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영주/누구나 아름다운 영혼을 지니고 있다

47. 나의 스승님

기른장 2021. 4. 4. 19:53

내가 처음 성문수 선생님을 뵈었을 때 그분은 40대 중반이었다. 키가 작고 아주 마른 체격이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다소 왜소한 용모였다. 그렇지만 정은 철철 넘쳐 흐를 정도여서 오빠의 소개로 내가 처음 청당동의 집을 찾았을 때는 마치 옛날부터 잘 알고 있던 사람처럼 반겨주었다.

 

그렇게 정이 많은 선생님은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눈가가 선선해지곤 했는데 나를 수련시키는 짬짬이 선생님의 지난날을 들려주곤 했다.

 

선생님은 경기도의 궁벽한 시골에서 태어났는데 선친께서도 상당한 도력을 지닌 분이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남다른 도력을 목격하고, 경우에 따라선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그 동네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는 벙어리가 한 사람 있었다고 한다. 말은 한 마디로 하질 못했고 다만 뜻모를 소리만 질러 대며 겨우 의사소통을 하는 정도여서 동네 아이들의 놀릴감이 되는 것이 다반사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사람이 워낙 부지런한 데다 심성까지 착해서 동네 사람들에게 흉을 잡히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그를 평소 유심히 지켜보던 선생님의 아버지가 어느 날 그 머슴을 집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한참 목 부위를 만진 다음 입을 크게 벌리게 하더니 머슴의 혀를 손으로 만졌다고 했다.

 

그런데 그러고 나자 잠시 후, 온 동네가 놀랄 일이 벌어졌다. 태어날 때부터 생판 벙어리인 그 머슴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상인들처럼 정확하게 언어를 구사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과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느릿느릿한 발음으로 “서언새앵니임”이라고 부르며 찾아와서는 첫 수확한 채소나 과일 같은 걸 가져오곤 했는데 어린아이인 선생님의 눈엔 커다란 충격이었다고 한다. 그 충격은 동네 사람들도 마찬가지여서 그 일이 있고 나서는 선생님의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의 아버지 되는 분은 천상 도인이면서 기인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가려서 받았더라도 여덟 명의 자녀와 두 내외가 먹고 사는 짐은 벗었을 터인데 그렇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분은 찾아오는 사람들이 성가시다며 오래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족들은 빈곤과 궁핍에 시달려야 했다.

 

선생님은 그렇게 가난에 찌든 생활을 겪으면서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죽어도 도인이 되지 않아야겠다고 그랬을 것이다. 도력 높은 아버지의 삶을 통해서 그런 식의 삶이란 결국 가족 모두를 고난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이라는 결론에 쉽게 이르렀을 것이다.

 

그런 중에 선생님의 가족은 서울 부근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고 한다. 가족의 장래를 위해서는 절대 아버지처럼 도인의 길을 걸으면 안된다는 결심을 할만큼 궁핍한 유년기를 보낸 선생님이 아버지께 감사하는 게 있다면 서울로의 이사였다.

 

생활이 조금 나아진 것도 있지만 궁벽한 시골에서 벗어나 뭔가 활기찬 기운을 맛보게 된 때문이었다. 아버지로부터 수없이 많은 체험을 했던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도력을 체험하게 된 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였다. 그리고는 그것이 선생님을 이 세계로 이끈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팔남매나 되는 자식들을 두고서 선생님의 어머니는 갑자기 자리에 누웠는데 며칠 버티지도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떴다. 밖으로 나다니던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어머니가 운명한 뒤였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와 시신이 가려진 낡은 병풍을 한참 물끄러미 바라본 다음에 벌어졌다.

 

아버지는 시신이 가려진 병풍을 젖히고 들어가더니 한참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아버지는 자식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불쑥 뜬금 없는 말을 했다.

 

“여보, 내가 당신을 대신해 죽을 수는 있소. 하지만 내가 저 어린 팔 남매를 혼자 기르면서 살 수는 없어요. 그러니 이렇게 합시다”

 

그리고는 다시 한참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수근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서럽게 울더란다. 그 울음소리에 선생님과 다른 형제들도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렇게 울었는지 나중에는 목이 쉬어 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별안간 병풍 뒤에서 인기척이나기에 형제들이 울음을 멈추고 그 곳을 바라봤을 때였다. 놀랍게도 돌아가신 어머니가 버젓이 걸어나오고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그 길로 아버지가 어머니 대신 숨을 거둔 것이었다.

 

당시에 선생님이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직 어리다면 어린 나이였지만 생명의 나고 죽는 것은 알고도 남을 나이였던 것이다. 분명히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차디차게 굳어 있는 어머니의 시신을 두고 얼마나 울었는데 그 어머니가 살아서 걸어나온 것이었다. 벙어리 머슴의 말문을 트이게 한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충격이었으리라.

 

기이한 일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살아돌아온 선생님의 어머니는 오래 천수를 누렸다는데 집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는 다락으로 올라가 아버지와 오랜 시간 의논을 했다는 것이다. 사소한 가정사에서부터 아이들의 일까지 밤이 되면 생전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오래 다락에서 머물렀다는 것이다.

 

나는 선생님의 얘기를 다 듣고 난 뒤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은 이해가 가지 않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지금 당장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고 들어둬라. 언젠가는 너도 아, 선생님의 말씀이 이런 거였구나 할 때가 있을 테니까”

 

선생님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나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당신이 하는 얘기를 기억에 담아 두고만 있으면 언젠가 책꽂이에서 필요한 책을 뽑아서 읽는 것처럼 꼭 쓰일 날이 있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세상사에 초연한 듯 살아온 아버지의 삶을 그렇게 싫어했던 선생님도 나이들수록 어쩔 수 없는 아버지의 자식이었던 모양이다. 당신의 아버지가 그러했듯 선생님도 원래 돈을 버는 쪽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청담동의 사무실은 언제나 찾아오는 사람들로 붐볐지만 선생님의 형편은 항상 넉넉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찾아오는 분들의 점심 걱정까지 해야 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줄기차게 선생님을 찾는 분들이란 대개가 도담을 나누는 도인들이나,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한 가난한 학생들, 생활이 어려워서 어쨌거나 선생님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심지어는 지방에서 상경해 조그만 일을 하고자 하는 젊은 청년들까지 선생님 사무실 한쪽을 빌어 쓰고 있는 상태였고, 그들의 식비까지 선생님이 내어 주고 있는 설정이었다.

 

그렇지만 내 눈에 비친 선생님의 그런 모습이 결코 싫지는 않았다. 싫든 좋든 선생님은 당신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이 가진 사랑을 베푸는 걸로만 보였다.

 

내 기도(氣導)의 첫걸음에는 이렇게 기수련에 대한 직접적인 가르침 보다는 행으로 몸으로 보여 주던 스승님 한 분이 계셨다.

 

출처 : cafe.daum.net/keedo/Q8yM/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