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베인/그리스도 요가

그리스도 요가(Christ Yoga) 11장

기른장 2020. 3. 13. 20:56

시간이 슬금슬금 흘러 바야흐로 티베트 특유의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밤 동안 눈이 내려 잠사르를 온통 눈 이불로 덮었다. 앞으로 이 눈은 최소한 6개월 동안 녹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낮 햇살은 따스했지만 밤이 되면 영하로 떨어졌다.

 

나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이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최근 몇 달 동안 나는 바깥세상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지는 나의 의식에 큰 변화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조변석개하는 관념들이 나에게서 사라져버렸다. 나는 더 이상 진리에 대한 관념으로 우왕좌왕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어리석은 갈등은 이제 사라져버렸다. 지극히 진보된 관념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관념에 불과할 뿐, 진리가 아니라는 걸 나는 안다.

 

그런 인식에 도달하자 즉시 진리에 대한 모든 관념들이 사라져버렸다. 어떤 영적이거나 물질적인 갈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마음의 유연성 속에 자유가 있다. 그리고 그 자유 속에 진리가 있고, 그 진리 속에 사랑이 있다.

 

사랑은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머리가 만들어 낸 관념에 불과하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에 대하여 생각할 때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로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그 사람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

 

소유욕이 있을 때 거기에 질투와 두려움이 있게 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이 아닌 것들을 찾아낼 때 우리는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확실히 사랑은 소유욕, 질투, 두려움 따위가 아니다. 당신이 소유하려고 할 때 거기에는 두려움과 질투가 있게 된다.

 

이것을 알면 당신은 변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 변화는 당신 자신에 대한 앎의 결과로서 온다. 당신은 사랑이 아닌 것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거짓들이 떨어져 나가고 사랑이 즉시 현현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이며, 길이 닦여질 때 즉시 현현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기혼자라면 남편, 아내,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당신은 그들을 이용한다. 당신은 그들에 대해 두려움과 질투심을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을 자각하게 되면 당신은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욕망의 충족은 사랑이 아니다.

 

거지한테 동전 한 닢을 던져 주고 가던 길 가는 것이 사랑인가? 당신은, 자기가 선행을 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녕 그것이 사랑일까? 당신은 인류를 사랑한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하지만 정녕 그런가?

 

우리는 지금 사랑의 문제에 대해 천착하고 있다. 사랑의 문제에 대해 깊이 탐구할 때 우리는 사랑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사랑과 관련해, 우리 자신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사랑이 아닌 것으로부터 해방되게 된다. 이 자유 속에 사랑이 현현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사랑을 억지로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랑을 소유할 수 없다. 사랑이 당신을 소유해야만 한다. 사랑이 당신을 소유할 때 당신은 더 이상 두려움이나 질투, 소유욕 등을 느끼지 않게 된다.

 

당신이 사랑을 주거나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가슴이 아니라 마음의 표현에 불과하다. 당신과 거지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거지는 넝마를 걸치고 있고 당신은 좋은 옷을 입고 있다. 거지는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지만 당신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차이에 불과하다. 보다 깊이 들여다본다면, 거지도 당신과 꼭 마찬가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지도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의 생명은 당신의 생명과 동일하다. 그는 당신이 살아가듯이 살아간다. 당신도 역시 거지이다. 보다 높은 차원에 살 뿐 거지이기는 마찬가지다.

 

당신의 외적 조건들을 걷어내고, 거지의 외적 조건들을 걷어내면 당신이나 거지나 마찬가지 아닌가? 당신 안의 생명과 거지 안의 생명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만든 사회 때문이다. 우리는 조건화를 통해 사회를 만들고, 그것은 우리의 조건들을 지속시킨다.

 

자선행위를 할 때 당신은 고상함을 느낀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랑이라 부를 수 없다. 당신이 중심에 있지 않은가? 당신은 타인에 대해 동정심을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사랑일까? 그런 상태의 원인자는 누구인가? 바로 당신이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동기와 행동을 깊이 파고들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당신은 큰 혼란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걸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상태들을 어떻게 녹일 수 있는가? 우리가 자신의 조건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의 조건화를 통해 그 상태가 영속화되지 않겠는가?

 

당신은 이 조건들에 대해 사회에 책임을 전가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도피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될까봐 내면에 대한 관조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의 참 모습을 상기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당신은 사회의 희생자들을 동정한다. 하지만 그들을 희생시킨 것은 바로 당신 아닌가? 당신은 사회를 이렇게 만든 당사자이다. 스스로를 깊이 성찰해 본다면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용서하는 것이 사랑인가? 당신은 용서하기 때문에 자비로운 인간이라고 생각할 지 모른다. 이 용서의 문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어째서 당신은 용서를 하는가? 내가 당신에게 모욕을 준다. 당신은 기분이 상한다. 당신은 분개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한다. 그러고 나서 당신은 용서한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중심에 위치해 있다. 용서행위는 당신의 도덕성을 높여준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사랑일까? 당신은 여전히 중요한 사람이다. 그렇지 않은가? 사랑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자신을 강화하는 행위가 아니다. 사랑은 자아가 사라졌을 때 현현한다.

 

동정, 용서, 소유욕, 질투, 두려움은 사랑이 아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무관심하다. 마음이 사랑을 가지고 장난치는 한, 거기에 사랑은 없다. 마음은 사랑을 타락시킬 뿐이다. 마음은 사랑을 낳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음은 사랑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랑에 대해 글을 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당신은 사랑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사랑일까? 당신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는다. 하지만 보라, 그들 안에 사랑이 있는지. 사랑이 당신 안에 있을 때, 당신은 결코 사랑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사랑은 사거나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시간을 초월해 있다. 시간에 속한 것들만이 사거나 팔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통과 불행이 증식되는 이유다. 마음은 문제를 만들어 놓고는,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거기에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그칠 때에만 사랑이 현현하고, 그 사랑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마음이 활동할 때 가슴에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 마음이 활동하면 가슴 속에는 마음에 속한 것, 시간에 속한 것들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나 사랑은 시간에 속한 것이 아니다. 시간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질 때 사랑은 현현하게 된다. 그러므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의 작용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본질을 이해하고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바로 문제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과 직면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교회를 짓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글을 쓰고, 설교를 하고, 새로운 슬로건을 내세우고, 새로운 정당을 만들고, 회의를 한다. 우리는 이런 저런 조직을 만들고는 세계 평화나 무엇 무엇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었던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문제를 더 복잡하게만 만들었을 뿐이다.

 

우리는 이 모든 문제가 마음의 산물이라는 걸 인식해야만 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새로운 방법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그쳐야만 한다.
그것은 새로운 것 같지만 동일한 낡은 바탕 속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
마음의 활동이 그쳤을 때 비로소 사랑이 현현하게 된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결코 사랑이 현현하지 않는다. 모든 문제는 사랑과 더불어 해결된다.

 

우리는 형제애의 실천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조직들을 창설한다. 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마음의 영역 안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이 이 모든 것을 이해할 때, 그리고 이 모든 소란이 그칠 때 사랑이 현현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은 지금 존재하고 있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한,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신이 어느 한 사람을 진실로 사랑할 때에만 당신은 전체를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된다. 한 사람도 사랑할 줄 모르면서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누군가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을 때 당신은 전체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당신의 가슴은 충만해지고 마음은 구성 작용을 그치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모든 문제는 녹아사라지게 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
왜냐하면 여기에 우리의 참된 행복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주제는 내가 나의 스승과 게쉬 린포체로부터 받은 가르침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었다. 그들의 가르침이 나에게 길을 열어주었듯이 나의 이 말들이 당신의 길을 열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내가 스승에게 말했다. “떠나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는데 당신은 아무 말씀도 없군요. 내가 떠나는 걸 당신도 원치 않는다는 걸 잘 압니다. 하지만 저는 가야만 합니다. 제 느낌에 그 날이 머지않은 거 같아요.”

 

“그래.” 그가 말했다.
“네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그 생각을 너의 마음속에 집어넣은 것은 바로 나야. 그 말이 나의 입이 아니라 너의 입을 통해 먼저 나오길 바랐다. 너도 알겠지만 네가 떠나면 몹시 그리워질 거야. 사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지. 하지만 네가 세상 속에서 사역을 할 때 나도 너를 따라다닐 거야. 왜냐하면 그것 역시 나의 일이기 때문이지. 너를 돕는 조력자들이 있어. 그들 중에는 이미 육신을 벗은 자들도 있지. 나는 그 조력자들과 함께 너의 곁에 있을 거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상적인 의식 상태 속에서 살고 있어.
사회적인 문제들, 개인적 염려들과 더불어 일상 의식 속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조건화에 따라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의식의 보다 깊은 층을 의식하고 있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영, 욕망, 증오, 시기, 두려움 등을 가지고
그들의 일상적인 활동에 매몰돼 있어.
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조건화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위, 권력, 부, 육체적 쾌락 등을 얻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지.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더욱 조건화 시키게 돼.
그리고 보다 깊은 층에서 이 조건화된 의식은 자기 자신을 표면으로 투사하게 되고
심신 속에 온갖 종류의 동요를 야기 시키게 되지.

 

의식을 상위 의식과 하위 의식으로 나누는 사람들도 있어.
그들은 상위 의식을 영적인 존재라고 말해.
하지만 그것 역시 그들의 바람의 투사가 아닐까?
너도 알다시피 그것은 단지 하나의 믿음에 불과해.
그것은 여전히 마음에 속한 것이고 정신적인 구성이야. 그렇지 않니?
영적인 존재에 대한 이 믿음은 자기들의 조건으로부터의 도피야.
하지만 그 조건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어.
왜냐하면 자신들이 어떻게 조건화되었는지 인식하게 될 때까지
그들의 조건은 계속 남을 것이기 때문이지.

 

너는 마음의 작용을 보고 그것을 철저히 이해해야만 해.
네 자신의 정신 작용의 깊은 국면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너는 자신과 타인의 관념에 갇히게 되기 때문이지.
그것이야말로 네가 피해야만 할 것이지.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해 네가 무엇을 생각하든, 또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여전히 네 자신의 사고 과정의 산물이야.
따라서 그것은 시간의 산물이지. 그리고 시간의 산물은 결코 무시간적인 것이 될 수 없어.
영적인 존재는 오로지 무시간적인 것 속에만 가능하지. 영적인 존재는 지금 있는 거야!
너는 그것을 만들 수 없어.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지.”

 

그가 내게 드러내고 있는 위대한 진리를 나는 철저히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감히 여쭈었다.
"내 자신을 탈 조건화시키기 위해서는 잠재의식의 감추어진 모든 구석구석을 이해해야만 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표면으로 끌어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 그가 대답했다.
“우리는 기억 속에 감추어진 이 모든 모호하고 당혹스런 혼란을 이해해야만 해.
그러나 이 드러냄의 과정에 시간은 결코 필요치 않아.
만일 이 드러냄이 시간에 속한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무시간적인 것이 될 수 없어.
시간에 속하지 않은 다른 방법이 있어. 그것은 즉각적인 것이야.
즉각적인 놓음 속에서만 실재가 현전하게 돼.
분석은 시간의 방법이야. 그것으로는 결코 무시간적인 존재를 드러낼 수 없어.
단지 보다 많은 조건들만을 만들 뿐이지.

 

너의 행위의 원인은 다름 아닌 기억이야. 그건 너도 알지, 그렇지?
너는 무엇인가 되기를 원해. 하지만 이것은 실재를 가리고 있는 기억을 강화시켜버려.

 

그렇다면 이 정신 과정을 철저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표면 의식 층이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표면 의식 층 속에서 살고 반응해. 더 이상의 것은 거의 모르지.
다음 층은 기억이야.
뭔가 알기를 원하거나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 반응할 때 기억이 작동하게 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게 되지.
왜냐하면 기억 없이는 어떤 반응도 행위도 불가능하기 때문이지.
너의 행동은 기억의 결과야.
기억은 단지 그 순간 안내 역할을 할 뿐이지.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너는 거의 모르기 때문이야.
너는 기억에 붙잡혀 있어.
그리고 그것은 너의 조건화야.
너는 그 조건에 따라 행동하고 반응해. 그렇지 않니?"

 

“예, 그렇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자, 이제 우리가 기억을 넘어, 더 깊은 층에 이르렀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아주 고요한 상태에 이르게 돼.
그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공의 상태야.
총체적 의식 자체만이 남아. 그 결과 의식이 이 모든 층들에 스며들게 되지.

 

뭔가 되기를 원하면 너는 어떤 행동을 하게 돼.
이 행동은 너의 기억의 결과임에 틀림 없어.
왜냐하면 너는 아직 그 밖의 어떤 것을 모르기 때문이지.
이 모든 감추어진 조건화를 이해할 때에만 너는 알 수 있어.
그 모든 것을 이해할 때 너의 마음은 고요해지게 돼.
그것은 네가 억지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거기에 더 이상 기억으로부터 표면 의식으로 흐르는 상념의 흐름은 일어나지 않아.
기억의 흐름이 계속되는 한 고요는 있을 수 없어.
너는 암시나 반복을 통해 억지로 표면의식을 고요하게 만들 수 있을지 몰라.
마음은 한 순간 복종할 거야.
하지만 조건화된 기억은 여전히 거기에 있어서, 혼란을 초래하고 갈등을 일으키지.
그리고 결과적으로 너는 그 영향에 굴복하게 돼. 내 말 이해되니?"

 

“예. 이해됩니다.” 내가 말했다. “내면에서 변성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내 마음의 심연 속을 관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 전체 과정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기꺼이 기다렸다.

 

그가 계속 말했다. 그는 나의 마음을 책처럼 읽을 수 있었다.

 

“자, 뭔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한,

너는 필연적으로 자아, 즉 '나'라는 관념을 강화시키게 돼.
결국 너의 조건, 기억을 강화시키게 되지.
그러나 뭔가 되고자하는 욕망이 사라지면 이 모든 층들이 텅 비어 공하게 돼.
그러므로 너는 '됨'의 과정을 이해해야만 해.
이미 알고 있듯이 '되기'는 실재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야.
그것은 실재를 가리고 있는 것을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야.
무엇인가 되고 있을 때 너는 너의 기억과 함께 있는 것이야.
네가 얻은 것은 재ashes이지 실재가 아니야.
너는 신이 자신의 안내자라고 말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 역시 하나의 생각에 불과해.
네가 충분히 깊이 관한다면 그것이 단지 너의 기억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이해되니?”

 

이제 인식의 빛이 지극히 명징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내게 보여주고 있는 것의 전체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의 마음은 변성의 상태에 있었다.

 

그가 말했다.
“생명은 나무의 한 가지에 불과한 게 아니야.

생명은 나무의 모든 가지들이야.
그것은 나무를 살아가게 만들어.
그러므로 생명의 아름다움과 위대성을 알기 위해서는 생명의 전 과정을 이해해야만 해.

 

너의 존재의 모든 상태를 알기 위해서는 너는 그것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아야만 해.
너는 모든 형태의 조건들을 자각해야만 해.
표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차원에 이르는 것까지 모두.
너의 가족생활, 민족 사상, 종교적 신념, 다양한 개인적 체험 등,
잠재의식의 모든 내용을 이해할 때 너는 기억과 상념의 본질을 이해하게 돼.
그때 너는 그것들이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돼.
네가 그것들을 보고 알 수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너는 실재를 알 수는 없어.
그 밖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것들이 녹아사라질 때에만 너는 실재의 작용을 체험할 수 있어.

 

분석의 과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분석의 과정에서, 너는 모든 기억, 반응, 반응의 원인을 풀고 그것들을 녹이려고 깊이 들어가지.
하지만 거기에는 무한한 시간과 인내와 주의가 필요해.
이 결실 없는 긴 분석의 과정은 결코 끝이 없는 시간의 과정이야.
하지만 시간의 과정은 결코 무시간적 존재를 드러낼 수 없어.
그러므로 네 자신을 탈조건화 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너의 조건들을 더욱 강화시키게 돼.
이해가 되니?

 

자, 너는 어떻게 하고 있지?
너는 과거의 기억, 낡은 기억, 낡은 전통, 낡은 관념과 믿음 등을 가지고
새로운 것, 현재와 만나고 있어. 그것들은 너의 조건들이야.
그러므로 너는 너의 조건들을 가지고 새로운 것, 현재와 만나고 있는 것이야."

 

“예.” 내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어제의 반응으로 오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렇지.” 그가 말했다.
“너는 낡아빠진 분석 방법으로 한 단계 한 단계 각 반응을 분석하고, 하나하나 녹이려고 애쓰고 있어.
하지만 이런 방법을 통해서는 너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더욱 더 조건화를 야기하게 돼.
왜냐하면 너는 이미 어제에 갇혀 있고 동일한 방식으로 내일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

 

자, 그러므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즉각적인 자유이어야만 해.
시간의 경과를 통한 자유는 구속만을 가져다 줄 뿐이야.
따라서 너는 시간이나 기억의 요소 없이 전체 문제에 접근해야만 해.
거듭남을 위해서는 변화는 시간적인 문제여서는 안 돼.
그것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있어.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그것이 바로 문제이지.

 

만일 네가 나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다면
너는 마음이 완전히 깨끗해지는 체험을 하게 될 거야.
너의 마음속에 지금 무엇이 일어나고 있지?
너의 기억은 어제에 속한 거야.
새로움을 만나기 위해서는 너는 어제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만나야만 해.
그때 새로움, 즉 실재가 어제로부터 해방되게 돼. 실재는 지금이야.
너는 실재를 만들 수 없어. 오로지 기억들만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지.
기억은 무한한 실재의 작용에 장애가 될 뿐이야.

 

자, 너의 마음의 상태를 잘 살펴봐.
오늘과 만나려면 너는 더 이상 어제에 매달려서는 안 돼.
이 진리를 깨달을 때, 거짓된 것을 인식할 때 그 거짓은 떨어져 나가게 돼.
진리만이 너를 완전히 탈조건화시킬 수 있어.
네가 진리를 통해 거짓을 알아볼 때 즉각적으로 탈조건화가 일어나게 돼. 그렇지 않니?”

 

“예.” 내가 말했다.
“지금 나는 자유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선택에 대한 욕망이 없습니다.
내가 매달리길 원하는 중심 이미지도 없고, 뭔가 되려는 욕망도 없습니다.
이 진리를 인식하는 순간 저는 어제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이제 내게 영원한 현재가 실재입니다.”

 

“그래.” 그가 내 말에 동의했다.
“네가 어떤 것에 대한 진리를 인식할 때, 더 이상 그것에 대한 논쟁은 사라지게 돼.
어떤 비난도 판단도 없이 기억, 신조, 국적 등에 대한 사실 그대로를 보게 될 때,
그리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게 될 때 너는 전체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돼.

 

아들아, 너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바로 진리야.
네가 거짓을 구별하고 진리를 보게 될 때 너는 즉각적인 자유를 얻게 돼.
이 자유 속에서 무한하고 강력한 실재가 작동하게 되지.
가슴과 마음이 진리를 통해 자유롭게 될 때 진리가 현전하게 돼.
진리는 그저 드러날 뿐이야. 너는 진리를 만들어내지 못해."

 

스승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자유를 느꼈다.
현재는 살아 있는 현재이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자유롭고 항상 새롭다.
어제와 더불어 새로움을 만난다면 그것은 낡은 것이 돼버린다.
내가 자아를 보고 그것의 거짓됨을 인식하게 되면 나의 조건은 녹아 사라지게 된다.
우리가 무아를 깨달을 때 실재는 즉각적으로 현현하게 된다.

 

나는 스승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시간과 과거로부터의 해방을 체험하였다.
당신 또한 과거로부터의 해방을 체험할 수 있다.
당신이 순간순간 현재와 만날 때 그 속에서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과거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을 괴롭히는 것은 바로 과거가 아닌가?
왜냐하면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미래 속으로 투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재는 과거나 미래보다 더 위대하다.
그것은 항상 살아 있는 현재이다.

 

당신이 의식하지는 못할지라도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당신은 과거 때문에 두려워한다.
당신은 과거 때문에 증오한다.
당신은 그것의 거짓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자신의 조건을 알고 그것을 이해하면
의식의 지극히 깊은 층에 숨어 있던 마음의 모든 내용들이 노출되고,
과거로부터의 즉각적인 해방이 찾아온다.
비로소 나는 나의 스승이 전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줄 것이라고 했던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그리스도 요가인 것이다.
완전한 자유. 이렇게 인간의 아들은 신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