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것은 이미 내 안에
서문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가이아 프로젝트’ 홈페이지(www.gaiaproject.co.kr)에 올려져 있던 장휘용 교수님의 〈명상록〉과 〈수상록〉 중에서 책 구성상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정신세게원 강의 녹취록과 운동역학에 관한 논문 내용을 뺀 나머지 전부를 모은 것입니다.
모두 45편의 명상일기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올 여름 저자가 뉴질랜드 행 이후 수상록에 쓰신 ‘전체의식 곳으로’라는 체험 글까지를 마지막 원고로 엮었습니다.
돌이켜보건대 2001년 당시 저자가 운영하던 웹사이트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www.fortruth.net)’의 명상록 코너에 첫 번째 글 ‘창조인가 체험인가’가 올라오고 나서 저자에게 다가온 큰 변화중의 하나는 수행자적인 자세에서 사명자 의식으로의 전환이었습니다. 이후 그 결정판으로써 《가이아 프로젝트》 책이 선을 보였고 지금은 더 나아가 지구 의식과 함께하는 또 다른 새 국면으로 접어들고 계십니다.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또 에너지와 의식은 뭘까요? 지금 여기 이 지구별 행성에서 우리들이 매순간 연출해 내는 구체적인 행위들은 다차원 우주 안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물질을 넘어 영적인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다양한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데, 스스로의 각성으로 알아가는 이외에도 채널링이라는 형식을 통해 미지의 영역으로부터의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독한 환멸을 맛본 사람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평가절하하고 싶겠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이, 듣는 자가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그리고 각자에게 봉인된 기억과 공명하는 자극 정도에 따라 얼마든지 유익한 체험을 할 수가 있고 의식 확장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여정을 통하여 조금씩 진리와 계합되어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정보가 때로는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진실을 추구해가는 여정에서 순탄하고 안전한 과제만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해원되지 못한 욕망을 부채질하는 달콤하고 얄궂은 메시지의 수렁에 휘말려 허우적댈 수도 있고, 정화되지 않은 부정성과 의심을 촉발시키는 쓰디쓴 분노의 불의 잔을 들이켜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내적으로 허락하지 않은 체험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내면의 진실과 직면하기가 두려워 위안을 구하던 어리석음을 그치게 될 것입니다.
이 순간에서 휴식하지 못하고 완전함을 얻지 못한 채 막연히 더 새로운 것을 쫓아 앞으로 내달리기만 한다면 채워지지 않은 갈증으로 언젠가는 지쳐 쓰러지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데 외부에서 채널로 주어지는 메시지가 아닌, 명상과 수행을 통한 각성, 그리고 남이 주는 것이 아닌 일상생활 속에서의 자기 주체적인 깨달음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성숙한 의식의 소유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고 듣고 깨우친 만큼이 아닌, 나머지 전체에 비추어 아직도 모자란 부분을 인정하고 겸허히 수용하는 구도자는 매우 드뭅니다. 그리고 안다고 한 내용에 대해서도 정말로 명명백백히 꿰뚫은 앎인지 냉철한 점검이 뒤따르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자칫 솥뚜껑을 자라로 오인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착각한 사실로 만족한 나머지 채널링은 고사하고 자기 앎인지 뜬 구름인지(스스로는 확신한다고 하겠지만) 오리무중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렇듯 자기 스스로 깨닫는 것이 공허한 구호로 그쳐서는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채널링 역시 꼭 외계의 고차원 존재나 신명 혹은 인간의 형상을 한 특별한 에너지체와의 통신이라고만 생각하는 것도 고정관념입니다. 이 세상 어느 존재, 어느 의식, 나타난 형상이 어떻든 간에, 이 우주이든 다른 우주이든 혹은 대지 위를 유영하는 어떤 기운이라 하더라도 어쨌거나 나의 의식에 포착되고 에너지 교류가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다 채널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참다운 나로부터 오는 비전이나 느낌도 일종의 채널현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낡은 개념에 묶이지 않는 살아있는 정신이 요구됩니다. 요컨대 나 아닌 것은 다 의심하라거나 내가 스스로 안 것은 무조건 안심해도 된다는 그럴싸함에 쉽게 안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체의깃에서 보자면 나 아닌 무엇의 접근이라고 하여 그것을 이분법으로 마계로부터의 희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너무 모든 사물과 현상을 부지불식간에 기존의 상식과 선입견으로 바라보면서 늘 같은 의식 패턴의 테두리 안에서 돌고도는 자기체험의 율동을 반복하곤 합니다. 진정으로 진실을 원하고 진리를 구한다면 이를 과감히 탈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 자신도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안다고 자신했을 때 무지했고, 모른다고 낙심했을 때 그 안에 앎의 숨결이 있었습니다. 한시도 전체를 떠난 적이 없으면서도 언제나 습관적으로 분리된 부분을 인식하여 고통을 자초하곤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조차 한 차원 높여 보면 의식의 성장에 밑거름이 됩니다. 밤을 모르고서 어찌 낮을 알며, 큰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고서 어찌 인생의 참맛을 온전히 알겠는지요.
그러므로 어둠과 빛을 다 끌어안아야 합니다. 그림자를 없애겠다고 장애물을 모조리 도려낸다면 아무 재미도 없는 허황한 우주에 덩그러니 갇혀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영적 무지를 후려치는 그 어떠한 아픔이라도 다 너그러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누구나 자기 행실에는 다 이유가 있고 자기 기준에서는 각자가 한 우주이니 저마다 옳습니다. 그래서 과정에서마다 나름대로는 다 널리 보고 행동한다고 했어도 지나고 보면 여전히 우물 안에서 헤엄치고 있었음을 알 때가 있는데, 그것을 은폐하려는 건 용렬한 짓일 뿐입니다.
모든 것은 이미 이 무한한 우주 안에 완전하고도 다양한 생명으로 살아있으며, 그 어떠한 것도 우주 전체로서는 버릴 것이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자기 체험이 지금도 시작도 끝도 없는 가운데 진행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과정이면서 모든 것은 목적입니다. 나를 체험하는 것이 우주이며, 자기 체험하는 우주가 곧 내가 아닐까요?
고맙고 다행하게도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지나온 여정을, 때때로 지금에 비추어 부분적으로는 숨기고픈 과거일 수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그대로 만인 앞에 드러낸 용기에 개인적으로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매순간 진실했기에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저도 그러하였지만, 많은 분들이 이 책에 실린 저자의 진솔하고 편안한 구도 체험기에 깊이 공감하고 수긍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은 적이 많다고들 합니다. 잔잔하지만 강렬한 내면의 성찰 속에서, 비록 글을 통한 교류였지만 알 수 없는 정신의 향기에 이끌려 다음 글을 언제 올라오나 기다리던 때가 행복했던 시절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일전에 아는 동생(자칭 불출거사)에게 《가이아 프로젝트》 책을 권했더니 읽고는 “고맙다. 맘이 편해졌다. 큰 그림을 알겠다.”고 했으나 그뿐이더니, 뒤에 〈명상록〉과 〈수상록〉을 접했을 때에는 “아! 이건 그냥 있으면 안 되겠다. 장휘용 이 분이 누구냐. 이 책을 읽고 모이는 사람들도 만나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와 닿더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시간이 지나고 저자가 이 시간 이후 그 어떠한 의식으로 변모되어간다 할지라도 여전히 이 책에 실린 관찰과 고백과 깨달음과 언명들은 많은 길 찾는 이들에게 영롱한 보배로 남을 것입니다.
2006년 10월 한가위를 맞아
화악산(華岳山) 자락에서
레무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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