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BOOK/에드가 케이시의 삶의 열 가지 해답

02. 삶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가?

기른장 2022. 1. 15. 19:32

우리 대부분은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제대로 길을 가고 있다고 전적으로 확신하고 일에 열중하고 결단을 내리고 문제를 해결해 간다. 그러나 어떤 때는 목적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기 위해 암흑 속에서 손을 더듬거려야만 한다. 그 목적이 백만장자가 되는 것입니까? 명성을 원합니까? 정치권력을 추구합니까? 성공의 또 다른 외적 형태를 바라고 있습니까?

내 친구 중 한 명이 이런 문제로 인해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사업에서는 크게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전보다 더 불행하고 불만족스럽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결국 찾아낸 대답은 각자는 다른 사람의 견해에 상관없이 자신의 내부로부터 성공을 느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내 친구의 경험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성공을 가늠하는 사회의 일반적 기준이 물질적 부, 남을 지배하는 권력 등 성공을 위한 내적 열망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로 하여금 삶의 진정한 목적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성공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우리는 분망하고 혼란한 일상생활 속에 말려들어 있기 때문에 삶의 진정한 목적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에드가 케이시의 우주적 의식은 일상의 혼란을 관통하여 근원적인 본질에 도달할 수 있으며, 그 본질로부터 삶의 진정한 목적을 분명한 영상으로 떠올릴 수 있다. 그의 리딩은 모든 수준의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물질적인 것,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 등 어느 한 가지 측면만 강조해서는 충분히 완성된 자아라는 진정한 만족을 창조할 수 없다.

케이시가 암시했던 것으로 우리가 새겨두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야망과 진정한 성공의 차이이다. 부적절한 야망은 그 자체 내에 자기 파괴의 씨앗을 품고 있는 듯하다. 야망은 보통 자기 과장이라는 결과를 낳는데, 케이시는 이 과장이 진정한 자기 실현의 중대한 장애물이라고 보았다.

나 자신도 삶의 목적을 올바르게 이해하려 노력했으나 줄 달린 ‘요-요’처럼 잡으려다가 놓치곤 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케이시가 이 주제에 관해서 말한 것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오랫동안 나는 ‘성공’이 내 인생의 목표이자 목적이라는 생각에 만족해 왔기 때문에 내 친구처럼 이제는 나도 성공의 진정한 의미를 스스로 정의 내려야만 했다. 튼튼한 재정기반과 행복한 가정과 가족, 그리고 좋은 친구들은 물론 내가 원하는 것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것들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아직도 이런 목표들이 전적으로 칭찬 받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생의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이 그것들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덧없고 사라지기 쉽다.

 

영적 성공이 진정한 성공이다

에드가 케이시의 리딩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역시 이런 현실적인 목표에 중요성을 부여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이런 목표들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영혼의 성공’ 이었다. 영혼에는 가장 강렬하고 영속하는 자각 의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내부에서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신성한 갈망을 무시해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비록 우리가 자주 그것을 일축해 버리기는 하지만.

그는 리딩 3420-1에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에게 물질적 성공으로 간주되는 것 모두가 영적 성공은 아니다.”

한 가지 분명한 지침은 천박하거나 피상적이거나 이기적인 것은 영혼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도 이런 지침을 무시해서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던 경험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마도 직관에 따른 결과겠지만 케이시가 말한 것과 유사한 생각들을 따른 결과, 나 자신이 보상을 받았다고 느꼈던 그런 경험들도 있었다.

나는 전에 믿기 어려운 미스터리를 조사하기 위해서 프랑스에 갔었다. 론 강변의 인구 3천의 작은 마을인 ‘풍-셍-에스프리’라는 마을의 전 주민이 단 하룻밤 사이에 모두 미쳐버렸던 것이다.

처음에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극심한 불면증을 앓게 되었다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거리의 카페는 잠을 잊은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도록 밤새 문을 열어두어야 했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병적 도취감의 물결이 마을을 휩쓸었다. 주민들은 광적인 명랑함과 설명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수 년 동안 서로 말도 안 붙였던 사람들이 사랑에 넘쳐서 서로 부둥켜 안았다.

그러나 일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마을의 분위기는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전직 공군 조종사가 자신은 비행기며 날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마을회관 발코니에서 모여 있던 군중들 머리 위로 뛰어내렸다. 또 다른 주민은 자신이 서커스 단원이라고 외치면서 교각을 고정시킨 케이블 꼭대기에서 춤을 추었다. 아이들은 호랑이들이 천장 속을 어슬렁거리고 있으며 피가 그들에게 떨어지고 있다고 소리 질렀다. 결국 주민 모두가 미쳐서 마을은 완전히 황폐하게 되었다. 마을의 질서를 잡기 위해서 이웃 도시의 군대와 헌병대를 불러와야만 했다.

이런 집단적인 정신병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 마을로 반입된 밀가루가 맥각균과 곰팡이에 오염되어 있었고, 그 때문에 그들이 먹은 빵에는 리세르긴산(LSD 환각제의 일종)의 특성이 함유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내가 이제까지 발견한 이야기 중에 가장 극적인 것이었으며 생생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조차 거의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출판사 관계자는 대단히 기뻐했으며 책을 쓰는 대가로 나에게 상당한 선불을 주었다. 그 책은 ‘그 달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성공을 기뻐했다. 내 성공이 극심한 고통을 받은 사람들의 불행에서 연유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갑자기 그 책에서 벌어들인 돈이 죄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그 책 인세의 대부분을 그 마을에 기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 결심의 동기가 어떤 숭고한 마음의 발로가 아니었으며 죄책감에서 마지못해 그런 결심을 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 때 내가 돈을 기부함으로써 느꼈던 만족은 포기한 돈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던 어떤 만족보다도 더 컸었다. 단지 마을 주민들의 감사만으로도 그 돈의 몇 배 이상을 보상 받았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화자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케이시가 말한 것의 실례를 들기 위해서이다. 즉 케이시는 우리 내부의 어떤 것이 우리로 하여금 타인에게 선을 행하도록 촉구하고 있으며, 이런 촉구에 순응함으로써 우리가 보상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왜 그럴까? 우리를 비이기적인 행동으로 이끄는 이런 신성한 충동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 충동이 삶의 진정한 목적에 관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러한 질문에 대해 잠자는 케이시가 직접 한 대답을 살펴보자.

리딩 2795-1에서 ‘내 현생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케이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당신의 목적은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창조력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첫 번째 질문인 ‘과연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케이시의 대답을 읽은 뒤라면, 이 대답에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첫 번째 질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배웠었다. 우리는 제1원인인 신의 일부였으나 그 이후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의 목적을 신의 목적과 일치시켜 다시 신과 결합해야만 한다. 진실된 의미에서, 이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삶의 최고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질문자는 왜 ‘현생(present incarnation)’ 이라는 말을 썼는가?

 

환생과 영혼

케이시 리딩의 많은 부분이 환생과 카르마를 언급하고 있다. 이 개념들은 서구 문화 속에서 성장한 우리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전 인류의 상당수가 이 개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케이시 대답의 근거를 이해하게 된다면, 환생에 관한 그의 믿음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처음 환생의 개념을 맞닥뜨렸을 때 케이시 자신도 혼란스러워 했다. 그는 이 개념이 성서에 대한 자신의 깊은 믿음과 상충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연구가 좀 더 진행 된 다음, 그는 환생의 개념이 기독교 정신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 했다. 환생 개념은 영혼이 창조력과 하나가 되기 위한 여정에 있다는 그의 설명과 일관성이 있었다.

근래에는 점점 더 많은 서구인들이 환생의 가능성에 대해 마음을 열고 있고, 케이시의 리딩을 통해 환생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회의적 마음은 증거가 필요했고, 그래서 평소처럼 나는 먼저 과학에 의지했다.

나의 회의주의의 약점이 이안 스티븐슨 박사의 연구에 의해 드러나게 되었다. 이안 스티븐슨 박사는 버지니아 의과대학의 정신과 의사인데, 환생이라는 주제를 빈틈없이 연구한 학자였다. 『환생을 암시하는 20가지 사례』라는 그의 책은 환생의 원리를 기본으로 하여 달라이 라마와 티벳의 라마 승려들을 선정하던 절차에 대한 자세한 연구서였다. 그 책에는 많은 자료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 모든 자료는 스티븐슨 박사가 철저히 확인한 것이었다. 그 자료들이 직접적인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환생을 입증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 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우리가 과거 생을 살았다면 그 경험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 아닌가?

환생이 정신분석학의 근본원리와 대단히 유사하다는 것을 내가 깨달을 때까지 환생에 대한 믿음을 방해하는 이 장애물은 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현재의 삶 속에서는 오직 구체적인 유형의 것만 다루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별로 어렵지 않게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리고 무의식에는 의식적 기억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거대한 정보의 창고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현재의 삶에서조차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다면, 과거생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과거생을 기억할 수 없다고 해서 환생이 없다거나 환생을 믿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다시 케이시의 리딩으로 돌아갔다. 케이시는 이미 많은 믿기지 않는 일들을 통해 리당이 정확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었었다. 즉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에게 행한 그의 피지컬 리딩과 건강을 위한 치료방법들이 그 증거들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환생의 타당성을 입증할 강력한 증거들을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탐색의 결과 나는 리딩 1391-1을 찾아냈다. 그 리딩은 1936년에 행해진 것으로 대상자는 단지 ‘M.S’라고 익명으로 되어 있었다. 다음은 그 대상자의 과거생을 밝힌 케이시의 리딩 중 일부이다.

 

“그 당시 이 실체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어떤 단체의 수녀원장과 같은 지위에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에세네파의 관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실체가 베풀고, 봉사하고, 남을 격려하고 위대한 활동에 기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실체는 예수 제자들의 삶 속에서 고무적인 경험을 했으며, 베다니 · 갈릴리 · 예루살렘 등지에서 예수를 자주 만났습니다. 실체는 에마우스 · 예리코 · 예루살렘 근방에서 학교를 운영했습니다. 실체는 가야할 길과 신비와 지식을 알기를 위해서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실체는 예언자들의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었기 때문에 여성 예언자로서의 능력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1936년 케이시가 이 리딩을 행했을 때만 해도 에세네파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케이시는 특정한 도로명과 지명 그리고 사건들을 지적했고, 이런 것들의 대부분이 그 당시의 역사가나 성서학자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나처럼 환생을 믿는 것이 내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억지로 갖다 붙인 것처럼 들릴 것이다. 에드가 케이시는 그 사건이 일어난 지 1,900년이나 지난 뒤의 사람이며, 그 장소로부터 수천 마일이나 떨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과 장소가 나오는 이 이국적인 정경을 내가 왜 확신하게 되었는가?

1947년, 케이시가 앞의 리딩을 행한 지 11년이 지난 뒤, 저 유명한 사해문서가 발견되었다. 이 발견 뒤 4년이 지난 1951년에는 사해 연안에서 동굴들이 발견되었는데, 당시에는 이 동굴들을 고대 로마인들의 요새라고 생각했었다. 나중에 이 동굴들이 케베트 쿰란이라고 불리는 에세네파 수도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곳에서 사해문서들이 기록되고 연구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곳에 에세네파의 수도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케이시가 그의 의뢰인 M.S에 관해 언급한 것은 어찌된 것인가? 1세기에 살았던 유대 역사가 조세푸스는 에세네파의 공동체는 남자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자 예언자나 어떤 유형의 여성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케이시의 리딩은 이 고대 역사가의 설명과 정면으로 상반되었다.

쿰란 동굴이 발견된 뒤, 그 수도원 주변의 묘지들이 발굴되었는데 그곳에는 많은 여자들의 유골이 있었다. 이런 예를 볼 때 환생에 관한 케이시의 견해는 신중히 조사할 만한 가치가 있다. 비록 이 실례가 증거는 못되고 근거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확증을 얻기 위해서는 기다려야만 할 것 같다. 리딩 956-1에서 ‘무엇으로 환생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라는 직설적인 질문을 받았을 때 케이시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경험을 통해서.”

 

왜 환생하는가?

환생의 뿌리는 창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창조는 어느 누구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난해한 개념이다. 세계의 종교들은 다양한 창조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많은 신화들이 극단적으로 왜곡되고 과장되었다. A.R.E. 회보에서, 에드가 케이시의 아들 휴 린 케이시는 자신의 아버지가 말했던 창조, 영혼, 과거생, 환생, 그리고 이와 연관된 다른 개념들을 명확히 밝히는 임무를 용감하게 떠맡았다.

휴 린 케이시는 창세기에 나오는 신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을 상기시킨다. 이 말은 신도 우리와 똑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휴 린 케이시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신의 인격화된 개념은 인간의 자만에 의해 창조되었다. 즉 인간은 신을 천상의 옥좌에 앉히고 그에게 아름다운 천의(天依)를 입히고 긴 하얀 수염을 기르도록 고집했다.”

신은 이제까지 그래 왔고 미래에도 항상 그렇지만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영적 존재이다. 창세기에서 신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은 우리 역시 한 때는 순수한 영적 존재였다는 의미이다. 휴 린 케이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처음으로 이 차원(지구)에 들어섰을 때는 물질적 형상으로서가 아니었다. 인간은 영혼, 신성한 빛의 불꽃 속에 들어있는 영적 실체로서 지구에 왔었다. 지구에 온 영혼이 지금처럼 물질적 육체 속에 머물게 된 것은 신의 의도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선택이었다. 인간은 점차 자신을 3차원 의식의 한계 내에 제한하게 되었고, 이제는 그것이 인간이 인식 가능한 기본 형태가 된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이런 물질적이고 3차원적인 한계 내에 가두었기 때문에 우리는 제1원인(시원, 신)으로부터 분리되게 되었다. 이제 우리의 임무는 애초에 우리가 분리되어 나왔던 신, 창조력과 다시 결합하는 것이다.

리딩 900-59에서 에드가 케이시는 이와 관련된 기본적인 견해를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완전한 법칙이란 창조주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태초에 주어진 창조주와의 동일성을 상실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구에 머무는 동안 창조주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영혼이 오랜 세월동안 영속하고 있으며, 수없이 환생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영혼 자신)으로서의 궁극적 의식은 지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케이시가 말하기를 우리가 여기 지구에 머무는 것은 교육적 기회를 창조하기 위함이며, 그 기회를 통해 우리는 영혼을 발전시킬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리딩 1227-1에서 그가 말하기를

 

“우리가 지구 차원에서 경험을 쌓게 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영혼의 반전을 위한 영적 선택의 결과입니다.”

 

실체 · 지구 · 점성술

이야기를 계속 진행하기 전에, 일부 독자들에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몇 가지 사항을 미리 설명하고자 한다. 케이시가 자주 쓰는 용어인 ‘실체(entity)’와 ‘지구(earth)’ 그리고 가끔 언급하는 점성학이 바로 그것이다.

케이시는 리딩을 의뢰한 사람을 지칭할 때 ‘이 사람’ 혹은 ‘저 사람’이라는 말 대신에 ‘실체’라는 표현을 써왔다. 리딩 1494-1에서 어떤 질문자가

“영혼의 실체는 환생하면서 바뀝니까?”라고 질문하자 실체라는 용어의 간접적인 설명이 주어졌다.

“영혼이 바로 실체입니다. 실체는 영혼이며 동시에 마음과 육체입니다. 알겠습니까? 환생이란 실체가 육체 혹은 새 집에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케이시의 리딩에 대한 나의 이해와도 일치한다. 즉 케이시는 인간 존재를 몸과 마음과 영혼의 결합체로 보았으며, 그는 육체적 인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보다 중요한 영적 측면까지 말하려 했었다.

리딩 816-3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에 영혼이 있습니다. 마음과 육체는 이에 따릅니다. 바로 그 존재의 의식(영혼)에 따르는 것이죠. 사람들은 유일한 창조력에서 유래한 그들 각자의 몫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이 리딩의 후반부에서 그는 인간의 영혼만이 불멸하기 때문에 이 영적 측면이야말로 우리 삶의 목적, 혹은 삶의 다른 국면을 평가하는 진정한 척도임에 틀림 없다고 덧붙였다.

그가 사용한 ‘지구(the earth)’라는 용어의 의미를 말하자면, 케이시는 리딩 5755-2에서 우주에는 지구 외에도 많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많은 우주가 존재합니다. 태양계만 하더라도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보다 훨씬 더 큰 많은 태양계가 있습니다. 이곳 지구에서의 경험은 우리 태양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경험과 비교하면 극히 작은 조각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영혼은 우리 태양계와 다른 태양계에서도 ‘모든 경험’을 완수하게 됩니다.”

일간신문에서 오늘의 운세를 읽는 사람들에게는, 지구에서의 경험이 우연이 아니라 영혼의 발전을 위한 영적 선택의 결과라는 케이시의 주장과 점성술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점성술의 전통적인 해석은 그것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영향을 예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케이시에 따르면, 우리 영혼이 교육적 경험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유의지의 실행이 필수적이지만 양자간에 아무런 모순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점성술의 힘이라는 것이 우리를 예정된 길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가 우선할 수 있도록 우리의 충동이나 성향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케이시의 일반적인 심상은 이런 것이다. 각 영혼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지상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면서 영적으로 발전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 과정에서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고 오히려 신에게서 더 멀어지는 행동을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각각의 생애에서 우리는 그런 실수를 만회할 행동의 자유도 가지고 있다. 매번의 생은 긍정적 카르마의 축적을 통해서 우리가 영혼의 진보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또 다른 기회인 것이다.

 

카르마는 인과응보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를 안심시키는 글귀임과 동시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경구이기도 하다.

각 영혼은 거듭되는 환생을 통해 지상의 육체적 존재와 비물질적인 영적 존재 사이에서 진보와 퇴보를 거듭한다는 것이, 케이시에게 리딩을 의뢰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항상 도사리고 있던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은 사람들에게 상당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리딩 928-8에 이렇게 질문했다.

“각 영혼이 완전함에 도달할 때까지 지구로 환생을 계속해야만 합니까? 혹시 그러다 길을 잃거나 사라진 영혼은 없습니까?.”

실제로 그런 두려운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케이시의 유머러스한 대답은 우리를 안심시킨다.

 

“만일 신이 진짜 신이라면 길을 잃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우리 각자, 그러니까 각각의 영혼은 바로 신의 일부라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말을 계속한다.

 

“영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영혼과 분리된 개인은 사라집니다. 그 영혼이 궁극적으로 실체가 될 때까지 환생 혹은 기회는 계속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 자신의 육체적 발전을 미심쩍게 생각하던 사람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내가 육체적 완전함을 얻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이 필요합니까?”

케이시는 다음처럼 주의를 주었다(리딩 2982-2).

“당신이 적어도 30번 이상 환생하기 전에는 물질적 육체의 완전함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기억해야 할 점은, 단지 육체적 완전함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의뢰인들에게 실망만을 안겨주는 경우는 결코 없었다. 그는 항상 의뢰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길을 안내해 주었다. 케이시는 이렇게 지적했다.

“그러나 당신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 균형을 취함으로써 건강을 증진할 수도 있습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환생의 개념에 움찔한다. 특히 카르마를 징벌의 과정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들은 현생의 삶이 과거생에서 행한 잘못에 대한 처벌이라고 생각한다.

케이시는 카르마는 징벌이 아니며 각 개인이 과거생에서 행한 실수를 긍정적 방법으로 보상하는 기회라는 것을 재확인해주었다. 그는 많은 리딩에서 의뢰인들의 과거생과 그 과거생들이 현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과거생에서 무슨 잘못을 했건간에 현생에서 바르게 살면서 균형을 잡고 신의 계획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영혼이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런 관점은 리딩 342-2에서 분명히 표현되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곳(지구)에 왔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케이시가 확고한 어조로 대답했다.

“당신이 과거생에서 행했던 모든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리딩 2636-1에서 “바로 이 시대에 내가 지구에 태어난 목적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케이시는 이런 조언을 했다.

“당신이 시작해 놓고서 아직 완수하지 못한 일들을 끝마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카르마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행했던 그대로 돌려받는다는 그런 필연적인 인과응보의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 행위를 직시하고 그 결과를 감내해야 한다는 의미지만 우리는 응보라는 의미에 구속되지 않고도 카르마를 청산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과거생에서 남을 학대했던 사람이 현생에서 반드시 학대받는 사람으로 환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는 학대받는 여성들이나 아이들을 돕는데 자신의 삶을 헌신할 수 있으며, 그들의 고통을 자기 것인양 느끼면서 그 고통을 경감시키는데, 즉 긍정적 방법으로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카르마는 우리가 세상과 자신의 영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무이다. 리딩 3420-1에서 케이시는 그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말하자면 영적 실체가 진보하느냐 퇴보하느냐는 그 실체가 지닌 능력을 여하히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능력이란 그 영적 실체가 과거생을 통해서 발전시켜 온 기술과 성향들을 말한다.

“각 영혼은 그 실체가 과거생에서 개성과 인격의 일부로서 획득한 능력을 지닌 채 새로운 물질적 경험의 기회를 맞이하게 됩니다. 각 영적 실체는 제1원인(시원, 신)과의 더 밀접하고 강렬한 영적 교섭을 준비한다는 희망을 지니고 환생합니다.”

이 리딩의 후반부에서 케이시는 만약 그 영적 실체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혹은 그런 일에 기여하지 않는다면, 그 실체는 자신이 인생에서 실패했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봉사에 대한 강한 충동은 영혼의 바램이다

많은 심리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우리가 사회에 공헌하는 일을 할 때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케이시의 견해로는 우리가 영적 기원 혹은 제1원인을 단단히 붙잡게 되면 거의 자동적으로 타인에게 기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깊은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사나운 폭풍에 시달리다가 겨우 안전한 항구로 들어온 사람은 밧줄로 배가 항구에 단단히 고정되어야 확실한 안전감을 느끼고, 밧줄이 헐거워 배가 요동을 치면 불안을 느낀다. 케이시의 리딩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준다.

제1원인은 우리가 언제라도 매달릴 수 있도록 항상 우리 주변에 있다. 그래서 그것을 갈구하고 매달린다면 항상 안전하게 배를 정박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유한한 폭풍은 계류 밧줄을 끓을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항해를 해오면서 나는 수도 없이 배를 정박소에 댔었고, 그때마다 낯선 사람들이 내미는 도움의 손길을 받았었다. 훌륭한 항해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배에서 뛰어내려 새로 도착하는 배의 계류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동지애의 정신은 전염성이 있다. 이것은 도움을 받는 사람만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사람의 내부에 있는 동지애의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항해자들의 불문율이다. 이것은 진정한 만족은 타인을 돕는 데서 찾을 수 있다는 케이시의 생각에 대한 예이기도 하다.

물론 타인을 돕는 목적이 단지 만족감을 얻는데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케이시는 그 점을 시적 은유를 통해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우리가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의 팔에 기대어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만족에 대한 욕구는 삶의 목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첫 번째 질문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케이시는 영혼이란 초의식이라고 부르는 것 안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삶의 목적이 없을 때, 가치 있는 일을 해야만 할 것 같은 모호하고 불분명한 충동으로 마음의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도 바로 이 초의식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누구나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욕구, 타인을 돕고자 하는 욕구, 창조력과 조화를 이루고 그것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비록 우리가 그런 욕구의 진정한 근원을 완전히 깨닫고 있지는 못할지라도.

리딩이 설명하기를 그런 충동과 갈망은 신과 다시 하나가 되어 완전함을 이루고자 하는 영혼의 바램이라고 한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케이시는 리딩 3420-1에서 우리가 궁극적 이상으로서 봉사에 대한 강한 충동을 지니고 있다고 암시했다.

 

이상은 진정한 삶의 목적으로 인도한다

첫 번째 질문에서 우리는 이상을 세우는 것이 명상의 실천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다. 영적 이상은 허버트 퓨리어의 말을 빌자면 “동기의 무게 중심이며, 우리 내부의 중심이자 핵으로 작용한다. 이상이 간단한 단어나 이름이든, 혹은 좀 덜 복잡한 개념이든 간에 그것은 우리 내부에서 고등한 목적의식을 깨우는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케이시가 권고했듯이 삶의 목적을 위해서도 이상을 세워야만 한다. 만약 이상을 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노도 없이 급류에서 카약을 타는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상을 세우는 것은 영혼이 행동을 통해서 성장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지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리딩 816-3에서 실체의 육체적 구현의 목적을 묻는 질문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체의 육체적 경험은 실체가 가야 할 길을 똑바르게 만들어 줍니다. 현재 모든 영혼이 경험하는 것들은 그 실체의 경험 중에서 어느 것이 이상적인가를 밝혀내는 기회입니다.”

사실 케이시의 원리들을 나 자신에게 적용하고자 했을 때, 내 인생의 목적의 근간으로서 이상을 세운다는 점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그러나 케이시는 이상을 세우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음이 여러 리딩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리딩 816-3에서 나는 마치 굳은 약속처럼 보이는 그의 말에 용기를 얻게 되었다.

즉 우리가 이상을 척도로 자신의 삶을 평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안내하고 관용을 베풂으로써 그들이 우리의 선행을 보고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영적 발전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며 좀 더 분명하게 삶의 목적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최상의 봉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 그리고 타인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움은 우리가 실천하는 인내와 관용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희망을 찾도록 하는 것이라고 케이시는 암시한다.

그는 거듭해서 우리가 자신을 뛰어넘는 목적의식을 가져야 하며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춰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리딩 2272-1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일깨워준다.

“어쩌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 안에서 현존하는 신과 마주칠 수도 있고, 그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신의 모범으로 비춰질 수 있는 기회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선을 깨우쳐 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개인적 경험에 부여된 목적을 완수하게 됩니다.”

케이시가 이상적 봉사를 위해 어떤 위대한 사명을 완수하라고 충고하지 않고 단지 모범을 보이라고 했기 때문에 솔직히 기운이 난다.

리딩 877-1에서 그는 실체로서 개인의 목적은 유일무이한 것이지만 우리가 신의 동료이자 공동 창조자라는 생각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창조력에 좀더 잘 조화되도록 돕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면 역설처럼 들릴 수도 있는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리딩 275-39에서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가 자신의 마음이나 많은 경험들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영혼의 활동이 자기 발전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활동이 비이기적이어야만 합니다.”

케이시는 우리에게 예수가 했던 말을 상기시킨다.

“내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이 내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너희가 보는 그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창조력을 끌어와서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결과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천상의 조화에서 분리되는 위험을 줄일 수 있다.

더구나 편리하게도 우리는 이 곳 삶의 목적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가 창조력이라는 우주적 의지에 자신을 조화시키고자 애쓰고, 제1원인인 신에게 자신을 일치시키고자 노력하면, 그로 인해 우리 자신이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되고 영혼의 완전성을 신장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본래 자신이 가던 길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태도를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이 점에 대해 리딩 641-1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상의 실천을 통해 실체가 성장한다

“맨 처음 자신의 이상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 · 물질적인 것도 함께 말입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대접할 생각조차 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돌볼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당신이 타인을 대하는 물질적 · 일상적 활동은 당신의 영적 이상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을 대접함으로써 본래의 자기 자신이 됩니다. 바로 이런 이상이 강조되고 있습니까?”

그는 우리의 영적 성장이 자신의 이상에 따라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있다고 계속 강조한다.

“그러므로 정신적, 물질적 측면뿐만 아니라 영적 측면의 이상까지도 그것은 단지 어떤 주의나 주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체의 경험 안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상의 실천을 통해 실체가 성장합니다.”

여기에 내포되어 있는 법칙은 세계의 대종교들 대부분에서도 볼 수 있는 근본 법칙의 하나이다. 바로 ‘황금률’이다. 이것이 바로 이상이 될 수 있다. 이 이상을 언제나 마음속에 최고의 가치로서 간직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항해를 안내해줄 나침반인 것이다.

인생의 목적을 깨닫는 것에 관한 케이시의 안내를 리딩이 요약하고 있다.

“개별 영혼이 물질적 경험 속으로 들어가는 목적은 다른 사람들에게 빛이 되기 위해섭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약속함으로써 인생이라는 길을 가는 우리의 용기를 북돋워준다.

“삶과 그 삶에서 마주치는 문제들은 힘겨운 짐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더 위대한 성취와 우리 자신의 성장을 위한 기회입니다. 우리는 매일 영혼이라는 과일나무의 씨를 뿌리고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 나무가 자라도록 우리가 걱정하거나 초조해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리고 신을 찾는 것은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기 때문에 선행을 베푸는데 망설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영적으로 성장하면 물질적 보상은 저절로 뒤따른다

우리는 보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추구했었기 때문에 케이시의 견해는 아주 신선한 느낌이 든다. 덕분에 우리는 영적 힘을 통해 세속적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는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물질적 목표와 행복을 얻는다는 측면에서 케이시의 리딩이 실망스럽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케이시는 타인에 대한 비이기적인 봉사를 통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진정한 영적 만족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예기치 못한 다양한 방법으로 물질적 보상의 즐거움까지 안겨준다고 확신했다.

요약하자면, 물질적이고 유한한 세속적 목표들에 간접적 (영적)으로 접근한다면, 신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갈망이 항상 행위의 기준이 된다. 우리 자신의 그리스도 의식을 탐색해 간다면 더 많은 물질적인 것들이 저절로 뒤따를 뿐만 아니라 삶은 더 풍요롭게 되고 물질의 무상함도 감소할 것이다. 우리는 그 물질들을 좀 더 즐길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매일 삶의 진정한 목적을 자각하게 되면 우리는 좀 더 충만하고 균형 잡힌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받게 될 보상은 우리 영혼이 창조주인 신과 재결합하는 것이다. 나는 영혼이 영계에서 오직 평정의 상태를 유지하기만을 갈망할 것이라는 상상을 그만두었다. 영혼은 자신의 발전을 서두르기 위해 지상에 체류하는 기간을 이용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 아마도 영혼은 환생의 사이클이 끝나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지 않고, 그 사이클을 앞당기기 위해 자진해서 지상의 고통으로 뛰어드는 것 같다.

리딩 295-2에서 “우리는 다시 지구로 돌아와야만 합니까?”라는 질문이 주어졌을 때 케이시는 가능한 단 하나의 충고를 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사십시오. 그러면 다시 지구로 돌아올 필요가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