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6남매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 하나와 언니 둘, 밑으로 여동생 둘인 셋째딸. 아버지는 동경제국대학 법학부를 나온 엘리트였고 어머니는 엄한 가정교육을 받은 사대부 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우리 집과 바로 이웃한 학교의 교감 선생님이셨고 어머니는 정갈한 옷매무새만큼이나 집 안팎을 꼼꼼하게 챙기시던 분이었다.
뒷날의 내 삶이 워낙 모질고 팍팍해서인지는 몰라도 나의 유년기는 아주 화사한 봄볕같이 온화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 풍족한 집안 형편은 아니었음에도 우리 집에서는 웃음소리가 그친 날이 없었다.
아버지는 가슴이 아주 따뜻한 분이셨던 걸로 기억된다. 자식들은 말 할 것도 없거니와 낯선 사람에게도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 무엇보다도 내가 아버지를 존경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로는 보기 힘든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었다. 두 분은 내가 보기에도 무척이나 금실이 좋으셨는데 그건 아마도 아버지의 궁핍하기짝이 없었던 성장기와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아버지에겐 형님이신 큰아버지와 여동생인 고모 한 분이 계셨는데 6. 25때 인민군조차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궁벽한 산골 출신이었다. 가난한 산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억척같이 살아오느라 아버지의 체구는 아주 자그마하고 마른 체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버지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형님으로부터 책가방을 뺏기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형님이 별로 공부에 관심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농사일에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판국에 동생 녀석이 한가하게 학교나 다닌다는 게 영 달갑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형님의 눈을 피해 도망치듯 학교엘 가곤 했는데 체구도 작은 아버지가 고갯길 이십 리를 걸어 학교에 도착하면 이미 1, 2교시 수업은 끝나 있었던 적이 많았다고 한다.
더구나 겨울에 눈이라도 오는 날엔 그 먼 길을 아버지 혼자 보낼 수가 없어 할아버지께 당그래로 눈길을 치우면서 등굣길을 터 주셨고, 그렇게 학교에 도착해보면 하교시간이 되곤 했단다. 그러면 그 때마다 아버지의 담인선생님께선 그 날 공부한 내용을 다시 가르쳐 주곤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아직 어려서 그랬는지 동경 유학생활 동안의 굶주림과 고학에 대해서는 별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녁을 먹고 나서 우연히 옛날 얘기가 나오면 아버진 눈가에 아련한 회상의 기운을 머금고서 그 어린 시절 당신이 겪었던 일을 마치 남의 일처럼 자식들에게 들려주곤 하셨다.
아버지가 세상 사람 누구에게나 따뜻한 마음을 내보인 것은 어릴 때부터 그렇게 억척스런 삶을 혼자서 감당하면서 생긴 외로움 때문이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많이 외롭고 고달팠으리라. 그래서 자식들한테 큰소리 한 번, 회초리 한 번 들지 않았고 세상 뜨시는 순간까지도 아무 말씀이 없었으리라.
여러 형제들 중 난 좀 별난 아이로 자랐다고 한다. 오빠나 언니들과 놀다가도 뭔가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 있으면 정신없이 푹 빠져드는 버릇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은 아침에 김꽃이 핀 걸 망연히 보고 있다가 그만 저물녘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왔다고도 하고, 뒷산 언덕빼기에서 개미들이 집을 짓고 있는 걸 보다가 등을 밝히고 찾아나선 아버지의 등에 업혀 잠이 든 채 돌아오기도 했다 한다.
우리 가족 모두를 품에다 가두셨다. 그리고는 자식들이 어릴 적부터 각자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골라서 할 수 있도록 배려했던 모양이다. 발이 빨랐던 큰언니한테는 달리기를, 성격이 유난히 침착하지 못한 딸 많은 집 외아들인 오빠한테는 붓글씨를, 무용을 꽤 잘하던 작은 언니한테는 무용을 가르쳤고 아직 뭘 잘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던 나에게 미스코리아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흉터 없이 키워야 한다는 말씀을 유난히 많이 하셨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편으론 어이없는 자식 사랑이었지만 그런 것들도 나에게는 몇 안 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근무하던 학교에 골목을 하나 두고 있던 사택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집에는 아주 너른 마당이 있었고 울타리는 어른 키만한 탱자나무로 둘러쳐져 있었다.
아버지가 퇴근할 즈음이면 아이들은 대청마루에서 울타리 너머를 돋음발로 기웃거리며 귀가하는 아버지를 서로 목청껏 부르곤 했다. 그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던 어른들의 눈에는 도대체 아이들과 꽃밭의 꽃들이 분간되지 않아 보였으리라. 탱자나무에 탱자들이 알알이 열리는 가을이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부모님은 틈틈이 우리 남매들을 데리고 마당의 꽃밭을 일구곤 했는데 거기에는 사시사철 꽃이 없을 때가 없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각자 나무나 꽃을 하나씩 지정해 주었는데 나에게는 싸리나무를 골라주었다. 언젠가 싸리꽃이 피자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화단가에 쪼그리고 앉아사서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네 꽃이란다”
어릴 적 아버지가 준 싸리나무와 그 꼭대기에 매달린 꽃은 이후로도 나에게 있어 커다란 숙제였다. 잠시 꽃을 피우는 시간 외에는 늘상 푸르죽죽하더니 찬바람이 불면 저렇게도 불쌍하리만치 앙상해 보이는 저 나무를 아버지가 나에게 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미스코리아로 만들겠다던 셋째딸에게 왜 저런 나무가 어울릴 것이라 생각하셨는지......
아버지가 준 숙제를 푸는 데는 꼬박 25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지던 그 무렵, 내가 이혼을 하고서 고향을 떠나던 날에야 왜 아버지가 싸리나무와 그 꽃을 내게 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버지가 오래도록 살아 계셨다면 그렇게 많은 세월을 통해 그 숙제를 풀지 않아도 됐을 것을......
싸리나무는 버릴 게 없는 나무였다.
이른 봄 꽃이 피면 벌떼들이 꿀을 따서 싸리꿀을 만들고 나무 자체는 싸리비로, 바구니로 혹은 울타리로 유용하게 쓰인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고유의 윤기와 탄력을 잃으면 아궁이의 불쏘시개로 사용되다가 나중에는 재로 남아 논과 밭에 뿌려지기까지 모두 쓰여지는 것이다.
아아, 아버지는 그랬던 것 같다. 나도 싸리나무처럼 버릴 데 없는 정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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