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휘용/장휘용 교수 명상록-전체의식 속으로

23. 거짓이란 토양에서 깨달음은 꽃피지 않는다

기른장 2021. 12. 14. 19:18

몇 년 전 미국의 한 설문조사기관은 미국인들이 하루에 평균 300번 이상씩 거짓말을 한다고 밝혀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부정과 비리로 오염되어 있는 대부분의 후진국과는 달리, 청교도 정신을 계승하고 정직과 신뢰를 근간으로 이루어진 미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백 번씩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평소 사고방식과 언행을 유심히 지켜보고 거짓이 우리의 일상에 얼마나 깊이 파고들어 있는지를 한번쯤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아마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요즘 좋아졌어' 혹은 '예쁘졌어' 를 연발하고, 원하지 않는 모임 참석을 요청 받았을 때에는 '선약이 있다'는 등의 핑계를 대는 것을 세련된 매너로서 인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진정한 느낌 혹은 마음과는 다르지만 남을 배려하여 행하여진다는 소위 백색 거짓말( 악의 없는 거짓말; white lie)이 훌륭한 매너로서 자리 잡은 지는 벌써 오래된 일입니다. 더 나아가, 전통적으로 경계의 대상이 되어온 악의의 거짓, 즉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하여지는 거짓된 말과 행동조차 사회적 능력의 일부인 것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인식조차 못하는 상태에서 거짓을 습관적으로 행하게 되었고, 적당한 수준의 거짓은 원활한 사회 생활을 위한 윤활유인 양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거짓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은 사회적응력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취급받고, 진실된 말과 행동을 고집하는 '직선적'인 사람은 융통성이 없는 사람, 심지어는 지혜롭지 못한 사람으로까지 비하되고 있습니다.

거짓에 대한 사회 통념의 변화는 오늘날의 수행자들, 특히 뉴 에이지(New Ages)적 성향의 수행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전통적으로 도가(道家), 불가(佛家), 유가(儒家)에서는 진실하지 못한 언행을 극도로 경계하고 항상 세 치 혀를 조심하라고 가르쳐 왔지만, 오늘날의 일부 수행자들은 진실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임을 강조하며 영적 모임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왜곡하거나 핵심을 감추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흔히 발견되고, 특정인을 근거없이 비방하거나 비하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견됩니다. ESP(초감지능력)를 발휘하는 사람들 중에도 자신에게 확실히 감지되지 않는 정보를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거나 객관성이 없는 정보를 진실인 양 말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합니다. 심지어는 스스로 깨달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도 세인들의 이목을 의식해 진정한 자신의 상태를 감추고 가식적인 언행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런데, 거짓과 진실의 경계는 애매한 경우가 많고, 그 개념 또한 논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대체로 사회적 관점에서의 진실과 거짓은 주로 말과 행동의 일치 여부에 따라 판단되지만, 수행의 관점에서는 거짓은 보다 넓게 그리고 진실은 보다 좁게 정의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실한 삶이란 자신의 언행에 모순이 없어야 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언행과 일치할 때에 확보되는 것입니다. 거짓이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악의(惡意) 여부와는 상관없이 진실을 왜곡하거나 축소 혹은 과장하는 것이며, 의도적으로 진실의 핵심을 감추는 것 역시 거짓입니다. 예를 들어, 남녀 간의 사랑에 있어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서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행위 역시 거짓된 행동입니다. 자신의 마음과는 다른 언행을 하며 살아가는 것은 거짓된 삶이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다른 글들에서 여러 차례 이야기한 바 있지만, 우리는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와 있는 존재들이고, 각 생에서 배워야 할 주제들과 부수적인 과제들은 인생을 시작하기 전 자신의 영혼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지구에서의 삶을 통해 배워야 할 중요한 주제는 사람, 자연, 우주 등을 포함하는 여러 대상들과의 관계들(relationships)이고, 특히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는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부모, 형제, 친지라는 관계를 맺게 되고, 자라면서 스승과 친구라는 관계를 맺으며, 성장해서는 동료, 애인, 배우자, 도반 등의 관계를 맺습니다. 이러한 관계들 속에서 항상 진실만을 추구하고 일관된 언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반면 상대방에 따라 진실을 각색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각각의 사람들에게 언제 어떤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하였는지를 철저히 기억해야 하고, 만일 그렇지 못하면 자신이 한 이야기들의 모순이 드러나 상대방으로부터 불신과 외면을 받게 됩니다.

진실하지 못하고 거짓을 행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삶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거짓된 사람은 진실이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언행에 신경을 쓰게 되며, 그 결과 머릿속은 잡다한 염려와 걱정으로 항상 가득 차 있게 됩니다. 그 결과, 지극히 단순한 사고와 생활 속에서 본성(혹은 하늘)과의 교류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는 참된 수행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가식적이고 거짓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겉으로 나타나는 것과는 상관없이 항상 내면적으로 불안감, 열등감 그리고 패배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거짓은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습(習)으로서 자리잡게 되고, 이로 인해 자신의 성격이 전반적으로 왜곡되는 결과가 초래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세상을 자기 기준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거짓 성향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도 당연히 그럴 것으로 여기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매사에 시시비비를 가리는 경향이 심화되고, 주위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며 그들과 불화(不和)하게 됩니다. 심할 경우 자신의 마음마저 끊임없이 의심하게 됨으로써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알기 어려운 상태가 됩니다. 또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에 급급하고, 모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게 되는 성향을 낳게 됩니다.

거짓된 삶을 사는 사람은 거짓을 감추고자 많은 노력을 하지만, 거짓과 가식은 예상치 못한 순간 불쑥 불쑥 그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정직과 성실 그리고 상호 신뢰가 없는 관계는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고, 그 속에서 화합과 조화는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오랜 윤회 속에서 무수한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결국 진실한 삶의 중요성입니다.

거짓이란 많은 경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습관적으로 행해지는 것이긴 하지만, 진정한 수행을 원하는 사람에게 거짓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무엇보다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실을 그대로 인정할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의 거짓을 철저히 반성하고 고치려는 부단한 노력이 이어져야 합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 도(道)를 이야기하거나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공허한 일이며, 진실한 삶이 전제되지 않은 수행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진실하지 못한 자신의 성향 때문에 자신을 비하하거나 비관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진실하지 못한 성격 혹은 성향은 영혼의 근기(根氣) 혹은 진화 정도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고, 특정의 인생 체험을 위해 자신의 영혼이 스스로 선택한 체험의 도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자신이 체험하게 될 인생을 미리 설계할 때에는, 먼저 배우게 될 핵심 주제를 미리 정하고 이를 위한 여러 가지 체험 도구들을 선택하게 되는데, 우리가 흔히 기질과 성격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체험을 위해 선택된 중요한 도구들입니다. 인생의 핵심 주제를 효과적으로 배우기 위하여 각 영혼은 특정의 기질, 예를 들어 불같은 맹렬함 혹은 유순함 등을 미리 선택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면서 형성하게 될 성격 역시 선택하게 됩니다. 성격은 어릴 적 환경으로부터 자연히 형성되는 것이지만, 유년시절의 환경을 선택한다는 것은 곧 한 개인의 성격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명상록의 다른 글들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인생의 많은 것들은 어떤 부모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미리 결정됩니다. 부모의 선택은 어릴 적의 환경과 주입되는 관념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성격까지도 사실상 결정하게 됩니다.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을 행하는 성향 역시 어릴 적 환경에 의하여 주로 결정됩니다. 유년시절을 극단적인 경제적 궁핍 속에서 생존을 위하여 발버둥 치며 보낸 사람에게 거짓은 몸에 밴 생존의 수단입니다. 또한 상호 불신하는 부모 밑에서 어릴 적부터 어른스러움을 강요받고 성장한 사람에게 거짓과 위선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다시 말해 거짓 성향 역시 유년시절을 어떠한 환경에서 보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만, 영혼의 측면에서는 필요한 체험을 위해 미리 선택한 중요한 체험 도구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성향이 강하고 전생까지 깊은 수행이 이루어진 사람들 가운데서도 거짓되고 삐뚤어진 성격의 소유자는 쉽게 발견됩니다.

현실 생활에서 거짓의 유혹은 이따금씩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거짓이 몸에 밴 사람이 그 습(習)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누구 못지 않게 진실한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해 온 제 자신도 얼마 전 거짓의 유혹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거짓을 무척이나 싫어했고, 4년 전 심신의 근본적 변화를 겪은 후에는 모든 것을 아무런 주저없이 공개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으며, 또 남을 배려한다는 백색 거짓말도 똑같은 거짓말일 뿐임을 강조해 왔습니다. 하지만 작년 연말,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미 알려져 있는 일이었지만 특정인에게는 큰 충격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한동안 진실을 감춘 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 자신의 거짓을 특별히 의식하지도 못하고 지내다가 한 달 후 그것이 더 큰 문제로 비화되기 시작해서야 비로소 저의 진실하지 못한 언행의 문제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항상 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상위자아를 느끼면서 거짓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고 생각해 온 저이기에, 이 체험은 제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분들 중에는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완전한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순간순간 변하는 자신들의 마음을 바라보고 언행을 지켜보면서, 자신들의 삶에 거짓이 끼어드는 지를 끊임없이 살핍니다. 얼마 전 그들 중 한 분은 어떤 전시회에서 뜻하지 않게 누구를 만나게 되었고, 당황한 나머지 상대방의 섭섭한 감정을 달래줄 수 있는 적당한 거짓말을 하고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조금 후 자신이 거짓말을 한 것을 깨닫고 자신의 행동을 반성한 것은 물론 상대방에게 바로 전화하여 자신의 거짓된 말에 대하여 사과하였습니다. 사회적 기준에서 볼 때에 당연하거나 예의바른 것으로 간주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사과함으로써 그 분은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든 것입니다. 좀 지나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 같은 행동이 자신들의 삶에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을 추구하고 도(道)를 구하는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지구대변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요즘, 하루가 다르게 사람들은 깨어나고 있습니다. 이들 깨어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자신의 할 일들을 자각하기 시작합니다. 예언된 일만 이천 도통군자들은 혼란과 환란의 강도가 높아져 사람들이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게 될 때 그들의 횃불이 되어 줄 것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인지, 왜 이런 변혁이 오는지, 다가오는 세상은 어떠한지, 그리고 이 환란을 통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를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런 역할을 감안할 때 도통군자들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전 먼저 견성(見成)하고 그리고 깨달음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견성 혹은 깨달음이란 자신의 본성을 바라보고 알게되는 하나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체험을 통해서 사람들은 지복의 상태를 경험하거나 다양한 ESP 능력이 생겨나고 인생과 우주의 진실들이 정리되기도 하지만, 그 체험자가 계속 깨달음의 상태에 머문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길로 빠져들어 가는 경우는 흔히 발견됩니다.

평소에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강한 소망을 가지고 있던 견성 체험자는 계속되는 채널링 메시지를 통해 자신이 그 특별한 존재라는 착각을 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 사이비 교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또한 평소에 의심이 많고 거짓 성향이 강한 사람의 경우, 자신의 강한 구도심으로 말미암아 큰 영적 체험을 하고 일시적으로 우주의 진리를 깨달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몸에 밴 거짓과 의심의 습(習)은 그 체험자를 깨달음의 상태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견성 체험을 포함한 수행상의 모든 영적 체험들의 의미를 부정하면서 세속적인 삶으로 회귀하는 경우도 발견됩니다. 거짓이란 토양에서도 깨달음의 싹은 자라날 수 있지만, 깨달음의 꽃을 피울 수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번 명상록 <관념과의 싸움>에서 관념이라는 딱딱한 틀을 뒤집어 쓴 채 새로운 세상으로 통하는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거짓된 삶을 청산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기존 관념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결코 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텔레파시를 통해 마음과 마음이 바로 통하게 되는 새로운 세상에서는 오직 진실만이 통용될 것이고, 그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각자가 거짓을 철저히 청산하고 진실한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실한 삶은 수행의 근본이고, 지금 이 시기에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2003년 4월 11일

출처 : 장휘용 교수 명상록 - 전체의식 속으로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