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베인/그리스도 요가

그리스도 요가(Christ Yoga) 08장

기른장 2020. 3. 8. 19:27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자 나는 스승에게 말했다.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말을 베일로 가려왔더군요. 높은 영적인 이해에 도달한 사람들만이 그 감추어진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래.” 그가 동의하였다.
“지금까지는 항상 그런 방식이었지.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은유적인 방식이 아니라 직설적으로 분명하게 말해야만 해.

거짓들을 분명하게 밝혀야만 될 때가 도래했어.

이해를 통해 거짓이 녹아 사라지게 함으로써 세상의 불행의 원인을 제거해야만 해.

어떤 경우라도 너는 말에 연막을 씌우거나 진리에 대한 관념을 만들어서는 안 돼.

너는 거짓을 드러내야만 해. 거짓을 분명히 보았을 때 진리가 현전하게 되지.

왜냐하면 진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야.

 

이제부터 우리는 더욱 세부적으로 들어갈 거야.

네가 마음의 모든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이야.

인간의 마음은 오늘날 세상의 모든 문제들의 원인이지.

우리는 이제까지 해왔던 것보다 더 명확하게 거짓을 이해해야만 해."

 

그날 아침 그의 몇 마디 말을 통해 나는 더 밀도 높은 공부가 진행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설명하고 있는 요점들을 놓치지 않도록 특별히 더 집중해야만 했다.

 

그가 하는 말의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나의 마음은 명징하게 깨어 있었다.

 

이윽고 그가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우리가 다룰 주제는 기억이야.

나는 네가 기억의 의미를 철저하게 이해하길 원해.
기억은 우리가 겪는 많은 갈등의 원인이지.
사람들이 특정한 과학과 관련된 기술적 지식을 습득할 때 기억이 필요해.
이런 종류의 기억을 우리는 사실적 기억이라 부를 거야.
이런 사실적 기억이 없다면, 사람들은 교량, 기차 엔진, 자동차, 집 등과 같은 사물을 만들 수 없어.
사실적 기억은 사람들을 유쾌하게 하거나 불쾌하게 만드는 그런 기억과는 완전히 다른 거야.

 

만일 어떤 사람이 너에게 불쾌한 얘기를 하고, 또 어떤 사람이 유쾌한 얘기를 했다고 하자.
그러면 너는 즉각적으로 어떤 반응을 하게 돼. 그리고 그것은 기억이 되지.
그리고 다음 날 너에게 불쾌한 말을 했던 사람을 만나게 되면, 너는 그 때의 기억을 가지고 그를 대하게 되지.

그 순간 네가 느끼는 감정은 어제의 기억에 대한 반응이야. 즉 분노지.
이번에는 너에게 유쾌한 말을 했던 사람을 만났다고 하자.

그러면 너는 역시 어제의 기억을 가지고 그를 대하게 되지.

이번에 너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하게 돼. 즉 기분이 좋아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 경우에 공히 기억이라는 동일한 기능이 작용하고 있어.
이것을 우리는 심리적 기억이라 부를 거야.

 

이렇게 기억에는 사실적 기억과 심리적 기억이 있어.
심리적 기억에는 명확한 반응이 수반되지.

마음속을 들여다본다면 너는 유쾌한 기억은 붙들려 하고 불쾌한 기억은 떨쳐버리려 애쓰는 걸 알게 될 거야.

반응은 항상 일어나고 있어.
마음은 기억이고 기억은 마음이며,

실재 안에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네가 이해할 때까지 그 반응은 계속 될 거야.

 

이제 너는, 심리적 기억이든 사실적 기억이든, 기억-마음은 과거의 결과라는 걸 이해하기 시작했어.

기억-마음의 바탕은 하나의 조건 지어진 상태, 즉 과거야. 이해되지, 그렇지?

 

이제 이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도록 하자.

새로운 것을 만날 때 우리는 낡은 반응, 즉 기억과 함께 만나지.

그 결과 어떻게 되지? 새로운 것이 낡은 것이 돼 버려.

새로운 것이 과거에 의해 조건 지어져 버리기 때문이지.

도전은 항상 새로운 거야.

하지만 새로운 것을 체험하는 속에서 새로움이 낡은 것에 의해 조건 지어지게 되지.

그런 상태에서 새로움은 결코 온전히 인식될 수 없어.

왜냐하면 새로움을 낡은 반응과 함께 대하기 때문이지. 새것이 너덜너덜해져 버려.

따라서 새로움을 자유로이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지.

너의 체험이 과거, 낡은 것에 의해 조건 지어져 버리기 때문이야.

 

너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면, 네가 어떻게 새로움을 만나는 지 알 수 있을 거야.

너의 마음이 종교적 편견, 국가주의, 각종 사상 등에 의해 조건 지어져 있다면 너는 결코 새로움을 이해할 수 없어.

왜냐하면 낡은 것이 장애물처럼 이해를 가로막기 때문이지.

그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반응 속에 낡은 것을 계속적으로 강화시키게 돼.

이 모든 것은 불완전한 경험이야.

이 불완전한 경험은 항상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라 너를 괴롭히게 돼.

이것이 바로 하나의 관념에 대한 집중이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억압을 의미하게 되는 이유야.

 

그렇다면 이 불완전한 경험은 왜 너를 괴롭히는 것일까?

왜냐하면 그것은 기억이고, 기억은 마음속의 인상이기 때문이지.

그러나 만일 문제의 전체 진실을 이해한다면 너는 진리가 결코 기억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왜냐하면 진리는 마음 너머에 있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진리는 항상 새롭고,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

이것을 이해함으로써만 너는 경험을 완성시킬 수 있어.

왜냐하면 왜곡 없이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것에 대해 알 수 있는 진정한 식별력이 생기기 때문이지.

 

만일 기억을 새로운 것에 대한 가이드로 사용한다면 그 새로움은 낡은 것이 될 거야.

낡은 기억을 완전히 이해하지 않는다면 너는 그것을 유지하기를 원하게 되지.

사실상 너는 그것을 계속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어.

어떤 것에 대한 진리를 완전히 이해했을 때에만 그것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돼.

 

자, 이제 우리가 기억을 어떤 식으로 키우고 있는지 살펴보자.

너는 주문을 외우고, 책을 읽고, 종교적 신앙, 사상 등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그 밖의 모든 쓰레기 같은 지식들을 갖고 있어.

자, 그러면 새로운 것을 만날 때 어떻게 될까?

너는 낡은 것으로 새로운 것을 만나게 돼!

이제 기억이 새로운 것보다 더 중요하게 되어버린 것이지. 그렇지 않니?”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혀가 딱 굳어 버렸다.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전에는 결코 깨닫지 못했던 어떤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마음과 마음의 움직임에 대한 이해가 보다 더 명료해졌다.

그 순간 나는 마음이 자아라는 것, 그리고 내가 그 환영의 유일한 창조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나이가 어렸을 때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고, 늙었을 때에는 과거 속에 살게 돼!

어째서 그럴까?

그건 아주 단순해. 우리가 지금을, 현재를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야.

미래를 더욱 중요하게 여길 때 사실상 우리는 현재 속에서 살 수 없어.

이점을 분명하게 이해할 때, 자아에 대해 완전히 이해할 수 있어.

지금 나라고 하는 존재가 무엇인가를 아는 데는 기억이 필요치 않아.

기억은 자아를 이해하는 데 장애물이야.

내가 기억의 본질을 알았을 때만 그것의 중요성은 사라지게 돼.

 

새로운 생각, 새로운 느낌은 마음이 기억에 사로잡히지 않았을 때만 다가와.
만일 너에게 기억이 없다면 너의 재산, 믿음, 종교, 국적 등은 중요하지 않게 될 거야.
기억은 자아를 강화시키지. 자아는 갈등의 원인이야.
그렇기 때문에 너는 반드시 기억을 이해해야만 해.
네가 기억을 이해할 때 그것의 중요성은 사라져 버리지.

 

그러나 기억이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창조하고 있다는 것과
기억이 오늘과 내일을 만든다고 하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너는 과거가 현재와 미래 속으로 투사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왜냐하면 살아 있는 현존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지.

 

과거를 통해서 그리고 기억을 통해서 영원자, 미지자를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해.
그런데 이것이 소위 진리를 공부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애쓰고 있는 일이야.
그들은 기억을 통해서 실재를 알려고 노력하고 있어.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항상 모색하고 있으면서도 결코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야.
이 자아 곧 기억의 투사의 잘못됨을 보여주는 것이 너의 일이야.

 

실재는 기억에 불과한 '나'가 사라졌을 때만 현현할 수 있어.
기억을 통해서는 결코 실재를 깨달을 수 없어. 이 사실을 이해했을 때
너는 실재의 현현에 장애가 되는 자아를 유지하는 이 심리적 기억을 이해하게 될 거야.
이 진실을 네가 이해하게 될 때, 거짓된 것들은 떨어져 나가게 돼.

 

기억은 삶을 둔중하고 공허하게 만들어 버려.
왜냐하면 우리는 기억 때문에 갈등 속에서 살기 때문이지.
이제 너는, 심리적 기억이 하나의 장애물임에 비해
사실적 기억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필수적임을 알게 되었어.
만일 사실적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 교감할 수 없을 거야.”

 

“예.” 내가 말했다.

“이제 기억의 본질을 이해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억은 더 이상 새로운 것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새로움이 항상 지속되기 위해서는 어제를 통한 반응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그가 대답했다.

“그것을 이해하게 되면 실재 곧 지혜가 네 안에서 그리고 네 주위에서 일을 하게 될 거야.

 

너는 영체에 대해 말하지만, 네가 말할 때 그것은 단지 영체에 대한 관념에 불과해!
네가 그 허구성을 이해할 때 너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돼.
그렇지 않니? 이것이 자유야. 이 자유 속에 실재가 존재하지. 이해가 되니?"

 

“예.” 내가 대답했다. “이제 확실히 이해됩니다."

 

이 말과 함께 스승은 법복을 걷어들고 가버렸다.

내 스스로 공부하도록 일부러 나만 홀로 남겨둔 것이다.

 

나의 마음은 기억의 오래된 상처들을 내려놓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 중요한 사람이라는 환영에 갇혀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고 행동하는 지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기억들이 꾸역꾸역 솟아올라왔다.

 

이제 그 전 과정이 이해되었다. 이 모든 불완전한 체험들이 이제 완성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라는 것이 갈등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것들에 대한 기억이 녹아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두려움, 분노, 비난의 감정 없이 초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나'라는 존재의 결과이기 때문이었다.

 

'나'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순간 나는 자유로워졌다.
'나'라는 존재가 문제의 원인이었다. 나의 반응들은 나의 조건에 대한 보호였다.
그 조건은 결코 실재가 될 수 없다. 실재는 결코 반응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아만이 반응한다. 왜냐하면 '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아를 드러내는 것이 자유이다.
기억, 생각, 과거, 미래 등, 이 모든 것들이 내 자신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분리돼 있지 않았다.
나는 기억, 생각, 반응으로부터 분리돼 있지 않았다.
그것들은 내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것들은 기억의 결과이고 그 안에 실재는 없다.

 


나는 더 이상 판단도 비난도 하지 않게 되었다.
"판단 받지 않으려거든 판단하지 말라."
나는 예수가 한 이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이윽고 이 모든 조건들, 상념, 기억 등이 사라져 버렸다.
그것들은 실재가 아니다. 자아는 그 자신이 만들어낸 것들에 의해 묶여 있었던 것이다.

 

자아를 이해함으로써 당신도 지금 이 순간 자유를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변화는 이런 방식으로 일어나며 실재는 걸림 없이 무제한적으로 작동한다.
실재의 작용은 위대하다. 그러나 당신은 순간순간 그것을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있는 현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조건에도 묶여 있지 않다.
이렇게 현재를 사는 것이 그리스도 요가이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징이 울리고 나서야 나는 이 시간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에 대한 느낌이 나를 압도했다. 그 느낌은 지금까지도 내게 너무도 생생하다.

 

나는 마을에 내려갔다 돌아온 스승과 홀 안에서 만났다. 그는 내 어깨 위로 팔을 두르고는 이렇게 말했다. “네 얼굴을 볼 때마다 변화된 너의 모습이 눈에 띄는구나.”

 

그리고 그가 덧붙여 말했다.

“새로운 소식이 있어. 노르부와 그 가족이 돌아왔어. 너를 몹시 또 만나고 싶어 해. 노르부는 무척 예쁘지. 네가 그녀 안에 잠들어 있던 사랑을 일깨운 거 같아. 그 사랑은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이야. 무시해서는 안 돼. 오늘 그녀가 너에 대해 말하는 눈빛 속에서 나는 그것을 눈치 챌 수 있었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노파심에 미리 네게 얘기해 두는데, 너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자력이 강해. 그러니까 힐러(치유사)가 될 수 있었던 거지. 자! 노르부가 내게 부탁하더군. 그녀가 여기 와서 너를 위해 집안일을 거들고 빨래도 하고 이런저런 잡일을 하며 너를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거절하지 못하겠더군. 우리는 결코 봉사의 선물을 거절하지 않기 때문이야. 무조건적인 봉사를 통해 사랑이 탄생하니까.”

 

내가 대답했다. “당신의 말뜻 충분히 이해돼요. 저도 전에 경험한 적 있어요. 봉사를 통한 사랑의 표현과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그래.” 그가 말했다.
“진정한 사랑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거야.

사랑은 생각이 아니야. 사랑은 그것보다 훨씬 깊고 심원하지.

사랑이 없다면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비애지.

그들은 나이만 먹을 뿐 아직도 미숙한 채 그대로야.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 책을 읽고 얘기를 나누지만 삶의 진정한 향기를 결코 알지 못해.

따라서 슬프게도 삶을 풍요롭게 하는 따스한 가슴의 온기가 빠져 있지.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리 애써도 결코 어떤 문제도 풀 수 없어.

 

생각으로만 순수해지려 애를 쓰면 불순해지게 돼.

왜냐하면 거기에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지.
진정한 사랑은 순결과 순수야.
논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란 불가능해.
종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유치하고 어리석지.
사랑의 문제를 호르몬의 작용이나 터부의 관점에서 다루는 것은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보여줄 뿐이야.
관계 속에서 우리의 생각, 느낌, 반응에 대해 의식적이 되는 것이야말로

자아를 드러내는 과정이야.

이 과정 속에서 실재가 현현하게 되지.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통해서만 우리는 자아를 초월한 곳에 이를 수 있어.

우리는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없어. 사랑은 자아가 드러나는 과정 속에서 탄생하는 거야."

 

나의 스승을 보면 볼수록, 그리고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그의 위대한 지혜와 명철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다.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있기만 해도 나는 자아와 마음을 넘어선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마음 안에 있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지만 마음을 넘어서 있는 것은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체험될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