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리스도 요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스도 요가는 단지 이름에 불과하다. 그 이름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제야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이 책의 제목으로 어떤 것이 적당할 지 항상 찾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름이나 제목, 지위, 서열, 관념 등에 사로잡힌다. 어리석은 마음은 그 모든 것들을 먹고 산다.
마음의 먹이는 그 자신의 구성물들이다. 그것들은 관념, 말, 신조 등이다. 우리가 마음의 어리석음을 알지 못할 때, 마음은 스스로를 흔들어 놓는 문제들을 계속 만들어낸다. 그리고 마음은 계속 중얼거린다. 이 중얼거림은, 마음 그자체가 문제의 원인이라는 것을 이해했을 때, 그리고 마음의 본질과 그 움직임을 이해했을 때 비로소 멈추게 된다.
성숙하지 못한 마음은 언제나 문제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수준에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만들어낼 뿐이다. 그렇게 원인과 결과라는 끝없는 사슬이 계속된다. 이 사슬은 오직 마음 자체가 이런 상태의 원인이라는 걸 자각할 때에만 끝나게 된다.
정치가, 경제학자, 교조주의자 그리고 여타의 모든 무슨무슨 주의자들은 성숙하지 못한 마음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을 추종하는 모방자들 역시 그들과 똑 같은 마음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사유할 수 있기 전에는 이러한 최면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말들, 모든 책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방해물일 뿐이다. 그것들은 단지 조건 지어진 마음을 먹여 살릴 뿐이다. 마음은 그 조건에 순응한다. 따라서 그런 마음은 결코 창조적이 될 수 없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떻게 하면 창조성을 얻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기 원할지 모른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당신은, 내가 창조적이 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 당신은 어떤 테크닉을 수련함으로써 창조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루에 여덟 시간씩 악기를 연습하면 창조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책을 쓰고, 작곡을 하고, 시를 쓰고, 연설을 하고, 설교를 해도, 그 행위 자체가 창조성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당신은 어쩌면 완벽한 연설가, 유능한 작가, 좋은 화가일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당신에게 여전히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창조성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마음을 초월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나'이다. 자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창조성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자아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쉽다. 그저 당신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기만 하면 된다. 갈등이 있는 한 창조성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갈등은 창조적인 행동을 방해한다. 마음이 대립되는 것들에 붙잡혀 있는 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고, 이 갈등은 창조성의 발현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마음이 고요할 때에만 창조적 상태가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창조성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창조성은 그저 있을 따름이다. 마음이 자기 자신을 이해할 때, 즉 모순을 양산해 내는 그 작용방식, 표현욕, 성취욕 등을 이해했을 때에만 창조성은 활동하게 된다. 인간 안에 내재한 그리스도, 신의 영만이 창조적이다. 당신은 그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마음이 완전히 고요해지고 그 자신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질 때에만 창조성의 현현이 가능하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창조성은 자기표현을 의미한다. 자기표현은 중요하고 특별한 존재가 된 느낌을 준다. 이것은 공허하고 무지한 자아를 먹여 살린다. 그리고 창조성의 상태를 파괴한다.
자아가 부재하고 모든 대립들이 조용해질 때 창조성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존재한다. 자아가 창조적이 되길 갈망하는 한, 창조성은 결코 현현하지 않는다. 자아가 사라졌을 때만 창조성은 탄생한다. '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유일자 아버지만이 창조적이다. 일을 하는 것은 오직 그이다.' 그것이 진정한 창조성이다. 예수의 이 말들은 비록 정확하게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전달해 준다. 말로는 창조성을 전달할 수 없다. 오로지 자아의 부재 속에서만 창조성은 작동할 수 있다. 창조성의 작용은 대립도 갈등도 없이 넓고 무한하다.
만일 내가, 이 책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지 아닐지 염려했다면 결코 쓰지 못했을 것이다. 자아가 방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아가 자기 자신을 인식할 때, 모든 사물들은 있는 그대로 보인다. 그리고 더 이상 그것들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욕구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만일 자신의 관념이나 신조에 따라 이 책을 수용하거나 거부한다면 당신은 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구성 요소들에 반응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은 거의 가치가 없다. 그러나 당신이 보다 깊은 차원에서 이 책을 자아에 대한 이해의 수단으로써 읽는다면 내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변화는 마음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변화는 실재의 활동을 방해하고 있는 자아의 소멸의 결과로서 생기는 것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때에만 마음은 중얼거림을 멈춘다.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실재가 현전하게 된다.
우리는 매일 꾸준히 공부했다. 우리의 토론을 통해 특정 단어들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나곤 했다. 그런 과정은 내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다양한 요가의 지적 체계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통해 많은 놀라운 일들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내면의 그리스도를 해방시키는 데 장애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가 진리에 대해 쓴 책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것들은 대부분 지적인 것에 불과하다. 내가 '지적'이라고 표현할 때 그것은 마음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마음이 만들어낸 것은 진리가 아니라 단지 진리에 대한 관념일 뿐이다. 마음은 집중과 요가 행법들을 통해 놀라운 일들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작용하는 것은 자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요가는 자아, 즉 마음이 고요해질 때에만 가능하다.
나의 스승은 이런 말로 가르침을 시작하곤 했다.
“마음이 무엇으로 구성돼 있는지 이해함으로써만 마음을 초월한 실재가 드러날 수 있어.
그러나 자아가 있다면 진리는 존재할 수 없어.
왜냐하면 자아가 늘 전면에 나서기 때문이지.
그 때 진리는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돼버리지.
하지만 진리는 수단이 아니야.
진리에는 시작도 끝도 없어.
그러므로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자아의 투사에 지나지 않아.”
한 번은 내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만일 생각이 사라져버린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물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죠?”
당신도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지 모를 것이다. 나는 이런 질문을 수차례 받아왔다.
“만일 내가 너에게 그 질문을 한다면 너는 그 요구, 즉 도전에 반응하고 생각을 시작하게 돼!" 스승이 말했다.
“그러므로 사고란 도전에 대한 반응이야. 하지만 그 반응은 항상 과거의 결과이지.
왜냐하면 마음은 과거의 것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지. 마음은 새로운 것을 알지 못해.”
“예.” 내가 말했다. “이해가 돼요."
"몇 분 후에 내가 너에게 질문을 하면 그것은 너에게 또 다른 도전이 돼. 그리고 너는 다시 생각하기 시작하지.”
“예, 맞아요.”
“자,” 그가 말했다.
“그러면 이 반응이란 무엇이지? 도전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야.
하지만 너의 반응, 응답은 과거의 기억, 경험으로부터 오지.
그렇다면 그 반응은 항상 낡은 것이지. 그렇지 않니?”
“음,” 그가 계속 말했다.
“한 가지 물어볼게. 너는 신을 믿니? 자, 나의 질문에 너는 즉각 반응할 수 있어.
하지만 그것은 너의 조건을 통한 반응이야.
네가 만일 신을 믿지 않는다면 너는 '아니오.'라고 대답할 거야.
하지만 그것은 신이 없다고 믿는 너의 신조에 의해 너의 마음이 조건화되어 있기 때문이야.
만일 네가 신을 믿고 있다면 너는 '예.'라고 대답할 거야.
하지만 너는 너의 기억이 말해주는 대로 '예'든 '아니오'든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야.
기억은 경험의 결과야. 경험은 지식이지. 그리고 지식은 과거에 속해.
그러나 너는 지식이나 경험을 통해서는 결코 신을 알 수 없어.
그러므로 생각은 과거의 배경에 대한 반응이지.
생각은 개인적 또는 집단적 차원의 반응이야.
그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종, 신조, 믿음, 지식, 관습 등 너의 배경에 따라 달라지지.
따라서 생각은 결코 새로울 수 없어.
너의 마음이 지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한 순간 뒤에는 바로 낡은 것이 돼버리지.
너는 과거의 것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있어. 그것이 바로 기억이지.
너는, 마음이 고요해졌을 때만 현재의 순간을 알 수 있어.
너는 현재에 대해 생각할 수 없어.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과거가 돼버리지."
그 생생히 살아 있는 순간 속에서 너는 의식적이 돼. 하지만 너는 생각할 수 없어.
왜냐하면 그 순간 자아는 사라지고, 너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지 못하기 때문이지.
지나간 순간은 기억이야. 그러나 생생한 순간은 여전히 현재 속에서 살아 있는 순간이지.
너는 그 체험에 대해 생각하기를 원해. 따라서 이제 너와 너의 체험이 있게 되지. 그러나 그 체험은 지나갔어.
그것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항상 현존하는, 네가 없는, 오로지 실재와 영원만이 존재하는 그런 생생히 살아 있는 순간이 아니야. 그러나 너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그것이 지나갔을 때 너는 그것을 다시 잡기 위해 노력하지.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해. 그것은 기억이야. 왜냐하면 지나간 과거이기 때문이지.
너는 이제 기지旣知의 것, 과거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 기지의 것은 항상 과거야.
그러나 항상 현존하는 순간은 언제나 새로워. 이것이 바로 네가 실재에 대해 생각할 수 없는 이유이지.
그것은 항상 마음을 넘어서 있어. 그것은 마음이 고요해 졌을 때만 체험이 가능해.
하지만 마음은 활동적이지. 거기에는 너와 경험이 존재해.
그러나 그것은 지나간 과거야. 네가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야.
그렇지 않으면 너는 결코 그리스도 요가를 알 수 없어.
생각은 결코 그 스스로를 새롭게 할 수 없어. 생각은 언제나 낡은 것이야.
너의 조건, 전통, 인종, 경험, 신념 등은 모두 낡은 것이야.
따라서 생각은 자기 자신의 투사물만을 알 수 있어.
생각은 이미 체험한 것만을 인식할 수 있지.
생각은 단순한 인식일 뿐이야.
생각은 자신을 넘어서 있는 것을 알 수 없어.
생각은 단지 상징, 말, 이미지, 경험들일 뿐이야.
이것들 없이는 생각은 존재할 수 없어.
그러므로 생각은 결코 창조적일 수 없어.
왜냐하면 생각은 지나가버린 것들만 알고 있을 뿐이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결코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지.
생각은 자신을 넘어서 있는 것을 경험할 수 없어.
왜냐하면 생각은 오로지 낡은 것만 인식할 뿐, 새로운 것은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지.
네가 체험한 것은 기억이 돼. 그리고 너의 생각은 기억의 산물이야.”
“예." 내가 말했다.
“이렇게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시니 이해가 갑니다.
생각은 마음속에 있는 것에 의해 제한됩니다. 그래서 생각은 새로운 것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오직 낡은 것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죠.
생각은 마음을 넘어서 있는 것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생각은 마음 안에 있는 것들, 즉 기억만을 투사할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추상적인 것은 전혀 없어.” 그가 계속 말했다.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너는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심적인 인식이야.
'나'는 기억들로 구성돼 있지.
'나'는 말, 이미지, 상징 등을 통해 그 기억들을 체험하고 있어.
생각은 단지 과거를 체험하고 있는 거야. 그것은 결코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어.
그러므로 생각은 신 또는 실재를 결코 경험할 수 없어.
왜냐하면 신 또는 실재는 미지자로서, 상상할 수도 없고, 창조될 수도 없고, 공식화될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지.
신이라는 단어는 신이 아니야. 신은 이미지도 아니야. 신은 생각도 아니야.
그렇지 않다면 너는 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것은 불가능해. 왜냐하면 신은 마음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지.
마음은 오직 기지旣知의 영역 안에서만 기능할 수 있어. 그것을 넘어서면 활동할 수 없어.”
“이제 분명히 이해됩니다.” 내가 말했다.
“내가 미지자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그 즉시 마음이 활동하게 됩니다. 마음은 항상 미지자를 기지의 영역 속으로 끌어당겨 오려고 애쓰고 있지요. 하지만 그것은 명백히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미지자는 인식 불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이죠. 링쉬라 은자님도 내게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래.” 그가 말했다.
“생각이 그쳤을 때만 미지자는 현전하게 돼. 그러므로 '나'는 미지자를 체험할 수 없어.
나, 마음, 자아는 모두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야.
자아는 단지 관념, 이미지, 말, 상징의 다발일 뿐이야. 이것들은 기억이야.
자아는 오로지 그 자신의 투사물만을 인식할 수 있어.
마음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어. 자신은 분명히 미지자를 체험했다고.
하지만 마음이 체험한 그것은 미지자가 아니야. 그것은 단지 마음의 투사물일 뿐이야.
마음은 다만 그것을 미지자라고 믿고 있는 거지.
마음이 이 사실을 이해했을 때 마음은 고요해지게 돼.
마음은 더 이상 추구에 의해 흔들리지 않게 되지.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미지자가 드러나게 돼.
그러면 미지자는 아무런 방해 없이 무한하게 작동하게 되지.
생각은 과거와 기억에 의해 제한돼. 그러나 미지자는 항상 지금 존재하지.
그것은 어떤 제한도 없이 순간에서 순간으로 항상 지금 존재해.”
그는 잠시 멈추고 나서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네가 미지자를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단지 마음의 새로운 감각을 표현하고 있는 것뿐이야.
그러나 감각이나 관념은 미지자가 아니야.
미지자는 결코 인식될 수 없어. 미지자는 다만 존재할 뿐이야.
그것은 창조되지 않아.
네가 창조한 것은 단지 미지자에 대한 관념일 뿐이야.
그것은 마음, 자아의 투사물이지.
너는 결코 미지자를 창조할 수 없어.
이제 이해가 되지, 그렇지?"
“예.” 내가 말했다. “분명히 이해돼요."
“실재가 현전하기 위해서는,” 그가 설명했다.
“너는 반드시 생각의 모든 과정을 이해해야 만 해.
그것은 마음, 자아의 작용이야.
그것은 단지 기억, 경험, 관념, 이미지, 상징들의 다발에 불과할 뿐이지.
이 사실을 이해하면
자아는 더 이상 미지자를 체험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게 되고 고요해 지게 되지.
마음이 자연스럽게(억지로가 아니라) 완전히 멈추었을 때만 그 고요 속에서 실재가 드러나게 돼.”
이 토론이 당신의 인식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 믿는다.
기지의 것은 결코 미지자가 될 수 없다.
생각은 과거의 표현일 뿐이다.
그러나 실재는 항상 현존하는 지금(NOW)이다.
생각이 멈춘 순간 그것은 바로 현전한다.
순간순간을 살 때 시간은 사라진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의 상념이 멈추었을 때만,
과거와 미래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만 경험할 수 있다.
과거는 기억이고, 미래는 과거의 투사물인 희망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과거의 관점 속에서만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순수한 사고는 순간순간 현재의 표현인 영감을 통해 나온다.
예수는 다른 표현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언젠가 나는 이런 질문을 했었다.
“우리의 이해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를 포함한 선지자들의 말이 어떻게 해서 진리를 드러내는가요?”
“음, 아들아.” 그가 대답했다.
“이것 봐. 말은 결코 진리를 드러낼 수 없어.
예수는 이렇게 말했지. ‘죽이는 것은 바로 말이다.'
이것은, 말이 진리를 감춘다는 의미야.
추론을 통해 진리에 다가갈 수는 있어.
하지만 침묵의 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추론을 그쳐야만 해.
침묵이야말로 진리의 입구이기 때문이지.
아들아, 너도 알다시피 성경의 모든 말씀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씌어진 것이야.
우리는 무엇보다 이점을 고려해야 해.
신약은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하고 150년 뒤에 씌어졌어.
십자가형은 당시의 처형법이야.
오늘날 서구 세계에는 사람을 죽이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지.
교수형, 단두대, 전기의자, 총, 폭탄 등. 만일 누군가가 사람을 죽이면 사람들은 그를 살인자라 부르지.
그리고는 사람들은 그 살인자를 죽여. 그렇다면 그 사람들도 역시 살인자 아니겠니?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는 방식대로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을 죽이곤 해.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신에게 봉사한다고 생각하지.
이런 믿음의 결과, 오늘날 전 세계에는 대량 학살이 일어나고 있어.
사람들의 용인 없이 살인을 하면 교수형에 처해지지만, 사람들의 용인 하에 죽이면 훈장을 받게 되지.
하지만 그것은 똑같은 살인일 뿐이야. 너는 이점을 부인할 수 없을 거야.
너도 알다시피 신의 대리자라는 성직자들은 사람을 죽이러 출정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살인을 위해 만들어진 무기들을 찬양하고 있지.
그들은 지극히 저급한 야만성을 자신들이 믿는 신의 속성에 부여해 왔어.
성경을 읽어 보면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너도 알 수 있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성스러운 경전, 즉 성경이라고 부르지.
어떤 사람들은 이제 시대는 변했고 인간은 진보했다고 말할 거야.
하지만 과연 그럴까? 오히려 인간은 예전보다 더 교활해졌지.
인간은 백 년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어.
그것도 한 순간에. 결과는 훨씬 더 파괴적이지.
오늘날 우리는 활과 화살 대신 총과 폭탄을 가지게 되었어.
우리는 한 번에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폭탄을 가지고 있어.
소이탄이라는 것도 있지.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는 폭탄이야.
그건 화살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극심한 고통 속에 사람을 죽이지.
자, 이런데도 인류가 진보했다고 말들 하는 거야.
맞아.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무기 기술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그것도 살인이기는 마찬가지 아냐? 어떻게 사람을 죽이든 살인은 살인이지. 결과는 똑 같아.
무기는 더욱 치명적이 되었어. 그러면서도 인류가 더 인도적이 되었다고 말들 하지. 그게 더 인도적이 된 건가?
이 모든 대량 살상의 원인은 국가, 인종, 종교, 이상, 신조의 분리야.
가장 위험한 인물은 이념주의자야.
왜냐하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자비해지기 때문이지. 그는 모든 반대 세력을 죽이려 들지.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신들의 이념 때문에 서로를 죽이고 있지.
자기들의 사상을 지키려고 살인을 하고 있어.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대량 학살을 봐.
교회에 가고 사랑의 신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것이 자행되고 있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진리인가!
영성은 모든 것을 감싸 안는 거야.
만일 네가 어떤 사람은 사랑하고 또 어떤 사람은 미워한다면, 너는 결코 자비스러운 인간이 될 수 없을 거야.
이런 모순 속에 산다면 영적인 인간도 될 수 없지.
예수는 이렇게 말했어. ‘너의 신과 이웃을 사랑하라.’
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길은 이웃을 사랑하는 거야.
사람들은 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그건 간단해.
이웃이 자기와 다른 이념, 다른 코드, 다른 종교, 다른 국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따라서 우리는 사상, 믿음, 국적, 종교 등의 본질을 이해해야만 해.
이 모든 것들은 성숙하지 못한 마음의 산물이야.
분별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지.
열왕기 상권 7장 21절에는 솔로몬이 성전의 입구에 세운 두 기둥에 대해 말하고 있어.
우편 기둥의 이름은 야긴, 좌편 기둥의 이름은 보아스지.
여기서 언급된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 신이 직접 지은 살아있는 신의 성전이야.
생명이 몸을 창조했어. 생명은 신이야.
왜냐하면 생명 자체인 존재와 떨어져 살 수 있는 생명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지.
어떤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어.
‘그것은 영원한 말씀이다. 나는 유일자이다. 나 이외에 다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 예수는 이렇게 말했지.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생명을 갖고 있듯, 아들 안에도 생명을 주셨느니라.'
자, 그러면 야긴과 보아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야긴은 하나라는 의미야.
이것은 만물의 기초인 단일의 원리를 상징하지.
우주를 관통하고 있는 수학적 요소들은 그 유일자로부터 나왔고, 다시 유일자 속으로 녹아들어가지.
이 수학적 요소는 살아 있는 생명이 아니라, 유일한 생명이 창조한 피조물에 대한 인식이야.
수학적 요소에 대한 균형으로 생명의 요소가 있어.
그것이 바로 보아스라 불리는 기둥이지.
보아스는 목소리라는 뜻이야.
목소리는 창조주의 살아있는 표현이야.
영만이 목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신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신이시니라.'
그 의미는 분명해.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이 두 기둥을 통과해야만 해.
그것은 살아 계신 신의 성전 속에 있는 상징적 우주이지.
예수는 이 성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어.
‘이 성전을 허물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리라.’
진리에 무지한 자들은 예수가 유대의 회당을 두고 한 말이라 생각했지.
하지만 예수는 살아계신 신의 성전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야.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의 성전을 돌무더기로 보지.
그리고 그걸 인간의 손으로 지어지지 않은 영적 성전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
신에 대한 관념이 신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되어버린 거지.
교리와 신조는 편협한 길이야. 그것은 손으로 지어진 신전으로 우리를 이끌지.
그러나 예수는 내면의 성전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고 있어.
내면의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이 아니야.
우리가 거짓과 참을 식별하기 시작할 때
단계적으로 내면의 신전 안에서 생명의 모든 신비가 우리 앞에 펼쳐지게 돼.
그 의미는 분명해.
그 길은 교회, 영적 지도자, 성직자를 통해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하나의 생명을 통해 가는 것이야.
‘다른 길로 오르는 자는 도둑이고 강도이다.’
이 내적 신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보다 많은 만족, 호기심, 물질적 그리고 영적 이익의 추구를 통해서는 열리지 않아.
그것은 사랑과 자비 속에서 우리의 생명을 증가시킴으로써 열리지.
그리고 그것은 마음이 스스로 만들어낸 어리석음을 볼 수 있을 때만 가능해.
관념을 넘어 서 있는 그리스도는 목자이고, 아버지의 생명은 아들 안에 있는 생명과 같아.
아버지 유일자만이 홀로 살아계시지.
문을 지키고 있는 자는 아버지 유일자야. 그는 모든 존재들을 알고 있어.
‘이 보잘 것 없는 자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잃어버릴 수 없노라.'
그들은 신의 목소리를 알고 있고 낯선 이를 따라가지 않을 거야.
진리를 알고 있는 그들은 분리를 주장하는 자들로부터 돌아설 거야.
낯선 자를 따르는 자들은 염소들이지.
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자는 누구나 이방인이야.
그러나 신의 그리스도는 모든 혼 안에 있는 생명이지.
이 사실을 안다면, 들어가고 나오고 할 수 있어.
다시 말하면 이런 의미야.
진리가 드러나면
인간의 구원인 생명나무에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
너는 상대세계 속으로 들어가
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준비해 놓은 그 안의 모든 좋은 것들을 맛볼 수 있어.
예수는 다시 이렇게 분명하게 말했지.
‘그래, 너희 위선자들아, 이사야가 했던 이 말은 진실로 너희들을 두고 한 말이로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예수가 인용한 구절은 이사야 29장 13절이었어.
예수는 또 이렇게 말했지.
‘내게는 이 무리에 속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어, 그들도 데려와야 하노라. 그들은 나의 목소리(즉, 내면에 있는 그리스도의 소리)를 들을 것이니, 하나의 무리, 하나의 목자가 될 것이라.’
이 말은,
세상의 모든 국가, 모든 사람들이 마침내 바깥에서 안으로 눈을 돌려,
각자 모든 이들 안에 있는 신의 영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임을 뜻하는 것이야.
그리하여 어떤 분리도 없이 하나의 생명, 하나의 신, 하나의 목자, 하나의 양떼가 되는 것이지.
우주적 생명과 개별적 생명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야.
분리는 없어. 분리는 오직 사람의 마음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어.
이 생명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지.
예수는 이렇게 말했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일을 하는 것은 내 안에 계시는 아버지의 영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요가야.
요가는 묶는다는 의미지.
그리스도 요가는 인간 안에 있는 그리스도, 신의 영 속에서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다는 뜻이야.
그러므로 그리스도 요가는 모든 개인 안에 있는 그리스도, 신의 대령大靈과의 합일이지."
자아의 본질과 작용 방식을 이해함으로써만 인간의 모든 어리석은 행동은 사라질 수 있어.
마음의 고요 속에서 내면의 신전은 드러나게 돼.
창조적 이해, 자비, 사랑은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은 그 고요 속에서 드러나.
이것들 없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선의는 존재할 수 없어.
오직 바른 수단을 통해서만 바른 행동이 나올 수 있어.
그릇된 방법은 오로지 공허함과 죽음만을 가져올 뿐이야.
평화와 사랑은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나오는 거야.
그것들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야.
그것들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이해할 때 즉각적으로 현전하게 되지.”
그가 말을 마쳤다. 그의 가르침은 새로웠다. 그것은 예수의 말들이 인간의 구원을 위한 길을 보여주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윽고 고요한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침묵을 깬 것은 나였다. 내가 말했다.
“우리는 공공연히 대량 학살을 자행하고 그것이 더 많은 살인을 낳게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불행, 타락, 부채, 파괴를 만들고 있습니다. 조직적인 대량 학살에 참여했을 때 우리의 삶 속에는 다른 많은 불행들이 끝없이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릇된 가치들을 좋아하고, 영원한 가치들을 경시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흔히 말하는 신의 심판입니다. 그러나 신의 뜻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입니다. 소유와 권력을 위한 정복욕, 이데올로기를 관철시키려는 욕망은 끝없이 계속 확장돼 가고 있는 듯 보입니다. 정말로 장님이 장님을 파멸로 끌고 가고 있는 형국이에요.”
그러고 나서 나는 성구를 인용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우리는 우리가 이해한 바에 대해 말하고 우리가 실제로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자 그가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나는 이런 식의 기도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오 신성한 영이시여, 당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가리고 있던 모든 것들이 우리 앞에 드러났습니다.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우리는 거짓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이제 모든 두려움, 증오, 다툼은 자아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오 사랑하는 이여, 이제 우리는 사람이 사람에게 대하는 잔인성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로지 당신 안에 머물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뜻대로 행할 것입니다.
당신의 존재만이 우리의 행복이며, 당신의 존재 안에서 모든 내적인 빈곤은 녹아 사라져 버렸습니다.
오 신성한 가슴이여, 당신의 심장 안에서 우리는 사랑합니다. 오 신성한 사랑이여, 당신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입니다."
그의 몸과 얼굴은 뭐라 형언할 길 없는 신의 사랑과 영광의 빛으로 밝아졌다. 그의 말들은 사랑이라는 옷에 달린 너무도 아름다운 진주들이었다. 그는 진실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친구처럼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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