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휘용/장휘용 교수 명상록-전체의식 속으로

24. 깨달음이 더이상 우리의 화두(話頭)가 될 수 없는 이유

기른장 2021. 12. 17. 22:04

지금까지 지구에서 삶을 영위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생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들은 오감으로 느껴지는 물질과 육체를 전부인 양 인식하고, 물질을 획득하고 소비하는데 전력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대중들 속에서 극히 일부는 보이지 않는 세상의 존재를 인식하고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며 자신의 본성을 밝히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물질만을 추구하는 일반인들과 구별하여 인생의 참된 길을 추구하는 사람이란 의미에서 '구도자'라 부르기도 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닦아나가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수행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들 구도자 혹은 수행자들은 영적 스승들의 가르침과 스스로의 자각을 통해 인간의 본질은 영혼이고, 영혼은 육신이 죽어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 불멸의 것임을 알게 됩니다. 또한 인간은 윤회의 굴레 속에서 태어나고 죽는 과정을 무수히 반복해 왔음을 알게 되고, 깨달음만이 자신의 영혼을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빠져나오게 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에 따라 수행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목표를 '깨달음(見性)'으로 정하고 이에 매진하게 됩니다.

구도자들의 깨달음에 대한 열망은 수많은 논란을 야기하여 왔습니다. 깨달음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에서부터 시작하여 깨달음의 현상은 어떻게 다가오고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논쟁들이 이어져 왔습니다. 많은 수행자들은 깨달음이란 부처가 되는 것 즉 성불(成佛)로 인식하거나 인간완성의 의미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일부 수행단체에서는 깨달음을 몸과 마음의 상태를 기준으로 여러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특정의 상태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는 것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일부 수행자들은 마음의 귀를 통하여 들리는 소리의 종류에 따라 깨달음의 단계를 나누기도 하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깨달음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는 수행자도 있습니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도 수행자들 사이에 깨달음에 대한 대체적인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내면의 불성 즉 본성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마음의 절대적 평화를 회복하며, 윤회의 틀에서 벗어나 더 이상 지구에 머무르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윤회가 어떤 원칙 하에서 혹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지만, 고통스런 삶이 계속되는 윤회에서 벗어나고픈 열망이 수행자들에게 깨달음에 대한 집착을 부채질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수행과 깨달음에 대한 대다수 수행자들의 인식에 대하여 생각해 볼 문제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대다수의 수행자들은 일상을 떠난 수행이란 항상 좋은 것이고, 일상적인 삶은 수행과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진정한 이유가 생생한 체험을 통해 진정한 앎을 축적하는 것임에 동의한다면, 수행이라고 불려왔던 행위와 일상생활을 구분해서 인식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진정한 앎은 수행을 통해서도 물론 축적될 수 있지만, 하루하루의 일상을 통해서도 쌓여 간다는 것입니다.

굳이 수행과 일상생활을 비교하자면 축적되는 앎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배우게 되는 다양한 관계들 중에서 수행자의 삶을 살아 갈 때는 하늘, 우주, 절대자와의 관계 등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배우게 되고, 반면 일상적 삶에서는 다양한 인간 관계들에 대하여 주로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영적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앎이 다른 앎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고, 따라서 수행자의 삶이 비수행자의 일상적인 삶보다 더 소중한 것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각 영혼의 진화정도 및 그 때까지 축적된 앎에 비추어 보아 보다 시급한 체험과 덜 시급한 체험이 있을 뿐입니다.

깨달음과 관련해 수행자들에게 비교적 덜 알려져 있거나 잘못 알려져 있는 것은 근기(根氣) 혹은 의식수준과의 관계입니다. 특히 대다수의 불가 수행자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불성이 있고 따라서 누구나 바르게 수행하면 바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명상록의 다른 글들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인간이란 무수한 삶을 거듭해서 사는 가운데 조금씩 깨우쳐 가는 존재입니다. 깨우침 혹은 진정한 앎의 축적은 생생한 체험을 통해서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며 결코 일시에 이루어 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계기로 혹은 별다른 계기가 없이도 갑자기 깨달음을 얻게 되는 사람을 발견하는데, 이를 근거로 깨달음은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 즉 돈오(頓悟)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관찰의 결과입니다. 이번 생의 관점에서 볼 때는 갑작스런 깨달음이라고 보여 지겠지만, 오랜 윤회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별안간 일어나는 깨달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수한 전생의 삶을 통해서 이미 충분한 앎이 축적되었기에 이번 생에서의 깨달음이 가능한 것이고, 전생까지의 축적된 앎이 부족한 사람 즉 근기가 부족한 사람은 현생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깨달음을 얻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깨달음을 '진정한 앎이 충분히 축적되어 임계점(臨界點)에 도달한 상태에서 무언가를 계기로 갑자기 겪게 되는 특별한 체험'으로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수행자들의 깨달음에 대한 집착이 헛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앎의 임계점에 도달하거나 접근한 사람에게 깨달음의 체험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다가오지만, 그렇지 않은 수행자에게 깨달음은 이루어질 수 없는 하나의 꿈일 뿐입니다. 그 꿈은 이번 생에서 아무리 특별한 수행을 계속한다고 하여도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꿈은 그냥 하나의 집착으로 남게 되고, 그 깨달음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수행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는 근기에 대해서 언급하며 영혼은 오랜 윤회를 통해서만 조금씩 진화되는 것임을 시사했지만, 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수행자들은 많지 않아 보이고, 수행자들을 지도하는 승려들은 이런 저런 이유에서 이에 대한 언급을 가급적 회피하는 듯 보입니다. 누구든지 수행하면 이번 생에서 깨달을 수 있다는 유혹적인 이야기 속에서 수행의 중요성은 왜곡되고 과장된 채 전달되어 온 것으로 보입니다.

깨달음이란 서두른다고 단시간에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알고 보면 그것을 빨리 얻으려고 조급해 할 이유도 없습니다. 모든 영혼은 결국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거쳐 진화하며, 배워야 할 모든 것을 배우면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게 됩니다. 먼저 가는 자는 자신이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을 이미 배웠기 때문에 앞서 가는 것이고, 뒤에 오는 자들은 자신보다 배움이 늦었기에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결코 앞서가는 자를 부러워 할 것도 없고, 뒤에 오는 영혼을 얕볼 이유도 없습니다. 각자는 그저 자신의 길을 갈 뿐입니다. 깨달음도 진정한 앎이 충분히 축적되면 언젠가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수행자들이 깨달음이란 화두를 집어던져야 할 또 다른 이유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구의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의식수준이 다양한 영혼들이 모여 사는 지구에서 겪게 되는 독특한 체험입니다. 이제까지 지구는 다른 우주와 차단된 채 인간의 몸을 받고 태어난 존재들이 힘들고 생생한 체험을 하는 물질행성이었고, 지구 영혼의 관점에서 깨달음은 대자유를 얻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지구는 변화 중이고, 머지않은 장래에 지구의 성격은 완전히 바뀌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지구는 영혼들의 특별 수련장으로서 우주에서 고립된 상태에서 다른 우주와의 왕래가 원칙적으로 두절되어 있었지만, 새로 거듭나는 인류는 우주와의 다양한 통신채널을 갖추고 다른 우주와 자유로이 교통하는 완전한 우주인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영혼들의 지구 밖 이동을 제한해 왔던 윤회 시스템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깨달은 존재만이 지구를 벗어나 대자유를 누리는 그러한 일도 사라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구에 있는 영혼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녔던 진화상의 특별한 사건 즉 깨달음은 이제 곧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와 더불어 '수행'이란 말과 '깨달음'이란 말도 차차 사라질 것입니다. 생활이 곧 수행이고 삶이 곧 수행이 되는 때가 되면 굳이 수행이란 말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구상에 머무는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우주인으로 거듭나게 됨에 따라, 영혼의 진화상 특별한 의미를 지녔던 깨달음은 더 이상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모든 것이 급속히 바뀌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주의 모든 것은 항상 바뀌고 있지만, 지금의 지구는 현대 문명이 시작된 이후 겪어 보지 못한 특별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그 변화는 에너지적 변화로부터 시작되어 물질적 변화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지금까지 정통적이라고 간주되어 왔던 많은 가르침들의 의미와 중요성도 바뀌고 있습니다. 시간이 진행될수록 과거의 가르침들은 점점 그 의미를 상실해 갈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진리라고 생각해 온 옛 성자들의 가르침도 재해석될 것입니다.

불교나 기독교의 틀에서 벗어나 살펴본다면, 지구의 대표적 성인들인 석가모니나 예수의 가르침도 시대 의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걸맞는 메시지를 전달하였고, 당시의 사람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인도할 수 있는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결코 우주의 전체 그림을 다 펼쳐 보인 것도 아니었고, 또 그들의 모든 가르침이 시대를 초월한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메시지는 100년 전, 1000년 전 혹은 2000년 전 성자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이 아니고, 지금 이 시대, 아니 지금 바로 이 순간 하늘에서 전달되는 메시지입니다.

진리는 불변임을 강조하며 계속 전통적인 가르침과 정통 수련법 만을 고집하는 수행자들은 많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가르침에 귀 기울이기 보다는 오랜 세월을 통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진리임이 입증된 것을 따르겠다는 것은 합리적인 사고의 소산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수행자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유연한 사고, 열린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정통'만을 고집하고 이와 다른 모든 것을 잘못된 것 혹은 이단시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정통'이라는 것을 고집할 때 우리는 자신의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틀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될 것입니다.

변화하는 지구와 더불어 지금 수없이 많은 메시지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동일한 내용의 메시지들도 많이 있지만 서로 상충되는 메시지들도 많습니다. 그런 메시지들을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은 자신을 큰 혼란 속으로 빠뜨릴 수 있지만, 이러한 혼란은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가이드시스템을 활용함으로써 피할 수 있습니다. 기감이 발달한 분들은 메시지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고, 그렇지 못한 분들도 내면의 느낌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우주의 진실이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 우리는 뭔지 모를 가슴 뭉클함과 공명 혹은 전율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지 못한 말을 들을 때 우리의 가슴에는 냉랭함과 공허감만이 느껴집니다.

지구대변혁을 위해 지구에 온 많은 존재들은 깨어나기 시작하였고, 그들 중 일부는 그들에게 주어진 일들을 이미 시작하였으며 하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몸으로 느껴지는 기운을 통하여 혹은 마음을 통하여 우리는 누가 진정한 하늘의 일꾼인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과 언행이 전통적 수행자 혹은 성인과 다르다고 해서 그들에 대한 마음의 문을 닫고 불신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의식은 이미 전통적 수행자 혹은 옛 성인의 그것을 넘어서 있을 수도 있습니다. 머리로 판단하고 분별하기 전에 마음으로 느끼고 몸으로 느껴보는 것, 이것이 이 특별한 시대를 선택하여 살아가고 있는 지구상의 모든 용기있는 영혼들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2003년 6월 4일

출처 : 장휘용 교수 명상록 - 전체의식 속으로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