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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가까운 세월을 경제와 경영이라는 주제에 몰입되어 살아왔던 제가 갑자기 도(道)를 새로운 화두(話頭)로 삼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세상을 꿈꾸며 현대 물질문명의 첨병 역할을 해 온 제가 어느 날부터인가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비물질 세상을 이야기하고 또 그것이 보다 근원적인 세상임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갑작스런 나의 변신이 그 동안 가깝게 지내온 분들을 어리둥절하게 혹은 못마땅하게 만들기도 하였지만, 심신의 근본적 변화를 체험함으로써 알게 된 보이지 않는 세상은 시간이 갈수록 제게 더 확실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덕분에 '경제와 도'를 이야기해 달라는 부탁을 받긴 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아리송하게 느껴질 수 있는 논제입니다. 더구나, 예나 지금이나 다독(多讀)을 기피해 온 저인지라 정신세계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경제와 도'를 한바탕 흐드러지게 논해 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대신, 우주와 인생의 진실은 나름대로 정리가 되어 있다고 느껴온 터인지라, 이에 근거하여 문제를 풀어 보리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질과 정신의 조화로운 삶
본래 경제(經濟)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약어로서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에서 출발하였고, 영어 economy라는 단어도 그 어원상 하늘의 조화 혹은 질서란 뜻을 함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물질문명이 고도화되는 20세기를 거치면서 경제란 재화 및 용역의 생산과 소비, 다시 말해 물질의 흐름을 나타내는 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도(道)란 본래 사람이 걸어가야 할 바른 길을 의미하였지만, 이제는 정신세계에 대한 추구 혹은 마음수련을 뜻하는 것으로 널리 인식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단어의 의미를 근거로 접근해 볼 때, 경제와 도의 관계는 분명 보완적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질과 정신의 두 요소로 구성된 인간에게 있어서 경제행위란 물질적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고, 구도 행위는 정신적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질이 영혼임을 아는 사람에게도 인간의 물질적 측면은 결코 무시될 수 없는 것이고, 인간을 오직 물질의 관점에서 인식하는 유물론자들도 죽음이 가까운 나이에 이르면 비물질적 측면에 관심을 보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물질과 정신의 관계를 보완적이라기보다는 대립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 합니다. 사실 이제까지 많은 구도자들은 경제행위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부인하고, 가능하면 그것을 회피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여 왔습니다. 이 때문에, 경제행위에 몰두하면 도(道)로부터 멀어지고, 도에 집중하게 되면 물질적 궁핍을 감수해야 한다고 하는 사회적 통념이 생기게 된 모양입니다. 물론 이같은 딜레머를 피하기 위해 다수의 철학자들과 지성인들은 인간이 물질만을 강조하면 다른 동물들과 다를 바 없지만 구도(求道)행위만 중요시하면 (물질의)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두 측면이 적절히 조화된 균형있는 삶을 강조하여 왔습니다.
이렇게 물질과 정신을 대립하는 것으로 보든, 그 조화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든 간에 한두 가지 문제점이 제기됩니다. 경제행위와 구도행위의 어느 정도 배합이 과연 '균형있는 삶' 혹은 '조화(調和)로운 삶'이냐 하는 것이고,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답'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조화로운 삶'이란 극히 주관적인 것으로서, 각자의 구도심이나 처해 있는 상황 그리고 타고난 성향 등에 따라 크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수도원에서 수련하고 있는 사람은 극히 최소한의 경제행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시간은 정신적 삶에 투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일부 유물론자들은 거의 모든 시간이 경제행위에 투입되어야 마땅하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道)와 의식수준
'경제와 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답변을 찾아보기 위해서는 도의 본질에 대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道)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이 걸어가야 할 바른 길(正道)을 뜻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바른 길이냐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사람들은 같은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이 세상을 바라보고 분석할 때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인식방법을 의식수준이라고 정의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의식수준에 따라 각기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따라서, 자신이 도달한 의식수준에 따라 '무엇이 도이냐?' 하는 것도 당연히 달라집니다.
사람의 의식수준은 육체를 감싸고 있는 인체 에너지 (오라: aura)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윤회를 통해서 조금씩 변해가는 오라 에너지는 크게 보아 육체와 직접 관련된 육신의 에너지와 영적인 에너지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윤회를 적게 한 영혼일수록 진정한 '앎'의 축적이 적어 의식수준이 낮고 육신의 에너지가 지배적입니다. 따라서 육체적 본능에 보다 충실한 삶을 살게 되며, 이웃보다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하지만 윤회를 거듭함에 따라 앎은 증가되고 의식수준은 높아지며 영적인 에너지가 강화되어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도 함께 배려하는 마음이 자연히 생겨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가족, 친지만을 생각하다가 점차 민족과 국가를 생각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피부색깔과 종교를 뛰어넘어 전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합니다.
의식수준이 상승하면서 도(道)에 대한 생각도 바뀌게 마련인데, 낮은 의식수준에서는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게 되고, 사회질서와 안전 유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어 계율 혹은 법의 준수를 도의 근간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식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도덕과 윤리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더 나아가서는 양심이 도의 근간으로서 다가옵니다.
이렇게 도(道)란 사람들 각자의 의식수준에 따라 달라지지만, 특히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더 높은 차원의 도를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들에겐 의식의 성장을 통해 종국적으로 깨달음을 얻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고, 따라서 이들이 말하는 도란 자신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할 수 있는 바른 길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도란 결국 우주적 진리에 부합되는 삶을 사는 길을 의미하고, 따라서 도와 경제행위와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인생과 우주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래에 소개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짜 모습'은 제 자신의 체험과 깨달음 그리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분들과 인류의 여러 영적 스승들을 통하여 제게 정리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이 세상은 알고 보면 기의 바다, 에너지의 바다입니다. 몸의 혈자리들이 열려 기에 대한 감각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듯이, 우리는 생물체는 물론이고 무생물과도 끊임없이 에너지를 교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태양과 별, 행성, 달 그리고 우리를 지탱해 주고 있는 땅으로부터도 강력한 에너지를 끊임없이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에너지를 교류하고, 벽에 붙은 천부경의 액자 혹은 백두산 천지의 사진으로부터도 맑은 에너지를 계속 받아들입니다. 사람의 몸은 물질적인 육체 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진동수를 가진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오라: aura)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 중 육체는 가장 진동수가 낮은 에너지일 뿐입니다.
이렇게 에너지의 바다에 떠다니는 우리는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 자신을 이 우주의 다른 존재들과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 나는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혼자구나!" 하며 고독에 떠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여러 다른 차원에서 여러 존재들과 교류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영혼이며 오랜 윤회를 통하여 많은 체험들을 함으로써 진정한 '앎'을 증가시켜 나가는 영원한 존재입니다. 감각기관을 갖춘 육체가 있음으로 해서 생생한 체험이 가능하고, 이를 통해 앎의 축적과 새로운 에너지의 유입 그리고 의식의 성장이 일어납니다. 육신이 없는 영혼의 상태에서 의식의 성장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 것은 생생한 체험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인생의 본질은 체험을 통한 의식의 성장이라고 할 것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좀더 깊이 파악하기 위해서는 윤회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수천 년간 인도인들과 대다수의 불교도들이 믿어 왔고 또 현재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있는 윤회의 원리는 우파니샤드 시대의 야쥬냐발카에 의하여 주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생에서 이러이러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 징벌로서 현생에서 불행을 당해야 하고, 현생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내생에서 큰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카르마(業)에 의한 인과응보적 윤회설은 이제까지 인간 사회의 신분제, 계급제 (예: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정당화시키고 유지, 존속시키는 데는 크게 공헌하였지만 우주의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근원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우주에는 선과 악, 좋고 나쁨, 행복과 불행이란 구분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한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업으로 인하여 다음 생에서 복을 받고 악업으로 인하여 벌을 받는다는 생각은, 오직 현상만을 좇는 사람들에게만 성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근원적 세상을 이해하고 선과 악, 좋고 나쁨의 구분을 고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선, 전생에서 행한 잘못으로 현생에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상징되는 아주 낮은 의식의 산물임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 생과 다음 생 사이 즉 바르도 상태에 있을 때, '빛의 존재'라고 표현되는 영적 스승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신에게 가장 시급한 앎, 가장 필요한 에너지가 무엇인지를 고려하여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인생을 설계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상태에서 인생을 설계할 때는 오직 영적인 성장에만 관심이 있고, 따라서 필요한 경우 엄청난 육체적 고통을 수반하는 삶을 스스로 설계하기도 합니다. 윤회가 이렇게 자신의 설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은 최면을 통한 전생연구가들이나 임사체험자들의 진술, 그리고 인체 오라를 연구해 온 사람들에 의하여 공통적으로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윤회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인생이란 자신에게 절실한 앎과 에너지를 얻기 위한 체험의 장이라는 사실은 '행복한 인생'의 추구가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 주고, 또 현실의 어려움을 전생의 악업 탓으로 돌리며 체념해 왔던 이제까지의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부를 축적하거나 권력을 잡게 되었을 때에도 거드름이나 오만함을 부리는 일은 없어지게 될 것이고, 극심한 빈곤과 질병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특히, 우리 자신이 인생의 설계자임을 확신하게 되면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향후에 일어나는 어떠한 일들도 모두 나의 성장을 위해 스스로 설계한 것임을 알게 되면 미래에 대한 근심걱정은 자연히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와 도
위의 내용을 요약하면, 인생이란 자신이 미리 설계한 영혼의 성장을 위한 체험의 장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도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란 결국 순간 순간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의식성장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경제행위와 관련한 바람직한 구도자의 자세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지구라는 훈련장에는 수많은 영혼들이 육체라는 물질의 옷을 입고 태어납니다. 물질을 취득하고 소비하는 경제행위는 우리의 의식성장을 위한 훈련 과정에 기본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그것을 기피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영적 성장을 위해서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경제행위는 자신의 육신을 유지시켜 줄 뿐만 아니라 경제행위를 통하여 만들어지는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많은 체험들을 가능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의 경제행위 중 생산행위는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데, 대체로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는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보다 많은 물질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직업을 가지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직업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이는 모두 이 생을 시작하기 전 자신의 설계에 따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어떠한 직업도 모두 체험을 위한 주어지는 신성한 것이며, 죄악시해야 할 직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 자신의 직업을 통해 돈을 많이 벌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에 나쁠 것은 전혀 없으며, 그것은 오히려 바람직한 삶의 모습입니다. 뭔가에 열심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순간순간에 집중하는 것이고, 이는 곧 체험의 극대화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억지로 무리하게 물질을 추구하는 경우, 우리는 물질에 집착하고 또 집착하는 그것이 습(習)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이는 이번 생에서의 의식수준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오라 에너지에 기억되어 다음 생들에서도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물질에 집착하거나 무리해서 물질을 추구하는 것은 도에서 벗어난 것이며, 이는 설령 돈을 버는 목적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의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목적은 결코 방법을 정당화시키지 못합니다.
도의 관점에서 볼 때 개개인의 경제행위 중 소비활동은, 그 자체로서는 바람직하다거나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자가 많은 물질을 소비하고 가난한 사람이 빈궁한 삶을 영위하는 그 자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부자가 이웃의 굶주림을 모른 채하고 과시적으로 돈을 물 쓰듯 한다면 그의 이기심은 더욱 커지고 의식은 성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의식성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부자 인생을 설계한 사람들이 훨씬 어려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자신이 소유한 물질을 혼자서 소비할 때도 의식성장은 이루어지지 못하지만, 이웃과 나누어 사용할 때에도 그의 마음가짐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진 물질을 남과 나누어 사용하면서 진정으로 이웃과 하나 됨을 느끼고 기쁨과 환희를 맛보게 된다면 그는 커다란 의식성장을 이룰 것입니다. 하지만, 베풂의 과정에서 자칫 과시욕이나 자만심이 살아난다면 이는 자신의 의식을 오히려 낮추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베풂은 그 행위를 하는 것조차 떠올리지 않는 상태, 즉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는 상태'의 마음가짐에서 행할 때 진정한 의식의 성장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경 말씀과 같이, 부자가 도를 행하기란 가난한 사람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입니다.
물질이 부족해서 남의 도움을 받는 경우, 베푸는 사람에 대하여 진정으로 고마움을 느낀다면 이 또한 자신의 의식성장을 도와줄 것입니다. 베풂의 진정한 의미를 배우게 되고, 언젠가 자신도 다른 사람과 물질을 나누어 쓸 수 있게 하는 에너지를 형성시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움을 받는 과정에서 열등감을 느끼고 위축된다든지 혹은 베푸는 사람에 대하여 적대감을 갖게 된다면 이는 의식의 성장을 방해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어떠한 경제행위도 그 현상만을 가지고 도에 맞는지 여부를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질을 얼마나 많이 소유하느냐, 또 얼마나 많이 벌어들이느냐 하는 그 자체는 의식성장의 측면에서 중립적이기 때문입니다. 부자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신의 생산과 소비활동을 통하여 의식을 상승시킬 수도 있고 또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결국 도란 어떤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행위시의 마음가짐, 즉 긍정적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경제행위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행위가 수행인 것을 깨닫게 되면, 구도자들이 경제행위와 관련하여 느끼는 고통은 크게 줄어들게 되고, 이를 긍정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2002년 3월 2일
출처 : 장휘용 교수 명상록 - 전체의식 속으로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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