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BOOK/에드가 케이시의 삶의 열 가지 해답

01.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기른장 2022. 1. 14. 18:59

나는 항상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 즉 순수하고 의심을 품지 않으며 믿음을 굳건히 지속 지켜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나는 그들을 부러워한 반면 그들은 내가 당황하면서 의심을 품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적도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만났던 선교사들에게서 이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이지리아 오지 마을에서 치명적인 새로운 바이러스성 질병이 발생했었다. 그 질병으로 죽은 선교사에게서 추출한 혈액 샘플이 예일 대학의 의학 실험실로 보내졌다. 10일쯤 지나자 그 혈액을 시험하던 서너 명의 연구원들이 죽었다. 그 혈액 샘플은 대단히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어 소각되었다. 더구나 나이지리아에서 온 보고서에 따르면, 그 질병의 희생자와 약간이라도 접촉한 의료 선교사들 역시 10일 이내에 죽어갔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 매료된 나는 이 새로운 질병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 먹었다. 아차하면 나도 죽을 수 있다는 강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랜드로버를 타고 1,500마일을 달려 질병의 근원지인 라사 마을에 도착했다. 동료 선교사들이 파리처럼 죽어가는 데도 어떻게 선교사들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지 나는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한 대답은 간단했다.

“우리는 신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돕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일을 계속할 겁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신을 믿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이런 봉사를 할 수 있었는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 곳에 잠시라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가능한 한 빨리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러나 그들의 확고한 믿음은 내 마음에 깊게 새겨졌다. 나는 그런 사고방식을 견지할 수 있는 방법을 몰랐었기 때문에, 그 사건은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부러움을 느끼게 했다. 자신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그것을 내부로부터 느껴야만 한다.

그렇다면 에드가 케이시가 받은 수많은 편지에 쓰여진 많은 질문들 중에서 집요하게 계속되는 질문의 하나가 ‘과연 신이 존재하는가?’라는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질문이라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 질문은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편지를 쓴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일상생활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점차 깨닫게 되겠지만 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케이시의 대답이 이 책에 쓰여진 다른 의문들에 대한 대답의 근본임을 알게 될 것이다.

신, 그리고 신의 본질이 가장 확실한 형태로 개인 삶의 모든 면에 스며들어 있다. 케이시에 따르면, 우주의 시원(始原), 즉 신은 전지(全知)하고 편재(遍在)할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문제를 풀기 위해 끌어다 쓸 수 있는 신성한 에너지가 무한히 담겨있는 샘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그렇다고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장애물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케이시의 신에 대한 개념은 아주 폭이 넓어서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둘 다를 함축하고 있다. 그 개념은 신을 믿는 사람이건, 신에 대해 혼란스러운 생각을 가진 사람이건, 신을 의심하는 사람이건, 전혀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건, 그 사람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케이시의 리딩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존재가 발생한 방법과 이유에 대해서, 그리고 만물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준 위대한 창조주에 대해서, 이성적인 이해의 차원에서 획기적인 도약을 이룩할 수 있었다. 우리의 제한된 오감으로 인지되는 물질세계를 초월한 곳에 영적 실재가 존재하며, 그것이 실질적으로 물질적 존재보다 더 중요한 ‘참 실재’라는 케이시의 리딩은, 이러한 사실에 저항하는 내 마음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나처럼 교회의 가르침에 맹종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케이시의 리딩이 큰 도약이 될 수 있었다.

 

 

신을 이해하려면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에드가 케이시의 신비로운 마음을 탐험하는 이 여행에서 내 자신이 안내자라기보다는 독자와 함께 길을 가는 동료라고 느껴진다. 이런 느낌으로 인해, 내가 영적 개념 - 이 경우에는 단지 신적 존재를 받아들이면서 겪은 어려움 - 을 수용하면서 겪어야 했던 일부 어려움들을 마음 편하게 말할 수 있다. 물론 나로 하여금 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던 그런 일들도 독자들과 함께 나누게 될 것이다.

과거 내가 영혼을 연구하고자 시도했을 때는 지나치게 교회의 틀에 집착하는 맹신적 목사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나이가 들면서 과식과 과음 그리고 지나친 육류에의 탐닉으로 말미암아 내가 지니고 있었을 수도 있는 영혼의 빛과 통찰력의 가물거림 마저 두꺼운 철판으로 차단되었다. 나처럼 약간 무신앙의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는 신성이라는 개념 안에서 믿음의 도약을 하는 것보다는 계량 가능한 과학적 개념을 신봉하는 것이 훨씬 쉬웠다.

케이시는 여러 창문을 통해 신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도약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나 신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기에 앞서, 케이시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라는 그릇된 관념을 나에게서 제거함으로써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과연 신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만족할 만한 답을 줄 수 있는 신의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 그려보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신의 이미지가 필요하다. 케이시의 리딩을 거듭해서 탐색하던 중, 내 자신이 시각적 영상에 의존해서 우주적 관념을 이해하고 수용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종종 우주는 차갑고 논리적인 언어보다는 은유나 상징을 통해 더 효과적으로 뜻을 전달하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해를 방해하는 이미지들도 있다.

화가로서 미켈란젤로는 진정한 천재였지만, 그가 그려놓은 당당한 모습의 노인이 하얀 턱수염을 휘날리면서 아름다운 하늘에 유유자적하면서 떠 있는 의인화된 형상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나는 긴 시간과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만 했었다. 나는 신이 미켈란젤로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그의 노고를 치하했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러나 자신이 인간 형상에 꿰맞추어진 것에 대해서 신이 기뻐했을 것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다. 불행히도 미켈란젤로의 논리력은 붓을 다루는 놀라운 솜씨에 미치지 못했었다.

만일 신이 보잘 것 없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초월하여 어느 곳에나 존재하며 전지전능하다면, 그는 인간 형상에 가두어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 같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케이시는 신의 이미지대로 인간이 창조되었다고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신의 이미지란 추상적 의미이며 단지 인간의 육신에만 한정된 의미는 아니다.

 

신은 무한한 에너지이며, 우리는 그 에너지의 일부이다

신은 누구 혹은 무엇인가? 제1원인(시원), 우주의 힘, 창조력. 이런 것들은 에드가 케이시가 신의 정수를 일컬을 때 쓰는 표현들이다. 각각의 용어는 ‘만물은 하나이다.’라는 그의 기본 사상을 각기 달리 표현하는 방법들이다.

제1원인(시원)으로서 신에 대한 케이시의 개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학자들이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내놓은 빅뱅 이론, 거대한 에너지의 폭발로 인해 우주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는 것과 모순되지 않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나는 그것을 수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무엇인가 우주의 시원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태양계도 없고 생명도 없을 것이다. 아울러 당신과 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케이시는 이것을 원(原)창조 에너지라고도 불렀다. 이것은 무한한 에너지의 샘이며 우리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어느 곳에나 존재하고 있다. 이 전제로부터 추론컨대, 이 거대한 에너지는 모든 곳에 다 존재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고, 당신과 나도 우리의 희망과는 상관없이 그것의 일부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던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여러 힘들은 유일한 신의 확장이거나 현시(顯示)일 뿐이다. 이것은 신 안에서는 만물이 하나라는 케이시의 확신에 대한 증거이다. 혹은 성서적 표현을 빌린다면, 우리는 신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한다. 그리고 만물은 신을 통해서 또 신을 위해서 존재한다.

이제 이 추론을 한 걸음 더 진행시켜 보자. 만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원 창조 에너지’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또 그것의 일부라고 한다면, 생명과 의식 그리고 자기 인식 역시 그것으로부터 출현했을 것이다. 이런 개념으로부터 케이시가 말한 생명의 정의가 도출된다.

 

‘생명은 존재의 의식이다.’

 

물질은 물질이 아니다

케이시의 리딩이 제공하는 삶의 의문에 대한 대답에서 알게 되겠지만, 인간이 마주치게 되는 많은 문제들의 근본원인은 우리 스스로가 시원에서 분리되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이제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다시 그것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의식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야만 하는 길이다. 우리는 시원의 상태로 돌아가서 그것과 다시 하나로 녹아들어야 한다. 우리는 자기 인식을 잃지 말아야 하며, 우주의 장대한 계획에 우리의 목적을 일치시켜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가능한가? 물질적 육체의 ‘조밀한 밀도’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에서 의문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육체는 (어떤 물질로 이루어진 덩어리건 간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밀도가 높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는 주로 텅 비어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사실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벽돌은 전혀 물질과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양자인데, 양자는 단지 빛 혹은 에너지 일뿐이다.

아인슈타인이 처음으로 ‘물질은 전혀 물질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물질은 ‘힘의 장(force field)’의 형태 안에서 얼어붙은 빛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우주 안에 속해 있는 무한 양자들은 순수한 에너지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구성된 우주의 물질도 에너지의 집합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가 태양 광선을 통과할 수 있듯이 물질들을 통과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려보는 우주인 것이다. 우리의 조밀한 육체 역시 단지 양자들이 엉킨 구름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다. 빛의 구름은 두 개의 구름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처럼 부드럽게 제1원인(시원)과 다시 결합할 수 있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우리가 얼마나 평온해질 것인지를 상각해보라. 우리는 창조주의 품안에서 휴식을 취할 것이며, 애쓰지 않고도 우주적 힘의 의지와 방향에 합치되어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귀 먼 하늘에 쓸데없이 외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 안의 회의주의자는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우주적 계획의 목적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창조력에 진짜 목적이 있단 말인가? 장대한 계획과 불변하는 조화의 법칙이 있단 말인가?”

이것을 실제적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이런 불변의 법칙이 없다면 무수한 은하와 별과 행성들의 체계가 온전히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수 천 만의 세포들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직 혼돈상태만 존재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어렵지 않게 케이시의 전제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즉 만물은 신의 의지와 지성에 의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과 싸우는 대신 그것에 융화됨으로써 평화와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것, 케이시가 가르치는 것을 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주에는 모든 지식과 정보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법칙으로서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때까지 묵묵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수학의 법칙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우주의 법칙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자신을 조율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정말 가능할까? 초자연적 현상을 탐색해 온 나의 직업적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초자연적 관념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객관적인 사상가들 -과학자들과 전통적 철학자들-을 끌고 들어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케이시의 리딩에 대한 연구에도 역시 이런 방법을 채택했다. 즉 이 책 전체에 걸쳐 나의 이해를 도와준 과학자와 철학자들의 사상을 포함시켰다.

데이비드 봄이 바로 그런 과학자들 중 한 명이다. 그는 런던대학에 근무하는 물리학자인데 노벨상 수상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그의 계시적인 책 『완전한 전체와 함축적 질서』에서는 과학과 신비주의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암시하고 있다.

“우주의 질서 속에서는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는 이 개념을 홀로그램에 비유함으로써 우리가 그것을 시각화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즉 필름을 잘라 토막을 낸 다음, 그 중 한 조각의 필름에 동조성 레이저 광선을 비추면 전체 영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물질의 기본 조각들도 공간적 거리에 관계없이 우주의 다른 곳에 있는 자신의 ‘동료’ 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즉시 알 수 있다.

나는 데이비드 봄의 추론이 만물이 하나라는 케이시의 관점에 대한 과학적 뒷받침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실질적으로 파장을 맞출 수 있는 것도 바로 ‘만물은 하나’라는 그런 개념인 것이다.

케이시에 따르면, 의식적 마음은 물질적 육체에 갇혀 버렸기 때문에 오직 무의식적 마음만이 물질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한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통상의 제한적 존재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사심 없고 건설적인 의지를 지녀야만 한다. 또 우리는 우주의 단일성에 녹아들고자 하는 동시에 우주의 보편성과 조화되고자 하는 절대적 소망을 가져야만 한다. 이 보편성이야말로 케이시가 말하는 신의 개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임무이자 제기된 문제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실질적으로 신의 일부이며 다시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며, 무한한 근원적 힘에 의지하면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그 힘에 조화시켜야 한다. 우리는 무한한 신성의 차원에 동조되어야 한다. 그곳은 ‘참 실재’가 존재하는 순수한 영적 차원이다.

 

타인에게 베푸는 사랑을 통해 내부의 신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내용들이 케이시가 신을 비인격적인 힘으로 간주했다고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신이 존재를 창조했을 때, 그의 지성의 일부인 우리를 창조했을 때, 신은 진정한 영적 존재를 구성하는 개별 영혼으로서 우리 각자를 창조했다. 물론 진정한 영적 존재는 물질적 육체를 초월해 있지만 지상에 머무는 동안은 육체의 부분으로서 존재한다. 우리는 변함없이 신의 목적의 일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의 협력자로서 우주를 위한 신의 장대한 계획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조물주이자 창조주인 신은 문자 그대로 우리의 부모도 되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의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지니고 있다. 피조물에 대한 신의 사랑은 손으로 만질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다. 더구나 우주적 사랑은 모든 의식의 핵심 속에 변함없이 존재한다. 반면 우리는 신에게 대해서 만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사랑이라는 형태로 신의 사랑을 되돌려 주어야 하는 자식의 의무를 지고 있다. 케이시의 신념의 기본은 2가지이다. 신은 유일하며, 또한 신은 사랑이다.

자 이제, 이런 생각에 대해 케이시 자신이 말한 것을 들어보도록 하자. 한 의뢰인이 편지를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기도할 때 신을 어디에나 존재하는 비인격적인 힘이나 에너지로 생각하는 것이 바른 태도입니까? 아니면 지상의 모든 개인을 인지하고 있으며, 각자가 필요로 하는 것과 각자를 만나는 방법까지 세세히 알고 있는,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아주 현명한 인격적 존재로 신을 생각해야 합니까?”

케이시는 평소처럼 성서적 표현으로 대답했다.

“둘 다 맞습니다. 신이 물질적 형태로 나타남에 있어서는 그 제한된 움직임 속에 깃든 에너지입니다. 그러나 신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자신의 의식과 인식을 조율하십시오. 그러면 내부의 영혼이 드러나고 그것은 외부의 영혼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예수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말했듯이 당신과 아버지는 하나이며 당신이 아버지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케이시는 여기서 예수의 소망을 언급하고 있다. 즉 예수처럼 우리도 내부의 창조력에 조화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신은 자신이 창조한 영혼들이자 그의 일부인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케이시는 다음의 말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가 시간과 공간의 무한함을 들여다보게 되면, 그 안에 신의 힘과 영향력이 존재함을 깨닫게 되고, 동시에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또 신의 의지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사람의 영혼에게 주어진 선택권이며, 사람들은 그것을 이용할 수도 있고 그것과 하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능하고 나약한 방식대로 신의 의지를 이용하려 할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의미가 있고 중요하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당신은 신의 지혜 속에서 이런 영향을 보게 됩니다.”

케이시는 여기서 신이 자신의 자녀들인 우리를 돌보고 있다는 것 이상을 말하고 있다. 그는 신의 일부인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사랑과 관심을 말하고 있다. 케이시는 리딩을 통해 다음과 같은 점을 철저히 인식시키고자 한다.

“당신이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에게 구원과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때까지는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신이나 외부에 존재하는 신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타인에게 베푸는 사랑을 통해서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신을 깨닫게 된다는 생각은 리딩 262-130에 더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 리딩은 1942년 7월, 에드가 케이시의 가르침을 연구하기 위한 모임의 첫 번째 회합에서 행해졌다. 그 모임의 다섯 회원이 버지니아 비치의 사무실에 모였다. 그들 중에는 케이시의 아내 거트루드, 그의 아들 휴 린 케이시, 그리고 비서이자 속기사인 그래디스 데이비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단 최면 상태에 들어간 케이시가 깊은 무의식에서 대답할 준비가 되자, 케이시 부인은 평소 하던 대로 암시를 시작했다.

“당신 앞에는 그룹의 회원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신과 사랑과 인간’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합니다. 당신은 이 주제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하고, 그 설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암시도 할 것입니다.”

케이시 역시 평소대로 간단한 서두로써 말을 시작했다.

“예, 여기에 그룹 회원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룹과 개인들, 그리고 그들이 알고자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는 리딩을 계속 진행했다.

“진실로 신은 사랑인가? 진실로 신은 우리 각자의 어버이인가? 진실로 신은 우리 각자에게 적용되는 법칙인가? 진실로 우리 각자는 자신의 경험 속에서 그 영향과 법칙과 사랑을 알고 있는가? 이와 같은 개인적인 신, 추상적 인격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고 알고 있는 신이 개인의 삶 속에서 증명될 수 있는가?”

“신이라고 알려진 힘과 권능과 영향력의 특성은 곧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일상생활 속에 사랑을 실천하면, 개인적인 신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케이시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다음으로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관계를 생각해 봅시다.”

그런 다음 그는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 아버지! 당신의 자녀인 제가 타인 안에서 당신의 신성을 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바로 이것이 케이시가 변함없이 추구해 온 핵심 주제였다. 우리는 타인 안에 있는 신성을 보아야 한다. 자신과 타인을 비난하기를 그쳐야 한다.

 

신의 무한한 사랑이 존재를 창조했다

에머슨과 소로우 그리고 매사추세츠 콩코드의 유명한 초월주의자들이 활약하던 시대에, 마가렛 풀러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의문 때문에 심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한 번은 저녁 만찬석상에서 그녀는, ‘우주를 받아들인다.’는 깨달음을 얻고 나자 마침내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되었노라고 동료들에게 말했었다.

풀러의 분투와 노력은 우주를 인정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사실 신의 본질에 대한 케이시의 개념은 궁극적으로 우주를 인정하는 것을 쉽게 해준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은 신은 논리를 통해 찾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실천함으로써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그래서 나를 도와줄 과학자와 철학자들에게 다시 한 번 눈을 돌리게 되었다. 나는 모티머 아들러가 쓴 무종교인을 위한 안내서 『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시사적인 논거를 찾아냈다.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편집위원장이며, 시카고 철학 연구소 소장인 아들러는 에드가 케이시와 직접적 관련이 없음을 지적해 두어야 겠다. 그러나 나는 아들러와 케이시를 나란히 비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의 생각은 놀랍도록 유사했으며, 존재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킨다는 관점에서, 케이시의 신비로운 마음이 아들러의 분석적인 마음과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주적 통찰을 통해서 케이시는 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고 아들러는 냉정하고 논리적 방법으로 신에게 접근했다. 그는 책에서 일련의 강력한 철학적 논거를 들어 종교적 의미의 신을 공박했다. 그 논거들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때로는 아주 불쾌할 수 있지만 결국 신에 대한 케이시의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아들러는 우리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우주의 출현 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창조적 원인이 필요 불가결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연적 원인의 힘에 의해서 우주가 창조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초자연적인 존재 혹은 신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 더구나 신은 창조주일 뿐만 아니라 우주를 지속시켜 가는 보호자이기도 했다.

아들러는 이렇게 냉정하게 논리적으로 접근하여 인격화된 신의 개념을 부정했지만 신의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그는 무엇을 창조하고 그것을 보호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랑의 행동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신이 우리의 실질적인 부모라는 케이시의 신에 대한 개념을 생각나게 하는 주장이다.

아들러는 존재한다는 것은 선(善)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지고한 존재의 무한한 선(善)이 제한된 선과 물체의 유한한 상태 속으로 넘쳐 흐르게 되면 신은 존재를 출현시키고 그 존재를 보호하게 된다.”

아들러는 논리적 연구로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믿음의 도약을 요구하는 철학적 갭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적으로 신을 탐색하려는 노력은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느낀다. 논리를 통해 밝혀진 신은 믿음을 위한 합리적인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창조력의 손길에 맡겨라

케이시는 생명을 ‘존재의 의식’이라고 정의하기도 했었지만, 리딩 5753-1에서는 다른 식으로 정의하고 있다.

“생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제1원인(시원)인 신의 구현이다.

신을 시원으로 인정하면 우주를 받아들이기가 한결 쉬워진다. 케이시는 우리가 스스로를 육체적 존재와 신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마가렛 풀러 역시 이렇게 하려고 고군분투했던 것이다. 케이시는 겉으로 보기에 간단한 이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나 역시 몇 가지의 방법을 개발했다.

어떤 일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긴다는 것은 내가 이제까지 닦아온 재능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러려고 애를 쓸 때마다 내 자신의 에고 때문에 몰입하기가 힘이 든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문에 나는 좋은 승객이 되지 못했다. 순전히 완고함 때문에 나는 스스로 통제하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케이시가 자신을 완전히 ‘우주적 힘인 신’의 손에 내맡겨야 한다고 암시했을 때 나는 이것이 그다지 나쁜 생각이 아니라고 믿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 그런 상황들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나는 필라델피아에서 나룻배로 댈라웨어 강을 자주 건넜었다. 당시 내가 어머니에게 배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자주 불평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배가 강 반대편 나루터를 향해 직선 코스로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맞은편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했음은 물론이다. 그 배의 선장은 내가 모르는 조류나 물살까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고려해서 항로를 잡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몰랐었다. 그 배는 오직 외관상으로만 항로를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지구 행성이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을 때마다 나는 이 경험을 기억해내곤 했다. 그래서 지구 궤도도 멋대로가 아니라 나보다 현명한 누군가가 그것을 조정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내가 케이시와 아들러의 책들에서 읽은 것과 고대에 관한 성서의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신은 우주라는 배의 선장이며 몸소 키를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에게 운전을 맡기고 편히 지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이같은 단순한 상상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신의 의지와 우주적 힘에 완전히 내 맡겨야 하며, 협력자와 동료로서 신과 함께 해야 한다는 케이시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다른 유용한 예가 있다. 나는 예전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대서양 상공을 비행하는 점보제트기의 조종석에 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조종석의 계기판에서는 수많은 불빛이 빛나고 있었다. 그 계기판의 지침들은 나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들이지만 조종사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들이었다. 계기판에서 눈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자 무수한 별빛들이 하늘의 거대한 계기판처럼 보였다.

만약 내가 조종사 대신에 비행기를 조종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마찬가지로 내가 지구라는 우주선의 조종을 떠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바보 같은 상상인가? 다시 말하지만, 신이 운전하도록 믿고 맡기는 것이 낫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의 뜻을 신의 의지에 맞춘다면 스스로 조종할 때 겪어야 하는 많은 골치거리에서 해방될 수 있다.

나로 하여금 신의 존재를 믿도록 해준 이런 생각들을 떠올릴 수 있게 이끌어준 에드가 케이시에게 감사한다.

세속적 · 정력적 · 물질적인 삶을 사는 많은 친구들 역시 신을 믿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나의 이런 생각들을 듣고 그들 역시 어떤 통찰을 얻게 되었노라고 말한다. 친구들의 예를 볼 때, 내 생각을 독자들과 나누는 것이 본론에서 벗어나는 것 같지는 않다. 아마 독자들은 신의 실재에 관한 나의 볼품없는 연구를 일별함으로써 약간의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

어느 아름다운 가을날이었다. 케이시의 리딩을 읽다가 단풍이 붉게 물든 숲을 바라보게 되었다. 다양한 색으로 물든 나뭇잎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그것들은 우주적 힘인 창조 에너지에 의해 자란 듯이 보였다. 나뭇가지에 바람이 한 차례 획 스쳐가자 임무와 생명을 마친 나뭇잎은 땅에 떨어졌다. 이때 불현듯 각각의 나뭇잎은 나무의 부분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각각의 나뭇잎은 광합성 작용을 통해 자신이 속한 나무의 목적에 봉사하다가 가을이 되면 낙엽이 되어 나무가 자라난 그 땅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신과 우리의 관계에 관한 케이시의 리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잎과 나무처럼 창조된 영혼들이 비록 분리는 되어 있지만 신의 일부인 것이다. 잎을 만들어낸 나무가 협력자와 동료가 된 나뭇잎에 의존하듯이 신은 협력자와 동료로서 자신에게 봉사하는 개인을 창조한 것이다. 그리고 나무의 작은 씨앗 속에 완전한 나무로 자라기 위한 모든 것이 담겨 있듯이, 우리 각자의 내부에도 신의 영혼이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의 신성한 에너지 속으로 완전히 몰입할 수 있다.

가을이 깊어진 뒤 그 나무를 다시 바라보았다. 이제 나뭇잎은 모두 떨어지고 헐벗은 가지만 팔 벌려 갈구하듯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내년 봄 다시 새 생명이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리라. 나무들은 우주에 충만한 창조력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침묵 속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나에게는 이 나무들이 케이시가 강조했던 것처럼 우주의 힘에 완전히 동화되어 그것에 순종한 것이 왜 도리에 맞는 것인지에 대한 좋은 본보기였다.

나는 아직 신에게 완전히 내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단계까지는 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렇게 평화롭고 자비로운 순응의 길로 나를 이끌어준 케이시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리스도 의식은 우리 내부에 신의 영혼이 담겨 있다는 자각

에드가 케이시는 생의 대부분을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보냈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신과 성서에 대한 믿음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것은 그가 쓰는 어휘나 최면상태에서 말하는 억양에서도 나타났다. 그의 영적 리딩은 성서적 표현의 메아리처럼 들린다. 그는 성서의 글귀를 자주 언급했으며, 그의 리딩에는 성서의 글귀와 그의 철학이 함께 녹아 들어가 있었다.

리딩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글귀 중 하나는 ‘그리스도 의식’ 인데, 여기에 케이시 리딩의 핵심이 담겨 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원리에 주의를 집중해야만 하며, 그 원리가 존재에 대한 완전한 이해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준다는 것이다.

케이시 가르침의 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의식을 확실히 자각해야 한다. 우리가 이 용어를 단지 신약성서에 국한된 의미로만 받아들인다면 제 길을 가지 못할 수도 있다.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활동하면서, 케이시는 구약과 신약을 가리지 않고 성서의 모든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였다. 그는 구약과 신약 모두를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에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은 잘못된 것이며 불필요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더구나 예수가 가르친 원리가 유대-기독교에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부처나 다른 스승들도 그런 원리를 설파했던 것이다.

수천 년 이상 예수가 가르친 원리들은 종교적 ·지정학적 논쟁에 얽매여 그 진실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 원리들은 실천되어야 하는 것들이지 이론적으로 옹호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하듯이 실제로 적과 이웃에게 사랑을 베푼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타인에 대한 봉사를 위해서 삶을 헌신한다면 어떻게 될까? 케이시가 자주 말했듯이, 우리가 미움을 버리고 친절과 인내와 사랑을 실천한다면 어떻게 될까? 달리 말하자면, 예수가 바랬듯이 우리가 황금률(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을 최우선으로 실천한다면 어떻게 될까?

사실 이런 원리는 단지 표현만 약간 다를 뿐 세상의 거의 모든 종교에 공통적으로 보여진다. 케이시의 범종교주의는 이런 가르침의 보편성의 반영이다. 바로 이런 보편성으로 인해 우리는 케이시의 리딩을 자신의 입장에서 자유롭게 평가할 수 있다. 우리가 믿는 종교에 구속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실 이런 가르침들은 그리스도 의식의 고차원적 성장의 결과이자 방법이다.

그리스도 의식은 보다 단순한 개념인 황금률보다 더 고차적 개념이긴 하다. 케이시는 그리스도 의식이라는 용어를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즉 의식하든 못하든 우리는 유일한 창조력 혹은 신의 부분이라는 자각이 각자의 내부에 존재하며 그 자각이 바로 그리스도 의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지식은 우리들 대부분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지만 그것을 의식 상태로 끌어올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열 수 있으며 자신을 이런 힘에 조화시킬 수 있다. 이런 조화가 개인의 의지를 신의 의지, 즉 창조력의 의지로 한층 더 가깝게 이끌어 준다. 이렇게 개인의 의지가 신의 의지와 조화를 이루게 되면, 우리는 세상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되고, 삶의 방식도 변하게 되며, 타인과의 관계도 바뀌게 된다. 그리고 점차 예수처럼 우주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예수는 그리스도 의식을 완벽하게 지니고 있었다.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라고 불려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신에 대한 완벽한 조화 때문이었다. 그리스도 의식이 오직 예수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조화를 추구하는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내부의 그리스도 의식은 신에 이르는 통로이다

미심쩍은 마음을 지닌 사람일지라도 역사적 사실로서 인간 예수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단 한 사람이 인류 역사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친 예는 유사 이래 처음이었다. 이 점을 생각해보자. 세계 전역에 걸쳐 사용되고 있는 달력이 신화 속의 인물의 탄생일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란 말인가?

그러나 케이시는 우리의 모든 생각 속에 스며들어 있는 그리스도 의식을 따르는데 있어서 예수의 삶이 신화인지 사실인지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한다. 단지 그리스도 의식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풍요로움을 얻고 더 조화로운 존재가 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그런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말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케이시는 예수를 길 안내자, 즉 모든 사람이 우주적 힘에 녹아들 수 있도록 가장 신뢰할 만한 길을 제시해 주는 최상의 안내자로 간주했다. 예수는 신의 물질적 차원의 현현이며, 신성이 우리에게 좀 더 가까워지도록 하려는 배려였다고 케이시는 생각했다. 케이시는 리딩 1158-14에서 이런 생각을 성서적 표현으로 말하고 있다.

“‘너희 영혼이 내 영혼의 증거이다.’라는 성서의 말처럼 우리는 자신이 살아있는 신의 자녀들임을 압니다. 신은 사랑을 낳았고, 예수를 통해 육체로 구현되었습니다. 예수는 이방인이 아닌 형제로서, 그리고 신의 상속인으로서 - 그렇습니다! 신의 무한한 사랑을 사람의 자녀들이 알 수 있도록 - 육체로 현현한 그리스도가 되어 상속권을 공유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삶에서 신의 무한함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라는 한 인간의 삶에서 신의 무한함을 봅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나는 왜 예수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릴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해 자주 의혹을 품곤 했다. 그러나 왜 예수가 그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가 취한 행동의 영향이다. 그는 덧없고 비실재적인 현상계(물질계)를 초월한 중요하고도 드높은 영적 세계가 실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생각이 짧은 사람은 지상에서의 순간적인 삶이 실재이며 영원하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태풍 앞에서 촛불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과 같다. 어떤 역사적 대사건도 예수의 희생만큼 인간에게 이런 점을 극적으로 가르쳐준 것은 없었다. 단지 이런 이유 한 가지만으로도 예수의 자기 희생은 최상의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만일 우리 모두가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공통의식을 지니고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만일 우리가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시작한다면 분명히 세상은 훨씬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다. 심지어 이기주의마저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슬픈 사실은 우리가 그 가르침을 충분히 실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가 그것을 실천하리라는 희망은 있다. 오직 자신만이 스스로를 방해할 따름이다.

예수의 가르침이 케이시의 리딩 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케이시는 우리에게 친절하고, 온화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한다. 예수를 신성한 인도자 내지는 길 안내인으로 보는 케이시의 관점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게 한다. 즉 우리는 내부에 그리스도 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영적 도움을 얻기 위해 삶을 통해 그 의식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을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내가 아직 한참 멀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일상의 삶이라는 험한 파도를 헤쳐 가는데 있어서 그리스도 원리가 반가운 부표가 된다는 케이시의 암시를 받아들일 수 있다. 요컨대 우리는 문제거리들을 그에게 떠넘기도록, 무거운 짐을 그의 어깨에 내려놓도록 권유받은 것이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큰 도움과 한 없는 위안이 될 수 있다.

내가 이해한 것을 정리해 보면, 신성의 물질적 표현이 그리스도 원리이며, 그것은 우리가 우주적 힘에 파장을 맞출 수 있도록 돕는다. 그 결과 우리는 우주적 힘과 하나가 되고 더 완전에 가까운 존재의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케이시가 강조한 타인에 대한 친절과 인내, 그리고 비이기적인 봉사는 우리 모두가 갈구하는 최적의 생활환경을 창조할 수 있다.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그리스도 의식을 통해, 우리가 받은 가르침들을 통해, 그리스도 정신은 신과 창조력에 이르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종교는 신의 안을 보고, 과학은 신의 바깥을 본다

신이 우리 내부에 존재하고 바로 그 곳에서 신을 찾을 수 있다는 케이시의 확신이 삶에 얼마나 확실한 효과를 주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내부에 있는 창조력에 접근해 가면 그것으로부터 영적 · 도덕적 안내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안내는 외적 환경의 영향을 받거나 왜곡되지 않는다. 나는 이 실재하는 힘이 자이로스코프와 같은 작용을 한다고 생각한다.

자이로스코프 나침반은 자석 나침반하고는 전혀 다르다. 자석 나침반은 여러 지형에서 발생되는 전자기적 왜곡 현상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실제로 자석 나침반은 항상 양극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북극에서는 그것이 무용지물이 된다. 어떤 의미에서 북극에서는 그것이 ‘주관적’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그 자체(북극)를 가리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이로스코프 나침반은 그것을 싸고 있는 케이스나 지리적 위치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나 진짜 방향을 가리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전에 난투켓에서 10미터 짜리 돛배를 타고 파도가 일고 있는 바다로 항해한 적이 있었다. 이때 나침반이 갑자기 고장이 났다. 밤 하늘에 항상 북쪽에 떠 있는 북극성을 기준으로 항해해서 겨우 목숨과 선체를 구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 사건은 흉폭한 바다와 싸울 수 있는 용기를 불러 일으켜 준 내 안의 신을 되돌아 보게 하는 계기도 되었다.

케이시는 우리에게 밖과 안을 동시에 보라고 말한다. 비록 우리가 신을 보거나 만질 수는 없을지라도 우주 전체에 편재된 신을 항상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 항해의 동반자이다.

그러나 신을 믿는 우리가 진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현대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적합한 신의 의미를 알아야만 한다. 이 점을 고려할 때, 로버트 J. 제프리스의 통찰력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는 탁월한 재정가이며 교육자이고 과학자이며 사업가이다. 그는 에드가 케이시 재단과 연구계몽협회(A.R.E.) 그리고 아틀란틱 대학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다.

제프리스는 요즘 서구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랜 세월동안 전해 내려온 영적 유산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고 지적 한다. 현대적 의식은 정통-유대-기독교 이론의 일부에 대해서 불안하고 꺼림직한 느낌을 갖게 되었으며, 아담과 이브는 그 화려한 빛을 잃었다고 지적 한다. 노아와 승객이 넘치는 그의 방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혼잡한 것 같다. 처녀 잉태와 예수의 기적은 이제 일부 사람들에게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고, 그런 기적에 바탕을 둔 특단적 교리의 가르침 역시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외계 우주에 대해 충분히 알게 된 지금, 현대적 신앙은 하늘의 어느 곳에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성서와 과학의 발견들 사이의 충돌은 점증되어 왔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그런 충돌의 가장 극적인 예는 아마도 창조론자와 진화의 가르침에 입각한 비 종교적인 인문학자들 사이의 충돌일 것이다.

읽은 책 중에서, 에머슨은 천국이 하늘에 있는 신비로운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완벽한 의식의 상태’라고 정의했다. 이것은 케이시의 생각과 합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창조론자와 비종교적 인문학자들 사이의 충돌은 불필요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제1원인(시원)으로서 신이라는 케이시의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이 두 학파가 충돌할 필요가 없어진다. 제1원인이 ‘빅뱅’으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해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진화는 단지 창조의 부분적 요소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 논쟁의 양 당사자가 모두 옳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윈은 정확하기는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내 아내 엘리자벳은 그녀의 책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진화론은 단지 부분적으로 진화한다.”

흥미롭게도 20세기의 비종교적이며 과학적인 믿음에도 불구하고 제프리스는 많은 사람들이 예전보다 더 열렬하게 신의 존재와 신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런 근본적인 의문들에 대한 대답이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의 지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성의 견지에서 주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점점 느끼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는 개인적이며 영적인 철학을 찾고 있다. 그것은 지적임과 동시에 도덕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우리가 그것을 토대로 삶을 건설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제프리스는 정통적 신앙을 시험하는 것은 그것을 버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현대적 이해 수준과 조화를 이루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우리는 현대적 지식의 견지에서 스스로 대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으며, 과거의 잘못이 감춰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제프리스는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우리는 스스로 신을 찾기 위해 신학에 의존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신학자들의 왜곡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근본적인 진리 속에 억지로 심어 놓았으며, 특히 그런 생각에 물든 신학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제도화되어 왔던 것이다.

제프리스가 상기시켜 주었듯이, 성서는 아직도 통찰과 개인의 영적 믿음을 위한 훌륭한 원천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과학 자체도 물질적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견지에서 종교와 동일한 영적 영향을 줄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과학은 물질계(현상계)의 모든 것이 불변의 법칙에 따른 공통적 화학 성질의 조화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자연법칙은 케이시가 강조한 것처럼 물질적인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사실 과학 자체는 약간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 인간 존재의 영적 차원을 탐색하고 있다. 노벨상 수상자인 존 에크레스 경은 ‘인간의 마음은 두뇌와 분리되어 있으며 마음이 두뇌를 지배한다.’는 학설을 주창했다 그는 자신이 실험을 통해서 이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고 말했다.

비물질적 마음이 물질적 두뇌에서 분리되어 있으며 동시에 그 두뇌를 지배한다는 사실이 함축하는 의미는 굉장한 것이다. 물질의 속박에서 벗어난 마음은 케이시가 리딩을 행할 때 갔던 그 길을 자유롭게 거닐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마음이 물질적 육체에 속박되지 않았기 때문에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그것은 자유롭게 존속할 것이다. 더 나아가 개별 영혼의 생각이 영속적인 의식 속에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케이시는 리딩 3188-1에서 이러한 의식의 존재와 제1원인(시원)과의 관련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 즉 시원은 질문자에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 실체(질문자)가 자신의 의식을 발견할 수 있고 선과 악,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을 자각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입니다. 영혼에게는 죽음이란 없습니다.”

제프리스는 양심뿐만 아니라 인간의 의식도 신성이 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분명 인간이 단지 물질적인 존재 이상이라는 사실은, 제프리스에게는 신이 존재 한다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신의 영적 본질에 대한 그의 믿음의 기초이기도 하다.

 

신에 이르는 길은 명상이다

‘신이 존재하는가?’ 라는 첫 번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유한하고 제한된 마음으로 무한을 탐색해야 한다. 이것은 열쇠 구멍으로 힐끗 보면서 집 전체를 설명하려는 것과 같으며, AM 라디오를 가지고 FM 방송을 들으려는 것과도 같다. AM 라디오의 회로 자체가 FM 방송을 듣기에는 적합하지 않음에도 말이다.

우리의 두뇌 회로도 이와 같이 제한적이다. 특히 의식 수준에서는 더 그렇다. 그러나 케이시는 이러한 한계를 초월한 투시 능력을 보여 주었다. 그의 이런 능력은 그가 행한 수많은 피지컬 리딩에서 증명되었다.

우리 모두도 이런 도구를 이용할 수 있다. 신과 우주에 펼쳐진 신의 장대한 계획을 탐색하고, 삶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고, 우리의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구하는데 이런 도구를 이용할 수 있다.

그 도구는 바로 명상이다. 케이시는 리딩 1861-19에서 ‘명상이란 우리 내부의 신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라고 단순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만일 명상이 신의 말을 듣는 것이라면, 기도는 신에게 말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에드가 케이시만이 명상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동서양 종교의 독실한 신자들은 몇 천 년 전부터 명상을 실천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 미국인으로서 케이시는 시대를 수십 년 앞서 있었고, 동양사상에 흥미를 느끼는 최근의 추세를 미리 예견하였으며, 생체 자기제어(biofeedback)로서 치료를 목적으로 명상기술이 사용되리란 것도 예견했다. 그는 훈련된 깊은 호흡을 통한 요가를 권고했으며, 몸 안에 있는 차크라 센타의 중요성을 믿었다. 그에게 도움을 청했던 많은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서는 고요한 명상을 하라’는 그의 암시가 대단히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 명상을 통한 육체적 · 정신적 건강증진 가능성이 조지 H. 홀린스(외과의사)에 의해 실험 되었다. 홀린스 박사는 자신이 명상보다는 의학적 치료의 전문가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신과 환자들을 위해 실질적으로 명상을 이용했고, 그 결과는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홀린스 박사는 「A.R.E. 저널」에 다음과 같이 썼다.

“명상이 우리 자신과 타인에게 미치는 최상의 정신적 영향 중 하나는 생각과 느낌과 태도를 좀 더 잘 조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장 많이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근심과 걱정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명상 중에 모든 문제들을 신에게 떠넘길 수 있는데 무슨 걱정이 필요합니까?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모든 일들을 신의 손에 맡기는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이 신성한 질서에 따라 진행되며 우리에게 최선의 것이 주어질 것임을 알게 됩니다.”

바쁜 대도시 의사의 입에서 나온 말 치고는 감동 깊은 말이다.

 

명상은 육체와 정신을 영적 근원에 조화시킨다

나는 퀘이커 교도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종교적 집회에서 명상을 배웠다. 그들은 신이 외부뿐만 아니라 우리 내부에도 존재하며, 신은 내적인 빛과 직접 들을 수 있는 목소리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빛을 보고 목소리를 듣기 위해 공인된 성직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신성한 에너지의 정수는 우리들 각자의 내부에 담겨있다.’고 말한 케이시는 퀘이커 교도가 아니었지만 그의 견해는 퀘이커 교도와 비슷했다. 그는 기독교적 시각을 바탕으로 위대한 고대 동양철학을 끌어안았던 것이다.

퀘이커 교도는 기도할 때 침묵 속에서 그룹 명상을 하게 된다. 명상 중에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느낀 사람이 그 침묵을 깨고 신의 소리를 전한다.

케이시는 개인과 그룹에 미치는 명상의 절대적 가치를 이해했다. 명상은 신과 하나가 되기 위한 길을 탐색하는 도구다. 그는 명상이 내적 발견을 위한 근본원리라고 여겼다. 리딩 284-41에서 케이시는 명상의 목적을 자세히 설명했다.

“우리 모두는 자신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인지에 대해 때때로 혼란스러워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발견합니다. 우리 자신이나 타인이 보기에 그것이 모두 아름답거나 정결하거나 순수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민활하게 하거나 그것을 찾으려 애쓰기보다는 외적인 모습에 더 주의를 기울입니다.”

이때 ‘명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제기되자, 그는 이런 혼란스러움을 해소하는 명상의 역할에 대해 말했다.

“명상은 생각에 잠기는 것도, 백일몽을 꾸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육체가 물질과 정신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압니다. 명상은 물질적 육체와 정신적 육체를 영적 근원에 조화시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명상은 창조주와의 관계를 알기 위해 물질적 정신적 속성을 창조주와 조화시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명상입니다.”

 

창조주가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것은 영혼이었다

리딩 281-41에서 케이시는 명상과 관련하여 인간 영혼이라는 표현을 썼다. 케이시는 영혼이야말로 모든 개인의 궁극적인 정수이며, 바로 그 곳에 진정한 의식과 자각이 들어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런 점을 확신하지는 않는다. 이런 의혹에 대해 케이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나은 것을 바라며 소망한다는 바로 그 사실, 우리가 슬프거나 기쁠 수도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마음의 활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본질적으로 불멸의 어떤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시작된 근원에 이어져 있습니다. 영혼, 그것은 창조주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졌습니다. 몸이나 혹은 마음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영혼이 창조주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입니다.”

당신도 긴가민가하겠지만 나 역시 이런 말을 의심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내가 경박한 불가지론에 사로잡혀 있던 시절 내내, 영혼에 대한 나의 믿음이라는 것은 세찬 바람에 휩쓸려 이리저리 튕겨 다니는 탁구공과 같았다. 그러던 중 나는 자신의 회의주의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경험을 했었다.

1957년 어느 날 나는 「뉴욕 타임즈 지」에서 우연히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게 되었다.

‘판사는 영혼에 관련한 130개의 증언을 듣고서, 어느 사람에게 탄광업자의 유산을 물려줄지 결정해야 한다.’

이것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기사였다. 제임스 키드는 아리조나 피닉스 근방의 불길한 ‘미신 산’에서 부업으로 금을 채굴했던 것 같다. 그 지역은 실종된 네델란드인의 금광이 있었다고 전설화되다시피 한 지역이다. 구리 채굴업자인 그는 한 해에 3천 달러 이상은 결코 벌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1949년에 불가사의하게 사라진 이후 현재까지 그의 부동산의 가치는 거의 2,500만 달러에 달하게 되었다.

제임스 키드의 시신이나 그의 금광은 결코 발견되지 않았다. 유일하게 발견된 것은 그가 휘갈겨 쓴 유언장이었는데, 유언장에서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인간의 육체가 죽은 뒤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사람에게 주겠노라고 썼다.

나는 그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에, 그의 시신과 광산을 찾기 위해 수 주 동안을 ‘미신 산’에서 말을 타고 다니면서 보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찾지 못했으며, 말안장으로 인한 상처만 아직까지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었다. 즉 소위 말하는 ‘금세기의 유령재판’에서 나는 무언가를 배웠던 것이다.

130건 이상 되는 개인이나 기관 혹은 연구소들이 제임스 키드의 재산에 대한 권리를 신청했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영혼의 존재와, 죽음과 동시에 영혼이 육체를 떠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법정은 수 주에 걸쳐서, 텔레파시와 투시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증언과 죽음 뒤의 삶에 관한 명백한 증거가 되는 초자연적 현상들, 그리고 인간 영혼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수많은 증언을 듣고 난 다음에, 제임스 키드의 재산을 결국 미국 심령 연구회에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초자연적 현상과의 최초의 만남이었다. 그리고 이 경험은 훗날 내가 케이시의 리딩을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 많은 준비와 도움이 되었다.

 

명상은 내부의 영혼을 일깨운다

수많은 리딩에서 케이시는 개인적 실체는 육체와 정신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아주 복잡한 주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모험을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케이시가 인간의 내적 삶을 의식의 3가지 기본 상태로 구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의식과 잠재의식과 초의식이다.

‘영체(soul-body)’가 머무는 곳은 초의식 안이며, 영체는 각 개인적 실체(entity)의 영속하는 영적 본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의식을 통해 신에게 접근할 수 있다. 리딩에 따르면 케이시의 영적 정보는 바로 이 초의식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창조력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 모두가 얻고 싶어 하는 우주적 지식 역시 바로 초의식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의식은 현재의 삶을 주관한다. 그것은 물질적 육체와 오감이 인식하는 수준이다. 잠재의식은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높은 의식과 유한하고 제한된 의식상태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한다. 명상은 우리가 영혼을 찾고 그 영혼을 통해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신을 찾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리딩 826-11에서 케이시는 ‘그렇다면, 그러한 무한한 힘의 영향을 실체가 어떻게 자각할 수 있는가?’ 하고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자 곧 해답이 나왔다.

“정신적 자아(마음)가 명상의 고요함 속에서 긴장을 풀고 느슨해졌을 때, 그리고 그것이 자아에 미치는 영향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자아의 열림에 의해 의식이 진공처럼 느슨해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때 열린 육체의 중심들(차크라)을 통해 의식은 영적 자아가 내재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영적 자아는 자아의 일부이며 자아 속에 싸여 있습니다. 영적 자아의 에너지는 깊은 곳에서 의식의 차원으로 솟아오릅니다. 만일 정신적 자아가 신의 의지와 조화되어 있다면 성령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케이시가 좋아하는 성서의 인용문 중 하나가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인 줄 알아라.”(시편 46: 10)

 

마음을 멈추고 자아를 비워라

명상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케이시는 명상을 배우는 과정이 갓난애가 처음으로 걸음마와 말을 배우는 것처럼 거북하고 불편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명상을 배우는데 있어서 내가 당면한 첫 번째 문제는 어떻게 매일 15분씩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케이시는 하루에 15분의 명상이 가장 적절하며, 그것을 끝까지 계속하라고 권고했다.

우리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침묵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일처럼 들린다. 그러나 분주한 현대적 삶의 와중에서 생각과 행동을 딱 멈춘다는 것은 충격적일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뒷좌석에 짐을 가득 실은 상태에서 갑자기 브레이크를 세게 밟는 것과 같다. 우리가 미처 고개를 숙이기도 전에 그날의 모든 근심걱정이 목뒤에 부딪쳐 산산조각 날 수도 있다. 일상적인 걱정거리가 나를 엄습할 때면 내가 인생을 낭비를 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불안에 휩싸이곤 했었다.

이때 내가 깨달은 것은, 육체적 · 정신적 고요함으로 이끌어주는 바로 그 행동(명상)이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자신을 근심걱정의 차폐막(명상)으로 억지로 끌고 가야만 했었다. 일련의 깊은 호흡, 20번 내지 30번의 심호흡은 내 마음에서 일상적인 걱정거리를 몰아내 주었다. 비록 당장에 마술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고요함 그 자체에 창조와 치유의 힘이 깃들여 있다.

실제적 견지에서 케이시는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즉 편안한 자세로 앉거나 누운 다음, 꽉 죄는 옷을 느슨하게 하고, 요가의 방법에 따라 심호흡을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육체적 의식을 느슨하게 하여,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우주의식과 접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타인에게 품고 있는 원한과 불친절한 생각들을 멀리 쫓아내게 된다. 자아가 신의 의지에 완전히 복종하는데 유리하도록 이기적 욕망은 버려진다. 케이시는, 신은 우리가 부르면 바로 응답하기 위해서 언제나 가까이 머물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우리는 내부에서 창조력이 솟아오르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서 제거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을 실행하는데 선언이나 기도가 도움이 된다.

 

이상을 설정하고 그것을 선언하라

간단히 말하자면, 선언이란 명상을 시작하면서 창조력과 자신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한 두 마디의 말이다. 우리는 선언을 통해 자신보다 더 위대한 힘에 마음의 초점을 맞추게 된다. 선언의 목적은 신을 향해 우리 몸의 통로를 여는 것이며, 신은 그 통로를 따라 우리를 충만하게 하고 권능을 주는 것이다.

선언은 우리의 이상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다. 케이시는 우리에게 영적 이상을 설정하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허버트 퓨리어가 그의 책 『에드가 케이시 입문서』에서 말했던 ‘중요한 동기의 중심, 정수, 혹은 내부의 핵심’을 설정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내부의 고차원적 목적 의식을 일깨워 주는 모세 · 예수 · 부처와 같은 단순한 이름일 수도 있다. 그것은 ‘사랑’ 혹은 ‘하나됨’과 같은 단어나 그 단어의 속성일 수도 있다. 우리의 최고의 이상이 무엇이든 간에 케이시는 명상 중에 그 이상을 계속 유지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영적 의식을 위해 육체적 의식을 잠재우게 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서 리딩 281-41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육체에서 벗어나면 신과 함께 하게 된다.”

 

진언(Mantra) - 만물은 진동이다

간혹, 케이시는 동양 종교에서 하듯이 진언을 외우면 육체의 파동을 창조력에 동조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리딩 2823-3에서 케이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명상의 방법을 말하자면, ‘오~옴’ 하는 소리를 내면서, 그 떨리는 소리에 마음을 동화시키도록 하십시오. 억양 없이 단조롭게 하지 말고, 그 소리의 배후에 있는 본질을 느껴 보십시오. 육체의 힘을 통해서 육체의 쿤달리니가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다른 것들(일곱 차크라)을 정(淨)하게 합니다. 쿤달리니는 육체의 창조적 중심에서 잠을 깨어나 육체 여러 곳의 에너지 센타를 통과해 올라갑니다. 그것은 항상 ‘신이시여, 저희 뜻대로 마옵시고, 언제나 당신 뜻대로 하옵소서.’란 목적을 가지고 자아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쿤달리니가 머리에 있는 일곱 번째 차크라에 도달하면 실체는 직관과 통찰력과 많은 분별력을 얻게 됩니다.”

케이시는 진언이 내부에 있는 이런 특성을 불러 일으켜서, 우리를 내부에 있는 창조주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가 부언하기를 이기적인 동기로는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케이시는 이기적인 동기를 버리는 것이 명상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했다.

물론 진언을 읊조리면서도 자아에 대한 의식을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동양 역사는 오랜 세월 동안 진언이 유용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카트만두에서 에베레스트 산기슭까지 힘든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진언을 처음 접할 때까지 나는 진언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꼬불꼬불한 히말라야의 산길은 거대한 사원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사원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순간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대여섯 명의 수도승들이 붉은 법복을 입고 가부좌를 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그들은 허리를 곧게 펴고 머리는 숙인 상태로 앉아 있었는데, 나의 출현에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진언을 웅얼거리고 있었는데 그 낭랑한 울림은 법당의 대들보를 진동시켰다.

그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서 그 곳에 앉아 있는데 진언을 하는 소리가 나를 꿰뚫는 것 같았다. 그 소리가 계속되자 나는 마치 바닥에서 위로 들어 올려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진언의 목적이 그것에서 울려나오는 진동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다음과 같은 통찰을 얻었다. 모든 생명은 진동이다. 원자로부터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수 조 개의 세포들, 그리고 우주 자체의 리듬과 맥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진동이었던 것이다.

명상을 하는데 있어서 만트라의 진동은 우리가 창조력에 동화될 수 있도록 돕는다. 나는 이 점을 그 당시 녹음했던 테이프를 듣고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녹음테이프를 들으면 육체적 · 감정적 긴장이완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완은 케이시가 리딩 826-11에서 말했던 ‘내부에서 울려 나오는 고요하고 작은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고인이 된 휴 린 케이시 박사(에드가 케이시의 아들)는 심리학과 초심리학의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기 아버지의 리딩을 철저히 연구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의 명상의 활용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리딩 1861-12에서 ‘명상을 해서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것이 가능합니까?’라는 질문이 주어졌을 때 에드가 케이시는 위트 있는 놀라운 대답을 했다.

“어떤 정보라도 가능합니다. 당신은 낚시에 쓸 지렁이를 파내는 일부터 협주곡을 연주하는데 필요한 정보까지 얻을 수 있습니다.”

휴 린 케이시는 명상이란 고요함 속에 침잠하는, 긴장의 이완과 느긋함을 추구하는 과정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우리는 항상 최우선의 목적인 무의식이라는 고차원의 영역을 열고, 자아를 창조력의 의지에 완벽하게 일치시킨다는 목적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이 명상을 진지한 수련이 끝없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에드카 케이시가 리딩 274-3에서 말한 것을 안도하는 마음으로 반갑게 주시해 보라.

“명상과 기도에 있어서, 오랫동안 그것에만 매달릴 필요는 없으며, 삶의 만족을 주는 주변의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물질적인 것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그것들이 마음의 목적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즐겁고, 친절하고, 사랑하면서, 열린 마음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분명 명상은 우리 내부의 신을 찾는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가 이 책에 나오는 다른 중요한 질문들을 탐색하는데 있어서 명상의 기술은 여러 면에서 유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케이시가 보여주었듯이 명상은 우리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신앙과 무신앙

나로 하여금 불가지론이라는 정신적 장벽을 뛰어넘도록 해준 에드가 케이시에게 감사한다. 불가지론적 태도는 항상 나를 괴롭혔다. 그런 태도는 확신이 없고 망설이는 우유부단한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불가지론은 기아를 중립에 놓은 상태로 자동차 경주에서 이기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립적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아무 맛도 없다는 것을 뜻했다. 그래서 나는 그런 무관심한 상태를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한편으로는, 어떤 믿음에 대한 열정적인 옹호자는 남과 마찰을 일으키는 수가 있다. 일부 선의의 옹호자들은 그들의 믿음을 타인의 머리 속에 심어줄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케이시는 이 문제(신앙을 갖느냐 마느냐)에 대해서 우리 자신의 판단에 맡기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를 솜씨 있게 조종하고 있다. 하지만 그를 따르기가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내가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 관한 연구를 마친 결과 나는 이제 우리의 삶에서 밀접하고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진정한 비인격적인 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다. 사랑과 빛의 신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쉽게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케이시가 말한 예수의 개념 역시 진실이다.

리딩 3003-1에서, 케이시는 우리의 내부에 존재하는 그리스도 의식을 슬픈 마음으로 바라보지 말라고 촉구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웃음을 잃는다면 즐거움마저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조차 웃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비록 그림에는 그 사실이 그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고통을 당할 때조차 웃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을 더욱 화나게 했습니다.”

케이시는 예수가 영적 영역이야말로 진실하고 파괴될 수 없는 것이라고 확신했다는 점을 우리가 가슴속에 간직하기를 바란다. 그런 확신이 있었기에, 예수는 로마의 병사가 자신의 육체를 파괴함으로써 앞으로의 세대를 위해 더 넓은 세상에 그리스도 원리를 전파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웃었던 것이다. 만약 사형 집행자가 예수를 살려두었다면 후세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동시에 케이시는 예수의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부처나 다른 위대한 스숭들의 사상들도 깨닫고 있었다. 그 사상은 우리 동료 생명체들을 위한 사랑과 평화의 등불로 세상을 밝게 비추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어떤 종교나 철학도 우주적 신과의 영적 교섭을 제한하는 회원제 클럽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