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베인/그리스도 요가

그리스도 요가(Christ Yoga) 10장

기른장 2020. 3. 12. 13:01

협곡에서 암자로 돌아오는 나의 마음은 충만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스승이 나의 생각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너의 진보에 무척 기쁘다. 네가 여기를 떠나면 정말 섭섭할 거야.”

 

내가 대답했다. “저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당신이 제게 보여주신 친절, 배려, 사랑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이런 은혜를 받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끼고……” 내가 말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그가 다시 말했다.

 

"네가 가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세상에 위대한 것들을 주는 자들은 자신이 가치 있는지 없는지 생각하지 않아.
그들은 자신들이 통로라는 걸 인식하고 있어. 무한 지성이 현현하는 통로 말이야.
그들의 마음속에는 자기들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하는 생각 자체가 없어.
예수가 말했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나 너는 지금 마음 한 구석에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어.
이 관념은 단지 너의 배경, 너의 조건화의 결과에 불과해.
이 사실을 안다면 너는 다시는 그런 식으로 생각지 않을 거야.”

 

그것은 나에 대한 따끔한 훈계였다. 하지만 말 속에는 사랑과 자비가 넘쳐흘렀다.
나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어렸을 때 자주 들었던 말의 조건화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너는 입 다물고 거기 가만있어.' 나는 더 이상 그러한 느낌에 갇히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사실 내가 이런 충고를 들은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링쉬라 은자님도 나를 조용하고 부드럽게 타일렀었다.
그가 말했다.
“우리는 너의 가치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우리는 단지 어떻게 해야만 진리를 세상에 가장 잘 알릴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어.
너는 좋은 통로야. 이곳을 떠날 때 너는 보다 나은 통로가 되어 있을 거야."

 

암자로 돌아오자 노르부가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문 앞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눈부셨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만든 녹색과 흰색 체크무늬가 들어간 빨간 모직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야생 양귀비가 꽂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행복감으로 밝게 빛났다. 그녀가 눈웃음치자 가지런한 치아가 아름답게 드러났다.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정말 예쁘게 보여, 노르부. 나를 위해 이렇게 빼입은 거니?”

 

그때 스승이 끼어들며 말했다. “이거 둘 사이가 심상치 않은데?”

 

그는 나와 노르부 사이에 깊은 사랑이 잠재해 있어서 언제든 뜨거운 불길로 타오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맞이하게 될 이별이 힘들어지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 점을 알고 있었다. 내게는 커다란 사랑의 힘이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노르부를 감싸 안을 수도 있었다.

 

나는 스승 앞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는 널 정말로 사랑해, 노르부. 언제나 항상 사랑할 거야.”

 

미소 짓는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녀가 말했다.
“나도 당신을 정말로 많이 사랑해요. 당신이 우리를 떠나면 나는 당신이 몹시 그리워질 거예요. 그러나 슬퍼하지는 않을게요. 당신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나는 알아요. 나는 당신과 함께 한 삶에 대한 추억을 간직할 거예요.”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이 다 좋다는 걸 알았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는 스승에게 우리를 축복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주는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이, 너희도 서로를 사랑하라.”

 

우리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육체를 넘어선 참된 영적 사랑을 뜻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앉았다. 대화는 웃음과 활력에 넘쳤다. 우리는 행복했다.
우리 세 명을 묶고 있는 영원한 사랑의 연대감 속에서 근심 걱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오후에 노르부가 방안으로 들어와 우리와 함께 앉았다. 그녀도 나름대로 영적으로 성숙해 있었다. 스승과 나의 토론을 통해 그녀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스승은 결코 그가 나의 교사라든가 마스터라는 암시를 준 적이 없었다.
그것은 거짓을 드러내고 진리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그 나름의 방식이었다.

 

스승이 다음의 말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은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가 우리 둘을 바라보았다.
“이 말은 마스터 예수가 한 말이야. 이것은 내가 너희 둘에게 주는 말이기도 해.”

 

“그리스도 요가는 자유야.” 그가 말했다.
“모든 거짓, 모든 나, 자아를 이해해야만 자유는 오는 거야.
왜냐하면 그것들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지.
우리가 자아를 이해하지 못할 때, 그리고 자아가 자신의 희망과 욕망 속에 갇혀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려고 끊임없이 헐떡거리게 되지.
그리고 그 결과 자유는 불가능하게 되지.
그러나 이해를 하게 되면, 극복은 불필요해져. 이제 알겠니?”

 

“예” 우리는 입을 모아 대답했다.

 

“사실상 정복은 억압의 한 형태에 불과해.

너는, 네가 억압하고 있는 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어.
따라서 네가 억압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불가능해.
너도 최근에 그것을 체험했지, 그렇지?
더 이상 사랑을 억압할 필요는 없어. 너의 사랑은 자유야.
진정한 사랑이 있을 때 거기에 욕망은 있을 수 없어.
거기에는 자유로운 사랑의 표현만이 존재하지.”

 

노르부가 대답했다.
“이제 저도 알아요, 스승님. 제가 저의 온 가슴을 다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요. 저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제 마음이 아니라 온 가슴으로 사랑할 수 있어요. 스승님, 당신께서는 저에게 사랑하는 길을 보여주었어요.”

 

“아니다, 얘야.” 그가 대답했다.
“그것은 네 스스로의 힘으로 발견한 거란다.

나는 너에게 그 길을 보여줄 수 없어.

왜냐하면 그것은 스스로의 힘으로만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야.

그것은 나의 체험이 아니라 너의 체험이야."

 

나도 역시 그 자유를 알고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가슴의 사랑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마음의 사랑은 우리를 구속한다는 것을 알았다.

 

스승이 말했다.
"마음의 사랑이 욕망하는 것이라면 가슴의 사랑은 주는 것이야.
양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해.
전자가 자아의 사랑이라면 후자는 신의 사랑이지.
신의 사랑은 영원히 살아 있어. 그것은 영원해.

반면 자아의 사랑은 자아와 더불어 죽어. 그것은 사랑의 그림자에 불과해.
왜냐하면 자아는 실재의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이지.
그러나 네가 온 가슴과 혼으로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사랑을 결코 알 수 없어.
두려움에 대한 정복은 단지 두려움의 연기에 불과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지?"

 

내가 대답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예수는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해방되어야만 할 최후의 두려움이라고 했죠.
달리 말해서 그 말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된 사람만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 맞아.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어떻게 죽음의 공포를 정복할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야.
이것은 비단 노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돼.

 

사람이 사후에도 존속하느냐 여부에 대한 믿음에 매달리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사람들 중에는 사후에 혼이 있다고 말하는 부류도 있고
사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는 부류도 있지.
후자의 사람들은 인간은 환경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말해.
하지만 양자 모두 그렇다고 생각하고 믿을 뿐이야.

그런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어째서 사람들은 사후에도 존재가 계속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그리고 존속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사람들이 지속되길 바라는 것은 이름, 형상, 경험-지식-기억이야.
그것이 바로 '나'라고 하는 자아의 본질이지. 그것들은 사실상 동일한 거야.
그리고 사람들은 바로 그것이 지속되기를 바라지.
주의 깊게 관찰하면 너는 내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너는 너의 기억, 경험, 생각이야.

어떤 차원이든 너의 사고 과정이 위치하는 곳에 네가 있어.
너는 죽음이 왔을 때 그 과정이 끝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어.
사후에 네가 어떤 형태로 지속될 것이고, 다음 생에 다시 돌아오게 될 거라고 믿을 수도 있어.
하지만 이것은 너의 믿음의 표현에 불과해. 그것은 너의 정신 과정의 일부분이야.
나는 지금 사후세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야.
다만 그것에 대한 단순한 관념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야.

 

생명-영은 결코 계속될 수 없어.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과 시간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지.
연속성이라는 단어 속에는 시간, 즉 어제, 오늘, 내일이 함축돼 있어.
그러므로 무시간적인 존재에게는 연속성이 있을 수 없어.
오로지 시간적인 존재에게만 연속성이 있을 뿐이지.
영원하고 항상 현재에 머무는 존재에게는 시작도 끝도 없어. 따라서 연속성도 있을 수 없지.

 

너는 오직 네가 알고 있는 것만을 표현할 수 있어. 너의 생각, 기억, 지식, 체험 등.
너는 네가 모르는 것을 표현할 수 없어.
너는 오로지 너의 마음속에 있는 것만을 표현할 수 있어.
너는 너의 마음을 초월한 것을 표현할 수 없어.
너는 실재를 표현할 수 없어. 왜냐하면 너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야.
이해를 통해 마음이 고요해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실재-영원을 깨달을 수 있어.
그것의 작용은 광대하고 무한하지.

 

'나는 영적인 존재다'라고 말하는 것은 위안이 되는 생각에 불과해.
그것에 대한 사고 과정 속에서 그것은 시간에 붙잡혀 있어.
따라서 그것은 무시간적인 것일 수가 없지! 따라서 그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야.
시간은 상대적이야. 그러나 무시간적인 존재는 상대를 넘어서 있어.
그것은 시간에 종속되지 않아.
미지자는 기지旣知의 것에 종속되지 않아. 그러므로 그것은 기지의 것으로 표현될 수 없지.

 

네가 지속시키길 원하는 것은 네가 아는 거야.

다시 주의 깊게 살펴 봐.
그러면 네가 지속시키기를 원하는 것은 네가 이미 알고 있는 그 무엇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네가 이 점을 깊이 들여다본다면, 그 진실성을 알게 될 거야.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너의 생각-느낌일 뿐이야.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네가 지속되길 바라고 있는 것들이지.
왜냐하면 너는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지.

 

너는 미지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해.

네가 지속시키기를 원하는 것은 기지의 것이야.
너는 그것이 끝날까봐 두려워하고 있어.
그러나 지속되는 그것이 끝나야만 실재가 현현하게 돼.
하지만 너는 그것이 끝날까봐 두려워하고 있어.
그래서 너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야.
너는 그것을 어제에서 오늘, 그리고 내일로 옮기기를 원하고 있어.
너는 지속에 대한 욕망 때문에 살아 있는 현재를 미래에 희생시키면서
너만의 유토피아를 만들고 있어.

 

하지만 지속되는 것은 결코 스스로를 새롭게 할 수 없어.
순간에서 순간으로 항상 현재에 존재하는 것만이 순간순간 새로 태어나고 새로 거듭날 수 있어.
그 안에는 돈도, 과거도, 미래도, 선도, 악도 없어.

 

이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면 지속되는 것은 다양한 형태의 기억이라는 걸 알 수 있어.
너는 기억에 매달리고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거야.
초시간적 존재가 현현하기 위해서는 시간에 속한 기억, 자아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이제 분명히 알 수 있을 거야.

 

마음은 시간을 초월한 존재를 상상할 수도, 공식화 할 수도 없어.
마음은 오로지 과거에 속한 것, 시간의 결과인 것만을 알 수 있어.
마음은, 네가 읽은 것, 생각한 것, 믿는 것, 그리고 어제, 오늘, 내일만을 공식화 할 수 있어.
마음은 결코 순간순간을 공식화 할 수 없어.
항상 지금 속에 산다면, 거기에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없어. 오로지 지금만이 존재하지.
마음은 어제, 오늘, 내일, 그리고 신조, 이론에 매달리기 때문에 끝나는 걸 두려워하지.
마음은 하나의 생각에서 또 다른 생각으로 쉽게 변하기 때문에 확신을 못해.

 

난점은 네가 그동안 쌓아 온 모든 것, 체험한 모든 것, 너의 믿음, 관념, 희망 등을 버리기 어렵다는 것이야.
그것이 바로 죽음이지. 그렇지 않니?
그것들을 잃는 것이 죽음이야.

 

기지의 것으로는 결코 시간을 초월한 미지자를 드러낼 수 없어.
네가 알고 있는 것은 시간에 속한 것이야.
하지만 시간은 결코 무시간적인 존재를 드러낼 수 없지.
이 점이 분명히 이해가 되니?"

 

내가 대답했다.
“예, 이해됩니다. 과거의 것들에 대해 내가 매 순간 죽을 때, 그때 바로 미지자, 실재가 현현합니다.

지속적인 것은 결코 진리, 실재, 미지자, 새로움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그 자체의 투사물들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시간 속에서 살 때 어제-내일은 살아 있는 현재보다 더 중요하게 됩니다.

현재만이 창조적입니다. 우리는 현재 속에 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순간순간 죽어야 합니다. 그 죽음 속에서 생명이 현현합니다.”

 

“그래.” 스승이 말했다.
“네가 마음속을 들여다본다면,
살아있는 현재 속에 살 때 어제나 내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이것이 바로 진정한 행위-활동이야.
그것은 기억의 결과, 어제의 결과에 대한 반응이 아니야.
살아 있는 현재 속에는 죽음이 없어. 그것은 영원해.
그것이 바로 예수가 이렇게 말한 이유이지.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라.'

 

창조성은 생명의 활동이야.

사람은 신을 창조할 수 없듯이 생명도 창조하지 못해.
사람은 신에 대한 관념을 만들고는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지.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게 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진리를 가리고 있는 환영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어.
시간은 생명을 만들 수 없어. 그렇지 않니?”

 

내가 대답했다.
“많은 사람들은 시간 속에서 창조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기술을 습득할 수 있을 뿐 창조적이 되지는 못한다는 걸."

 

그가 말했다.
“하나의 기술을 습득하는 것은 단지 습관에 불과해.
습관은 창조적인 것이 아니야.
어떤 기술을 습득하는 데는 항상 노력과 투쟁이 따르지.
자아가 뭔가를 하기 위해 투쟁 속에 있는 한 그것은 창조적인 상태가 아니야.
마음이 대립 속에 갇혀 있는 한 항상 갈등이 존재하지.
그리고 그것이 바로 창조성을 배제해 버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창조성을 얻을 수 있죠?” 내가 물었다.

 

“창조성을 얻는 것은 불가능해.” 그가 대답했다.
“너는 창조성을 배제하는 것을 이해해야만 해.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자아를 이해하는 것을 의미해.
마음이 자아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울 때, 거기에 평화가 있게 되지.
그리고 그 평화 속에 바로 창조성이 현전하는 거야.
창조성은 어떤 노력이나 투쟁 없이 현현해.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현재이기 때문이지.
창조성은 순간으로부터 순간으로 존재해.
그러나 너는 창조성을 소유하고 그것을 표현하고 싶어해.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해.
왜냐하면 창조성은 마음과 시간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창조적이 되고 싶다면, 너는 반드시 시간 안에서 기능하는 것을 멈추어야만 해.
자아가 죽을 때 거기 생명이 현현해. 그리고 창조성이 현전하게 되지.
예수는 이것을 달리 이렇게 표현했지.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자는 잃을 것이고 목숨을 버리는 자는 얻게 되리라.'

 

바람이 그치면 호수가 잔잔해지는 것처럼,
마음의 문제들이 끝날 때 창조적 존재가 현현하게 되는 거야.
나, 즉 자아는 아무 것도 아니야. 내 안에서 일을 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영이야.”

 

그가 눈을 감았다. 그의 입에서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오, 영원히 살아있는 현존이여, 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항상 저와 함께 계십니다. 당신과 나는 분리돼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명철을 통해 거짓을 관觀하여 저는 살아 있는 현존이 오실 길을 깨끗이 치웠습니다.
당신 안에서 저는 시간에 대한 관념을 비웠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무시간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저의 마음에 속한 것임을 저는 압니다.

 

인성 속에는 실재가 존재할 수 없음을 저는 압니다.
왜냐하면 당신만이 실재이고 불가분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죄 속에는 실재가 존재할 수 없음을 저는 압니다.
왜냐하면 당신 안에 죄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인간의 마음속에서만 죄는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들 스스로가 만든 것일 뿐입니다.

 

당신은 진리이고 진리는 모든 곳에 편재합니다.
당신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불변의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살아있는 현존을 가리고 있는 것은 시간임을 알기에, 저는 매일 죽을 것입니다.
이제, 살아 있는 진리가 저를 자유롭게 했습니다.
자아는 착각이라는 걸 저는 압니다.
이제까지 저는 거짓된 것을 참이라고 믿어왔습니다.
이제 자아는 죽었습니다.
당신의 생명은 영원히 저의 것입니다.
오, 영원히 살아계신 지복의 존재여."

 

노르부와 내가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우리 두 사람의 눈앞에 마스터 중의 마스터, 예수가 천상의 빛에 싸여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노르부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영적인 황홀경의 상태에 잠겨 앉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른다. 왜냐하면 거기에 시간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때 나는 내 안에 죽음이 존재치 않는다는 걸 알았다. 죽음은 영원한 생명 속에 삼켜졌다. 그 평화와 고요 속에 실재가 현현했다. 죽음의 공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