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서는 오랫동안 인간 사후의 일에 대해 얘기해 왔다. 언젠가 있을 최후의 심판에서 각자가 지은 죄의 결과에 따라 천국와 지옥으로 갈리게 된다는 것과 한 번 정해진 심판에서 누구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가르침은 대표적인 예이다. 또 선지자들의 가르침이나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서 극락에 가는 것이 종교 행위의 최고선인 것처럼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이런 이분법적인 내세는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이,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과 지옥이 사람들로 하여금 현생에서 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경고로서 가능하다면 몰라도 심판의 결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만약 최후의 심판이 있고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앙의 유무에 따라서만 영생이 결정된다고 생각해 보자. 그건 신과 인간사이의 엄청난 노예 구조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영혼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신성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 되고 이승에서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오로지 신을 경배하는 것뿐이다. 일생 창조주에게 헌신해야 하고 개인의 의지는 모두 묻어 두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 온 모든 문명은 아무 가치 없다는 것이 되고 인간들이 꾸준히 가꾸어 온 모든 도덕률이나 정신문명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모든 가치나 지식이 한낱 헛수고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부처나 예수의 가르침은 그들이 살아 있던 당대에서는 거의 혁명적인 것이었다. 박애와 평등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가르침은 당시에는 거의 이단으로 취급당했고 심지어 예수는 인간으로서의 순탄한 일생을 마치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들의 가르침은 종교라는 형식 아래서 방법과 절차의 문제로 고착되고 말았다. 심지어는 지나친 형식주의로 흘러서 그들이 깨달은 공부의 내용은 없어지고 지금에 와서는 교의만 횡행할 뿐이다.
석가의 가르침이나 수행은 누구나 도를 깨쳐 본래의 자기를 찾고 윤회의 억겁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신도들은 현재의 제 복을 빌기에만 바쁘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한 사실에 절대적인 신성을 부여함으로써 무조건적인 신의 사랑과 최후의 심판이라는 교리를 무차별으로 적용하는 것도 그러한 예이다.
부처의 가르침이 그저 제 앞에서 두 손으로 빌고 복을 얻기를 기원하라는 게 전부가 아니었듯이, 무턱대고 예수도 우리 모두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할 것이라 믿기는 어렵다. 에수의 부활은 오히려 본래의 그 자신을 위한 경험이었고, 일종의 시범이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또 그러한 시범의 목적은 인류에게 죽음 같은 건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죽은 다음에 심판이 있고 거기서 천국과 지옥이 나뉘어진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꼭 지옥이라고 쓰인 팻말을 보아야만 지옥에 들어온 줄 알고, 백화방초가 핀 꽃길로 들어서야만 천국이라는 생각하는 것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은 죽은 뒤의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얼마든지 겪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살아 있어도 죽은 것보다 더 괴롭다면 그것이야말로 지옥이 아니겠는가. 또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행복하다면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너무 멀리서 마치 이 세상을 떠나서야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못보고 있을 뿐이다.
이승에서의 삶은 고난과 고통만이 따르는 것이라 생각하고서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이상형을 그려 보이는 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동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낙원을 종교의 내세관에 끼워 넣었을 때 인간은 스스로가 만든 신에게 몸과 마음이 모두 얽매이게 된다. 종교가 경전의 해석에 따라 수십, 수백의 종파로 나뉘어지고 심심찮게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각자의 마음을 스스로 닦는 노력보다는 그저 신에게 의지하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어 육신이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진 후 가벼운 영혼이 되어 영계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정해진 인연 다른말로 하면 이 우주를 유지하는 거대한 질서 그 큰에너지에 의해 다시 환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 환생은 자신이 지은 죄업에 따라 혹은 수양한 도력에 따라 짐승으로 환생하거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거나, 아주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윤회의 업장에서 벗어나 참된 자아를 찾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처와 예수의 깨달음의 근원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그분들의 사후에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절차나 방식은 대부분 껍데기에 지나지 않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공부해야 한다면 굳이 종교적인 절차나 방법에 기댈 것이 아니라 그 공부한 내용을 따라가면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고 그러기 위해 행하는 것이 나의 기수련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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