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가까운 세월을 사람들의 의식수준을 측정하고 의식수준에 근거하여 세상을 바라보면서, 저는 인생과 우주의 많은 부분들이 의식수준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타고난 의식수준과 현재 의식수준 측정치만 가지고도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상태를 유추하고 미래를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개성이라고 부르는 많은 성품들도 그 사람의 타고난 의식수준과 연관되어 있고, 특정인의 언행은 그 사람의 현재의식과 직결되어 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학식이 높아도 쉽게 분노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언행을 하는 사람은 의식수준이 낮은 상태에 있고, 겉으로는 아무리 좋은 매너를 가지고 있더라도 항상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타고난 의식수준은 부정적 수준(200 이하)에 머물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반면, 겉으로는 무뚝뚝해도 내면에 이웃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의식수준은 아주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의식수준과 언행에 대한 관계를 이해하면서 이전에 가졌던 "저 사람은 하필이면 왜 저런 말들만 하고 왜 저런 행동들을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특정 행위는 그 당시 그 사람의 에너지 상태(의식수준)와 직결되어 있고 의식수준이란 자신이 쉽게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면서, 이 세상 사람들의 행위에 대하여 비난할 것도 칭송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정의 에너지 상태에서는 그에 따른 마음상태가 형성되고 그에 걸맞는 행위들이 자연스레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또한 역사상 악명 높았던 정치인 혹은 지도자들의 상당수가 깨달은 영혼이라는 사실은, 선과 악에 대한 우리의 이분법적 사고의 문제점과 더불어 이 세상이 영혼의 성장을 위한 무대장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강하게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인생이란 결국 주어진 연극무대에서 주어진 역할을 할 뿐으로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체험을 위하여 행하는 역할에 대하여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결국 무지(無知)에 근거한 분별심의 발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생의 많은 것을 설명해 주는 의식수준은, '진정한 앎의 수준', '에너지의 수준', '인식의 수준' 등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데, 이는 또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틀과 직결됩니다. 인식하든 못하든 사람들은 자신의 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흔히 관념 혹은 고정관념이라고 불리는 이 틀은 의식수준과는 반비례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틀의 역할은 그 틀에 맞지 않는 것을 배척하고 받아들이지 않게 만드는 장치이기 때문에, 의식의 확장 혹은 인식의 확장에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 우주와 하나 되는 것 즉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 인식의 틀은 입수되는 정보를 그 틀을 통해 판단하는 과정을 거치게 함으로써 정보를 왜곡시키고 자신의 편협성을 강화하고 포용력을 제한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성장에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이 가진 틀들을 제대로 인식하고 하나하나 제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낮을수록 보다 좁고 보다 강한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덕적, 윤리적으로 보아 훌륭한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높을 것으로 생각하고, 자유분방한 사고와 행동의 소유자들이 낮은 의식을 가진 것으로 판단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도덕군자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은 도덕이라는 강한 인식의 틀 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제한하고, 사람들을 자신의 도덕적 틀 속에서 판단하며 그 기준에 벗어난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좋은 틀, 나쁜 틀의 구분은 없으며, 모든 틀은 영적인 진화를 방해하고, 모든 것을 수용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존재의 완성'과는 역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틀을 약화시키거나 제거하는 것은 결코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인식의 틀을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것을 버리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식수준이 아주 높은 사람들 혹은 깨달은 존재들도 미약하나마 자신만의 독특한 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틀 중 일부에 대해서는 그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지혜'라고 불리는 틀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을 사는 지혜를 길러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지혜를 사람의 최고 덕목으로 꼽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이야기하고 뱀의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물질적 현실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지혜란 마찰과 갈등을 최소화시키는 슬기로움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지혜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상호간의 타협을 의미합니다. 지혜란 두뇌의 산물로서 일반인들에게는 매우 귀중한 덕목일 수 있지만, 진정한 진리를 추구하고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경계되어야 할 하나의 큰 유혹일 수 있습니다.
각자가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자신의 인식의 틀 안에서 가능한 것이고, 인생의 지혜라고 하는 것도 각자의 인식의 틀 안에서 인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지혜란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자신의 의식수준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로운 행동이라 여겨지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보여 질 수 있고, 또한 자신이 지혜롭게 행동하였다고 생각한 것이 시간이 좀 경과한 뒤에는 달리 느껴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얼마 전 저는 아주 뛰어난 에너지 리딩 능력을 가진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물의 에너지 속에 기억된 정보들을 영상, 문자 혹은 느낌들을 통하여 읽을 수 있고 또 동식물과의 대화도 가능한 분이었지만 여태까지 그 능력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분입니다. 그 분과의 만남은 제 인식의 폭을 넓혀 주었고 또 미래에 대한 느낌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 분은 제게 지금 그리고 미래에 꼭 필요한 분으로 느껴졌고 따라서 제 가까이 모시고 싶었지만, 그 분이 젊은 여성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세상 사람들의 시선과 오해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조성되는 상황이 그분의 선택을 극도로 제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높은 수련의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여겨지는 분들조차도 여전히 강한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무수히 많은 틀을 가지고 그 속에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내가 어떤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강한지, 내가 과연 그 틀들을 모두 버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한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라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틀이 만들어 낸 산물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시시각각 옥죄고 있는 인식의 틀에서 벗어날 때 그리고 지혜라고 불리는 유혹에서조차 벗어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으며, 진정한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세상, 그것이 바로 다가오는 미래의 모습일 것입니다. 저는 지금 그 세상을 간절히 염원하고 있습니다.
2002년 5월 21일
출처 : 장휘용 교수 명상록 - 전체의식 속으로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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