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휘용/장휘용 교수 명상록-전체의식 속으로

18. 독서를 통한 수행

기른장 2021. 12. 12. 14:55

최근의 정보기술 발전과 인터넷의 대중화는 정보의 대량 확산을 가속화시키며 수행 문화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제까지 비전(秘傳)되어 오던 경전이나 수련법들이 새로 알려지고 채널링 정보들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등 정신세계에 관한 다양한 지식과 정보들이 빠른 속도로 전파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행 정보의 확산으로 요즘의 많은 수행자들은 일상적 생활을 중단함이 없이 독서를 위주로 정신세계 강의 혹은 영성 모임에의 참석 등을 병행하며 수행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한 스승을 섬기며 몸 수련을 통해 하나씩 깨쳐 나가던 과거의 수행자들과는 크게 달라진 모습입니다.

사실 독서란 손쉽게 그리고 단시간에 많은 정보와 지식을 흡수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행 방법입니다. 수행이란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던 것을 하나씩 깨우쳐 나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의 수행자들에게는 전생까지의 체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하나씩 되살려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독서는 자신의 오라에 저장된 기억을 효과적으로 되살려내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수행에 있어서 독서의 역할을 잘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독서 위주의 수행에 따른 한계와 위험에 대해서도 충분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수행자들에게 독서의 한계를 이야기하고 있고, 수행이 이미 상당한 경지에 오른 분들을 만나면, 되도록 독서를 줄이고 명상을 늘일 것을 조언합니다.

특히 이미 깨달음의 의식으로 도약한 분들에게는 필요한 정보나 진리는 명상 가운데서 저절로 떠오르거나 자연스럽게 정리될 것임을 이야기하고, 서둘러 정보를 외부에서 구하려고 할 필요가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독서란 오라 속에 기억된 '앎'을 되살리는 자극제 역할을 하지만, 일단 한번 잘못 입력된 정보는 내면의 '느낌'과 충돌을 일으켜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향후의 수행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 할지라도 독서만을 통한 수행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수행의 진척은 지식의 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일상 생활 혹은 수행 가운데서의 체험 혹은 감동을 통해 진정한 앎이 하나하나 축적되면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몸을 통한 수행 (예: 명상, 참선, 기수련, 요가 등)이 병행되지 않는 경우 독서는 수행자를 사변적(思辨的)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고, 자신의 한정된 지식에 근거하여 논리적으로 이끌어 낸 생각들을 우주의 진실인 양 여길 위험성이 존재합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광대무변의 우주에 대하여 극히 제한된 지식과 정보에 근거하여 이끌어 낸 결론이란 그 과정이 아무리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 할 지라도 우주의 진리와 동떨어질 가능성은 매우 큽니다.

수행에 있어서 논리적 사고를 과신할 수 있는 위험 사례로서 시공간(時空間)의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상당수의 뉴 에이지 서적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석가모니의 설법 그리고 수련상의 체험 등에 근거하여 시간과 공간이란 실재하지 않는 하나의 환상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부 수행자들은 이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근거로 논리적 추론을 계속합니다.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시간의 흐름을 전제로 하는 전생과 윤회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허구라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러한 주장은, 거듭되는 수많은 생을 살면서 체험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 것으로 알고 있는 다수의 수행자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오감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주어진 공간 속에서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확실히 느끼고 있는데,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과연 사실일 수 있을까요? 우리가 현실이라고 느끼는 모든 것이 정말 인류의 집단적 착각일까요? 그렇다면 과연 전생과 윤회도 없는 것일까요?

시공간의 문제와 같이 우리가 몸으로 확실히 느끼는 것을 별다른 논거(論據)나 스스로의 특별한 체험 없이 오직 외부 정보에 의존하여 부정하고자 할 때, 우리의 마음은 불편함을 느끼고 혼란스러워 합니다. 자신이 몸으로 받아들이는 느낌과 상충되는 정보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아무리 외쳐보았자 결코 자신의 앎으로 되지 못하고, 오직 수행상의 혼란을 초래할 뿐입니다.

오감으로 그냥 인식되는 것과 상충되는 명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을 통한 깨달음입니다. 시공간의 문제 역시 자신의 수행 혹은 체험을 통해 시공간이란 오직 우리의 체험을 위하여 제공되는 가상현실의 배경일 뿐임을 확연히 깨달을 때 해결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없이 외부의 정보에만 근거하여 시공간이 없다는 것을 아무리 반복적으로 머리에 주입해도 그것만으로는 결코 참된 이해에 다다르지 못합니다.

시공간의 문제와 관련하여 수행자들이 알아야 할 사실은, 인간이란 다차원적인 존재이고 이 우주는 여러 차원이 겹쳐 있다는 것입니다. 인체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3차원의 물질세계에서 오감으로 인지되는 육체를 비롯하여, 그것을 감싸고 있는 진동수가 각기 다른 일곱 개의 에너지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실제 그보다 더 많은 층이 있을 수 있음). 따라서 인간은 선(1차원)과 면(2차원)을 포함해서 모두 10차원에 걸쳐서 인지될 수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한 차원에서 적용되는 논리를 다차원적 존재와 다차원적 세상에 대하여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3차원의 물질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근거로 이끌어 낸 결론을 4차원의 세상에 적용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논리의 전개가 아닙니다. 특히, 다차원적 시각에서 볼 때, 시공간의 문제와 같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그 존재를 확실히 인식하고 있는 것을 환상 혹은 착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부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다 적절한 해석은, 한 차원에는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지만 다른 차원 혹은 더 높은 차원에서 볼 때는 더 이상 같은 모습 혹은 같은 의미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생과 우주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차원적인 접근 없이 오직 한 차원에서의 논리만으로 풀어갈 때, 그 결과는 진실과 크게 동떨어진 것이 될 수 있습니다. 3차원 물질계에는 분명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고, 따라서 우리는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 주어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물질적 체험을 위해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들에게 시공간 즉 현실은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고 또 전생과 윤회도 확실히 존재합니다. 인간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존재라는 것은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3차원의 현실을 인식하고 있는 한, 시공간이 없다는 주장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공허한 것입니다.

뉴 에이지 서적에서 많이 언급되는 또 다른 주장은, '우리 모두는 하나(Oneness)'이고, '우리는 모두 신(神)'이며 '깨달은 존재' 라는 것입니다. 이들 주장들은 뉘앙스나 구체적 내용 면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동일한 존재임을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들을 깊은 이해 없이 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수행자 자신에게 큰 혼란을 줄 수 있고, 석가모니가 말한 '근기', '의식수준' 그리고 더 나아가 '깨달음'의 개념을 부정하게 됩니다.

다수의 뉴 에이지 서적들이 모든 인간이 하나임을 주장하고 있지만, 거기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나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책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가 이 문제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근거를 제시한 서적일 것입니다. 이 책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에너지의 세상이고 모든 존재들은 에너지체들이며, 우리 모두는 결국 하나의 근원적 에너지에서 파생된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허공에는 우주의 모든 존재를 잉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근원적인 에너지인 천지기운이 가득하다. 이 근원적인 에너지에서 바깥으로 뻗어져 나오면 나올수록 점점 특정한 정보를 가진 에너지가 강해지고, 마침내는 이 특정의 에너지가 하나의 개별화된 존재로서 나타나게 된다. 나와 너, 그와 그녀 그리고 각각의 동식물들 모두가 특정의 에너지가 강해지면서 개별화된 존재이다 "

우리 모두는 하나의 근원적 에너지('천지기운')로부터 나온 존재이기에 하나라고 할 수 있고, 또 근원적 에너지는 창조주 혹은 신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신이라는 표현도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며, 신은 스스로를 완전히 자각하고 있기에 우리 모두는 깨달았다는 말도 헛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애초에 하나의 근원적 에너지로부터 나왔고, 현재도 그 근원적인 에너지와 연결되어 있고, 언젠가는 의식의 확장을 통하여 그 근원적인 기운과 완전한 일체인 상태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의미를 잘못 인식하거나 확대 해석하는 것은 수행상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나' 라는 존재는 결국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달려있고, 나 자신을 너와 완전히 다른 존재로 인식하면서 우리가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을 기망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나의 육체는 너의 육체와 다르고, 나의 마음과 영혼은 너의 마음, 너의 영혼과 분명히 다르다는 인식은 너와 내가 하나라는 인식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깊은 명상이나 체험을 통해 '우리는 모두 하나' 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그 깨달음이 자신의 의식을 크게 확장시키고 자신의 인생 항로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큰 힘이 됩니다. 반면 머릿속에서 하나의 지식으로만 자리잡고 있는 사람에게, 그 지식은 오히려 자신의 내면에 있는 다른 사람에 대한 분별심을 위장하는 역할을 하게 되고, 따라서 수행에 오히려 지장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은 반드시 몸을 통해 확인되면서 '분리의식'이 '통합의식'으로 바뀌게 될 때 그 진정한 의미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세상이 바뀌어 수행에 관한 다양하고 유익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수행에 있어서 독서의 중요성은 더욱 증대되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수행은 결국 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따라서 독서는 몸 수련과 병행하여 이루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독서만을 통한 수행의 효과는 제한적이며, 잘못하면 자신의 수행이 오히려 방해받을 수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2002년 7월 15일

출처 : 장휘용 교수 명상록 - 전체의식 속으로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