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베인/그리스도 요가

그리스도 요가(Christ Yoga) 05장

기른장 2020. 3. 3. 21:42

매일 아침이 새로웠다. 계곡에는 밤새 비가 내렸다. 산은 더욱 많은 눈으로 뒤덮였다. 자욱하게 낀 옅은 안개가 시원한 바람에 밀려가고 있었다. 햇살이 그 사이를 뚫고 빛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마치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의 아침과 흡사했다. 차이점이라면 이곳의 산들이 훨씬 더 크고 가파르고, 풍경이 더 웅장하다는 것이다.

 

스승은 이미 마을로 내려가 있었다. 그는 그곳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도움과 조언을 청했다. 그들은 정말로 운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을 때 내가 말했다. “이른 아침부터 일과를 시작하셨군요.”

 

“응.” 그가 말했다. “새벽 3시경에 촌장 부인이 사내아이를 출산하는 걸 도왔어. 산모와 아기 둘 다 건강해. 이틀 정도 지나면 그녀는 회복될 거야.” 이것은 내가 본 그의 다른 면모였다. 그의 다재다능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 동네 아이들 중 상당수가 내가 받은 애들이지. 지금은 전문가가 다 되었다니까." 그가 말했다. “아침 식사는 했나?” 그가 물었다.

 

“아니오.” 내가 대답했다. “이제 막 일어나서 면도하고 씻고 풀pool에 가서 몸을 담그고 있었어요.” 풀은 온천에서 나오는 물로 아주 뜨끈했다. “실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디 가신 건지 궁금하더라구요.”

 

“그렇군." 그가 대답했다. "나는 새벽 2시부터 일을 했어. 그리고 무슨 일이 없는지 마을을 한 바퀴 휘 둘러 보았지. 별일이 없더군.”

 

내가 말했다. “티베트의 신생아 사망률이 높은 걸로 아는데요.”

 

“그래.” 그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 지역은 그렇지 않아. 신생아가 죽는 일은 거의 없어.”

 

“마을 아이들 숫자를 보니 그런 거 같네요." 내가 대답했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의 놀라운 치유와 사랑의 힘 덕분이죠."

 

“아침 식사나 같이 하지.” 그가 말했다. 나의 칭찬과 찬사를 끊어버리려는 것 같았다.

 

그는 항상 내게 이렇게 가르쳤다.
모든 인간 안에 신의 영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종교적 교리, 신조, 여타 마음의 혼란 등으로 가려져 있다고.

 

“만일 이해하기만 한다면 지금 내가 하는 일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일들을 너도 할 수 있을 거야."

그가 말했다.

“예수도 이와 비슷한 말을 거의 2천년 전에 했었지만,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

그 주원인은 사람들이 눈먼 자들을 모방하기 때문이야."

 

“너는 어떤 상도 숭배해서는 안 돼. 심지어 나무, 돌 등으로 만들어진 그리스도의 상징물들조차.”

그가 계속 말했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는 너를 실재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기 때문이지.

자기 내면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남아있는 한,

사람들은 지배하고 속이고 착취하는 거짓 스승들의 도구가 될 뿐이야.

사람들이 계명되었을 때만 자신들을 이러한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내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아침으로 우유 한 잔 먹을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어요."

 

“그래. 아들아, 그러렴.”

 

야크 젖은 유지방이 풍부하고, 크림이 맛있다. 나는 거의 매일 아침 보리죽과 함께 그것을 먹었다. 그러나 이 특별한 아침, 나는 다만 한 잔의 우유면 족했다.

 

아침 식사 후 우리는 산이 마주보이는 프론트 홀로 갔다. 눈앞에 펼쳐진 이 장관과 대기 속에서 나는 항상 날카롭게 깨어 있는 것을 느끼곤 했다.

 

“오늘 아침에는 희망에 대해 말하려 해.” 그가 말했다.
이윽고 그가 익숙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희망은 불안의 상태야. 불완전한 상태에 있을 때, 사람들은 희망을 가지고 살게 되지.
잠언 17장 10절에 이런 말이 있지.

‘한 마디로 총명한 자를 경계하는 것이 매 백 개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이느니라.'
지혜로운 자는 실수를 인식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그것을 반복하지.

 

대부분의 사람들, 아니 사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외적인 안전을 구하고 있지.
그러나 외부적인 불안이 존재하면 거기 내면적인 불안도 항상 존재하게 돼.
그 역도 마찬가지야. 왜냐하면 내면은 항상 그 자신을 외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지.
이런 이해의 결핍과 더불어 인류는 희망의 철학을 발전시켜 온 거지.

 

희망에 매달려 있는 사람은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야. 그는 살고 있는 게 아니야.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미래이기 때문이지.
따라서 희망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전혀 살고 있는 것이 아니야.

 

그는 미래의 어디선가 살고 있는 거야.
미래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지.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유일한 시간이야. 왜냐하면 지금은 유일한 실재이기 때문이지.
어제나 내일을 사는 것은 불가능해.
만일 미래나 과거 속에서 살고 있다면, 너는 다만 너의 마음속에서 살고 있는 것일 뿐이야.
그렇다면 삶이라는 것은 단지 환영에 불과한 시간 속에서 사는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게 돼.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반대로 생각하지.
그들은 어떤 불안도 없는 상태를 추구하고 있어. 왜 그럴까?
그건 간단해. 그들이 불안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야.
너 역시 그렇다면 너는 반드시 마음이 불안한 이유를 발견해야만 해.
그때 비로소 너는 네가 어째서 희망하는지 이해하게 될 거야.

 

확신에 차지 못할 때 너는 절망감에 빠지게 돼.
그래서 너는 희망의 철학을 추구하게 되지.
하지만 네가 희망에 대한 진실을 이해할 때 절망과 희망, 양자로부터의 해방이 찾아오게 돼.

 

너는 네 자신을 이해하기 전에는 두려움을 느꼈었어. 사실 그렇지 않니?
그건 네가, 생각과 생각하는 자가 분리돼 있지 않다는 것을 식별하지 못했다는 의미야.
너는 너의 생각을 생각하는 자와 별개의 것으로 보고, 그 결과 생각을 두려워하였지.
하지만 이제 너는, 생각이 생각하는 자를 창조하고
생각하는 자가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을,
따라서 양자가 분리돼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너는 생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주시함으로써
이 모든 조건 지어진 생각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켜야만 해.
생각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지? 내게 말할 수 있겠니?”

 

“예.” 내가 말했다.
“생각은, 상속된 것이든 습득된 것이든 기억과 환경에 대한 반응을 통해 생겨납니다."

 

“그래.” 그가 말했다.
“자아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행동 방식을 식별해야만 해.
왜냐하면 자아와 생각은 하나이고 같은 것이기 때문이지.
이 점을 이해하면 평화가 찾아오게 돼.

 

이제 너는, 자아에게는 어떤 실재성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자아는 단지 연속적으로 투사되고 있는 기억과 경험의 다발일 뿐이야.
그래서 자아는 자신의 생각과 경험들 속에 갇히게 되고, 그것이 마음을 구성하게 되지.
이제 너는 이 모든 것이 심적인 거라는 걸 알 수 있어.

 

이 점을 식별하고 이해하지 못할 때 거기 두려움이 존재하게 되지.
너는 두렵기 때문에 희망하는 거야. 희망과 두려움은 마음속의 대대물待對物이야.
그런 상태에서는 항상 지금 존재하는 실재의 드러남은 불가능하지.
그런 상태 하에서는 살아 있는 현재를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과거와 미래가 이해를 통해서 현재 속에 녹아사라질 때, 평화가 임하게 돼.
그리고 그 평화 속에 실재가, 창조적인 생명이 현전하게 되지.
창조성은 언제나 지금 그리고 현재 속에 있을 뿐 미래나 과거 속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아.
그러므로 철학이나 희망을 만들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알 수 있을 거야.”

 

“예.” 내가 그의 말에 동의했다.
“나는 이제 내 마음이 변화되고 있고, 두려움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나는 옳은 것과 그른 것, 영적인 것과 비영적인 것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들이 단지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동안 나는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버렸었어요.
그러나 영성은 사랑, 지혜, 친절이에요.
이해를 통해 투쟁이 사라질 때에만 그것들은 다가옵니다."

 

“그래.” 그가 말했다.
“너는 네 멋대로 결론들을 만들고는 그걸 이해라고 불러왔어.
하지만 이제 너는 이제 그 결론들이
너의 상태에 대한 이해에 하나의 걸림돌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

 

두려움을 통해 너는 종교 의식에 매달려왔어.
그것을 통해 너는 도망치려고 발버둥 쳤지.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더욱 갇히게 되었지.
너의 결론들은 하나의 벽이 되었고, 너 자신을 둘러싸버렸지.
너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어. 스스로가 만든 감옥 속에 말이야.

 

그 안에서 너는 비교하고 수정하고 억누르고 보충하면서 만들고 부수었어.
하지만 더 많은 혼란만을 초래했지.
이 혼란은 두려움과 모순에 찬 감옥에 갇힌 자아의 투사에 불과해.
자아가 어떤 과정을 거치고 있는지 아는, 자아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만 이 상태는 녹게 돼.
오직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만 자아는 그 자신을 스스로 만든 환영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어.

 

자아가 단지 기억, 경험, 제한, 믿음, 순응 등의 다발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이 자기울타리를 벗어나게 되지.
자아가 갈등하는 이유를 알고 혼란이 그칠 때
그 고요 속에서 영원하고 무한한 실재가 현전하게 돼.
의식이 해방되면, 의식은 자신이 시간, 기억, 경험, 과거, 미래의 환영을 받아들일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자유로웠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자유는 현재 속에서 살 때에만 존재해.
그러므로 우리가 순간순간 그 환영을 식별할 때 그것은 본래의 무無 속으로 녹아 사라지게 되지.
그리고 이 자각 속에서 실재가 드러나게 되고 창조성이 현현하게 돼.

 

자아가 갇혀 있을 때 자아는 외부의 신에게 기도하게 되지.
이것이 바로 신자들이 결코 신을, 미지자를 알 수 없는 이유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부의 신을 믿고 있어.
외부의 신을 믿는 이상 그들은 결코 신을 알지 못할 거야.
하지만 무신론 역시 신앙의 일종이야. 따라서 무신론자들 역시 미지자를 발견할 수 없어.
왜냐하면 믿음과 불신은 조건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기 때문이지.
믿음은 알려진 것, 즉 기억에 대한 결과야. 기억은 결코 미지자를 깨달을 수 없어.

 

기억은 이렇게 말하지. '나는 신을 알지 못해. 그것은 미지의 어떤 것이야.’
이렇게 기억은 미지자를 창조해.
그리고는 그것을 미지자에 대한 체험의 수단으로 믿는 거야.
그러나 이것은 아무런 알맹이도 없는 심적인 조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는 알 거야.
마음이 자신의 가공물로부터 자유로울 때에만 미지자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해.
이 발견은 외부가 아닌 내면으로부터 오지.”

 

“이제 알겠어요.” 내가 말했다.
“결론이라는 것은 이해의 걸림돌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자아는 그 결론에 갇혀버리기 때문이죠.
결론은 자아의 중심적 이미지가 되고 환영 속에 가둠으로써 자아를 눈멀게 만들어 버려요."

 

“그래.” 그가 계속 말했다.
“결론과 자아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야.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변화와 해방이 찾아오게 되지.
모든 결론들은 떨어져 나가게 돼.
그렇게 되면 마음은 한없이 유연해지게 되고,
이런 무한한 유연성 속에서만 실재는 발견되는 거야.

 

결론으로부터 우리는 결심을 형성하게 되지.
결심은 어리석은 짓이야.
결심은 단지 욕망을 억누르는 것일 뿐이지.
억압을 통해서는 이해란 불가능해.
현재 속에서 깨어있을 때
너는 각기 상이한 차원에 존재하는 마음의 다양한 가지들을 발견할 수 있어.
자아의 길들이 벌거벗은 채 펼쳐지게 되지.
높은 차원이건 낮은 차원이건, 질투하게 되면 질투에 의해 묶이게 돼.
단순한 피상적인 질투에서부터 정신적ㆍ영적 차원의 보다 정묘한 형태의 질투에 이르기까지,
질투는 내면의 창조성의 발현에 장애가 돼.

 

창조성은 사고의 소산이 아닌 존재의 상태야.
그것은 거짓에 대한 이해를 통해 얻게 된 변화의 결과지.
사물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일 우리의 반응을 주시한다면
우리는 자아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자각하게 될 거야.
너는 각 반응 속에서 기억, 두려움, 허영심, 탐욕, 저항, 수용, 믿음 등을 보게 될 거야.
관계 속에서의 이 반응들을 통해 너는 너의 본질을 알 수 있어.
너의 본질을 아는 것은 자기 인식이야. 그리고 이것만이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어.

 

네가 깨어 있으면 그러한 자각을 통해
너는 어떤 비난, 두려움, 판단의 개입 없이 있는 그대로의 네 자신을 볼 수 있어.
그리고 마음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 있지.
그러면 그때 가공되지 않은 실재가 현전하게 돼.
유일자 아버지가 일하게 되지.
유일자 아버지는 현재 속에 영원히 편재해.
그리고 모든 창조의 배후에 존재하는 유일한 지성이야.

 

자, 네 마음속을 들여다봐.
그러면 너는, 타인들의 생각에 의해, 종교, 정치, 경제 분야의 지도자들에 의해
네가 어떻게 영향 받고 조건 지어져 있는지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이 모든 것들은 진리의 도구가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유일한 창조성인 실재를 발견하기 위해
너는 그것의 정묘한 영향과 그것에 대한 너의 반응에 대해 자각해야만 해.”

 

이제 나는 그의 지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유일한 진실한 영향은 자유로운 영의 영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은 마음의 구성 성분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를 표현한다.
그리고 그 속에 올바른 사고의 엄청난 힘, 그리스도 요가의 비밀이 존재한다.

 

“네.” 내가 말했다. “이제 나는 세계가 왜 혼란스러운지 알게 되었어요.”

 

“그래. 하지만 그 혼란을 없애는 작업은 너와 나로부터 시작되는 거야.
혼란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으면 안 돼.”

 

“네.” 내가 말했다.
“과거가 더 이상 현재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창조성을 경험할 수 있어요.
우리가 그 모든 모순과 한계들을 지닌 마음을 이해할 때에 비로소 마음은 고요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마음을 초월한 것이 현전하게 되고, '나'는 무한자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가 설명했다.
“뭔가 되고 싶은 욕망, 어떤 결과를 성취하고 싶은 욕망이 있을 때
거기에는 반드시 모순이 있게 돼.
그리고 모순이 있는 곳에 마음의 고요는 있을 수 없지.
고요는 삶의 전체 의미를 깨닫는데 필수적인 요소야.
그러므로 시간의 산물인 생각은 결코 무시간적 존재, 시간을 초월한 존재를 깨달을 수 없어.
생각의 본질은 과거와 미래에 속해 있어.

 

따라서 생각으로는 살아 있는 현재를 완전히 자각할 수 없고
현재의 사실을 완전히 의식할 수도 없어.
왜냐하면 시간의 산물인 생각은 자신과 상반되고 모순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스스로 만들어낸 모든 문제들을 없애려고 노력하기 때문이지.
생각은 단지 어떤 목적을 추구할 뿐이야.
생각의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생각과 생각하는 자가 사라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실재를 깨달을 수 있어."

 

“알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만일 제가 물질적, 정신적, 또는 소위 영적인 수단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면
나는 이용되고 있는 거군요. 내가 이 착취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겠어요.
외적인 행복을 추구할 때 나는 착취자를 만드는 자가 됩니다.
착취자는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착취자는 자연의 괴물이 아니라 물질적, 정신적, 영적 만족을 구하는 나의 요구의 결과입니다.
거기에는 자유가 없어요. 그리고 결코 바라는 것을 성취할 수도 없죠.”

 

“그래.” 그가 말했다. “전적으로 옳은 말이야.
그런데 거기에는 좀 더 살펴봐야 할 미묘한 문제가 있어.
사람들이 무언가에 저항할 때 그것은 그들 자신의 악한 행동의 결과야.
사람들은 몇 사람을 죽임으로써 악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해.
악한 행위를 한 사람을 사형시키고 감옥에 가둠으로써 악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건 악을 더 부추길 뿐이야.
왜냐하면 사람들은 악한 행위를 하는 자의 역할을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잘못된 방법으로는 결코 올바른 행위를 끌어올 수 없어.
살인자들을 죽이는 단순한 방식으로는 평화를 가져올 수 없어.
그것은 너 역시 살인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거든.
우리가 상이한 국적, 종교, 이데올로기에 따라 패를 나눈다면 공격자와 방어자가 생기게 되지.
방어자는 언제든 공격자가 될 수 있어.
우리가 무지, 전통, 습득, 이상, 추종 등을 통해 어떻게 조건 지어져 왔는지 인식할 때까지
평화와 자유는 있을 수 없어.

 

악은 악을 통해 극복될 수 없어.
악은 어떤 상반되는 행동을 통해 극복될 수 없어.
그것은 더 많은 공격과 더 많은 악만을 초래하게 되지.
오직 이러한 분리가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 이해함으로써만
인간 세계에 평화가 올 수 있어. 평화는 공격의 결과로 생기지 않아.

 

평화는 전쟁을 통해 생기는 것이 아니야.
평화는 오로지 공격성, 국가주의, 종교 조직 등 이 모든 전쟁의 원인들을 이해하고
그것들이 녹아사라질 때에만 찾아와.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사랑, 신, 평화가 현전하게 되지.
그것들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야.
너는 평화를 창조할 수 없어.
사랑-평화는 유일자의 근본 원리야.
그것은 세계가 존재하기 전에 존재했어.
그것은 유일한 실재야.
‘나는 유일자이다. 나 외에 다른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성은 모든 것을 포괄해. 그 속에는 어떤 차별도 분열도 욕망도 존재하지 않아.
무지의 그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너는 반드시 너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해방되어야만 해.
그리고 모방과 전통과 권위의 노예가 되기를 거절해야만 해.

 

세계는 이기심에 바탕을 두고 있어.
그 이기심은 환영, 두려움, 모순에 가득 차 있지.
인간은 두려움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무책임하게 돼.
그리고 더욱 심한 혼란과 무질서로 치닫게 되지.

 

이해와 적응을 통한 의식적 행동은
우리를 순수한 사고로 이끌고, 그것은 다시 순수한 행동으로 이끌어.
그 속에는 더 이상 공격성, 이기심, 증오, 살인 따위는 존재하지 않지.
오직 그때에야 현재에 대한 자각이 가능하게 돼. 그것은 언제나 항상 지금이야.
그것은 어떤 개인, 국가 또는 그룹 속에 대대待對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아.

 

너는 선과 악이 그 자체로 존재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거야.
그것들은 단지 우리 행위들의 결과를 가리키는 단어에 불과해.
이 행위들은 우리의 사고 유형에 의해 선결되지.
이 사고의 원인은 속박된 자아의 무지야.
그러므로 자아에 대한 이해는 세상의 슬픔과 갈등을 없애는 데 필수적인 요인이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재의 표현인 그리스도 의식의 발현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각하는 거야.
이것이 바로 네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야.
달콤한 말이나 사상은 인간의 무지를 지속시킬 뿐이지.
믿음은 인간의 마음을 편협하게 만들어.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들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이해할 때에만
마음은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돼.

 

원인을 이해하는 명징한 마음,
비난, 적대감, 애국심, 종교적 형식, 정치적 술수 등에 의해 혼란되지 않은 마음,
인류가 어떻게 조건 지어지게 되었는지 이해하고 자각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 때만 그것은 사라지게 돼.
오로지 자유로운 마음속에서만 진정한 영감은 발현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요가야.

 

기도할 때, 신과 네가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해서도, 영감을 외부에서 구해서도 안 돼.
그렇지 않다면 너는 분리의 환영 속에서 길을 잃게 돼.
오로지 하나의 생명만이 있다는 것,
그리고 너의 생명은 너의 형제자매들의 생명과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해.
너는 무한자의 한 부분이고 너의 형제는 또 다른 부분인 것이 아니야.

 

하나의 생명 속에는 어떤 분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
우리의 몸 안에는 심장, 폐, 간장, 신경계통, 뼈, 수족 등 많은 장기들이 있어.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몸이야.
하나의 피가 우리 몸 안의 모든 장기들에 자양분을 공급하고 있지.
이와 마찬가지로 각기 다른 국가들이 하나의 몸의 장기를 구성하고 있어.
하나의 생명이 모든 것 안에 깃들어 있지.

 

네가 거짓인 것을 이해하면 진리가 드러나게 돼.
진리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어.
왜냐하면 그 밖의 모든 것들은 그 자신의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야.
그것은 진리 속에서 존재할 수 없어.
진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고 진리 속에 어떤 분리가 없기 때문이지.
분리는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이야.”

 

이 말과 함께 그는 입을 다물었다.

나 역시 침묵했다. 달리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나는 듣는 법을 배웠다.
나는 그의 말에서 관념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다만 내 자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도록 듣기만 했다.
이제 나는 이런 자기이해야말로 지혜의 열쇠라는 것,
그리고 자기이해 없이 어떤 지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신은 영감에 넘치는 말을 들으며 그냥 침묵한 채 앉아 있어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그 말을 반복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말은 당신의 모든 삶을 바꾸어 놓게 된다.
거대한 변화가 내면에서 일어나고, 그 변화와 함께 설명할 수 없는 해방감이 찾아온다.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런 해방감을 느꼈다.
그 느낌은 언제나 새로웠다. 과거의 속박들이 떨어져 나갔다.

 

우리는 잠시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내게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내게 있어서, 과거와 미래는 현재 속에 녹아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만이 유일한 시간이었다.
이 깊은 침묵 속에 실재가 있었다. 그것이 모든 것이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힘은 바로 '지금'이었고 그 힘은 사랑이었다.

 

사람들에게 희망이 더욱 중요하게 된 것은 그들이 현재 속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이 문제를 깊이 들여다본다면,
희망은 언제나 미래의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미래는 오직 마음 안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대의 삶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언제나 현재 속에 존재한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은 창조적이다. 그것은 순간순간 언제나 새롭다.
그 속에서 기억은 녹아 사라지고 사랑은 유일한 실재가 된다.

 

아마 당신은 그런 순간을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너무도 경이로워 다시 붙잡으려 애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과거가 돼 버렸고 지금인 현재를 체험할 수 없다.
그 순간은 과거가 돼 버린 체험이고 기억일 뿐이다.
과거와 미래는 당신의 마음속을 제외한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바로 이 순간은 창조적이다. 창조성은 매 순간 자신을 새롭게 한다.
그러므로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마음속에만 존재한다.
이것을 이해할 때 옳고 그름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분리도, 국가도, 믿음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거기에 유일한 실재인 살아있는 현재를 방해할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유일한 실재는 사랑이고 지혜다. 그것은 만물의 아버지 신이다.
그리스도 요가는 다른 모든 요가들보다 위에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 오직 지금 존재한다!
신은 자신의 완전성 속에서 지금 존재한다. 지금!
그만이 홀로 존재한다!

 

당신이 이것을 깨닫게 되면,
실재 안에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것들은 다만 인간의 마음 안에서만 존재한다. 이것은 인간의 조건화이다.
우리의 자아와 마음속에는 이미지, 믿음, 관념, 분리, 어제, 미래 등이 존재한다.
그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가 어떤 비난이나 판단 없이 그것들을 자유롭게 보고 초월하려면
마음이 활동하는 것을 그쳐야만 한다.
왜냐하면 마음은 커다란 환영이자 환영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것은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실재에 대한 관념에 불과하다.
신이라는 단어는 신이 아니다.
신은 영원하며 완전함 속에서 항상 지금 존재한다.

 

신은 유일자이다. 이것을 체험하려면 마음이 고요해져야만 한다.
마음은 아는 자가 아니다. 마음이 이 사실을 이해할 때 그것은 투쟁하기를 그친다.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현재 속에 존재하는 실재가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미래 속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미래는 오직 마음속에만 존재한다.

 

당신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것을 체험해야만 한다.

아무도 그대를 위해 대신해 줄 수 없다.
그것은 어떤 선생이나 스승 없이 홀로 가야만 하는 길이다.
그것이 미지자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른 길은 없다.
이것이 바로 내가 경험한 것이다. 나는 혼자 힘으로 그것을 알았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요가이다.

 

미지자를 체험하는 데 있어서 교사는 방해물일 뿐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 받는 자가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이 고요해지면 양자는 사라지게 된다.
거기에 경험자와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아가 영원의 순간 속에 녹아사라지기 때문이다.
나의 말들은 부적절하다. 나의 말들은 결코 미지자를 드러낼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외부가 아닌 내면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진리는 결코 이용될 수 없다.
세상적인 행위 속에서 진리를 이용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그것에 접근하는 순간
당신은 그 진리를 잃게 된다. 그 때 진리와 당신은 분리된다.
거기에 당신과 진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진리가 될 수 없고,
다만 진리에 대한 관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진리는 현전한다.
당신은 삽이나 곡괭이처럼 진리를 이용할 수 없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당신이 진리보다 더 위대해져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이용하려 하지 않고 진리가 작동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당신의 삶과 관계 속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고,
그것의 작용은 무한하게 광대해질 것이다.

 

진리를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노력하면 그 순간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단지 지적 행위에 불과하다.
그 안에는 기억, 분리, 선, 악, 환영, 증오, 질투, 적대 등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단지 자아의 투사일 뿐이다.

 

그러나 만일 진리가 당신 안에서, 당신을 통해, 마음의 방해 없이 작동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개념을 초월하여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을 자유롭게 하는 진리(또는 미지자, 신)의 효과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미지자에게는 이름이 없다. 미지자는 예측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마음이 그것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은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나 마음이 고요해진다면 진리가 작동할 것이고 그 작동은 무제한적으로 광범위해질 것이다.
이 안에, 언제나 지금 존재하는 무한한 생명의 힘과 영광과 자유와 최고의 행복이 존재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주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누가 복음 18장 1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