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남편은 내가 중학생일 때 친구들과 같이 공부를 배우던 가정교사 선생님의 친구였다. 당시에 그들은 대학생이었고 우린 중3 학생이었으니 그냥 어른으로만 보였었다. 아무런 이성적인 감정을 느낄 수 없었던 사이였고 그저 재롱부리는 아이와 어른과의 만남 정도였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답지 않게 소탈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친구간에 우정도 두터웠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타입의 남자였다.
그는 친구가 바쁜 일이 있을 때면 대신 우리의 공부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는 당시에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가 너무너무 편했다. 먼 곳에 나가 있던 오빠 같았고, 아주 가끔은 희미한 아버지의 그림자를 보는 것도 같았다. 그냥 그렇게 편하다 보니 그와 나는 매일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런 만남이 내가 여고생이 되면서부터 그에게는 좀 다르게 느껴졌던 것 같다.
내가 스무 한 살이 되던 해 1월에 나는 그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솔직히 연애 감정이 어땠는지, 그와의 결혼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는, 그야말로 엉겁결에 그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돌이켜보면 왜 내가 세상 물정에 그렇게 어두웠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왜 그렇게 결혼을 서둘렀는지..... 아마도 일찍 고아가 된 몸으로 나름대로 힘들게 세상에 부대끼면서 살아온 탓에 살가운 정이 그리웠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품과도 같은 그런 보살핌과 정이 그리웠을지도..... 만약 그랬다면, 나의 환상은 아주 일찍 깨어져 버린 셈이다. 부부간의 애정이란 게 부모와 자식간의 애정과는 아주 다르다면 말이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부터 그는 너무 달라졌다. 그렇게 편하리라고 기대했던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불편하고 무서운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무엇 때문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자상하게 나를 돌봐 주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정말 하루 아침에......
그는 다른 사람에게는 여전히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친구들도 변함없이 그를 따랐고 누구에게도 섭섭하게 대하는 걸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와의 관계에서는 참으로 달랐다. 그에게서 나타난 첫 번째 변화는 말이 거의 없다는 거였다. 시댁에 들어가 있었던 탓에 다른 이들의 눈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지만 그는 단 두 사람이 있는 공간에서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마치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남자로서의 권위를 세우는 유일한 방법인 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중에 따로 살림을 차리면서는 더욱 심해졌지만 그는 신혼초부터 줄창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는 험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말도 거의 하지 않으면서 눈에 불을 켜고 나를 바라보는 사람과 한 방에서 잠을 자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거의 미치게 만들었다. 그가 그렇게 순식간에 변하는 것을 본 뒤로 나는 지금도 사람이 하루 아침에 다른 무엇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이런 일이 있었다. 결혼한 지 두어 달 지났을 때였나? 봄비가 정말 보기 좋게 내리고 있던 저녁 무렵이었다. 마침 시부모님은 출타 중이었고 다른 식구들도 집을 비운 상태였다.
하루 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는 시집살림에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되어 있던 나는 그 봄비 소리에 소름이 오싹 돋을 만큼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원체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내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그와 함께 나들이를 할 수도 있겠다는 마음에서였다. 결혼하기 전에는 비만 오면 그와 함께 방죽에 올라 신발이 다 젖도록 돌아다니는 것이 일과였을 정도였으니까. 또 시집살이하는 새댁이 남편의 도움 없이 외출을 한다는 것은 상상 밖의 일이기도 했으니까.
“형님! 비오는데 밖에 나가보지 않을래요? 지금 방죽에 나가면 물안개가 지천으로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을 텐데......”
나는 결혼을 한 뒤에도 단 둘이 있을 때면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호칭을 그냥 쓰곤 했는데 그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버럭 고함부터 질렀다.
“너, 지금 미쳤니?”
나는 지금도 그 때 그의 표정을 선연히 기억하고 있다. 입술을 깨물며 너무 한심하다는 듯이, 아니 그런 말을 하는 내 모습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는 듯이, 그의 눈에서는 새파란 불똥이 튀고 있었던 것이다. 미쳤느냐는 그의 되물음도 가슴을 아프게 쳤지만 나는 그의 잡아먹을 듯이 이글거리는 눈빛에 숨이 턱턱 막혔었다. 왜 그랬을까, 그는. 왜 나만 보면 눈에 그렇게 불꽃을 피워 올렸을까......
그 때부터 그와 나 사이에는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사람의 어깨엔 더 이상 내가 기댈 수 있는 자리라고는 없어 보였던 것이다.
스물 두 살의 나이에 나는 첫딸 민정이를 나았다. 엄마가 됐다는 사실이, 힘들 때마다 딸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나에게는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그렇게 힘든 시기에 아이마저 없었다면 난 도대체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그러나 부모가 없이 자란 가난한 집 딸의 설움은 아이가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시집 식구들 사이에서 나는 먼지 한알보다도 더 작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의 눈에 나는 언제나 중학교 3학년이었고 따라서 주부의 자리가 나에겐 없었다. 심지어는 시댁에서 분가를 해서 나갈 때에도 그랬다. 아직 살림을 할 수 있을 만큼 되지 않았다며 가정부를 딸려서 살림을 내 주셨고 언제나 나는 아이 이상의 대우를 기대할 수 없었다.
돈도 주는 만큼만 쓰면 되었고, 내 손으로 계획을 세워 가정을 꾸리는 일은 없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아침에 남편에게 얘기하면 언제나 해결이 되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가계부를 쓴다거나 절약해서 살림을 불릴 계획을 세운다거나 하는 보통 주부들의 일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남편은 술을 아주 좋아했고 주벽이 있었다. 일년 365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을 마시는 사람이었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 초인종을 누르면 대번 문을 열어야 했다. 그가 두 번씩이나 초인종을 눌렀다가는 대번에 사단이 일어났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길 경우 나는 몹시 시달림을 당해야 했기에 항상 긴장상태로 있어야 했다. 아무리 늦은 시간에도 나는 깊이 잠들 수가 없었다.
분가한 이후로 그는 모든 일에서 철저하게 나를 배제시켰다. 마주보고 이야기를 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고 자기의 것과 다른 가족의 것도 철저하게 구분해 놓았다. 심지어 오디오조차도 아이들과 내가 듣는 게 따로 있었고 그 사람의 것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아침식사는 안 하는 게 습관이 되었고 점심은 나가서 먹고 저녁은 부모님과 함께 하는 통에 결혼생활 10년 동안에 같이 식탁에서 마주해본 기억은 손꼽을 정도였다.
그렇게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나면서 나는 우울증을 보이기 시작했다. 산다는 게 이다지도 막막할 수가 있는지, 내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두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가끔 주위의 사람들이 내가 술을 먹고 비틀거리는 걸 봤다는 얘기를 해왔다.
“아니, 대낮부터 무슨 술을 그렇게 먹었어? 시집살이가 좀 고되더라도 그러면 쓰냐?
내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몇 번이나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을 하다가 나중에는 그만 지쳐 버렸다. 내가 그렇게 취한 것처럼 보인 것은 신경 정신과에서 조제해 주는 약을 계속 복용한 탓이었다.
그 약 탓에 나는 언제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지냈다. 눈동자는 풀어져 있었고 언니나 동생이 날 찾아오면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울컥 울음만 쏟아 내곤 했다. 모든 것이 나에게서 멀어져만 가는 듯한 안타까움에 나는 나날이 시들어갔다.
그렇게 견디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편을 잡고 사정을 했다. 이런 상태로 집에 있다가는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나는 지금 살아 있는 게 아닌 것 같다고, 그러니 나를 어디로든지 좀 보내 달라고 빌었다.
그런 일이 있고서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경남 함안의 장춘사라는 절로 휴양을 떠났다. 서른 해를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편안히 두 다리를 뻗고 누워보지 못했던 나에게 장춘사는 내 머리를 누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되어 주었다. 두 달을 그 곳에서 사는 동안 난 완벽하게 편안할 수 있었다.
몸이 약해 등산 한 번을 못해 본 나였기에 산 아래 마을을 구경한 것도 처음이었고, 비온 뒷날 구름바다를 볼 수 있었던 것도 그 곳에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광경은 쪽문 사이로 보이는 석양이었다. 온천지를 붉게 물들이는 그 노을을 보면서 나는 비로소 시들어가던 내 마음의 불씨를 조금씩 되살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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