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 나는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아주 가까운 동료 한 명인 데오도르 레이크와 뉴욕의 알 곤킨 호텔에서 점심을 같이 했었다. 당시 나는 칼럼을 쓰면서 새터데이 리뷰지의 편집을 맡고 있었고 그는 막 새 책을 출간한 참이었다. 나는 레이크 박사가 인터뷰하기에 매혹적인 상대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오랜 전통을 지닌 학교 출신으로 탁월한 신사였으며 위트가 있고 명민했다.
그 때까지 나는 정신 분석학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는데, 프로이드 학설의 애매모호함으로 인해 상당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이론의 절대적 핵심만을 요약해 달라고 레이크 박사에게 요청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프로이드가 모든 환자들에게 지향하는 하나의 압축된 목표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아마도 레이크 박사에게 프로이드의 방대한 저술들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해 달라는 것은 온당치 못한 요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요청을 정중하게 받아들였다.
“예. 당신의 그 요청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정신분석 치료에는 궁극적으로 단 하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환자들이 일과 사랑에서 자신들이 지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레이크 박사가 부언 설명하기를, 이러한 목표가 노이로제 환자나 정신병 환자에게 뿐만 아니라 심각한 감정적 문제가 없는 사람에게도 적용된다고 말했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이 지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해서 일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분명 노이로제나 정신병에서 벗어나게 될 겁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일과 사랑은 함께 뒤섞여 강하게 맺어져 있다고 했다.
에드가 케이시가 정신 분석가는 아니었지만 그의 영적 리딩들은 분명히 일과 사랑에 대해서 동일한 결론을 지적하고 있다. 만일 차이가 있다면 케이시의 경우 그 근거를 영적 측면에서 구했다는 것 정도이다.
사실 인간 마음에 대한 케이시의 이해는 프로이드나 레이크의 이론보다는 심리학자인 칼 융이 주장한 ‘집단 무의식’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융의 집단 무의식은 종족 경험의 영적 계승을 가정한다. 그 종족의 모든 구성원에게 기억의 창고가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케이시는 모든 사람의 무의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자신으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정확한 의학적 진단을 할 수 있게 했으며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신을 우주적 힘에 동조시켰다고 생각했다.
케이시에게 있어서 사랑은 영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점을 거듭 밝혔다. 실제로 그는 신은 사랑이며 사랑은 신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사랑 역시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버지니아비치의 A.R.E. 스터디 그룹이 펴낸 책 『신을 찾아서 (A Search for God)』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사랑은 신입니다. 우주의 법칙은 이 세 단어(Love is God)로 완성됩니다. 인간은 이 속성을 수행하고 육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육체적 삶이 완전해지고 생명의 영속성이 실현되는 것은 바로 이 사랑을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창조력의 구체화이며 사랑의 표현입니다.”
창조력은 무한하고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도 무한하고 언제나 그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레이크와 케이시가 사랑과 일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에서 다룰 ‘어떻게 일과 사랑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그 둘을 잠정적으로 분리하고자 한다. 이 장의 후반에서 일을 논할 때 알게 되겠지만 일과 사랑을 분리하는 것은 진짜 불가능하다.
케이시는 일을 잘 하는 근본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아마 일터에서 하는 일은 그곳에서의 인간관계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랑’의 질을 개선하고 싶다고 말할 때 자주 개인적인 관계, 우정, 가족관계, 섹스, 연애 등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먼저 그런 개인적인 관계들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을 살피고자 한다. 그런 다음 일터에서의 사랑의 역할을 탐색코자 한다. 사랑의 영적 차원을 살피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신의 사랑을 실천할 때 최고의 만족을 얻게 된다
다른 많은 영적 가르침들과 마찬가지로 케이시의 리딩들은, 신은 사랑일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물들을 신성의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점은 케이시가 창조력으로서 신성을 언급할 때 거듭 반복해서 강조되고 있다. 리딩 281-24에서 그는 수사적 질문을 한다.
“물질이 창조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가?”
그리고 이런 대답이 뒤따른다.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영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공간과 시간 속을 나아갔습니다. 그 드러남은 밀과 옥수수와 인간 등으로 구체화 되었습니다.”
존재는 신의 영이 움직인 결과이다. 우리는 영혼 속에 신의 자국 즉 신성한 사랑의 자국을 간직하고 있다. 일과 사랑과 삶의 어느 분야든지 그것을 효율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바로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존재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 신성한 영의 특성 한 가지는 스스로를 구현하려 하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스스로를 느끼고자 하는 충동이다. 이 충동은 두 번째 질문에서 언급된 ‘신성한 충동(divine itch)’과 같은 것이다. 이 충동은 영적 이상에 의해 인도되는 삶의 진정한 목적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이것이야말로 창조력을 깨닫고 그것과 하나가 되는 길이다.
케이시에 따르면 이 길은 사랑에 달려 있다. 우리의 행동이 사랑을 나타낼 때, 우리는 온 우주를 지탱하고 있는 창조력과 일치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럴 경우 우리의 모든 행동에는 창조력의 권능이 스며들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행동 중에 신의 사랑을 반영할 수도 있지만 이기적인 목표를 추구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생명을 준 창조력과 조화되지 않는, 사랑이 없는 그런 목표 말이다. 케이시는 경고한다. 만일 그런 목표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가장 내밀한 자아와 상반된 목표를 향해 달리는 꼴이 된다고. 그리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노력은 헛된 것이 될 거라고.
케이시는 자유의지, 그리고 우리의 선택권을 인정했다. 리딩 352-1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실체(상담자)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혼자 힘으로 최선의 길을 선택하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자신을 창조하는 능력이야말로 창조력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유의지는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자기 방종에 빠지게도 합니다.”
케이시는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실행했을 때 초래될 수 있는 결과를 분명히 밝혔다.
“자신이 누군지 알고자 하는 사람들, 즉 그들 내부의 창조력과 조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비록 그 길이 험할지라도 기쁨과 평화와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만족이나 방종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즉 신의 진정한 사랑에 공명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고난과 분쟁과 혼란을 겪게 됩니다. 비록 그들이 물질적 기준으로는 풍요하더라도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진정한 자아에 모순되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한 첫 단계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자신이 가장 성공할 수 있고 이익을 볼 수 있는 분야가 어떤 것인가를 묻는 의뢰자에게 케이시는 이렇게 대답했다(리딩 969-1).
“큰 성공과 이익은 자신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어떤 일을 하고자 합니까? 당신 자신을 위해서 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칭찬 받기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사랑을 주기 위해서 입니까?”
인간관계와 직업에서 꿈을 실현하는 법을 리딩에서 찾는 사람들에게, 신을 경배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내려야 한다고 반복해서 충고하고 있다.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이 신성한 사랑인가 아니면 자기 이익인가?
신에게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내적 평화와 기쁨과 만족을 얻는 길이라고 케이시는 모두에게 말한다. 자기 탐욕을 위해 일함으로써 한동안 뚜렷한 성공을 거둘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는 의식적 마음의 목적과 우리 내부의 신성의 목적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결국은 불가피하게 혼란이 초래된다.
타인의 행복에 봉사함으로써 신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라
신에게 봉사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물론 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리딩 곳곳에 다음과 같은 계명이 산재해 있다.
“정성을 다해, 마음을 다해,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
케이시에게 있어서, 이것은 우리 모두의 삶에 가장 중요한 근본이었다.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신을 사랑한다는 것, 그 신이 추상적 신이든 인격화된 신이든 그것이 심상화하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 나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비록 신을 사랑하는 것이 바람직한 마음의 상태라는 것이 이해는 되지만 말이다. 나도 언젠가는 그런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다. 비록 의식적으로는 그런 상태를 이상으로 여기기는 하지만 나는 어두운 방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까만 고양이를 찾으려는 맹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리딩을 통해 케이시의 사상들을 추적한 결과 몇 가닥의 빛줄기가 어두운 방을 비추고 나는 약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케이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신을 분명하게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신의 현현(顯現)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뉴잉글랜드 산자락의 가을 낙엽에도, 잠자는 다섯 살 배기 아들의 얼굴에도, 아이가 갑자기 짓궂은 장난을 시작할 때도, 거기에는 분명히 신이 존재하고 있다.
추측하건대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신의 사랑을 우선하라는 케이시의 주장을 따르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은 성서의 계명을 따르는 것이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면, 우리는 간접적으로 신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왜냐하면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은 계량용 컵에 담아 둘 수도 없고 분석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빈틈없는 정신과 의사이자 『사랑과 의지(Love and Will)』라는 뛰어난 책의 저자인 롤로 메이 박사는 서구적 전통에는 4가지의 사랑이 있다고 지적한다. 성적 충동-리비도, 생식의 욕구-에로스, 형제애나 우정과 같은 사랑-필리아, 그리고 타인의 행복을 위한 자비로운 관심-아가페, 이것은 인간을 위한 신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케이시는 리비도나 에로스를 의식적으로 멀리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가장 강조한 사랑은 아가페와 필리아였다. 그는 형제애적 사랑을 통해 신의 사랑을 구현하고, 타인의 행복에 봉사함으로써 신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라고 강조했다.
메이 박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외부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인간의 사랑과 슬픔, 동정과 자비는 영향 받지 않는다. 우리는 아가페를 타인에 대한 존중, 자신의 이익을 초월한 타인의 행복에 대한 관심이라고 정의했다. 사심 없는 사랑,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나로서는 케이시가 이와 다르게 말했던 것 같지 않다.
사랑은 조건 없이 주는 것이다
케이시는 실제로 ‘사랑의 법칙’이 있다고 말했으며, 리딩 3744-4에서 단 한 마디로 그 법칙을 정의했다. ‘주는 것’이라고. 그의 기본적인 충고가 리딩 341-44에 들어 있다.
“만일 사랑을 받고 싶다면 먼저 사랑을 주십시오. 자신의 생명이 소중하다면 먼저 남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말하자면 사랑은 주는 것이다. 리딩 3744-4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면, 물질적 혹은 이 지상의 차원에서 사랑의 법칙이 구현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경고도 잊지 않는다.
“보상이나 보답을 바라면서 주는 것은 사랑의 법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입니다.”
신의 사랑과 같은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주어야 한다. 사랑을 베푸는데 보상에 대한 기대가 수반되면, 타인을 위한 일을 하면서 어떤 단서를 붙인다면, 이미 그것은 더 이상 주는 것이 아니다. 이럴 경우 우리는 더 이상 신성한 사랑을 구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창조력의 완전한 권능으로부터 단절된다. 그 최종 결과는 효율적으로 일하고 사랑하는 우리의 능력을 스스로 제한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들과 가장 완전한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가 있는가? 그 첫 단계는 내적인 것이다. 리딩은 우리의 시도가 신과 우리의 이상에 합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신성한 동기를 채택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영적 수준에서의 우리의 이상이며, 케이시는 리딩 256-2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우러러 볼 수 있는 어떤 것이며 도달하려고 애써야 할 어떤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상에 준거한 태도와 생각의 패턴과 육체적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 리딩 3744-4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신이 자신의 창조물, 혹은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이 계명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자. 케이시는 우리가 반드시 아이들을 희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타인을 위해 조건 없이 주는 가장 숭고한 본보기를 예시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인간관계에서 이상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면 그것은 타인을 향한 신성한 사랑을 구현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될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가진 최상의 능력을 다해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상을 깨닫는 과정에서. 길잡이와 안정성을 얻기 위해 의지하는 원천은 우리 내부에 있기 때문에 언제나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의식이다. 케이시는 예수로부터 방사된 사랑이 길을 밝혀준다고 말했다. 예수가 말했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를 함축하고 있다. 또 그는 우리 모두가 ‘길’이 될 수 있다고 암시했다. 우리는 예수가 행했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자신의 이상에 도달하느냐 여부로 판가름되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믿음이 무엇이건 간에,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다.’라는 성서적 발상을 확인할 수 있는 많은 증거들을 역사 속에서 다시 한 번 찾아볼 수 있었다. 나는 그런 행동들을, 우리 속에 잠재된 최상의 능력이 표현한 사랑이 반영된 본능적 행동이 틀림없다고 믿는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극적인 자기 희생의 기회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한 사랑에 대한 유일한 판단 기준도 아니다. 그러나 케이시가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이상에 의해 인도된다면, 내부의 신성에 기초한 사랑은 받게 될 보상이나 다른 사람의 힘, 또는 반응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리딩 987-4에서 케이시는 이렇게 묻는다.
“만일 네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얻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이런 유형의 사랑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록 우리의 사랑이 응답 받지 못한다고 해도 계속 사랑을 주어야 한다. 배은망덕을 당하더라도, 사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느끼는 배신감은 우리가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신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위해를 무시해야 하며, 대신에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에게조차 ‘황금률’을 적용해야 한다.
“슬픔과 고뇌에 잠겨 있는 사람의 얼굴과 가슴에 희망과 환희와 기쁨과 웃음을 가져다주십시오. 이것은 당신 영혼 속에 있는 신성한 사랑을 더욱 빛나게 만들 겁니다.”
이러한 이상적인 사랑은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주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완벽한 순수함과 진실됨이 그 사랑의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충고는 대단히 이상주의적이다. 이러한 순수하고 신성한 사랑을 지속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해보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우리가 노력해야만 하는 이유를 리딩 1537-1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미움도 창조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움은 혼란과 분쟁을 창조합니다.
미움이 그렇듯이, 생각과 행동에서 사랑의 패턴은 스스로를 강화해 간다. 우리가 신성한 사랑의 패턴에 부합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할수록 내부에 있는 신성한 사랑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케이시가 말하기를, 우리가 가능한 한 자주 그리고 완벽하게 신성한 사랑의 개념에 몰두한다면 사랑하는 데 있어서 최상의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포용하는 것이다
이 신성한 사랑의 또 다른 특성은 무엇인가? 이 사랑은 조건 없이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요구하는 것도 소유하는 것도 전혀 없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결점을 찾지 않는다. 케이시는 이 점을 리딩 1816-1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서로 사랑하라.’는 율법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소유하고자 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사랑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며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배워야 합니다.”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랑은 일종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사랑의 대상을 강하게 구속하려 할수록 그 사랑을 잃게 된다는 증거가 역사나 문학작품 속에 널리 퍼져 있다. 아마 사랑하는 사람을 통제하고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당신이 사랑을 느꼈던 바로 그 사람이 본래의 자기로 머물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함정은 사랑뿐만 아니라 우정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자신을 봉사의 도구로 이용하라
이런 비이기적인 사랑의 또 다른 특성은 당연히 주변 사람들에 대한 봉사에서 아주 완전하게 표현된다. 이런 사랑은 용기를 잃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낙담한 사람에게 기쁨을 안겨준다. 이런 사랑은 즐겁다. 이것은 우리 내부에 있는 신성으로부터 흘러나오며 진정한 행복의 원천인 신성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남에게 봉사하는 것이 곧 기쁨이라는 것을 통감했던 경험이 있다. 파괴적인 토네이도가 오하이오와 펜실바니아의 수 마일을 휩쓸었다. 여러 마을이 황폐화되어 납작해졌으며 거의 백여 명이 죽었다. 그런 재난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파괴된 지역이 그레이트 플레인(미 대륙의 중부)의 소위 ‘토네이도 통로’에 위치한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지역 주민들은 그런 자연의 횡포에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생존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처음에는 오직 고통과 절망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그 사람들은 갑자기 사랑과 봉사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들은 서로를 돕기 위해 모여들었으며, 그들의 절망은 사랑과 애정이라는 열정으로 바뀌어갔다.
펜실바니아 휘트랜드의 시장 헬렌 더비는 그녀가 평생 겪은 것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경험이었다고 생각하는 사건을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녀는 자기 관할의 전 지역을 돌아보고 있었다. 삼일 동안 잠도 못 잔 채 거리를 걸으면서 폐허가 된 마을들을 둘러보고 절망감을 느꼈다. 그 때 어떤 여자가 파괴된 자기 집 지붕 밑에서 기어 나오더니 시장을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안겨 본 적 있으세요?”
바로 그 순간 더비 시장은 황폐화된 마을의 복구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이 내부에서 솟아오름을 느꼈다.
이 무시무시한 비극의 폐허 속에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 사랑은 타인에게 봉사하고 궁극적인 희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토네이도가 바로 자기 쪽으로 오는 것을 본 어떤 남자는 곁에 있던 두 아이를 도랑에 밀어 넣고 자신은 토네이도에 휩쓸려 가버렸다. 그 남자는 바람에 날려 수백 야드 떨어진 곳으로 내동댕이처져 죽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살아 남았다. 아이들의 생존이 그의 비이기적인 사랑에 대한 보상이었다.
공동체 차원의 사랑도 있었다. 아미쉬와 메노나이트 주민들은 폐허가 된 마을을 돕기 위해 멀리서 달려 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농장 일을 제껴둔 채, 자신들의 농기구를 가져와서 엉망이 된 도로를 오고가면서 수 주 동안 잡석들을 치우고,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낯선 사람들의 집의 복구를 도왔다. 메노나이트 주민 한 사람은,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나에게 말했다.
죽음의 토네이도가 훑고 지나간 뒤 몇 개월이 흐르자, 주민들은 다시 자리 잡았고, 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사랑의 풍요로움으로(무조건적 봉사) 가득 차게 되었다.
물론 케이시의 충고는 이런 극적인 사건이 벌어질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은 아니다. 일상 속에서 타인에게 봉사하는 것 역시 그 보답을 받을 수 있다. 리딩 3659-1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을 타인을 돕는 수단으로 써야 합니다. 그리고 남을 돕는 즐거움 자체를 부상으로 여기십시오. 그것은 우리에게 평화와 조화와 호감이 가는 품성을 선물합니다.”
사랑과 봉사는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다
케이시는 사랑과 봉사의 경험을 말하면서 거듭 반복해서 '기쁨(joy)’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기쁨은 타인에 대해 봉사할 때 저절로 야기되는 결과이며, 봉사의 자동적 보상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보상 이상이며, 우리를 이끌어주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케이시는 우리가 일상을 즐겁게 살아야 한다고 거듭해서 충고하고 있다.
“인생은 우울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슬픔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십시오. 생활 속에서, 타인과의 사귐에서, 일상의 활동 속에서 항상 기쁨을 잃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기쁨과 행복이 또 다른 기쁨과 행복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과 행복이 이기적인 동기에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나에게는 유머가 진정한 사랑과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기쁨의 한 형태였다. 빅터 보게는 언젠가 ‘두 사람이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웃음이 최고다.’라고 말했다. 나는 웃음이 사랑으로 바뀐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신의 사랑이라는 파악하기 어려운 개념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신이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고, 우리 역시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해서였다. 사실 나는 대부분 신학자들이 이 점을 지적하지 않은 것은 아주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케이시는 자주 기쁨과 유머를 강조했으며 의기소침한 태도를 버리라고 주의를 주었다. 성서를 읽어 본 바에 의하면, 예수 자신도 가르침을 베풀 때 유머를 배제하지 않았었다. ‘부자가 신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에서는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교훈을 주는 만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유머 역시 사랑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강한 치유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에드가 케이시는 사랑에는 치유력이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이다. A.R.E.에서 간행한 책 『마주 보면서(Face to Face)』에서 허버트 퓨리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도 영적 치유가 일어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 사람의 내부에서 생명과 빛과 사랑의 영혼이 활기를 띠게 되면, 그것은 생각과 기도를 통해 투사되어 다른 사람의 영혼을 되살아나게 할 수 있다.”
노만 커즌스는 그의 베스트셀러 『질병의 해부(Anatomy of an Illness)』에서, 고칠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자신의 질병을 유머가 어떻게 고쳐주었는지 말한다. 그에게 있어 유머란 전 인류를 위한 무제한의 사랑의 표현일 뿐이다. 그는 웃음이 치료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웃음을 중심으로 한 자신만의 치유 계획을 짰다. 매일 일련의 코미디 비디오나 몰래 카메라 프로 등을 보는 거였다. 그는 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자신의 성공적인 치유법을 남에게 전하고 있다.
성적인 사랑
우리가 말하는 이런 신성한 사랑은 모든 관계에서 표현될 수 있다. 가족, 친구, 혹은 연인 사이에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떻게 최상의 사랑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실제로 가장 궁금한 것은 ‘어떻게 성생활에서 최상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선택을 할 때 고려했던 요소들이 섹스에 관련된 기본 선택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 요소란 ‘우리가 누구에게 봉사하려 하는가. 신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인가?’이다.
리딩 1173-11에서 한 질문자가 결혼하는 동기를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이냐고 묻자, 케이시는 모든 성적 관계에 해당되는 대답을 했다.
“그러한 관계가 살아있는 신에 대한 봉사와 영적 성장에 부합하는 것인지, 아니면 육체적 욕구에 의해 촉발되는 것인지가 관건입니다. 만일 성적 관계가 정략이나 육체적 애욕만으로 촉발된다면 이러한 관계는 서로에 대한 관이나 무덤이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영적·정신적 욕구가 성적 욕구와 일치한다는 각자의 내부로부터의 응답이 있어야만 합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즉 자기 만족만을 위해서 섹스를 추구하는가, 아니면 타인의 삶 속에서 영적 축복을 창조하기 위해서인가?
우리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도 짐작하다시피, 성에 대한 리딩의 관점은 삶의 다른 모든 양상에 대한 통찰로 이어진다. 우리는 자기 만족만을 위해서 섹스를 이용할 수 있고, 단기적으로는 이런 욕구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둘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실되고 영원한 만족을 얻는 길은 창조력의 아름다움과 사랑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섹스를 이용하는 것뿐이다.
이혼한 친구 한 명이 생각난다. 그는 원하기만 하면 어느 여자하고도 재혼할 수 있는 그런 조건을 갖춘 사내였다. 여러 여자를 사귈 수 있는 독신생활이 얼마나 즐거우냐는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은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네. 다양함보다 더 단조로운 것은 없다는 것을 말일세.”
케이시가 찬성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는 리딩 1479-1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적 사랑의 목적이 물질적 · 육체적 ·세속적 열정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영적 차원의 것을 잃게 됩니다.”
개인에 따라서는 창조력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섹스를 단지 자손 번식을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섹스가 타인의 삶에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리딩 826-6은, ‘자손을 낳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금욕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일부는 그렇습니다. 다른 경우에는 금욕은 쌍방에게 아주 해로운 것입니다. 반면 어떤 경우에는 둘 중 하나에게 해롭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우리의 영적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실행에 옮겨져야 한다.
“그러므로 목적에 관해 교육하기보다는 감정의 만족이 타인의 삶에서 영적 축복을 창조하는데 집중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육체가 처한 다양한 국면을 포함해서.”
이것은 부부 관계 이외의 섹스에도 적용될 수 있다. 케이시는 동일한 리딩에서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각 개인이 지닌 원칙의 문제입니다. 성적 관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마치 봄에는 꽃이 피고 겨울에는 눈이 오듯이 말입니다.”
이런 섹스가 정당한 것이냐의 여부는 그것이 개인의 원칙과 합치하느냐, 그리고 자신이나 상대방의 이상의 표현으로서 행해지느냐에 달려 있다. 독신자로 남거나, 성적 갈망을 삶의 전혀 다른 분야에 대한 사랑과 창조적 노력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자신의 선택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길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개인적인 선택일 뿐이다.
선택 그리고 그 선택에 충실하는 것이 핵심적 요소이다. 케이시는 리딩에서 그 점을 말했다.
“남자나 여자가 그런 관계를 맺지 않을 것을 선택했다면, 그 선택에 충실해야 합니다. 선택을 하는 체만 하고 실제로는 그 선택에 충실하지 않으면 그것은 진실로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케이시가 여기서 성의 위선에 대해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 보다 더 익숙해진 어떤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리딩 5747-3에서, 케이시가 말하는 요점은 생물학상의 성적 충동이 신에 대한 봉사와 사랑의 표현 속에서 정화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랑은 다정하고 친절하며 형제애가 넘치고 인내심이 강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개인 삶의 목적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일터에서 사랑의 역할
일부 사람들에게 에드가 케이시의 교훈은 개인적인 관계보다 일터에 적용하기가 더 까다로울 수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즉 타인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직장에서 일하는 것과 사랑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케이시 리딩의 핵심적인 가정은 ‘신은 하나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모든 국면들, 즉 종교적, 영적, 정신적, 감정적, 물질적, 경제적인 모든 국면들이 신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케이시는 리딩 4405-1에서 이 점을 밝히고 있다.
“사람들은 자주 영적인 삶과 정신적인 삶이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임에 틀림없다. 아니 그것들은 하나이다. 사람들이 그것들을 분리해 보려고 하지만 하나임에는 변함이 없다. 영혼은 생명이다. 모든 생명의 배후에 있는 원동력이다.”
케이시의 견해로는 영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 사이에 진정한 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영적인 것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의 진짜 구성요소이다. 결과적으로 타인과 최상의 관계를 맺어주는 신성한 사랑의 원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도 적용이 된다.
케이시의 리딩이 영적이기는 하지만, 그 리딩들은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도 매우 실제적인 가치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케이시가 육체적 건강을 위한 리딩(피지컬 리딩)들을 주로 남겼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리딩에서 두 번째로 자주 다룬 주제가 ‘일’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사랑과 봉사로 일하면 우주적 풍요가 실현된다
일에서 최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에 관한 케이시의 충고가 이제는 귀에 익숙할 것이다. 즉 신 혹은 창조력은 사랑이며, 우리가 신성한 사랑과 조화되어 일할 때 신의 무한한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이 이기적인 것이라면, 거기에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신의 힘에서 단절하게 한다.
케이시는 직업을 바꾸려고 생각하고 있는 의뢰인에게 앞서 말한 취지의 충고를 했다. 리딩 853-2에서 케이시는 그 남자에게 스스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도록 권고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 자신의 생각처럼, 나를 신의 의지에 역행하는 상황으로 몰고 가는가?”
만일 그렇다면 신에 대한 좀 더 이상적인 봉사를 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택하라고 충고하고 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이 타인에 대한 봉사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면, 그 기회를 신의 의지를 예증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십시오. 적어도 당분간은 말입니다. 그 일과 관련된 모든 기회가 탐색될 때까지는 봉사할 수 있는 당장의 수단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에 덧붙여 자신보다는 신의 영광을 위해서 일한다면 모든 경제적 필요는 저절로 충족될 것이라고 케이시는 확신한다. 케이시는 리딩 877-2에서 매우 분명하게 이런 약속을 했다.
“우리가 그런 능력들을 봉사라는 측면에서 발휘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미래의 소득, 물질적 성공, 사회적 활약들을 스스로 보장하게 됩니다.”
케이시는 이 원리의 예로써 성서의 문구를 인용했다.
“들에 핀 꽃을 보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먹여 주신다.”
그러나 케이시는 이 점에 관한 회의적인 반대를 리딩 1472-6에서 예상했었다.
“자, 당신은 이것이 비현실적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현실적인 영리 위주의 기업적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타인에 대한 봉사에 전념하면 이런 것들은 현실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런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라고 제안한다.
“금과 은은 누가 만든 것입니까? 힘과 권위와 빛과 희망은 누구에게서 나옵니까? 이런 것들을 준 사람이 누구입니까?”
케이시가 말하기를, 신은 모든 창조의 근원이며 우주의 물질적 풍요의 근원이다. 때문에 우리가 신과 더불어 일하고 있다면, 그 봉사 속에서 우주적 풍요가 구현된다고 말한다.
영적 이상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큰 성취를 이루게 된다
우리가 일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첫 단계는 자신이 활동할 분야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런 첫 단계를 거치면서 무엇을 위해 일할 것인가가 분명해진다. 리딩에 따르면, 자신의 영적 이상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큰 성취를 이루게 된다고 한다. 물론 자기 출세와 물질적인 성공만을 위해서 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기적인 일은 영혼 속에 존재하는 가장 심원한 인생 목적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외적 행동이 내부에 본질적으로 잠재된 창조력의 의지에 거스르게 되면서 결국은 내적 동요와 갈등을 야기하게 된다.
일단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 결정되면 다음 단계는 스스로 준비하는 것이다. 즉 필요한 공식적인 훈련(교육)을 받아야 하며, 활동하기로 선택한 분야에서 열심히 일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혹은 새로운 일의 목적에 맞게 내적인 믿음을 다시 강화해야 하는 수도 있다. 리딩 877-2에서 케이시는 그런 일의 필요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처음에는 내부로부터 준비를 하십시오. 그 일에 전념 하십시오. 스스로 확신을 가지는데 필요한 활동들을 하십시오. 자신이 가고자 하는 분야에 대해서 결코 두려움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의심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실패를 끌어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약속이 진실이라는 것을 믿고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그 약속이 현실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안전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될 것입니다.”
케이시가 말하기를, 우리가 어떤 분야를 선택하든 그리고 스스로 준비를 갖추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해야 하든, 그러한 준비를 통해서 우리는 좀 더 유능해지고 스스로 선택한 일의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리딩 956-1에서 케이시를 직업 선택에 대한 특별한 충고를 했는데, 그의 의뢰인에게 여행 가이드가 가장 알맞은 직업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그는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학문적 연구와 내적 확신을 강조했다. 그 의뢰인이 언제쯤 그 일이 실현되겠느냐고 묻자, 케이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준비가 된 순간부터입니다. 당신 자신이 준비를 갖추면 그 일은 현실이 됩니다. 창조력과 함께 할 준비를 하는 사람은 신의 기쁨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시작하라
케이시가 반복해서 강조한 핵심 중 하나는 항상 현재의 상황에서 즉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너무 자명한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 막연히 시간을 낭비한다.
“만일 나에게 이런저런 조건만 갖춰지면, 진짜 한 번 해볼 텐데.”
자, 우리는 그런 처지에 있지 않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을 뿐이다. 지금 이곳이 우리를 위한 절대적인 최상의 장소(조건)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시작해야 한다면 이곳이야말로 움직이기 시작해야 할 곳이다. 오늘의 기회는 오늘의 조건하에서만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을 되뇌이는 것만으로는 일을 완성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서 리딩은 ‘당장 수중에 있는 것을 이용하라.’고 자주 충고한다. 다른 자원을 기다리는 것은 다른 상황이나 조건을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비효율적이다. 새해에는 더 나은 기회를 얻을 수 있는지를 묻는 의뢰인에게 케이시는 리딩 1472-9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기회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발전에 달려 있습니다. 나날이 제공되는 그런 기회를 통해서 내부로부터 솟아올라야 합니다. 자주 말해지듯이 수중의 것을 이용하다보면 더 큰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을 이용하라. 의욕, 지식, 경험, 능력, 물질적 도구 등. 케이시는 이렇게 약속한다.
“만약 우리의 목적이 창조력과 조화되고 있다면, 신은 오늘 임무에 필요한 자원을 충분히 주실 것이며, 내일 필요한 것은 그 때가 되면 주실 것이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느나는 물음에 리딩이 준 가장 간결한 대답은 아마도 ‘일단 시도하라!’ 일 것이다. 일단 자발적으로 목표 달성에 도전하게 되면. 우리는 이 목표를 향해 집중적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 비록 필요한 모든 단계를 알고 있지는 못할지라도, 지금 알고 있는 것을 행하다 보면 다음 단계는 저절로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집중적 노력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의미에 대해 케이시는 리딩 5603-3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집중적 노력이란 땅을 파고 들어가 숨는다거나 걱정하거나 초조해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 그것이 성공할 것인지 여부를 가지고 자신이나 타인을 들볶는 것도 아닙니다. 일단 시도해 보십시오! 자신이 택한 분야에 전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준 것만큼 되돌려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일을 연기하면 나중에 좀 더 좋은 조건이 갖추어질 거라고 기대하면서 뒤로 질질 미룬다. 다음과 같은 괴테의 시는 우리를 놀라게 한다.
진심으로 원한다면, 바로 이 순간을 잡으십시오.
당신이 꿈꾸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시작하십시오.
대담함 속에 천재성과 힘과 마술이 있답니다.
단지 시도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점차 뜨거워지고
일단 시작하면 일은 완성되니까.
케이시가 괴테의 생각에 백 퍼센트 찬성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나는 아직 쓸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타자기 앞에 앉았던 경우가 수 없이 많았다. 이럴 때면 괴테의 말과 지금 당장 지니고 있는 것을 이용하라는 케이시의 충고를 생각했다.
그런데 일단 타이핑을 시작하면 내부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힘이 솟아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마음이 뜨거워지고, 타이핑이라는 행동이 무의식로부터 생각을 끌어올린다. 그 무의식은 우리에게 불려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충고는 모든 종류의 일이나 활동에 적용될 수 있다. 이것이 중대한 결정을 하는 것이든 혹은 오랫동안 미뤄왔던 편지를 쓰는 것이건 간에 말이다. 물론 일단 시작하면 그 일에 충실해야만 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리딩에서 인내가 또 다른 중요한 자질로 거론되는 것이다.
한 여성은 글을 씀으로써 신과 인류를 위한 가장 큰 봉사를 하게 될 것이라는 리딩을 들었다. 리딩이 경고하기를, 성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며 그녀는 준비를 해야만 한다고 했다. 리딩 1567-2에서 케이시는 이렇게 말했다.
“쓰고 - 또 쓰고 - 또 쓰십시오.! 일 년 혹은 그 이상 당신이 썼던 모든 것을 찢어버려야 할 수도 있겠지만 쓰고 또 쓰십시오. 당신은 타인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비록 지금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즉 글이야말로 그녀가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할 수 있는 분야인데, 마침내 그 결실을 맺을 때까지는 인내를 가지고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주는 대로 받게 된다
케이시는 리딩 262-44에서 ‘사랑이란 자신이 가진 것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진지하게 노력할 때, 우리의 노력이 사랑이라는 창조력과 조화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해야만 할 일 중 하나가 바로 주는 것이다. 케이시는 주는 대로 받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일에서 뛰어난 성취를 원한다면 우리는 매일 보통 이상의 봉사를 기꺼이 해야만 한다.
리딩 361-9에서는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다.
“예수는 위대한 종이며, 위대한 종은 만인의 주님이기 때문에 그는 삶에서의 봉사와 활동을 통해 단 하루의 수고나 곤란을 극복할 정도의 수고만을 하려고 몸을 사리지 않습니다. 그는 기꺼이 그 이상의 것을 위해서 행동합니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따를 수 있는 모델이 있다. 신의 위대한 종으로서 예수가 이 세상에서 활동했으며, 우리의 내부에도 그와 같은 그리스도 의식이 잠재되어 있다. 케이시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그가 살았던 방식이며. 우리 각자는 예수의 길을 따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성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케이시는 이렇게 주의를 준다.
“만일 일상의 활동 중에 이상(ideal)이 당신 자신을 타인에게서 격리시킨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이상이 타인과 더 나은 관계를 맺도록 해준다면 그것은 올바른 것입니다.”
실제로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진실로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면,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타인에게서 멀어질 수 있겠는가?
가장 큰 적은 자기 내부의 이기적인 속성이다
‘내가 주의해야 할 어떤 적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사람에게 케이시는 리딩 2953-1에서 재빨리 이렇게 대답했다.
“예, 있습니다.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적이란 자기 내부의 이기적인 속성일 뿐입니다.”
삶의 다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일을 하면서도 우리는 적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자기 내부의 시기와 분노와 원한을 경계하고 그것들을 더 사랑스러운 반응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물론 자신의 탐욕에 만족을 주어서도 안 된다.
단기간에 걸쳐,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부당하게 이용함으로써 성공을 하고 물질적 부를 얻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리딩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가 오직 창조력과 조화되어 일할 때만이 진정한 번영과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자격이 없는 동료가 특혜를 받아 승진한 데 대해 시기와 분노로 고통 받는 어떤 사람을 상담하면서, 케이시는 비록 그 승진자가 물질적 풍요는 즐길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역시 내적 갈등을 겪고 있으므로 전혀 부러워할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
리딩 531-1에서 케이시는 그 질문자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살다보면 의혹이 일어나는 시기가 닥칠 겁니다. 당신은 법과 질서와 타인의 권리까지도 무시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더구나 물질적 측면에서 보면 그들은 세상에서 많은 것들을 얻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많은 영혼들의 삶과 연관이 있는 활동들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 배후의 진실을 알지 못하는 당신은 이렇게 소리칩니다. ‘착하게 살아 봤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고민과 의혹까지 자세히 살펴본 적이 있습니까? 그들의 삶속에 웅크리고 있는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부끄러움을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까?”
이 짧은 리딩을 통해 케이시는 의뢰인에게 시기와 탐욕이라는 두 가지의 내적인 적을 경계하라는 충고를 했던 것이다.
적의 역시 개인적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일터에서도 피해야만 하는 대상이다.
리딩 603-2에서 케이시는 자신을 화나게 만든 동료들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초월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의뢰인은 자신에게 큰 스트레스를 주는 동료와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케이시에게 물었다.
케이시는 여기서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사랑에서 나온 무관심’이란 태도를 취하라는 것이다. 그의 제안은 이런 것이다.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경우라면 도움을 주십시오. 그러나 되도록 그들과 다른 방면의 활동에 몰두하도록 하십시오. 그들에 대한 무관심이 다른 분야의 봉사활동으로 이어지도록 하십시오.”
다른 경우인 리딩 262-47에서는 사랑의 확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용서를 통해 자신의 내부에서 사랑을 구현토록 하십시오. 스스로 실천하는 선행만이 시기와 다툼과 무지를 몰아냅니다.”
이에 관해, 리딩 2629-1에서는 우리가 관용을 실천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너그러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대단한 미덕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을 대할 때 장점을 확대해서 보고 단점은 축소시켜 보십시오. 왜냐하면 하느님조차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용서하듯이 당신도 용서하십시오.”
이런 자기 개선과 내부의 적을 경계하는 가르침들이 우리가 실천하기에는 너무 무리한 주문인가? 지난 밤에 이런 가르침을 따르지 못했다고 이미 자신을 비난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가? 케이시는 이에 관해서도 우리를 안심시켜 주는 말을 했다. 타인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조바심도 결국은 사랑을 표현하는데 장애가 되는 또 다른 내부의 적이라는 것이다. 케이시는 리딩 270-34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내부의 적들이 사랑을 방해하지는 않을까 해서 지나치게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조바심을 내지 마십시오.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인내를 가지십시오. 인내 속에서 당신은 자신의 영혼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케이시가 인내의 중요성을 지적하면서 투시력까지 동원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케이시에게 상담 편지를 보냈던 사람들은 그의 권위를 진심으로 경외했었기 때문에 비록 그 대답이 간단한 것일지라도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정도의 충격과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그의 리딩들을 살펴보던 나 역시 인내에 관한 내 자신의 능력에 의혹을 품게 된다. 인내라는 척도에서 내 자신이 마이너스 100에 위치해 있지는 않을까 두렵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나로 하여금 인내력을 기르는데 실제로 도움이 되었으며, 그래서 나는 그 충고가 진짜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일을 통해서 사랑을 구현하라
일에서 최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방법에 관한 케이시 리딩의 요점은 우리가 하는 노동의 결과가 물질적 보상의 차원에서 측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점은 우리가 일을 통해 사랑이라는 창조력을 얼마나 잘 표현했는가 이다. 우리가 신의 사랑에 자신을 일치시켜 가면 내적 완성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내적 완성은 인간의 가슴속에 내재한 신의 의지와 조화되어 일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케이시는 자주 이런 내적 완성을 약속했으며 사실 그것이 우리가 선을 행한 증거라고 말한다.
그는 리딩 531-3에서 다음과 같이 상기시킨다.
“이웃들에게 친절하고 상냥하게 말할 때면, 당신의 마음과 영혼이 기쁨의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을 당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말을 걸었던 사람들의 경험 속에서 - 비록 그 경험이 세속적 삶에서 혼란을 야기하는 것일지라도 - 기쁨을 찾아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당신의 영혼은 결실을 맺어가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케이시는 다음과 같이 우리의 용기를 북돋워 주고 있다.
“선행을 하는데 망설이지 마십시오.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이 기쁨과 생명과 만족한 영혼의 왕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단지 영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극히 현실적이다. 최상의 능력을 발휘해서 일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기꺼이 자신의 손을 더럽혀야 한다. 우리는 기꺼이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땀을 흘려야 한다. 그러나 일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누구를 위해 땀을 흘리려고 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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