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휘용/장휘용 교수 명상록-전체의식 속으로

22. 관념과의 싸움

기른장 2021. 12. 14. 19:17

지난 수천 년 동안 여러 성인들과 영적 스승들이 지구를 다녀갔으며, 현재도 상당수의 영적 지도자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시대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모습으로 우주의 법을 전달하고 인생의 의미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가르침에는 공통적인 내용도 많이 있지만, 서로 다르고 모순되는 듯 보이는 것들도 적지 않게 발견됩니다. 일부 수행자들은 그러한 '다름'에 대하여 무척 혼란스러워 합니다.

예를 들어, 노자나 장자와 같은 분들은 순리대로 물 흐르듯 살아가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을 이야기하였고, 저 역시 의지로 무엇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은 인생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도(道)라는 것은 무엇을 의도하고 그것을 성취하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활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이에 반해, 일부 뉴 에이지 지도자들은 각자가 창조주임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며, 인생은 '창조'하고 '선택'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또 다른 예로서, 달라이 라마는 자신의 저서 《행복론》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 수 있을까?"를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마음의 평안을 찾을 때 오는 것임을 설파합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한,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살아간다는 생각은 육체적 제약에 따른 우리의 제한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고,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희로애락의 생생한 체험을 통해 영적 성장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진정한 깨달음이란 행복을 추구하는 수행자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도달하는 지복(至福)의 경지가 아니라, 행복과 불행의 구분 그 자체를 뛰어넘는 경지임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분들은 인류의 역사를 빛과 어두움의 대결로 표현하고, 이제까지는 어둠의 세력이 인류를 지배해 왔지만 지금은 "빛의 일꾼"들이 힘을 모아 어둠을 몰아내고 빛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의 견해로는 빛과 어두움이란 것도 결국 인생의 생생한 체험을 위한 무대장치에 불과하고, 수행이 아주 깊어지면 빛만 추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빛과 어둠의 분별 역시 뛰어넘게 됨을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가르침들이 차이가 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이 시대적, 문화적 차이로 말미암아 다르게 표현되거나 해석되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는 가르침을 펴는 사람들의 세상을 보는 차원 혹은 의식수준이 다르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실 모든 가르침은 특정의 의식수준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그 의식수준에 도달해 있거나 접근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가르침이 아주 훌륭하고 감동적인 것으로 느껴지지만, 자신의 의식수준을 훨씬 초월한 가르침이나 자신보다 낮은 수준의 가르침은 잘 받아들여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것으로 느껴집니다.

우리는 같은 세상을 살지만 각자의 의식수준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결국 각기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셈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르침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누구에게도 맞지 않는 가르침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적 가르침들의 시시비비를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수행자들은 가르침의 차이를 발견할 때 과연 어느 가르침이 보다 높은 수준의 것인지 궁금해 하기도 합니다. 수행자들의 의식이 영적 스승들의 의식수준에 못 미치는 한, 특정의 가르침이 어떤 수준에서 나온 것인지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명상록의 《참 스승이란》에서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수행자들이 이 문제에 특별히 유념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각 수행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현재 의식수준에 걸맞는 가르침, 즉 현재 이 순간의 자신에게 감명을 주고 깨우침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자신보다 의식수준이 너무나 높아서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언행을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라면 자신의 참 스승이 되기 어렵습니다. 최고로 높은 의식의 가르침을 발견하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가르침을 발견하여 실천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자신의 의식이 상승함에 따라 자연히 보다 높은 수준의 가르침을 찾게 되고 보다 높은 의식을 가진 스승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저는 개인적으로 관념과의 싸움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2년 전 출판된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명상록의 글들에서 우리의 관념 혹은 고정관념들에 대하여 이야기해 왔습니다. "숙녀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사내대장부가 그래서는 안되지"하는 생각은 남녀에 대한 고정관념에 기인한 것이고, 길가는 사람들을 잘 생겼다, 못 생겼다 분간하고 자신이 아는 사람들을 행복한 사람, 불행한 사람 혹은 훌륭한 사람, 못난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도 모두 우리의 관념들이 만들어내는 작품들입니다. 남편 혹은 아내의 언행에 대한 만족과 불만도 부부관계에 대한 자신의 관념과 그에 따른 기대에 의하여 생겨나며, 자식에 대한 기대 역시 부모-자식 관계에 대한 관념에 의하여 형성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관념에서 크게 벗어난 행동과 현상을 발견할 때 분노하게 됩니다.

제 글을 읽어보신 분들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제가 가진 사고방식과 가치관은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크게 동떨어진 것이고, 대다수 수행자들과도 많이 다릅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제가 근본적 변화를 겪은 이후 지난 몇 년 동안 저의 언행은 사회적 관념에서 크게 벗어나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하여, 강연을 통하여 그리고 사적인 대화를 통하여 우리가 가진 인식의 틀, 즉 관념의 문제점들을 이야기해 왔고, 그 관념들이 자신의 수행을 어떻게 방해하고 있는 지를 이야기해왔습니다. 특히 많은 수행자들이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관념들에 대하여 이야기해 왔고, 그것이 이제까지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초래하였는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제 소신을 진정으로 이해해 주는 사람들은 여전이 드물고, 저의 언행이 진실 되지 못하고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일부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행의 관점에서 볼 때, 세상에서 존재하는 가르침이나 사람들에 대하여 쉽게 판단하고 쉽게 비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고 있고, 비록 나에게 특정인의 언행이 못마땅하고 위선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더라도 그러한 의견과 느낌은 주관적인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틀린 것일 수 있고 또 언젠가 바뀔 수 있습니다. 특히 특정인 혹은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판단할 때 그 판단의 기준은 자신이 가진 관념인데, 대다수의 관념들은 상대적이고 또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 보통입니다. 이를 인식하는 수행자라면 특정인의 주장, 생각 혹은 언행에 대하여 동의할 수 없을 때, 비난하고 힐난하기보다는 조용히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진리와 진실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인식될 새로운 세상(후천세계)에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관념들에 사로잡혀 있는 한 절대적 진실을 인식할 수 없고, 오직 상대적, 상황적 진실만을 전부인 양 받아들이게 됩니다. 또한 관념은 인생의 진정한 체험을 방해하는 큰 장애물로도 작용합니다. 인생에서 전개되는 하나하나의 사건들은 각기 독특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는 대신 자신의 관념에 의존해 즉각적인 판단과 그에 따른 감정적 대응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관념은 자신의 감정을 증폭시켜 인생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며, 순간에 집중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깨달음을 방해합니다. 힘든 인생을 살면서도 제대로 된 체험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장본인이 바로 우리의 관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관념은 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반면 다른 사람이 가진 관념은 잘못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거의 모든 관념들은 시대와 장소 그리고 문화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인 것들입니다. 남녀관계, 가족, 부부, 스승과 제자 등과 같은 인간관계에 대한 관념들뿐만아니라 아름다움, 행복, 좋은 것 등과 같은 추상적인 관념들도 동서양 혹은 지역에 따라 다르고, 시대적으로도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념들은 오직 상대적인 가치만 있을 뿐이고, 불변의 절대적인 가치는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상대적 가치를 버리고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수행자라면 우리가 가진 관념들의 한계를 쉽게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수행자는 과연 행복이란 무엇인지,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부터 깨달아야하고, 무엇을 기준으로 행복과 불행,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분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수행자들은 자신이 지닌 도덕과 윤리의 기준이 얼마나 시대적, 문화적 상황에 의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관념이 인간의 사고를 얼마나 제한하고 있는지를 깊이 느껴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행동을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하기 전에 자신이 분별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관념에 대하여 재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 자체로 항상 온전한 것이라는 가르침의 의미를 되씹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소위 지성인들은 지금 이 시대를 혼돈의 시대라 규정짓고, 무너지고 있는 기존의 권위를 대체할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음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즉 사회적 질서를 지탱해주던 관념들이 점차적으로 허물어져 가고 있음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사회의 관념들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붕괴되어 왔고, 이러한 경향은 근래들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인간복제 문제만 보더라도 (육체적)인간이란 반드시 남자와 여자의 성적 결합에 의해서만 태어날 수 있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뿌리 채 흔들고 있습니다. 인간복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라엘리안 운동은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이고 에너지적 존재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극히 제한된 틀을 가지고 있지만, 결혼, 가족, 남녀관계 등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무너뜨리는 데 상당한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언론들은 인터넷 확산에 따른 컴퓨터 채팅문화의 보급 그리고 그로 인한 가정주부들의 광범위한 불륜에 대하여 보도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 사이에 무너지고 있던 유교적 성관념이 인터넷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었고, 이제는 주부들에게도 본격적으로 확산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최근 한 신문의 칼럼에는 〈무너지는 '평생가족'〉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는데, 지난 3년 간 청소년을 상담해 온 그 글의 필자는 현재의 상황을 "정상 가족은 멸종했다"라고 표현하면서, 청소년들에게 가족이란 "가족은 침묵에 익숙하다", "가족은 가식으로 만난다" 등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대다수의 사회적 지도층 인사들은 이러한 현상들에 대한 근본적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사태들은 기존 관념의 자연적 붕괴라는 측면에서 제게는 매우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집니다. 새로운 세상을 맞을 준비가 우리가 모르는 새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관념의 주입과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지금의 기성세대들과 어린이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기성세대들은 소위 과학적, 이성적, 물질적인 것 이외의 것들을 철저히 부정하는 강도 높은 교육을 받아왔고, 따라서 이에 부응하는 강한 관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어린이들에게는 비물질적, 비현실적인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린이가 미술시간에 머리에 뿔난 새를 그렸다면 교사와 부모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들었겠지만, 지금은 창의성이 뛰어나다고 오히려 칭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반지의 제왕에 열광하고 해리포터의 마법에 심취해 있으며, 영화 속의 일들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어느 특정인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는 세상, 에너지의 세상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게끔 인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일부 관념들에 대한 자연적인 붕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수많은 고정관념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 또 벗어나려는 마음조차 내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기존의 관념들을 청산한다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고 현실적 생존의 근거를 포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관념들은 보다 높은 차원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기 전 반드시 청산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관념들이란 딱딱하고 무거운 의식의 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무거움을 유지한 채 의식은 도약할 수 없으며, 딱딱한 껍질을 입은 채 새로운 세상으로 통하는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 다가올 것으로 예상되는 물리적 변화들은 각자의 관념들을 깨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현실이라고 부르는 물질적 기반들이 완전히 파괴되었을 때 사람들은 더 이상 기존의 관념들을 유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것이고, 그것들을 포기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관념들에서 벗어난 사람은 사물을 더 이상 미리 판단하지 않을 것이고, 항상 사람들을 그 자체로서 인정하고, 모든 가능성을 인정하는 유연한 사고, 열린 사고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세상에서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지구로 유입되는 에너지가 증대됨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 특히 상당수의 도통군자(혹은 빛의 일꾼)들이 감정의 증폭, 불안감, 위기감, 기타 다양한 심적 고통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들에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게 만들어 집착과 분별심을 잦아들게 하고 관념에서 탈피하게 하려는 하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늘이 주관하는 집단적 특별수련이 진행 중인 셈입니다. 그러한 체험을 참기 힘든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을 바라보고 정화하는 계기로 인식하기를 기원합니다.

2003년 2월 18일.

출처 : 장휘용 교수 명상록 - 전체의식 속으로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