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들 의식수준을 이야기하지만 그 의미는 말하는 사람에 따라 크게 다릅니다. 물질세계만을 인식하는 사람이 "그 사람은 의식이 낮아!"라고 말한다면 교양, 예의범절 혹은 지식의 수준을 이야기할 것이지만,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말할 때는 호킨스(David Hawkins) 박사가 말하는 의식수준(level of consciousness)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호킨스 박사는 의식수준을 '세상을 판단하고 분석할 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인식방식 혹은 두뇌의 작용'으로 정의하면서 의식의 지도, 즉 의식수준에 따라 나타나는 특징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식수준 100에서의 주된 마음의 상태는 두려움, 200에서는 용기, 400에서는 이성(理性), 500에서는 사랑, 그리고 600에서는 평화가 주된 상태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호킨스 박사가 말하는 의식수준의 개념은 매우 추상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이따금씩 의문이 생깁니다. 특히 의식수준이 아주 낮은 사람들은 무기력감, 두려움 등의 상태에 머무르게 되고 반대로 의식이 아주 높아지면 사랑, 환희, 평화의 상태에 젖게 된다고 알고 있는데, 의식수준의 본질이 무엇이기에 그것에 따라 마음의 상태가 그렇게 달라질 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또한 운동역학 혹은 다른 방법들을 통해 의식수준을 측정해 온 분들의 경우, 호킨스 박사가 제시한 의식의 지도가 잘 맞지 않은 경우를 적지 않게 발견합니다.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오랫동안 수련하고 있는 어떤 사람은 마음의 평화를 경험하고 있지만 그의 의식수준은 500에 채 미치지 못하고, 반대로 마음 수련이 되어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감정으로 요동치는 한 젊은이의 의식수준은 600에 육박해 있는 경우가 그 예입니다.
이 경우 측정자의 측정치가 크게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호킨스 박사의 의식지도가 정확하지 못한 것인지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일부 사람들은 의식수준의 의미를 평가절하하거나 의식수준 이외의 다른 정보들, 예를 들어 영혼의 나이 등도 영적인 정보로서 중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의식수준에 관련된 여러 의문점들은 의식수준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해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사람들 대다수는 인간의 본질이 진화하는 영혼임을 받아들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서, 태어나고 죽고하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무수한 체험을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진정한 앎은 조금씩 증가합니다. 이렇게 서서히 성장해 가는 영혼의 상태를 측정하는 지표가 의식수준이고, 따라서 의식수준은 곧 '진정한 앎의 축적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이야기한다면, 의식수준은 인간이란 영적인 존재이고 영혼은 점차적으로 진화해 간다는 개념에 입각한 것으로서, 영적인 진화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인 것입니다.
호킨스 박사가 제시한 의식의 지도는 의식수준을 '진정한 앎의 축적 정도'로서 인식할 때, 보다 확실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체험을 통한 앎이 부족한 영혼일수록 무지(無知)에서 오는 두려움과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앎이 부족할수록 우리 모두는 하나라는 것에 대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자신을 다른 존재로부터 자꾸만 분리시키며, 눈에 보이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게 됩니다. 따라서 의식수준이 낮은 존재일수록 두려움, 공포, 무기력감, 이기심 등이 그 특징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반대로 앎이 커질수록 인생을 살아가는 데 용기를 갖게 되고, 다른 존재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며, 우리 모두 하나임을 점차적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사랑은 커지고 마음은 평화로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의식수준을 또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인식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런 체험이 없는 무지(無知) 상태의 영혼은 자신이 다른 존재들로부터 분리되고 격리된 것으로 느끼며, 따라서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러 생을 반복하면서 자신 이외의 존재들의 중요성을 이해하게 되면서 이웃을 생각하게 되고 자신이 속한 집단, 민족, 국가, 인류 그리고 더 나아가 우주를 인식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식의 확장은 곧 다른 것, 다른 존재에 대한 수용 및 포용을 의미하게 되는데, 이 것이 곧 의식의 확장입니다. 따라서 의식수준은 곧 자신 이외의 것을 얼마나 많이, 얼마나 폭넓게 포용하느냐 하는 것과 직결됩니다.
이런 점에서 의식수준은 우리가 가진 인식의 틀, 즉 관념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의 인식을 제한하는 관념들 하나하나는 자신을 다른 존재들과 분리시키는 역할을 하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거나 수용하는 데 걸림돌이 됩니다. 보다 강한 관념을 가진 사람일수록 그리고 보다 많은 관념을 가질수록 수용성과 포용성은 떨어지고, 따라서 의식수준은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각자가 가진 수많은 관념들을 하나하나 허물고 녹여 낼 때 의식은 상승하기 마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마음공부의 정도는 의식수준의 결정적 요인은 아닙니다. 희로애락의 감정변화를 많이 느끼고 시기, 질투, 분노 등의 감정이 생긴다고 해서 의식수준이 크게 저하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감정들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남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마음이 아주 작은 상태에 머무른다면 의식수준은 낮을 수 밖에 없지만,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일시적으로 감정의 격랑에 휩싸인다고 해서 의식이 급격히 저하되지는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의식수준의 상승은 마음공부를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우리의 인식을 확장시키는 영성모임에의 참석 혹은 독서 등을 통해서 더욱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의식수준은 교양, 인품 등과도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교양이란 드러나는 겉모습을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교양 있고 겉으로 잘 참고 원만하다고 해도 그것은 의식수준과 별개인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교양을 중요시하는 사람일수록 진실되지 못하고 따라서 의식수준이 높지 못한 경향이 있습니다. 인품 역시 인간적 기준으로 겉모습을 바탕으로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수준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의식이 상당히 높아지면 세상에 대한 사랑이 증가되어 인품이 훌륭한 사람으로 간주되지만, 의식이 더욱 높아지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되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의식수준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앞서 언급한 의식수준에 대한 많은 의문들은 자연히 해소됩니다. 제 경험을 이야기한다면, 5년 전 처음 의식수준을 측정하기 시작하였을 때 개개인의 의식수준 측정치가 제 예상과는 크게 빗나가 의아하게 생각한 경우가 많았고, 그것이 의식수준의 개념 그 자체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측정치가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경우는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특정인의 언행과 느낌을 바탕으로 예상되는 의식수준은 실제 측정치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는 의식수준 측정의 정확성이 제고되어서가 아니라 의식수준의 개념을 보다 확실히 이해하게 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얼마 전까지 저는 '현재 의식수준'과 '타고난 의식수준' 두 가지를 측정해 왔습니다. 현재 의식수준이란 글자 그대로 현재 의식수준이 얼마인가를 나타내는 것이고, 타고난 의식수준은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윤회를 하는 가운데서 그 존재가 도달한 가장 높은 의식수준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중에서도 '타고난 의식수준'이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었는데, 자신이 한번이라도 도달해본 수준까지 의식을 확장시키는 것은 비교적 쉽게 이루어지지만, 그 이상으로의 확장은 몸을 통해 어렵게 체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노인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의 경우 현재 의식수준은 타고난 의식수치를 상당 수준 밑돌고 있는데, 두 의식수치를 비교함으로써 수행을 통해 비교적 쉽게 의식을 성장시킬수 있는 정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현재 및 타고난 의식수준 수치를 근거로 그동안 많은 수행자들에게 조언해 왔지만, 최근 그 정보가 일부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 나름대로 정리한 '타고난 의식수준'의 정의와 관계가 있습니다.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는 영혼은 크게 둘로 구분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영혼들은 지구상에서 진화되어 왔지만 일부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 혹은 사명을 지니고 별에서 온 경우입니다. 지구상에서 계속 진화한 영혼의 경우, 타고난 의식수준은 영혼 진화의 정도를 잘 포착하지만, 별에서 온 존재의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발견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여자 분의 경우 우주에 있을 때는 800을 훌쩍 뛰어 넘는 의식의 소유자였지만, 지구상에서는 매우 격렬하게 저항하는 삶을 주로 살아왔고, 그 때문인지 수십번의 윤회를 통해 체험한 의식수준의 최고치는 600 전후였습니다. 이 경우 타고난 의식수준으로 측정되는 600이란 숫자는 그 분 영혼의 진화 정도를 크게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본래 우주에 있을 때의 의식수준이 '타고난 의식수준'을 크게 능가하는 경우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유념할 것은, 인간이 윤회를 통해 점차적으로 의식 상승(=영적 진화)을 이루어 나가는 존재이긴 하지만, 의식수준은 시간과 더불어 직선적으로 상승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전생보다는 현생, 현생보다는 내생의 의식수준이 반드시 높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각 생에서는 나름대로 독특한 체험과 역할이 주어지기 때문에, 각 생의 특징에 따라 의식수준은 상당히 다르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경우 2000년 전 한 수행하는 여성으로 살 때의 의식이 700 전후였지만, 700년 전 티벳 승려로 살 때의 의식수준은 800대 후반이었고, 그리고 100년 전 미국에서 여성 사업가로 활약할 때의 의식수준은 400대였습니다.
이상의 의식수준 논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의식수준은 이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개념입니다. 인간이란 진화하는 영혼의 존재인데, 그 진화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 의식수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다른 여러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의식의 측정은 측정자의 필터(=측정자가 가진 틀)를 거쳐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결코 100% 진실된 측정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보다 높은 의식의 소유자가 측정하는 수치일수록 보다 신뢰성 있는 정보를 제공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제까지 저는 많은 사람들의 의식수준을 측정해 오면서 그 정보가 함부로 남용되거나 오용되는 것을 피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의식수준 정보의 의미를 더 크게 느끼기에 그 측정 오류를 줄이고자 노력해 왔고, 또 그 정보가 함부로 공개되거나 가볍게 여겨질 만한 언행을 자제해 줄 것을 조언해 왔습니다. 또한 자신의 의식수준을 가장 급격히 떨어뜨리는 것은 '영적인 오만'임을 말하고, 진정으로 의식수준이 높은 존재의 특징은 겸손함이라는 사실을 강조해 왔습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진화 선상에 있고 언젠가는 모두 창조주의 의식으로 변할 존재들이기에, 지금 의식이 높은 '선배'들이라고 해서 뒤쳐진 '후배'들을 깔보거나 업신여기지 말아야하며 우리는 모두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갈 뿐임을 여러번 이야기해 왔습니다.
우주에는 결코 우연이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석가모니가 '근기'라는 개념을 제시한 이후 2500년이 지나서 호킨스 박사에 의하여 '의식수준'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것이 한국에서 더 발전되어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에는 분명히 하늘의 뜻이 담겨 있다고 여겨집니다. 제 개인적으로 볼 때, 호킨스 박사가 '의식수준'의 개념을 제시하고 그 측정이 가능함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의식수준의 측정을 통한 많은 깨달음과 각성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제가 몇 년 동안 만나온 많은 분들이 특별한 존재임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며, 지금 진행되고 있는 지구의 차원상승에 대하여 지금과 같은 확신을 갖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특별히 높은 의식을 타고났다고 이야기 드린 분들중 상당수는 이미 깨어났고, 또 보다 많은 분들은 이제 깨어 나고 있습니다. 이 분들 대다수는 제가 전해 드린 의식수준 정보의 중요성과 신뢰성을 받아들일 것이며, 뭔가 할 일이 있어 이 지구라는 별에 와 있음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이런 분들을 통해 의식수준의 진정한 의미는 이해되기 시작할 것이며, 의식수준에 관한 현재의 논란들은 점차 소멸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2003년 10월 27일
출처 : 장휘용 교수 명상록 - 전체의식 속으로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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