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베인/그리스도 요가

그리스도 요가(Christ Yoga) 02장

기른장 2020. 3. 1. 19:10

이제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 건축물 네 개를 다 보았다.
런던의 바오로 대성당,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
바그다드에서 14 마일 위쪽에 위치한 티그리스 강변 카디마인의 홀리 모스크,
그리고 독특하면서도 세계에서 찾아가기 가장 어려운 라사의 포탈라.
이 네 건물을 한 생에서 모두 본 것이다.
나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세계에서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종교적 센터로서 포탈라는 전 세계 인구의 5분의 1을 대표한다.

모든 불교 신자들은 불교의 영적인 수장 달라이라마의 거처인 포탈라를 동경한다.

 

포탈라는 키추 강이 가로지르고 있는 라사 평원 중앙의 거대한 암반 위에 세워져 있다. 이 웅장한 건축물 포탈라는 높이 4백여 피트, 폭 1천여 피트, 부속건물들을 포함 1-1.5 평방 마일의 넓이로, 만년설을 인 설산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백색의 탑처럼 솟은 17층 높이의 이 건물은 서양인들이 초고층 빌딩에 대한 꿈도 못 꾸던 16세기에 지어졌다.

 

수 세기의 세월을 이겨내도록 지어진 걸 보면 티베트의 건축술이 아마 세계에서 가장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분명 오랜 세월 전승돼 내려온 어떤 건축 대가들의 영감에 찬 기술임에 틀림없다.

 

포탈라는 위엄 있게 서서 주변 수 마일 안의 모든 것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달빛 속에서 포탈라를 올려다보면 백색의 벽면이 기괴한 빛을 뿜는 것처럼 눈부시게 보인다. 포탈라는 마법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포탈라를 본다면 당신도 그 신비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푸른 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빛과 만월의 달빛은 마치 우리가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저 멀리서 라마들의 영창 소리가 우리 귓가에 들려왔다. 그들은 저음의 울리는 목소리로 만트라 옴마니반메훔을 반복해서 불렀다. 그리고 이와 함께 깊은 음색의 대형 징 소리, 총가들의 소리가 수많은 작은 종소리와 어우러져 나를 매혹시켰다.

 

전에도 이 모든 소리를 들은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 그것은 나를 더욱 경이감에 차게 했다. 그렇다. 그것은 눈과 귀로 체험할 수 있는 가장 매혹적이고 신비한 장면과 소리일 것이다.

 

“정말로, 세상에서 이런 것은 또 없을 거예요.” 나는 나의 스승에게 말했다. 그는 깊은 사색 중이었다. 내 목소리가 그를 깨웠음에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놀라서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답했기 때문이다. “뭐라고 말했지?”

 

같은 말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서 이렇게 대답했다. “정말로 놀라워요.” 그러자 그는 오래 전의 기억이 마음을 훑고 지나간 것처럼 미소를 지어보였다.

 

포탈라는 순수한 티베트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면 아라비아와 이집트의 건축물들이 연상되었다. 그 거대한 규모에 숨이 턱 막힐 뿐만 아니라, 구조물의 색깔과 아름다움 역시 나를 사로잡았다.

 

포탈라는 주변 환경과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어서,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거기에 들어다 갖다 놓은 듯한 인상을 주었다. 눈을 머리에 인 산들, 나무들, 인근의 호수, 달빛 속에 빛나는 황금 천개天蓋, 반짝이는 별들, 라마들의 영창 소리, 거대한 징들의 깊은 울림, 총가들의 소리, 그리고 수많은 작은 종들의 딸랑이는 소리,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 내 안에 영원히 살아남을 불멸의 기억을 새겨주었다.

 

나의 스승은 많은 관료들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다음 날 우리가 포탈라 곳곳을 돌아볼 수 있는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것들을 보았기 때문에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들만 묘사할 수밖에 없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달라이 라마의 아름다운 방들이다. 방안에는 많은 금불상들이 있었고 금으로 도금된 벽면은 금으로 된 문자와 부조들로 장식돼 있었다.

 

최고의 장인들에 의해 디자인 된 집정실은 황금 천개天蓋와 자금빛의 황금 능라 등이 어우러져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달라이 라마의 무덤 안에는 수백 개의 금은 잔과 그릇, 금은 불상, 금 부조 벽, 금은 세공품, 보석으로 장식된 불상들이 보관된 상자 등이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썩어 사라질 주검을 위해 이런 공을 들이다니 얼마나 엄청난 시간과 돈의 낭비인가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떠올랐다.

 

그 모든 것들은 내 숨을 턱 막히게 했다. 그 누구를 위해서도 사용되지 않고 꽁꽁 자물쇠 채워진 부富. 나는 일찍이 그런 모습을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달라이 라마 무덤의 외부 천개는 황금판으로 덮여 있다. 확신컨대 이곳 한 군데에서만도 수백 만 파운드에 상당하는 황금을 보았으리라.

 

우리의 시간은 제한돼 있었고, 또 이 모든 사치를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날 아침 잠사르로 길을 나섰다.

 

그날 밤 우리는 트락체 사원에 도착했다. 이 사원은 산중턱 고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사원이 시야에 들어오자 내가 스승에게 말했다. “저렇게 높은 암벽 위에 거대한 건축물을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여요. 어떻게 저 많은 양의 목재와 석재들을 옮겼을까요?” 내 생각에 그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해 보였다.

 

스승이 대답했다. “네가 보고 있는 저 사원은 6백년도 더 된 거야. 하지만 지금까지도 튼튼하지. 앞으로 6백년이 더 흘러도 변함이 없을 거야."

 

정말로 깜짝 놀랄만한 기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게쉬 린포체가 우리를 마중하기 위해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게 아닌가! 분명 스승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시치미를 뚝 뗀 것이었다. 린포체의 존경스러운 얼굴을 보자 내 심장이 기쁨으로 뛰었다. 그의 얼굴에는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자, 결국 우리 이렇게 다시 만났잖니."

 

그날 우리는 15 마일을 여행했다. 피곤함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다시 만나자 피로가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비로소 스승이 그렇게 서둘러야만 한다고 계속 말한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사원의 입구에 이르렀을 때 승원장이 나와 우리를 환대해주었다. 훤칠한 키에 어깨가 떡 벌어진 그는 짐작컨대 55살 정도 되는 듯 했다. 그가 웃음 짓자 아주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났다. 그의 얼굴에는 친절함이, 이마에는 지성이 가득 묻어났다. 그의 목소리는 깊고 부드러웠다. 아쉽게도 그는 영어를 할 줄 몰랐다. 그럼에도 나는 그로부터 풍겨 나오는 온화함을 느낄 수 있었다. 게쉬 린포체가 나에 대해 그에게 미리 귀 뜸을 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승이 다시 통역 역할을 해주었다. 나는 대화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었을 뿐 내용 전체를 완전히 따라갈 수는 없었다. 나도 모르게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스승의 손길이 몸에 느껴지자 정신이 번쩍 깨었다. 그가 말했다. “이제 저녁을 먹도록 하자. 그러고 나서 잠자리에 들자. 우리 모두 아침에 다시 만나도록 하지.”

 

너무 피곤해서 음식이 많이 먹히지 않았다. 식사 후 나는 원장의 침실로부터 떨어진 작은 방의 아늑한 침상에 들었다.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나는 세상모르고 잠에 빠졌다. 마치 약물을 먹은 듯 너무 피곤했다. 옷도 벗지 않은 채 오로지 드러누워 잠 잘 생각 밖에 안 나는 그런 건강한 피로를 당신은 느껴본 적이 있는가? 그날 밤 내가 느낀 기분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라사에서 우리는 1주일간의 여정을 이틀 만에 몰아쳤다. 하지만 게쉬 린포체와의 재회로 충분한 보상을 받은 기분이었다. 게쉬 린포체가 티베트어로 원장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아들은 지금 무척 피곤해요. 이제 휴식을 취해야만 해요.”

 

나도 내가 언제 그렇게 피로를 느끼고 있었는지 미처 몰랐다. 나는 정말로 기쁘게 잠자리에 들었다.

 

머리가 베게에 닿자마자 나는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총가 소리를 들을 때까지 나는 세상모르고 잠만 잤다. 우리는 원장실에서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식후에 우리는 밖으로 나가 저 멀리 펼쳐진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날 하루만은 거기서 푹 쉬고 싶었다. 내가 스승에게 그런 나의 뜻을 말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게쉬 린포체도 우리가 그와 함께 하루를 보내길 바라고 있으니 나도 기쁘다.”

 

내가 물었다. "그분은 여기 왜 오셨죠?” 스승이 설명해주었다. “그는 너를 무척 아끼고 있어. 너를 아들, 아니 그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지. 그가 이 먼 거리를 여행해 온 것도 너를 다시 보기 위해서야.”

 

바로 그때 게쉬 린포체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이렇게 물었다. “여기서 나를 만나게 돼 놀랐나 보지?” 나는 그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어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사실 어제 계곡을 올라올 때 당신이 제 마음에 너무도 강하게 떠올랐어요. 나의 스승에게 제 느낌을 말했어요. 그는 뭔가 알고 있는듯한 미소만 지을 뿐 시치미를 뚝 떼더군요. 다시 당신을 보게 되자 내 가슴이 기쁨으로 마구 뛰더군요.”

 

나는 이보다 더 나은 표현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 말은 내 가슴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었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순간적으로 따스한 기운이 나와 전기처럼 나를 관통해 지나가는 느낌이 일고, 그의 얼굴이 햇살처럼 환해졌기 때문이었다. “우리 저리로 가서 앉도록 하자.” 그가 말했다.

 

우리는 저편 정자로 갔다. 이 정자는, 캬추 강이 토빙추 강으로 흘러드는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면해 있었다. 강물은 어떤 부분에서는 부드럽게 굽이쳐 흘렀지만 또 다른 부분에서는 바위들과 거세게 부딪히며 하얀 포말을 허공에 흩뿌렸다.

 

원장과 나의 스승은 서로 대화에 몰두해 있었다. 그래서 게쉬 린포체와 나만 남게 되었다.


게쉬 린포체가 말했다.
“내가 평생 동안 해온 공부의 정수를 네가 얻길 바란다.

나는 네가 거짓된 모든 것을 보기를 원해.

이런 방식을 통해서만 너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야.”

 

내가 말했다.

“예, 제가 당신을 떠나고 난 이후 제 마음은 계속 변화를 겪고 있어요.

이제 저는 마음 속의 어떤 것도 진리를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어떤 관념, 어떤 경험, 심지어 지난 수 세기 동안 축적되어 온 사상들조차도 진리를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내 아들아, 그건 진실이다.” 그가 말했다.
“마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진리는 마음 자체의 투사일 뿐, 진리가 아니란다."

 

그때 나는 그가 그리스도 요가에 대해 계속 가르쳐주기를 바랐다. 그는 나의 생각을 알아차렸음이 틀림없었다. 이런 주제를 얘기할 때면 늘 그렇듯 그가 갑자기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그가 매력적인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나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단순히 그의 말만 듣지 않았다. 실재를 가리고 감추고 있는 것은 바로 내 자신, 나의 자아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그런 사실을 자각케 해야만 한다는 자세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의 목소리는 음악처럼 들렸다. 그것은 다시 오랜 시간과 같았다. 나의 저서 <히말라야를 넘어서>를 읽었다면, 내 말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런 말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참된 명상만이 실재를 드러낼 수 있어.

비록 너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지만,

인간의 마음으로는 결코 그것을 드러낼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마음, 즉 알려진 것으로는 미지자, 즉 알려지지 않은 것을 결코 드러낼 수 없어.

마음은 단순히 관념, 기억, 경험들일 뿐이야.

마음은 온통 그런 것들로 구성돼 있지.

따라서 마음은 결코 진정한 진리를 계시해 줄 수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그들의 마음의 투사에 불과해.

그들은 진리에 대한 책을 읽을지도 모르고, 순전히 다른 사람들의 관념에 불과한 말들을 들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제 너는 그런 것들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

진리는 오직 내면으로부터만 드러날 수 있는 것이야.

진리는 결코 외부로부터 현시되지 않아.”

 

내가 대답했다.

“예, 링마탕에서 당신과 있었을 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이제 저는, 하나의 관념에 집중하는 것은 마음을 편협하게 만들 뿐이고, 편협해진 마음으로는 무한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말했다.

"심지어 기도조차도 진정한 명상이 아니야.

우리는 어떤 단어나 어구를 반복함으로써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 수 있어.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응답을 받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 응답은 실재의 응답이 아니야. 그것은 무의식의 반응이야.

왜냐하면 기도는 단지 구걸하고 기원하는 행위일 뿐, 결코 창조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지.

기도 속에는 항상 이원성이 존재해. 구걸하는 자와 주는 자.

사람들은 예컨대 자동차나 어떤 성품 등, 자신이 소유하지 못한 것들을 얻기 위해 기도하지.

 

예수는 다른 말로 이렇게 표현했지. 너희는 기도할 때 구하는 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어라.

이것은 즉각적인 선물이야. 모든 것은 지금 이 순간 존재해.

명상이란 진실로 마음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발견하는 과정이지.

바로 지금, 얼마 후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이야.

 

너의 마음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너의 조건이야.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너의 상념 속에서 항상 표현을 구하고 있지.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한다면, 지금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반드시 알아차려야 해.

러면 어제도 과거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거야.

마음이 중얼거리는 것을 멈추었을 때 비로소 실재가 드러나지.

실재는 항상 바로 지금 현재야.”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진정한 명상은 순간적인 적응성과 무한에 대한 폭넓은 인식이 가능한 마음을 의미해.

따라서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즉각적으로 녹일 수 있지.

모든 도전이 지금 이 순간 이해되지. 거기에 어제의 반응은 존재하지 않아.

진정한 명상은 자기가 드러나는 과정이야. 자기가 드러나지 않는 명상은 명상이 아니야.

그것은 단순히 어떤 것도 드러낼 수 없는 수축 과정일 뿐이지.”

 

내가 말했다.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마음의 모든 내용, 즉 의식적 활동과 무의식적 활동, 깨어 있을 때와 잠들어 있을 때의 활동 모두를 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비록 때때로 그것이 교란적이라는 생각이 들곤 하지만."

 

“아들아, 그건 네가 결과를 구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가 설명했다.
“이제 우리 한 번 잘 생각해 볼까?
네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너는 항상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있지.
새로움은 기억을 통해서는 올 수 없어. 그렇지? 기억은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내 방식으로 나와 같이 명상해 봐. 그러면 차츰 너는 나와 같은 체험을 하게 될 거야.
우리는 내일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재를 발견하기 위해 모색하고 있는 중이야.

 

무엇보다 먼저 자아 인식이 없는 명상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깨달아야만 해.
자아 인식은 높거나 낮은 것이 아니야.
상위 자아니 하위 자아니 하는 것들은 단지 관념일 뿐이야. 그것은 마음의 산물일 뿐이지.
마음은 시간이야. 시간은 무시간적 존재를 드러낼 수 없어.
따라서 진정한 명상 속에서 상위 자아에 대한 집중은 아무 의미도 없어.
진실로, 명상은 상념 또는 기억의 전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야.
그렇기에 이것은 즉각적으로 성취될 수 있지.

 

진리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야. 진리는 지금 이 순간 존재해.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존재할 수 없지.
시간은 무시간적 존재를 드러낼 수 없어.
기억-상념은 시간의 산물이야. 그렇지 않니?
자, 그럼 자아란 무엇일까?
확실히 그것은 기억이야. 상위 자아든 하위 자아든 그것은 기억일 뿐이야.

 

내가 말했듯이,
상위 자아와 하위 자아에 대한 관념은 단순히 사변적인 것이고 마음의 산물에 불과해.
그렇지 않니? 네가 마음을 들여다본다면 그렇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상위 자아와 하위 자아는 그저 관념에 지나지 않아.
너는 어디선가 그것에 대해 읽은 적이 있어. 너는 그것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어.
그리고 이제 너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것은 실재가 아니야.

 

너는 아마 상위 자아를 아트만 또는 영이라고 부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마음 안의 관념일 뿐이야.
네가 그것을 아트만이라 부를 때, 너는 그것을 높은 차원에 올려다 놓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기억의 한 부분에 불과해.
그러므로 '나'의 모든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반드시 기억, 관념, 상념들을 이해해야만 해.
기억, 관념, 상념은 동일한 것이야.

 

상념이나 기억이 없다면 자아는 존재할 수 없어.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기억을 이해해야만 해.
여기서 기억은 방금 전이나 어제 획득된 것뿐만 아니라, 수 세기 전에 획득된 것까지 포함되지.
기억은 축적된 시간 체험의 결과이고 과거의 모든 영향이야.
표면 의식 속에 있든 잠재의식 속에 있든 이 모든 것은 다 기억이야.

 

하지만 기억을 낱낱이 조사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하지만 시간은 진리를 드러낼 수 없어.
왜냐하면 진리는 무시간적이고 항상 현재이기 때문이야.
따라서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시간적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시간을 사용하는 버릇이 있어.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진리는 항상 저 멀리 있을 뿐이야.
이제 우리는 이런 인식에 도달하게 돼.
생각은 기억의 결과이고 기억은 반드시 즉각적으로 녹여야 된다는."

 

그가 계속 말했다.
“자, 이제 알겠지. 자아는 단지 기억의 다발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은 상념의 형태로 자신을 투사해.
생각과 자아는 분리돼 있지 않아. 양자는 하나야.
그것은 결코 진리일 수도 없고, 진리를 드러낼 수도 없어.
우리는 반드시 마음을 초월하고 기억을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한 곳에 이르러야만 해.
하지만 기억이 작동하는 한 시간이 존재할 수밖에 없지. 시간은 실재가 아니야."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순간 그것이 보다 분명해지며 내적 변화가 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것이 이해되고 있었다.

마음은 시간과 기억과 관념의 산물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이 비로소 인식되었다.

해방되려면 마음은 결코 진리를 드러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는 걸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높든 낮든, 기억은 초월적인 것을 드러낼 수 없다.

 

마음이 결코 진리를 드러낼 수 없다는 걸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진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침으로써만 나는 진리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게 되자 마음이 고요해졌다. 그것은 강요된 고요가 아니라 자유를 통해 온 고요였다.

나는 더 이상 어떤 것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무엇인가 돼야겠다는 욕망이 사라졌다.
마음 자체는 진리로 변화될 수도, 진리를 찾아낼 수도 없다.
진리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마음이 고요해져야만 한다.
그러면 시간과는 무관한 고요가 존재하게 된다.

 

그것은 강제되거나 강요된 고요가 아니라 이해를 통해 생겨난 고요이다.
마음이 중얼거리기를 멈추었을 때 그 침묵 속에 실재가 존재하고 미지자가 현현한다.
이것은 창조성이다. 나는 결과에 대한 욕망을 버렸다. 모든 행동이 멈췄다. 생각도 멈췄다.
이것은 가장 고차원적인 형태의 사고思考이다. 왜냐하면 이제 창조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의 상념은 더 이상 기억의 표현도, 과거의 표현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생각이 진리인가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한 표현도 아니었다.
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았고, 더 이상 사물 속에 갇히지도 않았다.
모든 지성적 활동이 멈췄다. 나는 더 이상 방황하지도, 의아해 하지도 않았다.
이제 사유도 사유자도, 경험도 경험자도 없었다. 이제는 기억과 시간을 통한 경험도 없었다.

 

다만 시간이 사라진 속에서 경험의 상태만이 존재했다. 어제, 오늘, 내일이 완전히 멈추었다.
그것들은 마음속에만 존재할 뿐, 사실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마음은 시간 없이 존재하였다.
그렇게 시간 없이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것이다.
원인이 없기에 결과도 없다. 원인 없이 존재하는 것이 실재이다.
아버지 유일자가 자신의 일을 수행하고 있다. 여기에 창조성, 즉 완전함이 존재한다.

 

이제 나는, 진리가 즉각적이며, 시간의 산물인 마음이 완전히 멈추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즉시, 모든 생각이 시간성을 띠며, 모든 인간적인 문제가 바로 지금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실재는 어떤 문제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를 만드는 것은 인간 그 스스로일 뿐이었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었다.

 

모든 인간적 문제들은 기억과 경험과 시간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억은 결코 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문제들은 그것들 자체가 발생한 차원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기억의 작동이 멈추었을 때 문제들은 즉각적으로 해결되었다.

 

그것들은 무시간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오직 시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시간은, 문제가 존재하고 있는 마음속에서만 존재하였다.
오로지 미지자만 존재하고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
인간의 모든 문제들은 사랑과 지혜인 미지자 안에서 녹아 사라져 버린다.

 

이것을 알게 되자 창조성이 탄생하였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한자는 유일한 실재였다.
나는 단순한 로봇이 아니라 모든 곳에 편재하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능동적 창조 원리였다.
이제 나는 자아에 대한 인식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자아는 실재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실재가 곧 자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이 유일한 시간이다. 내일도, 어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와 과거가 현재를 가리고 있을 때, '지금'은 인식되지 않는다.
따라서 명상은 집중의 수단이 아니다. 집중은 수축, 배제, 제한이다.
명상은 자유, 시간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제 나는 오로지 유일자만이, 늘 새로움the Ever New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원성도, 대립물도, 욕망도, 갈망도,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들은 마음에 속한 것이다. 분리 속에 살고 있는 것은 바로 나였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그리스도 요가만이 유일하게 참된 요가이다.

 

이제 나와 나의 것은 사라져 버렸다.
오로지 전체만이 실재할 뿐이었다. 물방울이 바다가 된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이제 나는 예수가 한 이 말의 의미를 알았다.
그것은 관념이 아니라 실재였다.
생각은 결코 실재를 창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생각은 시간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무시간적 존재를 드러낼 수 없다. 이제 나는 이것을 알았다.
기억의 산물인 생각이 그쳤을 때에만, 지속되는 생각이 끝나야만, 영원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은 이 침묵 속에 기억과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자가 있다.
그것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항상 지금 현재이다.

 

이제 나는 상위 자아도 하위 자아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분리이고 마음의 산물일 뿐이다.
상위 자아든 하위 자아든 자아는 단지 관념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시간의 관념은 환영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나의 스승과 원장이 우리 쪽으로 다가와 곁에 앉았다. 나의 스승이 말했다.

“우리는 당신들이 시간의 세계로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요. 방해 하고 싶지 않았죠."

 

그가 말했다. “이곳은 게쉬 린포체가 가장 좋아하는 사원 중 한 곳이지. 네가 잠사르에서 돌아올 때 그는 여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리고 링마탕까지 함께 돌아가게 될 거야. 우리는 네가 혼자 가게 둘 수 없어.” 내가 대답했다. “영광입니다."

 

그 후 우리는 라사와 포탈라에 대한 일반적인 대화를 나누며 아침 시간을 보냈다. 곧 정오가 되었다. 한 라마가 다가와 식사 준비가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어떤 음식이 나올지 궁금했다.

 

맛있는 보리죽, 멋지게 요리된 양고기, 보리빵, 신선한 버터, 그리고 빠질 수 없는 티베트 차가 준비돼 있었다. 식단을 보니 흔쾌해졌다. 이제 나는 티베트 차에 길들여졌고 좋아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피마자유를 먹는 기분이었었다. 끓는 물에 차, 야크 버터, 소금을 넣으면 훌륭한 티베트 차가 된다. 정말 놀라운 혼합이다!

 

게쉬 린포체는 이미 원장에게 나에 대한 모든 것들을 말해준 상태였다. 원장은 티베트어로 내게 말했다. “나도 영어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어디서 무슨 일들을 해왔는지 듣고 싶군요.”

 

우습게도 나는 티베트어로 그럭저럭 대화를 해나갈 수 있었다. 특정 단어들에 대한 액센트가 서툴렀지만 그는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화가 끝나자 나의 스승과 게쉬 린포체가 내 티베트어 실력에 대한 인정의 뜻으로 박수를 쳐주었다.

 

오후에 우리는 사원을 둘러보았다. 트락체 사원에는 약 500명의 라마들이 있었다. 사원의 정면은 벼랑 끝에 위치해 있었다. 계곡 아래까지 가파르게 내려선 벼랑은 1천 피트도 더 돼 보였다. 이런 곳에 사원을 짓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된 작업이었음에 틀림없다. 거대한 나무 기둥들이 법당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다.

 

“어떻게 저 기둥들을 올려 왔을까요?” 내가 물었다.

 

“모두 수작업이지." 그가 대답했다. “사람들이 나무 기둥 하나하나에 여러 개의 밧줄들을 묶은 뒤 계곡으로부터 끌어 올려왔어. 저 대형 석재들은 거대한 바위에서 잘라내고 떼어낸 것들이지. 티베트의 건축가들은 이런 종류의 일에는 세계 최고일 거야.”

 

티베트의 모든 사원들은 서로 비슷비슷하다. 이 사원의 특징이라면 높은 산 암반 위에 지어졌다는 것이다. 사원의 바로 앞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계곡에는 캬추 강이 로빙추 강과 합류하고 있었다. 바로 거기서 거센 물결이 거대한 둥근 바위들과 부딪히며, 급행열차처럼 포효하는 굉음을 내고 있었다.

 

우리가 밟게 될 여정 길이 캬추 강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었다. 이제 이틀만 더 여행하면 우리는 잠사르에 도착하게 된다.

 

상쾌한 하루였다. 여행의 마지막 단계를 앞두고 재충전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말로만 자주 듣던 스승의 암자를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날 밤 나는 전날처럼 단잠을 잤다. 이틀간의 여정을 하루에 다 마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스승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들아, 족히 30 마일거리이고, 길도 험하다. 아주 위험한 곳들도 있기 때문에 길도 좋은 쪽으로 걸어야만 할 거야. 그런 길에서는 조랑말 등에도 타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거야.”

 

다음 날 아침 6시경, 우리는 길을 나섰다. 우리는 그날 밤 안으로 데첸종까지 가고, 다음 날 밤에는 잠사르에 도착하도록 계획을 세웠다. 우리가 타고 온 조랑말들은 계곡 아래 있는 사원 소유의 마구간에 있었다. 우리는 게쉬 린포체와 원장에게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식량으로 가득 찬 배낭을 맨 채 돌계단을 내려오는 것은 올라가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계곡 아래로 내려온 우리는 조랑말을 타고 길을 재촉했다. 신선한 아침 산들바람을 마시며 거센 물살이 바위와 부딪혀 허공에 산산이 뿜어내는 하얀 포말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경이롭고 장엄한 풍광은 그 자체로 활력소가 되었다.

 

서구인 중에 라사를 넘어 티베트 오지 깊숙이 여행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까지 내가 성취한 일들에 대한 중요성이 새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