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Q&A에는 윤회의 원리에 대한 질문들이 이어졌고, 이에 대한 답변을 통해 저는 인과응보적 윤회의 허구성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저는 책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에서 전생의 악업이 현생의 불행을 초래한다는 식의 인과율은 성립되지 않음을 이야기하였는데, Q&A에서 이를 다시 부연 설명하였습니다. 근원적 세상에는 선과 악의 구분이 없고 행복과 불행이라는 구분도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우리가 생각하는 상태 혹은 사건들(예: 선업, 악업, 행복, 불행)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과율이 적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과응보적 윤회설은 우파니샤드 시대의 야쥬냐발카에 의하여 시작되어 수 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해 왔지만, 사실은 우주의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된다는 점을 밝혔던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많은 증거들은 우리의 인생이 태어나기 전 스스로 설계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러한 제 견해에 대하여, 지금까지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믿어 온 것을 버리고 아직 완전히 정립되지 않은 새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야기하시는 분도 있고, 제 주장의 근거가 되는 "선과 악의 구분은 없다"는 것에 대하여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분도 계셨습니다. 오랫동안 존속되어 온 '안전한' 이론을 계속 따르고 싶다는 분들에게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좀더 명확하게 정리되실 것입니다" 하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선과 악이 실재한다고 느끼시는 분들과는 좀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이 세상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제 주장에 동의하지 못함을 알고 있고, 또 어느 정도 이해되시는 분들의 경우에도 몸으로 와 닿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심신의 근본적인 변화를 겪기 전에는 그런 것에 대한 의문조차 떠오르지 않았고, 만약 그 때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제게 했다면 아마 이상한 사람 취급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선악은 과연 존재하느냐?"를 논한다는 그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고, 또 선악의 구분이 없음을 입증하거나 설명하기는 더더우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원론적 세계관, 이원론적 사고에 대한 하나의 사례로서, 깨달음으로 가는 여정에 극복되어야 할 매우 중요한 이슈로 생각됩니다.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도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갈 수는 있지만, 이 문제의 해결은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터득하는 키(key)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주의 진실에 대하여 눈뜨게 되면서 가장 먼저 이해하게 된 것은 '천국-지옥론'의 허구성이었습니다. 천국론은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죽어 천국에 가서 영원토록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영원토록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견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설의 논리적 허구성은 다음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쉽게 발견됩니다.
모든 인간들을 일생동안의 선행과 악행을 근거로 한 줄로 세웁니다. 가장 착하게 산 사람을 맨 앞쪽에 세우고, 가장 악하게 산 사람을 맨 끝에 세운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중간 어느 위치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 줄로 선 상태에서, 자신과 자신 바로 앞에 선 사람 그리고 바로 뒤에 선 사람을 선악의 측면에서 비교해 본다면 그 차이는 그야말로 미미할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천국행과 지옥행으로 분류하기 위해서 연속된 그 줄의 어느 점에서 끊는다고 한다면, 과연 어디에서 끊을 수 있을까요?
어느 지점을 기준으로 천국행을 끊는다고 할지라도 기준점의 앞뒤에서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는 두 사람의 선악 차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거의 존재하지 않는 선악의 차이 때문에 한 사람은 영원히 천국으로, 한사람은 영원히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순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연옥이 추가되어 셋으로 나누어져도 마찬가지로 존재합니다. 이것은 바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극히 익숙해 있는 이원론적 사고의 모순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과 악의 개념은 우리 육신의 보호본능과 두려움의 감정에 기인한 것입니다. 뭔가 육신에 위협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악으로 간주하고 도움이 되는 것은 선으로 간주합니다. 자신의 육신에 필요한 의식주(衣食住) 그리고 즐거움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악으로 간주되고, 그것을 돕는 것은 선으로 간주됩니다. 다시 말해, 선과 악은 철저히 물질에 근거를 둔 것이고, 따라서 물질적 세계에서는 선과 악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선과 악에 대한 보통사람의 관념을 그대로 인정한 채 선과 악을 생각해 보아도 그 구분은 상대적이고 모호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법적인 측면에서의 악이라고 간주되는 것을 먼저 살펴볼까요? 우리나라에서는 간통죄가 큰 악으로 치부되지만,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또한 현대의 대부분 국가에서는 윤락행위를 악으로 처벌하고 있지만, 일부 고대 국가에서는 특별히 선택된 여인들이 신을 모시는 신전에서 윤락행위를 하였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높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장 큰 죄라고 생각하는 살인죄는 어떻습니까? 첩보원으로서 외국에 파견되어 외국의 요인들을 암살한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서 영웅대접을 받지만, 자국민들에 대하여 테러행위를 한 외국인은 극악무도한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법적인 측면이 아닌 양심의 측면에서의 선악, 즉 개인적 선악은 확실히 존재할까요? 어떤 사람이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살인한 경우,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발적으로 살인한 경우 그 행위는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이 경우, 양심의 가책 여부를 기준으로 뒤의 사람만 악을 행하였다고 해야 할까요?
선과 악은 물질세계, 현상계, 혹은 상대계에서만 통용되는 개념이고, 우주의 근원 즉 절대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등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체험을 위해서 존재하는 현상계에서는 그러한 구분이 가능하지만 보다 고차적인 세상에서는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생을 홀로그램적 관점에서 보게 되면 선악의 존재가 없음은 더욱 분명해 집니다.
깨달음이란 우주의 진실을 깨닫게 됨을 말하고, 깨달은 자란 우주와 통하게 된 사람 혹은 우주의 진실을 확실히 알게 된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깨달았다고 해서 모든 우주의 진실이 한꺼번에 머리 속에 들어와 체계적으로 정리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신, 희로애락의 감정이 거의 소멸되어 감을 느끼고, 대부분의 집착들이 사라지고 또 이원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인간이란 굴레를 벗어난 이들에게는 선과 악,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등의 구분이 공허한 것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만약 어떤 분이 아직도 그런 것을 분별하고 있다면, 그 분은 깨달음의 경지에 잠시 머물렀을 지는 몰라도, 완전한 깨달음 즉 해탈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2002년 2월 10일
출처 : 장휘용 교수 명상록 - 전체의식 속으로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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