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위자료 한 푼 받지 않고 이혼을 했다. 당시 시댁 형편이 좋지 않았던 것도 한 가지 이유였지만 위자료를 받으면 아이들을 시댁에 두고 와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겠다는 말을 들은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정색을 하며 말렸다.
“지금 마음이야 당연히 그렇겠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데리고 어떻게 살겠다는 거야?”
“지금 제 정신이니? 그 사람이야 또 새장가 가면 되겠지만 넌 어떡 할래? 좋은 사람이라도 생기면 너도 다시 살아 봐야지. 뭣하러 아이들을 위해서 창창한 네 인생을 희생하는 거냐구?”
그들에게는 마치 내가 아이들을 위해 희생할 것을 각오하는 사람처럼 비쳐졌던 모양이었다.
당시의 나는 두 아이를 제외한 내 인생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좀더 엄밀히 말하면 나는 아이들을 위해 남은 내 삶을 희생하겠다는 생각은 가지지 않았다. 다만 나를 위해서였다. 아이들이 내 곁에 없으면 내가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세상에 순수하고 전적인 희생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종교나 지극한 모성애를 극적으로 미화할 때 쓰일 뿐이다. 꼼꼼히 따져 보면 그런 희생에는 한결같이 내밀한 목적이나 바람이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자신에게 필요한 뭔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이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 내 아이들을 제외한 내 인생을 단 한 번도 생각할 수 없었다. 불면의 밤을 겨우 보내고 아침에 눈을 뜰 때도, 식은밥 한 그릇을 떠놓고 아침마다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은 것도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때때로 나는 오히려 나를 위해 아이들이 희생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아이들이 있기에 나는 생활을 계획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확실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를 위해서 아이들에게 맹목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단 한 번도 후회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루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가난했을 때 아이들을 더 이상 고생시키는 죄를 지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아이들을 아빠한테로 돌려보낼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고생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아이들까지 궁핍하게 살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너무 가난해서 도저히 너희들을 잘 먹이고 잘 입힐 수가 없단다. 그러니 어쩌겠니? 아빠한테 가서 살지 않으련?”
몇 번이나 목이 매이는 걸 참으면서 내가 그렇게 말을 꺼내자 두 딸은 울음을 터뜨리며 내 목을 잡고 매달리는 것이었다. 큰딸인 민정이는 그저 이렇게라도 엄마하고 같이 살겠다고, 그러니 제발 다시는 그런 말일랑 하지 말아 달라고 우는 것이었다. 그 날 나는 밥상머리에서 두 딸을 부여안고서 머릿속이 온통 먹먹해질 정도로 울었다. 그리고 그게 앞으로 내가 숱하게 겪어야 될 슬픔의 시작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후에도 두 아이들에게 드리워진 결손가정의 그늘은 쉽게 걷히지 않았다. 아이들이 점차 나이가 들면서 어쩌면 그 그늘은 더욱 짙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아이들은 언제나 엄마와 아빠랑 같이 한 집에서 살게 되기를 빌었다고 한다. 교회에 갈 때면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렸고 절에서는 부처님께 빌었다는 것이다.
이제 나의 두 딸은 결혼을 생각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 사람과 나는 여전히 남남이다. 아이들에게 에미로서 더 바랄 것은 없다. 이렇게 커온 것만 해도 대견스럽기 짝이 없으니 말이다. 다만 이제부터는 조금씩 마음에 드리워졌던 그늘을 벗어던지고 세상의 밝은 양지에서 제 뜻대로 살아 줬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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