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안에서 우리의 존재 의미와 역할에 대한 탐구를 하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 존재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종교와 신앙 체제를 만들었다. 모든 종교는 '삶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인간들의 시도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 삶의 의미는 우상이나 신화, 태양신, 조신(bird gods)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철학으로 설명되어 왔다. 그것들은 시대의 이해와 지성을 반영한다.
인간은 삶에 대한 공부를 단계별로 밟아야 한다. 진화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도전하고, 발견하며, 배워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는 발상의 전환으로 우리 자신을 위한 진리를 찾아 나서는 시대다. 우리는 이제 종교와 철학자들을 절대적 권위자로 대접하고 경청해서는 안 되고, 그들의 말을 개인적 발견의 길을 걷는 데 활용하는 하나의 정보로 받아들이면 된다. 새로운 변환기에 우리는 창조와의 연결에 대한 책임을 배울 것이며, 가장 중요한 것, 즉 스스로 자신들의 진리를 발견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 시대에는 어떤 신이 어떤 것을 원한다고 말해 주는 영적인 영매(middle-man)들이 필요 없게 될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스스로 진리를 발견하는 법을 배우고, 우리가 이해한 것을 다른 사람들과 자유롭게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삶이 주는 어려움에 직면하여 자신의 행동에 100퍼센트 책임을 지는 것이야 말로 이 시대에 우리가 진실로 배우는 위대한 공부다. 미래의 지도자들은 스스로 모범과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개념을 가르칠 것이다.
고대에는 신들이 지구를 지배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은 홀로 서서 창조 안에서 자신이 영적으로 설 자리를 발견해야 한다. 이 새로운 시대에 인간은 자신의 영혼과 접촉하고, 자신이 이미 창조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단순한 물질적 존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창조와 연결되는 영적 에너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영혼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실질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항상 새로운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창조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됨에 따라 우리 영혼들이 텔레파시나 텔레키네시스, 미래 비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창조 및 고도의 의식을 가진 다른 존재들과 직접 대화하는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배울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교육과 새로운 방법, 그리고 새로운 생각을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낡은 패러다임(paradigm, 발상 체계)이 답변해 줄 수 없는 질문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영적 자아를 이해하고 그 자아를 우리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새로운, 그리고 실질적인 방법에 대한 필요성이 있지만 종교는 그 대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일 우리가 2천 년 전의 평균적인 사람들을 들여다보면, 제대로 구성된 종교(기독교)가 얼마나 가치가 있었겠는지를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시는 혼돈의 시대였으며, 인간들은 자신의 삶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어떤 종류의 잘 짜여진 종교를 구슬프게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기독교는 신(하나님)과 인간의 삶의 의미를 설명하는 논리적 방법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것을 제공했던 것이다. 첫째로 삶이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도록 십계명을 가졌다. 거기에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고 그에 준해 사는 기본 법칙들이 있었다.
그리고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사람들은 신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존재 이유를 발전시켜 창조와 보다 가깝게 느끼게 되었다. 그들의 삶은 그로 인해 보다 풍성하고 의미 있게 되었다. 기독교는 그 가르침이 집대성된 신약성서(the New Testament) 이후 탄생되었다. 태양신으로 시대에 대한 이해를 반영했던 이집트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그 시대에 대한 반영으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천 년이 흘러 우리는 이제 또 하나의 '새로운 시대', 즉 보다 복합적이고 정교한 이해가 요구되는 시대에 들어왔다. 기독교는 원래의 형태로 오래 살아남았지만 더 이상 우리의 의문에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없다. 질문에 대한 답을 자신 속에서 찾아라. 자신의 영혼과 연결되어 있는 고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가 자랄 때 내 부모는 성공회와 깊이 관계하고 있었다. 나는 신부 보조 보미사였으며, 영성체 의식(Communion ceremony)의 거의 전 과정을 단번에 암송하기도 했었다. 나의 그런 성장 과정은 미국의 중서부 지방에서는 아주 정상적인 것이었으며, 내가 살던 동네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기독교를 배우면서 자랐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는 사물들에 대한 의문을 갖고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싶어 했다. 그 뒤 나는 사업상 일본, 중국, 유럽, 이집트 등으로 여행하면서 사람들마다 제각기 서로 다른 관점과 깨달음(understanding)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방법으로 생각하거나 동일한 것을 믿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라들의 숫자보다 더 많은 철학, 신앙, 그리고 종교들이 있었다. 어느 곳을 가든지 삶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들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은 환상적이었으며, 나를 인도에서 살았던 예수에 대한 책을 읽도록 이끌었다.
예수는 인도에서 살았다
내가 '셈야제 실버스타 센터'에 머물고 있을 때 나는 빌리의 '컨택노트'와 내가 가지고 갔던 다른 여러 책들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가운데 『 Jesus Lived in India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장성규 옮김. 고려원. 1987초판)라는 이름의 책이 한 권 있었다. 그 책은 내가 미국을 떠나기 전에 친구가 준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것이었는데, 독일의 역사학자 홀게르 케르스타인(Holger Kerstein)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조사를 중심으로 펴낸 책이다.
그는 예수가 십자가형에서 살아남아 그 뒤 여러 해 동안 인도에서 살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책은 저자가 이스라엘에서 수년간 연구한 끝에 펴낸 상세 보고서다.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인도 등지에서 그는 십자가형 이후 예수가 밟았던 길을 밝혀 냈다. 그의 저자는 예수에 대한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자신의 탐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다가 살아난 뒤에 밟았던 길을 따라 걸었는데, 그 결과 이 역사 학자는 여러 나라를 거치는 과정에서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묘사하고 있는 낡은 두루마리들과 서적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책은 예수가 인도의 슈리나가르라는 고장에서 말년을 보냈다는 설을 입증하는 증거로 끝을 맺는데, 그에게는 가족이 있었고 나이가 많이 든 다음에 생을 마친 것으로 되어 있다.
나는 그 책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아주 잘 쓴 것이었다. 저자가 자신의 주장을 잘 뒷받침하고 있어서 법정에 서더라도 충분히 승소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감명을 받은 나는 플레이아데스인들과 접촉한 빌리가 그 책의 내용을 인정하는지를 알고 싶어서 안달했다. 나는 빌리가 셈야제에게 종교(주로 기독교), 신(기독교의 하나님), 그리고 예수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이 주제에 대해 아는 것이 아주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플레이아데스인들에게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들이 역사를 실제로 목격하는 기술적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한 개인의 경험에 대해서는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빌리에게 전해주었을지도 모르는 정보는 다른 어떤 것 보다 진실에 더 접근해 있을 것이었다. 역사상 예수의 삶과 죽음만큼 인류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별로 없다고 쉽게 단정지을 수 있다.
임마누엘(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나는 부엌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빌리를 찾아냈다. 그는 내가 그 책을 며칠 동안 읽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온갖 질문을 가지고 나타날 것을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선반에 놓인 라디오 위에서 메모지 두 장을 집어 들었다. 내 첫 번째 질문은 예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하는 것이었다. 빌리도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빌리는 나에게 예수가 그의 진짜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시작했다. 우리가 예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일생 동안 결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었다. 그 이름은 A.D. 189년, 기독교를 만드는 단계에 있던 사람들이 붙여준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을 최대한 발휘하여 임마누엘의 가르침이 다시 쓰여진 것도 그 기간 동안이었다. 초기 기독교의 저술에는 임마누엘(Jmmanuel)이 Emmanuel로 쓰여져 있다. 그의 이름은 많은 찬송가 속에서도 Emmanuel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플레이아데스인들이 사용하는 라이라인들의 고대 언어 속에서 그 이름은 J로 시작하고 있다. 따라서 빌리는 그를 Jmmanuel이라고 지칭한다.
우리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임마누엘의 이미지는 기다란 금발 머리에 좁고 섬세한 골격을 가진 젊은이다. 빌리는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얼굴을 쳐다보면서 몇 초 동안 생각을 하고 나서, 임마누엘은 십자가형에 처해질 무렵 대략 178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78--80kg 정도의 몸무게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검은 곱슬머리와 큰 골격, 그리고 커다란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피부는 볕에 그을려 햇볕에 장기간 노출된 노동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임마누엘의 출생
플레이아데스인들은 임마누엘이 지구에서 태어난 인간이며, 인간들과 똑같이 살다가 죽었다는 것을 명백히 밝히기를 원했다. 그의 생애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진실을 위해 싸운 한 예언자의 삶이었다. 그는 플레이아데스에서 온 천상의 아들들로부터, 그들의 지혜를 통해 많은 교육을 받았다. 그는 영혼의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지구상에 창조의 지식을 전하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자 하는 스스로의 의지를 발견했다 그의 출생은 플레이아데스인들에 의해 비롯되었으며, 지구상에 있던 플레이아데스인들의 마지막 지도자 플레요스(Plejos)에 의해 요청되었던 것이다. 플레요스는 여생을 보내기 위해 플레이아데스로 되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예언자 한 사람을 남겨서 창조와 삶에 대해 자기 대신 가르치도록 하고 플레이아데스로 떠나기로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지구를 다스릴 신들이 더 이상 없었기 때문에, 플레요스는 플레이아데스의 영적 지도자들에게 임마누엘의 영혼을 지상에 탄생시키도록 허락을 구했다. 임마누엘은 평범한 지구인 부모로부터 태어나기에는 그의 영혼이 고도로 진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역시 고도로 진화된 플레이아데스인 남자로 결정되었다. 가브리엘(Gabriel)이라는 이름의 플레이아데스인이 아버지로 결정되었고, 마리아(Mary 또는 Maria)라는 지구 여자가 아이를 임신하기로 정해졌다. 그녀는 지구상에서 살고 있던 오래된 라이라인 영혼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그녀의 유전자가 들어오는 영혼이 보다 높이 진화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임신시킨 수단(방법)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그 특별한 영체의 탄생을 돕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그녀가 동의하여 임마누엘의 영혼은 지구로 오기로 결정을 내리고 그녀의 몸으로 들어왔다. 마리아는 요셉이라는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그 특별한 수태(impregnation)에 대해서 요셉은 펄펄 뛰면서 관련되지 않고 싶어 했다. 그는 마리아를 떠남으로써 결혼 계획을 취소하려고 했다.
요셉의 마음을 이해한 가브리엘은 그에게 가서 그 일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했다. 또한 지구를 다스리는 하나님이 그 일을 지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요셉은 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진정을 했고, 마리아와 결혼하는 자신의 계획을 진행시켰다. 임마누엘은 말구유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경전이 말하고 있듯이 여관에는 정말로 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임마누엘은 삶의 기간 내내 자신의 진정한 아버지 가브리엘을 알고 있었다. 그가 여러 차례 임마누엘을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신이 아니라 당시에 지구를 다스리고 있던 플레이아데스 영적 지도자들의 지시를 받아 자신을 낳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플레이아데스인들의 지식은 신의 것이었으나 그들은 단순히 관찰하는 쪽을 택했다. 왜냐하면 이제 지구인들이 스스로를 신뢰하는 것을 배울 때이며 또한 창조와의 영적 연관성을 발견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지구상에는 더 이상 신들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임마누엘이 그것을 설명하고자 노력했지만 인간들은 신이라는 존재에 의해 다스려지는 데 익숙했고,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생각은 천천히 만들어질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달력으로 임마누엘의 진짜 생일은 2월 3일이지 12월 25일이 아니다. 임마누엘의 특별한 재능은 미래를 예견하는 것이었다. 그는 미래에 자신의 가르침이 어떻게 될 것인지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깨닫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 우리와 똑같이 피와 살로 이루어진 한 천상의 자손에게서 태어났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신(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가르침은 창조와 모든 인간들의 한 부분으로서 영원한 영혼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인간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신의 말씀과 어떻게 연결시킬지 알고 있었다. 인간은 여전히 자신을 돌보아 주는 신의 존재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즉 인간은 아직 스스로를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들에게 창조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그전에 미리 많은 삶의 교훈을 가르쳐 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래에 어떤 꼴이 될지를 안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삶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그의 말들은 지구상의 모든 시대에 걸쳐 살아남게 될 진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진실한 가르침은 미래에 다시 한 번 나타날 것이며, 인간들을 평화와 번영의 시대로 이끌 영적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 역할을 할 것이었다.
임마누엘은13세 정도의 어린 나이에 인도로 가서 공부를 시작했다. 거기에서 그는 명상을 수련했고, 당시의 위대한 스승들로부터 삶에 대해 배웠다. 동양의 지식은 별들에서 온 하늘의 아들들과 딸들이 지구상에 살고 있었던 아틀란티스 시대 이래로 전해져 내려온 것이었다. 여러 번에 걸쳐 그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방문을 받았다. 아버지 가브리엘은 그를 영능력으로 안내하고 그 활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그 이후 삶을 사는 동안 그것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는 미래의 일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자신에게 없었다. 그는 인간으로 태어나 살면서 자신의 사명을 다 할 것이었다. 자신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미래를 내다보고 자신의 운명을 알도록 해 주었다. 그는 한 인간으로서 115세에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육체는 아주 늙겠지만 자신의 영혼은 좌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가올 십자가형(Crucifixion)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육체적 고통만 초래할 뿐이며, 그것은 자신의 영능력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임무는 끝나는 것이었다. 그에게 쏟아진 모든 증오는 그를 자신의 길에서 끌어내지 못했다. 진실이 육체의 고통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고문을 당하고 파멸할 수도 있지만, 고통은 지나가고 진실과 그의 영혼은 상처받을 수 없는 것이므로.
임마누엘의 글
나는 임마누엘이 자신의 생애 중에 썼을지도 모르는 가르침이 있는지에 관심이 있었고, 플레이아데스인들은 이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기독교인으로 자라기 때문에, 기독교의 마태, 마가복음과 신약이 어떻게 중심이 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어째서 임마누엘 자신이 쓴 오리지널 저서가 하나도 없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가 쓴 원전이 있었다면 그의 진정한 말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빌리도 이와 같은 질문을 플레이아데스인들에게 했었다. 그들은 임마누엘 당시에는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귀했기 때문에 자신의 가르침을 써 놓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고 빌리에게 말했다. 그는 그것을 십자가형을 받은 후에, 어려서 영혼의 공부를 했고 나중에는 길고 윤택한 삶을 누렸던 인도로 되돌아가면 하려고 계획했었다. 당시 그의 가르침을 기록한 사람은 유다 이스카리옷(Judas Iscariot) 이었다. 유다는 임마누엘의 제자이자 훌륭한 친구였으며,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그를 배신한 사람이 아니었다.
플레이아데스인들은 그 가르침이 임마누엘에게 전해진 것임을 명백히 하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자신의 플레이아데스인 아버지 가브리엘에게서, 그리고 어린 시절 인도에서 스승으로부터 스스로 배웠기 때문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기록되어 미래에 대비, 안전한 장소에 묻혀 있었다.
그 가르침은 그의 기록관(scribe)이었던 유다 이스카리옷이 기록하고, 그의 아들 요셉(인도에서 낳은 아들 가운데 맏이)이 추가로 기록하여 오랜 세월을 이어갔다. 진리가 후세들을 위해 긴 세월을 견딜 수 있게 한 것이다. 플레이아데스인들은 그 기록들이 미래에 발견되어 지구 인류가 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임마뉴엘은 미래의 2천 년대까지도 인간들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여, 또 다른 2백 년이 더 지나서야 진리의 밀알이 영양분 있는 토양을 발견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유다는 배신자가 아니었다
유다 아스카리옷은 임마누엘의 배신자가 아니었다. 유다의 기록 하나가 도난을 당했다. 바리새파 사람으로 유다 이하리옷(Juda Ihariot)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그것을 임마누엘에게 불리한 증거로 사용토록 하기 위해 훔친 것이었다. 그는 유다 이스카리옷의 가방에서 몰래 이 기록을 빼내 임마누엘을 노리고 있던 서기장들과 바리새파인들에게 은 70냥을 받고 팔았다. 임마누엘을 신성 모독(blasphemy) 죄로 고소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그것을 나중에 새로 한 번 더 써서 세월을 제대로 견딜 수 있도록 보관해야 했었다.
유다 이하리옷이라는 자의 아비가 임마누엘을 박해한 자였는데, 자기 아들의 죄를 숨기고 집안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사람들에게 임마누엘의 기록관 유다 이스카리옷이 배신자라고 떠벌렸던 것이다. 그의 권력과 사회적 위치 때문에 그의 말을 사람들이 믿은 것이다. 그것은 서기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잘 된 일이었다. 이제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 가운에 한 사람이 그를 배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했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추종자들이 그를 배신하고 팔아넘긴다면, 어떻게 그의 교훈이 진실일 수 있겠는가 하고 모두가 회의를 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도기장이의 피 밭에서 목을 스스로 매단 것은 바리새파 스므온의 아들 유다 이하리옷이었다. 임마누엘과 함께 인도로 여행하면서 기록관 노릇을 한 친구이자 제자인 유다 이스카리옷이 아니었던 것이다.
십자가 처형
임마누엘은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앞에 섰다. 빌라도는 그에게 판결을 내리고 싶지 않아서 그의 피를 요구하며 고함지르는 백성들에게 떠넘겼다. 그는 살인자 두 명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었다. 군중들이 악을 써 대는 속에서 그는 심하게 매질을 당했다. 갈비뼈 대부분이 부러졌고, 그는 간신히 서 있을 뿐이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 힘조차 없어 시몬(Simon)이라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골고다(Golgotha)라고 불리는 장소에서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허공에 세워졌다. 십자가에 사람을 못 박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저 묶는 것이 전례였던 것이다. 그러나 군중과 로마 군인들은 고위 성직자들의 선동을 받아 광란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임마누엘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 심한 폭풍이 시작되어 하늘을 까맣게 뒤덮는 상태가 세 시간 지속되었다. 폭풍이 끝날 무렵 그의 머리가 갑자기 앞으로 떨어지면서 그는 혼수상태(coma)에 빠져들었다. 군인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살아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창으로 넓적다리를 찔러 보고 물과 섞인 피가 흘러나오자, 군인은 임마누엘의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군인은 임마누엘이 죽었다고 외쳤다.
군중 속에 아리마대에서 온 요셉(Josheph of Arimathea)이 있었는데 그는 임마누엘의 추종자였다. 요셉은 그가 죽지 않았고, 단지 많은 뼈가 부러지고 심하게 맞았기 때문에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임마누엘은 영혼에 있어서는 강했지만, 육체의 훼손은 그도 감당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요셉은 본디오 빌라도로부터 임마누엘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묻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는 인도에서 온 임마누엘의 친구들 몇이 거기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위해 만들어 놓은 무덤으로 임마누엘을 데리고 갔다. 그것은 비밀 출입구를 따로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인도에서 온 친구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무덤 입구를 지키던 군인들의 눈에 띄지 않은 채 출입할 수 있었다. 임마누엘의 건강이 다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는 데 사흘이 걸렸다. 그는 인도에서 온 친구들의 적절한 간호를 받았는데, 그들은 특별한 기름과 연고(salve)들을 가지고 있었다.
임마누엘이 뒤에 나 있는 비밀 출입구를 통해 무덤을 빠져나간 뒤, 공중에서 커다랗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밝은 빛 하나가 나타났다. 그 안에서 그의 플레이아데스인 아버지 가브리엘이 나왔다. 그는 군인들을 잠재워 놓고, 출입구를 막고 있던 커다란 바위를 옆으로 굴려 임마누엘의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가 무덤 속으로 들어가서 그가 사라진 것을 보도록 했다. 그들은 가브리엘의 지시를 받고 시내로 들어가 제자들에게 임마누엘이 회복되어 일어났다는 것과 갈릴리로 가는 노상에서 그를 만나도록 하되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말했다.
임마누엘은 제자들 앞에 두 번 더 나타났는데, 한 번은 그들이 '마지막 만찬(the Last Supper)'을 갖기 위해 며칠 전에 모였던 방에 있을 때였고, 다른 한 번은 갈릴리로 가는 길에서였다. 그리고 그는 자취를 감추고 아버지 가브리엘에 의해 시리아에서 내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채 다마색, 즉 다마스쿠스(Damascus)에서 삼 년을 살았다.
임마누엘과 사울
그가 동생 토마스(Thomas), 즉 도마와 어머니를 다시 만난 것이 그때였다. 그의 동생은 사울(Saul)에게 그의 추종자들이 당하고 있는 참혹한 일을 전해주었다. 임마누엘은 그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했다. 사울은 나중에 폴(Paul), 즉 바울로 알려지게 된 자로서 기독교 형성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살아남아서 신약을 만드는 임마누엘의 가르침은 그 나름대로 이해한 부분이다.
도마는 사울이 아주 악랄한 적이 되어 누구든지 임마누엘을 신봉하는 자에게는 협박하고 다닌다고 알려 주었다. 그는 이웃나라들의 회당(synagogue)에까지 편지를 보내 임마누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적발하라고 요구,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압송해서 재판에 넘겼다. 임마누엘은 사울을 손보기로 결심하고 계획을 짰다. 그는 사울이 다마색으로 오고 있는 것을 알고 길에서 그와 마주쳐 잊을 수 없는 한 수를 가르쳐 주기로 계획했다. 사울은 그가 죽은 것으로 믿고 있었으므로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할 것이었다.
임마누엘은 몇 가지 비밀스러운 화약, 연고, 그리고 액체를 준비하여 시내를 떠나 길가에 숨어서 사울을 기다렸다. 밤이 되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길을 따라오는 가운데 사울을 볼 수 있었다. 임마누엘은 특별히 준비한 것에 불을 붙였다. 그것은 엄청나게 밝은 불빛과 소음을 내면서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고 혼을 빼놓았다. 연기가 길 위의 사람들을 감싸자 임마누엘은 사울이 들을 수 있도록 고함을 쳤다. 임마누엘의 목소리를 듣자 사울은 유령의 소리라고 생각하여 겁에 바싹 질렸다. 임마누엘은 연기 속에서 말하면서 사울이 시내로 들어가 자신의 제자에게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다마스쿠스로 향했다.
사울과 일행은 자신들이 유령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고, 두려움에 질려 꼼짝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임마누엘이 무덤에서 나와 그들에게 말할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겁에 질리고 혼돈에 빠진 채 그들은 다마스쿠스로 여행을 계속했다. 그리고 임마누엘의 제자 한 사람이 사울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전해 주었다. 그 바람에 그는 서서히 이해를 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겁에 질려 정신이 약간 이상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별로 많이 알아듣지 못했다.
사울은 당시 고위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죽으면 부활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환생(reincarnation)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사울은 임마누엘의 목소리를 듣고 빛을 보았을 때 임마누엘이 부활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자신의 가르침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임마누엘이 죽음에서 부활했다고 하는 생각의 시발이다. 사울은 임마누엘이 결코 죽은 적이 없고, 단지 자신을 놀린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임마누엘과 동생 도마, 유다 이스카리옷,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는 인도로 긴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하는 동안에도 그는 많은 나라에서 가르침을 전파했으며, 연설의 내용이 너무 혁신적인 바람에 종종 박해를 피해 달아나야 하기도 했다. 인도로의 여행은 몇 년이나 걸렸고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오늘날의 서파키스탄, 서 히말라야 산맥의 마지막 발꿈치 근처에 있는 나라에서 그의 모친은 병이 심해 죽었다. 임마누엘의 나이 38세 정도의 일이다. 그녀는 오늘날 마리(Mari)라 불리는 파키스탄의 작은 마을에 묻혔다. 모친을 잃은 뒤 임마누엘은 인도 북부를 가로지르는 카슈미르 지역을 여행하면서 가르침을 전파하는 일을 계속했다.
45세 정도가 되었을 때, 그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하여 여러 명의 아이들을 낳았다. 다른 평범한 가장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정착해서 가족을 부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인도 최북단에 위치한 슈리나가르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그는 많은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가르침을 전파했다. 그리고 그는 약 115세의 나이로 자연사(natural death) 하여 시외의 잘 알려지지 않은 무덤에 묻혔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90세 정도에 죽어서 슈리나가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묻혔다. 임마누엘의 맏아들 요셉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유다의 뒤를 이어 기록하다가 아버지가 돌아 간 다음에 인도를 떠났다. 3년 동안의 여행 끝에 그는 예루살렘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다.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적은 원본 두루마리들을 가지고 와서 임마누엘이 들어가 있었던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 속에 감추었다. 그는 거기가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탈무드 임마누엘(The Talmud of Jmmanuel, 임마누엘의 가르침)
1963년 플레이아데스인들은 라시드라는 이름을 가진 그리스 가톨릭 정교의 사제를 두루마리가 묻혀 있는 장소로 이끌었다. 그 두루마리는 송진 속에 넣어져서 임마누엘이 젊었을 때 아버지 가브리엘로부터 받은 수정처럼 투명한 상자에 들어 있었다. 고대 아랍어로 씌어진 두루마리들은 아들 요셉이 감추어 두었던 납작한 바위 밑에서 발견되었다.
라시드는 그 두루마리의 내용을 아랍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사본을 만들어 두었다. 그는 그것을 세상에 공표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루마리들은 길었고, 무려 120장(chpter)이 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스위스에 있는 빌리에게는 그 가운에 36장만을 그때까지 보내 주었을 뿐이었다.
바그다드에서 가족과 숨어 있던 그 신부(당시에는 그것 때문에 신부직을 떠나 있었고 결혼도 했다)는 기독교 세력과 유태 세력이 보낸 자객들의 미행을 당하고 있었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 레바논으로 달아나서 그는 가족과 함께 난민 수용소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가족이 유태 군인들에게 발견되는 바람에 수용소는 파괴되어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살육되고 말았다. 가족과 함께 간신히 학살을 피한 그는 야밤에 도주를 했는데, 그때 두루마리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직후 신부와 그의 가족은 한 테러리스트가 갈기는 증오와 분노의 기관총탄 세례를 받아 살해되고 말았다. 그래서 오리지널 두루마리의 운명은 밝혀지지 않은 채 그가 번역한 36장만 세상에 남아 있게 되었다. 그들 36장은 빌리에 의해 정확한 독일어 성서체로 재번역된 다음 다시 영어로 번역되어 오늘날 『탈무드 임마누엘(The Talmud of Jmmanuel)』이라는 책으로 나와 있다.
미국의 와일드 플라우어 출판사가 출판한 그 책은 『천상의 가르침(Celestial Teachings)』이라고 하는 동반 책자를 가지고 있다. 그 책은 제임즈 디어도르프(James Deardorff) 박사라는 기독교 역사학자가 썼는데, 『탈무드 임마누엘』의 가치를 검증하기 위한 6년 동안의 연구 결과이다. (한글판 『탈무드 임마누엘』은 1994년 초 '홍진기획'에서 와일드 플라우어 프레스와 계약을 맺고 독한 대역으로 출판하였다)
주기도문
서양의 학교나 교회에서는 대부분 주기도문(the Lords Prayer)을 배운다. 그런데 『탈무드 임마누엘』에서는 그것을 약간 다른 방식으로 읽는다. 임마누엘은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속에 있는 영혼과 창조의 연결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가 가르치고자 한 명상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을 도와 달라고 신에게 부탁하는 기도라고 생각했다. 잘못 이해된 채로, 주기도문은 『탈무드 임마누엘』에 기록되어 있는 형태를 취해 씌어지게 되었다. 임마누엘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그 내용은 실은 '나의 영혼이여'라고 하는 제목의 명상법이다. 여기 그 원형을 싣는다. 이것은 임마누엘의 원기록인 『탈무드 임마누엘』에서 취한 것이다(와일드 플라우어 프레스와 흥진기획의 허락을 얻어 게재. 『탈무드 임마누엘』 p6-45).
<나의 영혼이여 - 주기도문의 원형>
“나의 영혼이여 그대는 전능합니다.
그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빕니다.
내 안에 그대의 왕국을 스스로 구현하도록 하소서.
그대의 능력이 내 안과 지구 위에서, 그리고 하늘 안에서 펼쳐지도록 하소서.
오늘 하루의 양식을 주셔서 나로 하여금 내 잘못을 인식하고 진리를 깨닫게 하소서.
유혹과 혼란으로 이끌지 말고 나를 잘못으로부터 구원하소서.
이는 내 안의 왕국과 능력과 지식이 영원히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나는 동의합니다)”
[출처] 제11장 임마누엘 이야기|작성자 그린파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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