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휘용/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제8장 깨달음을 향하여

기른장 2021. 2. 7. 20:04

제8장 깨달음을 향하여

사람은 저마다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본다


우리는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또한 각기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주어진 시대와 사회 환경은 같다 할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인지하느냐 하는 것은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 본 세상이 어른이 되어 인식하는 세상과 아주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다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나에게 기억되어 있는 고향집은 마을 입구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고 초가지붕은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막상 어른이 되어 다시 고향을 찾고 보면 고향집은 마을 어귀 바로 근방이고 초가지붕은 유난히도 낮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들이 저마다 세상을 다르게 인식하는 것은 신체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원인은 우리들 각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데 있다. 수치심과 절망감에 빠져 살면서 세상을 염세주의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것으로 비춰진다.

 

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축복으로 생각되고 세상이 너무나 평화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들에게는 세상의 어떤 것도 걱정할 일이 못되고, 세상의 어떤 사람도 자신에게 진정한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호킨스 박사는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의식수준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하고, 20여 년 동안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왔다. 그는 의식수준을 "개개인이 세상을 판단하고 분석할 때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인식 방식" 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그가 이야기하는 의식수준은 앞서 말한 단순한 '관점의 차이'라는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의식수준이라는 말에는 진화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관점의 차이를 이야기할 때는 무엇이 '더 좋은 것'이라든가 '진화된 것'이라든가 하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의식수준은 인간의 진화에 따라 의식수준이 점점 높아져 간다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호킨스 박사가 이야기하는 의식수준의 의미를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가 든 예를 한 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지금 허리가 굽고 옷차림이 아주 남루한 한 노인이 부자 동네 화려한 집 앞을 서성이고 있다. 이 모습을 본 어떤 사람은 '왜 젊을 때 좀더 열심히 일하지 않았을까?' 하고 노인을 무력하고 창피한 존재로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저 노인이 언제 도둑으로 변할지 모르니 경계해야겠군' 하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 빈부격차를 해소시키지 못해 저런 노인이 있게 한 사회제도가 문제야' 하고 생각하고, 또 다른 사람은 '노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다른 모습이야'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렇게 동일한 사건을 보고도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천차만별인데, 이처럼 같은 사건을 주관적으로 각기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의식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의식수준은 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 세상에 발생하는 사건들에 어떤 감정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호킨스 박사는 인체의 근육 반응을 이용해 의식수준을 1에서 1,000까지의 수치로 측정했다. 다음 페이지에 보이는 표는 앞에서 살펴 본 '남루한 노인'의 예와 결부시켜 인간의 의식수준을 정리해 본 것이다.


호킨스박사는 의식의 지도, 즉 각 의식수준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을 제시하고있다. 200이라는 수치는 내재된 '진실한 힘(power)'과 눈에 보이는 '억지스런 힘(force)'의 분기점을 표시하는데, 대체로 의식수준 200 미만인 사람들은 살아남기에 급급한 파괴적인 삶을 사는 반면 의식수준 200 이상인 사람들은 대체로 건설적인 삶을 산다고 한다. 의식수준 350은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에너지가 강해지는 수준을 말하며, 500은 사랑의 에너지, 540은 환희의 에너지, 600은 평화의 에너지가 넘쳐나는 수준을 의미한다.

전 인류의 의식수준은 몇 세기 동안이나 190 수준에서 머물렀으나 20세기 말에 갑자기 상승해 2000년 현재 207이라고 한다. 의식수준 200 이상인 사람들이 전 인류의 15% 정도이며, 깨달음의 세계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이 되는 의식수준 500에는 전 인류의 극히 일부만이 도달해 있다고 한다.


호킨스 박사가 제시한 의식의 지도는 그가 수십 년 간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측정한 결과를 토대로 만든 것이지만, 이를 해석하는데 주의가 필요하다. 즉, 그가 제시한 의식수치별 특징은 그 수치에 머무는 사람들의 "경향"을 나타낸 것이고, 따라서 그 특징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의식수준이 500으로 올라가면 갑자기 사랑이 커질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가 제시한 것은 의식수준 500내외에 이른 사람들에서 사랑이 아주 커진 사람들이 상당수 발견되었다는 것이고, 500미만 의식수준에서 혹은 500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서 사랑이 충만하게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의식수준에 따라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나만을 위한 삶을 사는가, 남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가, 혹은 남을 위한 삶을 사는가 하는 것이다. 자신의 물질적 ·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은 가장 낮은 수준의 삶이라 할 수 있고, 이웃과 남을 배려하고 정신적 건강을 중요시하는 삶은 비교적 높은 수준의 삶이라 할 수 있으며, 물질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을 추구하고 남을 위해서 사는 삶은 최고 수준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 영혼과 내세에 대한 긍정적 태도, 자비와 사랑의 실천, 겸손하고 헌신적인 태도 등은 높은 의식수준의 특징인 반면, 자기 위주의 태도, 이기적이고 뻔뻔스러운 행동, 현세적이고 현실적이거나 물질주의적 사고, 거만함, 위선, 과시욕, 파괴성, 폭력성 등은 낮은 의식수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배움이 많은 영혼일수록 의식수준이 높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식수준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체계라고 할 수 있지만, 교육 정도나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닌 보다 근원적인 것이다. 의식수준은 어린이의 경우에도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또 대부분의 경우 일생 동안 아주 조금만 상승할 뿐이라는 호킨스 박사의 연구 결과를 고려해 볼 때, 의식수준은 연속되는 삶을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는가를 가늠하게 해주는 영적 수준 혹은 자아 완성도로 해석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람의 '근기(根氣)'도 바로 의식수준을 말하는 것인 듯싶다.


이처럼 의식수준의 존재는 윤회론적 세계관과 잘 부합되고, 윤회를 통해 얼마나 많은 체험을 했느냐 하는 데 따라 의식수준이 달라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사람들이 각각 다른 의식수준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은 인체의 에너지 장 측면에서도 설명될 수 있다. 브레넌이 인식하는 일곱 가지 에너지층 중 마지막 일곱번째 층은 신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가장 근원적인 에너지층인데, 앞서 말했듯이 이곳에는 전생의 기록들이 영상의 띠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진정한 앎이란 삶에서의 체험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앎의 크기나 이에 따라 결정되는 의식수준은 우리가 윤회를 통해 얼마만큼 많은 것을 배웠느냐 하는 데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더욱 다양하고 강렬한 체험을 한 영혼일수록 일곱번째 에너지층에 있는 에너지가 더 순수하고 높을 것이다.


윤회를 통해 많은 체험을 한 사람의 경우, 보다 순수한 에너지로 구성된 일곱번째 에너지층은 감정과 육체를 조절하는 안쪽의 에너지층과 육체에 큰 영향을 미치고, 그 사람이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반면 가장 바깥쪽 에너지층이 덜 순수한 사람은 감정과 육체를 관할하는 하위 에너지층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므로 감정적이고 육체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의 타고난 의식수준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높은 의식수준을 타고난 사람도 비교적 낮은 에너지 수준에 머물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타고난 수준을 회복하면서 그때부터 그 이상의 의식 성장을 이루어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제7장에서 이야기한 임사체험자들 대부분은 임사체험을 통해 급격히 영적인 사람으로 바뀌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본래 높은 수준의 의식을 타고난 사람들이 그보다 낮은 에너지 수준에서 머물다가 인생의 시나리오에 포함된 임사체험이라는 극적 계기를 통해 타고난 높은 의식수준을 회복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초능력이나 영능력 자체를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의식수준과 동일하게 보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깨달은 사람들이나 그 수준에 근접한 사람들에게는 흔히 초능력이 나타나지만 반대로 영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의식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다. 특히 우리가 귀신이라고 부르는 저급한 에너지와 소통할 수 있는 영매들의 의식수준은 천차만별이어서 영매들 모두가 의식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다. 의식수준은 낮더라도 거듭되는 생을 통해 영적인 능력을 계발시키고 발휘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각각 다르다는 사실은 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여러 명이 둘러앉아 텔레비전 뉴스에서 나오는 같은 사건을 보고 있을 때도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각자의 의식수준에 따라 확연히 다르다. 이것은 사실상 사람들간의 완전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비슷한 의식수준을 가진 사람들은 같은 사건을 비슷하게 해석하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잘되고 쉽게 친해지게 되는데, 이를 우리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불러왔다. 반면에 의식수준이 서로 다를 경우, 말하는 사람의 의사나 감정이 듣는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없어서 서로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의사소통의 문제는 상대적으로 자신의 의식수준이 낮을 경우에 더욱 심각해진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높은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는 자신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의식의 경지에 있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제대로 파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람들은 자신보다 낮은 의식수준의 사람들은 잘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이 낮은 단계의 의식을 이미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은 팽개치고 남을 위해 살겠다는 사람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지만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의식수준의 차이에 따른 의사소통 문제는 주로 의식수준이 높은 소수의 사람들이 의식수준이 낮은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는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성자들은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따돌림을 받는가 하면 처형을 당하기도 했는데, 지금이라고 이러한 현상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의식수준이 높다고 해서 모두 다 오해받으며 지내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보다 의식수준이 훨씬 높은 사람의 언행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자신보다 의식수준이 조금 더 높은 사람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그 수준을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선망하고 존경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히 높은 의식수준을 가진 사람이 유사종교를 만들어 교세를 급팽창시키거나 큰 수련단체를 운영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영혼의 성장을 방해하는 고정관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수없이 많은 '하라' 혹은 '하지말라'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고, 이러한 훈계는 자연스레 고정관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대부분의 고정관념은 어린이들을 사회에 잘 적응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부모나 선생님, 성직자, 그밖의 수많은 어른들로부터 주입되고 있다.


특히 우리는 도덕적, 윤리적, 혹은 종교적 관점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에 대해 반복해서 배운다. 이렇게 형성된 고정관념은 그때그때 사회를 유지한다는 측면에서는 유익하고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현실적 이익과 부합되기는 하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 볼 때 여러 기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고정관념은 우주적 가치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도덕과 윤리, 제도, 심지어는 종교의 교리 해석까지도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회교 문화권에서 당연시되는 일부다처제가 다른 문화권에서는 죄악으로 여겨지고, 어떤 문화권에서는 자신의 아내가 밤에 손님의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는 것이 최고의 손님 접대이지만 다른 문화권에서는 크나큰 지탄을 받을 행위인 것이다. 재물을 멀리 할수록 훌륭한 인물로 평가한 시대도 있었지만 현대는 재물을 많이 모을수록 더 능력있는 사람으로 평가한다. 이렇게 시대와 장소, 문화에 따라 달라지는 관념이라면 절대적 가치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고정관념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불필요한 고통을 안겨준다. 우리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 선생과 학생의 관계, 직장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 등에 대해 많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고, 상대방이 자신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면 분노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자식된 도리로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당신이 내게 이럴 수 있어?' 하고 반발한다. 어쩌면 인간이 받는 비극과 고통의 대부분이 자신의 고정관념과 관련된 것일지도 모른다.


문화적 고정관념 못지 않게 많은 사람들에게 심리적 고통을 안겨주는 것은 종교적 고정관념이다. '이렇게 하라' 혹은 '저렇게 하지 마라' 하는 계명 혹은 계율을 제대로 지키지 못함으로써 오는 심리적 부담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저자는 미국 유학시절 한 한인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몇 년 동안 교회에 다니다 그만 둔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이후 오랫동안 교회 담임 목사의 설교 중 "하나님을 멀리하면 지옥에 갈 것입니다"라는 말이 떠올라 마음이 불편했었다.


세계적인 논란거리 되고 있는 임신중절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나라에서는 임신중절을 살인 행위로 간주하고 있으며, 임신부의 건강이 염려되는 상황에서도 종교적인 이유에서 임신중절을 막는 경우가 많다. 임신중절 금지는 인간 생명을 존중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수많은 여성들을 괴롭히는 잘못된 종교적 고정관념이다.


태아는 수태되어 이 세상에 태어나기까지의 9개월 동안 지구에서 수억 년에 걸쳐 진행되어 왔던 생물의 진화 단계를 밟는다고 한다. 즉, 태아는 단세포 생물, 강장동물, 어류, 양서류, 그리고 포유류 단계를 거쳐 7~8개월 후에야 드디어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인체 에너지는 임신 초기부터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해 7~8개월이 되면 불완전하게나마 에너지층이 형성되지만 완전한 에너지층이 형성되려면 태어난 후 상당 기간이 지나야 한다. 또한 최면을 통한 연구에 따르면 태아는 태어날 무렵이 되어서야 사람의 기본적인 인식능력을 지니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본다면 사람은 수태하는 시점부터 시작해 출생 후 2~3년이 될 때까지 점차 인간으로서의 특성을 갖추어 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태아의 모습과 각 신체 부위의 기능, 에너지층, 기본적 인식능력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해 볼 때 임신 7~8개월이 되는 시점부터 태아를 하나의 인간으로 간주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들이 그러하듯 태아의 생명은 매우 소중하고 가급적이면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임신 초기의 인공유산을 살인 행위로 간주하고 당사자를 죄책감 속에 몰아넣는 것은 잘못된 종교적 고정관념이다. 전생박사 브라이언 와이스는 최근 자신의 책 《빛의 존재로부터의 메시지》(Messages From the Masters)에서 인간의 형체를 완전히 갖춘 태아를 유산하더라도 영적인 측면에서 실질적인 해로움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문제점들보다 더 근본적인 고정관념의 폐해는 그것이 우리의 의식 성장을 방해한다는 데 있다. 과거의 경험으로 형성된 고정관념이 새롭게 일어나는 사건들에 적용될 때 우리는 과거의 인식 패턴을 반복하게 되고 이는 끊임없이 과거의 체험만을 반복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의 고정관념은 과거에 일어난 유사한 사건들에 적용되었던 대처 방안을 찾아내어 이번 사건에도 적용시킴으로써 우리가 새로운 경험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구실을 한다. 우리의 의식과 영혼은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을 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고정관념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결정적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관념들은 대부분 우리의 참 자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서 생긴 분별심에 기인한다. 내가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며, 사실은 모든 존재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면 분별심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이제 더 이상 내가 옳고 남이 틀렸다든지, 내가 남보다 더 우월하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또한 다른 민족을 비하하거나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차별하고 배척하는 일도 하지 않게 된다.


이 우주에서 아무도 모르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주 잠시 동안 지나가는 멋진 여자를 품에 안고 싶다는 생각을 하더라도 우리가 사는 기의 세상에서는 모두 기록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나쁜 짓'으로 간주하고 있는 수많은 생각과 행위들은 우주적인 관점에서 볼 때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극히 자연스러운 것을 우리에게 주입된 고정관념이 나쁜 것으로 판단하도록 강요하고 있을 뿐이다.


수많은 잘못된 고정관념은 우리를 제약하고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며 우리를 죄책감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러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거기서 벗어날 때 우리는 고통과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고, 순간순간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모든 고정관념이 우주적인 관점이나 영적인 관점에서 잘못된 것일까? 우주적 관점에 부합되는 관념이나 기준은 과연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하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과연 누구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봄으로써 찾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근원적 기운이 개별화된 존재로서 자유의지를 가진 똑같이 귀중한 존재이다. 따라서 어떤 개별화된 존재가 다른 개별화된 존재의 자유의지를 방해하거나 침해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고 그밖의 일들은 모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여태껏 정치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재물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종교적 혹은 영적 권위를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행해 온 갖가지 억압과 강요는 배가 고파 빵을 훔친 행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잘못일 수 있다. 또한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무수히 행해졌고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다수의 소수에 대한 횡포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영혼의 성장은 일상의 삶속에서 이루어진다.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의식수준을 높이고 영혼을 성장시키는 것이라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영혼을 성장시킬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도 억지로 남에게 양보하고 혼자 속상해하는 것이 영혼의 성장을 위한 길일까? 깨달음을 위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아내와 자식을 내팽개친 채 입산하여 금욕생활을 한다고 집착에서 벗어나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분별심을 버린다며 모든 것에 대한 사리 판단을 중단해서 현실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 과연 진정한 수행의 길일까?


우리의 의식, 우리의 영혼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수련이나 수행이 중요하다. 하지만, 일상적인 삶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대다수의 수행자들은 일상을 떠난 수행이란 항상 좋은 것이고, 일상적인 삶은 수행과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진정한 이유가 생생한 체험을 통해 진정한 앎을 축적하는 것에 있음을 이해한다면 일상적 삶을 통한 체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수련이나 수행은 우리 몸을 정화시키고 경혈을 열어 우주의 기운과 통할 수 있도록 도와 주며, 물질세계가 아닌 더욱 근원적인 세계가 존재함을 일깨워 줄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늘, 우주, 절대자와의 관계 등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배울 수 있게 한다. 반면, 일상적인 삶에서는 주로 다양한 인간 관계들에 대하여 배우고, 우리가 머리 속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관념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양한 체험들이 제공된다.


영적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앎이 다른 앎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고, 따라서 수행자의 삶이 비수행자의 일상적인 삶보다 더 소중한 것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 각 영혼의 진화정도 및 그 때까지 축적된 앎에 비추어 보아 보다 시급한 체험과 덜 시급한 체험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영혼의 성장이나 깨달음을 위해 수련에만 매달린다든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입산하여 혼자 지내는 것은 대부분의 수행자들에게 최선의 방법이라 말하기 어렵다. 물론 생활 공부를 통한 앎이 충분히 축적된 상태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금욕과 수행에 전념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6년 동안 수행한 끝에 성불(成佛)하였다 한다. 수없이 많은 윤회를 통해 이미 전생에 성불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던 석가모니에게는 출가 후 6년 동안의 수행이 꼭 필요한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지에 오르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인간관계를 체험할 수 있는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이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어려움과 고통을 피하기 위해 토굴을 파고 들어가 혼자서 생활한다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리는 것과도 같다.


영혼의 성장에는 공적(公的) 공부 또한 필요하다. 공적 공부란 우리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이웃을 위해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으로 남을 위해 일을 함으로써 지고의 기쁨을 맛보게 되고, 이를 통해 우주의 본성이 내게 있음을 확인하고 스스로 그 본성을 회복하기 위해 더욱 매진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진정한 공적 공부는 수행 공부, 생활 공부와 더불어 우리 영혼을 성장시키는 데 필요하다. 하지만 남에게 베풀 때 조금이라도 거만한 마음이 들거나 과시하려는 욕심이 마음속에 숨어 있다면 공적 공부의 효과는 사라져버린다.


우리의 진정한 앎은 일단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체험함으로써 증대된다. 그런데 우리는 전생에서 이미 배우고 깨우친 것은 어렵지 않게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특히 강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경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이때 중요한 것은 먼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려는 자세이다. 제3장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들 마음에는 여과작용을 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음을 닫고 있으면 새로운 앎은 증가될 수 없고 따라서 영혼의 성장도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이 지닌 수없이 많은 관념들을 바라보고, 그것을 하나하나 깨쳐 나갈때 우리의 마음은 점점 열리고 우리의 진정한 체험은 증대되어 간다.




에너지가 맑아지면 깨달음이 온다


정신세계에 관심을 갖고 마음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깨달음을 추구하게 된다. 지금까지 깨달음은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는 것(見性), 부처가 되는 것(成佛), 해탈하는 것 혹은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 등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깨달음이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깨달음은 존재 혹은 인식의 근본적 변화를 수반하기에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기와 의식수준의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은 근원적기운의 개별화된 존재로서 자신만을 고집하는 마음이 얼마나 강한가에 따라 개개인의 '기의 수준'이 결정된다. 다시 말해 기의 맑고 탁함은 그에 포함된 정보 수준에 달려 있는데, 이기심의 정도가 심할수록 에너지가 탁해지는 반면 이기심이 없어지고 만물에 대한 포용력이 커질수록 에너지가 맑아진다. 세상 만물이 모두 같은 근원에서 뻗어져 나온 것이라는 정보가 입력됨으로써 우리의 에너지는 만물을 포용하는 더욱 맑은 에너지로 바뀌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하지만, 깨달음은 의식수준과 관련해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생을 살면서 체험을 통해 진정한 앎을 축적하고 조금씩 의식수준을 상승시켜 나가는 존재이다. 깨달음이란 이렇게 의식 진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앎이 충분히 축적되어 특정의 수준에 이를 때 겪게 되는 심신의 큰 변화" 혹은 "그러한 변화를 수반하는 특별한 체험"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제2장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인간은 눈에 보이는 육신을 포함하여 그를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다양한 파동의 에너지로서 구성되어 있다. 계속되는 윤회를 통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체험, 새로운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앎을 축적한다. 다음 생을 시작하기 전 자신의 새로운 인생을 설계할 때는 자신의 의식성장을 위하여 혹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에너지가 보충될 수 있는 체험을 계획한다.


여러 전생들을 통하여 다양한 에너지가 인체 오라에 축적되고 진정한 앎이 크게 증가되어 의식이 특별한 수준 다시 말해 우주의 근본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우리는 심신의 특별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이제까지 축적된 오라 에너지가 특정의 조화점에 이르게 되면 심신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앎의 체계적 정리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깨달음이라 일컬어져 왔던 경지인 것이다.


이렇게 깨달음을 의식수준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의식수준이 낮고 앎의 축적이 부족한 어린 영혼이 하루 아침에 득도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이따금씩 어떤 일을 계기로 갑자기 깨달음을 얻게 되는 사람을 발견하고 이를 근거로 깨달음은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 즉 돈오(頓悟)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관찰의 결과이다. 이번 생의 관점에서만 볼 때 그 깨달음은 갑작스러운 것으로 보이겠지만, 오랜 윤회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별안간 일어나는 깨달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수한 전생의 삶을 통해서 이미 충분한 앎이 축적되었기에 이번 생에서의 깨달음이 가능한 것이다.


깨달음이란 서두른다고 해서 단시간에 얻어질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알고 보면 그것을 빨리 얻으려고 조급해 할 이유도 없다. 모든 영혼은 결국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거쳐 진화하며, 배워야 할 모든 것을 배우면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게 된다. 자신보다 먼저 가는 자는 자신이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을 이미 배웠기 때문이고, 뒤에 오는 자들은 자신보다 배움이 늦었기에 뒤따라오는 것이다. 결코 앞서가는 자를 부러워 할 것도 없고, 뒤쳐져 오는 영혼을 얕볼 이유도 없다. 각자는 그저 자신의 길을 갈 뿐입니다. 그 길을 가다 보면 앎은 계속적으로 축적되고, 그러다가 문득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많은 수련자들은 깨달음을 위해서는 집착과 분별심을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렇게 집착과 분별심을 버리겠다는 마음이 또 다른 집착, 즉 그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집착을 낳게 되어 수련자의 의도는 성취되지 못한다.


깨달음의 단계에 이르면 집착과 분별심은 저절로 없어진다. 하지만 이는 깨달은 결과 그렇게 된다는 것이지, 깨닫기 위해서 집착과 분별심을 버리도록 억지로 노력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집착하고 분별해야 할 대상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되면 우리의 에너지는 맑아지고 집착과 분별심은 자연히 사라지게 된다. 다시말해, 진정한 앎이 우리를 집착과 분별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더욱 효과적인 수련을 위해서는 수련자가 깨닫겠다는 마음도, 집착과 분별심을 버리겠다는 마음도 버려야 한다. 깨달음에 대한 집착, 집착과 분별심을 버리겠다는 집착이 수련자를 깨달음의 길에서 더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자신이 모르는 새에 의식이 확장되고 앎이 증가되어 이루어지는 것이지, 깨달아 보겠다고 마음 먹는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순간에 머무르기


내가 내 인생을 설계하여 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이 스스로 설계한 삶을 실제로 체험하기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생의 지상 목적은 체험을 하는 것이고, 그 체험은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마음이 현재의 순간순간에 머무르고 이를 통해 충분한 체험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과거나 미래에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 닥친 어려움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미래를 상상함으로써 고뇌하고 고통받는다. 사람들은 앞으로 해결해야 될 의식주 문제에 대해 걱정하고, 곧 만나게 될 새로운 사람들과 어떤 인간관계를 맺게 될지 염려하며, 조만간 예상되는 사업의 어려움과 경제불황 가능성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하고 있다.


물론 미래를 미리 계획하는 것은 다가올 시간을 좀더 충실히 보낼 수 있게 한다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하지만, 대개는 미래에 대한 부질없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현재의 순간순간을 허비하게 된다. 그러다가 막상 걱정하던 미래가 도래하면 그럭저럭 견뎌내는 것이 보통이다.


요즘 번지점프가 유행하고 있다. 담력을 길러줄 뿐만 아니라 짜릿한 쾌감을 맛보게 해주는 것이 현대인의 입맛에 잘 맞는 모양이다. 번지점프를 하는 사람들은 보통 뛰어내리기 전에 큰 두려움에 휩싸인다. 특히 높은 점프대에 올라가 곧 뛰어내리게 될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점프대에 올라올 때까지 가졌던 자신감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온 몸은 공포감으로 후들후들 떨린다. 하지만 막상 뛰어내리는 순간에는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짜릿한 쾌감을 맛보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번지 점프를 하기 직전 우리가 경험하는 공포는 순전히 점프 후에 겪게 될 것에대한 근거없는 두려움에 의한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의 슬픔과 분노는 주로 이미 일어난 과거에 대한 회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을 쳐다보면서 살아계실 때 좀더 효도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 눈물짓는다. 또 얼마 전 누군가가 내게 무례한 행동을 했던 사실을 기억해 내고는 치밀어오르는 불쾌한 감정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다음에 만나면 꼭 그 수모를 되돌려주리라고 다짐하기도 한다.


특히 노인들은 미래를 상상하기보다는 과거를 회상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경향이 있다. 젊은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고 흐뭇해 하기도 하고,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나 잘못들을 떠올리며 혼자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사람들이 희로애락의 감정, 특히 부정적 감정에 휩싸이는 것은 주로 미래에 대해 걱정할 때나 과거를 회상할 때이다. 따라서 우리가 과거나 미래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에 머무르게 되면 이러한 부정적 에너지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몇 년전 저자는 미국 방문길에 디트로이트 공항에 몇 시간 동안 머물러야 했던 적이 있다. 서울에서 도쿄를 경유해 디트로이트 공항에 도착했고, 세관 검사를 끝내고 오후 5시경 가족이 있는 인디애나 주로 가는 연결 비행기에 탑승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항공사는 별다른 이유 없이 갑자기 그 항공편을 취소시키고 밤 11시 비행기를 이용하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생긴 6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던 나는 '우연히' 공항에 있는 책방에 들르게 되었고, 그곳에서 유난히도 눈에 띄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나는 이마 중앙에 있는 혈자리인 인당혈이 열려 있어서 기운이 이마 부근에서 가장 예민하게 느껴지는데, 그 책에서 나오는 기운은 다른 책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그것은 서양에서 새로운 영적 지도자로 떠오르고 있는 독일 태생의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가 지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The Power of Now)라는 책이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사춘기 때부터 스물아홉 살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자살 충동을 느껴온 심한 우울증 환자였는데, 어느 날 새벽 잠에서 깬 그에게 전보다 더 심한 우울증과 함께 삶에 대한 깊은 회의가 물밀듯 밀려왔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과 같이 살 수 없어(I can not live with myself any longer)" 하고 중얼거리던 에크하르트는 문득 "아니? 그러면 나라는 존재가 둘이란 말인가?" 하는 의문에 휩싸이게 되었고,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진짜고 다른 하나는 가짜겠군!"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로 인해 그는 의식이 중지된 상태로 빠져들었다. 그 순간 갑자기 자신이 볼텍스 에너지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고, 강한 진동이 시작되었으며, 허공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체험했다.


그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 상태로 얼마쯤 시간이 지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창 밖에 새 한 마리가 지저귀고 있었는데, 그 새의 울음소리는 전에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소리였다. 아침 태양은 창문 커튼 사이로 서서히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고 그 햇살이 바로 사랑 그 자체로 느껴졌으며, 그를 둘러싼 주위의 모든 것이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고 있음을 난생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에크하르트의 삶에는 근본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고, 1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그는 영적 지도자로서 영국과 캐나다, 미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은 현재에 머무는 것의 중요성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오직 현재만이 실재하는 것이고 현재만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이며, 과거나 미래는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창조물로서 기억이나 기대의 결과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존재하는 것은 현재뿐이고 따라서 의미있고 보람된 삶은 지금 현재에 머무르는 삶, 현재에 충실한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에 머무는 것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어도 우리 마음은 여전히 과거나 미래에 머물고 있고, 이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 보통이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 현재에 머물기 위해서는 인생에 대한 좀더 근본적인 앎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 인생을 스스로 설계해서 태어났고, 인생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스스로 선택한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인생을 설계할 때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인생을 계획해서 태어났다. 따라서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 때문에 부끄러워하거나 기분 나빠할 필요도 없고 나 자신이 설계한 미래에 대해 걱정할 필요도 전혀 없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됨으로써 우리는 오직 이 순간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명상이란 생각을 멈추거나 마음을 비우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명상 상태에서 우리의 생각이 멈추게 되면 자신을 우주로부터 분리시키던 마음이 만든 장막이 걷히게 되어 우주의 기운이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오게 된다. 따라서 규칙적으로 명상을 하게 되면 신체적 · 정신적 · 영적인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명상이란 본래 인도를 중심으로 동양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온 수련법 가운데 하나지만 지금은 서양에서 훨씬 더 큰인기를 모으고 있다. 서양에서 명상의 효과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매일매일 명상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으며, 명상자들을 위한 다양한 안내서들이 많이 출간되어 있다.


이 명상의 관건은 바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오만 가지 상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인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상념 없이 단 1분, 아니 30초를 보내기도 쉽지 않다.


이렇게 눈만 감으면 몰려오는 상념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명상시 특정한 것에 의식을 집중하는 것이 좋다. 선도수련에서는 몸의 느낌에 집중하게 하고, 간화선(看話禪)에서는 특정한 화두(話頭)에 의식을 모으게 하며, 위빠사나 수련에서는 떠오르는 상념들 혹은 느낌 그 자체를 바라보게 한다. 이 모두가 끊임없이 떠오르는 상념들을 중지시키기위한 것이다.


인생이란 스스로 계획한 삶을 살면서 체험하기 위한 것임을 확실히 깨닫게 되면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부터 해방된다. 이때 마음은 자연히 현재에 머물게 된다. 이렇게 되면 명상을 할 때도 더 이상 과거나 미래와 관련된 오만 가지 상념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게 되며, 생각을 비우고 효과적인 명상을 할 수 있다.


아니, 우리가 현재의 순간순간에 머물게 되면 우리의 삶 자체가 명상으로 바뀌게 된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 육체를 중심으로 한 소아(小我)에서 벗어나 우주의 본성과 연결되게 된다. 그 결과 에너지는 정화되고 자연스레 건강이 회복된다.


자신의 일을 즐기며 그것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현재에 머무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집중하며 바쁘게 지내는 사람은 며칠씩 밤을 꼬박 샐 때도 안색이 나빠지지 않고, 건강에도 별 문제가 없는 것이 보통이다. 현재에 머무는 상태에서는 에너지가 활발하게 교환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바쁘게 일을 할 때 오히려 더 힘이 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반면에 평상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고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그 고민이 과거와 관련된 것이든 닥쳐올 미래와 관련 것이든 안색이 좋지 않고,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자주 느끼게 된다. 이는 현재에 머물지 못한 결과이며 에너지 교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해서 생기는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