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베인/그리스도 요가

그리스도 요가(Christ Yoga) 06장

기른장 2020. 3. 4. 19:33

스승과 나는 명상의 상태에 잠겨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의 세계로 돌아오자 새로운 활력이 느껴졌다. 내 얼굴이 몇 년은 젊어진 모양이었다.

 

스승이 말했다. “사람이 확 달라 보인다. 훨씬 젊어진 거 같아.”

 

나도 그것을 느꼈다. 몸은 가벼웠고 마음은 명징했다. 이제 나는 실재가 사용하는 보다 나은 통로가 되었다. 실재는 그러한 목적으로 우리를 창조했다. 나는 모든 것이 잘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더 이상 과거의 체험이나 기억에 의존하지 않았다. 사실상 내 자신의 외부에는 안내자가 없었다.

 

나의 스승이 말했다.
“아들아, 너의 유일한 안내자는 미지자야.
내가 너보다 훨씬 더 경험이 풍부하겠지만 나는 더 이상 너에게 안내자가 아니야.
오로지 나의 우정만이 네 가슴이 바라는 것을 줄 수 있을 뿐이야.
너의 안내자는 내면에서 온단다.

 

우리는 아직 명료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 함께 격의 없이 토론하게 될 거야.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인 신의 사랑과 지혜를 통해 길이 드러나게 될 거야.
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야. 일을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신의 생명이지.
예수는 이렇게 말했어.

‘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일을 하는 것은 내 안에 계신 아버지이다.'

이 말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란다. 신만이 홀로 살아있지.
그러므로 이 생명을 방해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면, 그 방해물은 사라지게 돼.”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프론트 홀에 계속 있었다. 이제 점심시간이 되었다.

 

내가 말했다. “아침에 과식한 느낌이에요. 점심으로 그냥 우유 한 잔만 먹으면 안 될까요?”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유로 점심을 때웠다.

 

우리는,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할 일들과 내가 여행해야 할 나라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후 나는 미국, 캐나다, 영국, 스코틀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중국, 일본, 중동 등을 다녔다. 나의 치유 사역은 기적적이었다. 하지만 내가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이 내가 그 무엇보다 분명하게 배운 것이다. 나는 영이 인도하는 대로 갔던 것이다.

 

점심 후 나는 앞에서 우리를 도전하듯 쳐다보고 있는 니블룽리충 봉우리를 등정하는 문제에 대해 다시 얘기를 꺼냈다.

 

“자.” 스승이 말했다. “그렇다면 준비 작업을 해야지. 보아 하니 직접 시도하지 않는 한 너는 만족하지 않을 거 같구나. 우리에겐 좋은 짐꾼들이 필요해. 이 지방에는 훌륭한 짐꾼들이 많이 있어. 세계 최고의 수준들이지. 우리는 단계별로 등정해야 해. 보통 일이 아니거든. 최소 10일은 걸릴 거야. 우리는 올라가는 길에 캠프들을 준비해야만 해. 로프와 여타 등산 장비들은 다행히 여기에 있어. 산을 오르려면 지금 당장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곧 겨울이 닥칠 테고, 그러면 희망이 없어. 눈이 너무 많이 쌓이거든. 폭풍의 위험도 있어. 이곳의 폭풍은 엄청 사나워. 며칠 동안 지속되지. 이런 폭풍을 만나면 산 속에서 생존할 수 있을 지 의문이야. 너를 이곳으로 부른 것은 너의 사역 때문이지 등반 때문이 아니야. 이런 일로 네 목숨을 위태롭게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 그가 묻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말했다. "정말로 고마워요. 당신이 내게 베풀어준 그 모든 은혜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할게요.”

 

“자,” 그가 말했다. “만일 우리가 저 버섯 모양의 봉우리를 넘어서지 못하면 등산을 포기하도록 하자꾸나.”

 

“네,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등산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남부 알프스와 스코틀랜드의 어려운 암벽 등반을 나서기 전에 느꼈던 흥분된 기대감이 다시 되살아나고 있었다. 등산에 대한 열정이 나의 피 속에 흐르고 있었다. 내 안에는 도전에 대한 의지가 항상 꿈틀거렸다. 하지만 과거처럼 무모한 위험을 감수하지는 말자고 내 스스로를 달랬다.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지만 나는 젊은 시절 터무니없는 모험들을 하곤 했었다. 이제 나는 그것들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알고 있다.

 

준비가 끝나자 스무 명의 노련한 짐꾼들과 함께 우리는 등반에 나섰다. 그 날 아침의 기억이 너무도 선명하다. 우리가 출발할 때는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다. 우리가 일출 전에 떠난 것은, 빙하 바닥까지 이르는 5마일 여정의 첫 코스가 비교적 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아침 7시 경에 빙하 바닥에 도착했다. 스승은 빙하의 우측 융기된 부분에 첫 캠프를 설치하도록 지시했다.

 

그가 설명했다. “이 빙하의 길이는 15 마일이야. 저 설선(역주: 만년설이 있는 지역의 하한선)에 첫 캠프를 설치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물품 대부분을 보관해 두자. 그리고 저 곳에 도달하면 그때 가서 세부 계획을 짜자.”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숲 가장자리를 통과했다. 이제 우리 앞에 탁 트인 벌판이 나왔다. 바람이 사납게 불어대며 우리의 길을 방해했다. 우리는 빙하의 가장자리를 따라 나아갔다. 크레바스들이 있을 위험 때문이었다. 우리에겐 크레바스를 건널 장비도 없었다. 남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이 얼음 강은 특히 아름다웠다. 어떤 크레바스들은 최소한 직경 20피트는 되었다. 거기로 떨어진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고원의 강풍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잘 헤쳐 나가고 있었다. 암반 지대를 통과하는 것은 쉬웠다. 우리는 마침내 오랜 세월동안 바위를 덮고 있던 얼음 지대에 이르렀다. 그곳은 마치 유리 같았고 무척 미끄러웠다.

 

우리는 특별한 아이스 부츠를 신고 있었다. 내 것은 발에 꼭 맞았고 무척 편했다. 스승과 나의 발 사이즈는 거의 비슷했다. 나는 전에 어떤 일을 위해 그것을 신었었는데, 그 때 내 것으로 선택해 두었었다. 나는 야크 버터로 그것을 부드럽게 하였다. 그랬더니 발목 주위가 편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걷기에 편했고 장갑처럼 잘 맞았다. 등산할 때는 발목 주위를 잘 감싸주는 등산화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얼음을 헤치고 나아갈 때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스승이 앞장섰다. 그는 얼음 속을 끊으며 걷는데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등산가들과 함께 산을 오른 적이 있었지만 내 스승과 같은 전문가는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와 같은 정확한 판단력을 가진 등산가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첫날의 여정을 마치고 쉬었다. 꽤 좋은 성과였다. 짐꾼들이 우리를 따라 왔다. 우리는 거대한 두 개의 바위 사이에 야영할 안식처를 마련했다. 우리는 빙벽 옆에 램프를 켜놓고는 뜨거운 커피, 고기, 보리빵, 버터, 치즈를 먹었다. 배가 고파서인지 맛있었다. 공기가 서늘했다. 스승이 야영지로 선택한 장소는 눈사태에도 안전한 곳이었다. 우리는 잠시 잡담을 나누었다. 나는 그에게 기도에 대해 말해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가 말했다. “눈을 좀 붙이는 게 더 좋을 거야.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네게 가장 좋은 기도야. 한 숨 푹 자야 내일 아침 상쾌해 질 테니까. 우리는 날이 밝는 대로 일찍 출발할 거야.”

 

그래서 나는 기도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편한 시간에 듣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나는 말했다. “비록 지금 등산 중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공부를 완전히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아니야.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아. 적절한 시간이 되면 그때 공부를 하도록 하자꾸나.”

 

우리는 장갑과 털모자를 착용한 채 슬리핑백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 날 아침 스승이 내 털모자를 잡아당겨 깨우기 전까지 나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눈을 뜨자 햇살이 막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면 길을 나서도 될 만큼 날이 충분히 밝아질 거야.” 그가 말했다.

 

나는 등산화를 신고 재킷을 입었다. 우리는 30분 만에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약 한 시간 동안 아무 문제도 없이 잘 나아가던 우리 앞에 심각한 장애가 나타났다. 가파른 빙벽과 마주친 것이었다. 이 난관을 뚫고 나갈 방법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스승이 말했다. “한 가지 방법밖에 없어. 절벽을 오르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오늘 아침에 출발했던 지점으로 다시 내려가 이 절벽의 반대편으로 돌아가야만 해. 그런데 그렇게 하면 하루가 낭비되지. 유일한 방법은 이 절벽을 오르는 거야. 저 돌출된 바위가 지탱해주기만 한다면 우리는 할 수 있어. 저 위로 밧줄을 던져 걸 수 있다면 오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야. 내가 저기 올라가면 너를 끌어올릴 게. 그리고 너는 마찬가지 방법으로 두 명의 짐꾼을 끌어올려. 그런 식으로 그들이 다시 나머지 사람들과 짐들을 다 올릴 수 있을 거야.”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그 돌출된 바위에 밧줄을 단단히 맨 스승이 빙벽을 올랐다. 그 뒤를 내가 따라 올랐다. 짐꾼들도 안전하게 올라왔고 모든 짐들도 성공적으로 올렸다.

 

빙벽 꼭대기에 이르자 우두머리 짐꾼이 우측의 돌출된 암반 바로 아래 캠프를 설치하면 어중간할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는 더 위쪽에 캠프를 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우측의 낭떠러지 쪽을 향해 갔다. 이제 우리는 오랜 세월에 걸쳐 바람과 눈에 의해 얼음 같이 딱딱하게 굳은 눈 속에 발 디딜 곳을 찍어가며 나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우측 낭떠러지 위에 올라서서 캠프를 설치했다. 이제 산 정상까지는 6천 피트(1800m)도 남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위험한 여행의 세 번째 날이 지나갔다.

 

스승이 말했다. “우리는 너무 늦지 않게 반드시 삼 일 안에 정상에 도달해야만 해. 이곳의 바람은 허리케인 같은 속도로 불어. 이런 광풍이 불기 시작하면 희망은 없어.”

 

그렇게 거기에 캠프를 설치한 후, 다음 날 우리는 본격적인 등정을 시작했다. 두 명의 짐꾼과 스승과 나, 이렇게 네 명은 로프를 이용하여 서로 연결했다. 나머지 여덟 명의 짐꾼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등산의 달인들이었다. 로프를 다루는 솜씨들이 놀라웠다. 그들은 우리의 다음 캠프에 필요한 물품들을 운반하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저 아래 캠프에 남겨 두었다.

 

스승이 앞장서 갔다. 그 뒤로 남자Namza라는 이름의 짐꾼이, 그 뒤로 내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파호라는 이름의 짐꾼이 뒤 따랐다. 남자Namza는 '덮는다'는 의미이고 시파호Sipaho는 '비껴간 악'이라는 의미이다.

 

픽켈을 다루는 스승의 솜씨는 탁월했다. 그는 매 걸음마다 픽켈을 두 번씩 찍었다. 덕분에 우리는 버섯 모양의 정상에 이르기까지 안정되게 전진할 수 있었다. 스승이 말했다. “저곳에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조사해 볼게."

 

그러나 내가 말했다. “당신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아요. 제가 같이 갈게요.”

 

“아니야.” 그가 대답했다. “나 혼자 가는 게 더 나아. 별 일 없을 거야. 저 번 밤에 말했던 너의 믿음은 어디로 갔니?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니?” 나는 간신히 자제했다. 아직 내게는 벗어버려야 할 많은 조건화된 껍질들이 있었다.

 

스승은 혼자 떠났다. 30분 정도 지나자 우리는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가 떠난 후 눈사태가 한 번 나기도 했다. 그는 얼음과 눈 속에서 걸음을 빠르게 찍어가며 불과 몇 분 만에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가 돌아오자 나는 기뻤다. 내가 말했다. “아직 내게는 산을 움직일만한 믿음이 없어요. 하지만 나의 믿음은 성장하고 있어요. 이번 일은 저의 믿음에 대한 놀라운 시험이었어요.”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바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말했다.
“내가 찾은 길은 딱 한 가지야. 그것은 암벽을 오르고 나서 이 눈 덮인 원추형 꼭대기를 건너 돌출부로 간 뒤 정상을 향하는 거야. 눈이 충분히 굳어 있다면 우리는 해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백 피트(30m) 아래 바위 바닥에 미끌어떨어질 거야. 내 생각에 그곳에는 부드러운 눈이 깊이 퇴적돼 있어. 이것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하지만 내 생각에 우리는 이 원추형 지대를 무사히 건널 수 있을 거 같아. 네 생각은 어때? 도전하길 원하니?”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제가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죠?" 그가 만족스런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우리는 다시 모두 서로 로프로 연결한 채 지극히 위험한 얼음 바위를 타기 시작했다. 우리는 마침내 문제의 그 원추형 지대 가장자리에 도착했다. 눈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돌출 부위에 도달할 수 있었다.

 

스승은, 돌아오는 길이 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내 생각에 다음 캠프를 여기에 설치해야 할 거 같아. 확실해. 이것이 유일한 길이야. 지금까지 누구도 여기 올라오는 길을 발견하지 못했어. 아마도 저 가파른 빙벽에 이를 수 없었던 것 같아."

 

“당신은 어떻게 해내셨는지 모르겠군요.” 내가 말했다. “저 바위 빙벽을 타오르려고 할 사람은 세상에서 다신 아무도 없을 거예요."

 

"바위 표면에 매달려 있는 동안 얼음을 커트해서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 난점이지." 그가 겸손하게 설명했다. 내가 말했다. "당신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니 거머리 같던데요." 우리는 모두 큰 소리로 웃었다. 그것은 지난 몇 시간 동안의 긴장으로부터 해방되는 안도의 웃음이었다.

 

우리가 그 융기부에 오른 뒤 다른 사람들도 잇달아 도착하자 그날 밤을 보내기 위해 캠프를 설치했다. 이제 우리는 산 정상으로부터 2천 피트(600m) 가량 떨어진 곳에 와 있었다. 우리는 성공에 대한 확신에 넘쳤다. 다음날 우리는 최종 공격을 위해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마지막 날 우리는 일출과 함께 길을 나서 정오 무렵 꼭대기에 도착했다.

 

정상에서 보니 녠첸탕글라의 봉우리들이 저 멀리 펼쳐진 장관이 눈에 들어왔다. 반대편 계곡 아래로는 거대한 호수가 보였다. 해발 1만 5천 피트(4500m) 높이에 자리한 그 호수는 길이 50 마일(80km), 폭 30마일(48km)에 달했다. 산줄기가 호수의 오른편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호수의 이름은 남초 또는 텡리노르라 불렸다. 숫자를 세어보니 이 호수로 흘러드는 강줄기가 30개에 이르렀다.

 

그 강들 중 두 개는 다른 것들에 비해 현저하게 컸다. 그 강의 이름은 각각 느강추와 트리추였다. 왼편으로는 아직 전인미답의 지역이 보였다. 거기에는 단 한 명의 인간도 살고 있지 않은 듯 했다. 그러나 오른 쪽에는 호수 변에 집이 몇 채 보였다. 수천 피트 아래에 있는 그 집들은 핀 머리처럼 생겨서 마치 손으로 금방 집어 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티베트의 모습이었다. 스승이 말했다. 수 세기 동안 이 지방 사람들은 거기서 태어나서 거기에 살다가 거기서 죽었고, 아마 아무도 이 계곡 바깥세상을 본적이 없을 거라고.

 

내가 대답했다. "그들에게 그런 욕망조차 없을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이 모든 것이 너무도 아름다워요."

 

“그래.” 그가 대답했다. “저곳은 낯선 땅이지. 하지만 그들에게는 바깥세상이 훨씬 더 낯선 곳일 거야.”

 

우리는 계획을 성취했다. 결코 잊지 못할 스릴 넘치는 경험이었다. 우리는 세계 최초로 니블룽리충을 오른 사람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했다. 충만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우리는 소원을 성취했다. 이것은 좋은 전조였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스승도 동감했다. 그날 오후 우리는 하산하기 시작했다. 캠프에 도착해 보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그 광경의 아름다움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산 길은 예상보다 쉬웠다. 우리는 떠난 지 딱 10일 만에 잠사르로 되돌아왔다. 나는 결코 그 경험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내 수련의 일부였다. 우리가 어려움과 마주 칠 때 그 어려움은 사라져 버렸다. 그 이후에도 항상 그랬다. 참으로 기적적으로 어려움들이 녹아 사라져 버렸다.

 

당신이 신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지 않으면 신이 직접 일을 한다.
당신이, 당신을 통해 신이 작용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 작용은 광대해지고 무제한적이 되며 완전하게 된다.

여기에 바로 그리스도 요가의 비밀이 존재한다.
일을 하는 것은 신이다.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다.
나는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니블룽리충을 오르는 동안 깨닫게 되었다.

 

그날 밤 우리는 돌아왔다. 마을 사람 전부가 좋은 소식에 대한 기대감으로 밖에 나와 우리를 맞이하고 환영해 주었다. 우리가 드디어 일을 해낸 것인가? 모든 사람들이 기뻐해 주었다. 우리의 성공 소식은 잠사르 지방 전체로 퍼졌다. 모든 사람들이 축하해 주기 위해 마을 한 가운데 회관에 모였다.

 

그들은 저마다 음식들을 가지고 왔다. 많은 양의 보리 맥주, 창이라 불리는 전통 음료, 티베트 전통 빵의 일종인 참파 등이 있었다. 달걀들도 돌려졌다. 이것은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념품이었다. 이 달걀들 중 어떤 것은 일 년 이상 된 것도 있었다! 마을 전체에 밤이 새도록 조화로운 행복감이 퍼져갔다.

 

스승과 나는 우리의 성소로 갔다. 우리는 열흘 동안 씻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그보다 더 오래 씻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우리는 물이 흐르는 풀 안으로 들어갔다. 물은 따뜻하고 상쾌했다. 우리는 배수구 쪽에서 몸을 씻었다. 목욕하고 나서 우리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마을 회관으로 내려갔다.

 

스승이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우리에게 준 음식을 먹자꾸나.” 우리는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음식 중에는 구운 닭고기와 구운 감자도 있었는데, 이것들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것은 정말 맛있었다.

 

스승은 티베트어로, 이번에 처음 정복된 니블룽리충 정상에 우리가 어떻게 올랐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어찌나 주의 깊게 경청하던지 바닥에 핀이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스승의 목소리는 참으로 근사했다. 누구든 그의 말에 매혹되어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티베트 여자들은 모든 면에서 남자들과 평등했다. 티베트 여자들 중 많은 수가 등산을 무척 잘 했다. 여기서는 여자들 역시 쟁기질을 하고 땅을 파고 물을 나르고 나무를 한다. 집 안팎에서 여자들은 남자들만큼 모든 면에서 능숙하다. 특히 장사를 하는 데는 남자들을 훨씬 능가했다.

 

티베트에서는 노소 구분 없이 보리 맥주 창을 마음껏 마셨다. 티베트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낙천적이다. 서로 다투는 일을 거의 볼 수 없다. 술을 마실수록 더욱 흥에 겨워했다.

 

농부들 사이에서는 도덕관념이 꽤 느슨하다. 아무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날 밤 거기에는 어떤 구속감도 없었다. 티베트인들은 아이들을 무척 좋아한다. 결혼하기 전에 여자가 임신을 하더라도 그것에 개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혼이든 아니든 일정한 연령에 이른 여자에게 아이가 없는 경우를 거의 볼 수 없다. 티베트인보다 더 행복한 사람들을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의 생활 조건은 겨울에 혹독하다. 동절기 동안 기온은 대부분 영하로 떨어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조건들에 익숙하다. 그들은 다른 곳의 기후조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스승은 한 마디로 잠사르의 왕이었다. 노소구분 없이 모든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다. 그토록 존경받는 비결은 그가 지닌 지혜와 사랑과 이해심이었다. 나는 그가 타인을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는 참으로 진리의 화신이었다. 모든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 그의 마음을 통해서 어떤 방해나 제한 없이 진리가 작용하고 있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우리는 비로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피곤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잠자리에 들자 세상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깨어보니 해가 솟아 있었다. 나는 니블룽리충 산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불타오르는 열망은 없었고 일종의 만족감이 밀려왔다. “오늘 아침 기분이 뿌듯해요.” 내가 스승에게 말했다.

 

“그래.” 그가 대답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공부를 해야만 해.”

 

내가 그에게 말했다. “지난 번 산에서 내가 기도에 대해 질문했었잖아요. 그래서 오늘은 기도라는 주제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해주시면 좋겠어요.”

 

그가 말했다. “너에게 있어 기도란 무엇을 의미하지?”

 

“음, 나는 대체로 뭔가를 원하거나 문제를 가지고 있거나 아플 때 기도를 하곤 해요. 때로는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도 있구요.”

 

“그래.” 그가 말했다.

“기도할 때 너는 대개 불안정한 상태에 있지 않니? 아니면 모순에 처해 있거나 불행하거나 혼란된 상태에 있지 않니?”

 

“예, 행복하거나 만족을 느낄 때 기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그렇다면 말이야.” 그가 말했다.
“기도가 어떤 만족감을 가져다주는 것이 틀림없어.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에 기도를 포기했을 거야.
구하면 받게 돼. 믿음의 정도에 따라 받게 되지. 이것이 기도의 자연스러운 결과야.
그렇지 않은가?
예수는 말했지. ‘받았다고 믿어라. 그러면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진리야.

 

하지만 기도할 때 너는 어떤 형태로든 만족을 추구하고 있어.

차원이 높건 낮건 만족을 구하고 있는 마음에게는

대개 맹목적인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 믿음의 정도에 따라 특정한 양의 만족이 있게 돼.

그러나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

기도의 방법을 이해할 때 우리는 그것을 발견할 수 있어.

 

자, 너는 기도할 때 어떻게 하니?
특정한 말들을 반복하거나, 특정한 자세를 취하거나 하지 않니?
그러면서 너는 응답을 구하고 있지.
응답에 대한 갈구 속에서 마음은 다소 고요해지게 되지.
그리고 그 고요한 상태에서 너는 만족감을 느끼게 돼.
그리고 고요한 상태 속에서만 마음은 응답을 받을 수 있지.
하지만 이것은 네 자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아.
어떤 결과를 요구하고 추구하고 갈구하는 이런 상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야.

 

기도 속에서 너는 항상 손을 벌리고 있어. 기다리고 희망하면서.
그러나 그런 희망 속에는 절망감이 수반되지.
너는 어떤 상태에서 벗어나거나 어떤 것을 얻기를 갈망하고 있어.
그러나 기도는 결코 너로 하여금 기도를 하게 만든 그 상태로부터 마음을 해방시킬 수 없어.
따라서 항상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지.
그리고 이 불안한 상태가 바로 마음으로 하여금 계속 기도하게 만들어.
그러므로 해결책은 마음을 그 자신의 문제들을 만들어내는 것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거야.
그렇지 않니?

 

기도는 기도하는 자가 하기 나름이야.
우리가 뭔가를 요구할 때 거기에는 무의식적인 응답이 있게 돼.
그 응답은 수세기에 걸친 무의식적 체험으로부터 오는 거야.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 상태에 따라 받게 돼.
예수가 이렇게 말했듯이. ‘받았다고 믿어라. 그러면 너는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대립 속에서 살고 있어.
소유와 빈곤, 건강과 질병, 성공과 실패, 선와 악 등.
마음의 모든 과정을 이해했을 때만 너는 대립의 상태를 초월할 수 있어.
이것이 기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야.

 

기도는, 기도하는 자에게 그 어떤 해결책도 가져다주지 않고, 간구에 대한 해결책도 아니야!
어쩌면 너는 원하는 것을 얻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렇다 해도 뭔가를 바라는 마음 자체를 없애지는 못해.
따라서 중요한 것은 너의 기도에 대한 피상적인 응답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문제를 만들어내는 마음의 모든 과정을 이해하는 거야.

 

세상 사람들은 오랫동안 평화를 위해 기도해왔지만, 평화는 언제나 저 먼 곳에 있을 뿐이지.
전쟁의 원인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무슨 효과가 있지?
성공을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실패의 원인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질병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건강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효과가 있을까?
기쁨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슬픔의 원인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너는 환희에 찰 때는 기도하지 않아. 어떤 문제가 있을 때만 기도하지.
너는 네가 해결 할 수 없는 갈등이나 어려움을 겪을 때만 기도하지.

 

마음, 즉 자아가 바로 문제의 원인이야.
우리에게 필수적인 것은 마음의 모든 과정을 이해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마음은 더 이상 중얼거리지 않게 되고 억지로 고요하게 만들 필요도 없게 되지.
이미 내가 설명했듯이,
마음은 올바른 명상을 통해서만 고요해지게 돼.
실재는 바로 그 고요 속에 있어.
실재는 그 어떤 문제도 갖고 있지 않아.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은 자아일 뿐이야.
그리고 자아는 그 문제에 대해 기도하지.
해결책은 문제의 원인을 이해하는 거야.
문제의 원인은 바로 너 자신 즉, 자아야.
자아는 실재 속에는 존재하지 않아.
자아의 본질을 이해했을 때 그것은 녹아 사라지게 돼.

그리고 문제도 사라지게 되지.
그렇게 될 때 실재가, 창조성이 즉각 현전하게 돼.
그것이 진정한 기도야.
그것이 존재야.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존재의 무한한 상태, 효율성, 포괄성을 체험해야만 해."

 

나는 침묵 속에 있었다. 그것은 억지로 만들어진 침묵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아의 본질과 작용 방식들에 대한 이해를 통해 생겨난 침묵이었다.
이 깊은 고요 속에서 나의 마음은 중얼거리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실재가 현현했다.
그 순간 나는 실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문제는 무無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재뿐이다.

그것은 결코 창조될 수 없는 창조성이다.

 

문제를 만든 것은 마음 자체이다.

따라서 마음은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하지만 마음이 이런 사실을 이해하는 순간 마음은 중얼거림을 멈추게 되고,
문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자기인식이다.
이 자기 인식이 없는 한 해결책은 없다.
이것이 진정한 기도이다.

이것이 진정한 명상이다.
이 속에서 실재는 활동한다.

그리고 이 활동은 넓고 무한하다.
신은 그 자신의 집을 완전히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