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영주/누구나 아름다운 영혼을 지니고 있다

41. 결혼과 이혼(2)

기른장 2021. 3. 31. 21:50

시부모님은 아주 훌륭하고 좋으신 분이었다. 시아버님은 판사 출신의 변호사였는데 평생을 청렴하게 사셨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그 월급으로는 아홉 남매를 도저히 먹여 살릴 수가 없었다는 얘길 자주 들려주곤 했다.

 

아이들을 제대로 입힐 수가 없어 군용담요를 사다가 옷을 만들어 입히곤 했다는 얘기며, 소송이 걸린 당사자로부터는 생선 한 마리 받질 않았다는 것이었다. 너무 가난해 공직생활을 포기하고 변호사 개업을 하셨던 분이다.

 

게다가 당시로는 드물게도 시어머니께 무척이나 다정다감하게 대했다. 언제나 시어머니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고 자식들에게도 어머니를 존경하도록 가르쳤다. 시어머니는 그런 시아버지와 잘 어울리는 분이었다. 웬만한 일이라도 시아버님과 관계되는 일만 아니라면 남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는 분이었다. 셈을 철저히 하시는 분이 아니라서 아무리 귀한 물건이라도 남이 원하면 주는 그런 분이었다.

 

그런 시부모님의 영향 탓이었는지, 시댁 식구들은 부모님의 말씀이라면 누구 하나 딴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의 남편도 에외는 아니었다. 언제나 부모님의 뜻을 따랐고 설사 부모님의 결정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일단은 그대로 따르는 사람이었다.

 

시아버님은 늘 바빴다. 어려운 사람들에겐 무보수로 변론을 맡아 주었고 늘 밤 늦게까지 변론 원고를 작성하느라 다정한 아버지나 할아버지로서 보낼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분이 가족들과 얘기 몇 마디라도 나눌 수 있는 틈은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은 꽤 길었는데 두세 시간씩 반주를 겸해 식사를 하곤 했다.

 

내가 장춘사에서 꿈 같은 두 달의 간의 요양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에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그 동안 먹어 왔던 약을 더 이상 먹어 왔던 약을 더 이상 먹지 않았다는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집 안의 살림은 모두 시어머니가 맡아서 했는데 그러나 그즈음에 시어머니는 커다란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계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시아버지의 높은 신뢰도 때문에 계를 조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복잡한 셈에는 서투른 대신 마음씨 좋기로 소문난 시어머니는 곧 엄청난 적자에 허덕여야 했다.

 

그러다 보니 더 높은 이자를 주겠다며 새로운 계를 만들어야 했고 또 계를 타고 돈을 안 내는 사람의 부분까지 감당하느라 더욱 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에 있던 내가 만류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버렸다. 식구들의 갖은 핀잔을 들어가며 시아버님한테까지 얘길 해 보았지만 내 얘기가 반영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하게 풀려 가고 있었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시어머님은 가족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는데 나에게 비난의 화살이 꽂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요령부득인 것은 왜 하필 나에게 그런 비난이 쏠렸는가 하는 점이다. 시댁의 식구들이나 친척들은 내가 친정으로 재산을 빼돌린 탓이라느니, 도박을 크게 하고 다녀 탕진했다느니 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있는 자리에서 그런 것은 아니라서 내가 뭐라고 말을 할 형편은 아니었다. 다만 주위에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얘기를 귀동냥하며 나는 그저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새삼스레 내 가슴을 짓누르는 날이 계속되었다.

 

시어머니가 그 지경이 되기까지 시댁 식구 중 누구 하나도 바른 소리 한 번 하는 사람이 없다가 일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자 다들 서로 탓하고 헐뜯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돈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리던 시어머니였다. 그 광경을 보다 못한 내가 한마디했다.

 

“무슨 일이든지 잘못되기 이전에 가족들끼리는 많은 얘길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잘못되어 버렸을 때 가족들은 서로 위로하며 뭉쳐야만 합니다. 지금 어머님은 남들에게 시달리는 고통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충분히 괴로워요. 그러니 이제 우리끼리 이러는 것은 그만뒀으면 합니다.”

 

식구들은 네가 뭔데 감히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정말 그랬다. 내가 알기로 그 당시의 시어머님이 가장 바랐던 것은 잘잘못을 따지는 게 아니라 따뜻한 위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그런 일이 있고서 닷새쯤 지났을 때였다. 난데없이 시아버님이 남편과 나를 안방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편지 한 장을 내밀면서 나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에미야! 내, 널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니가 이럴 수가 있느냐. 돈이 필요하면 애비한테 달라고 하면 될 것이지 어떻게 네 시어미를 속이는 게야? 늙은 할망구가 눈이 어둡다고 네 맘대로 주무르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시아버님의 얼굴은 금방 벌겋게 달아올랐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시댁 친구들이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바를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면전에서, 그것도 시아버님에게서 직접 듣기는 처음이었다.

 

편지는 법대를 졸업하고 고시를 준비하고 있던 시동생에게서 온 것이었다.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형수한테 십원짜리 하나도 맡기지 말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나는 기가 막혔다.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이 곳의 일을 그리도 소상히 알고 있는지, 또 변호사라는 시아버님이 어떻게 달랑 그 편지 한 장만을 믿고 나를 이리도 나무랄 수 있는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그렇잖아도 근거 없이 떠도는 소문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한 번 해명은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나로서는 이렇게 남편이 있는 데서 그 기회가 주어진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나 시아버님의 말씀이 끝나기를 기다려 내가 마음을 다잡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남편이 먼저 고개를 숙이며 쏟아놓는 말을 들으며 나는 까무라칠 뻔했다.

 

“다음부터는 이 사람이 다시 그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게 어떤 건지 나는 그 때 처음 알았다. 세상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최소한 내 남편만큼은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믿음이 일순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가슴을 뚫고 찬바람이 횡하니 지나가고 있었다.

 

다음부터 그러지 않도록 하겠다라니? 도대체 누가, 누구를, 무엇을 그러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인가. 내가 시어머니를 속이고 돈을 빼내는 바람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정말 믿고 있는 건가, 이 사람은......?

 

어떻게 그 방을 나섰는지 나도 모른다. 다만 머릿속에서 그 사람이 고개를 숙이며 뱉은 말들만 맴을 돌고 있었다. 아마 내가 그 나이가 되도록 그렇게 모질게 입술을 깨문 적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살아 버린 날보다 살아야 할 날이 훨씬 많다고 생각하는 나로선 이 사람한테 정말 ‘이 이상’ 내 인생을 맡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부터 그러지 않도록 하겠다’는 그 한 마디에 나는 이혼을 결심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와 같이 흥하고 같이 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부부뿐이다. 내가 망하더라도 부모는 그대로 건재할 수 있고 형제 또한 건재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망하면 정말 같이 망할 수밖에 없는 건 부부밖에 없다는 걸 그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의 남편이었던 사람에게 고마운 점은 있다. 그 사람이 부자였기 때문에 나는 내 젊은 날의 10년을 최소한 돈 때문에 비굴하게 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이혼 후 아이들과 힘겹게 홀로서기를 하면서도 단 한 번도 돈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던 것은 그 시절 풍족함 속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귀한 것인지 알아 버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