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편안한 휴가를 선전하는 TV 광고를 보고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았다. 여종업원이 일류 호텔의 테라스에 서서 ‘플로리다로 와서 일상의 근심 걱정을 털어버리라’고 시청자들을 초청하고 있었다.
“우리는 당신이 신문을 읽는 것도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날마다 험한 세상의 혼란에 의해 얼마나 호되게 공격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예이다. 정치적 격변, 피로 얼룩진 폭동, 그리고 온갖 분규에 관한 뉴스들은 내부에서 개인적인 절망감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즉 스스로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그런 사건들에 의해 자신이 내팽개쳐진 느낌이 드는 것이다. 유행병, 자연 재해, 그리고 도처에 널린 범죄와 직면하게 된 우리는 취약하고 무력하며 때로는 희망조차 없다는 그런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절망감이 특히 심하게 느껴지는 경우는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행하는 잔혹함을 목격할 때이다. 연쇄 살인, 강간, 그리고 폭력에 관한 뉴스가 항상 화면을 가득 채운다. TV. 신문은 유혈 사태와 폭동진압, 그리고 난민구제가 정치적 · 군사적 이유로 인해 방해받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한 대규모의 기아를 상세히 설명한다.
우리에게 가장 절망감을 안겨주는 사실은 그런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단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이와 같은 사건들을 마주하면서 마가렛 풀러가 ‘우주를 수용했듯이’ 이런 세상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만일’ 이라는 키플링의 유명한 시는, 주변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 미쳐갈 때 당신이 제 정신을 차리고 있다면 당신은 칭찬 받아 마땅하다고 암시하고 있다. 나는 항상 이 시가 너무 극단적으로 음울하고 청승맞고 감상적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시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영혼의 고차원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루어야만 하는 버거운 문제를 제기한다. 바로 내가 이 책을 쓰면서 맞닥뜨려야 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지나친 감상주의와 진정한 지혜의 중간에 처진 줄에서 줄타기를 해야만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명상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명상은 낚시 미끼를 찾는 것에서부터 협주곡을 연주하는 것까지 모든 것에 유용하다’고 한 케이시의 대답은, 감상주의를 피하고 모든 사람에게 유용한 길잡이가 되고자 하는 재치있는 위트의 본보기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나는 그의 리딩을 연구하면서, 그가 항상 한 발은 땅에 딛고 있으면서도 종종 고원(高遠)한 창공으로 솟구쳐 오른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태도는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문제에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평온을 누릴 수 있는가. 우리의 의지를 신의 의지에 조화시켜야 한다는 케이시의 안내는 우리가 주변 세상의 혼돈으로 인해 현기증을 느끼고 있을 때 확실하고 실제적인 도움이 된다. 우리가 세상의 힘에 의해 폭풍 속의 종이컵처럼 내던져진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과거보다 더 한층 내적 수단에 의지하게끔 내몰리게 된다.
케이시의 중요한 원리들을 마음에 간직하고 창조력은 외부 뿐만 아니라 내부에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우리는 무제한의 에너지와 체력과 힘을 끌어낼 수 있는 원천을 가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용기와 영성을 북돋울 수 있고 삶의 줄타기 곡예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 대부분은 특별한 기도문의 충고에 익숙하다. 성모의 기도, 고요의 기도, 그리고 아마도 예닐곱 개의 다른 기도문들이 있을 것이다. 그 기도문들은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바꿀 힘을 주고, 바꿀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일 고요함을 주고, 그리고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간구한다. 이것은 훌륭한 기도이고 나름대로 훌륭한 조언이다. 그러나 이 기도에는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는지 그 방법이 빠져 있다.
에드가 케이시의 영적 리딩들을 살펴봄으로써 리딩에서 제공하는 매우 중요한 그 방법들을 이해해 보자.
우리는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어떻게 내적 평화와 안정을 얻을 수 있는가? 또 우리는 어떻게 의미심장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세상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가?
영적 이상에 충실하면 평화를 누리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게 되겠지만, 케이시의 리딩은, 세상을 더 평화로운 상태로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 내부의 평화를 얻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진정한 내적 평화를 얻은 다음에야 다른 사람에게 평화의 빛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내적 평화를 얻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불신과 분쟁이 가득한 현대의 삶에서, 진실 자체가 상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내적 평화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의지할 수 있는 반석과 영적 안정을 주는 닻을 갈망하고 있다.
리딩 1977-1에서 케이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먼저 인생을 평화와 조화가 함께하는 전체로 여기십시오. 생존이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또 죽는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하나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만이 평화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언뜻 보기에 이 글은 단지 세심한 조언처럼 보였다. 즉 죽음과 삶은 하나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암시를 재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 그 이상의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 삶의 진정한 목적을 잊지 않도록 상기시키는 것이다. 각 개인의 목표가 내부의 신성함에 일치되어야 하고, 생각뿐만 아니라 행동에서도 자신을 창조력과 조화시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 케이시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당신이 신의 법칙과 조화롭게 산다면 평화롭게 살 것입니다.”
신의 법칙에 순응해서 살면, 내적 평화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구에서 함께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도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당신이 가족의 일원이듯이, 도시의 시민이고, 국가의 국민이며, 우주의 일원이라는 것을 아십시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케이시는 그 결과를 주의 깊게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목적을 무시하고 오직 이기적인 씨앗만 뿌렸다면 당신은 무엇을 수확할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우리가 오랜 세월동안 들어왔던 것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뿌린 대로 거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절로 자기 삶의 진정한 목적을 알게 되고, 그것에 전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질문 ‘우리 삶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가?’에서 언급된 충고가 여기서도 적용된다.
“먼저 영적 측면에서 당신의 이상을 파악하십시오. 당신의 성향에 맞는 이상을 선택하십시오. 왜냐하면 자신의 영적 이상을 알고 그것을 일에 적용할 때, 당신은 행복하고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방법으로 최상의 공헌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방법은 세상의 빛인 신의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향상 자신의 영적 이상에 충실하라고 케이시가 말한다. 영적 이상은 우리를 안정되게 고정시켜 주는 닻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외부 환경이 혼란스럽고 위협적이더라도 자신의 이상에 충실해야 한다. 심지어 물질적 보상이나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서도 이상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인생에는 밀물과 썰물과 같은 기복이 있습니다. 어두운 시절도 있고 햇빛이 가득한 시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적 목적을 지니고 있는 영적 실체는 평화의 안식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딩 1977-1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뿌린 것이 이상이라면 당신은 일상의 경험 속에서 그 이상을 수확하게 될 겁니다.”
이상이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영적 이상을 알고 그에 준해서 살아가야 하며, 선행 조건으로서 당신의 행동이 누구를 영광스럽게 하려는지 알아야 한다. 당신 자신인지 신인지.
선행을 하는 것은 항상 중요하다. 그러나 삶의 선택들이 비록 그것이 타인에게 도움이 될지라도 자기 출세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면 진정한 평화를 얻지는 못할 것이다.
리딩 622-6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킨다.
“영혼은 자기 내부에 현현한 신과 자신이 공동 창조자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선택이 실체를 이기적인 우쭐함으로 이끈다면 결국은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창조력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라면, 육체와 마음은 평화와 조화 그리고 그 영혼이 물질적 경험의 세계로 들어온 참다운 목적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동기에 주목할 때만 평화가 우리의 것이 된다는 말이다. 즉 우리의 행동이 내부의 창조력과 다시 하나가 되고자 하는 바램에 의해 인도되어야만 하며, 그 창조력의 의지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지위나 성공이 행동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 · 신의 본질 · 삶의 진정한 목적 등과 연관이 있고, 이 연관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케이시의 답변을 통해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리딩 256-4에서 케이시가 말한 것이 그다지 놀라운 사실은 아닐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과 자신의 능력을 신에게 헌신하면 그 속에서 기쁨과 평화를 얻게 됩니다.”
만일 세상에 봉사하는 것이 우리의 의지를 신의 의지에 일치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것을 항상 자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삶의 최우선적 목적인 창조력과 재결합하는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준다. 비슷한 생각이 리딩 136-2에도 나타나 있다.
“신과 하나됨을 이룬 그 상태에서 내적 자아는 신의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찾기를 갈구하는 것은 아주 주관적인 느낌이다. 즉 우리의 뜻이 신의 의지와 일치하고, 우리가 신의 의도에 조화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신이라고 불리는 에너지의 일부이며, 삶을 통해 그 에너지를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을 갈구하고 있다.
하나 됨이라는 이런 주관적인 느낌에 이르는 방법은 명상과 삶이 있다. 명상은 내부의 신과 접촉을 할 수 있는 아주 유용한 도구이며 삶은 그 삶의 운영을 통해 현생의 목적을 완수할 수 있는 도구이다.
리딩 622-4에서 케이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이란 방종이나 자기 자랑 혹은 자기 과시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단지 혼란과 분쟁 그리고 두통만 가져옵니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삶이란 신과 하나 됨을 이룩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영혼의 갈망이고, 유일한 창조력과 하나가 되면 그것이 모든 의식에 평화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창조력의 의지에 일치하는 삶을 살라
두려움과 의심을 치워버려라. 그리고 매일 신 안에 머물라고 리딩 262-128에서 충고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신을 믿고 그 말씀 안에 머물 때 평화가 찾아온다고 배웠다. 비록 간단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정말 이것은 신의 소리를 들으라는 단순한 충고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것은 새로운 깨우침을 향한 도전이다. 우리는 두려움과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에 직면해서도 진실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들어왔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더라도 창조력의 의지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우리를 위협할지라도 신이 우리에게 바라는 대로 그것을 기꺼이 감수해야만 한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 우리의 영적 확산을 단념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굳게 지키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가 신을 위해 살기 위해서는 어떤 두려움이든 극복해야 한다. 이것은 창조력의 의지에 일치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든 올바른 것을 지지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영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확신에 대해 용기를 가질 필요가 있으며 또 그것을 꾸준히 지속할 필요도 있다. 분명 기도문을 외우고 종교적 의식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리딩 1901-1에서 말한다.
“평화와 조화를 얻는 데 지름길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른 삶 속에서 그것들을 구하십시오.”
우리가 오직 안식일이나 자선사업을 할 때만 신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다. 평화와 조화를 얻는 길은 우리의 확신과 이상과 여타의 행동들에 달려 있다. 잘 생각해 보면 케이시의 경고가 분명하고 논리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자신의 양심을 거스를 수 없으며, 자기 자신과 가정과 이웃과 신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케이시가 주장한 기본적 원리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우리 각자는 창조력이 현상계(물질계)에서 물질적 형태로 구현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역시 신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에게 베푸는 지극히 작은 것일지라도 그것은 바로 창조주에게 베푸는 것이다. 우리가 이웃을 하찮게 대접한다면 그것은 바로 신을 그렇게 대접한다는 의미이다. 케이시는 이럴 경우 우리의 양심은 결코 평화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리딩 524-2에서 케이시가 말하기를, 소위 선행의 실천을 통해 우리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한다. 그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흔을 다해서 창조주를 사랑해야 하며, 거기서 그칠 것이 아니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이용해야만 한다. 남에게 관대해지려는 노력이나 자기 인생의 중요한 계획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거리에서, 시장에서, 그라고 다양한 인생의 길을 걷고 있는 각 개인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모든 기회를 이용해야만 한다. 이런 것들은 케이시의 교훈을 적용해야 하는 기회이자 통로이다. 그 답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약속 받는다.
“영혼과 마음은 은총을 받고, 지혜롭게 되며, 분별력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만족과 평화와 조화를 창조하게 됩니다.”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여 타인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라
리딩 165-22에서 케이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의 양심에 따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선행을 감추지 마십시오.”
이 충고에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찾아야 한다는 케이시 조언의 핵심이 들어 있는 듯하다. 우리의 행동은 풍요하고 봉사하는 삶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즐거운 하루를 보내세요!’라고 인사하는 것 이상을 필요로 한다. 리딩 1901-1에 따르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과 인내와 사람과 조화를 가져다 줄 수 있도록 자신의 재능을 활용해야 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의식이라는 개념이 아주 실제적인 것으로 바뀌게 된다. 우리는 첫 번째 질문에서 언급한 케이시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다. 즉 우리가 유일한 창조력의 일부라는 자각은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깨닫고 있든 아니든 우리 모두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바로 이 의식 상태에 완벽하게 동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과 완전히 일치되는 삶을 살면서 자신의 행동을 통해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그것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리딩에서 케이시는 예수의 삶을, 우리가 평화를 퍼뜨림으로써 어떻게 자신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본보기로 삼았다. 그는 우주에 가득한 창조력의 의지에 충실한 행동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평화를 퍼뜨렸다.
리딩 272-7에서 케이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킨다.
“지상에 있는 하느님의 아들에 의해 길은 이미 제시되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끊임없이 선행을 행했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계시도 아니었으며, 승리의 과시도 아니었고,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선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이 현상계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좀 더 잘 알려주고자 함이었습니다.”
즉, 예수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줄 목적으로 살았던 것이다. 이것은 자신에게 집착하거나 세상으로부터 도피한 사람은 흉내낼 수 없는 그런 삶이었다.
케이시는 우리가 예수의 형제자매이며 모두가 신성한 ‘빛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가 날마다 행했던 것처럼 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 곳에서 친절을 보이십시오. 저 곳에서는 온화함을 보여주십시오. 비틀거리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말을 하지 마십시오.”
이런 본보기를 통해서 주변의 사람들은 잘못을 저지른 아들에게까지 온화하게 말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메시지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것이다.
이 길을 따름으로써, 다시 말해 신의 사랑의 빛이 거리에서, 가정에서, 군중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도록 함으로써 우리가 받게 되는 보상은 힘과 희망과 평화이다.
케이시가 강조하는(리딩 1326-1) 자질 중의 하나는 인내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 있는 신에게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내와 형제애를 구현해야 합니다.”
그가 ‘구현(manifest)’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생각되었다. 우리가 창조력의 본질로부터 유래된 특성들을 세상에 구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단어를 사용했던 것 같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단지 모범을 보이는 것 이상의 일을 하고 있다. 우리는 장대한 신의 계획을 세상에 퍼뜨림으로서 ‘신의 공동 창조주’가 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리딩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평화롭고 싶다면, 먼저 타인을 평화롭게 해 주어야 합니다. 만일 친구를 가지고 싶다면, 자신이 먼저 친절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만일 사랑받고 싶다면, 먼저 사랑 하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케이시는 사랑스러운 사람 뿐만 아니라, 적이나 우리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까지 사랑을 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자신의 행복과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고 케이시가 말한 것의 또 다른 예이다. 상대의 적의를 기꺼이 감수하면서 다른 쪽 뺨을 대준다는 것은 항상 모험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니 이런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 그가 확언한 것은, 우리가 신의 의지를 실천하고 있다는 자각으로부터 얻는 내적 평화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익을 얻게 될 세상에 선의를 축적해 가는 것도 포함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전함이 아니라 노력이다
이런 조언들을 듣고 도저히 그렇게 살 자신이 없어 불안해지거나, 오직 성인들이나 이렇게 완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품을 수도 있다. 케이시는 그런 생각을 하는 당신을 안심시켜준다. 우리가 이런 메시지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서 완전할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은 단지 열심히 노력하는 것 뿐이다.
그 좋은 예가 1934년에 한 여성에게 행했던 리딩 516-2에 나온다. 그가 최면 상태에서 한 말에 따르면, 이 여성이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성인으로 비춰진 적은 결코 없었다.
“이 실체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그리고 관련이 있는 개인이나 집단으로부터 자주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활동으로부터 새로운 희망을 얻고 그녀에게 축복이 있으라고 빌고 있습니다.”
케이시가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희망과 인생의 전망을 엉뚱한 곳에서 찾으려 해왔다고 한다.
우리가 인간이 되면 족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대단히 큰 위안이 된다. 나는 분노, 시기, 증오를 전혀 느끼지 않는 상태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리딩 476-1에 따르면, 자신이 완전해지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이런 감정이 현실임을 부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해야만 할 일은 이런 감정들이 실재함을 자각하고, 그것들과 반대의 감정인 용서, 사랑, 돌봄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이다.
“이렇게 정화된 영향들은 영혼의 발전에 기여합니다. 비록 영혼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하겠지만, 그런 고난들이 평화와 행복과 기쁨과 조화를 가져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미움과 원한과 다툼의 반대되는 것들이 아닌가요?”
이상을 굳게 간직하는 방법
이제 우리도 알다시피, 잠자는 케이시는 내적 평화를 찾는 사람들에게 많은 유용한 가르침들을 베풀었다. 그리고 그런 모든 가르침들이 그의 근본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우리는 자신의 의지를 신의 의지에 일치시킴으로써 창조력과 다시 하나가 되는데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살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노력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한 것 같다. 나는 마음속에 이상을 굳건히 간직하기 위해서는 어떤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케이시는 ‘주기도문’이 이런 목적에 이용할 수 있는 완벽한 선언(affirmation)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을 단지 기계적으로 반복해서는 효과가 없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것을 되풀이하면서 한 줄 한 줄의 의미를 명확히 하고,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매 줄마다 깊이 숙고하자 그것의 중요한 함축적 의미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예를 들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를 보자. ‘우리’에 중점을 두고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다. 즉 나는 단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 그들 모두가 나와 마찬가지로 신에게 말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또한 이 문구를 말할 때 ‘하늘’을 ‘의식의 완전한 상태’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이미지들에 의해서 수렁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대신에 나는 비인격적인 신이 머물고 있는 자각의 상태를 상상할 수 있었다.
기도문을 계속 살펴보자. ‘이름(신의)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여기서 신에 중점을 둠으로써, 나는 세상의 혼란한 짐을 신에게 떠넘기기를 희망한다. 왜냐하면 신은 그 혼란을 다룰 힘이 있으며, 우리의 유한하고 제한된 시야로는 간파할 수 없는 장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나라에 임하옵시며 (주의 왕국이 세워지고), 뜻(주의)이 이루어지이다.’ 이 글귀에 대한 명상을 통해, 개인적인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우주의 궁극적인 계획을 수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나에게는 무의미한 혼란으로 보이는 것들이 단지 신의 찬란한 건축물을 완성하기 위한 보기 흉한 비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기도문이 결론을 맺고 있듯이, 무한한 권위(신)가 세상의 극심한 혼돈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훌륭히 다스려 간다는 것을 암시하는 쪽에 중점을 둘 수도 있다.
‘진정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대신에 ‘오직’이라는 단어로 대체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신의 무한하고 광대한 파장에 동조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의 현 상황이 지금처럼 절망적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A.R.E. 직원의 한 사람인 마크 써스톤은 주기도문의 이해와 실질적인 적용의 또 다른 방법을 창안했다. 그는 A.R.E. 스터디 그룹이 주기도문을 현대적 용어로 바꾸어 현 세상에 좀 더 유용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바뀐 기도문은 아무래도 시적 서정성은 덜했지만 현대화된 문구는 위대한 기본 원리들을 현대적 삶에 적용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바뀐 기도문을 여기에 기록하면서 이 장을 마치고자 한다. 당신이 자신의 평화를 찾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 모두를 이곳에 내신 창조력이여.
당신의 힘은 우리 모두를 초월합니다.
우리가 당신의 보이지 않는 조화와 함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우리의 제한된 시야로 당신의 장대한 계획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우리의 필요가 충족되도록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우리가 타인에게 행한 불의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동요되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외부의 파괴적인 힘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소서.
세계는 우리가 아니라 당신의 것입니다.
우리가 지닌 모든 힘은 당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그 힘은 우리가 성취하는 모든 것의 원천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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