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시간을 가질 무렵 노르부가 도착했다. 그녀는, 계곡에서 자라는 야생 양귀비를 머리에 꽂고 있었다. 그녀는 참으로 진귀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녀는 전혀 수줍은 기색이 없었다. 나는 그녀가 내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얘기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녀는 자유로웠다. 일찍이 그 어떤 이성에게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자유로움이었다. 나는 어떻게 그녀가 그토록 자연스러울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나의 스승으로부터 이미 오래 전부터 가르침을 받아온 터였던 것이다.
그녀의 커다란 푸른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도 두려움 없이 내 눈을 응시했다. 그녀의 마음에는 모든 환영들이 사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둘 사이에는 어떤 불편한 느낌이 없었다. 그녀는 매혹적인 억양으로 영어를 훌륭하게 구사했다.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할 때면 예쁜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치열이 드러나며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의 미모와 자유로운 정신에 의해 더욱 빛나는 그녀의 인품에 나는 놀랐다.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너는 무척 사랑스러운 소녀야, 노르부.” 내 말에 그녀는 전혀 동요가 없었다.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제가 여기 와서 당신을 돕고 싶은데, 허락해 주실래요?”
“이곳에 네가 와주면 나야 정말 좋지, 노르부.” 내가 말했다. “하지만 내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너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도 그럴 시간이 많지 않을 거야. 그게 유감이야."
“저는 열두 살 때부터 스승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왔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감사의 표정으로 나의 스승을 쳐다보았다.
“그래.” 내가 말했다. “나 역시 스승님으로부터 말로 다 할 수 없이 큰 도움을 받았어. 한 가지 말해 줄까? 나는 자아, 이놈의 천치 같은 자아에 대해 인식하는 법을 배웠어. 자아의 거품은 뻥하고 터져버렸어.” 자아가 어떻게 소멸되는지 잘 알기에 우리는 깔깔 웃어 재꼈다.
우리 사이에는 어떤 긴장감도 없었다. 나는 진정한 인간관계에 대해 알게 되었다. 사랑이 없다면 관계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르부는 집안일을 척척 잘 했다. 이제까지 내가 본 여자들 중에서 제일로 잘하였다. 그녀는 날마다 계곡에서 꺾어온 야생화들로 테이블을 장식했다. 그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그때그때 잘 챙겨주었다. 그리고 제한된 음식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요리해 내놓았다. 그녀는 한 시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녀는 내 옷, 양말, 셔츠 등을 빨아주었다. 그녀는 우리의 편의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해주었다.
어느 날 내가 말했다. “노르부, 네가 날 완전히 버려놓고 있어. 너의 극진한 보살핌 때문에 이제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만족할 수 없게 될 거야.”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기쁨으로 활짝 피어올랐다. 그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예뻐 보였다. 사실 내가 거기에 머물고 있는 동안 그녀는 날마다 더 예뻐졌다.
공부가 없는 밤이면 그녀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부드러운 소프라노로 사랑스럽게 인도와 티베트의 서정시들을 노래했다.
할리우드에서 영화 제작을 하는 내 친구에게 그녀의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다. 내가 그녀에 대해 말하자 그는 그녀를 할리우드로 데려와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다. 나는 그에게 히말라야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는데 그는 그것을 영화화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데려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어느 날 저녁 우리는 바깥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노르부에게 말했다. “바깥세상은 불순하고 위선적인 사람들로 꽉 찼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에서는 친절한 척하지만 등 뒤에서는 험담을 하지. 사실상 거의 대부분 위선적이야. 심지어 꽤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런저런 틀에 갇혀 있지.
“노르부, 누군가 이상적으로 보일 때 사람들은 멀리서는 좋아해. 하지만 그 이상형의 존재가 사람들 사이에 오게 되면 시기하고 질투하지. 이상적인 모습은 갑자기 죽어버려. 그리고 사람들은 또 다른 이상을 찾아 나서지. 자신들이 도망쳐 들어갈 그런 이상을 말이야. 사람들의 마음은 헛된 꿈으로 가득 차 있어. 하지만 가슴은 텅 비어 있지. 중요한 것은 가슴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상에 매달린 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보길 두려워하지. 그들의 이상은 훌륭한 도피처야. 하지만 결코 자유를 가져다주지는 못해. 사람들이 비평이나 비난,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볼 때 그들의 거짓된 상태는 사라지게 돼. 그리고 실재가 현현하게 되지. 실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야. 자신의 생각-느낌-반응을 식별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보기보다는 이상 뒤에 숨기를 더 좋아하지.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할 때에만 자유, 미, 사랑이 현전하게 돼. 이것들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야. 그것들은 영원하고 항상 현존해. 그것들은 거짓이 사라졌을 때만 현전하지.”
그때 나는, 진리에 관한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자와 여자는 모든 면에서 평등하고, 진리를 가리고 있는 자아에 대한 자각의 정도에 따라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노르부는 우리를 결코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보석 같았다. 나는 그녀의 행동들로부터 지혜를 얻었다. 그녀의 행동들은 무의식적 사고의 결과였다. 그녀에게 그것은 자연스러웠다. 그것은 그녀를 자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었다.
노르부는 결코 우리의 관심을 끌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자유로이 봉사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신을 위해 어떤 것도 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유로웠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가졌다. 그녀는 대립 속에서 살지 않았다. 인생의 동반자로서 그녀보다 더 완벽한 사람을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와 함께하는 그녀의 삶은 환희와 행복이었다. 그녀는 간혹 우리의 토론에 끼어들었다. 그럴 때면 그녀의 지혜와 이해력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느 날 스승과 나, 단 둘이만 있을 때 스승이 내게 말했다. “네가 이곳을 떠나면 노르부는 생각보다 훨씬 더 너를 그리워하게 될 거야. 너는 너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으로 후비고 들어오지. 그렇기 때문에 나도 너를 더 그리워하게 될 거야. 네가 이 땅에 온 이래로 너는 너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들어와 있어.”
“여기,” 그가 말했다. “오크 사원 원장의 서찰이 하나 있어. 다른 하나는 게쉬 린포체의 서찰이고, 다른 하나는 퉁라한테서 온 거야. 그들 모두 너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말하고 있어.”
“예.” 내가 말했다. “나도 당신들 모두를 사랑합니다. 당신들과 헤어지면 나도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커다란 슬픔을 느끼게 될 거에요. 사실 나는 종종 혼자 중얼거리곤 해요. 진정한 친구들이 있는 이곳을 내가 왜 떠나야 하는 걸까? 하지만 당신이 뭐라 답할지 알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 내 아들아. 나도 네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알고 있어. 우리도 너를 사랑해. 그만큼 여기서 너와 함께 살고 싶은 마음도 간절해. 하지만 너에게는 세상에서 해야만 할 많은 일이 있어.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와 같이 살 수 없는 거야."
그 순간 내게 쏟아지는 신뢰를 받을 만큼 내가 그렇게 가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그저 지평선 위의 작은 먼지 같다는 느낌이 들 뿐이었다. 이윽고 스승이 다시 말했다. 그가 내 생각을 읽었음에 틀림없었다.
“기억해라.” 그가 말했다.
“자아는 아무 것도 아니야. 실제로 일을 하는 것은 바로 영이야. 자아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오히려 그것은 종종 장해물이 되곤 하지. 이 점을 깨달으면 자아는 더 이상 방해가 되지 않아.”
즉시 안도감이 느껴졌다. 더 이상 내게 책임이 없다.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보다 큰 힘이다. 내가 자아를 버리면 버릴수록 그 힘은 더욱 커진다. 두려움이 사라졌다. 자기비하감도 사라졌다. 나는 다시, 오래 전 그가 자아의 껍질을 벗겨 주었던 그 때로 돌아왔다. 두려움은 오로지 자아가 있을 때만 존재한다. 나는 이제 그것을 안다. 그가 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도 그러한 나의 인식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날 밤 노르부가 우리 곁에 와 앉았다. 우리는 거의 자정까지 그녀의 라사 여행담을 들었다. 마지막에 그녀가 말했다. “돌아오게 되서 기뻐요. 온갖 허식적인 종교 행사들을 보고 있자니 모든 자신감이 상실되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래, 노르부.” 스승이 말했다.
“자신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
하나는 우리가 어떤 기술을 숙달했을 때 기술자로서 느끼는 자신감이란다.
너도 알다시피 이런 종류의 자신감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해.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자신감이 있지.
의식적 마음과 무의식적 마음, 두 영역 안에서 자기 자신을 알 때 생기는 자신감이 그거야.
정신의 표면적 활동과 잠재적 활동 전체를 이해할 때 자신감이 생기지.
이 자신감은 주제넘거나 약삭빠른 생각도 아니고, 성취의 기억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야.
그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때 나오는 자신감이야.
개인적 구제, 허세, 성취 등의 믿음에 바탕을 둔 자신감 속에는 두려움이 내재돼 있지.
그러나 종교의식, 인간관계, 사물, 관념과의 관계 등의 본질을 이해할 때 너는 모든 권위로부터 해방되게 돼.
그러면 스승도 제자도 없어. 법상 위에 앉은 구루도, 그 아래 앉은 첼라도 존재하지 않아.
이 사실을 이해하면, 너는 모든 시간 감각과 권위로부터 자유롭게 될 거야.
그런 자신감 속에는 사랑과 애정이 내포돼 있지.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높음도 낮음도 존재하지 않아.
사랑은 그 자체로 영원하기 때문이지.
이 존재의 상태 속에는 내적인 고요가 있어.
이 고요 속에는 사랑, 친절, 관대, 자비가 있지.
존재의 이런 상태가 바로 미의 정수야.
이것 없이, 법복이나 법구로 치장만 한다면 높고 낮음의 환영만을 강조하는 셈이 되고,
결과적으로 갈등과 분리만을 부추길 뿐이지.
그리스도 또는 붓다의 자신감은 마음의 활달한 유연성에서 우러나오는 거야.
그것은 선택받은 소수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오로지 하나의 생명만이 있어.
그 생명은, 그 발현을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자각하고 있는 사람에게 온전히 활동하게 돼.”
그때 그녀는 자신만의 존재의 향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나는 노르부가 그녀만의 독특한 자유로움을 어떻게 지니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말했다. “노르부, 이렇게 지혜의 샘과 같은 현자를 가까이 두고 있으니 너는 선택받은 사람이야.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도 우리와 같이 살면 되잖아요."
스승이 그녀를 쳐다보더니 입을 열어 딱 한 마디만 말했다. “노르부.”
정적이 흘렀다. 우리는 모두 상념에 젖었다. 조화로운 영적 사랑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이윽고 내가 입을 열어 정적을 깨뜨렸다. “분리라는 것은 없어, 노르부. 영 안에서 우리는 항상 함께 있어. 영원한 사랑의 끈에 꿰인 진주처럼 말이야.”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저도 알아요. 제게 잠시 소유욕이 생겼어요. 하지만 지금은 사라졌어요. 왜냐하면 분리란 마음 안에서만 존재할 뿐, 가슴 안에서는 결코 없기 때문이에요.”
그러자 스승이 말했다. “이제 저녁을 차리는 것이 좋겠구나, 노르부. 식사 후에 우리는 휴식 시간을 가질 거야. 이제 거의 자정이 다 돼가는군. 너도 피곤해 보이는구나.”
이윽고 노르부가 구운 닭고기와 버터로 찐 감자를 내왔다. 우리는 모두 자정의 식사를 즐겼다.
다음날 아침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간밤의 단잠 덕분인지 모두들 행복감이 넘쳤다. 노르부가 티베트의 노래를 행복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녀에게 무슨 노래인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다. “제가 직접 만든 노래에요.”
“노래 가사를 영어로 말해줄래, 노르부?” 내가 물었다. 그녀는 웃음을 짓더니 계속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식사 후 스승이 내게 말했다. “오늘은 협곡 위로 올라갈 거야. 상세한 토론을 하고 싶은데, 너의 공부에 도움이 될 거야."
우리는 협곡으로 올라가 풀이 자란 바위 위에 앉았다. 발밑에는 야생 양귀비, 대황 등의 야생화들이 피어 있었고 주위에는 진달래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위대한 현자의 가르침을 듣기에는 정말이지 안성맞춤인 장소가 아닐 수 없었다.
이윽고 그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예수가 이런 말을 했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있는 지극히 비천한 형제들 중 한 사람에게 한 행위는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나는 네가 일상 속에서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참구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사람들은 이 위대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어.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분리, 이념, 신조 등에 묶여 있기 때문이지.
그것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칸칸이 격리시키지.
흔히 신, 인간, 우주가 하나라고 말들 하지.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관념에 불과해.
관념은 진리를 드러낼 수 없어.
사실상 그것은 네가 습득한 심적 이미지에 불과해.
그것은 도피처로 이용되곤 하지.
그것은 너의 눈을 가려서 실재를 보지 못하게 만들어.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식별한다면 너는 초월하여 진리를 체험하게 돼.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너의 상념은 네 자신의 특정한 조건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만일 그런 조건이 없다면 상념도 없어질 거야.
네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상념도 달라지지.
만일 네가 사회주의자라면 너는 그런 방식으로 사고하게 될 거야.
만일 개신교나 힌두교, 가톨릭교 신자라면 그 믿음에 따라 사고하게 될 거야.
너의 모든 축적된 지식과 배움은 기억이 돼.
그리고 그것은 너를 조건화 시키지.
이 조건을 통해 너의 상념이 형성되지.
이 조건화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네가 무엇을 생각하든, 행하든 그것에 따르게 될 뿐이야.
확실히 이해가 되지. 그렇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기만 하면 너는 그들이 어떻게 조건화 되었는지 알아챌 수 있어.
너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야.
자신 안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이 조건화가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지 분명히 이해해야만 해.
그것을 왜곡 없이 초연하게 볼 수 있을 때 너는 자유를 얻을 수 있어.
그리고 그 자유 속에서 실재가 현현하게 되지.
실재는 어떤 종류의 조건이 아니야.
대부분 사람들은 책을 통해서 지혜를 추구하지.
사람들은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을 따름으로써 삶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
전문가들은 자기가 안다고 말하지. 하지만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는 자가 아니야.
어떤 사람들은 철학 학회나 종교 조직에 가입을 하지.
그런 식으로 그들은 끊임없이 모색을 해.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이해도 지혜도 얻을 수 없어.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한 모방이기 때문이야. 모방은 이해가 아니야.
단순히 어떤 관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해가 아니야.
자신의 조건을 강화시키는 것을 단순히 받아들이거나 반대되는 것들에 폐쇄적이 된다면
이해라는 것은 불가능하게 돼.
어떤 사람들은 이해하려고 노력한다고 하면서도 단순히 자신의 관념만을 바꾸기도 하지.
생각이 일어나는 자리를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때 변화는 일어나게 돼.
그렇게 되면 자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지.
자아는 너의 조건들이야. 자아는 너의 조건의 투사야. 그렇지 않니?”
“예.” 내가 말했다. “이제, 보다 분명하게 이해가 됩니다."
“생명은 조건화로부터 자유로워. 생명은 창조적이지.
따라서 창조적이기 위해서는 너는 반드시 생명의 표현을 방해하고 있는 자아를 이해해야만 해.
올바른 생각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알았을 때 가능한 거야.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신의 생각-느낌-반응에 자각적이어야만 해.
이것들은 우리의 축적된 과거에 대한 반응에 불과해.
이 축적의 메커니즘을 이해할 때 너는 자유를 얻을 수 있어.”
“이제 점점 더 명확하게 이해가 됩니다.” 내가 감히 말씀드렸다.
“우리는 자신의 관념, 믿음, 욕망, 두려움, 반감 등에 대해 자각해야만 해.
그리고 우리의 생각-느낌-반응이 현재에 영향을 미칠 때 그것을 식별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조건들을 표현하게 돼.
확실히 알겠지, 응?” 그가 내게 묻고는 계속 말했다.
"너의 생각이 특정한 패턴에 빠지게 되면 너의 생각-느낌-반응은 그 패턴에 갇히게 돼. 알겠지?
생각이 너의 배경에 따라 조형되는 거지.
네가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침묵이 일어나게 돼.
이 침묵은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야.
마음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게 될 때 투사 행위를 그치게 되는 것이지.
그렇게 되면 자아는 자신이 조건화의 원인이라는 걸 알게 되지.
이 이해 속에서 자유가 생기고 자유 속에 실재가 현전하게 되지.
마음이 더 이상 짐을 지지 않게 될 때 너는 이 자유를 체험하게 되는 거야.
예수나 여타의 마스터들이 지닌 기적적인 힘의 신비는,
예수가 아버지라 불렀던 생명을 자각했을 때 비로소 이해가 가능해.
그것은 결코 마음 또는 관념의 산물이 아니야.
그것은 생명 그 자체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의식이지.
인간 안의 불완전을 본 예수는 그 원인이 바로 인간 그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어.
그러므로 우리의 배경의 본질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은 단지 그 배경의 투사에 불과하게 돼.
이러한 자기 인식이 없다면 깨달음은 불가능해.
마음이 신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다면 실재에 대한 자각은 불가능해.
거기에는 단지 실재에 대한 관념만이 있게 되지. 하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니야.
왜냐하면 하나의 관념이 닳아서 없어지게 되면 또 다른 관념이 만들어지기 때문이지.
실재는 관념과 마음을 초월해 있어. 실재는 외부가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현현하는 거야.
마음의 모든 환영들은 그것들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 이해함으로써 녹게 되고,
그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실재를 깨달을 수 있어.”
“알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리스도 요가는 자아로부터의 해방이군요.
자아가 죽게 되면 신이 일을 수행합니다.
그는 만물의 창조자입니다.
그는 인간의 마음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지성은 우리의 마음이 제멋대로 판단하기를 그칠 때 비로소 작동하게 됩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래, 아들아. 그러나 그것도 여전히 하나의 관념에 불과해.
네가 말한 것은 사실일 수는 있어도 진리는 아니야.
진리는 오로지 마음이 고요해졌을 때만 체험이 가능해.
나는 네가 진리를 체험하기를 바래.
중요한 것은 체험이기 때문이지.
지적인 앎은 여전히 마음에 속해 있어. 그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야.
영적인 것은 참된 명상을 통해서만 올 수 있어.”
우리는 잠시 동안 앉아서 명상했다. 우리는 어떤 관념이나 이미지에 대해 명상하지 않았다. 우리는 참이 아닌 모든 것들을 보았다. 우리는 모든 거짓된 것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의 움직임들을 인식했다. 집착하고 있는 희망과 관념들을 관했다. 그것들이 단지 자아의 투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 모든 것들이 이제 녹아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존재 그 자체가 더욱 더 명징하게 자각되었다.
모든 힘, 모든 지성, 모든 사랑이, 자아가 죽는 순간 작동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유일한 장애물은 자아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오래 동안 내가 이 축복의 상태에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거기 억지로 만들어 내지 않은 고요가 있다는 것,
그 고요 속에 영원한 창조성이 존재한다는 것뿐이었다.
말로는 이 상태를 결코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위대한 '스스로 있는 자' 속에 용해되었다.
아버지가 신전을 통해 움직이고 있었다.
신전이 그 창조의 목적에 맞게 사용되고 있었다.
모든 힘, 모든 지혜, 모든 사랑은 영원한 현존이다.
자아는 아무 것도 아니고,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자아는 그 자체로는 아무 힘도 없었다.
마음이 흔연했다. 모든 갈등이 그쳤기 때문이었다.
창조되지 않은 그것만이 창조적이다.
내가 지녔던 과거의 생각과 이미지들이 살아 있는 현재 속에서 녹아 사라졌다.
이 살아 있는 현재는 언제나 항상 새롭다. 이 살아 있는 순간이 실재이다.
이제 나는, 자아가 그 스스로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스승의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것에 대해 나는 수백만의 단어로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 해도 심적인 형식을 초월한 이 존재의 황홀경을 드러내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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