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아침에 너무나 어이없게 고아가 되어 버린 우리 6남매는 할 수 없이 외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직 젖먹이 티를 벗지 못했던 막내동생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분이 입양했으므로 정확히는 5남매인 셈이다.
어머니는 세 번째로 음독을 할 때 아무래도 젖먹이 막내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막상 아버지의 뒤를 따르려고 마음을 다잡고 보니 막내가 얼마나 마음에 걸렸겠는가. 그래서 막내도 데려 가려고 했던 모양이나 다행히 막내동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얼마 있지 않아 은행의 지점장으로 있던 아버지의 친구분이 그 아이를 데려간 것이다.
“내 딸 없는 외손들 다 싫다.”
외할머니는 끅끅, 트럼을 하시며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하기야 줄줄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아이들을 모두 돌보기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사위는 물론이고 이미 딸까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 우리들을 보는 당신들의 마음이야 오죽했으랴.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그런 죄업을 자식 중의 누구라도 대속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그 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백마산에 있는 어떤 비구니 스님이 날 데리러 왔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닌 것 같았는데 어린 나의 눈엔 무슨 마귀할멈처럼 보였다.
그분은 몇 차례나 날 데리러 왔는데 그 때마다 나는 형제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두려움에 무작정 울기 시작했다. 아마도 생전 처음으로 느껴 보는 공포였을 것이다. 부모님을 졸지에 잃어버리고서도 느끼지 못했던 공포가 나를 그렇게 사로잡았던 모양이었다. 막무가내로 울어대는 날 차마 보낼 수 없었던지 그 스님은 이후로 다시 발걸음을 하지 않았고 나는 형제들과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나마 내가 큰 탈 없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외조부모의 따뜻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모 없이 자라는 아이에게는 언제나 그늘이 얹혀 있기 마련인가 보았다. 나는 말이 없는 아이로 자랐고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다닌 탓에 허리와 등이 구부정한 약골이 되어 갔다.
부모님의 사랑 속에 과잉보호를 받았던 탓인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부터는 유난히 몸이 약했다. 게다가 입이 짧아 음식을 잘 먹을 수가 없었다. 교장 선생님이었던 외할아버지가 갖은 애를 쓰며 나를 보살폈지만 나는 뭘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늦가을의 낙엽처럼 바싹 말라가던 나는 열한 살 때 학교에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었다.
1년을 꼬박 입원해 있는 동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형제 이외의 누구도 병실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죽을 게 뻔한데 죽고나면 눈에 밟혀 병원엘 갈 수가 없었다고들 했다. 오빠만이 밤이면 병실에서 간호를 해 주었고, 친척들만 만나면 동생이 죽어 간다며 한없이 울었다고 한다.
오빠는 여러 동생들 중에 유난히 날 귀여워했었는데 아버지, 어머니만큼이나 오빠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가을 산에 알밤을 따러 갈 때도 오빤 언제나 날 업고 다녔었고, 겨울 논밭에서 연날리기를 할 때도 언제나 날 업고 다니며 오빠의 바지 주머니에다 내 시린 발을 넣어 주곤 했었다.
나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는 그렇게 우울한 그늘 속에서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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