 여러 사람의 밥상 앞에 앉았다.
아침을 먹는 동안 이 집 식구들과 이야길 주고받으니 얼마 동안이나 서울에 있을 것이냐는 사람들의 질문에는 할 말이 막혀 버린다.
나는 한 숟갈의 밥을 입 속으로 넣으면서도 부담을 느꼈다. 며칠 서울 사정을 보고 내려갈 날짜를 잡겠다고 말을 해 놓고는 친척집에 가방을 맡겨 놓은 채 출근을 하였다.
며칠이 지나니 나는 스스로 손님이 아니고 이 집의 짐이라는 눈치를 느끼게 되었다.
나의 행동이 점점 거북해져 갔다. 이쯤 되면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해 주어야 하는 것인데 나의 처지도 정말 딱했다.
나는 아침저녁 타고 다니는 입석버스의 요금도 겨우 정당의 당원 동지들한테 신세를 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며칠이나 더 친척집에서 잠을 자야 할지 몰라 너무 미안한 마음에 언제나 저녁때에는 당 동지들과 어울려 막걸리 몇 잔에 취하여서 들어가면 저녁은 밖에서 먹고 들어왔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상을 차려오지 못하게 하였다.
하루 종일 식사라고는 아침 한 끼를 먹으면서도 나의 가슴 속에는 커다란 꿈이 나를 배고픈 상태에서 참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어린 시절을 거쳐 내가 청년이 된 것처럼 언제든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내 자신의 지난 일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웃을 날을 찾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날그날 당의 청년 동지들의 도움으로 약간의 버스비 정도는 마련했지만 사실 그들도 빈털터리라 나에게 대한 자신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나는 서울에서 나의 꿈을 찾으려면 당장 급한 의식주 문제 때문에 부산으로 내려가서 다시 좀 준비를 해 가지고 와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당장 부산까지의 차비가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었다.
넓은 서울바닥에서 지금의 딱한 사정을 나의 염치로서는 상의할 곳이 없었다. 여름날의 무더위 속에서 만원인 완행을 탈 수 있었던 것은 신의 도움처럼 생각이 들었다.
땀을 온몸이 젖도록 흘리면서 온종일 입도 다시지 못한 채 허기에 시달리며 부산의 누나 집으로 찾아갔다.
17. 여분 없는 인생
나의 운명 속에 여분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부산에 찾아와도 당장 급한 것은 서울과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누나가 남매지간이란 인연 때문에 억지로라도 당분간 부담을 덜 느낀 것뿐이다.
그런데 당장 또 알게 된 것은 이젠 이 고장에서는 옛날처럼 행동하기가 수월하지 않은 것이었다. 유명세가 뒤에 붙어 다녔다.
길을 갈려하면 사람들이 나의 얼굴을 힐끗힐끗 쳐다보는가 하면 골목길 같은 데서는 중학생이나 국민학생들이 아무개 지나간다고 떠들며 내가 안 보일 때까지 시선을 나의 곁에서 떼지 않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나의 신세가 정말 설상가상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이겨야 하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이곳저곳 찾아다니면서 아는 사람들의 일을 도와주고 내 몫의 일당을 벌었다.
부지런하게 이력서를 만들어 어떤 일자리이건 찾아 쏘다녔지만 얼굴 덕분에 나에게 맞는 자리가 없다고 퇴짜를 더 많이 맞았다.
나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았다. 이빨 없는 사람들은 잇몸으로 씹는다는 격언처럼 남을 의지하려던 마음을 버리고 자신과 부딪치면서 그날그날 일을 찾았다.
나에게 생기는 일은 궂은일뿐이었지만 그런 일도 피할 수 없었다. 비누를 배달하는 등 틈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일을 거들어 주었고 고철장사도 시작하였다.
나의 수중에는 두 달 만에 의식주를 해결하고 나서도 얼마간의 돈이 남았다. 나는 다시 나의 꿈을 찾아 서울로 올라갈까 생각을 하였다.
서울 가서도 부산에서처럼 막일을 할 결심이 생겼다. 당장 머리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사람이 나면 서울로 가고 말이 나면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뿐이었다.
늦은 가을 날 나는 또 수중에 몇 달치의 하숙비를 지닌 채 급행이란 글자가 끼인 보통급행 열차의 창가에 앉아 스치는 풍경을 감상적으로 느끼며 꿈과 낭만을 지닌 채 서울로 올라갔다. 나의 입가에서는 휘파람이 흘러나왔다.
그 날 나는 오후 늦게 서울 바닥에 나타난 것이다. 새로 맞추어 입은 양복에다가 넥타이까지 맨 정장한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의젓했다.
어느 날 잘 아는 선원으로부터 얻은 외제 선글라스까지 끼고 보니 지금 모습은 내가 보아도 옛날의 내가 아닌 것이다.
당사로 들렀더니 불쑥 나타난 나를 본 동지들이 여간 신기해하지 않으면서도 반가워했다.
그날 저녁 나는 10여명이나 넘게 있었던 동지들을 데리고 근방에 있었던 관철동의 싸구려 술집으로 찾아 갔다. 오래간만에 생두부 안주까지 주문해서 빈속인 동지들의 배 속에다 막걸리를 채우게 한 것이다.
주전자가 몇 개나 바뀌었다. 모두 얼근한 기분인지 이야기가 길어진다. 안면이 있는 주모가 호기를 부리는 우리 일행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돈 걱정이 되는지 점점 거북한 얼굴을 보인다.
오늘 술값은 내가 낸다고 얼마 되지도 않는 먹걸리 값을 두고 걱정 말라고 안심시키니 술집 주모가 말끔해진 나의 모습이 신기한지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술기가 오르는 것만큼 나의 마음도 부풀어갔다. 술집을 나올 때에는 모두 비틀거리면서 제 갈 길로 손을 흔들며 뿔뿔이 가버렸다.
혼자가 된 나는 길가에서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지닌 얼마의 돈을 믿고 인근에 있는 3류 여관에다 하루 저녁을 묵기로 이미 마음을 결정하고 있었다. 온종일 피로했던 몸은 술기 때문인지 금방 밤을 새게 하였다.
나는 그날로 사직동 쪽에다가 당분간 있게 될 하숙을 구하였고 나의 서울생활에서 부딪쳐야 할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날 나의 하숙집에는 당의 젊은 동지들이 여러 사람 찾아왔다.
값싼 소주와 오징어 다리 안주가 시간의 흐름에서 빈속인 배 속에 열기를 올린다.
세상에 대한 불만들이 터져 나온다. 이야기는 당직 개편에 대한 우리 주변의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일을 벌리려고 했다. 무엇 때문인지 한 사람 두 사람 흥분하기 시작한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웬일인지 이런 난처한 문제를 나에게 떠넘기려고 일을 꾸민다. 나는 당시 모인 사람 중에 가장 나이가 연소했다. 그런데도 흥분은 저희가 하면서도 나의 눈치만 살핀다.
그 날 오후 늦게 당사의 사무실이 지난번 있었던 사무총장의 독자적인 인사 때 불만으로 중앙당 중견 간부들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런 행동을 타협적으로 처리하자고 만류하려던 당 최고위원의 설득도 실패하자 당의 원로들이 당사를 나갔다. 당사의 출입문이 안에서 걸렸다.
당시 당의 사무차장이었던 이강백 동지는 단식 제의를 하자며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아무도 밖에 나가지 말자고 제의를 했다.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런 의견에 더욱 흥분을 하는 것이었다.
나도 당의 형편에 흥분을 느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나약한 당직자들의 형편에 딱한 마음도 생겨났다. 앞일을 대비하지 못하는 지도층의 사정이 일을 만든 것이다. 흥분된 사람들은 어디서 구한 것인지 술을 마신다.
밤은 깊어갔고 현실에 대한 만족보다 서글픔이 나의 마음속에 쌓여 갔다. 무엇인가 말을 해야 한다는 분노가 생겼다.
나는 마루바닥을 훔치는 걸레의 나무자루를 뽑아 들었다. 술에 취한 채 입을 열었다.
「이번 사태는 현직 국장단의 잘못이며 그러니 각 부서 국장들은 반항하면 죽여줄 것이니까 앞으로 나와.」
나는 고함을 지르며 주위에 침묵을 요구했다. 그때 나의 험한 표정을 보고 반발하려는 국장들도 있었지만 아우성을 치며 좋아하는 나의 지지자들 때문에 아무도 개인적으로 대들지는 못했다.
나는 주위의 현직 국장들을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게 하였다. 서울생활에서 눈치만 남은 사람들이라 어쩔 수 없는 위험을 느낀 때문인지 굴욕을 느끼면서도 몇몇 국장들은 나의 엄포에 눈치를 살폈다.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아무도 식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어제의 제의에 밤이 새어도 굳게 닫힌 문을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종로경찰서의 정보과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두 명의 정보 형사가 평소 자기네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내려고 하였다. 우리는 당내의 문제에 외부가 개입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면회를 사절하자 경찰관들이 돌아갔다.
당의 최고위원이었던 이동화 선생께서 24시간 만에 이런 일이 생긴 사태에 대하여 정중한 사과의 말로 우리에게 이성으로 돌아가라고 타일렀다.
당 사무총장이며 당직개편에 독자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 몽 선생은 현실을 인식하고 당 사무총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제의를 했다.
단식 농성은 그런 것을 확인하고 끝이 났다. 모든 당직자의 사퇴서가 제출되었다.
전 사무총장이었던 이 몽 선생은 나를 개별적으로 다방으로 불러내어서 매우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자네가 청년국장의 가장 적임자였지만 현주소지가 부산이었기에 또 당시 부산에 있었기 때문에 서울 출신을 내정하였던 것이라고 하면서 앞으로 남자답게 서로 그런 문제는 잊어버리자고 화끈하게 나왔다.
나는 비로소 이 사람도 그릇이 크다고 느끼며 하루 동안에 대한 일보다 앞으로 당을 위해 노력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두 사람은 서로 거북한 마음들을 금방 씻어버렸다.
전 사무총장과 헤어진 나는 이틀 만에 비지백반 한 그릇으로 속을 달래며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걱정을 했다.
대중당 정치위원회가 다음날 긴급히 소집된 결과 제출된 국장단의 사표가 수리되었고 사무총장 서리에 경북·의성 지구당 위원장인 이원수 동지가 임명되었다.
새로운 당직 개편과 더불어 당의 살림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사직동에 있던 하숙에서 나오면, 내자동에 있던 대한 홍익회의 사무실인 김우제 씨의 집과 당사를 내왕하며 한 달 두 달 소일하는 동안 내 수중에는 또 돈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무엇인가 돈 버는 일을 시작하여야 하겠다는 결심을 매일같이 하면서도 정작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동지들과 만나서 대화가 시작되면 다급한 생활문제에 대해서는 잊혀지는 것이었다.
무익한 꿈속에서 헤매던 어느 날이었다. 결국 나는 보따리를 꾸리기 시작했다.
음력 설날을 며칠 앞두고 수중에 돈이 거덜이 난 채 겨우 부산행 기차를 타게 된 것이다.
나에게 닥친 사정을 모르는 동지들은 내가 없으면 당의 혁신이 안 된다고 붙들었지만 누구의 말도 나의 마음속에 감동을 주지 못했다. 정말로 나는 서울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조국을 사랑했고 소속 정당을 사랑했고 동지들을 사랑했다. 핑계 때문에 남을 수 있는 처지라면 무슨 핑계든 찾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형편은 정이 듬뿍 든 동지들과 나를 떼어 놓았다.
내가 서울을 떠나는 날 당의 동지들과 그동안 사귄 당 외의 친구들이 10여명이나 서울역까지 배웅을 나와 주었다.
서로가 말 못하는 사정들 때문에 역전 근방 싸구려 술집에서 안주 없는 소주잔에서 위안을 찾으려 애썼다.
최희수 동지가 자기 형편에 무리를 해서 기차표 한 장을 구하여 나의 손에 꼭 지어주며 섭섭한 표정으로 설 쇠고 올라와 같이 활동하자고 떠나는 날 위로해준다.
신민당의 총재비서로 있던 이경식 동지가 주간지 두 권을 사주며 차안에서 읽으라고 내밀었다. 서울역에는 떠나는 사람들과 들어오는 사람으로 들끓고 있었다.
배웅해주러 나온 동지들은 차표가 개찰되는 출구까지 따라와 힘찬 악수로 나의 심란한 마음을 위로했다. 나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지정된 나의 좌석을 찾아 걸어갔다.
금방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창밖에는 불빛이 어둠 속에서 빠르게 지나쳐버린다.
내일 아침이면 기차가 부산역에 분명하게 도착되겠지 하고 당연한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입석표를 산 사람들이 달리는 기차 안에서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려고 의자 옆에 기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의 옆 자리에는 미인이라고 말하기에 적당한 젊은 여인이 곱게 눈을 감고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의 마음에는 이성과 자리를 같이 하게 된 젊음 때문인지 자꾸만 어떤 파문이 일어나려고 한다.
차 타기 전에 마신 술이 취하지 않고 말똥말똥 정신을 깨워갔다. 주간지를 펼쳐보는 마음 가장자리가 자꾸만 주간지 위에서 여인한테로 시선이 옮겨갔다.
수원역을 통과한 기차가 어둠 속에서 더욱 속력을 더하며 레일 위로 미끄러지는 바퀴소리가 귀에 거슬리게 들렸다.
야릇한 흥분이 이는 속에서 주간지의 책장만 바쁘게 넘기며 옆 좌석에다 대고 말을 붙였다.
「부산까지 갑니까?」 속이 보이는 말이 입에서 튀어 나왔다.
여자가 그 말을 듣고 시선을 돌리며 내 쪽으로 고개를 끄덕거려 준다.
몇 마디의 대화가 그때부터 그 여자와 나 사이에 오고 갔다. 그런데 금방 나는 말문이 막혀버린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떤 아쉬움이 자꾸만 나를 자극했다.
여자와의 대화가 계속될 수 있다면 내 마음도 기차가 달리는 동안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억지로 또 말을 만들었다.
「우리들의 인연은 이 기차가 종착역에 닿으면 끝나겠지요.」
여자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을 해주었다.
그런데 또 말문이 막혔다.
이젠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할 수 있는 적당히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만 나는 실례되는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의 인연이 끝나기 전에 한 번 유혹해도 되겠습니까?」
순간적으로 말을 해놓고 내가 너무 경망한 말을 한 것이 아닌가 후회했다.
여자는 오히려 표정도 변하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자신 있어요? 하는 대답에 나는 금방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실패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고 급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한 나의 대답일까. 여자도 나도 서로 말을 해놓고 웃었다.
조치원을 지나는 기차는 속력을 더 내며 달린다.
기차를 탄 사람들은 밤이 깊은 탓인지 거의가 졸고 있었다. 나의 입도 더 할 말을 찾지 못해 닫혀버린다.
대전까지 열차가 달리는 한 시간 가량 나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기차가 대전역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이 많이 기차에서 내린다. 기차가 대전역을 출발했을 때는 입석 승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기차 안은 비기 시작했다.
옆 좌석의 여자는 무엇인가 혼자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열차 안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이 옆을 지나갔다. 나는 그 물건을 파는 사람을 불렀다.
2홉들이 소주 한 병과 오징어 한 마리를 돈을 내고 샀다. 금방 오징어 다리를 찢어서 입속에 물고 씹었다. 마개를 딴 술병을 입에다 대고 호기를 부리며 용을 썼다.
굉장한 알콜기운이 몸에서 생겼다. 금방 속에서 불이라도 붙을 것만 같았다. 속이 알콜기운에 메슥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정신이 점점 몽롱해졌다.
나는 나의 팔을 뻗어서 옆 자리의 여자 어깨 위에 걸쳐버렸다. 깜짝 놀란 여자가 토끼 눈이 되어서 무엇 하느냐 고 항의를 했다.
나는 술내가 풍기는 입을 벌리며 이제 슬슬 유혹해 보는 것입니다 하고 말을 내뱉었다. 막무가내인 나의 행동에 여자는 오히려 가만히 있었다.
힘겹게 기차가 추풍령을 오를 때 우리 두 사람은 옛날부터 사귀던 사람처럼 부담 없는 대화가 오고 갔다. 다정하게 자리를 좁혀 앉아 상대에게 기댄 채 힘든 하루 밤을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속에는 알지 못하는 아쉬움이 일어난다.
기차가 조금 천천히 달렸으면 하는 기대보다 한 정거장 한 정거장 역을 통과하는 열차가 너무 빨리 달린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출발역에서 생긴 종착역까지의 인연이 순간의 아쉬움을 쌓으며 결국 기차가 부산역에 닿게 했다.
열차에 탔던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모두 일어나 출구 쪽으로 나아갔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어깨를 부딪치며 역의 광장까지 나왔다.
광장에는 희미한 아침의 먼동이 트고 있었다. 내가 먼저 말을 끄집어냈다.
「우리 두 사람의 인연은 끝난 것입니까?」
여인의 얼굴에는 서운한 표정이 지나가는 것 같더니만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나의 물음에 고개를 숙였다.
「참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안녕!」
나는 큰 가방을 든 채 바쁘게 길 건너를 향해 뛰었다. 여인은 한참 동안이나 이런 철부지 같은 나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는 새벽에 운행하는 버스 위로 올라갔다. 차 안은 이른 시간 때문인지 승객이 없이 한산했다. 버스는 달리기 시작한다.
창을 통해 나의 시선은 광장 쪽으로 여인을 찾아보았지만 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정말 무엇인가 아까운 물건을 잃었을 때 느끼는 아쉬움이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의 나의 행동이 자꾸만 머리에 떠올랐다.
아침이란 강렬한 빛이 도시를 비추자 나는 다시 현실이란 소용돌이 속에 묻혀 들기 시작했다. 비릿한 바닷가의 바람이 나의 얼굴에 부딪힐 때마다 내 마음 속을 지배하던 이상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다시 나는 방 문제에 대한 현실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외투를 가지지 못한 나의 나들이는 겨울이 무척이나 춥게 느껴졌다.
이곳 부산에는 나를 위로해 줄려거나 도울려는 사람은 없었다. 내 스스로 현실이란 문제에 무조건 뛰어들어 부딪치는 것뿐이었다.
하숙비 조달을 위해 체면이고 무엇이고 팽개치고 나니 나에게 떨어진 일자리란 게 아침나절 여자들이 일하는 미장원을 찾아다니며 위생비누 같은 걸 배달하는 것이 생겼다.
친구들의 사무실을 전전하며 필요한 일 거리를 찾으며 1972년의 봄을 맞았다.
나의 가슴 속에는 환상처럼 떠오르는 새로운 애정이 쌓였다.
조국을 위해 죽은 영웅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후세에 이름을 남긴 선인들의 행동이 제멋대로 머리에 떠오른다.
뜨거운 피가 온몸에 솟았다. 나의 생활은 오직 떳떳한 생각 한 가지만으로 현실을 멀리하며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어느 날이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뉴스가 거리를 흥분시킨다.
현직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이라는 사람이 서슴없이 「나 김일성을 만나고 왔소. 평양 갔다 왔소.」하고 말한 것이다.
나라 안이 금방 단 한 사람의 이야기에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싶어 흥분이 되었고 매스컴은 이런 문제를 무슨 위대한 계기가 온 것처럼 떠들어 대었다.
나는 금방 나의 오장육부 전체가 차가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또 이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두렵고 어두운 마음이 생긴다. 남북한 양쪽의 위정자들의 의중에 대하여 어떤 실소가 생기기도 하였다.
내 자신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러 놓은 것 같은 낭패한 마음이 생겨나기도 했다. 나는 결코 이런 현상에 대하여 신에게 감사할 수 없는 예감뿐이었다.
한 사람이 수천만 명의 동포를 우롱하려는 재주에 나의 양심은 감동도 기대도 없었던 것이다.
답답한 것은 양심을 그냥 지니고 살자니 눈앞에서는 순박한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일이 생각나서 안타까운 마음만 더 할 뿐이었다.
출세를 할 만큼 해놓고서도 더 출세를 하겠다고 억지를 부려대는 사람들 꼴을 볼 때는 양심이 부족한 자가 욕심만 많아가지고 현대판 진시황제가 되겠다고 서두르는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예감을 느끼지 못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이 기회에 출세를 해볼 모양인지 어떤 자는 이런 일에 박수를 보냈다.
나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이런 일을 목격하면서 외톨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두려운 예감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 커져갔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던 어느 날 세상을 또 한 번 놀라게 하는 뉴스가 생겼다.
국회가 국회의원들의 국정감사 기간 중에 해산되었다는 언론의 딱한 보도였다.
방송들은 무엇 때문인지 이런 일이 국가를 구하는 일이라고 억지 선전을 했다.
어쩌자고 이 사람들은 또 혁명을 하는 것인지 주위의 이야기가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당장 달라지는 것은 정권의 선전은 들을 수 있어도 국민의 의사는 매스컴 같은 곳에서 들을 수가 없었다.
말 많은 사람들이 입을 닫았는가, 반복되는 슬픈 역사의 전개 앞에서 젊은이의 마음속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자꾸만 막혀버리려는 목구멍 속에서 억지로 말이 튀어 나온다.
나의 양심은 이런 일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18. 「유신」이라는 혁명
어제의 일이 옛날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긴장을 감추려고 표정을 꾸몄지만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이 가슴을 짓눌러 왔다.
나의 양심은 누구에게선가 속고 있다는 느낌이 자꾸만 일어났다.
정권은 지능화된 방법으로 무서운 위협들을 남발하면서도 순종하는 사람들한테 공약(公約)은 절대하지 않는 추상적인 주장에는 신을 믿어온 나의 마음속에 언제까지나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 신에 대해 부정하는 마음이 일기 시작했다.
세상 사람들의 심정을 몰라 분연히 절규하고 싶은 혼자의 충동을 억누른다.
이렇게 가슴을 아파하며 한편으로 생활 때문에 쫓기며 며칠이 지났는데 매스컴에서 유신(維新)이란 생소한 말을 들먹이기 시작했다. 선전하는 것인지 단순히 기사화하는 것인지 지면이 특종으로 엮어지고 있었다.
나의 짧은 생애에 있어 처음 듣는 생소한 말인 「유신」이란 것이 어떻게 우리를 기대 속에서 구해줄 것인가 궁금하기만 했다.
권력자나 권력에 빌붙으려는 사람들은 우리의 생존 때문에 유신을 해야 한다지만 그렇게 좋은 유신이라면 사람들은 금방 알게 될 것인데 무엇 때문에 열을 올리며 억지로 사람들의 지친 머리속에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지 어떤 땐 납득이 안 갔다.
거리에 나와 보니 온 거리의 벽에는 공고문이 온통 나붙었다. 법, 법, 정말 이 나라가 법이 없어 이렇게 휘청거리고 있는가. 아니면 결국 이 법의 남발로 망해버릴 것인가. 내 가슴 속엔 표현은 할 수 없지만 슬픔이 솟구쳐 올랐다.
정말 그 사람들 말대로 조국이 번영되고 통일이 될 수 있다면 하는 마음은 아무도 자신 있게 공약하지 않는 내용들의 뒤가 가슴 속에 의문으로 쌓여 버린다. 나의 심중에는 조국의 앞날과 민족의 장래가 어둠 속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일어났다.
스스로에게 생기는 의문을 자기한테 또 물어본다. 이와 같은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머리속에는 별별 상상이 다 떠올랐다. 젊은 가슴 속에 쌓였던 조국과 동포에게 바치고 싶었던 뜨거운 정열이 식어갔다.
이제 내가 이 땅에서 지켜야하는 사명이 무엇일까, 진정 동포를 위할 수 있는 몸이 될 수만 있다면, 안타까워지는 마음속에서 단순하지 않은 조건이라도 찾아보기 위해 잠이 부족한 밤을 만들며 시간을 메웠다.
정말 불행한 사람들...
권력이 무엇이며 인생이 무엇이라고 자신의 영혼을 짓밟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가, 불행한 동포를 위해 헌신하지 못하고 온갖 원성과 우려의 말에 귀를 막고 진리를 외면하는 슬픈 행동에 걱정이 많은 내 사정보다 더 딱한 그 사람들의 사정에 동정이 갔다.
동포의 권리를 동포를 위해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양심에 공포를 느껴야 했고 어리석은 판단으로 자신마저 망치려는 행동에는 분노를 지나 연민을 느껴야 했다.
더욱이 연일 신문에 발표되는 사회단체와 야당 인사들의 지지 성명들은 나를 허탈감 속에 빠지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소속 정당의 동지였으며 부산의 인근 지구당 위원장이었던 S동지가 오래간만에 나를 찾아왔다. 울적한 심정 속에 지내고 있던 나는 무척이나 반가웠고 그도 반가운 표정으로 나를 대했다.
우리는 다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같이 했다. 그는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야당인사들이 모두 유신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었으니 나도 거기에 동조하라고 했다.
가만히 있어야 별 볼일 없으니 어느 곳으로 찾아가면 된다고 하면서 강력히 권하는 말 뒤에는 잘못하다가는 저들에 의해서 병신이 될 것이라고 위협적인 말까지 했다.
참으로 충격적이고 슬픈 말들이었다. 어떻게 잘못되어 가는 정국을 두고 정치인으로서 반대는 고사하고 무조건 찬성만 하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결국 나의 주위에 있었던 인근 지구당의 동지들도 어떤 이유였는지 지지대열에서 행동을 한 모양이었다.
다음날 신문에는 부산지역의 몇몇 대중당 위원장들의 지지성명이 있었다고 밝혔다.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봐서 예측은 했지만 막상 사실을 눈으로 보니 가슴이 떨리고 왈칵 슬픔이 올라왔다.
견딜 수 없는 허탈감에 안주 없는 소주병을 기울이며 혼자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소리 없는 절규를 내어 놓았다.
「나는 결코 출세나 영달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오직 양심에 따라 사명을 따르기 위해 살아갈 뿐이다.」
이런 소리가 나의 가슴에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는 시험이 시작되었다. 일을 마치고 단골다방에 들어갔더니 면식이 있는 모기관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나를 두고 유신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3, 4일이나 끈덕지게 찾아다니며 지지성명을 하라고 권했다.
참으로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불현듯 고함을 치며 발악을 하고 미쳐버리고 싶었다.
동시에 눈만 감으면 당장 어떤 불행을 당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그럴 때는 비통스러운 심경이 생기며 억울하게 당하기는 싫었다.
나의 고집에 면식 있는 기관원은 연일 찾아와서 지지를 강요했고 방법을 설명했다. 당황한 나는 이런 날이 계속되자 변명마저도 힘들었다.
나는 상대 앞에서
「나 한 사람의 지지성명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 이렇게 나를 사람대접을 해주니 지지해 버리는 것은 문제없으나 사람들이 알면 무식한 이 삼한의 지지까지 얻어 유신이 성공했다고 농담처럼 말을 할 것이오.」
나는 어떻게 하더라도 내손으로 지지 성명서는 제출할 수가 없었다.
진리가 없는 곳에 어찌 희망이 있으리요 하는 심정으로 나의 양심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 날도 헤어지는 순간 상대는 인상이 좋지 않았고 한 번 더 기회를 줄 터이니 다시 생각해보라고 위협적인 말이 섞여 나왔다. 그러한 그의 최종 제안에 나는 생각할 시간의 여유를 달라고 하며 그와 헤어졌다.
혼자 남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국민의 자유를 유보하고 헌법의 기능을 약화시키겠다는 조치가 국가를 위하는 길이 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털어버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음속에다 다짐을 한다. 결코 지지는 하지 않겠다고......
마침내 정권은 「유신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쳐 찬반을 결정하겠다고 발표를 했다.
참으로 기막힌 일뿐이었다. 할 테면 그냥 유신해야 하겠다 할 일이지 무엇 때문에 국민까지 끌어들여 같이 놀아나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찬반에 있어 반대자들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억지로 그들은 민중의 자유를 말살하려 하였다. 악인만이 성공할 수 있는 사회가 한 발 한 발 확실하게 다가왔다.
세상의 일이 겁이 나니 말은 한 마디도 못하면서 가슴만 태웠다. 아직도 희망을 지닌 젊은이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는 절망이 가슴을 쳤다.
하늘이 원망스러웠고 내 자신이 산다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리하여 이제는 독한 소주가 나의 유일한 벗으로 변하고 말았다.
술에 취해 있는 나에게 동리의 반장이 투표를 하라고 통지표를 전달해 주었다.
그런 다음날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절대다수의 찬성이라는 발표가 나오면서 차라리 내 마음은 오래간만에 홀가분해졌다. 이것은 결국 견딜 수 없는 기대를 버린 좌절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미련스럽게 조국의 장래가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만은 떨쳐버리지 못했다.
정의에 대해 근본을 버린 사회에 분노가 생겼다.
정말 이 땅에는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현실을 구할 수 없단 말인가? 아니면 유신헌법 같은 희한한 법이 있어야 국력을 신장 시킨단 말인가? 여러 가지 의문들만이 나의 몸을 순간순간 알콜에 시달리게 했다.
인심은 하루가 다르게 변했다. 나의 표정은 무거워졌고 약간 남아 있던 웃음도 사라졌다. 각박한 세상 일이 희망을 잃게 했다.
이런 날이 있고 나니 사람들 속에서는 협잡이 더 많이 일어났다. 믿음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낭패를 당했다.
영리한 사람들의 판단은 법이 상식에서 권력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느꼈다. 옳고 그름을 잊어버린 세상에서 피해자가 하소연할 곳이 없어 또 낭패를 당했다.
정의를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은 견뎌 내지를 못했다.
나는 술병과 더불어 시간을 보냈다. 취하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세상이 싫어졌고 사람이 싫어졌다.
1972년의 겨울은 유달리 춥고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나는 술 때문에 얼굴이 검게 변색되었고 코가 붉게 변해 갔다.
그런 속에서도 계절은 역시 정확하게 바뀌면서 나무에 싹을 돋게 했고 해풍이 훈훈한 1973년의 봄을 세상에서 보게 된 것이다. 이런 봄에 나는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을 안고 몸을 떨고 있었다.
19. 화려한 혼담
나는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누구한텐가 의지해 보고 싶은 단순한 마음을 느꼈다.
술이 취하면 주위가 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마다 머리속에는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라 왔다.
이판에 장가나 들어볼까 하고 나약해진 자신에게 물어보면 웃음이 생긴다.
삼십이 넘은 나이는 이런 생각이 생소하게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 그 날 이후로 생기게 된다. 주위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장가들라는 중신이 들어왔다.
사람들이 권한 상대는 지금까지 상상도 못해 본 그런 여자들뿐이었다.
나도 남자니까 장가를 들어 신부를 맞이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같이 느껴졌으나 이런 일을 치러야 할 나의 형편은 말조차 끄집어내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런 속에서도 어느 날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 되건 안 되건 선이나 한 번 보라고 나의 형편에 구미가 당길 만한 여자를 소개해 왔다.
남자만 똑똑하다면 재산과 가족 관계는 따지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은 여자였다. 또 장가만 들게 되면 주택문제와 방문제도 보장이 생길 만한 그런 가정의 딸인 것이다.
어찌 되었던 중매를 서겠다고 발 벗고 나서는 사람이 여자의 사촌 오빠 된다니까 허황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나의 뱃심에서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이 떠올랐고 하도 권하기에 만나보기로 승낙을 했다.
여자는 일류대학을 나온 부자의 딸이라는 소문이었다.
나는 약속날짜의 시간에 맞추어 부산에서는 당시 제일 큰 호텔이었던 반도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겠다고 한 것이다. 드라이크리닝한 양복을 찾아 입고 이발소를 다녀와서 약속 장소로 나가 보았다. 나의 모습이 평소보다 몰라볼 정도로 단정해 보였다.
여자 쪽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나왔다. 나 한 사람과 상대 쪽 여러 명과의 좌석은 금방 나의 기분을 서먹서먹하게 만들었다. 중매 서겠다던 사람이 그때서야 나와 상대를 소개한 것이다.
상대 쪽 여자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여자의 주위에 앉은 일행들이 나한테 이것저것 질문을 해왔다. 조그마한 말 한 마디도 붙잡고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나의 기분은 금방 자신이 면접시험을 치르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조건이 조건인 만큼 충분히 이해는 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열기와 의욕을 가시게 했고 특히 언뜻 보기에도 연예인 같은 옷차림을 갖춘 여자가 나와 같은 빈털터리와 고생을 하며 같이 살아 줄 사람 같지 않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시간은 꽤나 흘러갔다. 그런데도 상대방 측의 일행들은 말꼬리를 놓으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고 보면 내 꼴이 꼭 사람들의 노리개 감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심중에서 그만 고분고분하던 태도를 바꾸어서 역습을 시도했다.
상대 쪽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얼른 말꼬리를 잡았다.
「제가 한 번 물어도 좋겠습니까?」
여자 쪽의 사람들은 말문을 닫았다. 나의 태도는 당당했다. 상대 쪽에서도 승낙을 했다.
「제 말이 너무 결례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일은 알고 대화가 되어야 하니까요.」
나의 시선은 여자를 쳐다보며 새로운 말을 끄집어내었다.
「밥할 줄 아십니까?」
「몰라요.」
여자의 의기소침해 진 소리에 여자 쪽 가족은 당황해한다.
나는 두 번째의 질문을 던졌다.
「바느질 같은 것은 짧게 말해서 버선 같은 것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상대는 조금 전까지는 당당하던 태도와는 달리 울상이 된 얼굴이었다.
「모릅니다.」
여자 쪽 가족들은 반격인지 변명인지 대답을 대신 해왔다.
대학에서 가정과를 나왔는데 왜 못하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똑똑한 발음으로 분명하게 다음 질문을 했다.
「정말 부잣집 딸이란 말은 진짜입니까?」
함빡 미소를 띠우면서, 이젠 내가 상대들을 놀린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 쪽에서는 그런 나를 멍한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카운터 쪽으로 가서 일행이 먹은 음료수 값을 계산해 주었다. 그리고는 휑하니 호텔을 빠져 나왔다. 그때서야 여자 쪽에서는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소개를 한 사촌 오빠라는 사람이 나를 따라오면서 이형 이형 하고 불렀다.
나는 인근의 현대극장 옆에 있던 골목길의 작은 음식 가게로 들어가서 그 가게의 주인여자인 듯한 중년의 아주머니에게 마실 것을 시켰다. 금방 소주 한 병과 부침 한 접시가 탁자 위에 나온다.
나의 뒤를 따라온 여자의 사촌 오빠가 나의 좌석 앞에 앉는다. 나는 두 개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단숨에 내 앞의 술잔을 입 속에 부어 버렸다. 금방 속이 화끈 해지면서 거북하던 마음들이 잊어졌다.
여자의 사촌이 나의 잔에 술을 따르며 질문을 하였다. 어떻더냐 는 것이다. 나는 서슴지 않고 나의 감정을 그대로 말해 버렸다.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아요. 구태여 대답을 한다면 그릇된 계산일진 모르겠으나 30점이었소.」
매우 쑥스러워진 두 사람은 소주병을 계속 비웠다.
나는 그 날 저녁 알콜 속에 젖은 몽롱한 정신 속에서 낮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내가 좀 너무한 행동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가진 것이라곤 불알 두 쪽뿐인 주제에 남자라고 배알은 있어가지고 찾아온 행운을 바가지 째로 깨어버린 것이라고 웃었다.
가련한 자여. 그대는 자신을 아는가?
우선 아쉬운 마음에 후회도 했다. 그러나 끝난 일이었다.
그런 다음 며칠이 지나니 또 다른 곳에서 나의 구미에 당기는 일이 생긴다. 이번에 알게 된 여자는 부잣집 딸은 아니었지만 미인이었다.
미인대회에 출전해도 될 만한 얼굴과 몸매는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솔직히 겁도 났다. 그런데도 나는 여자와 만났고 여자는 나를 따랐다.
그 집 가족들도 은근히 나를 사윗감으로 붙잡으려 했다. 약혼식만이라도 해 두자는 여자 아버지의 제의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결국 이 여자한테서도 나는 자신을 포기하고 말았다. 약혼 제의를 받고 나는 약속을 어기고 말았다. 이유는 미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속 썩을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나는 나의 행동에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초라하고 비참했기 때문에 좋은 자리가 겁이 났는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이런 일이 있고부터 나의 행동이 점점 무절제 해졌다. 세상일 때문인지 허전하고 쓸쓸한 것을 이길 수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내 마음조차도 내가 알 수가 없었다. 누가 나를 좀 구해주기만을 간절하게 바랬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 가장 큰 고독을 느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술병이 나의 기분을 위로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직장에 나간다는 한 여자를 소개 받았다.
상대는 부자도, 미인도 아니었다. 한두 번 만나보니 부담이 생기지 않았다. 여자도 나를 경계하지 않았고 오히려 직장의 전화번호까지 일러 주었다.
나는 이런 순간 여자 앞에서 내 자신이 뻔뻔해지고 있는 것을 본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그런 내가 아니었다.
제 정신이 들 때는 양심에 두려움이 생겼다. 그러면서도 변하고 있는 자신을 두고 어쩔 수가 없었다.
대낮에도 술을 마셨고 술이 취하지 않으면 더 허전하고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나던 어느 날이다. 오후의 퇴근시간쯤 지난번에 그 여자가 일러준 전화번호의 다이얼을 돌려 보았다. 전화가 금방 나왔다. 전화를 받는 사람이 그 여자였다. 곧 만나기로 약속이 되었다.
나는 전화를 하면서도 술 생각이 나서 인근의 생맥주 집에서 만나자고 했다. 여자는 500㏄잔을 나는 1,000㏄잔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했다.
술과 여자가 나의 앞에 있자 금방 내가 무엇이 되는 기분이었다. 단숨에 큰 술잔을 들이켰다. 여자가 자기 앞에 있는 잔의 술을 나의 잔에 채웠다.
또 잔이 비자 여자는 술값을 내었다. 약간 미안했지만, 그 순간을 넘기니 기분이 좋아지는 듯 했다. 그런 나에게 여자는 말을 건네 왔다.
자기 집까지 좀 바래다주겠느냐고 한다. 나는 생각했다. 주머니에다 손을 넣었다. 차비가 얼마나 나올 것인지 신경이 쓰였다.
광복동에서 동래까지 거리를 생각하면 자꾸만 마음에 부담이 생겼다. 그러나 나는 대답을 해주어야 했다.
「차비를 나보고 부담하라고 하지 않으면 용기가 있습니다.」
여자는 웃었다. 우리는 잔이 빈 테이블에서 일어나 나란히 밖으로 나왔다.
빈 차를 잡기 위해 길가에 같이 서게 되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보며 지나간다.
여자가 빈 차를 먼저 보고 세웠다. 나는 여자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택시는 신나게 동래 쪽으로 달렸다.
약간의 주기가 오른 나는 눈꺼풀이 감긴 채 졸았다. 차가 멈추는 충격에 눈을 떴다. 목적지에 다 온 것이다.
나는 다음의 나의 행동을 모르고 있었다. 빈 택시는 두 사람을 내려놓고 떠나버렸다. 이제 여자의 동리까지 다 왔으니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때 망설이고 있는 나에게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여자를 바래다주는 것은 집 앞까지 바래다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내 생전 이런 경험을 가진 적이 없어 여자의 말이 맞으려니 생각하며 신사도를 지킨다고 말 한 마디 못하고 여자의 꽁무니에 붙어 골목길을 따라 들어갔다.
여자의 집은 좀 외딴 곳에 있었다. 사람이 집 근방에 접근하는 것을 안 그 집 개가 요란히 짖어댄다. 환한 전등 빛이 집 앞을 밝게 비추었다.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그 집 식구들이 나왔다. 이런 순간에 나의 행동은 어색하게 변해버린다. 숨겨 둔 비밀이 탄로 났을 때의 경우처럼 당황해졌다.
그 집 가족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처음 보는 나를 유달리 주시하며 잠깐 집 안에 들어왔다가 가라고 붙잡는다.
분위기가 이리되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낚시에 걸린 물고기 신세랄까, 마음속에는 두려운 것이 생기는 데도 방 안까지 들어갔다.
여자가 자기 집 식구들을 소개했다. 나는 여자의 아버지라는 사람 앞에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그 집 가족들 앞에서 내 변명을 좀 했다.
방 안에는 저녁식사가 끝나는 중이었는지 상이 그대로 차려져 있었다. 여자의 집 식구들이 나에게 저녁식사를 어찌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먹었다고 말을 했다.
그때 여자의 아버지가 술을 가져오게 한다. 닭을 볶은 안주와 소주가 상 위에 올라왔다. 그 집 식구들이 전등불 밑에서 초면인 나의 얼굴을 주시했다.
검게 탄 얼굴, 붉어진 코, 앞니가 빠진 치아,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나의 모든 것을 슬금슬금 훔쳐본다.
여자의 아버지는 나에게 자꾸 술을 권했다. 나도 어지간하게 마시는 편이었지만 그 영감님도 주량이 상당한 편이었다. 점점 술이 취해왔다.
주기가 오른 영감님은 이말 저말 물었다. 이 주사 나이가 몇이요 하며 먼저 생년월일을 묻는다.
손을 펴서 손가락으로 육갑을 짚어본다. 여자의 어머니가 붉은 빛을 내는 나의 딸기코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한 마디 거든다.
「술을 좋아하는 기요?」
나는 자꾸만 눈꺼풀이 감기려는 것을 참으면서 대답을 억지로 했다.
분위기는 이야기 때문에 당장 가겠다고 일어날 형편도 못되었다.
여자의 아버지가 자꾸 문제를 만들며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마다 나의 형편을 뻔히 알면서도 사실을 수월하게 대답해 주었다.
손으로 육갑을 짚어 보고 난 영감님이 자기 딸을 어떻게 보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는 술기운에 좀 더 솔직하게 말꼬리를 뺀다는 것이 결혼할 준비가 안 되었다고 대답했다. 그럼 무얼 하느냐 고 질문을 한다.
직장은 없고 돌아다니며 브로커 노릇이나 하고 산다고 했다. 영감님은 나의 숙소가 어디냐고 물었다. 영도의 어느 곳이라고 누나 집을 가르쳐 주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나를 놓아 주었다.
나는 그 집을 나왔다. 밤은 늦어 있었다. 그 집을 나오는 나의 머리속에 이제 이 여자와도 만나지 못하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허전해지려는 마음속에 떠올랐다.
큰 길까지 걸어와서 영도 쪽의 버스를 타니 긴장이 풀리면서 정신은 흐리멍덩해져 갔다. 나는 차 안에서 실수하지 않을까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용을 썼다.
아침이 되어서야 어제 저녁에 용하게도 누나 집까지 오게 된 사실에 스스로 감탄만 했다.
다음날 내가 없는 사이에 여자의 친척이 된다는 어느 고등학교 교사와 여자의 남동생인 고등학생이 나의 말을 확인하기 위하여 누나의 집을 찾아 왔더란다.
또 그 다음날은 여자의 어머니가 누나 집으로 찾아와서 나와 자기 딸과 혼인시키자는 말을 한 모양이었다.
장가들 나이가 넘었던 나를 생각할 때 형편 같은 것은 잊어버리고 일류 회사의 여사원이란 말에 덕이나 생길까봐 장본인인 나한테는 상의도 없이 누나가 여자의 어머니와 함께 용하다고 이름 난 사주쟁이 집으로 물으러 갔다.
두 여자가 결정한 결혼 날은 사주쟁이가 좋다는 날짜로 정하다 보니 15일도 안 남아 있었다. 나는 내 심중을 모르고 나와 상의도 없이 정한 여자들의 행동에 배짱을 부리고 싶었지만 너무 급박한 날짜 앞에 걱정이 생겼다.
나의 수중에는 가진 재산이라고는 5만 원 정도 현금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누나가 일을 벌여놓고 또 날 장가보내야겠다는 편지를 써서 시골의 가난한 누나들에게까지 띄운 모양이었다.
부모 없이 자랐지만 똑똑하다고 시골까지 소문이 난 동생 장가든다는 전갈에 누나들이 나의 형편을 생각하며 내려왔다.
아무 준비가 안 된 나의 앞에 봉채를 보내야 할 날짜가 3일 앞으로 닥쳐온다.
남매 중에 제일 어렵게 살던 혼자 된 큰 누나가 값싼 일제시계를, 중간 누나가 황금 석돈짜리 목걸이를, 손위의 누나가 백금반지 석돈으로 예물은 타협이 이루어졌다.
일가 집에 맡겨 두었던 돈 12만원을 뺏아가면서 이번만은 꼭 갚아 주겠다고 한 달 전에 나를 그렇게 성가시게 했던 형님도 8만 원을 내어 놓았다.
8만 원으로 봉채를 뜨려고 하니 애가 탔다. 옷감 한 벌 값이 5만원이나 더 되는 것이 많이 있었으니 싸구려 옷감으로 격식을 갖추기에도 부족했다.
나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옷감에다 돈을 맞춘 것이 아니고 돈에다 옷감을 맞추다 보니 흠이 있는 불량품을 사서 넣어야 했다.
뱃심 좋은 나도 봉채 짐을 뜨면서는 서글픈 자신을 숨길 수 없는 마음이었다.
다음날 나는 마지막으로 신부가 될 여자와 화장품 값이 그렇게 비싼지 이해가 안 되었다. 화장품 한 세트의 값이 6만 원이 넘었다. 그 날 나는 그냥 신부될 여자를 혼자 돌려보냈다.
다음날은 뒷날로 닥쳐온 봉채 날을 생각하면서 국제시장 거리를 혼자 어슬렁거리며 사방을 살피며 다녔다. 나의 발길이 국제시장의 중간 지점까지 가게 되었다.
길가에는 장사꾼들로 사람의 발길을 막았다. 나는 그곳에서 어떤 구루마 위에 진열된 화장품들을 보게 되었다. 당장 나는 그 물건들의 주인더러 가격을 물어 보았다.
구루마의 주인은 남자가 여자의 화장품 가격이 얼마냐고 하나하나 물으니 이상하게 쳐다보면서도 대답을 하였다. 어제 상점에서 물었을 때보다 너무 값이 쌌다.
나는 그 사람한테 물었다. 여자들이 화장할 때 꼭 쓰는 것만 이야기 해보라고 했다. 구루마의 주인은 어쩌면 손님을 만났다 싶어 금방 그 태도가 조금 전과 달라진다.
나는 이름도 모르는 화장품 여덟 개를 낱개로 샀다. 진짜건 가짜건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7,500원이라는 그 가격이 당장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해서 봉채 짐은 꾸려지게 되었다. 이제는 날 받아 좋은 날 예식장에만 가면 되는가 싶었다.
우선 신부될 여자를 만나 상의를 하였다. 예식장은 손님이 많이 올 것 같으니 큰 걸 구하라고 하며 신부될 여자한테 아예 일임을 했다.
여자는 나의 허풍을 듣고 대단한 줄 아는지 혼자 나다니며 시내의 예식장을 수소문해서 좌석 수가 제일 많고 홀이 크다고 소문이 나있었던 남포동의 제일예식장 3층을 예약했다고 나한테 알려왔다.
결혼 4일전에야 청첩장을 찍었다. 400여장의 청첩장을 인쇄소에서 찾아와서 신부 측과 반반인 200여장씩 나누어 가졌다.
막상 일을 당하고 보니 이 청첩장을 누구에게 가져다주어야 할 것인지 막연히 생각할 때보다도 당황해진다.
누구도 이런 나의 딱한 입장을 대신해 줄 사람이 없었다.
20. 나 장가갑니다
온종일 나는 한 묶음의 청첩장을 몸에 지닌 채 나의 결혼식에 시간을 내어 줄 사람들을 찾아서 길을 헤매야 했다.
「나 장가갑니다.」
금방 수줍어져 버리는 마음을 가지고서도 상대 앞에서 힘을 내 청첩장을 내어 밀었다. 그럴 때마다 상대방은 나이든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장가간다는 말에 축하한다면서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후가 되면 조심을 해도 극성스런 사람들의 행동과 함께 술이 취하게 된다.
나머지 청첩장 돌리는 일은 다음 날로 미루면 되었지만 딱한 생각이 다음 날 생기게 되는 것은 시간이 나의 사정 따위에 머물러 주지 않고 지나버린다는 것이었다.
3일 간을 뛰어다니며 돌린 청첩장 수도 헤아려 보면 70여장 밖에 되지 않았다.
드디어 내일로 장가가는 날이 다가왔다.
내 사정은 이제 새 신랑의 모양을 가꾸는 일들로 서둘러야 되게 된 것이다. 목욕도 하고 이발도 해야 했다.
결혼식 시간이 임박하자 걱정이 쌓이기 시작한다. 큰 예식장에 하객이 없으면 허전할 것이라고 생각해 보니 창피한 마음까지 생기게 되었다. 아무리 머리를 짜도 별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초조한 마음이 고통으로 변하여 어떻게 해도 당할 일이라면 시간이 좀 빨리 가기 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한낮이 되었다. 하루 전의 시간인데도 서울에 살던 동지들이 10여명 나의 장가간다는 소문을 듣고 결혼식을 보려고 내려왔다. 또 고향에서 남매와 사촌들이 형님 집을 찾아왔다.
1973년 5월 13일 정오의 제일예식장 3층 특실에는 400여석의 좌석은 생각할 수 없었던 기적이 일어났다. 축하객으로 좌석이 차버리고 통로마저 메워졌다.
신부 측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왔지만 청첩장을 받지 않고 나의 장가간다는 소문을 듣고 참석해 준 사람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식순을 진행하는 사회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축하객의 바쁜 발길을 붙들었다.
박수와 웃음이 계속 터져 나왔고 600여 명의 하객은 식장의 분위기에 매료되어 다른 집에 참석하려던 사람들까지 구경을 하는 일이 있어 식장의 입구까지 초만원 사례가 된다.
대중당 간사장의 축사는 「이 나라의 가장 뛰어난 젊은이의 결혼식에 참여해 준 내빈께」라는 서두로 시작되어 하객들의 마음을 사로 잡아주었고 새 양복으로 단장한 신랑의 모습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그 순간만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결혼식은 상당한 시간을 끌며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일가친척 앞에서 예단을 드리는 것을 마치니 나와 신부는 신혼여행 길에 나서는 것뿐이었다.
신부의 직장이었던 은행에서 형편을 보아 제공해 준 승용차에 신랑의 들러리와 신부의 들러리가 같이 따라와서 시간을 메워 주었다.
우리를 태운 자동차는 신혼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제주행의 비행기를 타게 될 시간까지 일행들을 싣고 양산 통도사와 해운대 등을 돌아주며 적당한 곳에서는 차를 멈추어 기념촬영을 하게 해주었다.
오후 6시가 가까워서야 비행기의 이륙지점인 수영비행장 앞에서 옆에 있던 사람들은 나와 신부만을 비행기에 타게 하고서는 돌아갔다.
금방 저녁노을이 지려는 여름철 하늘 위로 폭음을 내며 비행기가 떠오른다.
창문을 통해 비행기 안에서 밑으로 내려다보면 바다와 섬들이 간간히 보였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신랑이 된 것이 꼭 동화책의 이야기같이 실감이 가지 않았다. 옆 좌석에 앉은 신부의 얼굴을 쳐다보면 별 생각이 다 생긴다.
이 여자가 부도(婦道)를 알려고 한다면 고생깨나 하며 견뎌가야 할 것이라고 나의 처지를 생각했다. 내가 몹쓸 짓을 저지른 것 같은 미안한 마음이 떠올랐다.
또 다른 생각은 어릴 때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났다. 지금까지 살아 계셨더라면 오늘 같은 나를 보고 얼마나 대견해하며 좋아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서운한 여운을 남긴다.
비행기가 하늘에 뜬지 30분도 안 되었는데 비행기 안에 탄 여자 승무원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 나왔다. 조금 후에 목적지에 착륙하겠으니 승객들은 안전벨트를 몸에 매라는 방송을 했다.
창 밑에 나타난 바다 위의 육지를 내려 보며 이제 제주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천리 길도 금방 닿고 보니 새로운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도 더 빨리 제주에 온 두 사람이 공항의 출구를 나오니 어두워지고 있는 주위에서 누가 아는 척을 했다.
공항의 출구 쪽에는 신부의 여고 시절 동창이었던 친구가 그 사람의 남편 된다는 사람과 함께 우리 두 사람을 마중 나와 있었다. 여자들의 소개로 낯선 곳에서 만난 남자와 인사를 했다.
박 선생이라는 상대는 자기까지 네 사람인 일행을 택시에 태워 어디엔가로 안내해 갔다. 차 속에서 여자들이 너무 정답게 이야기를 하니깐 남자들도 서먹서먹한 것이 사라진다.
택시가 선 곳에서 쳐다보니 눈앞에는 용궁횟집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박 선생은 우리 일행을 그곳으로 안내해 놓고 네 사람이 실컷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자꾸 주문했다.
나는 초면에 너무 신세가 되는 것 같은 부담감이 생겼지만 남자끼리 권하는 술잔이 비워지면서 거북스런 마음도 사라져 갔다.
좌석의 분위기가 신혼여행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오고 갔다. 두 사람은 제주에서 지낼 시간을 위해 약간의 도움 되는 말을 가르쳐 주었다.
또 오늘 밤 우리 둘이 지나게 될 밤을 걱정하면서 요즘은 신혼 철이 되어서 그런지 제주시내에 하나 뿐인 KAL호텔은 방 구하기가 힘이 든다고 말들을 했다. 우리는 그때까지 숙소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두 사람은 제주에 처음 온 우리한테 숙소를 정할 수 있도록 그 사람들이 아는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또 다음 날의 스케줄인 신혼여행에 대한 요령까지 일러주고는 작별을 했다.
두 사람만 들게 된 방 안은 신혼의 첫날밤을 맞게 해 준 것이다. 신부가 여간 싹싹하게 보이는 탓만도 아니었지만 결혼을 하였다는 하나의 이유 때문인지 나의 마음속에는 오래 사귄 동지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처음 느낀 감정은 「결혼식을 올린 남자와 여자 사이가 이렇게 되는 것이구나?」하는 느낌이 새롭게 떠올랐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아보는 기분이 들었다. 신부와 나는 다음날의 여행계획을 생각했다.
박 선생 내외가 가르쳐 준 이야기를 생각하며 방 안에 있는 전화로 교환 보는 사람한테 부탁을 하여 택시회사에 예약도 하였다. 8,000원에 하루 동안 택시를 대절하기로 하고 아침 일찍 숙소 앞에 차를 보내오기로 약속이 된 것이다.
두 사람은 할 일이 없어졌다. 그때서야 긴장이 풀어졌다. 잠자리에 들었던 두 사람은 곤한 의식 속에서 전화벨소리를 들었다.
눈을 뜨니 날이 샌 아침이었다.
숙소의 현관에는 예약한 택시가 도착해 있었다. 두 사람은 아침도 거른 채 바쁘게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렀다. 신부는 얼굴의 화장을 손질했고 나는 옷을 갈아입고 표정으로 신부를 독촉했다.
두 사람이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나오니 숙박업소의 종업원이 우릴 알아보고 택시의 기사를 소개시킨다. 아직 어려 보이는 대절차의 기사는 능숙하게 짐을 받아들고 택시 쪽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자동차는 서서히 제주 시내를 빠져 나가기 시작한다. 시내의 택시가 그곳 사람들의 교통수단이 된 것보다 신혼부부의 대절에 이용되어 온 모양인지 운전기사는 능숙하게 차를 몰면서 저녁 숙박지를 묻는다.
박 선생 내외가 어저께 알려 준 성산포의 일출호텔에 숙박을 정하겠다고 일러주었더니 운전기사가 여행 코스의 스케줄을 설명하면서 제주에 대한 지리를 우리가 모르니까 자동차의 기사가 여러 곳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처음 달리면서 멈추어 준 곳은 제주시의 변두리인 길 옆에 있던 500년 되었다는 소나무 밑이었다.
우리가 지니고 있던 카메라를 받아 든 운전기사는 전문 사진사처럼 우리를 보고 포즈를 취하게 한 후 셔터를 눌러준다.
제주의 전설적 유적지인 삼성혈을 거치면서 차는 5·16도로에 들어 한라산을 가로지른 길을 따라 서서히 움직인다. 금방 녹음이 우거진 한라산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택시의 기사는 예정코스에서 볼 만한 곳이면 차를 세워 주었고 어떤 관광 안내원 못지않게 내력을 설명하면서도 말이 막히지 않았다.
점심때가 되어서 자동차는 서귀포 시내로 들어갔다. 나는 길가의 식당 간판을 보고 차를 멈추게 하여 세 사람이 같이 식사를 시켰다. 신부와 나는 아침 겸 점심을 먹는 것이었다.
밥알들은 까끌까끌 하고 목에 걸렸다. 작은 식당의 밥맛은 음식들이 입에 맞지 않았다.
대절차는 다시 우리 두 사람을 태우고 세 군데의 폭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무리 천천히 구경을 하여도 시간은 오후 세 시가 못되었다.
자동차의 기사가 말을 물어왔다. 제주가 처음인 생소한 우리더러 이제부터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호텔까지의 코스가 끝난 것이다.
택시가 우리 두 사람을 현관 앞에 내리게 하자 그곳에 있던 종업원들이 뛰어나와 짐을 받았다. 나는 두 사람을 태워왔던 기사한테 대절비를 지불하고 차를 돌아가게 하였다.
프론트의 종업원이 어떤 방이 있느냐고 묻는 나를 두고 객실에 대한 선전을 하며 어떤 방을 정할 것인지 눈치를 본다.
나는 요금이 제일 싼 현관 위쪽에 있던 한실로 방을 지정하였다. 객실 담당 여자종업원이 금방 짐을 옮겼다. 두 사람은 그런 안내원을 따라 이층 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호텔의 방안에 들어가자 불안한 일들이 생각났다. 당장 수중에 지닌 현금이 얼마나 우리들의 시간을 지탱할 수 있게 할 것인지 하는 우려였다.
나는 신부더러 수중에 얼마나 돈이 남았느냐고 물었다. 만 원 정도가 남았다고 귀띔을 해왔다. 여분이 없던 돈 중에서 밀감 밭에 들려 선물이랍시고 구한 밀감 상자들이 두 사람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어 놓았다.
계산을 맞추어 보는 나의 머리에는 낭패감이 생긴다. 지불해야 할 호텔의 방 값, 오늘과 내일을 지내야 할 두 사람의 식비 및 또 제주시내까지 나갈 교통요금이 자꾸만 머리에 부담이 되었다.
나는 이런 것을 계산하지 않고 섬으로 신혼여행을 온 것이 여간 당혹스럽지 않은 것이다. 해가 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부와 나는 작은 포구인 성산포의 바닷가 쪽으로 걸었다. 한 곳도 아스팔트가 되어 있지 않은 시골 길은 망태기 같은 걸 걸머진 여자들이 지나는 것 외에는 볼 것이 없었다.
한참 걸었다고 생각하니 물가에는 창고 하나가 나타났다. 더 갈 곳이 없어 길이 막힌 곳에까지 가서 되돌아서야 했다. 비릿한 생선 내음새가 콧가에 묻어왔다.
나는 오던 때보다도 더 느린 걸음걸이로 시골의 동리 쪽으로 눈을 돌리며 발을 움직였다. 결혼식 날 선물로 받은 시계의 바늘이 오후 6시를 가리킨다. 나는 좁은 촌 거리의 이 골목 저 골목을 살폈다.
곱게 화장을 하고 맵시를 낸 신부와 나를 길가에 있던 사람들이 곁눈질로 쳐다본다. 나는 한참을 쏘다녀도 내가 찾고 싶어 하는 집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설마 사람 사는 동리에 그런 집이 없으랴 하는 마음에 몇 번이나 낯선 길을 돌아다니면서도 사람들을 보면 물어 보지도 못한다.
한참이나 헤맨 끝에 한쪽 길가에 「중화반점」이라는 칠이 벗겨진 간판이 눈에 보였다. 나는 신부의 손을 끌며 함께 그곳으로 들어갔다.
작은 동리에 있던 식당의 내부시설은 형편없었다. 사방에는 때자국이 줄줄 흘렀다. 볼품없는 탁자를 두고 신부와 나는 마주 앉았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요리사 겸 주인인 듯 싶은 남자가 두 사람이 앉은 탁자 앞으로 와서 엽차 잔에 물을 따르며 무엇을 시키겠느냐고 주문을 받았다.
나는 주방과 홀 사이에 먼지가 엉망으로 묻어 있는 천 위에 씌어 있는 메뉴들을 살폈다. 한식과 중국음식의 이름들이 너저분하게 많이 적혀 있었다.
손님이라곤 아무도 없는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신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면서도 주문을 받으려는 사람더러 메뉴대로 다 되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상대는 대답을 했다.
신부 몫으로는 육개장을, 내 몫으로는 그보다 200원이 싼 짜장면 곱배기를 시켰다.
신부는 깜짝 놀라며 왜 같이 육개장을 시키지 않느냐고 당황하면서 물었지만 나는 또 변명할 말이 없어서 평소에 밀가루음식을 좋아한다고 엉뚱한 거짓말을 꾸며 보았다.
음식은 두 사람을 한참 기다리게 한 후 나왔다. 도시의 음식과는 맛에서 차이가 났다. 그런데도 하루 동안 두 끼 째 먹는 시골 짜장면이 나한테는 오히려 별미처럼 느껴졌다.
신부도 좀 시장하였던지 육개장을 남기지 않고 그릇을 비웠다. 나는 식사가 끝난 후에야 약간 안정감이 생겼다. 이제 오늘 걱정을 덜어버린 셈이 되었다.
식당을 나온 두 사람은 제주도의 저녁노을을 보며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앞 잔디밭에는 신혼여행을 온 사람들과 관광여행을 하려고 온 사람들이 띄엄띄엄 잔디 위에 앉아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도 호텔 앞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주위의 경관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목장의 말들이 멍에가 매이지 않은 채 평화롭게 풀을 뜯는 것이 시야에 나타났다.
주위에는 이제 시간에 쫓긴 어둠이 덮여 왔다. 한 사람 두 사람 나와 있던 사람들이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먼저 일어나 앉아 있는 신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호텔의 객실 쪽으로 걸었다. 우리는 별 말이 없었다. 그런데도 행동과 의사가 잘 통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새벽에 깨우지 않았는데도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아직 주위가 어두웠다. 얼굴을 닦고 몸에 옷을 걸쳤다. 그리고는 호텔 현관을 나왔다.
호텔 바로 옆인 일출봉의 가파른 길에는 벌써부터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져 있었다. 호텔 내의 안내 책자에는 일출봉을 한라산의 축소란 말로 소개했다.
우리는 길을 따라 정상까지 올라갔다.
사방이 밝아왔고 동쪽 바다가 붉게 타올랐다. 둥근 해가 바다 속에서 서서히 올라왔다. 정상에 오른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바다와 해 뜨는 곳에 모이고 있었다.
해는 점점 하늘로 떠올랐고 붉게 끓어오르는 것 같은 동쪽의 바다는 본래의 모습대로 다시 푸른빛을 되찾기 시작했다.
정상을 두고 바가지처럼 움푹 파진 분화구 같은 곳에는 누구의 손길에 의해선지 자연 그대로인지 모르겠으나 푸른 잔디가 잘 조화되어 있었고 산양의 무리가 이곳저곳에서 풀을 뜯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볼 것을 다 본 후에는 올라올 때 힘들었던 가파른 길을 다시 내려와야 했다.
나는 신부한테 아침이나 먹일 참으로 두 사람이 호텔 안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에는 먼저 온 사람들이 띄엄띄엄 자리에 앉아 식사들을 하고 있는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메뉴표를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매운탕 1,000원, 조기구이 2,000원, 메뉴의 가격표시가 나에게 금방 충격을 주었다. 나는 얼른 메뉴표를 제자리에 놓고 신부더러 일어나게 한 후 식당에서 도망치듯 당황하며 객실로 돌아갔다.
결국 아침도 먹지 못한 채 비싼 호텔의 음식 값만 확인하고 말았다. 형편이 이쯤 되니 신혼여행이고 뭐고 다 싫어졌다.
호텔 현관에는 자주 빈 택시가 들어왔다. 나는 그럴 때 현관으로 뛰어갔다. 제주까지 두 사람 얼마 받겠느냐고 택시 운전기사와 흥정을 하였다.
합승을 한다는 조건으로 한 사람당 1,000원씩 2,000원에 제주 시내까지 신부와 함께 짐을 챙겨서 차에다 몸을 실었다. 운전기사는 작은 차인 택시(브리사)에 다섯 사람이나 짐짝처럼 합승을 시킨 후 심하게 속력을 내어 달렸다.
지금 두 사람의 수중에는 차 삯을 제하면 2,500원의 돈 밖에 남은 것이 없다. 신혼여행이 이렇게 힘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나는 신부를 데리고 무사히 부산까지 돌아가는 생각으로 머리속이 가득 찼다. 달리는 차 속에서 다른 합승 손님이 운전수더러 좀 천천히 달리라고 주의를 주어도 나의 입에서는 한마디 말도 튀어나오지 않는다.
차는 상상보다 빨리 제주 시내에 닿았다. 우리는 시내의 KAL제주사무소 앞에서 내렸다. 근방의 식당에서 설렁탕 두 그릇을 시켜 먹고 나니 마음은 빨리 제주를 떠나고 싶었다.
신부가 먼저 내 마음을 아는지 KAL제주사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나한테 그곳 사무소 직원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했다. 2시 비행기로는 표의 교환이 불가능하다고 말을 한다.
나는 우리가 소지한 저녁 비행기 표를 잠시 후인 12시 비행기의 표와 교환하게 하였다. 오전 11시 30분에 비행장까지 사무소의 버스가 운행을 한다 하니 지체할 시간이라야 20여 분간이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사무소의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그동안 신부는 그저께 만난 친구한테로 떠난다고 전화를 했다. 20분은 금방 지나갔다. 공항행 버스는 시동이 걸린 채 사람들을 기다렸다. 공항에 나오니 우리를 제주에서 처음 마중해 주었던 신부의 친구 내외가 또 우리를 전송해 줄려고 그곳까지 나와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의 그런 행동이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었다. 우리한테는 오래 붙들고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 안내방송이 승객의 탑승을 자꾸 독촉해 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신부의 친구 남편과 악수를 나누고 비행기로 올라갔다. 시간이 된 때문이었는지 금방 비행기가 하늘로 뜨기 시작한다.
발밑에 섬들과 바다가 나왔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바다는 행복한 풍경으로 보였다. 조그마한 섬들이 밑에서 나타나고 지나간다. 그때 하늘에 구름이 모이고 있었다.
비행기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흔들리기 시작한다. 자꾸만 불길한 생각에 비행기가 추락하는 것이나 아닌가 불안했다. 기상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그 시간 이후 4일간 육지와 제주간 비행기가 뜨지 않았다) 그러다가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요동을 멈추고 잠잠한 상태로 항로를 잡았다. 얼마 후, 우리가 탄 비행기가 수영공항에 착륙하면서 답답하고 불안하던 조금 전의 감정들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제 신부를 어디로 데리고 가서 재우느냐는 새로운 고민이 또 머리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아무리 머리를 갸웃거려 생각을 하여도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옆에 있는 신부에게 궁한 질문을 하였다. 퇴직금 받은 것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신부는 딱 잡아뗀다. 나는 그때야 나 자신이 이렇게 주변 없는 비굴한 사내인가 느껴져서 부끄러운 마음을 가졌다.
수영에서 가까운 처가가 있는 동래에 먼저 들렸더니 장모와 장인이 무척이나 우릴 반겨주었다. 급히 차려온 음식상을 받으면서 결혼하고 처음으로 배부르게 포식을 하고 형님 집으로 인사를 갔다. 그 집 사람들은 그 날만은 우리 내외를 불편 없이 맞아 주었다.
나는 다음날로 고향에 있는 부모님 선산을 신부와 함께 찾아가기로 계획을 잡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답답하고 애가 쓰이는 일 때문에 형님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축의금이 얼마나 들어왔느냐고 말을 했더니 형은 약 20만 원 정도 들어왔더라 며 궁색한 변명을 하면서도 어딘지 돈을 쓴 곳은 안 가르쳐 주면서 다 썼다며 표정이 달라졌다. 이젠 마지막 걸었던 기대마저도 사라진다.
평소 형의 행동을 아는 나로서는 이런 일로 다투어 보았자 이득이 없는 일이었다. 세상의 인심이 이렇게도 야박한가 느껴진다. 그래도 부조 한 푼 못한 형이 축의금만은 챙겨 돌려줄 줄 알았는데 이제 그런 생각마저도 깨어지고 말았다.
사정이 이러한 상황에 처하면 오히려 마음이 단단해진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아무도 동정해 주지 않는 세상에서 혼자 울어보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워진 운명은 한탄할 곳조차 없었다.
가련한 자신을 두고 내일을 기다리면서 애가 타는 마음으로 잠을 자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날 신부를 데리고 오래간만에 고향을 찾아갔다.
제일 먼저 한 일이 어린 나를 버려두고 세상을 떠나간 두 분 부모님의 무덤 앞에 가서 신부와 나는 절을 했다.
신부가 장만해 간 옷가지를 무덤가에서 불로 태우고 준비해 간 술로 무덤 위의 잔디에다 뿌리니 금방 콧등이 찡하며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 어머니, 아버지 제가 장가를 들었습니다. 신부도 제 옆에 있습니다.'
마음속에서는 자꾸 이런 말들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내뱉지를 못했다.
고향 땅에 살던 누나나 친척들은 나에게 그 순간만은 무척 반가운 얼굴로 장가든 나를 맞이 해주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지낼 것이냐는 말은 한 사람도 묻지 않았다. 모두가 눈치만 남아있던 사람들이라 아픈 말은 피하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밤을 새우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걱정하던 일들이 점점 다급해왔다. 속으로는 안달이 생긴다.
결혼식 날 축의금만 내가 잘 챙겼으면 삭월세방 하나는 구할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에 형이 야속했지만 이젠 다 지난 일이었다. 이럴 때는 나 자신이 얄미워졌다.
어쩔 수없이 신부를 친정에 한 3일만 가 있으라고 말을 해서 보내 놓고 자신은 미친 듯이 시내를 쏘다녔다. 비위가 좋지 않은 나는 어느 사람을 보고도 돈 이야기를 끄집어내지 못했다.
하루가 지났다. 운명의 신은 나를 그냥 외면하지 않았다. 우연하게도 행운이 생긴 것이다. 돈 20만원이 내 수중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나는 그 날 저녁, 동래 처가로 달려갔다.
아내는 나의 일을 생각하며 안타깝게 기다리다가 찾아간 나의 얼굴을 보게 되니 무척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 날 저녁 우리는 처가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고 방을 구하러 다녔다.
당장 생각 같아서는 형과는 좀 멀리 떨어져 살고 싶었다. 처는 동래의 처가 가까운 곳에 방을 구해 보자고 아쉬운 제의를 했지만 나는 서면 근방에서 방을 구하려고 했다.
온종일 서면 일대의 가까운 동리를 훑어도 20만원으로 적당한 방이 없었다. 마침 그때 누님 동리인 민씨 집에서 방이 한 칸 났다고 해서 보증금 20만원에 월세 5천원으로 부엌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방 한 칸을 구해 우리의 신혼살림을 꾸렸다.
아내가 가져온 물건들을 방안에 정돈해 놓고 보니 두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을 만한 공간이 남았다.
끼니때가 되니 아내가 정성들여 지은 푸짐한 상이 들여왔다. 나는 음식상을 보고 처음으로 장가든 보람을 느꼈지만 혼자 살기에도 힘겨운 자신이었는데 또 한 사람 더 짐을 짊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두 사람의 생활을 위해 자신을 수월하게만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수입이 있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찾아다녔다.
고생으로 살아온 나였기에 어려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단련이 필요치 않았다. 한 푼 두 푼 돈이 생기면 아내에게 맡겨 보관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몸이 좀 피곤한 것 같아 집에 들어가 쉬고 싶은 마음에 한낮에 집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아내가 동리 아이들과 함께 방안에 앉아 있었다.
아내도 나와의 생활을 위해 동리의 국민학생들을 모아놓고 과외공부를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을 보게 된 나의 마음은 금방 찡하고 새로운 감정이 느껴진다. 쉬고 싶었던 마음을 바꾸어서 밖으로 나왔다.
신혼생활이 길어지면서 불안하기만 하던 생활은 두 사람의 노력 속에서 조금씩 나아져 갔다. 한편으로 정국은 점점 불안이 감돌았고 민족을 구하겠다던 유신의 선전은 사람들의 정당한 말에도 재갈을 물렸다.
정당법을 내세워 정당의 간판을 내리게 했고 감시와 탄압으로 인재들의 뜻을 짓밟았다.
내가 사랑했던 대중당도 자금의 압박과 가중되는 정권의 박해에서 견디지 못해 결국은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양심을 가지고 있어도 그 양심을 쓸 곳이 없었다. 이젠 정의를 가진 자가 매를 맞아야 하는 시대가 닥치고 있었던 것이다. 쥐를 잡으려 하지 않는 고양이만이 출세할 수 있는 세상을 보며 나는 허무함을 느꼈다.
그런 세상에 성질이 급한 사람들이 자기네의 애정을 믿고 정당을 만든다고 나섰다. 답답한 것을 느끼는 사람들의 관심이 이곳에 쏠렸다.
나의 가슴 속에도 사회에 대한 애정이 마음에 불붙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사람들은 정치를 찾으려는 사람보고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알지 못할 마음만이 뜻이 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정당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경계의 눈총을 받았다.
나는 이 어려울 때 내 양심으로 신당에 참여할 것인가를 며칠이나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일본 식민치하에서 독립 운동하기보다도 더 어려운 제 나라 안에서의 정치운동을 생각하면 처의 얼굴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며칠이나 한 여자와 조국을 생각하다가 결국에는 통일당이란 간판을 내건 신당의 부산 조직책임자였던 박재우 씨를 통해 민주통일당에다가 부산의 제1 선거구인 중구 영도의 조직책 신청서를 신청한 것이다.
나는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며 조금이라도 더 가정에 보탬이 되고자 이곳저곳 뛰어다닌다. 그런 후 1개월이 지났을 때 나의 조직신청서가 조직위원회를 통과하여 결정이 났다는 소문이 인편에 전해왔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박재우 씨로부터 한 번 만나자는 연락도 받게 되었다.
그 시기 나의 사정은 몇 푼의 돈을 벌겠다는 개인 사정이 있어서 몸을 뺄 수가 없었다. 마음은 이 나라의 정치를 구하기 위해 서울행 열차를 타고 싶은데 현실은 나의 행동을 하루 이틀 미루게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신문에 실린 개헌 청원운동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당장 나는 어떤 충동에 사로 잡혔다. 밤새도록 밤잠을 버리고 생각해 본다.
믿고 싶은 사회를 위해 청원해서 될 일이라면 국민이 좋아할 수 있는 법을 독재자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의식이 가슴 속에서 뜨겁게 올라오고 있었다.
마음이 더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하던 일을 버려둔 채 당일로 서울행 열차를 탔다. 서울에 올라온 나는 새로 생긴 빌딩들을 쳐다보며 오래간만에 중심가를 쏘다녔다.
제일 먼저 신당인 통일당 당사로 찾아 들어갔다. 뜻밖에도 이경식 동지를 그곳에서 만났다. 이경식 동지는 그 당에 나오던 젊은 청년지사들을 나한테 소개시키기도 했다. 인사를 나누고 보니 모두 뜻이 통한다.
그들은 부산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이야길 내게 물어왔다. 또 어떤 자는 날보고 부산시 개헌 청원운동 지부장 자리를 맡아서 같이 투쟁하자고 성급하게 조른다.
나는 이런 말을 들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통일당의 사무국으로 들어갔다. 낯선 사람들이 나의 얼굴을 쳐다본다.
나는 당의 사무총장 앞으로 걸어갔다. (당시 통일당의 사무총장은 전 경북대학교 문리과 대학 학장이었던 하기락 씨였다)
내 소개를 하며 인사를 했다. 하 총장의 얼굴이 나의 이름을 확인하자 쫓기는 사람처럼 서먹서먹해 한다. 당장 알 수 있었던 일이지만 어떤 사람의 방해 때문에 완결되어 결정된 사실이 보류로 변해 있었다. 사실을 확인한 나의 심중은 편할 수가 없었다.
내가 통일당을 나오려고 하니 조금 전에 이야길 나누던 통일당의 젊은 간부 당원들이 나를 인근에 있는 다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들은 내게 그들과 함께 같은 일을 할 수 있기를 원했지만 나는 지금 당장 어떤 결심도 이곳에서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내 행동 때문인지 좌석의 분위기가 당장 어색해진다.
나는 무거워지는 마음 때문에 가볼 곳이 있다는 핑계를 내세워 좌석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다방을 나선 나의 마음 한 구석은 쓸쓸했다. 한 마디로 통일당에 걸어본 장래의 기대가 무너진다.
행선지를 정하지 않고 걷고 있었다. 어디로 가본다. 한참이나 쏘다닌 끝에 낙원동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직도 어려운 조건들을 견디며 시골 경로당보다도 초라한 당 사무실을 지키면서도 어려운 행동을 포기하지 않는 통사당의 김 철 위원장께 인사나 하고 별 볼일 없으면 서울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들어선 낙원동의 통일사회당 사무실은 너무나 한산하고 쓸쓸했다.
나의 얼굴을 아는 어느 당원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의 마음이 금방 비통해지려고 한다. 이 땅에서 많이 존재할 수 있는 비극이라 여겼다. 일개 정당의 사정은 너무나 비참했다.
사람마다 여윈 얼굴에 눈망울만 반짝거렸다. 김 철 위원장은 뜻밖에 나의 방문을 두고 함박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어떻게 들었는지 나의 결혼식 이야기부터 끄집어내며 당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 섭섭하다고 말을 했다. 그곳의 간부 되는 당직자들이 나를 중심으로 에워싼다.
위원장실의 소파가 몸을 기대니 삐걱거린다. 찡하는 마음에 이곳 사정이 당장 머리에 떠오른다. 이야길 주고받는 동안 대화만은 누구나 호기가 넘치고 있었다.
나를 아는 그들은 제법 달라진 내 얼굴을 확인하고 마누라가 해준 밥이 좋긴 좋은 모양이라고 농들을 한다. 나도 웃음이 나왔다.
입 하나일 때도 머리가 무거웠는데 입 두 개가 되니 이젠 어깨까지 무겁다고 말을 하니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한바탕 웃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차에 누가 나의 손을 잡으며 차나 한 잔 하자고 끈다. 김 철 위원장도 그렇게 하라고 권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 사람과는 작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나를 다방까지 안내해 간 사람은 이동열 동지와 민주회복 서울특별시 대변인을 맡았던 백 철 동지였다.
나는 한 잔의 차를 마시면서 두 사람으로부터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간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또 소식이 궁금하던 월파 서 민호 선생께서 수송국민학교 건너편에서 통일 연구인협회 사무실을 내어놓고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서울에 올라온 김에 한 군데 더 들릴 곳이 생긴 것이다.
서울에서 지내게 된 하루는 나에게 있어 매우 분주했다. 다방을 나온 세 사람은 뿔뿔이 헤어졌다.
별 생각도 하지 않고 나의 발길은 청진동 쪽으로 향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수송국민학교가 어디냐고 물었다. 청진동쪽 사람들은 금방 수송국민학교를 가리켜 주었다.
나는 내가 있는 주위에서 얼마 안 되는 거리에 큰 간판이 걸린 통일 연구인협회 사무실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분위기부터 위엄이 있어 보였다. 낯선 사람이 나를 붙들고 어떻게 찾아 왔느냐고 용건을 묻는다. 나는 회장님께 인사나 드리려고 왔다고 내 소개를 하였다.
그때 나의 얼굴을 알아본 그 사무실 안에 있던 장재철 동지가 정색을 하며 반긴다. 언제 서울에 올라왔느냐고 채근이다. 나는 새벽에 서울에 왔다고 사정을 이야기를 했다.
주위의 시선들이 나의 얼굴 위로 쏠린다. 장재철 동지는 나를 소파가 있는 쪽에 앉으라고 권하고 손님이 와 있으니 잠깐 기다리라고 귀띔을 했다. 사무실 안에는 선생을 만나러 온 사람들이 더러 눈에 띈다.
얼마쯤 지나니 회장실의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나왔다. 장재철 동지가 회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나를 회장실로 안내한다.
72세인 선생은 건강해 보였다. 나는 선생께 인사를 올렸다. 선생은 나를 자리에 앉게 한 후 차를 시켜오게 했다.
신혼생활이 어떠냐고 근간의 나에 대한 안부를 묻는다. 꼭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인데 미국에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변명을 했다.
나는 선생이 바쁠 것 같아서 잠시 있다가 차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실을 나오니 장재철 동지가 몇몇 그곳에 나왔던 사람 중에서 대학교수와 정치인이라는 사람들을 소개해서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또 그곳에서 우연히 지난 대통령선거 때 야당 쪽 후보였던 김대중 씨의 비서관인 권노갑 씨를 만났다.
그 사람은 커피나 한 잔 하자며 다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일전에 부산에 갔다가 나의 집을 찾다가 못찾고 그냥 올라오게 되었다는 말까지 하며 초면인데도 무척 반가워했다.
그는 요즈음 통일 연구인협회 조직을 담당하고 있다고 자기소개를 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서범용 동지가 다방 안으로 들어오며 나를 보고 인사를 했다. 며칠이나 서울에서 묵을 것인가 하고 물었다. 나는 오늘 밤차로 내려갈 참이라고 말했다.
우리 일행은 요즈음 세상에 대한 이야길 끄집어내었다. 권노갑 씨는 통협이 전국 도지부가 거의 결성되었는데 부산직할시가 아직 결성되지 않았으니 지부장 한 사람 물색해 주든지 그렇지 않으면 나보고 지부를 좀 맡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나는 그 사람들의 부탁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다가 통일 연구인협회의 원서와 간행물을 한 보따리나 주는 대로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장재철 동지가 오늘 오후 6시에 중대발표가 있다는데 무슨 발표인지 알 수가 없다며 한복을 입은 중년 남자와 이야길 한다. 한복 차림의 중년은 얼마 후 나에게 자기소개를 먼저 했다. 그 사람의 직업은 교회목사였다.
신문에서 많이 본 이름이다. 좌석을 같이 하였던 사람들은 모두 나라에 대한 걱정을 가지고 있었다. 6시가 가까운 시간이 되었다.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조심스럽게 켰다. 우리는 귀를 기울였다.
정부는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한 것이다. 우리 일행은 긴급조치 1호의 내용에 놀라고 말았다. 주위에 있었던 사람들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여기저기서 한숨이 튀어 나오는가 하면 절망적인 말들이 튀어 나왔다.
나의 마음은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저녁이나 같이하고 가라는 그곳 사람들의 호의를 사양하고 아직 차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도 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길에서 부딪히면서 언제 왔는지 서울역 앞이었다. 매표소에서 부산행 표 한 장을 구입하고 인근의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열차시간을 맞추며 혼자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소주 한 병을 다 마시니 차 시간이 되었다. 감정 때문인지 술이 취하지 않는 것 같다. 정신없이 열차표의 지정된 좌석 번호를 찾아가 앉았다.
자꾸 갑갑하고 답답한 감정을 느꼈다. 열차 안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을 불러 소주 한 병을 샀다. 안주도 없이 소주병을 목구멍에 부었다. 술이 목구멍으로 자꾸 흘러 들어갔다.
비로소 몽롱한 의식으로 지독한 알콜의 독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의자에 기댄 채 밤새도록 일어난 일들을 모른 채 술에 곯아떨어진 것이다.
누구인가 나를 흔들었다. 눈을 뜨니 기차 안은 비어 있었다. 나는 급히 짐을 챙겨 역의 출구 쪽으로 허둥대며 뛰어갔다.
혹시나 하고 걱정을 하고 있던 아내가 나의 귀가를 보고 무척이나 다행한 표정을 지었다. 연일 신문에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체포된 사람들의 명단이 발표되었다. 더러는 기억되는 얼굴들도 있었다.
그들은 왜 감옥으로 가야 하는가? 그들이 당한 현실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열기를 잃어버린 겨울은 더 춥고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내 자신이 무사하게 지낸다는 사실에 수치감 같은 걸 느꼈다. 인간의 가장 큰 욕구가 무엇인가? 사람마다 생각은 틀리겠지만 국가를 위해 그 장래를 생각해 본다면 서로의 생각하는 차이가 그렇게 차이 질 수만은 없다고 느껴졌다.
유신은 누구를 위해 생겨난 것이며 긴급조치 법은 누구를 위해 생긴 것인가?
나의 마음속에는 두려움도 수치심도 점점 사라져 갔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결혼을 한 사실에 대해 후회를 했다.
나는 어려운 자신의 문제 외에 두 갈래 기로에서 생각해 본다. 사랑을 따르자니 스승이 울고, 스승을 따르자니 사랑이 운다 하는 유행가의 구절이 어쩌면 나를 두고 생긴 말 같기만 했다.
어느덧 복잡한 세상에서 아내라는 여자의 덕분에 일 년이나 넘게 행복했다고 생각했다. 유신을 하겠다고 겁을 주던 처음 있던 일도 부딪치니 2년이나 견뎠다.
험난한 세상도 살다보니 면역이 생긴 건가. 겁을 먹던 유신보다 세상이 험악해지니 젊은 마음속의 애국심이 가슴을 내어 밀기 시작했다.
세상을 보는 애정 속에 아내의 얼굴이 잊어진다. 이런 것이 나의 운명일까? 남들은 쉬쉬하는데 나는 떠들려고 하는 것이다.
양심, 그 양심을 가진 자를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핀잔을 준다. 그런데도 더 큰 운명에 부딪치기 위해 우리의 가난한 생활에서 나는 엉뚱한 일을 서슴지 않았다. 또 새로운 활동을 위해 자금마련을 시작한 것이다.
돈은 쉽게 구해지지가 않았다. 사람들은 나의 정당한 말부터 외면을 하는 편이니 누가 나보고 나라 위해 일해보라고 돈을 빌려 주겠는가.
결국 나는 급한 김에 전세방이나 하나 구하려고 불려가던 그 급한 희망의 줄을 끊어버렸다. 마누라보고 그 돈을 찾아오라니까 겁먹은 얼굴이 된 마누라가 별 말도 없이 우리가 일 년 동안 굶주리고 애써 모은 돈 전부를 찾아왔다.
세상인심은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건만 나는 모든 내 자신의 문제를 잊어버리고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 하나 만에 의지한 채 계획도, 가진 것도 없이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는 결심만 하고 있었다.
출처 : www.natureteaching.com/TATHAGATA/tujaeg/tujaeng_mai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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