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삼한(李三漢)

외로운 투쟁(6~10)

기른장 2021. 1. 2. 13:56

6. 단돈 10원의 밑천

 

나는 나의 앞에 섰던 사람이 하던 대로 먼저 10원짜리 한 장을 건네주었다. 돈을 확인한 상대가 신문 한 장을 건네준다.

 

그곳에 있던 신문장사 속에서도 꼬마였던 나는 건네 준 신문을 움켜쥐고 길거리로 나가면서 다른 애들이 하는 짓을 보면서 그 흉내를 내며 뛰어갔다.

 

내일 아침 국제신문! 하고 외치며 달리는 나의 발길을 붙드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고, 한 장의 신문은 20원의 돈과 바뀌었다.

 

나는 다시 신문사로 뛰어갔다. 긴 줄은 다 끊어져 나가고 없었다. 즉각 신문 두 장을 받아 쥔 나는 의식 없이 소리만 외치면서 길거리를 뛰었다.

 

「내일 아침 국제신문.」

 

목이 터지라고 외쳤다.

 

신문은 그날따라 잘 팔렸다. 몇 번씩이나 나는 신문사를 들락거렸다. 나의 주머니 속엔 100원짜리도 10원짜리도 여러 장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신문은 점점 팔리지를 않았다.

 

나는 어두워지는 변두리 길을 다니면서 신문을 팔았다. 희미한 전등불이 켜지고 난 뒤에도 한참이나 길을 뛰어 다녔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나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돈이 생기는 것이 신나고 행복하였다.

 

그 날 내가 모은 돈은 360원이나 되었다. 흠뻑 땀에 젖어 가지고 집에 들어가니 형수는 등신 같은 게 때도 제 때에 못 들어온다면서 푸념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여느 때처럼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다.

 

작은 양재기 그릇에 식은 강냉이가루 죽 한 그릇을 간장을 쳐서 비벼 먹고는 의젓하게 앉아 있었더니, 형수는 더욱 약이 오르는지 얼굴에 표독한 빛을 떠올리며 금방 무슨 말이든 하려는 표정이었다.

 

나는 더 기다리지 않고 돈 200원을 얼른 그런 형수 앞에 내어 놓았다. 돈을 본 순간 형수의 표정은 금방 달라지며 얼굴에 웃음이 흐른다.

 

「돈이 어디서 났소?」

 

형수는 돈의 출처가 궁금한지 나에게 물어 왔다.

 

「내사 신문장사 안 했능기요.」

 

하는 나의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형수는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금세 눈시울까지 적셨다.

 

나는 어린 소견에 이 여자도 악인은 아니여 하는 생각을 하며 그 날 밤은 깊은 잠이 들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은 통금해제 싸이렌 소리를 듣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160원을 지닌 채 희미해져 가는 별들을 보며 나는 영도 섬의 새벽길을 뛰기 시작했다.

 

신문장사를 하며 알게 된 어제의 아이들이 이야기하던 곳으로 신문을 받으러 찾아간 것이다. 토성동 개다리 옆에 있었던 <동아일보 부산분실>이란 간판이 달린 건물 주위에는 신문팔이 소년들로 득실거렸다.

 

먼저 온 아이들이 쇠창살 앞을 가로 막고 뒤로 길게 줄을 이어 서 있었다. 나도 나의 차례를 위해 줄을 섰다. 금방 나의 뒤에도 줄이 이어져 나갔다. 같은 처지의 소년들이라 이야기하기도 쉬웠다.

 

「신문은 언제쯤 나오노?」

 

하고 뒤에 선 아이에게 물으니 곧 올 것이라고 했다.

 

얼마 있지 않아서 자전거가 신문이 가득 실린 리어카를 끌고 왔다. 건장한 소년들이 그 리어카를 밀며 뛰어 오자 삽시간에 왁자지껄해진 속에서 아이들은 아귀처럼 서로 줄에 붙어 먼저 신문을 받을 양으로 밀어붙였다.

 

나는 내 차례가 되어서 가진 돈만큼의 신문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그 신문을 움켜쥐고

 

「동아일보요! 동아일보요!」

 

하고 외치며 이 길 저 길로 바쁘게 뛰었다. 앞에서 뛰던 아이가

 

「동아일보요! 특보요!」

 

하며 다른 말로 외쳤다.

 

그 때는 선거기간 중이라서 신문이 다른 때보다 잘 팔렸는데, 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 선생이 갑자기 죽었다는 뉴스가 신문팔이 소년들한테는 사회의 충격만큼이나 힘차게 뛸 수 있는 하루였다.

 

한낮이 되면서 다방과 상점에서는 동아일보를 찾는 사람이 많았고 신문이 모자라서 동아일보 1장에 50원씩이나 값이 뛰었다.

 

어찌되었건 당장은 신문팔이 소년들은 신이 났다. 나는 그 하루 동안에 아침 겸 점심요기까지 하고도 800원이나 모았던 것이다.

 

내가 밤늦게 집에 돌아와 보니 죽그릇이 어제와는 달랐다. 다른 때처럼 밥그릇이 아니고 좀 더 큰 양재기에 식은 죽이나마 하나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신문장사로 나다니면서 세상 살아가는 법을 알려고 노력했다.

 

선거가 끝나니까 신문은 열심히 뛰어도 잘 팔리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같이 나다녔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자 신문장사는 더욱 힘들었다.

 

어떤 곳은 토박이가 있어 드나들지도 못했다. 그런 것을 모르던 나는 어느 날 큰 봉변을 당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어느 다방에서 신문 한 장을 팔고 나왔는데 누군가가 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옆을 쳐다 본 나는 나보다 나이가 더 든 아이들에게 끌려가서 몰매를 맞았다.

 

옷이 찢겨지고, 온 얼굴에 멍이 들었고 신문도 찢겨졌다. 나는 그때 공포 때문에 울기조차도 못했다. 심지어는 칼을 목에 대고 찌르려 하면서 한 번만 더 들어오면 죽이겠다고 까지 했다. 아무도 나를 구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반죽음이 되어서 일어나기조차 못해 신음을 하고 있는데 그들은 더럽다는 듯이 나의 몸 위에다 침을 뱉으면서 가버렸다.

 

나는 한 번 당하고 나서부터는 조심이 생겨 텃세가 심한 곳은 피해 다녔다.

 

신문은 잘 안 팔렸다. 그런데도 이제 나의 사정은 달라졌다. 형수는 내가 돈을 벌어오길 기다렸다.

 

나는 동네 아이들과 노는 것보다 신문을 들고 낯선 골목길을 헤매며 다니는 것이 더 마음이 편했다. 나의 생각에는 무슨 일을 하면 어린 내가 돈을 좀 벌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어느 날 신문이 잘 안 팔려서 그냥 걸어가다가 길가에서 아이스케익을 팔고 있는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그도 아이스케익이 잘 팔리지 않는지 통 위에 앉아서 아이스케익 하는 소리만 계속 내어 지르고 있었다.

 

나는 신문을 든 채, 그 소년 옆으로 접근하였다. 그리고는 궁금한 것을 물었다.

 

「하루 얼마나 버니?」

 

그는 질문을 하는 나의 얼굴을 싱겁게 쳐다보며 말했다.

 

「응 600원 정도야.」

 

더 많이 버는 사람도 있다고 말을 했다.

 

나는 600원 이란 수입에 그만 부러운 마음이 생겼다.

 

「아무라도 할 수 있는 거니?」

 

나는 또 어떻게 하면 아이스케익 장사를 할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 소년은 나한테 통 값은 얼마를 걸어야 하고 아이스케익을 받을 때의 값은 얼마를 낸다는 등을 가르쳐 주었다. 1개를 팔면 4원이 남았다. 그래서 나는 그 소년과 약속을 하였다. 다음날 아침 아이스케익 집 앞에서 그와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통 값 1,800원이 약간 문제였지만 신문장사 밑천을 보태고 형수한테 얼마를 받으면 되겠다고 생각을 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다음날은 신문장사를 그만 두고 아이스케익 장사로 전업을 하였다.

 

아이스케익 공장 사람들은 내가 너무 어려 보이는 모양이었지만 굳이 하겠다고 사정을 하고 나서니, 아이스케익 집 주인도 잘 해 보라고 하면서 승낙을 하였다.

 

한여름의 날씨는 얼음 통을 어깨에 걸친 몸에 땀이 쭉쭉 흐르게 하였다. 신문장사 때처럼 활동이 간편하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아이스케익 통은 무게가 있었고, 처음 시작하니 생각보다 어색한 것이 많았다. 당장 급한 것은 아이스케익 이란 소리가 입 속에서 맴돌다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몸에 비해 무거운 통을 메고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가 시청 근방에 와서 눈을 딱 감고 용기를 내어서 아이스케익 하고 외쳤다. 그때 누가 내 등 뒤에서 아이스케익을 달라고 하였다.

 

나는 멋진 폼을 내면서 아이스케익을 통에서 끄집어내어 손님에게 주고 통 뚜껑을 닫았다. 그때 케익을 산 소년이 내게 물었다.

 

「너 케키 장사 하나?」

 

나는 고개를 들고 손님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내 눈 앞에는 고향에서 같은 동네에 살던 소년이 서 있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죄 지은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굴에 열기가 올라오고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멋쩍게 웃었다. 그는 10원짜리 한 장을 내밀었다. 그제야 말이 튀어나온다.

 

「그냥 두어.」

 

그러나 그는 억지로 돈을 받게 하고는 많이 팔라는 말을 남기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멍청히 거리만 주시하다가 너무나 초라해 보인 내 자신에 대하여 부끄러운 마음을 느꼈다.

 

통을 둘러맨 나의 머리속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발길이 움직이는 대로 걸어갔다. 자리를 잡은 곳은 시청 뒷편 바닷가의 선창가였다. 오고 가는 사람조차 뜸한 인적 없는 곳에서 통 위에 앉아 오랫동안 바닷물만 쳐다보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 아버지의 얼굴, 마지막 돌아가실 때까지도 잠시도 편안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운 옛날 생각에 나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뺨 위로 흘러 내렸다.

 

간간히 지나던 사람들이 아이스케익이 있느냐고 물으면서 사 주었다.

 

나는 바보처럼 하루 종일 멍청하게 있었는데, 하늘에는 노을이 지기 시작하였다. 선선한 바다 바람은 땀도 멈추게 해버린 것인지, 지나는 사람들도 더 아이스케익을 사먹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비로소 정신이 조금 들어서 아이스케익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였다. 통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아이스케익은 보이지 않고 나무꼬지와 단팥죽으로 변해버린 아이스케익 녹은 물이 보였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으나 버리기에는 밑천이 든 물건이 아까웠다. 양철통을 통 안에서 끄집어내어서 나무꼬지를 집어내기 시작하였다. 밥 대신 그 물이나 마셔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통에서 주어 낸 나무꼬지는 23개나 되었다. 23개의 아이스케익이 녹은 물을 먹으니 미적지근한 케익 물은 정말로 맛이 없는 음식이었다. 나는 빈 통을 챙겨 둘러메고 전등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길을 걸으며 케익 공장을 찾아갔다.

 

공장의 기술자가 어린 날 보고 다 팔았느냐고 물었지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빈 통에 얼음을 채우고 다시 50개의 케익을 통에 받아 넣었다.

 

먼 곳에 보이는 변두리 마을의 불빛을 보며 목청을 돋구어 어둠을 향해 외쳤다.

 

「아이스케익, 맛있는 아이스케익.」

 

하나라도 더 팔아야 한다는 집념이 나를 숨 가쁘게 뛰어다니게 했다.

 

온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몸은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입은 소리를 내지른다.

 

뱃속에서는 먹은 게 없는 데도 이상한 소리를 낸다. 꿀렁꿀렁 뱃속이 흔들리는가 하면, 6·25사변 때 들은 기관총 소리를 내기도 했다.

 

뱃속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요동이 심해 갔고 통증마저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도 온통 생각은 밑천을 날리는 것이 걱정이 되어서 죽으라고 움직이며 외친다.

 

어서 아이스케익을 다 팔아야 하는데, 저녁 때 먹은 케익 녹은 물이 몸에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참기 어려운 괴로움을 느끼면서 식은땀마저 흘리며 밤을 이겨내었다.

 

하루 저녁을 보내고 나니 고통은 멈추었지만 온 몸에 힘이 빠진 것이 만신창이었다. 좀 있으면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모처럼 시작한 장사를 하루라도 빼먹고 싶지 않아 나는 다시 이이스케익 공장으로 나갔다.

 

뜨거운 한여름의 땡볕 속을 나는 열심히 아이스케익 장사로 시간을 채웠다.

 

그러나 여름이 지나고 서늘한 기운을 느끼면서 길거리에는 얼음장사가 한 사람, 두 사람 자취를 감추었다. 아이스케익 장사들은 대부분 전업을 서둘렀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혼자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무엇이라도 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일을 곰곰 생각해도 머리속에 얼른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하다못해 나는 해볼 만한 일거리를 찾아 거리를 쏘다녔다.

 

세상에는 13살짜리 소년에게 줄 일거리는 많지 않았다. 어느 날은 사람들이 없는 영도의 고갈산 꼭대기까지 혼자 올라갔다. 칡뿌리라도 하나 캐고 싶었는데 어디에도 내가 찾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먼 바다를 바라보면서 큰 숨을 몰아쉬었다. 저 멀리에 또 다른 섬들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 왔다. 더 가까운 바다에는 배들이 오고 가는 것이 보였고 섬 주변에서는 무엇인가 물체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호기심과 혹시 저 곳에 내려가면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길도 없는 산비탈 길을 마구 내려갔다.

 

휘파람 소리처럼 길게 숨을 몰아쉬며 해녀들은 해안의 물속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물 위에 떴다가 곤두박질을 하면 1∼2분 정도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곤 했다.

 

나는 다른 일도 없고 해서 그 사람들의 일하는 장면들을 계속 주시하는 동안 여자들이 나오는데 모두 그물망태기에 가득 채운 해물들을 힘겹게 메고 나왔다.

 

그들이 잡아 온 물건은 시장에서 파는 것들이었으며 상당한 돈이 될 듯도 싶었다. 바다에는 임자가 없는지 아무라도 일을 하는 것 같았다. 해녀들은 숫자가 꽤 많았다.

 

나는 해녀들의 주위에 접근하여 얘기도 듣고 작업을 해 온 물건들도 보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임자 없는 저 넓은 바다에서 무슨 일이든 일거리를 찾아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 날 저녁 나는 동리 앞 문방구점에서 30원짜리 잠수경(潛水鏡) 하나를 구해 와서, 행여나 그 수경에서 물이 샐까봐 밤새도록 양철과 유리 사이에 초 땜질을 하였다.

 

다음날 날이 새자 아침이라고 죽 한 그릇 얻어먹고는 밀가루 부대 하나를 구해서 똘똘 말아 옆에 끼고서 인적이 뜸한 바닷가를 찾아갔다. 사람의 왕래가 없는 곳을 찾다 보니 길도 나지 않은 험한 산비탈과 위험한 벼랑을 몇 번이나 타고 넘어가야 했다.

 

 

7. 가을의 바다

 

추석이 지난 후의 바다 물은 차가워 있었다.

 

막상 자리를 정해 두고 작업을 시작하려고 하니 푸른 물이 마음속에 두려움 같은 걸 가지고 왔다. 그러나 나는 입고 있던 옷을 하나 둘 벗었다.

 

금방 온몸이 알몸으로 드러났다. 서늘한 기운이 몸을 떨리게 한다. 밀가루 부대를 줄에 묶고 그 줄을 배에다 동여매었다.

 

나는 물이 얕은 곳으로 뛰어들며 몸을 허우적거렸다. 몸 전체가 물속에 잠긴다. 손발을 놀리며 헤엄질 쳤다. 수경을 얼굴에 맞게 고쳐 쓰고 머리를 물속에다 들이 밀었다.

 

얕은 바다 밑이 보였다. 금방 몸이 지칠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나는 해녀들처럼 바다 깊은 곳에서는 작업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겨우 힘을 다해 물가에서 20여 미터쯤 떨어져 파도에 잠길 것 같은 물 가운데 보이는 바위까지 헤엄을 쳤다.

 

금방 숨이 차왔다. 손이 바위의 한 모서리를 잡았다. 그때 밀려온 파도가 나의 몸을 바위에서 떼어 놓으려고 했다. 나는 힘을 다해 허우적거리며 다음 파도가 올 때까지 안정을 취했다. 숨을 조절한 다음 고개를 물속에 묻고 바다 밑을 보았다.

 

수심 2미터 내지 3미터에서는 내가 찾던 물건들이 보였다. 돌미역도 있었고 곰피 같은 해초도 보였다. 다시 얼굴을 물 위에 내어 놓고 숨을 조절했다. 그리고는 물속을 향해 고개를 처넣고 곤두박질을 쳤다.

 

작은 손에 한 움큼의 해초를 뜯으면 물 위로 올라 왔다. 바다 밑 돌에는 소라도 붙어 있었고 담치도 바위에 붙어 있어서 딸 수가 있었다. 나는 약간의 물건을 만들어 물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

 

소라와 담치를 불에 구워서 생미역과 함께 시장기를 메우고는 작업을 계속하였더니 몇 시간이 못 되어 집에서 준비해 나간 밀가루 부대가 가득 찼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물기 젖은 몸을 닦고 옷을 입는데 온 몸엔 한기가 생기고 이빨이 부딪혔다.

 

불을 피운 나무에서는 불꽃보다 연기가 더 많이 났다. 눈물을 흘리며 입김으로 불꽃을 내게 하고 그 불꽃에 의지해서 몸을 녹이며 모든 시름을 잊었다.

 

제법 무게를 내는 물기가 흐르는 밀가루 부대를 어깨에 걸어 멘 채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해 온 물건들을 보며 형수는 놀란 눈으로 신기해했다. 형수는 그것을 우리가 먹을 만큼 남기고 이웃집에다 파는 모양이었다.

 

우리 가족도 담치를 충분히 넣은 시원한 국물로 오래간만에 배를 채울 수가 있었다.

 

나는 다음날도 바다에 나가서 일을 했다. 내가 해온 물건을 형수가 시장에 내어가서 돈과 바꾸어 보리쌀도 사고 강냉이가루도 사왔다.

 

나는 고달픔보다 형수 앞에서 사람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대견하게 생각이 되었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어떤 날은 나를 따라 동리의 다른 애들도 바닷가에 나오는 날이 있었다. 나는 외진 곳에서 물질을 할 때 옆에 친구가 있는 것이 얼마나 마음이 든든한가를 느꼈다. 그런 날은 더욱 경쟁이나 하듯 열심히 일을 했다.

 

11월이 되면서 바닷물의 온도는 물속의 일을 하기에는 너무나 차가워졌다. 해녀들의 작업하는 모습도 눈에 잘 뜨이지 않았다.

 

나의 용기와 인내에도 한계를 느꼈다.

 

동리의 애들도 나를 따라 바다에 나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다른 일거리를 구해야 했고 온종일 거리를 헤매는 신세가 되었다.

 

생활은 내가 보기에도 더욱 쪼들리는 눈치다. 형은 가족에 대한 부양에는 책임이 없는 사람처럼 우리에게 강냉이 죽 먹이는 것조차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형을 원망해 본다거나 나무라는 마음을 가져보기에는 아직도 어린 나이였다. 한 번도 형의 행동에 대해서 섭섭한 마음을 가져보지 못했다. 형편이 이러했으니 노는 것이 일하는 것보다 부담이 되었다.

 

나는 다음날도 어슬렁어슬렁 길을 헤매며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거리의 이 곳 저 곳을 돌아 다녔다. 어서 무슨 일거리든지 찾아야지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그날따라 시장기가 더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시청 옆 청과시장 근처를 서성댔다.

 

그때 마침 나의 눈앞에는 김장배추를 가득 실은 리어카를 덥수룩하게 생긴 50대의 나이든 사람이 끌면서 쩔쩔매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옆을 스쳐 지나가면서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어떤 여인이 옆에서 낭패한 얼굴로 바쁘게 무슨 말인지 해댄다. 나는 그 옆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제가 밀어 드릴까요? 하는 소리에 끙끙 용을 쓰고 있던 짐꾼 아저씨가 나를 쳐다보았다.

 

허수룩한 차림보다도 허약해 보이는 체구가 더 마음에 안 드는지 그 짐꾼은 아예 대꾸조차 않고 다시 리어카를 끌려고 힘을 써댔다. 그런데도 리어카의 바퀴는 꿈쩍도 않는다.

 

나는 짐꾼의 승낙도 얻지 않고 리어카 뒤를 힘껏 밀어주었다. 리어카는 그제야 꿈적거리다 바퀴가 돌기 시작하였다.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나의 일 인양 계속 리어카를 밀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리어카는 골목을 몇 번이나 돌아 비탈진 곳을 올라갔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이었는데 온몸에 땀이 흘렀다. 리어카 짐꾼은 리어카를 세운 채 배추 단을 묶은 줄을 풀기 시작하였다.

 

그제야 배추 주인인 듯한 여자가 신기한지 내 얼굴을 주시한다. 나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은 채 배추포기를 한아름씩 안고 집 안에다 쌓기 시작했다.

 

일이 다 끝나자 여자는 리어카 짐꾼한테 500원을 준다. 돈을 받아 쥔 짐꾼은 돈과 나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한참 생각하는 눈치였다. 100원짜리 한 장을 뽑아 쥐고는 너 무엇 사 먹어라 하는 말을 하면서 나의 손에 쥐어준다.

 

나는 몇 번이나 사양하며 거절하다가 그 돈을 받았다. 돈을 손에 쥐고 보니 힘들었던 조금 전의 일들이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중년이 넘어선 리어카 짐꾼한테 말했다.

 

「내가 끌고 갈게요.」

 

짐꾼은 말없이 미소를 짓고 나는 신나게 리어카를 끌며 앞서 갔다. 짐꾼은 급히 내 뒤를 따라오며 조심하라고 일렀다.

 

두 사람은 바쁘게 청과시장을 향해 뛰었다. 리어카 주인인 짐꾼은 무엇을 생각하는 것 같더니 또 말을 걸었다.

 

「야, 너 점심 먹었니.」

 

나는 무어라고 대답할까 망설이지도 않고

 

「저는 점심을 안 먹어요.」

 

짐꾼은 왜 점심을 안 먹느냐고 묻고 부모님이 계시냐고 물었다.

 

「형님하고 살아요.」

 

무엇인가 느낀 표정으로 먼 공간을 향해 한숨을 쉰다.

 

그러던 리어카의 주인은 나의 손을 끌고 가더니 억지로 30원짜리 우동을 한 그릇 사주며 먹게 했다. 나는 짐꾼한테서 오래간만에 따스한 정을 느꼈다.

 

13살짜리 소년이었던 나는 짐꾼과 청과시장을 돌아다니며 김장배추를 사러 온 사람들한테 접근하여 리어카 가져올까요? 하고 물으며 다녔다.

 

이렇게 하여 정말 나는 짐꾼의 조수가 된 것이다. 짐은 자주 내가 맡아 왔다. 힘은 들어도 돈이 생긴다는 마음에 더욱 용기를 내어 리어카를 밀고 다녔다.

 

짐꾼은 나를 보고 똑똑하다며 칭찬도 해 주었다. 나는 그가 준 얼마의 돈을 생각하면서 저녁때가 되어 다시 물어보았다.

 

「나 내일도 나오면 어떨까요.」

 

「그래 나오너라.」

 

짐꾼의 승낙에 나는 신나게 길을 향해 뛰었다.

 

나의 뒷모습을 짐꾼은 한참이나 보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해서 날마다 짐꾼을 따라 시장엘 다녔다. 그러나 겨울이 깊어가고 날씨는 더 추워졌다.

 

김장거리를 사려고 청과시장에 나오는 아주머니들의 발걸음도 뜸해졌고 김장거리를 실은 트럭도 청과시장에 들어오지 않았다. 청과시장도 그만큼 한산해졌다.

 

이젠 인정이 두터워 보이는 짐꾼과도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왔음을 느꼈다. 그동안 나의 사정을 대강 아는 그는 자기 걱정은 하지 않고 내 걱정부터 해 주었다. 이제 또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물었다. 그러면서 푸념을 내뱉었다.

 

「너 같은 아들 하나만 있으면...」

 

그는 자기 자식들을 두고 섭섭한 말을 했다.

 

나는 일거리가 없어진 청과시장을 떠날 때 아저씨께 보람 있는 일이 생기길 빌겠습니다 하고 말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내가 생각한 말로써는 근사한 말을 했다고 느끼면서도 어린 나이 때문에 다소 수줍은 마음을 지닌 채 목적지도 없이 공연히 큰 길 쪽으로 그냥 뛰었다.

그리고는 또 무슨 일인가 해야겠는데 하는 생각만이 강렬하게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나는 세차게 부는 바다 바람을 귓가에 맞으면서 으시시한 기분을 느꼈다.

 

나의 정처 없는 발걸음은 40계단 위로 오르고 있었다. 나는 길가의 벽에 신문배달원 모집 광고가 붙어 있는 것을 쳐다보았다. 나는 눈이 닳도록 벽에 붙여진 구인광고를 한 자 한 자 읽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신문 배달원이 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구인광고가 붙은 옆 계단의 신문사 간판이 달린 문을 밀며 들어갔다. 신문사 사무실 안에는 나보다 나이가 위로 보이는 소년들과 어른들이 있었다.

 

나는 누구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인가 망설이다 안경을 낀 중년신사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배달원 모집합니까 하고 먼저 물었다.

 

신사는 나의 행색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다른 책상 앞에 앉은 사람을 가리켰다. 나는 또 그 쪽으로 옮겨갔다.

 

「신문 배달원 모집합니까?」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나는 그 신사로부터 몇 가지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였다.

 

그 사람은 나에게 몇 가지 구비서류를 해 오라고 일러 주었다. 나는 동아일보 부산분실의 간판이 달린 문을 나왔다. 그리고는 또 거리를 무작정 걸었다.

 

 

8. 신문 배달원

 

나의 머리속에는 금방 신문을 돌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빨리 신문을 돌리는 배달원이 되고 싶었다.

 

나의 마음은 겨울철인데도 열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형수가 집에 돌아온 나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자 나는 무엇인가 마음속에서 금방 죄인처럼 자신이 위축됨을 느꼈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형수 앞에서 신문배달원 모집광고를 본 이야기를 했다. 그때 나의 심중은 절대 공짜 밥은 안 먹을 겁니다 하는 감정이었다.

 

형수는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후 자리에서 일어난 형수가 희멀건 강냉이 가루 죽 한 그릇을 반찬도 없이 방으로 들여왔다.

 

나는 며칠 동안이나 애를 써서 구비서류를 갖추어 신문사에 가져다주었다.

 

곧 통보하겠다는 그 쪽 사람들의 말을 믿고 집에 돌아와서 하루하루 겨울의 추위를 골목의 양지쪽에 서서 소식 오기만을 기다렸다.

 

학생들의 겨울방학이 끝나고 난 어느 날 그렇게 기다리던 배달원의 자리에 대한 신문사의 통보가 왔다.

 

나는 신문사로 달려갔다. 나에게 인수인계를 해 줄 전임 배달원을 신문사에서 소개받고 다음 날에는 전임 배달원의 안내로 독자 집을 확인하기 시작하였다.

 

한아름의 신문을 허리에 껴안은 채 전임 배달원을 따라 한 집 한 집 신문을 넣으며 나의 배달구역이 될 독자들의 집을 익혀갔다.

 

첫날은 배달이 끝나고 보니 3시간이나 걸렸다. 동광동 5가에서 영주동 수원지 위까지 골목마다 돌아야 했다. 새벽마다 반복되는 인수인계가 3일 만에 끝이 났다.

 

전임 배달원이 얼굴에 시원한 표정을 지으며,

 

「잘 해봐!」

 

하면서 나를 격려하는 말을 해주었다.

 

「... 응 고마워.」

 

하는 말로 대답을 하며 고등학교 학생이었던 전임 배달원 소년과 작별의 악수를 했다.

 

이젠 정말 나는 배달원이 되어 이른 새벽, 별들이 총총한 하늘을 보며 한아름의 신문을 허리에 껴안은 채, 한 집씩 독자 집을 찾으며 뛰어다녔다.

 

날이 갈수록 배달을 하는 일은 익숙해졌고 추위도 봄기운에 쫓겨 누그러졌다.

 

신문은 서울에서 기차로 밤에 실려와 새벽 5시쯤에 도착되어 왔기에 통금만 해제되면 나는 배달을 위해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안에 시계가 없었던 형편이라 언제나 통금해제 싸이렌 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싸이렌 소리를 놓쳤다가는 독자들한테 투정을 받기가 일쑤였다.

 

일찍 잠이 들었다가 일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다. 어린 나는 시간을 어림잡을 줄 몰라 잠자리에 들어도 선잠조차도 청하지를 못했다.

 

오직 신경은 잠결에서도 싸이렌 소리를 듣기 위해 곤두서 있었다.

 

이런 생활을 하다 보면 자정이 새벽으로 착각될 때도 있고 새벽이 자정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잠 속에 빠져 있던 나는 싸이렌 소리만 들으면 무의식적으로 일어났다. 그때마다 사방은 어두웠고, 그믐날이 되면 더욱 그러했다.

 

그런 어느 날이다. 나는 싸이렌 소리만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낯이 익은 어두운 길을 늦을세라 달음박질을 쳤다.

 

골목을 나설 때만 해도 총총히 걷는 골목길의 사람을 보았다. 나는 늦은 것만 같은 마음으로 더욱 발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거리는 점점 죽음처럼 고요해져 갔다. 영도다리를 넘으려는 찰나에 누가 뒤에서 나를 불러 세웠다.

 

「야 이리와 봐.」

 

나는 그때까지 경찰서의 순경 아저씨가 왜 나를 부르는지 알지 못했다.

 

「너 지금 어디 가니?」

 

가까워진 거리에서 순경이 말했다.

 

「신문 돌리러 가요.」

 

라고 대답을 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도 순경은 다시 불렀다. 제법 차분한 목소리로

 

「지금 몇 신데 신문을 돌리러 가냐?」

 

나는 순경의 질문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싸이렌 소리를 듣고 나온 거예요.」

 

싸이렌 소리란 나의 말에 순경은 무언가 알아채고는 12시 30분이라고 일러 주었다.

 

그제야 나는 자정을 새벽이라고 착각하게 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할 말이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경찰서 정문 근무의 순경도 씩 웃었다.

 

나는 새벽까지 정문초소의 나무의자에서 졸며 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새벽을 알리는 싸이렌 소리에 비로소 신문사 쪽으로 달려갔다.

 

그 날은 수십 명의 배달원 중에서 일착을 하였고, 한참이나 기다린 끝에 신문사의 문이 열리고 사무실 안의 난로 가에서 몸을 녹일 수가 있었다.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신문배달도 익숙해져 갔다. 신문사의 상급 직원들로부터 착실하다는 평도 자주 듣게 되었다.

 

신문배달을 시작한 지도 1개월을 넘어섰다. 이제 나는 배달료를 받을 날이 온 것이다. 흐뭇한 마음에 돈을 받으면 쓸 곳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마음이 그 날 오후부터 당황하게 되었다. 나의 상급직원인 배달직 감독은 미수금 영수증에서도 돈이 잘 걷히지 않는 영수증 중에서 배달료만큼 받아서 가지라고 뜯어 주었다.

 

나의 마음은 지금까지의 기대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가 돈을 가져 오기를 집에서는 기다리고 있는데 단돈 얼마라도 돈이 생겼음 하고 생각을 하면서도 다른 방법이 생기지 않았다.

 

나는 맥 빠진 발걸음으로 영수증을 지닌 채 급한 생각에 구독료가 밀려 있는 독자 집으로 찾아 나섰다. 독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며칠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나는 아무리 뛰어다녀도 그 날은 한 집도 수금을 못한 채 힘없는 발걸음을 집으로 돌렸다.

 

맥이 빠져 있는 나를 본 형수는 의심하는 눈치였고, 무능력했던 형은 어떤 마음에서인지 욕설을 섞어가며 다 집어치우라고 화를 냈다.

 

나는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처럼 민망스런 마음에 어떻게든 그 순간을 넘기고 싶었다.

 

세상의 고통과 시련은 이런 순간에 나를 더욱 기죽게 했다. 떨어진 고무신에서는 물기가 올라오는 데도 나는 신발 하나 바꿀 대책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자 나의 입장은 집안에서도 대우가 더욱 나빠졌다. 죽그릇이 바뀐 것이다. 양재기에 담겨져 있던 것은 대접으로 바뀌었다.

 

나는 하루하루 더욱 심하게 허기를 느꼈다. 몸은 크려고 바둥대는데 속을 채우지 못하고 배고픔을 참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갔다.

 

언제나 반복되며 생기는 딱한 일 속에서도 살아야 되겠다는 희망만이 나를 움직이게 하였다.

 

밤이 이슥해지는데 얼마의 미수금을 받겠다고 나는 영주동 일대를 쏘다녀야 했다. 화교 골목의 어떤 국밥집에도 두 달 치의 구독료가 밀려 있는 집이 있었다. 상점의 벽에 걸린 시계 바늘이 저녁 9시를 가리켰다.

 

나는 국밥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구수한 돼지고기 삶은 냄새가 속을 뒤집어 놓았다. 연방 군침이 입 안에 가득 고였다.

 

신문대금 받으러 왔다는 말을 하면서도 시선은 자꾸만 음식 있는 곳과 음식을 먹는 사람들에게로 옮겨갔다.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보고 식당주인은 다음에 오라면서 불쾌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나는 온몸에 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면서 한 달 치라도 좀 떼어 달라고 다시 매달렸다.

 

주인은 이런 내 앞에서 화를 내며 나를 몰아 세웠다. 나는 할 말을 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런 나를 두고 식당주인은 더욱 기세를 더하며 윽박질러 왔다.

 

주위 사람들이 보기가 딱했던지 오늘은 돌아가고 다음에 와서 달라면 될 것이 아니냐고, 모두 나의 사정은 알려고 하지도 않고 나를 타일렀다.

 

이 세상에는 아무도 나의 딱한 사정을 알고 있지 않았다. 나의 뺨 위에는 눈물이 흘렀다. 이런 나를 보고 식당의 주인 남자는 더욱 기세를 높여서 상말까지 했다.

 

나는 항변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어떤 손님이 나를 자기네 자리에 앉히고는 어른의 말을 그렇게 안 들을 수 있느냐고 타일렀다. 식당 주인도 모두가 나를 타이르자 조금은 마음이 풀리는지 잠잠해졌다.

 

나는 아무래도 나의 처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어린 나이에 신문배달원이 된 나의 사정이야기를 했다.

 

나는 식당 주인이 나의 말을 가로 막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늘 하루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했다.

 

이 영수증이 나의 월급이라는 점과 어쩌면 내일은 온종일 굶게 될 것이라는 딱한 내 형편을 털어놓으니까 주위의 분위기는 점점 가라앉았다.

 

그렇게 안 좋게만 보던 주인은 내일은 꼭 주마고 여러 사람 앞에서 약속을 하였고, 주위 사람들은 무척 측은한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이었다. 정말로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발길을 돌려 식당을 나오는 나의 마음속에는 세상의 인정이 생각했던 것만큼 험한 것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도 많은 날들을 굶다보니 몇 끼 정도는 굶어도 배고픈 것을 느끼지 못할 지경이었다. 나는 힘없는 발걸음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음식을 원하고 찾게 되는 본능을 느낄 뿐이었다.

 

나는 날마다 여전히 신문이 도착하면 한아름이나 되는 신문을 안고는 같은 길을 뛰어 다녔다. 어떤 날은 신문을 실은 기차가 연착할 때가 있었다. 그런 날은 배달원들은 애를 먹게 된다.

 

신문을 집어넣으면, 신문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대부분 투정을 해댄다.

 

어떤 사람은 쫓아 나와서 '구문'을 넣을 테면 당장 끊으라고 호통을 치는가 하면,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아예 신문을 안 보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여 급한 나의 발길을 붙들어 두기도 했다.

 

나는 이러한 모든 일이 투정부리는 독자 앞에서는 꼭 내 잘못인 양 송구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그리고 세상의 인심이 나 같은 소년을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용납하지 않았다. 힘드는 일은 하루하루 더 많이 생기고 고역은 늘어갔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땀투성이의 몸이 된다. 이 골목 저 골목을 정신없이 헤매다 보면 영주동 수원지 위쪽을 돌 때에는 언제나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맞게 된다.

 

어느 날 아침에 생긴 일이다. 기차가 좀 늦게 도착을 했다. 나는 힘들게 한 집 한 집 신문을 넣고 있었다. 영주동 수원지 위쪽을 올라왔을 때에는 아침 햇살이 온 누리를 비추었고 태양은 제법 하늘 가장자리까지 떠올라 있었다.

 

신문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나를 부르며 신문을 넣지 말라고 성화들이다. 나는 기차가 연착이었다고 변명을 하면서 다음 집으로 뛰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온몸에 맥이 탁 풀렸다. 땅과 하늘이 빙빙 돌았다. 머리속이 어지러워 더 이상 몸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중심을 잡을 수 없는 것이다. 다음 순간 나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내가 의식을 회복하였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나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내 꼴이 어린 마음에도 쑥스러워졌다. 주위에 흩어진 신문을 챙겨 들고 사람들이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눈을 피해 힘껏 뛰어갔다.

 

14살의 한 해를 신문배달로 날들을 채우고 보니 영양실조 속에서도 자란 키가 그 동안의 경험과 함께 이젠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동아일보 부산분실내에서 배달지역이 좋지 않기로 소문 난 구역을 일 년 만에, 내가 처음 신문사로 자청해 찾아갔던 때처럼 신문배달을 하겠다고 찾아온 사정이 딱한 소년에게 독자 집을 한 집씩 한 집씩 인계를 하였다.

 

나보다도 두세 살 위인 것 같은 소년은 내가 처음 배달을 시작할 때처럼 의욕을 가지고 인수를 받는다. 3일간 나는 그 소년과 같이 다니면서 배달 길을 상세히 일러주고 복잡한 길목에서는 그만이 알 수 있는 표시를 하게 하였다.

 

나는 그 소년에게 마지막 날 자신이 있느냐고 물으니 미소를 지으면서 기대감에 넘치는 표정을 보였다.

 

나는 오래간만에 해방감에서 맛보는 시원함을 느끼며 그 소년과 헤어졌다.

 

고향을 떠나와 낯선 도시에서 어린 나이에 삶을 위해 싸워 온 세월도 3년이 되었다.

 

형이 입다가 물려주는 옷이 이즈음에 와서는 바지가랑이나 소매를 걷지 않아도 되었다. 품은 우의처럼 느껴졌지만 행동하기에는 옛날보다 수월했다. 나는 빨리 성장하여 어른이 되는 생각을 자주 하였다.

 

오가는 사람을 볼 적이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신체와 힘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검게 탄 얼굴에 지게를 진 사람을 볼 적에도, 길거리에 늘어 선 무허가 우동집의 포장을 부담 없는 표정으로 젖히며 들어서는 것을 볼 때면 부러운 마음이 생긴다.

 

나도 언제쯤이면 저런 곳을 끼니때마다 부담 없이 드나들 수 있을까 하는 조그만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한 끼니에 막국수 두 그릇만 먹을 수 있는 것이 당장 나의 소원이었다. 나에게 다른 소원이 있다면 아무 일이라도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히 해낼 수 있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별다른 기대나 희망을 가져 볼 곳이 없었던 나는 아무리 깊게 생각하여도 의지할 곳은 자신뿐인 것이다.

 

고통스럽고 고달파도 세월은 나를 성장시켜 주고, 나이를 먹게 해 준다는 사실을 믿을 뿐이었다.

 

오직 기다리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세월이 흐르는 것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겨울이 지난 바닷가의 풍경은 한가로웠다. 신문 배달을 그만 두고 할 일이 없었던 나는 다시 한적한 바닷가를 찾았다.

 

전에 다녀본 길이라 낯이 익은 산비탈을 수월하게 넘었으며 가파른 벼랑에서조차 평소 느껴보지 못했던 정감을 느꼈다.

 

작은 파도가 바위 끝에 와서 부딪히면서 흰 물결을 퉁긴다. 그리고 그 물결은 금방 푸른 바다로 다시 잠겨 버린다.

 

물기 젖은 바위에는 돌김이 탐스럽게 붙어 있었다. 겨울 내내 자라서 그런지 제법 물결이 스칠 때마다 나래를 폈다가. 물이 빠지면 바위에 붙어버린다. 나는 마음 내키는 대로 돌에 붙은 돌김을 뜯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뜯어 모으는 김의 양도 많아졌다. 날씨가 아직 추우니까 물속에 들어가 작업을 할 수가 없어 여러 종류의 해물을 채취할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팔을 걷고 손길이 닿는 곳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뜯어내었다.

 

한 움큼의 김을 입 속에 넣고 씹어본다. 별달리 맛은 없지만 시장기를 느끼는 나에게는 분명히 도움이 되었다.

 

몇 시간의 작업을 통하여 얻은 것들이 제법 쌓여졌다. 아침에 나올 때 집에서 가지고 나온 보자기에 싸니 제법 묵직하다.

 

다음 날도 나는 바다 쪽으로 나갔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는 외로운 마음이 들지만 형수의 푸념이나 눈초리를 받는 것보다 이렇게 나다니는 것이 훨씬 더 좋았다. 날씨는 매일 따스하게 변해갔다.

 

물가에 다니면서도 마음은 빨리 날씨가 좀 더 따뜻해져서 물속에 마음껏 들어가서 필요한 것들을 더 많이 따내고 싶었다. 나는 하루도 쉬지 않고 바다로 나갔다. 살결이 검붉게 타 들어 갔지만 나는 내 모습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은 이런 나의 처지를 아는지 몸도 별 아픈 곳 없이 세월이 흘러 가주었다.

 

동리 사람들은 추한 꼴을 한 내가 또래의 자기 자식들과 어울리는 것마저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런 곳에서도 단 한 집 이웃에 살았던 중국인의 부인이었던 일본 태생의 여인이 동리 사람 중 나에게 가장 호의를 가져주는 사람이었다.

 

그 여자는 동리 사람들과는 어울리는 일이 없었다. 그 집의 어린 아이도 언제나 이방인답게 부모하고만 논다.

 

나는 이웃인 그 집 아이와 시간이 있을 때마다 어울렸고 또 그를 업어주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 아이의 어머니 되는 일본 여인이 어느 날 나에게 말을 붙여왔다. 솥 공장에서 일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여인은 솥 공장에 가면 밥은 양껏 먹을 수 있다는 소리를 했다. 나는 굶주림을 면할 수 있다는 말에서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녀는 자기 남편에게 이야기할 것이니 마음으로 준비나 하고 있으라고 귀띔을 해 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일본여인이 나를 부르더니 이야기가 되었으니 공장에 찾아가 보라고 하였다.

 

나는 헌 옷 한 벌을 챙겨 중국인들의 주물공장(鑄物工場)이 있는 대평동의 쌍화주물이라는 솥 공장을 찾아가게 되었다.

 

 

9. 나이 어린 노동자

 

큰 대문이 양쪽으로 열려 있었고 건물이 있는 담장 안의 지면에는 온통 쇠뭉치들로 가득 쌓여 있었다. 두 사람이 비껴 지날 만한 통로가 건물의 양쪽으로 나 있었고, 그 입구에는 사무실이 보였다. 사무실 안에는 전부 중국인 같은 사람들이 저희들끼리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떠들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한테 내가 찾아 온 용건을 말했다. 마침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건장한 중국인 청년이 별 이야기도 없이 나를 보고 자기를 따라 오란다.

 

나는 그 청년이 가는 대로 뒤를 따라 갔다. 나무로 짜여진 문짝을 밖에서 밀고 건물 속으로 들어가는데 꼭 굴속에 들어간 기분이 들었다.

 

실내는 캄캄했고 어느 쪽 벽에도 창문은 없었다. 굴속 같은 곳의 천정에는 30촉짜리 전구 두 개가 매달려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는데 한참이나 지나서야 주위가 보이기 시작한다.

 

양쪽으로 깔린 마루바닥은 사람들의 잠자리인 것 같았는데 키 큰 사람의 머리가 닿을 만큼의 공간을 두고 또 나무로 짜여진 마루가 설치되어 있었다.

 

나를 보고 2층으로 된 중간 마루에 자리를 정하라고 그 청년은 일러 주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작업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게 하였다. 나는 젊은 중국인이 시키는 대로 했다.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나의 자리라는 곳에 소지품을 놓아두고 옷을 바꾸어 입은 후 밑으로 내려왔다. 처음 이런 일을 당하고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였다.

 

나는 다시 젊은 중국인을 따라 공장 안으로 갔다. 굉장한 소음이 나의 귀와 눈을 놀라게 했다. 용광로의 팬 소리와 그 팬을 돌리는 발동기 소리가 사람들의 잡담하는 소리를 여지없이 삼켜 버리고 있었다.

 

온 몸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당장 뜨거운 열기가 몸으로 밀려온다. 우리 동리의 옆집에 살던 중국인이 저만치 거리에서 혼자 주물의 형을 흙으로 만들고 있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그곳에서 십장 일을 맡고 있는 중국인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

 

처음 하게 된 일은 수레를 미는 일이었다. 용광로의 조개탄을 실어 나르고 쇠붙이를 실어 날랐다. 또 용광로에 들어가는 돌조각을 실어 날라야 했다. 좁은 통로를 아슬아슬 하게 수레를 밀고 다녔다.

 

중국인 십장의 눈은 공장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 다녔다.

 

힘깨나 있어 보이는 제대군인 한 사람도 나와 같은 작업인 수레를 밀고 있었다. 그 사람도 하는 일이 몸에 비해 고된지 쩔쩔매고 있었다.

 

나도 첫날은 긴장과 견뎌야 한다는 다짐 때문에 무사하게 넘기긴 했지만 하루가 지나고 보니 이제 열다섯 살인 나의 체력이 감당하기에는 확실히 무리한 노동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도 억지로 견디게 한 것은 부식은 없으나 밥만은 양껏 먹을 수 있다는 미련 때문이었다. 조미료가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콩나물국도 허기진 생활 속에서 살아온 나한테는 부자들의 진수성찬보다도 맛있었다.

 

해가 져야 고된 일은 끝이 난다. 시간이 왜 그렇게 천천히 가는지 하루를 보내면서 몇 번이나 하늘의 해를 바라보아야 했다.

 

어두워진 후에야 몸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고 노동으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몸이 뭉개지는 것 같은 피로를 느낀다.

 

나는 오랜 만에 허기를 잊고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이나 잠을 청하기에 또 시달려야 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아침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사람들은 일을 하러 나가려고 서둘렀다. 나는 얼굴을 닦고 어제처럼 밥함지 속의 밥을 내손으로 먹을 만큼 떴다. 밥은 배가 부르도록 먹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온몸이 찢기는 듯한 괴로움을 느껴야 했다.

 

80여명의 노동자 중에서 나는 가장 나이가 어렸고 보기에도 허약한 체질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주위에서는 나의 이런 형편을 딱하게 생각한다든가 동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고달픈 생활을 하며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었기에 자기 자신의 지친 몸마저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며칠이 지나니 아침마다 나의 코에서는 코피가 쏟아졌다. 흐르는 피가 몸속에서 빠져 나간다고 생각하면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또 감당하기 힘들어도 나는 당당하게 하루 동안 장정 한 사람 몫의 일을 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면 중국인 십장의 눈이 등 뒤에 따라 다녔다.

 

너무 일이 고되기 때문에 더 견디지 못하고 공장에서 나가는 사람이 생기는가 하면 이런 중노동도 직장이라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작업 중에 쇳물이 조금이라도 땅에 엎질러지면 일을 하던 사람이 다치기도 했다. 쇳물은 너무 뜨겁기 때문에 살갗에 닿으면 닿은 부분이 금방 타버린다. 누구나 이곳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쇳물에 데인 자국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의 몸에도 어느 사이에 쇳물 자국이 더러 생겼다. 나는 그때마다 다른 도리가 없어 견딜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면 월급날이 돌아온다. 조금의 돈을 생각하면 그 돈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나의 머리에 떠올랐다.

 

생활력이 없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형수가 기대는 곳은 나였다. 그들은 나를 돌보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을 돌보아 왔고 조금은 돌봐 주어야 하는 것이 나의 형편인 줄 알았다.

 

형수가 아기를 낳아서 요즈음은 더 형편이 쪼들리는 모양이었다. 월급날이 아닌 데도 집안의 형편이 다급한지 형수가 나를 찾아 올 때도 있었다.

 

나는 첫 월급을 받는 날 군복을 물들여 놓은 작업복 한 벌을 사는 외에는 남은 돈 전부를 형수에게 건네주었다. 나를 짐스럽게 여기던 때와는 달리 돈을 받을 때는 태도가 몹시 달라 보였다.

 

나의 마음속에는 이런 일을 겪고도 미움 같은 것이 없었다. 오직 하루하루가 견디기 어려워도 바보 같은 마음이 되어 어려운 일은 금방 잊고 참았다.

 

하루의 일과가 끝난 다음이면 공장 안 합숙소의 모든 노동자들이 외출을 해서 기차 굴 같은 합숙소가 사람이 없어 비게 되면 나는 그 속에 혼자 남아 있게 되는 때가 많았다.

 

외출은 생각조차 하기가 싫었다. 가볼 곳도 없었지만 어디를 가도 위로를 얻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이 공장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 나의 눈에도 희망 때문에 일을 하는지 굶주림 때문에 일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고된 것을 이기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수단이었다.

 

나의 잠자리 건너편에 잠을 자던 어느 50대의 중국인은 하루 온종일 허리 한 번 펴는 일없이 맡긴 일에 순종하고 그 대가로 받는 적은 돈을 아편주사를 놓는 데 다 써 버린다.

 

그렇게 힘들여 돈을 벌고 있으면서도 그 돈으로는 아편가루를 구하는 것조차 부족하여 쩔쩔 매는 꼴을 보면 나의 마음에는 세상일들을 알 수가 없었다.

 

아편 중독자가 되어버린 지 오래된 것 같은 중국인 노동자는 합숙소의 사람들이 외출을 하고 나면 혼자 희미한 전등불 아래서 한 쪽 손으로 자기의 팔뚝에다 주사기를 꽂고는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때부터 눈을 감고 자리에 눕곤 하였다.

 

이런 일을 바로 맞은편에서 건너다보게 된 나는 그 영감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 그의 계속되는 행동이 이상해 옆 자리에 있던 고참 노동자에게 물으니 아편쟁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곳에 있던 고참들은 모두 나보다 먼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이곳의 사람들은 이런 일을 말리려 드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또 사무실에 있던 중국 사람들도 역시 다른 노동자들과 같았다. 모두가 남의 일 따위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다.

 

공장 안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은 소박하게 보이는 얼굴과 행동이 달라 곧잘 속에 없는 말을 잘 하는가 하면 기를 쓰며 자기 사정들을 숨기며 그냥 넘기려고만 하였다.

 

이런 환경 속에서 같이 있다 보면 나의 하루도 고달픔과 애환 속에서 넘어 갔다.

 

손수레를 밀고 있던 나를 중국인 십장은 어느 날 용광로의 고지기로 지명을 하여 일자리를 바꾸어 놓았다. 옆에서 계속 들리는 팬 소리가 더 크게 들렸고 당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열기였다.

 

덥다는 표현만으로는 말이 충분하지 않고 그냥 몸을 삶는 듯 했다. 금방 땀이 흘러 몸은 물에 빠진 것 같이 된다.

 

이런 열기를 사방으로 흩어 버리기 위해 사람의 몸보다 더 큰 선풍기 날개가 등 뒤에서 온종일 돌아가니 석탄가루나 쇳가루의 먼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코까지 덮는 입마개로 입을 막고 그 위를 수건으로 다시 동여 메고서 눈만 내어 놓은 채 일을 하는 것이다.

 

한참 일이 시작되면 조금만 게으름을 부려도 쇳물이 안 나온다고 고함이 들린다. 어려운 일은 이유가 통하지 않는다.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 해결책인 것이다.

 

중국인이나 한국인 노동자들은 아무도 공장을 움직이는 십장의 말에 항변하지 않았다. 몸이 고달파도 공장을 떠날 수 없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고 그래서 순종 그 자체가 방법이었다.

 

일이 바뀌고 부터는 자고 나면 아침에 가래가 목에서 넘어왔고 그 가래에 석탄가루와 먼지가 범벅이 되어 토해졌다. 이런 현상이 오래 가면 좋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지만 날이 새면 또 같은 일을 하러 가야했다.

 

그런 일들이 반년이나 계속되었다. 어떤 날 저녁의 일이다. 기차 굴 같은 합숙소에는 여느 때처럼 노동자들의 외출이 많았다. 나의 건너편 마루에서는 아편쟁이 중국인이 아편기운이 떨어져 괴로워 하다가 숨을 거둔 사건이 생겼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도 모르고 외출에서 돌아와 그 옆에서 잠을 잤고 아침이 되자 공장 안으로 일하러 나갔다. 그 중국인이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자 점심때가 되어서야 죽었다는 소문이 공장 안에 퍼졌다.

 

어느 손수레꾼이 공장 사무실에서 주는 몇 푼의 돈을 받고 아편기운이 떨어져 죽은 송장을 가마니로 싸서 손수레에 싣고 공장 문을 나갔다.

 

그 날의 일인데도 노동자들은 아무도 죽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옛날 일처럼 모두의 기억 속에서 금방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공장 안에는 중국인 십장의 눈이 일이 시작되면 사방에서 번뜩거렸고 쉴 사이 없이 일을 해야 하는 나와 같은 하급 노동자한테는 한숨조차 쉴 여유가 없었다.

 

그런 어느 날 형수와 손위의 누나가 나를 찾아왔다. 점심시간에 누가 면회를 왔다기에 공장밖에 나가 보았다. 형수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돌렸고 누나는 금방 눈물을 흘렸다.

 

내 가슴도 뭉클하여 눈물이 흐르려고 했으나 이래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억지로 참으며 말을 끄집어냈다. 어떻게 왔느냐고 내가 먼저 물었다. 혹시 돈 때문에 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볼 때 꼭 내가 동물원의 짐승 꼴이 된 것 같아서 그냥 올라가라고 말을 재촉하면서도 오늘 저녁에는 형님 댁에 올라가겠다고 하는 말을 남기고 내가 먼저 공장 안을 향해 발길을 돌려 버렸다.

 

오후가 되자 바쁜 일에 쫓겨 잡념은 금방 사라져 버린다. 일이 끝난 저녁에야 나는 온 몸을 빨래비누 조각으로 깨끗이 닦았다. 오래간만에 군복에다 물들인 새로 산 옷을 입고 외출을 하려고 생각을 하였다.

 

그 날 저녁엔 밥 대신 흑빵으로 식사가 나왔다. 나는 내 몫인 큰 빵 두 개를 종이에 싸들고 공장을 나와 형의 집으로 찾아갔다.

 

누나도 같이 있었다. 내가 싸온 빵 두 개를 방안의 사람들에게 내 놓았다. 사람들은 연신 말을 하면서도 빵을 뜯어 먹었다. 제법 빵이 맛있다고까지 말을 한다. 돌을 지난 조카아이가 큰 빵을 움켜쥔다.

 

누나가 내게 산 입에 거미줄 치겠느냐고 다른 일을 해 보라고 권한다. 형수도 그때 공장 안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그런 일이면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처음으로 인간적인 말을 했다.

 

나는 한 달 가량 남은 음력설까지만 하고 그만 두겠다고 나의 의사를 밝혔다.

 

밤이 이슥해져서 합숙소로 돌아오려고 할 때까지 형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겨울은 여름보다 한결 일하기가 수월했지만 설날이 가까워 오면서 공장 안의 노동자들은 들뜨기 시작했다.

 

모두 명절을 쇠러 떠나면 그 사람이 다시 지옥 같은 이곳으로 돌아올까 하는 의심이 생겼다. 한 사람 두 사람 설이 가까워지자 공장에서 떠나갔다.

 

나도 음력설을 3일 남겨 둔 날, 고향에 가야겠다고 십장한테 이야기를 했다. 사무실에서 계산을 하고 돈을 찾았다.

 

옷가지를 보따리에 싼 후 합숙소를 나오니 처음으로 중국인 십장이 미소를 지으면서 설 쇠고 고향에서 내려오면 공장에 다시 일하러 오라고 나를 타일렀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공장 문을 나오는 내 머리 속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발걸음은 점점 공장과 멀어졌다. 아직도 검은 연기가 나오고 있는 굴뚝을 보면서 자신을 처음으로 대견하게 생각했다. 지난 시간 동안 용케도 참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열여섯 살이 되는 날도 며칠이 남지 않았다.

 

나는 당장 다음 날부터 허기를 느꼈다. 그러나 악몽 같은 솥 공장의 일들을 다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1월의 추위가 내 몸을 움츠리게 했다. 일자리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고 온종일 거리를 기웃거려야 하는 나의 몸을 찬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쳤다. 춥고 배고픔을 절실히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골목길 구멍가게에는 뻥과자가 아이들에게 유행했다.

 

약삭빠른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뻥과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곳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구식 짚차의 핸들을 잡고 틀었다가 놓는 일이 고작이었다. 연탄불에 달구어진 틀에 쌀을 조금 넣고 틀의 뚜껑을 닫고 핸들의 밑에 장치된 곳에 집어넣어 주면 나는 핸들을 돌려 틀을 압축시킨다.

 

그러고 나서 힘을 풀면 압축된 틀에서 펑하고 조그만 쌀알들이 큰 과자가 되어 튀어 나온다.

 

온종일 핸들을 돌리다 보면 손이 뻐근하고 몸도 피곤했지만 일할 수 있다는 사실과 조그만 돈이지만 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데 만족했다.

 

이런 일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며 신용을 얻었다. 그래서였는지 이집 저집에서 나를 찾아주어 나는 쉬는 날 없이 일할 수가 있었다.

 

하루의 해가 지는 것만으로 세월이 바뀜을 느꼈다. 슬픔도 추위도 배고픔도 잊었다.

 

동리의 소년들이 성냥개비라고 부르는 별명처럼 나는 거리의 어떤 소년보다도 여위어 있었고 키만 멀쩡하게 컸던 것이다.

 

나는 이런 내 모습 때문에 내가 지금 당장 이룰 수만 있다면 나의 소원은 한 끼에 우동 두 그릇만 먹어 볼 수 있는 형편이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고 또 말하고 싶은 것이 남아 있었는데, 나의 몸이 볼품이 없어도 좋으니 살이 좀 찌게 되어 남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게 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안다면 우스운 말들뿐이었지만 나에게 이 두 가지는 절실한 소원이었다. 어떤 때는 나의 딱한 사정을 무작정 신에게 빌었다.

 

도시에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뻥과자가 한 때는 그렇게 유행이 되더니 사람들의 구미에서는 한물 가버려 뻥과자를 만들었던 집들이 여기저기서 문을 닫았다.

 

한참 성장기에 접어든 나는 또 주위의 눈치와 허기 때문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내어야 했다. 이런 나의 사정 앞에는 상의할 곳은 물론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게 말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오직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길거리를 쏘다니며 나를 원하는 곳이 있는가를 찾는 것뿐이었다. 온종일 행선지가 없는 발길을 재촉하며 시내의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대청동 미공보원 앞에 이르러 한낮의 강한 햇빛을 받으며 지치고 허기진 몸을 가누면서도 눈망울만은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나의 시야엔 어느 집 담벽에 붙어 있는 흰 종이 위의 검은 붓글씨가 들어왔다.

 

나는 그곳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예감처럼 종이에는 구인광고의 내용이 쓰여 있었다. 사원모집 광고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오래간만에 찾은 구인광고를 보고 포기할 수가 없었다.

 

내 머리 속은 잠시 어지러웠다. 부딪쳐 보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일어났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밤새도록 몇 장의 종이를 버려 가면서 이력서를 썼다. 볼품없는 얼굴이었지만 빨래 비누로 때를 씻었다.

 

옆집의 내 또래 친구의 바지를 빌려 입고 와이셔츠는 형이 씻으려고 벗어 놓은 것을 집어 입었다.

 

나 자신의 이력이 아닌 구인광고의 조건에 맞추어 꾸민 이력서를 들고 대청동에 있는 조선일보 부산지사의 간판이 붙은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세 살이나 올려 쓴 나이, 게다가 사실이 아닌, 고등학교의 학력 등 나로서는 양심까지 속이면서 조작한 내용들이 적힌 이력서였다. 이렇게 엉터리로 꾸며 쓴 서류도 그 쪽에서 원하는 요구에 비하면 미비점이 많았다.

 

당시 조선일보 부산 지사장이었던 곽도산 씨는 총무 부장으로부터 서류를 받아들고 한참이나 나의 얼굴을 보더니 뜻밖에 잘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의 떨리는 대답을 듣고 그 사람은 내일 아침부터 출근을 하라고 했다. 봉급은 당시 돈으로 일만 오천 원, 그리고 잘 할 땐 수당도 준다고 했다.

 

나는 조선일보사의 부산지사 사무실을 나올 때 내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꿈일까 생시일까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그날 저녁은 무슨 일 때문인지 언짢은 표정이던 형수에게 취직이 되었다는 말과 일만 오천 원의 월급을 받게 되었다는 말을 전해 주었더니 그도 얼굴을 활짝 피우며 정말이냐고 따진다.

 

내가 회사에 취직되기까지 경과를 이야기하자 당장 출근하려면 옷이 있어야 할 텐데 하고 걱정을 해 준다. 그 날 저녁 나는 중국인의 솥 공장에서 일할 때 산 군복을 물들인 옷을 손질해 입고 다음날 출근을 했다.

 

처음 내가 맡은 일은 신문 배달원의 배달감독과 애독자 구독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나는 서구 쪽 지역의 총무직책을 맡았으며 당장 활동을 하게 되었다.

 

배달원을 따라 다니며 한 집씩 나의 구역 내의 독자 집을 확인하고 머리속에다가 집어넣어야 했다.

 

나는 이곳에서도 같은 일을 하던 사원 중에 나이가 가장 어렸다. 실제로는 배달원이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애들이 반이나 넘었다.

 

나는 이런 결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남들보다 애를 써서 일했다. 밤이면 천자문 책을 사다 놓고 한문 익히기에 열중하기도 했다.

 

내가 나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2개월이 채 못 되어 여러 사람들한테서 특히 그곳 지사장으로부터 성실하다는 말을 들었다.

 

나보다도 나이가 더 먹은 고등학교 3학년인 배달원을 데리고 다니면서 미수금 독촉을 하였고 새로운 신문 구독자 확장에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러니 지사 내에서 구역별 수금 및 확장 부수에 1위를 하였다. 지사장은 나를 새롭게 신임해 주었다. 나는 신문사에서 하는 업무에 대한 일에 더욱 익숙해졌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동료 직원들은 나를 친절하게 대해 준다.

 

나는 매일매일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도박이 심하고 가정을 돌볼 줄 모르는 형이 종종 사무실 앞에 찾아와서 돈을 빌려 달라고 했다.

 

월급을 받으면 집에 보내 주는 데도 형의 요구는 잦아졌다. 어떤 날은 배달원이 수금해 온 돈을 빌려 주지 않는다고 어린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다가 요구 조건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막말을 하고 욕설을 하는 것이 예사였다. 나는 형을 볼 때마다 마음이 괴로웠다. 불쌍한 형, 나는 이런 형 때문에 몇 달이 지나도 옷 한 벌 사 입지 못했다. 나는 언제나 분주했다.

 

4월이 되면서 연일 학생들이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며 시내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경쟁이나 하듯 길거리를 메우며 데모를 했다. 신문은 이런 사실을 과장하여 보도하고 흥분한 시민들이 데모대에 박수를 치고 연일 아우성이다.

 

그러니까 4·19의거가 일어난 것이다. 시내엔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무장한 군인을 거리마다 길목에서 보게 됐다. 사람들은 더욱 극성을 부렸다. 이런 행동은 사람들의 오기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마음을 흥분시킨 나날 속에서 거리엔 담화문이 나붙었지만 사람들은 보지도 않았다.

 

미래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결정하지도 않은 채 남이 하니깐 나도 외친다는 식의 데모대의 숫자는 불어났고 흥분은 봄철에 열기를 더해 갔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자리를 물러나겠다는 하야 성명을 냈다. 경무대를 나서는 사진이 신문을 통해 온 사회에 전해졌고 하루아침에 집권당이었던 자유당이 몰락했다.

 

세상의 인심이 또 바뀐다. 그동안 자유당 정권 밑에서 그 정책에 반대하던 글을 실었던 탓으로 폐간되었던 경향신문이 그런 일이 있은 다음 날 복간된 것이다.

 

천주교 재단에서 발행하던 경향신문이 새로 복간됨에 따라 전국에는 새로운 조직과 보급망이 형성되었고 조선일보 지사장이었던 곽도산 씨는 경향신문 부산 지사를 다시 인수했다.

 

조선일보는 다른 지사장 앞으로 넘어갔다. 영업 사원들의 반은 경향신문으로 반은 조선일보로 갈라졌다. 나는 곽도산 씨가 짜 놓은 인사계획에 의하여 경향신문으로 갔다.

 

대청동에 있던 조선일보의 간판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바로 같은 자리에 경향신문의 간판이 나붙었다. 내가 이곳에서 새로 맞게 된 구역은 초량을 중심으로 한 동구 쪽이었다.

 

나는 이곳에서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다른 곳보다 많은 애독자를 확보하였고 운영도 잘해 나갔다. 나보다 나이가 더 먹은 배달원들과도 순조롭게 일들을 처리해 나갔고 구역에 대한 활동도 힘이 있어 보였다.

 

그런 몇 달 후였다. 내가 관리하던 지역이 지국으로 떨어져 나갔다. 지국에서는 인수인계를 해 갔다. 이제 나는 지사 내에서 내근 근무를 하면서 부실한 지국을 인수하고 관리하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나는 요령을 피우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오직 지시된 사항에만 의지하였고 그러니까 문제를 생기게 하지 않았다.

 

신문에 대한 경험과 보급 과정의 관리에 소홀히 했던 사람들은 몇 개월이 못가서 손해를 입게 되었고 지국을 지사로 넘겨왔다. 참으로 내게는 바쁘게 된 한 해였다.

 

이제 나는 열일곱 살이 되어가고 있었다. 설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초량 지국장이 나를 찾아왔다. 나를 보고 일을 좀 돌보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지사장에게도 매달린 모양이었다. 지사장은 곤란한지 나에게 의향을 물어 보라고 하며 모든 것을 나에게 미루었다.

 

지국장은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지사장이 승낙하였으니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통사정이었다.

 

세상의 경험이 부족했던 나는 이럴 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그만 지국장의 요청을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인 줄 알았다.

 

숙식을 제공하겠다는 지국장의 말에 따라 지국장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한 달이 지나니 약속은 이행되지 않는 것을 알았다. 나는 지국장의 말에 속아 내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곳을 떠나오려고 해도 지국장의 처남인 당시 초량 바닥에서 제법 악돌이로 소문 나 있었던 27세 가량의 제대군인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두 달 동안이나 그들에게 억눌려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나는 그곳을 빠져 나오기 위해 요령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내가 하는 일이 그렇게 신통하지 못하니깐 지국장은 슬그머니 나를 놓아 주면서 끝까지 엄포를 놓았다.

 

부산에는 봄이 서서히 오고 있었다. 나는 당장 실업자가 되어 직장을 구해야 했다.

 

영도로 이사와 살고 있는 누나 집으로 찾아 갔다. 누나는 나를 보고 반가워하면서도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걱정하는 눈치였다.

 

나는 나의 사정 이야기를 하고 며칠만 쉬겠다고 나의 뜻을 전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누이의 손에다 지니고 있던 돈 얼마를 건네주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할일 없이 거리로 쏘다녔다. 나 자신의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길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어느 오후였다.

 

대청동에 있었던 경남지역 병사구사령부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담벽에 부쳐둔 신병 모집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나는 그 벽 쪽으로 걸어갔다. 한 자씩 벽면의 글을 읽어 가면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군대나 지원할까 하는 마음이었다.

 

당장 나의 발길은 앞에 있는 대서소에 들어가서 3군 지원병 모집 절차와 구비서류를 알아보았다.

 

 

10. 소년 지원병

 

해군과 공군은 인기가 있어 지원하는 데 상당한 돈이 든다고 들 했다.

 

나는 비교적 지원 입대가 수월한 육군하사관 쪽을 선택하였다.

 

대서소에서 부탁을 하여 지원자 양식에다 써 넣어야 할 사항을 기재하고 나니 대서소의 사람이 접수증을 받아다 주면서 신체검사의 날짜와 필기시험 날짜들을 알려 주었다.

 

대서소를 나오니 나의 머리속에는 유니폼을 입은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로 군인이 될 수 있을까.

 

군인이 된 나 자신의 모습을 그리면서 며칠 남은 날짜들을 기다렸다. 군대의 지원 서류를 접수시킨 뒤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신체검사였다. 가슴둘레가 키의 절반이 못되었던 나는 지원병으로서는 너무 신체가 여윈 편이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생기는 걱정과 기대가 교차되는 가운데 며칠이 지나간 뒤였다.

 

필기시험을 치른다는 날 병사구사령부의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던 집합 장소인 동광국민학교 운동장으로 찾아가니 100여명의 지원자들이 여기저기서 우울한 표정으로 모여 들었다.

 

접수증이 수험표로 바뀌어졌다. 다른 소년들도 사정이 있어 군대에 지원을 했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막상 이런 장소에 나와 보니 마음은 우울하기만 하였다.

 

필기시험이란 것은 형식뿐인 상식 문제였다.

 

다음날 또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시청 옆에 있던 제5 육군병원에서 실시되었다. 나는 판정관의 앞을 지나면서 불합격이 될까봐 몹시도 마음을 졸였다.

 

허약해 보이는 내 외모가 이런 곳에 와서도 문제가 되었다. 신경이 쓰이는 것은 가슴둘레였다. 키의 2분의 1이 되지 않으면 불합격이 된다는 주위의 지원병들로부터 들은 말이 부담이 되었다.

 

키를 잴 때는 움츠려 보았고, 가슴둘레를 잴 때는 배 속에 숨을 빼고 가슴둘레를 조금이라도 키워보고자 애를 썼다. 그런데도 신체검사 기록표의 기록이 아슬아슬 하게 키의 절반이 되지 못했다. 나는 안타까웠다.

 

모든 신체검사의 절차가 끝났다. 지원자들은 현역 군인인 인솔자로부터 해산해도 좋다는 말을 듣고는 병원 밖으로 뿔뿔이 헤어졌다.

 

나는 견디기 힘든 고독감을 느꼈다. 가만히 있다가는 기피자가 많은 세상에 군대 지원도 못하는 병신 꼴이 될 것 같았다.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당시 돈으로 150원이 있었다. 아리랑 담배 한 갑을 살 수 있는 돈은 되는 것이다.

 

나는 주위를 살펴 담배 한 갑을 샀다. 그리고는 열심히 병사구사령부 소속인 지원병 담당 군인이 걸어가고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가쁜 숨을 내쉬면서 일등중사였던 군인을 불러 세웠다. 마침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나의 지원병 번호를 외웠다. 그리고는 담배 한 갑을 그의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부탁합니다.」

 

쑥스럽게 웃으며 처음으로 어쩔 수 없는 일에 청탁을 했다. 군인은 병사구 쪽으로 걸어갔고 나는 뒤를 돌아 군인과 반대 방향으로 걸으면서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이제 내 인생의 새로운 모험을 두고 무척이나 가슴 두근거리는 날을 보냈다. 아리랑 담배 한 갑에 큰 기대를 걸면서도 혹시나 하는 불안감은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나의 모든 신경은 지원병 합격자 발표가 나는 날에 멈추어 있었다.

 

나는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 사령부의 담벽 위에 붙여진 종이 위에서 나의 지원번호를 무척이나 조급하게 찾았다. 나의 수험번호가 다른 사람들 번호 속에 끼어 있었다.

 

비로소 나의 마음은 오래간만에 안정된 기분이었으나 또 새로운 걱정거리와 기대가 나를 이상하게 만들었다.

 

육군지원병 모병 담당자가 그곳에 모인 소년들을 보고 몇 월 며칠, 부산역 광장에 몇 시까지 모이라고 일러 주고는 해산을 시켰다.

 

나는 당장 나에게 닥친 사정을 아무에게도 말할 곳이 없었다. 나의 이야기를 듣고 군의 지원을 만류해 줄 사람도 없었고 그렇다고 나의 앞날을 걱정해 줄 사람도 내게는 있을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비밀처럼 혼자 마음속에 감춘 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시간만 기다렸다.

 

내가 군에 입대하는 날 누나 집을 찾아가서 군대에 입대하는 사실을 알려도 몸조심하라는 인사조차 않는다. 형을 찾아가서 인사를 했으나 형도 말대꾸조차 해주지 않았다.

 

나는 어저께부터 속이 비어 있으면서도 또 점심을 거른 채 오후의 소집 시간에는 부산역으로 걸어서 나갔다. 다른 지원병들의 주위에는 전송자가 더러 있었다.

 

아무도 위로의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없는 내 주위가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했다.

 

군인 모병담당의 호루라기 소리에 마음이 긴장됐다. 나를 부르는 호명 소리에 크게 대답하며 줄에 끼어 서니 난생 처음 기차요금을 국방부가 물어 준 열차에 승차하게 됐다.

 

떠나려는 군용 완행열차의 기적이 울리자 기차 안에 탄 지원병들은 모두 밖을 내다보며 손을 흔든다. 나는 멍청히 나의 지정석에서 창밖의 하늘을 쳐다보며 어서 오늘이 지나가 버리기만을 원했다.

 

기차는 조그마한 역까지 빠뜨리지 않고 멈추고 떠나니 완행열차는 피로하고 허기진 몸에 지루한 마음까지 갖게 했다.

 

지원병이 탄 객차에서는 그때부터 노래소리가 흘러나왔다.

 

오후 4시에 출발한 기차가 자정이 넘어서야 대전역에 도착을 한다. 우리가 타고 가던 객차가 다른 기차로 옮겨 붙는 작업이 있더니 금방 기차의 안과 밖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말씨가 이젠 달라졌다.

 

호남선 안의 손님들은 전라도와 충청도 사투리로 나 같은 사람을 이방지대에 온 느낌을 가지게 했다.

 

기차의 움직이는 속도가 서울 쪽으로 올라가던 기관차가 끌 때보다 더 느린 느낌이었다.

 

좌석 주위에서는 조는 사람도 있었고 술기운 때문에 코를 고는 지원병도 있었다.

 

선잠 속에서 호루라기 소리를 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위는 아직 어둠뿐인, 먼동이 트지 않은 새벽녘이다.

 

부산에서 지원병을 태워왔던 두 대의 객차를 연무역에 떼어 놓은 호남선 완행열차가 시원하다는 듯 기적을 길게 울리며 금방 떠나가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멈추어 버린 객차를 바라보며 이젠 더 갈 곳도 없는 목적지에 온 것이 느껴졌다.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그 시간부터 지원병들인 우리 일행을 통제하기 시작하였고 열을 세워 호명을 하더니 물건짝처럼 부대의 트럭에 실어 군부대의 영내로 향해 달린다.

 

군복을 걸친 군인들이 위압적인 말을 썼다. 우리 일행은 마음속의 잡념을 빼앗기고 말았다.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는 군부대의 식사를 때에 맞추어 하게 된 것이다.

 

일정에 따라 신검대에 들어온 다음날 아침부터 우리 일행은 신체검사가 실시되었다. 징집되어 온 사람들은 불합격을 원하는 사람이 있어 사바사바 소리가 사방에 나돌았다.

 

지원병 중에서도 나이가 가장 아래에 끼었던 나는 이런 주위의 형편 속에서도 행여나 나에게 불합격이 떨어질까 봐 가슴을 조여 가며 신검대의 한 곳 한 곳을 통과했다. 신경이 많이 쓰여 졌다. 손엔 땀이 흥건히 고였다.

 

이틀이나 걸린 아슬아슬한 나의 마음은 합격이라는 판정을 받고서야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여느 사람들과 같이 다음날에는 군인으로서 처음 절차인 인식표 군번을 받았고 정식 군인으로 등록이 확인되고 그런 다음날에는 일주일간 머물렀던 신검대를 떠나 훈련소로 넘어 갔다.

 

훈련소에서는 당장 편성을 끝내더니 우리가 입고 갔던 사복을 깡그리 벗게 하고 양말부터 모자까지 군수품으로 지급을 해주었다. 또 개인의 장비가 지급되었다.

 

군복을 갈아입은 우리들 앞에는 훈련병으로서의 입소식을 갖게 했고 다음날이 되니 훈련소의 일정에 짜여진 대로 신병들이 겪는 처음 과정인 훈련이 실시되었다.

 

계급장을 붙인 기간 사병들의 엄포는 다수인 훈련병을 통솔하는데 말 한 마디가 충분한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긴장이 몸에 배인 탓 때문인지 날만 새면 훈련과 군인 수칙의 암기 그리고 지급된 장비의 청소관리 등으로 하루가 꽉 짜여 있었지만 마음속에서는 같은 일만 반복하니 지루하고 고된 느낌 속에 시간이 흘러갔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웬일인지 그 날은 훈련을 마치고 나니 주위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훈련병을 막사 안에서 밖으로 나다니지 못하게 전달이 오는가 하면 기간 사병들이 무장을 하고 각자 막사에서 서성거렸다.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인가. 머리속에는 알 수 없는 궁금증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날 나는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5·16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과 성공했다는 사실이었다.

 

작년의 4·19혁명 일 년 만에 또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하루의 짜여진 일과에 피로해 있으면서도 점점 알 수 없는 이런 사연 속에 세상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 하는 궁금증이 나의 마음을 메워갔다.

 

이런 생각을 잠시나마 자신으로부터 떼어놓을 양으로 혁명 같은 것은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부인하며 억지로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를 갖기로 했다.

 

다시 우리의 앞에는 아침이 왔고, 하루의 훈련이 시작되었다. 구슬프게 들리는 취침나팔 소리를 기다렸다가 하루의 밤을 새고 나니 또 다음날부터는 훈련을 마치고 쉬려는 우리들 앞에 암기사항 한 가지가 하루의 일과에서 늘어났다.

 

출처 : www.natureteaching.com/TATHAGATA/tujaeg/tujaeng_main.htm

'인물 > 이삼한(李三漢)'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외로운 투쟁(16~20)  (0) 2021.01.04
외로운 투쟁(11~15)  (0) 2021.01.04
업(業)이란?  (0) 2021.01.02
외로운 투쟁(1~5)  (0) 2021.01.01
자연의 가르침 이삼한(李三漢)  (0) 2021.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