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베인/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제8장

기른장 2021. 5. 9. 19:54

오크의 승원은 모든 점에서 만토운과 비슷했다. 나는 나의 스승 바로 옆에 방이 주어졌다. 그것은 원래 승원장의 예비실이고 침실에 조그만 거실이 딸려 있는 아주 아늑한 방이었다. 바닥에는 티벳 융단이 깔려 있었다. 먼저 몸을 씻었다.

 

물론 이 승원이 서 있는 산 꼭대기에 쌓인 만년설이 녹아 승원 옆을 흐르는 강에서 얼마든지 퍼올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몸을 씻고나자 한 사람의 티벳 청년을 소개받았다. 나이는 25세쯤 되어 보였고 이름은 추안타파라고 한다. 매우 지적인 얼굴이고 이 승원의 영매(靈媒)이다. 린포체 대사가 이 청년을 처음 발견하여 데리고 왔다는 이야기를 대사 자신이 내게 들려주신 일이 있었다. 린포체 대사는 그야말로 옛날 이야기 같은 경위로 그를 만났던 것이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전에 린포체 대사가 에베레스트 산맥 일대를 방황하고 있을 때 한 번은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여 며칠을 굶어가며 헤매고 있는데, 에베레스트 산의 후미진 뒷편 어떤 계곡에서 홀연 추안타파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지고 대사 앞에 나타났다. 그때 추안타파는 겨우 15세의 소년이었다. 소년은 먹을 것을 대사에게 바치고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황홀상태로 들었다. 소년의 입을 통하여 바로 머라레파 대성자가 말씀을 하시면서 소년이 지닌 여러가지 초능력을 실연해 보였다.

 

추안타파를 거쳐 말하는 이가 틀림없는 머라레파 대성자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윽고 황홀 상태에서 깨어난 추안타파는 린포체 대사에게 「대사님이 여기로 오시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가져다 드리라고 하여 제가 왔습니다」고 하며 대사를 비밀 통로를 따라 안내했다. 따라가보니 야크가 무리지어 풀을 뜯고 있는 아늑한 골짜기가 나타났다. 야크의 임자가 누구인지 대사가 물으니 「저의 것입니다」하고 대답했다.

 

이상한 일이어서 「부모님은 어디 계시는가?」하고 묻자,

 

「네, 여기서 아주 먼 곳에 계십니다」고 한다. 대사는 더더욱 신기해서 「어떻게 이런 먼 곳 까지 오느냐?」고 물었다.

 

「네, 저는 이렇게 옵니다」하면서 소년은 ‘룽곰파’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 보였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 어린 소년이 어떻게 ‘룽곰파’를 할 수 있게 되었을까? 「누구에게 배웠는가?」하고 대사는 물어보았다.

 

「그이가 가르쳐 주셨어요」

 

「그이라니 누구 말인가?」

 

「그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소년은 마치 누군가가 옆에 같이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

 

대사는 추안타파가 여태까지 만났던 어떤 사람보다도 뛰어난, 태어날 때부터의 영매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린포체 대사는 추안타파를 카린퐁의 어떤 높은 요기에게로 데리고 가서 맡겼다는 것이다.

 

소년은 그 요기 밑에서 7년을 공부했고 그로부터 3년동안 오크 승원의 영매로 있는데, 그의 지위는 승원장보다 높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린포체 대사에게서 이미 들은 나는 그 청년에게 굉장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 힌두어로 말을 걸었더니 유창한 영어로 대답을 하여 나는 또 놀랐다. 카린퐁의 수련을 할 때 인도 사람인 요기가 그를 카린퐁의 영국학교에 입학시켰고 그 학교에서 추안타파는 동급생들이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 속도로 영어를 익혔다고 한다. 뒤에 확인해 보았지만 사실 추안타파는 그 학교에서는 아주 성적인 우수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의 영매로서의 능력은 참으로 놀랍도록 정확했다. 우리는 곧 친해졌다. 그의 영매능력 덕분에 이 물질 세계를 이미 떠난 많은 분들과 교령할 수가 있었는데, 그 교령은 모두가 정확하고 그를 통해 말하는 영들의 신원을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오크 승원의 우두머리인 승원장도 만났다. 그도 또 영어를 할 줄 알아 우리는 대화하는데 통역을 둘 필요가 없었다. 승원장은 명랑한 성격이어서 우리를 많이 웃겼다. 그의 웃음은 정말 전염성이 강하여 그의 옆에 있으면 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가지고 있던 영국제 비스킷을 선물로 내놓았다. 나의 스승이나 승원장 그리고 추안타파 모두가 아주 좋아해 함께 차를 마시면서 비스킷을 아끼고 아끼면서 먹곤 했다.

 

승원의 식사는 고기, 보리가루, 참파, 감자, 야크버터, 야크젖과 치즈…… 아주 풍성했다. 로스트 치킨도 며칠에 한번씩은 나왔다.

 

저녁이 되어 나는 쵸모리하리로 가라앉는 해를 보고 싶었다. 그렇게 말했더니 모두가 함께 나서서 승원 옥상으로 올라갔다. 승원의 평평한 옥상에서는 계곡이 눈 앞에 내려다 보이고 그 너머에 쵸모리하리의 봉우리들이 늘어서 있었다.

 

언제 보아도 도무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느낌밖에는 나지 않는 이 경관을 말로 나타낼 수 있을 턱이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아름답기 그지 없기 때문에 자꾸만 말로 어떻게든 나타내보려는 충동이 감히 일어나는 것이다.

 

해는 이미 쵸모리하리의 등 뒤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 연분홍에 가까운 색감을 뭐라 표현할까? 이런 미(美)를 세계 어디서도 보지 못했다. 핑크가 붉음으로 옮겨감에 따라 골짜기에서 보라빛 안개가 솟아오르고, 그 안개의 색도 차츰 짙어지면서 마침내 구름이 되어 산을 기어오르며 차례차례 산들을 뒤덮고, 이윽고 태양이 타오르는 빨강을 반사하는 것은 산꼭대기 뿐, 그 꼭대기도 차츰 엷어져 가고 눈 앞에는 보라에서 빨강까지의 스펙트럼의 모든 색깔이 반짝이는 융단이 나타나 계곡도 산도 모조이 감싸버렸다. 참으로 말은 힘이 모자라고 묘사는 초라한 것이 될 뿐이다.

 

해가 돋아날 때도 마찬가지의 현란한 변화이지만 일몰때와는 색깔의 배열이 반대였다.

 

참으로 그것은, 전율할 만큼 잊지 못할 체험이었다.

 

해야 할 일은 잔뜩 있다. 모두가 날이 새기 전에 이미 일어나 있었다. 나는 처음이라 건물 구조도 서툴고 생활방식도 익숙치 않았지만 만사 잘 될 수밖에 없다는 안심과 만족이 저절로 솟아났다.

 

이 날 아침 나의 스승은 정식으로 ‘스승’으로서의 법의(法衣)를 입고 있었다. 그이의 예지와 그리고 현실적 지식은 깊고 깊어 린포체 대사와 같은 깨달음의 차원에 있다.

 

맑은 목소리로 스승이 말씀을 시작했다. 뭔가 깊은 말씀이 나온다고 느껴졌다.우리는 모두 가만히 귀를 귀울였다.

 

「진리는 마음 속에서 만들어 내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지배하는 종교, 인간, 그것이 먹이가 되어버리는 문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지금의 이 세계 일반 사람들이 하고 있는 짓이다. 그들은 ‘참’을 아직 모르기 때문에 뭔가 의지할 것, 이끌어 주는 것을 바란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의 노예가 된다」

 

나는 이 때 추안타파가 자신이 속한 교단의 종교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나서 그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나의 이런 마음의 생각을 읽은 듯 스승은 말했다.

 

「추안을 염려할 것은 없다. 그는 벌써 오래 전에 노예의 사슬을 풀어 던져버렸어」

 

스승은 말씀을 이었다.

 

사람들은 ‘하나 됨’이라는 이상(理想)을 일단 내걸고 있지만, 사실은 모두가 어떤 분별이나 구별에 매달려 있다. 현실로 갖가지 신조(信條)나 국적, 종교상의 믿음, 정치적 이념의 차이를 버리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렇게 되는 것은 그런 것들에 꽉 얽매어 있기 때문이다. 또 그 때문에 그런 것들 모두가 가짜임을 깨닫지 못한다.

 

‘참으로 있는 것(實在)에는 구별이 없다. 따라서 종교든, 국가든, 이상이든, 신앙이든, 인간과 인간을 갈라놓는 것은 모두 가짜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평안’을 찾아내고 ‘해탈’을 얻으려면 ‘기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평안이나 해탈을 명상한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더더욱 묶이게 되는 것이다. 자기 마음 속에 있는 것에 어떻게 얽매여 있고 그 마음속의 생각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알지 못하면 명상이든, 기도든 아무 소용이 없다. 어떻게 해서 ‘갈라짐’이 생겼는지를 모르면 이른바 ‘하나됨’이든 ‘평안’이든 ‘해탈’이든 그밖의 어떤 이름으로 불러본들 그것은 그저 머리 속에서 만들어 낸 한낱 관념에 불과하다」

 

「린포체 대사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하고 내가 무심코 말하자,

 

「아들아, 해탈에의 길은 단 하나 뿐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얽매여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그대를 풀어 놓아줄 수는 없다. 그대가 그대 스스로르 풀어 놓아야 한다. 그때 비로소 그대는 일체의 ‘만들어진 것’ 뒤에 있는 거대한 창조력, 그대의 마음 저 너머에 있는 가장 높은 사랑과 예지를 볼 수가 있다. 그대 자신의 마음은 다만 그 지고의 사랑과 슬기가 스스로 나타나는 도구요, 수단이다. 그 지혜와 사랑과 슬기가 어떻게 가짜로 가득찬 마음을 거쳐 스스로를 나타낼 수 있겠는가? 그런 마음의 상태는 그리스도인 영의 슬기와 사랑이 아니라 그저 자기한정(自己限定)으로 만들어낸 것만을 나타낼 뿐이다.

 

그대를 여기에 데리고 온 것도 그 때문이다. 그대의 마음은 주(主)의 통로가 되기에 알맞게, ‘신이 들리기(over shadowing)에 알맞게 깨끗하고 맑아져야 한다. 그러지 않는한 그대 스스로 자기한정한 것을 비춰내는데 그치고 말 것이다. 그대가 이 땅을 나간 뒤에도 그대의 마음은 우리가 그대에게 기대하는 ‘봉사’-곧 ‘신이 들리기’ 위해 마음과 몸을 바치는 일-의 준비는 완전히 되지 않은 채로일 것이다. 세상 사람들 틈에 끼어 아직도 여러 해를 더 ‘후보(候補)’의 일을계속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려는 것은 그대에게 마음 속에서 만들어내어진 것은 ‘참’이 아님을 보여줌으로써 그대를 ‘신이 들리기’에 맞는 사람이 되게하는 것이다. 그대 자신의 일상생활과 일 가운데서 이것을 터득하는 체험을 갖는 것이 여기에 오래오래 머무는 것보다 훨씬 더 그대의 마음을 청소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대가 속세에서 일을 할 때 우리는 그대를 원조해 주겠다. 그대 뿐이 아니라 그대가 도와주려는 사람들까지도 도와줄 것이다.」

 

「세상에는 저보다 더 존경받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은데요」

 

「아들아, 이 일을 위해 그대는 태어난 것이야」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까지 정확하게 운명을 알고 그렇게 결정적으로 운명지워진다는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한마리 새까지도 그것이 땅에 떨어질 것을 아버지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고 주 예수는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나의 질문마다 한 마디로 잘리우곤 했지만 어떻게든 마지막 한방을 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아무튼 저는 아직 뜻대로 행동할 수 있을 만큼 해탈한 경지에는 이르고 있지 못합니다」

 

「아니, 도달해 있어. 그대는 그 무엇도 외부에서 강제되고 있는 것이 아니야. 그대 자신의 내부로부터 촉구되고 있는 것이야. 그것이 그대의 가장 깊은 속의 소망이 되는 것이야」

 

「그렇다면 저야 어찌되든 끝까지 이 일을 해보겠습니다」

 

「자 좀더 이야기해보지. 그대의 마음 속 청소가 전보다 조금 더 잘 되어 있으면 우리는 현실적인 일에 착수할 수 있다네. 그것을 나는 되도록 빨리 하고 싶은 것이야. 그대가 자기 자신을 따로 떨어진 독자적 존재라고 여기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한, 온갖 상호관계에 있어서의 갈등에서 해방될 수는 절대로 없다. 그러므로 참된 명상 또는 참된 기도란 바로 가짜를 발견해 내가는 과정이며, 자기자신의 마음이나 자기의 환경을 모르는 채로 그저 어떤 생각에 모으는 일은 아닌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른바 만트라(眞言)라는 어떤 말이나 문구를 되풀이하여 외우면서 그것을 가지고 명상이나 기도를 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자기 최면에 불과하다. 명상이란 어떤 생각에 젖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우러러 섬기는 것은 우상 숭배이고 어리석은 미신이다. 어떤 생각 또는 어떤 이미지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은 명상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도피일 뿐이다. 그것은 어쩌면 쾌적한 도피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어리석은 도피이다. 세계란 바로 사람이며 사람은 곧 세계이다. 그러므로 곧 그대는 세계요. 나는 곧 세계이다.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말씀하시는 대로입니다. 세계란 분명히 우리가 의식으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 문명을 만들어내고서도 그것에 지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바로 그대로야. 사람들은 노예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노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와 국가의 온갖 전통, 신앙, 차별에 의하여 생각과 감정이 사로잡히고 남의 엉덩이에 달라붙어 흉내를 내고 온갖 권위라는 것을 세우고 있어. 한 사람 한 사람이 그저 순응하고만 있을 뿐이며 자기 자신의 행위로 세계에서 획득한 안심이라는 것도 가짜다.」

 

「그것은 잘 알겠습니다. 이 상대적인 세계에서는 이제 이것이면 안심이다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그런 것은 다만 환상일 뿐입니다.」

 

「그렇다. 사람들은 훌륭한 인물이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은 하고 있지만 그 도중의 과정이 깨달음을 방해하며 그 자신을 포로로 만드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는 따위는 실은 불필요한 것이다. 그런 것을 노력하면 오히려 공포와 한정을 가져올 뿐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스스로가 두려워하는 내외의 영향에서 도피하려는 생각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뭔가 좋지않은 생각이 마음 속에 들어오면 어떤 일이 일어나지? 그 영향에서 도피하기 위해 그것을 물리치료하려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그 정체가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영향은 여전히 남아 있다. 자기자신의 상념의 정체를 잘 파악하여 대처하지 않으면 몸부림치고 규탄하고 비난하고 결국은 그 그림자의 반대되는 생각에 억지로 자기자신의 주의를 돌리려하기 때문에 도리어 한층 더 심한 갈등을 만들어내고 만다. 이렇게 사물에 대한 사고방식이 조금도 창조적이지 않은 쓸데없는 투쟁에 휩쓸려 버린다는 것을 알지못하겠는가?」

 

인간 생활의 참 모습이 차츰 눈에 보여왔다. 추안타파가

 

「스승님, 그 끝 말씀만으로도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어떤 생각이 자신의 마음을 지배할 때는 그 정체를 꿰뚫어 보아야 할 일이지. 그것과 싸워서는 안된다. 생각이라는 것은 모두가 무언가 다른 사물의 결과이며 그 사물의 값어치를 알아야 한다. 그렇게하면 어떠한 투쟁도, 공포도, 한정도, 혼란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에 어떤 갈등도, 긴장도, 투쟁도 없어졌을 때 비로소 그대의 마음은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그것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평안이 생겨난다. 우리들의 일을 위해서는 이런 마음을 꼭 그대가 지니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고 스승은 나를 응시하면서 말했다.

 

「그대는 순간순간 제 마음의 상태를 경계해야 한다. 그런 마음가짐을 일상생활 속에서 길러야 한다. 자기 자신의 어떤 마음을 정신분석 할 때만이 아니라 항상 ‘현재’속에서 감시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알 수 있게 되며 자아(自我)가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아를 아는 것이 바로 슬기와 참 도리에의 관문이다」

 

그리고나서 스승은 승원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영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여 선악의 갈등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남의 흉내를 내고 옳고 그르고의 상극속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마음속에서 「승원장님, 이것은 당신을 향한 설교라오」하고 뇌었다. 그러나 스승의 말은 거기서 멈추어지지 않았다.

 

「승원장은 선악의 균형이 잡힌 좋은 둥지를 찾아낼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또한 신이 이 균형을 실현시켜 준다고 여기고 있으며 그렇게 기도하고 영창하고 모방하고 순응하며 자신의 미신 속에 갇히어 있다. 그가 가짜를 분별하기만 한다면 진짜를 깨달을 것이다. 영적인 사람이 되려는 갈망은 결국 좌절과 비탄과 모순만을 의미할 뿐이다」

 

나는 승원장 쪽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아무말도 없었다.

 

스승은 계속했다.

 

「선악은 한 나무에 열리는 열매이며 뿌리는 하나이다. 그 뿌리는 인간의 마음 속에만 있으며 거기서 만들어내어지는 것이요. 그것은 ‘참’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추안타파가 내 귀에 속삭였다.

 

「승원장이 지금 설교를 듣고 있군요」

 

스승은 그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어쩌면 추안의 마음을 읽었을 것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추안타파 너도 마찬가지야」

 

「진리 그것은 선악, 과거,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진리란 순간에서 순간으로 지금 생명의 생생한 표현이다. 그 속에는 어떤 갈라짐도, 죽음도 없으며 영원히 지금만이 있을 뿐이다. 이 법열 속에서만 무한한 사랑과 슬기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는 과거로 도피하지 않고 미래를 헛되이 꿈꾸지 않으며 항상 지금에 살기 때문에 그대가 하는 모든 일은 거기에 걸맞는 것이 되고 그 보수 또한 놀라운 것이 된다.」

 

「자, 아들아」

 

하고 이번에는 나에게 말했다.

 

「이렇게 마음이 평온하면 삶의 기쁨이 솟으며 마음을 통제하거나 분석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스스로의 마음의 상태를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대는 어찌해야 한다든가 안된다든가 하는 스스로의 자아로 생각하여 긴장이나 공포를 자아내던 원인인 온갖 미덕이나 부덕에서 해방된다. 갖가지 미덕의 응어리에서 해방되면 공포가 사라지고 대립하는 것도 없으며 오직 사랑과 슬기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실재 속에서는 다만 사랑과 슬기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때 비로소 그대는 참으로 창조하는 자가 되며 주(主)가 다시 말씀하실 때의 그릇이 된다.

 

만약 그대가 무엇인가가 되려고 끊임없이 자아와 씨름을 한다면 그 괴로운 투쟁은 끝이 없다. 그러나 ‘자기자신-참 나, 신아(神我)가-이 참으로는 이미 지금 그것이다’고 알았을 때, 그 때 비로소 무애자재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이다. 자기가 언젠가 알지 못할 먼 미래에서가 아니라 실은 지금 이미 완전한 실상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대의 여태까지의 생각과 행위가 모두 한정되어 왔던 것이다. 끝없고 조건 없는 것을 이해하려면 마음이 자아의 생각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본래 ‘무(無)’인 자아는 녹아 없어져야 한다. 그럼으로써만 비로소 실재 곧 참 나는 ‘지금’속에서 실재 곧 신 스스로를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나 스스로는 무(無)이다’

 

나는 자신 속에서 깊은 변성(變性, transformation)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여태까지 나를 가르쳐오던 사물은 이제 나의 안에서 사라져 간다. 나는 나의 느낌을 스승에게 말했다.

 

「아들아, 그 말을 들으니 나도 기쁘다」

 

하고 스승은 대답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대의 마음이 윤리의 모순을 짊어지고 있는 동안은 그대는 자기의 실상(實相)이라는 진리를 꺠달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대의 마음이 온갖 윤리, 도덕, 차별, 분리, 구별 따위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으니 그대는 일체의 반동, 시간, 단절, 대립에 시달리지 않는 이른바 ‘자연법이(自然法爾)’의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터득할 것이다. 이제는 생명의 흐름이 생명 본래의 일을 한다. ‘아버지 신만이 역사하신다’」

 

「그대가 입으로 내보낸 말이 헛되이 그대에게 돌아오는 법 없고 그 목적을 다하리라」

 

그리고나서 스승은 승원장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승원장을 보라. 다른 고승들도 마찬가지지만 마치 자기들이 앉아 있는 방석처럼 힘없는 말을 토해내고 있을 뿐이다」

 

이 말에 승원장은 놀라면서

 

「스승이시여, 저는 제가 이 주위의 형식이나 교리 전부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고 말했다.

 

「그럼 왜 거기서 나와 인류를 정말 돕는 사람이 되지 않는가?」

 

승원장은 고개를 숙였다. 스승은 말씀하신다.

 

「'부름을 받는 자는 많으나 선택받는 자는 적다'」

 

스승은 승원장을 향하여 말했다.

 

「실재에는 지금이 있을 뿐이다. 과거도 미래도 없다. 이 깨달음을 허무하게 미루면서 후일을 기다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대는 자기자신을 가짜 미덕에서 풀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대는 여태까지의 어리석음을 떨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위하여는 자기 자신의 온갖 상념이나 동기나 내가 지금 그대에게 말하는 바에 대한 그대 자신의 반응까지를 잘 꿰뚫어 보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무지란 학습의 결여가 아니라 가치의 혼란과 갈등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승원장 그대는 지금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결정하기 어려운가? 그렇다면 그대의 마음 속에서는 여러가지 생각이 뒤얽혀 있고 그 속에 그대는 휘말려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대는 모방자에 불과하다. 그대는 이미 무(無)가 만들어 놓은 어떤 틀에 자기자신을 맞추려 하고 실재란 이러이러해야 할 것이라고 스스로 마지막 이미지를 만들어 내어 딱하게도 거기에 자기자신을 맞추어 나가면서 결국 ‘참’ 곧 신인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대는 그렇게 남의 흉내를 냄으로써 어찌 항상 실재하는 대생명의 끝없는 기쁨을 실현할 수가 있겠는가? 생명은 그저 항상 있으며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란 얽매이지 않는 ‘하나’이다. 그대의 마음이 형식이나 의식, 차별, 구별에 사로잡혀 있는 한 그대에게는 이해되지 않는다. 가짜를 지금 꿰뚫어 봄으로써만 승원장이여 그대는 참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권위를 세우고 그것을 높이는 것은 그대의 알맹이가 가난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기에게는 일을 해낼 만한 역량이 없다는 느낌이 있기 때문에 다른 무엇인가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대는 ‘참 있음 곧 실상’아닌 어떤 생각을 위안으로 삼고 그 속으로 도피하려 하는 것이다. 그대의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그대 자신이 손발이 꽁꽁 묶여 있는 것처럼 그대는 여기 이 많은 라마승들을 얽어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스승은 나를 항하여 이렇게 말했다.

 

「생명은 참으로 있는 것이요 그 스스로 이미 완전이며, 자아가 사라졌을 때 무애자재롭게 생명 그것이 나타난다. 개아(個我)는 분리 속에 있는 것이요, 자기를 남과 별개의 존재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의 대생명이 있을 뿐이며 그 속에는 어떠한 분리도 단절도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분리, 단절이란 마음의 환상임을 알게 된다.

 

그대는 이제 여러가지 미덕의 숭배나 죄의 두려움에 마음이 흔들리는 일은 없으리라. 또한 깨달음을 방해하는 윤리라는 좁은 길을 더듬어 갈 필요도 없다.

 

여기에 있는 승원장은 여태까지 어떤 틀에 자기를 맞추어 왔기 때문에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공포를 없애려면 자기의 심상이 ‘지금’ 완전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혼갖 허영이 질투, 부러움이나 소망, 희망, 회한이나 공포를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 모든 것은 다 그대가 시간-과거, 현재, 미래-이라는 미망에서 해방되고 참된 깨달음을 찾을 때 사라져 버린다.

 

마음이 가짜로 가득차 있으면 그것이 가짜임을 꿰뚫어 봄으로써 마음을 비워야 한다. 그러면 마음에서 가짜가 없어지고, 항상 있는 생명이 의식과 더불어 점점 확대되어 가면서 필경은 실재로 마음이 가득하게 된다. 한편 실재 그것 밖에 있는 것은 슬기와 사랑과 이해로써 그 정체와 원인을 분간할 수 있게 된다.」

 

스승은 나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유일무한의 생명은 사랑과 슬기 속에서 스스로를 나타낸다. 그대가 편협 완고한 신앙으로 그 나타남을 한정할 때에는 대생명의 지금 여기 그대의 삶에서의 그 본래 무애자재한 작용을 그대 스스로가 방해하는 것이다. 인간을 모두 따로따로라는 헛된 저주에서 해방하고 대생명 그것의 위대한 본원으로부터 태양계의 대천사들을 거쳐 흘러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참혹한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특수한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간을 거쳐 분명히 밝히는 일을 돋는 것이 그대의 일이 될 것이다. 이 생명은 슬기와 사랑과 자비로 가득차 있으며 인간, 곧 아버지인 신이 이 땅위에 모습으로 나타난 신의 아들인 거룩한 ‘인간’을 참으로 이해하는 새 시대로 이끌어들이는 선구자가 된다」

 

여기서 스승은 그 아침의 설법을 마쳤다. 우리는 모두 자리를 떠서 특별히 마련된 큰방으로 가 넷이 함께 앉아 식사를 하게 되었다.

 

먼저 승원장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 당신께서 분부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이제부터 기꺼이 하겠습니다」

 

스승은 대답하셨다.

 

「신이 그대에게 맡긴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라. 그렇게하면 그대는 이 나라를 무지와 노예와 빈곤 속에 얽어 매어온 미신들을 이 나라에서 제거하는 최초의 공로자가 되리라」

 

그 말을 듣고 승원장은 일어나 스승이 앉은 자리 옆으로 가서,

 

「저에게 주어진 이 일을 제가 끝까지 해낼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었다.

 

몇 해 뒤에 나는 그 오크 계곡의 승원이 티벳에서 가장 활발한 교화를 펴는 승원이 되고 간덴에 있는 라마교학의 중심마저도 어깨를 겨눌 수가 없다는 소문을 들었다. 오크의 승원장이 하는 설법과 그가 해 보이는 놀라운 초능력의 사실을 보려고 온 나라에서 라마승들이 운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날은 나머지 시간을 라마승들의 활쏘기 연습을 보며 보냈다. 매년 한 번 궁술대회가 열리어 온 나라의 승원에서 선출된 궁수들이 수도 라사에 모인다. 이것은 큰 행사이며 오크 승원의 라마승들도 그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과녁을 맞히는 솜씨는 대단했다. 그들의 활쏘기에서 중요한 것은 짐작이다. 커다란 과녁이 높은 곳에 들어 올려지면 궁수들은 한참 과녁을 응시하고 나서 과녁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뒤로 물러간다. 그리고는 짐작으로 활을 쏘는 것이다. 그런데도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가는 일은 거의 없다. 이렇게 많은 선수들이 날마다 연습을 하여 그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팀을 골라낸다. 백명 이상의 선수가 연습 결과를 점수로 종합하기 때문에 라사에서 열리는 경기에는 문자 그대로 가장 우수한 자들만이 참가하게 된다.

 

나는 어릴 때 집의 농장에서 활을 만들어 토끼사냥을 많이 했었다. 그러나 그 후에는 활을 쏘아본 일이 없지만 막상 라마승들이 연습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한 번 쏘아보고 싶어져서 부탁을 해 보았다. 라마승들은 모두 환영해 주었다. 과녁이 보이는 거리에서는 사실 나도 매우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시계 밖 표적에서는 별로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짐작으로 쏘는 연습을 충분히 하기만 한다면 숙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내가 연습에 참가하면서 흥이 돋구어졌다. 요행인지 모르겠지만 그 날 오후는 내가 속하게 된 팀이 이겼고 더구나 나 자신도 평균 이상의 성적을 올려서 조금 영웅이 된 기분이었다. 승원장도 좋아해 주었다. 승원장은 사실 명랑한 인물이었고 우리들이 그렇게 교류하게 된 것을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다음 이틀 동안은 여태까지 마음 속에 쌓아온 잡다한 관념이나 믿음을 마음 속에서 털어내기 위하여 나는 홀로 있게 되었다. 그런 시간을 가진 결과 나의 마음 속에는 다만 사실만이 남았고, 사실 그것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믿음이라는 관념적인 것은 하나도 없어지게 되었다. 스승은 그만큼 철저하게 나의 마음을 청소해 주신 것이다.

 

나의 마음은 이제 첫 번째 시험을 치를 준비가 되었다.

 

나에게 한 장의 종이가 주어졌다. 거기에는 아주 뜻이 깊은 몇 마디의 말이 쓰여져 있었다. 내가 할 일은 그 말을 읽고 거기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읽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전기가 몸 속을 꿰뚫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왔다. 순간 나의 마음은 완전한 공백이 되었다. 그리고는 나는 여태까지 체험해보지 못한 어떤 강한 신념 같은 것을 느꼈다. 슬기의 원천에 나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나는 딴 사람처럼 스스로 말하는 것을 스스로 듣고, 말이 입에서 차례차례 나오는 것을 들으면서 생각하는 것이었다. 마치 나라는 인간이 둘로 나뉘어져 한 쪽은 사랑과 슬기와 힘의 원천에 연결되고 다른 쪽은 동시에 그것을 느끼면서 그것을 공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게는 그것은 정말 새롭고 싱그러운 체험이었다.

 

스승은 매우 기뻐해주었다.

 

「이제 오래지않아 그대는 좀 더 잘하게 될 것이다. 차츰 숙달하여 마침내 위대한 영적 존재가 그대와 어울릴 수 있게 되고, 그 때에는 그대 둘레에 영적인 빛이 보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완성되을 때, 그대는 몇 달 후에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대를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대는 전과 같은 모습이요 형상이지만 어딘가 설명할 수 없는 차이점이 느껴질 것이다.

 

그대가 세상으로 돌아가서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는 동안도 계속 그대의 안에서 변화가 진행되고 그리하여 더더욱 많은 양의 힘을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세간의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 이 일을 훌륭히 해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인 것이다.」

 

그 이후 언제나 나는 홀로가 아니라 어떤 영적 존재가 나와 함께 있으면 그것이 어떤 존재인지를 나는 알 수가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안토니는 여러 영매를 거쳐 내가 여러 번 대화를 나눈 분이다. 그러나 어떤 영매도 추안타파만은 못했다. 이런 영적 존재들은 말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의 말 말고도 예컨데, 프랑스어, 이태리어, 중국어, 힌두어, 영어, 티벳어…… 모든 말을 완전히 할 수 있었다.

 

어떤 영혼이든 그 국적 여하에 불구하고 어떤 나라의 말이든 거침없이 바꾸어가면서 쓸 수 있는 일종의 메커니즘, 곧 영매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크 승원에 머무는 동안 순간 순간을 즐겼다. 우리는 모두 부지런히 일했고 잘 웃었다. 나의 진보는 빨랐다. 승원장 쪽은 생명과 종교에 관한 새로운 전망을 다듬는데 시간이 걸렸으며 처음에는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처음부터 너무 잘 해냈다면, 마치 어떤 교회의 지도자가 대중들을 공포 속에 얽어매놓는 죄나 지옥 또는 악마의 힘을 설하는 종래의 교설을 부숴버리려고 일어서는 교역자들을 추방하는 것처럼 그도 또한 라사의 고승들에 의하여 추방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민중이 공포의 포로가 되어 있는 한 민중을 교묘히 조종하여 속일 수가 있는 것이다. 교회는 ‘죄’ 위에서 번영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포의 원인이 제거되어 버리면 그 때는 더 이상 조종할 수도 속일 수도 없게 되어버린다. 온 세계에서 나는 일을 해오고 있지만 광신에서 비롯되는 공포로 가득차 있는 환자를 만나곤 한다.

 

그런 환자에게는 나는 언제나 가볍게 질문을 해 본다.

 

「신의 성질은 무한이겠지요?」

 

「그야 물론 하나님의 성질은 무한이겠지요!」-이것이 최초의 발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벗어나서 무엇인가 외부에 존재할 수가 없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무한이라고 할 수가 없지 않겠어요」

 

「그야 그렇지요」하고 대개 대답은 정해져 있다.

 

「무한이라면 하나님은 모든 곳에 다 계셔야 하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신은 무한이라고 할 수 없을 터이니까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악마이고 지옥도 하나님 속에 틀림없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만이 존재한다면 악마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래 존재하지 않는 악마를 인간은 멋대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은 그 성질상 무한이고 신과 악마가 함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마치 계산을 잘못한 것과 같아 계산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는 그것은 없어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악마도 그것이 본래 없는 것임을 깨달았을 때에는 그저 없어지고 맙니다.」

 

이것이 충격 요법 제 1호인데 그러나 그 힘은 좀처럼 발휘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성서 속에서는 지옥과 악마가 있다고 합니다」대개 이렇게 대답한다.

 

나도 언제나 일정한 말을 한다.「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너희들은 성서를 읽고 영원한 생명을 찾았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지요. ‘악에 항거하지 말라’고. 악에는 본래 힘이 없습니다. 그 없는 힘을 악에게 주지 말아야 합니다. 악마란 곧 자아를 말하는 것이며 지옥이란 그 자아가 만들어내는 혼란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니고 있는 것은 마음 속에서 만들어낸 한조각 신조나 관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신조나 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되새겨 보고 잘 생각하여 그것을 버리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 조각의 신조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 때까지는 그것이 가짜라는 사실을 모르고 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의 말씀은 어떻게 되나요?」하고 환자는 묻는다.

 

「예수는 진리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남기거나 기록해 두지 않았습니다. 기록해 둘 수가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빌라도에게 물었죠. ‘진리란 무엇인가?’하고.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어떤 말도 기록으로 남기지는 않았습니다. 말로 진리가 계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은 다만 진리에 대한 어떤 생각을 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 것은 결코 진리가 아닙니다. 이것을 예수는 아셨던 것입니다. 성서를 기록한 것은 인간입니다. 더구나 그 후에 그 성서는 인간의 손으로 열 두번씩이나 고쳐졌습니다. 당신은 말 그것이 진리가 아닌데도 그것을 진리라고 받아들입니다. 진리는 어떤 책 속에서도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의 정체를 알고 비로소 말이 진리가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소리치셨지요」

 

「예수가 황야에서 발견한 것을 보았을 때 나도 역시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의 정체를 전부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나의 자아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자아야말로 실재를 감추는 악마였던 것입니다. 자아는 언제나 얼굴을 앞으로 내밉니다. 그것이 자아가 하는 버릇입니다. 그러나 본래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다만 우리가 스스로의 실재에 무지할 때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아야말로 ‘참’ 곧 신의 나타남을 방해하는 악마이며, 나도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사기꾼이다. 너는 신의 아들로서의 내가 태어난 권리를 나에게서 속여 빼앗으려는 자이다’하고 외쳤지요. 신만이 유일한 존재이며, 신밖에 존재하는 것은 없음을 알았을 때 나는 나 자신이 육체나 육체의 생각이나 사람의 생각에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실재인 신으로부터 태어난 신의 아들임을 알았습니다. 나는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그 때 아버지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의 역사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신은 실존하는 것이기에 나 또한 실존함을 나는 알았습니다. 그러나 신이 무엇이라는 것은 모르지만 다만 우리는 하나이고 따로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자아란 떨어져 있음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분리라는 생각은 하나의 미망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마이고 지옥이며 또는 자아가 만들어내는 혼란입니다. 왜냐하면 자아는 분리만을 알고 자아의 이득만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놓칠세라 소중이 붙들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받아들여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어떤 생각, 어떤 관념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마음의 환상인 어떤 관념 사상을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신이 아닙니다. 신은 관념이나 사상도 아니거니와 어떤 이미지도 아닙니다. 망상도 아니거니와 믿는 마음도 아닙니다. 당신은 온갖 종류의 공포나 망상을 지닌 당신 스스로의 자아를 모르기 때문에 남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가짜를 모르기 때문에 진짜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소경이 소경을 이끌어 둘이 다 수렁 속으로 빠져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자, 만약 당신이 가짜를 찾아냈다면 그 다음은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진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에요. 당신에게 무엇이 진리인가를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 자신이 무엇이 가짜인가를 알기만 하면 그 때 비로소 당신만의 당신의 ‘참’을 직접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이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되 그것을 자기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진리를 스스로 직접 체험할 수 없습니다.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따위로 말하는 사람은 가짜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아직 그것을 몰라요. 그것은 당신 스스로의 신앙이라는 것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자기 마음속을 샅샅이 뒤져 그 속에 있는 것들의 정체를 알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한낱 생각이나 관념 또는 사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나 있음(I AM)’이 진리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입니다 사람은 그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요 그 밖에 실존하는 것은 없으며 그 속에는 어떠한 갈라짐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망상은 자아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며 그것은 자아가 만들어낸 환상이며 만들어내어진 것은 ‘참’이 아닙니다. 만들어지지 않은 것만이’ 참’입니다.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서 가짜들을 모두 없애버리면 ‘있음(I AM)’이 깨달아지겠지요.

 

그러므로 이른바 도덕이라는 것은 어리석음의 으뜸이며 도덕적인 인물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스스로의 ‘참모습’을 가리고 감추는 일입니다. 스스로의 실상이 아닌 것에 대해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어떤 관념이나 사상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그것은 도덕은 아닙니다. 도덕이란 스스로의 실상을 속속들이 알고 깨닫는 일인 것입니다. 이른바 도덕은 망상이요 속박입니다. 스스로의 실상을 모르면 도덕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한다 해도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미덕은 스스로의 실상을 아는 데서만 찾아내어질 수 있습니다. 미덕이란 곧 해탈이며 스스로의 실상을 남김없이 앎으로써 이루어지는 해방입니다. 미덕이란 실재의 나타남을 방해하고 있는 것을 꽤뚫어 보는 일입니다.

 

친절, 애정, 자비, 관대, 용서…… 이런 것들은 모두 실재의 나타남입니다. 이것이 미덕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의 잡다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이른바 도덕적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도덕적인 사람이 되려하는 것 속에는 미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덕은 지금 시간과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의 실상을 모르면 미덕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식으로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해준다. 그러면 환자들은 어김없이 더더욱 이야기를 듣고 지도를 받으려고 찾아온다. 말하자면 나의 이야기가 커다란 보람을 낳는 셈이다. 왜 그런가 하면, 내가 하는 말이 여태까지 진리와는 반대의 생활방식을 따라왔기 때문에 좌절과 실망만을 맛보았던 환자들을 무엇이 되려는 ‘애씀’의 긴장에서 풀어 놓아주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