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7월도 중순으로 접어들었습니다. 6월 한 달 내내 한반도를 축구와 응원의 열풍으로 달아오르게 하였던 2002년 월드컵도 우리 민족사에 큰 획을 그은 채 물러갔습니다. 2000년 이상의 오랜 세월동안 계속되는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상처받고 위축되기만 하던 우리 민족이었지만, 이번 월드컵을 통해 그동안 쌓였던 한(恨)이 일시에 씻겨 나가는 민족적 해원(解寃)이 이루어지고, 민족적 자긍심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월드컵 기간동안 수행자들의 또 다른 관심은 얼마 전 발간된 한 예언서에 수록된 한국팀의 월드컵 성적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대각(大覺)을 이루었다고 하는 분의 예언이었던 만큼 그것의 적중 여부는 수행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기에도 충분하였습니다. 결국 빗나간 예언과 세속적인 대응을 두고 예언 당사자에 대한 깨달음 시비를 불러 왔고, 또 깨달은 자의 사회적 책임 논란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알게 모르게 수행하는 사람들이 상당수에 달하고, 또 그들 중에는 스스로 혹은 주위 사람들에 의하여 도를 통했다, 깨달았다 혹은 대각을 이루었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깨달음이란 근본적으로 개인적, 주관적인 것이고 또 아직도 깨달음의 판단 기준은 극히 모호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깨달음 여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도 특정인의 깨달음 논란은 심심찮게 계속될 것입니다.
수행을 오랫동안 해 온 사람일수록 그리고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수행 경지에 대하여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특히 수행자가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경우 자신이 깨달았다는 착각에 쉽게 빠질 수 있습니다. 일단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수행의 진전은 이루어지기 어렵고, 대신 자만심과 오만함이 증폭되어 의식수준은 상당히 저하될 수 있습니다. 몇 번의 특별한 수행 체험을 하였다 해도, 마음은 여전히 욕망의 늪에 빠져 있고 세상일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면,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의 사회적 책임 문제는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깨달은 자에게 책임이란 어떤 의미가 있느냐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극히 한정적이었지만 머지 않은 장래에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을 것을 예상해 볼 때, 깨달은 자의 책임 문제는 향후에 중요한 이슈로 등장할 수 있습니다.
사실 현재의 제 상황도 깨달은 자의 책임이라는 문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제가 명상록 등의 글을 통해 몇 차례 깨달음에 대해 언급한 것은 제 스스로 그런 경지에 있음을 암묵적으로 시인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약 두 달 전 있었던 모임 중단 선언이 일부 사람들에게 잘못 이해되어 제 자신의 사회적 책임문제가 거론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그리고 형제로서의 책임을 소홀히 한다는 강한 질책을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받고 있기도 합니다.
명상록의 글 〈지금 내가 갈 길은〉 을 통해, 제가 제 스스로를 100% 확실하게 자각하게 될 때까지는 모임을 중단하고 자숙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선언하였지만, 이는 제가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반성을 하겠다든지 혹은 그 동안 진정한 깨달음의 상태에 있지 않았다는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제 스스로를 바라보아도 저는 분별심, 집착, 감정적 기복 혹은 인식의 범위 등의 측면에서 일반인들과는 너무나 다른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책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를 발간한 이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인생과 우주의 진실 그리고 앞으로의 세상에 대하여 이야기해 왔지만, 이제까지의 제 생각이나 언행이 잘못되었다든지 사람들을 오도했다는 느낌은 전혀 갖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제 존재에 대하여 전해 받은 정보들이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기에 그것을 스스로 100% 자각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보다 많은 명상을 할 필요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입니다. 제 자신과 제 역할에 대하여 보다 확실히 자각하기 전에는 모임을 재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상황이야 어떻든, 깨달음과 책임의 관계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깨달은 자란 기존의 관념들에서 벗어난 사람인데, 그들에게 현실적 책임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있다면 어떤 책임이 있을까요? 달리 표현한다면, 깨달음의 관점에서 본다면 책임이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문제를 거론하기 위해서는 먼저 깨달음 그 자체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과 깨달음에 대해서는 이미 명상록의 글에서 비교적 자세히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깨달은 사람들이 느끼는 깨달음이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수행자들의 일반적 견해와 달리, 깨달음이란 전생에 이미 깨달은 영혼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환생하여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자신의 본래 의식을 되찾는 과정을 주로 일컫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깨달은 영혼이 본래의 의식수준을 회복할 때 도달하는 의식수준은 각각 상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본래 타고난 의식수준이 800 정도인 사람이 깨닫게 되면 그의 본래 에너지 수준인 800 내외 수준으로 회복하지만, 만약 타고난 의식수준이 900인 사람이 깨닫게 되면 그는 900 내외의 에너지 수준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에너지 800 수준으로 깨닫게 되는 사람과 900 수준의 의식으로 깨닫는 사람 간에는 큰 차이가 있고, 따라서 이들이 깨달음에 대하여 조금씩 달리 표현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일일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깨달음에 대한 완전 일치된 견해는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것이고, 단지 깨달은 사람 혹은 상태의 공통점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깨달음과 책임에 관한 문제도 결국 깨달은 자의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개인적인 의견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 자신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책임감이 투철하고 의리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40대 중반을 넘어서까지 업무와 가족, 친지, 친구, 동료들에 대한 책임감과 의리는 아주 강한 편이었고,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노력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순진하다", "어리석다" 혹은 "곰 같다" 라는 평을 들으면서 제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제가, 심신이 극도로 피폐된 상태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겠다는 심정으로 기수련을 시작하였고, 이를 계기로 아주 짧은 시간에 수행이나 깨달음 등에 대한 의미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그 변화들 중 가장 쉽게 인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관계에 대한 것이었고, 특히 아내에 대한 마음의 변화였습니다.
결혼해서 근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너무나 맞지 않는 힘든 부부관계를 경험해 온 저에게, 아내의 언행은 거의 항상 불만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수련한 지 불과 3~4개월이 지난 어느 날부터, 아내가 해 주는 하나하나가 모두 고맙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기대했던 어떤 일을 해 주지 않아도 아무런 불만이 생기지 않는 제 자신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아내와의 관계에서부터 확연히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사실은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저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요구하는 것이 사라지고, 아빠로서 자식들에게 요구하는 것도 없어졌으며, 친지들과 친구들에 대한 기대와 바램도 사라져 버렸고, 심지어는 상거래에 있어서의 마음자세까지도 변화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오랫동안 경제학과 경영학을 연구하며 익숙해져 있던 주고받기(give-and-take)의 관념도 희미해져서, 나에게 필요한 물건을 제공하는 상인들에게도 너무나 고맙다는 느낌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변화는 제가 성자 혹은 사랑과 자비의 화신으로 바뀌면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변화는 제가 모든 세상사 그리고 관계들에 관한 기존의 관념들에서 벗어나고, 모든 것들이 새로운 의미로 정립되기 시작하면서 자연히 생긴 일이었습니다. 인생이란 결국 자신의 체험을 위해 펼쳐지는 연극무대와 같은 것이고, 이 연극에서는 누구의 잘잘못도 없고 성공이나 실패도 없으며, 성공했다고 거들먹거리는 자도 그리고 실패했다고 비통해 하는 자도 모두 각자에게 필요한 체험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은 인간의 근본적인 두려움인 외로움을 극복하고 소유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할수 있는데, 이러한 상호 속박은 우리 영혼의 본성인 자유로움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좀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사람들이 여러 관계들 속에서 서로를 속박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본래 자유스런 영혼임을 깨닫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관념과 잘못 설정한 관계를 경험하면서,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우리에게 맞지 않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본성에 따른 자연스러운 관계는 서로를 사랑 속에서 대하고 아무런 요구 없이 베푸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무언가 대가를 바라는 모든 관계들은 무명(無明) 속의 인간 의식이 만들어낸 사회적 장치인 것입니다.
깨달은 자란 인간관계에 대한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그들이 그렇게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관념과 제도를 거부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들에게 부부 혹은 가족이라는 인위적인 관계는 반드시 존중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며, 대가를 전제로 한 모든 사회적 관계들은 인간의 영혼을 속박하는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것이며, 보다 높은 의식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뀌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이미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사람에게 배우자로서 혹은 부모로서의 의무를 강요하고, 그것을 거부할 때 책임감 없는 이기적인 인간으로 매도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진리를 터득하고 그 진리에 따라 살려는 사람에게, 진리를 벗어난 인간의 제도를 강요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굴레들을 벗어난 존재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또 어떤 효과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석가모니의 출가나 원효대사의 행적들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경외심을 가지면서, 동시대의 깨달은 자에 대해서는 현실 혹은 책임이라는 잣대로 판단한다는 것은 모순된 일입니다.
제가 미래를 미리 계획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중단한지 벌써 몇 년이 되었습니다. 요즘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두뇌를 쓰지 않고 느낌에 주로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 인생의 프로그램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그러한 삶이 가장 바람직한 인생을 사는 방법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의 삶이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변덕스럽게 보일 수 있고 또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모든 욕심을 버리고 오직 영혼의 느낌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일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런 삶을 살아야한다고 강요할 수도 없지만, 그런 삶을 포기하라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2002년 7월 14일
출처 : 장휘용 교수 명상록 - 전체의식 속으로 中에서
'장휘용 > 장휘용 교수 명상록-전체의식 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 에너지 공간에서의 만남 (0) | 2021.12.12 |
---|---|
18. 독서를 통한 수행 (0) | 2021.12.12 |
16. 지금 내가 갈 길은… (0) | 2021.12.12 |
15. 자신을 바라보기(Ⅱ) - 인식의 틀 (0) | 2021.12.12 |
14. 자신을 바라보기 (0) | 2021.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