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우리가 사는 세상
우리 모두는 하나
여태껏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기의 세상이자 파동의 세상이고, 우리가 인식하는 물질세계는 물리학적으로 볼 때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입체적 영상 혹은 홀로그램이며, 우주의 비밀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특히 인체는 눈에 보이는 육체와 그 육체를 에워싸고 있는 여러 층의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음을 살펴 보았는데, 이러한 인체의 구조는 우리의 진짜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브레넌이 "마치 촛불의 불빛 같은 에너지 장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이야기한 인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초에 불을 붙인 상태를 관찰해 보면 초에는 심지가 있고, 그 둘레를 감싸고 있는 촛불이 있으며, 불꽃의 경계를 넘어서면 촛불이 비치는 공간이 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촛불에서 나오는 빛의 범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촛불은 초를 중심으로 한 비교적 작은 면적만을 밝힐 수 있을 뿐 그 바깥의 어둠을 밝혀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빛의 입자, 즉 광자는 촛불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으로 방사되고 있다. 광자가 바깥으로 퍼져나감에 따라 빛의 밝기는 점차 감소하지만 아무리 촛불에서 멀리 떨어지더라도 광자가 소멸하여 사라지는 법은 없다. 따라서 촛불에서 나오는 빛은 우주 전체에 퍼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인체를 촛불에 비유하면 눈에 보이는 신체는 촛불에 해당되고, 신체를 둘러싸고 있는 에너지층들은 촛불에서 나오는 빛이 방사되는 공간에 해당된다. 그런데 촛불에서 나오는 빛의 입자가 아무리 촛불에서 멀리 떨어져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듯이, 인체에서 나오는 빛인 에너지도 무한히 퍼져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브레넌은 자신이 인체의 일곱 가지 에너지층을 확실히 볼 수 있고, 제8, 제9의 에너지층도 희미하게나마 인식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의 에너지층도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인체란 육체로 인식되는 가장 낮은 진동수의 에너지를 중심으로, 바깥으로 가면 갈수록 점점 밀도가 낮고 진동수가 높은 에너지로 구성되어 무한히 퍼져나가는 에너지 덩어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체를 눈에 보이는 육체를 중심으로 시공간에 무한히 뻗어나가는 하나의 에너지체로 인식한다면 우리가 여태껏 불확실하게 인식해 온 많은 사실들이 명확해진다. '나'라는 존재는 밀도는 가장 높고 진동수는 가장 적은 육체를 중심으로 온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에너지체이고, 나의 상대방도 똑같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에너지 덩어리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동식물들도 사방으로 에너지를 방사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무생물까지도 미약한 에너지를 방사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우주에는 무한히 퍼져나가는 수없이 많은 에너지 덩어리들이 존재하고, 우리가 텅 빈 공간으로 인식하는 허공에는 그 모든 존재들의 에너지가 아주 미세하기는 해도 서로 섞이고 융합된 채 존재한다. 그런데 인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에너지층일수록 더욱 근원적이고 본원적인 에너지라고 생각할 때, 텅 빈 우주 공간에 있는 에너지야말로 가장 근원적이고 본원적인 에너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각 개체를 중심으로 에너지가 허공으로 전개된다는 관점에서 우주를 파악하는 대신 그 반대 시각에서 우주를 보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허공에는 우주의 모든 존재를 잉태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근원적인 에너지인 천지기운이 가득하다. 이 근원적인 에너지에서 바깥으로 뻗어져 나오면 나올수록 점점 특정한 정보를 가진 에너지가 강해지고 마침내 이 특정 에너지가 하나의 개별화된 존재로 나타나게 된다. 나와 너, 그와 그녀 그리고 각각의 동식물들 모두가 특정 에너지가 강해지면서 개별화된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의 오감은 근원적기운에서 뻗어져나온 가장 개별화된 부분만을 인식할 수 있으며, 개별화된 부분이 바로 우리의 육신을 포함한 물질세계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진짜 나인 진아(眞我)는 허공의 근원적 기운이고, 우리가 이제까지 몸이라고 불러왔던 것은 진아와 연결되어 있는 물질적인 부분에 불과하다. 이 근원적 기운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과 모든 생명체의 진아이므로 결국 이 세상 모든 존재는 하나인 것이다.
인체의 에너지 장에 근거한 이러한 해석은 인도 우파니샤드에서 우주의 실재인 '브라만(Brahman)'과 브라만이 개별화되어 나타난 '아트만(Atman;자아)' 과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해석은 옛 성현들이 직관에 의해 나를 소아(小我)와 대아(大我)로 구분하거나 가아(假我)와 진아(眞我)로 구분하고, 대아 혹은 진아를 이 세상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한 바로 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3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실 나라고 하는 것은 기를 만들고 조절하는 나의 마음이다. 나의 마음은 나의 육신과 에너지체를 두루 관통하여 존재하고, 가장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나의 마음은 허공의 본원적인 에너지에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진정한 나의 마음은 우주의 텅 빈 허공에 존재하는 공심(空心)이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마음이다. 이것이 또한 우주심(宇宙心)이고 우리의 본성(本性)이다.
근원적 기운과 공심에 대한 위 설명은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3차원의 공간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우주의 진실과는 조금 다를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말해 주듯 보통 사람들이 오감으로 인식할 수 있는 절대적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는 바로 우리 곁에, 아니 우리 몸속에도 있다. 그렇다면 '우주의 텅 빈 허공에 존재하는 기운'이라고 할 때 그 허공은 우리에게 하늘로 인식되는 공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별과 별 사이의 허공일 수도 있고 동시에 우리 눈앞의 공간이나 인체 속 공간일 수도 있다.
우주의 만물이 하나의 근원적 기운에서 나왔고 이 세상 모든 존재는 하나라 생각할 때,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나의 또 다른 일면이며,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의 모습도 실상 나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또한 너와 나는 모두 다 똑같이 귀중한 존재이며, 우주적 관점에서 더 귀한 존재와 덜 귀한 존재를 구분할 수 없다. 단지 누가 앞서가고 누가 뒤쫓아 오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육체 뒤에 숨겨진 정신이 감동을 준다
텔레비전을 통하여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경기를 지켜보면서 때로는 인간의 육체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 때로는 그 빠르기와 강인함에 감탄한다. 여자체조나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보며 여성의 곡선미가 주는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장대높이뛰기를 하며 새처럼 하늘을 날아오르는 인간의 모습에서 경이로움을 느낀다. 넓이뛰기 경기에서는 토끼가 뜀박질을 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허들 경기에서는 평원에서 갖가지 장애물을 뛰어넘으며 달리는 준마들을 발견한다.
관객들은 선수가 최선을 다하는 장면을 보며 감동하고, 우승한 선수가 시상대에서 메달을 목에 걸고 감격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함께 가슴 뭉클함을 느낀다. 그 선수가 참고 이겨왔던 수많은 어려움과 노력, 인내를 생각하면 마치 자신이 보상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뿌듯해지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국가와 인종, 종교를 초월해 모두가 한마음이 된다. 이렇게 우리가 진정으로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동받는 것은 선수들의 아름답고 튼튼한 육체가 아니라 그 뒤에 숨겨져 있는 강인한 정신 때문이다.
이에 비해 근육질을 과시하는 보디빌딩 대회나 여성미를 뽐내는 미녀 선발대회는 우리에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런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은 오랜 세월을 인내하며 닦아온 기량이 아니라 육체 자체의 아름다움일 뿐이다.
육체의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 한정된 것일 뿐 모든 인류가 언제나 한결같이 느낄 수 있는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고 미인으로 뽑힌 미녀가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도 관객은 별다른 감동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공허함을 느낀다. 인간 정신의 승리, 인간 정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를 소중하게 여기고 육체로 많은 것을 표현한다. 다른 한편, 우리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 자체만을 추구하는 그 어떤 것에서도 깊은 감동은 받을 수 없다.
남녀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오랫동안 쫓아다녔던 여자라고 해도 품에 안는 순간 그녀의 얼음장같이 싸늘한 눈빛을 발견한다면 마음은 얼어붙고 육체적 열정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반면에 겉모습은 빼어나지 못해도 내면의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은 언젠가는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사귀는 남성에게도 진실한 감동을 주게 된다.
인간은 근원적 기운의 개별화된 존재이고, 육체는 우리가 생생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감각기관들로 구성된 인체의 물질화된 부분이다. 우리는 모두 에너지이며,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영속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육체는 때가 되면 폐기 처분된다. 이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내 몸이 바로 나 자신인 것은 아니다. 나는 육체와 에너지체를 관통해서 흐르는 에너지이고, 내 몸은 나의 가장 개별화된 부분으로 물질적인 것을 느끼고 만들어내는 기능을 수행할 뿐이다.
'내 몸이 바로 나는 아니다'라는 사실은 오히려 우리가 우리 몸을 더욱 소중하게 여겨야 할 이유를 제공해 준다. 우리는 몸이 있기에 체험을 할 수 있고, 체험을 할 수 있기에 영혼은 성장한다. 영혼이 머무를 수 있는 성전이 되어주고 체험을 통해 성장할 수 있게 해주는 우리의 몸은 소중하기 그지없는 존재이다.
일부 수련자들은 육체로 인해 인간이 타락한다는 생각 때문에 육체를 부정하거나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하는데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육체를 학대한다고 해서 우리의 마음이 다스려 지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신과 나눈 이야기
닐 도널드 월쉬(Neale Donald Walsch)는 미국의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토크쇼를 진행하며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여러 차례 이혼한 전력이 있고, 적은 수입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던 닐에게는 한 가지 독특한 버릇이 있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짜증이 날 때면 누군가에게 부치지도 않을 편지를 쓰곤 했는데, 그 편지에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모두 털어놓았다.
1992년 어느 봄날 밤, 닐은 이번에는 아예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되는 하느님, 즉 창조주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하느님에게 왜 내 인생에서 제대로 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지, 왜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행복하지 못한지, 왜 항상 경제적으로 쪼들려야만 하는지,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내 인생은 이렇게 힘이 드는지 등에 대하여 늘어놓았다. 그런데 그가 글을 다 쓰고 펜을 놓으려 할 때 알지 못할 힘이 그의 손목을 잡아 다시 펜을 움직이게 하고 글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닐의 질문에 대한 창조주의 대답이었다.
이때부터 닐은 수년 동안 창조주와 다양한 대화를 나누었고 이것이 《신과 나눈 이야기》(Conversations with God)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단기간에 미국에서만 수백만 권이 팔렸고, 전 세계 28개국 말로 번역 출판되었으며 또한 수십 개국에서 300여 개의 스터디 그룹이 만들어져 이 주제에 대해 토론하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신과 나눈 이야기》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지만 이를 종합하면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두 의견으로 나누어진다. 첫번째 의견은 창조주가 손을 움직여 글을 써서 보여준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설령 그러한 영적 체험이 나타난다고 해도 어떻게 몇 년 동안이나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믿을 수 없다는 말이다.
다른 의견은 약간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들이 닐의 머릿속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으며, 창조주 혹은 높은 영적인 존재와의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쓰여질 수 없는 글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 책을 읽은 많은 독자들은 책에 실려 있는 내용들이 한 개인이 머리를 쥐어짜서 만들 수 있는 이야기의 한계를 벗어나 있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신과 나눈 이야기》는 신과 인간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기독교의 이원론적 사고에 많은 자극과 각성을 제공한다. 인간은 무한한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인간이 곧 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임을 설득력있게 풀어나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오직 예수, 오직 교회만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틀에서 벗어나게 하고, 기독교 신앙에 회의적이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복음서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닐이 말한 창조주와의 대화란 실은 높은 영적 존재와의 채널링이라고 생각된다. 20세기 후반부터 서양에서 크게 성행하고 있는 채널링(Channeling)이란 현상은 육체를 가지지 않은 에너지적 존재와의 대화라고 할 수 있는데, 입에서 저절로 말이 나와 메시지가 전달되거나 손이 자동적으로 움직여져 글이 쓰여지는 등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어떤 사람은 닐이 자신의 본성(本性)과 대화를 나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본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때문이다. 불성, 신성, 혹은 앞서 언급한 우주의 공심(空心)과 같은 개념인 본성은 누구나 지니고 있는 우주 본래의 순수 에너지로서 세상의 움직임 등에 대한 사유 혹은 정보가 전혀 담겨져 있지 않은 에너지이다. 따라서 육체를 가진 인간이 본성과 대화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일부 수행자들이 참선이나 명상 중 본성을 느끼거나 본성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느끼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상위자아, 즉 자신의 육체가 아닌 높은 파동수의 에너지체에 근거한 자아를 일컫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은 한국에도 여러 명의 채널러가 활동하고 있는데, 이들 채널러와 전통적 영매 혹은 무당과의 차이는 메시지 혹은 정보를 전달해 주는 존재와의 관계에 있다. 채널러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존재와 대등한 수평적 관계를 유지한다면 영매는 종속적, 예속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채널러는 본인의 의사에 따라 채널러의 역할을 그만 둘 수도 있지만, 무당의 경우는 연결된 영적 존재에 예속되고 그의 의사를 거역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특별한 계기로 높은 영적 존재와 만났다 하더라도 그러한 만남을 통하여 우리가 듣거나 보았다고 느끼는 것 모두가 진리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신의 소리라고 판단되는 것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해도 그 소리는 결국 자신의 마음과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두뇌를 거쳐 나온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편견이나 고정관념들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의 영감에 의해 쓰여진 책이든 창조주와의 대화를 통해 쓰여진 책이라고 느끼든, 책의 글자 하나하나를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경전의 글자 하나하나를 완전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부 종교인들은 같은 책 안에서 서로 모순되는 내용을 발견하고 고민하게 되며, 성인의 근본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과 나눈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들이 아무리 감동적이어도 저자 자신이 이제까지 지니고 있던 관념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참자아 혹은 상위자아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깊은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 내면이란 더욱 근원적인 곳을 이야기하며, 사람의 에너지체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육체 깊은 곳이 아닌 육체를 둘러싸고 있는 에너지를 의미한다. 더욱 깊은 내면의 세계란 더욱 근원적인 에너지를 의미하고, 따라서 깊은 내면 속으로 찾아들어가 참자아를 만나라는 것은 결국 보다 높은 파동수의 에너지와 연결하라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또한 참자아를 찾기 위해 우리의 의식을 점점 확장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의식을 확장하면 할수록 우리 마음은 좀더 옅고 높은 진동수를 가진 에너지층을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깊은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도, 의식을 자꾸만 확장해야 하는 것도 우리 자신이 결국 우주의 근원적인 에너지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명상을 하면서 의식을 점점 확장시키면 나라는 존재가 나의 육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된다. 내가 나의 육체보다 점점 커지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더욱 깊은 명상 상태로 빠져들어 가다보면 궁극적으로는 내가 바로 우주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의식이 육체에 머물러 있다가 차츰차츰 더욱 근원적인 에너지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느끼는 황홀한 체험이다.
이러한 '우아일체(宇我一體)'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내가 바로 우주의 근원적 기운이고 내 마음이 바로 우주심임을 깨닫게 되며, 우주 만물이 결국 하나라는 우주의 전일성을 체험할 수 있다.
우주의 감시망, 걱정할 필요는 없다
브레넌이 말한 인체의 일곱번째 에너지층에는 전생의 기록들이 영상의 띠 같은 형태로 존재한다. 최면이나 명상을 통해 스스로 전생의 기록을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우리 의식이 육체에서 에너지층, 특히 일곱번째 에너지층으로 옮겨 감으로써 그곳에 있는 전생의 기록들을 열람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부 초능력자들은 유물이나 유품을 만져봄으로써 그것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영상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어떤 시대에 존재했던 인물이든 관계없이 그의 가장 종합적인 정보라고 할 수 있는 의식수준까지도 측정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의 말과 행동, 모든 생각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기에 의하여 기록되고 보관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기록들은 언제든 읽혀질 수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우주의 감시망'을 빠져나갈 수 없다. 이에 대해 호킨스 박사는 《의식혁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주는 잊는다는 것을 모른다. ……우주의 모든 것은 특정 파장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이 에너지 유형은 영원히 존재하며, 그 원리를 아는 사람들에 의해 읽혀질 수 있다. 모든 언어와 행동, 생각은 영원한 기록으로 남게 되고 저절로 알려지게 된다. 거기에는 어떤 비밀도 없고 아무것도 숨겨질 수 없다. 우리 영혼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시간 안에 벌거벗은 채 서 있다."
우리가 우주에 벌거벗고 서 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현대인들은 사생활의 비밀을 중요시하고 비밀 보장을 강조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조상들은 나지막한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이웃과 더불어 살면서 한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아파트가 널리 보급된 요즘은 이웃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것을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한다. 또 자신과 관련된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거래를 할 때도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사용한다.
이렇게 숨기고 싶은 것들이 많은 현대인들에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감쪽같이 해치울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조차 모두 우주에 기록된다는 사실은 상당한 불안감을 안겨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주는 결코 인간의 비리를 감시하고 추적해 징벌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니 우주에는 비리나 감시, 징벌 같은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에 누군가 과거의 말이나 행동, 생각으로 인해 사후에 심판을 받거나 벌을 받을까봐 걱정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잘못 주입된 고정관념 때문이다. 수백 수천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히틀러나 스탈린이 지금쯤 지옥에서 호된 맛을 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이 또한 잘못된 고정관념 때문이다. 고정관념에 대해서는 제8장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느낌으로 판단하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느낌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특히 그 느낌이 이성적 판단과 일치하지 않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사실 느낌은 간단한 수학 문제 풀기처럼 두뇌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에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정치인이 중대한 정치적 결정을 하거나 기업인이 중요한 사업적 결정을 해야 할 경우, 혹은 일반인들이 정리가 잘 되지 않는 복잡한 의사결정을 해야 할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성으로 판단해 결정했을 때와 느낌에 의존해 결정했을 때 어느 쪽이 더 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아마도 느낌에 따른 결정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고, 느낌이 강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를 기(氣)적인 관점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이성과 두뇌에 근거하여 의사결정을 할 때 우리는 오감을 통해서 인식된 정보에만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이 아무리 합리적이라고 할지라도 극히 한정된 정보에 근거하여 결정하게 된다. 반면 우리의 느낌을 적극 활용한다면 보다 많은 정보를 이용하게 되어 보다 나은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느낌은 많은 경우 기적인 감각에서 오고, 기적 감각은 오감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정보들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위대한 정치인이나 기업인, 뛰어난 수사관 중에는 느낌이나 육감, 영감에 의존해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깊은 수련이나 명상 중에 받는 느낌은 상위자아로부터 받는 메시지인 경우가 많다.
느낌은 종종 마음의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왠지 모르게 답답하고 불편한 데도 왜 불편한지 정확히 알지 못할 때가 있다. 이러한 상태는 우리의 두뇌가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인 것을 그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즉, 두뇌는 모르고 있지만 더욱 깊은 차원에서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음을 알고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은 불편해지는 것이다. 수련을 통해 기감이 살아나고 맑아질수록 마음의 불편함을 더 자주, 더 강하게 느끼게 된다. 이는 우리들이 더 깊은 차원과 좀더 잘 소통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느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기적 감각을 증대시켜야 하는데 이는 명상이나 기 수련등을 통해 경혈 혹은 혈자리라고 불리는 부분을 활짝 열어줌으로써 가능하다. 육체와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체의 연결 통로 역할을 하는 경혈들이 활짝 열리면 육체와 에너지층 사이의 기 순환이 왕성해지는 것은 물론 우리의 에너지체가 알고 있는 정보들이 느낌이라는 형태로 두뇌에 전달된다. 따라서 기감이 발달한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빠르고 정확하다. 즉, 직관력이 개발되는 것이다.
느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기 수련 등을 통해 경혈을 열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받는 느낌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느낌을 받더라도 그 느낌이 우리의 합리적 사고와 다를 때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 실제 어떤 느낌을 받고 있을 때에도 '내가 과연 느낌을 받고 있을까?' 하며 의심하는 경우도 많다.
느낌을 무시하거나 의심하는 것을 중단하고 그 느낌에 집중하게 되면 느낌은 점점 강해지고, 강해진 느낌은 어느새 우리의 새로운 감각으로 자리잡게 된다.
기 수련은 기를 느끼는 데서 시작된다
기 수련이란 한마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기 에너지로 가득한 세상임을 인지하고 기의 원리를 이해함으로써 신체적 · 정신적 건강을 도모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기 수련은 우리 몸의 에너지 순환을 촉진시켜 신체적 건강을 증진시키고 기감을 발달시켜 우주의 많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이렇게 우주의 정보와 접하게 되면 우리 삶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고 따라서 마음은 자연히 안정을 찾게 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기는 우주 공간에 가득한 생명의 에너지이며 모든 생명체의 생명현상과 무생물의 움직임까지 주관하고 있다. 기 수련은 생명체와 우주의 기를 느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기를 느끼는 수련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몸에서 방사되는 기 에너지를 느끼는 데서 시작한다. 기를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오감을 정지시키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기는 우리의 오감으로 인지될 수 없는 것이고, 또 오감을 통한 인식의 강도는 기감을 통해 인식되는 것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에 의식이 오감에 머무르고 있는 한 기적인 느낌은 감지되기 어렵다. 따라서 기를 느끼기 위해서는 오감을 일시적으로 중지시키거나 완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처럼 '오감을 멈춘다'는 의미에서 기를 느끼는 수련을 '지감(止感) 수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감 수련의 요령은 다음과 같다. 먼저 두 손을 가슴 앞에서 서로 마주보는 상태로 하여 약 1~2cm 정도 띄운다. 모든 의식을 두 손바닥 사이에 집중하고 호흡과 일치시켜 두 손을 천천히 벌리고 모으기를 반복한다. 숨을 들이쉴 때 두 손을 벌리고, 숨을 내쉴 때 두 손을 모으는 것이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지만 수련을 계속하다 보면 두 손바닥 사이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찌릿찌릿한 느낌이 오기도 하고, 서로 당기거나 밀치는 자력감을 느낄 수도 있으며, 따뜻한 열감을 느낄 때도 있다. 수련을 계속할수록 그 느낌은 강해지고 두 손바닥 사이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기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기적 감각은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한다. 몸 안에서 경락이라는 기의 통로를 따라 돌고 있는 내기는 감정 같은 마음의 작용에 의해 오염되어 서서히 탁해진다. 따라서 신체적 ·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기가 몸 바깥의 외기와 끊임없이 교환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몸 안의 탁한 기운을 바깥으로 배출시키고 대신 외부의 맑은 기운을 몸 안으로 받아들이는 에너지 교환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때 우리의 신체에 기적인 조화가 유지되고, 건강이 유지될 수 있다.
이러한 에너지 교환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몸 안팎의 기가 들락거리는 문의 역할을 하는 경혈이 열려야 한다. 경혈은 어릴 적에는 열려 있으나 나이가 들수록 막히는 경향이 있고, 특히 부정적 사고를 많이 하는 경우 몸의 기운이 탁해져서 빨리 막혀버린다. 이렇게 막힌 경혈을 뚫어 기운이 몸 안팎으로 잘 교환될 수 있게 함으로써 기적인 감각은 회복되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경혈들이 활짝 열려 있을수록 바깥의 기를 많이 받아들일 수 있어서 느낌은 강해지고 정확해진다.
몸의 어느 부분에 있는 경혈들이 열리느냐에 따라 그 효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배 아래쪽 하단전 부근의 경혈들이 열리면 주로 신체적 건강이 증진된다. 가슴을 중심으로 한 중단전 부근 경혈들이 열리면 사랑이 커지고 의식이 성장하고, 머리를 중심으로 한 상단전 부근 경혈들이 열리면 영능력이 계발되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전통적 선도수련에서는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의 순서대로 수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이는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거나 마음의 수련이 덜 된 상태에서 영능력이 개발될 때 발생할 수도 있는 부작용을 우려해서 나온 말인 것으로 생각된다. 일부 수련자들은 이를 확대 해석해 반드시 하단전이 완성된 다음 중단전 수련을 시작하고, 중단전이 완성된 다음 상단전 수련을 시작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순차적 수련법을 따르게 되면 평생을 기 수련에 바친다 해도 상단전 수련으로 들어가기 어렵다. 오랜 세월에 걸쳐 하단전을 완성시키고 그 다음 중단전 수련으로 들어가는 경우, 여생을 이곳에 머물게 되어 사실상 상단전을 수련할 기회가 사실상 사라지게 된다. 수련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음, 즉 혼의 완성이고 이는 곧 중단전의 완성을 뜻하므로 중단전이 완성되면 상단전 수련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상․중․하단전을 동시에 개발시키는 수련법이 바람직해 보인다. 몇 가지만 조심한다면 상단전을 먼저 개발시킨 후 백회나 전정혈에서 들어오는 기운을 아래로 내려주어 하단전을 개발시키는 것도 효과적인 수련법이 될 수 있다. 상단전을 수련할 때는 의식이 머리 쪽에 있기 때문에 기운이 위로 쏠리기 쉬운데, 이럴 경우 적절한 도인체조나 절 수련으로 조절해 주어야 한다.
닫혀 있는 경혈들을 열어주는 것은 기 수련에 있어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단계로 '개혈(開穴) 수련'이라고 한다. 경혈들을 열어주기 위해서는 먼저 근육을 충분히 이완시킨 상태에서 기를 제어할 수 있는 우리 마음의 힘을 이용해 막힌 혈자리를을 뚫어주는데, 이때 기의 또 다른 형태인 소리를 동시에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즉, 우리의 의식을 뚫어주고자 하는 경혈에 의식을 집중하고 큰소리를 내거나 듣게 함으로써 비교적 쉽게 개혈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렇게 경혈이 열리기 시작하면 그 부위에 스멀스멀한 느낌이 나 옥죄는 듯한 느낌,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이 오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느낌이 강해진다. 반드시 열어주어야 할 중요한 경혈로는 양손 한복판에 있는 장심혈을 비롯해 발바닥의 용천혈, 단전호흡을 할 때 기가 들어오는 배꼽 정반대 위치에 있는 명문혈, 에너지 교환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머리끝 정수리 부근의 백회혈, 이마 중간의 인당혈, 가슴 한가운데 있는 단중혈 등을 꼽을 수 있다.
중요한 혈자리들이 열리게 되면 단전호흡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단전호흡이란 코로 숨을 쉬는 동시에 경혈을 통해 바깥 기운이 들어와 하단전에 모이는 수련법을 이야기하는데, 국선도와 단학선원에서는 명문혈을 통해 기운이 들어오는 명문호흡을 이야기한다. 일부 기 수련자들은 단전호흡을 복식호흡과 같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호흡에 맞추어 혈자리를 통해 몸 바깥의 기운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단전호흡이라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경혈들이 열린 상태에서 숨을 들이쉬면 아랫배가 불룩 나오면서 몸의 혈자리로 바깥의 기운이 들어와 단전에 모이고, 숨을 내쉴 때는 아랫배가 들어가면서 경혈들을 통해 몸 안의 탁한 기운이 빠져나간다. 단전호흡을 계속하게 되면 몸 안에 기운이 충만하게 되어 몸 전체에 기운이 돌게 되고, 이에 따라 힘이 생기고 질병 치유와 예방 효과가 나타난다. 단전호흡이 우리 몸의 면역력과 자연 치유력을 크게 증가시킨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 결과들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기 수련을 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으로는 명현현상(瞑眩現想)과 주화입마(走火入魔) 를 꼽을 수 있다. 명현현상은 주로 수련 초기에 나타나는 것으로, 수련을 통해 기가 왕성해진 상태에서 경락이 막혀 있으면 몸 안의 기운이 제대로 순환되지 못해 겪게 되는 몸살 같은 증세를 겪게된다. 이러한 명현현상은 보통 계속적인 수련을 통해 경락들이 열리면서 자연스레 사라지므로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에 반해, 주화입마란 기공을 단련해 가는 과정에서 기적인 부조화가 초래되어 환각이나 환청이 일어나고, 심할 경우 발작 증세가 일어나는 상태를 이야기한다. 주화입마는 주로 수련자가 호흡 수련을 할 때 숨을 오래 참으려고 억지로 노력함으로써 나타나는 부작용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무술 차원이 아닌 건강 차원에서 기 수련을 할 때는 절대로 무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호흡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작용에 대한 걱정 없이 집에서 혼자 쉽게 할 수 있는 수련법으로는 절 수련을 들 수 있다. 절 수련은 절대적 존재에게 경배하거나 무엇인가를 염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에너지를 정화시키고 마음을 밝히기 위한 수련법인데, 단순하지만 매우 효과가 있다. 수련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몸을 낮추는 불교식 절보다는 두 팔을 쭉 뻗어 머리 위에서 합장한 채 몸을 숙이며 합장한 손을 밑으로 끌어내리는 형태가 좋다.
이러한 절 수련을 통해 경혈이 열리고 기혈순환이 촉진되면 자연스럽게 단전호흡이 이루어지고 몸은 유연성이 증가한다. 특히 수련을 할 때는 의식을 몸에 집중함으로써 그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다. 매일 일정한 횟수(예:103배, 108배 등)의 절 수련을 '밥 먹듯이' 꾸준히 하면 몸에서 탁한 기운이 제거되고 몸의 건강은 물론 마음의 안정과 영적인 성장까지도 도모할 수 있다.
가끔씩 300배, 500배, 1,000배 혹은 3,000배의 절을 하는 것은 몸을 정화시키고 인내심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 절 수련 직후에 우리 몸은 완전히 이완되고 경혈은 열린 상태가 되는데, 이때 눈을 감고 20~30분 정도 명상을 하면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내가 체험한 기의 세계
원리적으로 볼 때 기 수련은 다른 어떤 운동이나 수련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시일 안에 효과적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적인 건강을 회복시켜 준다. 기 수련은 무엇보다 몸 안의 기운이 잘 돌게 해줄 뿐만 아니라 몸의 경혈들을 활짝 열어 줌으로써 육체와 에너지체 간의 기적 순환을 원활하게 하여 심신의 건강을 회복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기 수련은 신체의 경혈들을 열어 줌으로써 우리가 우주의 더 많은 정보를 느낌의 형태로 받아들이게 해주고, 의식을 점차 확장시켜 줌으로써 참 나를 찾고 우주의 근본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기 수련이 다른 정신 수련법들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수련자들이 수련을 통해 다양한 기적 체험을 하게 되고 이에 따라 더 쉽게, 더 깊게 수련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최초로 기적 체험을 한 것은 수련한 지 약 20일 정도 지나서였다. 지감 수련을 할 때 손바닥의 장심혈로 조금씩 기운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 느낌은 점점 강해져서 나중에는 끈적끈적한 물체가 양 손바닥에 붙어 있는 듯한 느낌으로 변했다.
그 다음 체험은 개혈 수련을 할 때 왔다. 양 손을 직각으로 꺽은채에서 양 팔을 앞으로 쭉 뻗은 기마자세로 서 있었는데, 갑자기 양 손의 장심혈로 말할 수 없이 강력한 무언가가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강철로 된 굵은 말뚝이 손바닥에서 어깨 사이에 콱 박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약 20분 동안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 있어야만 했다. 그 다음에는 배꼽 뒤의 명문혈이 열리면서 등이 뜨듯해지는 것을 경험했고, 특히 추운 겨울철에 자동차를 운전할 때 등허리가 뜨듯해지는 기분 좋은 경험들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수련을 시작한 지 약 1년이 지날 무렵부터는 머리 부근에 있는 혈자리와 관련된 다양한 체험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체험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처음에는 이마 중간에 있는 인당혈에 압력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어서 머리끝 백회혈과 그 앞쪽 전정혈이 차례로 죄어오는 듯이 아팠는데, 이러한 증상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이따금 하늘의 기운이 이 혈자리들을 통해 쏟아져 들어와 온 머리를 얼려버리고 가슴을 뜨듯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떨 때는 차가운 기름이 머리 끝에서부터 꿀렁거리며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몇 시간씩 혹은 며칠씩 계속되기도 했다.
머리 부근의 수많은 혈자리들이 제각기 들락날락하며 숨을 쉬기 시작해 얼굴 전체가 짓뭉개진 것 같은 느낌도 자주 받았는데, 한번은 얼굴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 궁금해서 수련 후에 얼른 거울을 본 적도 있다.
한동안은 하늘의 기운이 굵고 투명한 관을 통해 머리 앞부분으로 끊임없이 들어오고, 내가 어디를 가든 그 관이 따라다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상단전 혈자리들이 비교적 조용하게 숨을 쉬는 듯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이때를 즈음해 눈을 감으면 수많은 파장들이 이마와 머리에 와닿는 듯한 느낌이 강해졌고, 또 기운의 움직임이 빛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의념(意念)으로 소주천(小周天 : 상체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임맥과 독맥이라고 불리는 경락을 통해 기를 돌리는 것)을 몇 번 돌리면 온 몸이 빛으로 변하는 체험을 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하늘의 맑은 기운이 계속 백회나 전정혈을 통해 들어와서 언제나 머리가 시원하게 느껴졌고, 잠을 자려고 눈을 감아도 보름달 못지않은 밝은 빛에 휩싸여 있는 것을 느꼈으며, 눈을 감고 있을 때가 눈을 뜨고 있을 때보다 더 밝게 느껴지는 경우도 흔했다.
이러한 기적 체험들이 일어나면서 정신적인 면에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였다. 한동안은 사람들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져 모든 사람들을 껴안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특히 한밤중에 수련을 할 때 사람들이 남이라는 생각이 사라지고 모두 사랑스러운 내 형제자매들로 느껴지는 순간이 많았는데, 아마도 그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면 오해받을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세상 모든 것이 너무나 아름답고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기쁨과 환희에 젖기도 했다. 세상이 너무나 평화롭고 조화롭게 느껴지면서 마음이 잔잔한 호수 같다는 말이 실감났고, 운전하다가 다른 차가 불쑥 끼어들어도 별다른 마음의 동요가 없을 정도로 평온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때를 전후해 세상 돌아가는 일들에는 관심이 없어져서 두 종류나 받아보던 경제신문은 물론 일간지와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몇 개월을 보내기도 했다.
동시에 잠재능력도 조금씩 계발되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 파장과 빛의 형태로 기의 움직임을 강하게 느꼈고, 잠들기 직전이나 잠에서 깨어난 직후에는 선명한 영상들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상상하면 그것이 내면의 눈으로 선명하게 보였고, 눈을 감고 뇌파가 떨어진 상태에서 나 자신에 집중하면 나의 신체가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선명하지는 않지만 흑백 X-레이 사진처럼 보이는 것으로, 골격만 보겠다고 마음 먹으면 골격만 보였고 장기(臟器)만 보겠다고 마음 먹으면 장기만 보였다. 또 신체 각 부분의 탁하고 맑은 상태가 곧바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렇게 나의 잠재능력은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하였지만, 이후 더 이상의 개발은 중단되었다. 내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를 알게 되고 나의 나아갈 길이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잠재 능력의 개발이 나의 길을 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면서 그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늘의 기운이 상단전의 혈자리들을 통해 들어와 나의 몸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작업, 즉 환골탈태(換骨奪胎)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도 높게 진행되고 있다. 근래 들어서는 몸 전체가 하늘의 기운에 푹 빠져 있는 느낌 속에서 상단전의 혈자리들, 특히 인당혈이 받는 심한 압박감으로 인해 밤잠을 설치는 경우가 흔해졌다.
이러한 나의 수련 체험은 기수련자 뿐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수련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정신수련자들의 체험 중 자신의 마음이 연관된 영적인 현상은 너무나 다양해서 체험의 공통성이 결여되어 있는 반면, 기운의 유통으로 인한 체험은 공통성이 있다. 나의 체험들은 몸 안의 기운이 잘 돌고 상단전의 혈자리들이 많이 열린 상태가 되어 기의 순환이 빛의 움직임으로 감지되어 겪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다른 수련자들에게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일부 독자들은 앞서 소개한 나의 기 체험들이 낯설고 또 믿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그 체험들은 결코 과장되게 기술된 것이 아니며, 그 대부분은 지금도 눈만 감으면 나에게 바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모든 것이 기로 운행되는 세계에서 그것은 결코 놀라운 일도, 신비로운 일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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