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BOOK/도인(道人)

도인(道人) 1 - 24. 전쟁 속으로

기른장 2025. 3. 23. 15:47

24. 전쟁 속으로

1937년에 발발한 중일 전쟁의 소식이 매달 올라오는 생활용품에 섞여 화산에 전해졌다. 식량을 구하러 산을 내려갔던 동료들도 속속 산으로 귀환하여 전쟁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일본군이 얼마 전 베이징 외곽에 있는 마르코폴로교를 기습하여 장악한 다음 철과 석탄이 풍부하게 매장된 산시 지방의 산악지대로 진격했고, 이제는 톈진에서 난징에 이르는 전선에서 2차 공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군은 서서히 해안지대를 벗어나 비교적 궁벽한 내륙지방으로 밀려들었다.

중국 군대와 국민은 나름대로 저항을 시도했다. 그러나 사기만 드높을 뿐 훈련이 불충분한 데다가 장비마저 부족해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한 채 패주를 거듭했다. 특히 북쪽 지방의 소규모 비정규군과 주민들은 탱크와 비행기로 무장하고 돌진하는 잘 훈련된 일본군에 의해 전멸하고 있었다.

전투와 일본군의 잔학한 행위를 알게 된 화산파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분노와 증오심이 애국심으로 이어졌고, 화산에 있는 모든 도관에서 연일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사부와 사형과 수련생들이 각기 다른 의견을 펼쳤다. 어떤 이들은 흥분한 나머지 감정을 앞세웠고 어떤 이들은 그래도 냉정하고 침착한 자세를 유지했지만, 얘기가 전쟁과 일본군을 비난하는 대목에 이르면 너나없이 한 가지로 입을 모았다.

 

마침내 전쟁은 화산의 일상생활마저 뒤흔들기 시작했으며, 얼마 뒤에는 전쟁 소식에 귀를 기울일 필요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멀리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려 오고 머리 위로 전투기가 날아다니더니, 백 킬로 정도 떨어진 시안 쪽에서 불그스레한 불길과 함께 거대한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많은 도인들이 전쟁에 휩쓸리면 안 된다고 외쳐댔다. 집과 가족을 등진 수도자는 더 이상 세상일에 관여해선 안 되며, 오랫동안 갈고 닦아 온 청정한 마음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속세는 전쟁, 속임수, 거짓말, 돈, 살인, 정치 등의 위험 요소가 가득한 곳이니 수도자에게 부여된 계율을 엄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애국심에 불타는 도교인들은 즉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만약 중국 땅에 도적이 들끓는다면 마음놓고 수도에 전념할 수 있는 장소조차 없을 것이라고 언성을 높였다. 정의감에 불타는 그들은 제한적으로나마 전쟁에 참여해야 하며, 자신들이 세상에서 잊혀진 존재이든 아니든 간에 국가와 국민은 자신들을 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논쟁이 거세지면서 내분의 조짐이 엿보이자 화산의 대사부는 전원 회의를 소집했다. 화산의 다섯 봉우리에 기거하던 모든 사부들과 수련생들이 남봉에 있는 도관으로 모여들었다. 도관의 뜰로 들어서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어려 있었지만, 입에서는 여전히 찬반의 열변이 쏟아져 나왔다.

사부는 뜰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본청 현관으로 걸어나갔다. 등뒤의 고색 창연한 도관 건물 때문인지 그날 따라 유난히 사부의 키가 커 보였다. 대사부는 카랑카랑하면서도 묵직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도교를 신봉하는 사람들로, 세상에서 잊혀진 존재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등졌고 따라서 소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다툼에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다면 그 동안 이 신성한 산에서 갈고 닦은 청정한 마음을 잃게 될 겁니다. 속세에 기거하면서 몸과 마음을 더럽히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우리 역시 중국인입니다. 지금 외적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있으니, 모든 국민이 나라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도록 맡은 일을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필요합니다. 정신수양 외에도 그만큼 중요한 요소들이 더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총이나 칼을 들고 싸워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공헌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모두들 자신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자문해 보십시오. 산을 내려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만한 것을 구해 줄 수도 있고, 또 아픈 사람을 치료해 줄 수도 있습니다. 미래를 위해 전통기법을 익히고 보존할 수도 있겠지요.

다시 말하거니와 적군을 죽이지 않고도 나라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또 여러분 중에는 권법등 무술을 익힌 사람도 있는 줄 압니다. 그런 사람들은 무술로 나라를 지키십시오. 전사가 할 일은······.」

사부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사이훙의 머리는 벌써 전쟁터로 달려 가고 있었다. 아직 젊기만 한 사이훙의 혈기가 들끓었다. 사이훙은 당장 싸움터로 달려가 위기에 처한 국가와 국민을 구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만행을 저지른 자들에게 응분의 대가를 돌려주고 싶었다.

그날 저녁, 사이훙은 두 사형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두고 토론을 벌였다.

 

「우리는 지독할 정도로 고된 수련을 쌓았고, 덕분에 제법 출중한 무예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무예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이훙은 저도 모르게 뜨거운 입김을 내뿜었다.

그러나 두 사형은 진지한 자세로 귀를 기울였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린 쭝우는 좀처럼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했으며, 칭 수이셩은 일단 말을 꺼내면 숨김없이 툭 털어놓기는 하지만, 마음속으로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칭 수이셩이 갑자기 하산을 선언했다.

「우리는 무술을 배웠으니 싸워야 해. 여자와 어린아이와 노인들이 당한 비인간적인 행위가 생각날 때마다 참기 어려울 정도로 울화가 치밀어. 더 이상 수수 방관할 수 없어. 그놈들을 죽여 버리고 말겠어.」

「저도 그럴 작정입니다.」

사이훙이 사형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사이훙과 칭 수이셩은 동시에 린 쭝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린 쭝우는 두 사람을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이훙과 칭 수이셩은 평소 논쟁을 싫어하던 린 쭝우가 곧 자리를 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종단(宗團)에 적(籍)을 둔 채 참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쟁터에서 계율을 지키기란 불가능할 테니까요. 또 하산하면 이런저런 세상사에 휘말릴 수밖에 없으니 아예 종단을 떠날까 합니다.」

사이훙의 말이 끝나자마자 린 쭝우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사이훙, 탈적(脫籍)은 안 돼.」

 

「저는 어느 도관에도 속하지 않는 떠돌이 도인이 되겠습니다. 이제야 솔직히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가끔 이곳 생활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배불리 먹지도 못하며 온종일 수련에 매달리다 보니 의기소침해진 거지요. 매일 새벽에 일어나 경전을 외고, 아침 먹고 경전을 외고, 점심 먹고도 경전을 외고, 저녁을 먹고도 경전을 외고, 심지어 잠자리에 가서도 경전을 외고······. 저에게는 떠돌이 도인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칭 수이셩이 사이훙에게 과거의 일을 깨우쳐 주었다.

「자네 스스로 서약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평생 도인의 길을 걷겠습니다. 그렇지만 전쟁터에서도 계율을 암송한다면 위선자가 될 뿐입니다. 저는 살아남기 위해 계획을 세워 싸우고, 고기를 먹고, 악한 일도 불사하고, 살인까지 할 생각입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싸움에 전념해야 할 판국에 어떻게 계율을 지키란 말입니까?」

두 사형은 서로 멀거니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자네 마음대로 하게, 사이훙.」

린 쭝우가 침통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산을 내려가더라도 계율을 지키도록 노력할 생각이네.」

「나 역시 그렇게 할 작정이네.」

칭 수이셩이 린 쭝우에 동의를 표했다.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두 분께서도 어쩔 수 없이 살인을 하게 될 겁니다. 두 분은 사부님께서 미쳐 날뛰는 살인자를 응징해야 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셨나요?」

사이훙은 또다시 뜨거운 입김을 토해냈다.

「그분 말씀은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은 죄악이라는 뜻이네. 인간으로서 어찌 그렇게 잔악한 짓을 저지르겠다고 마음 먹을 수 있겠나?」

칭 수이셩은 잘 들으라는 듯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었다.

칭 수이셩이 말을 마치자 린 쭝우가 덧 붙였다.

「사이훙, 우리는 악을 물리쳐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하네. 즐기기 위해 생명체를 죽이지는 않지만 우리를 해치려는 산적과 산짐승에 대항해 싸움을 벌인 적은 있네. 성인이라 해도 자기 몸을 보호할 필요는 있으니까. 우리 모두 이유 없는 공격에 응전을 한 경험이 있지. 자신을 지키는 일은 권리이니까 말이야.」


다음날 사이훙은 사부를 찾아갔다. 사부는 길고 헐렁한 평상복 대신 손목과 발목 부분을 동여 맨 검은색 무복을 입고 있었다. 사이훙은 절을 한 다음 안으로 들어갈 것을 청했고 사부는 허락한다는 표시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산하고자 합니다.」

사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이훙을 주시했다. 사이훙은 사부가 뭐라 대꾸할 틈도 주지않고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영영 종단을 떠나고자 합니다.」

사부는 손바닥으로 책상을 힘껏 내리치고는 사이훙을 노려보았다. 사부가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본 사이훙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뻔뻔스러운 놈! 지금 네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느냐?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지 말아라!」

「전쟁터에서 계율을 지킬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네놈에게 하산해도 좋다고 허락하더란 말이냐!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줄 아느냐? 어떻게 그런 건방진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변덕스러운 생각을 쫓아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돼. 잠자코 수련에 힘을 기울이도록 하거라.」

「무슨 일이 있어도 참전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참전을 하면 세상 음식을 먹을 수 밖에 없습니다.」

「계율을 지키거라!」

「우리 몸이 바로 신들이 거주하는 도관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사이훙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면 어떻게 싸울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그렇게 해야 한다면 도관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양분을 섭취해 몸을 보존해야 합니다. 신들도 낡아빠진 〈도관〉에는 머무르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머릿속이 불량한 생각으로 꽉 차 있구나. 한 마디로 주제 넘는 놈이란 말이다!」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조차 없다면 배추나 무와 똑같다고 해야겠지요.」

사부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무시무시한 눈길로 사이훙을 바라보았다.

 

「이놈, 혈기에 의지해 너무 천방지축이로구나! 후회할 짓을 하기 전에 잘 생각해 보도록 하거라!」

「저는 떠돌이 도인이 될 생각입니다. 이곳을 떠나면 그 어떤 도관에도 적을 두지 않겠습니다.」

사이훙의 목소리는 조용하면서도 단호했다.

「이제 떠나면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말거라.」

사부의 최후 통첩이 떨어지자 사이훙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할 얘기는 모두 마친 셈이었다.

「사부님,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사부는 다시 자리에 앉아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화산파의 무예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어, 화산 출신의 제자들은 크게 환영을 받았다. 산을 내려온 사이훙과 린 쭝우와 칭 수이셩은 각기 다른 게릴라 부대에 들어갔다. 그들이 정규군 대신 게릴라 부대를 선택한 이유는 정규군은 상급 부대의 명령을 따라야 하지만 게릴라 부대는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싸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이훙이 소속한 게릴라 부대의 우두머리는 차이 딩지에(蔡頂結)와 바이 쑹지(白宋基)였다. 사이훙 부대는 적의 후방을 배회하거나 정찰부대처럼 최전방 지역을 들쑤시면서, 적군을 공격하기도 하고, 때로는 적군의 장비를 파괴하며, 적군의 기밀을 몰래 빼내기도 했다. 무술이 뛰어났던 사이훙과 동료 대원들은 총보다는 전통무기를 선호했다. 정규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할 경우에만 총을 사용했다.

 

사이훙이 즐겨 사용하는 무기는 한쪽 날이 선 칼과 창이었다. 검정색 무사복에 짚신을 신고 땋은 머리는 위로 감아 올려 두건 속에 집어 넣었다. 사이훙은 높은 이상을 가슴속에 품은 채 성난 종마처럼 적을 무찔렀다. 그는 특히 단독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적군을 하나씩 쓰러뜨리길 좋아했다. 사이훙은 새벽이나 황혼 무렵, 때로는 훤한 대낮에도 풀숲에 몸을 숨기고는 지나가는 적병을 몰래 쓰러뜨렸다. 창에 목을 찔린 적병은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접근전이 벌어지면 사이훙은 칼을 휘두르면서 상대방에게 바싹 다가가 상대방이 총 대신 대검을 사용하도록 했다. 차가운 소리를 내며 칼집을 나온 사이훙의 묵직한 칼은 어김없이 위력을 발휘했다. 사이훙은 몸을 빙글 돌리거나 펄쩍 뛰어 공격을 피하면서, 번쩍 칼을 휘둘러 상대방의 사지를 잘라 버렸다. 사이훙은 찌르고 베고 피하고 휘두르는 법을 가르쳐 준 무인들의 철학을 명심하고 있었다.

〈고통을 주려면 슬쩍 베고, 자비를 베풀려면 목을 자르라······.〉

사이훙은 시간이 날 때마다 온 힘을 기울여 권법을 수련해 왔기 때문에 손발의 위력이 마치 쇠뭉치를 휘두르는 듯했다. 그 동안 금욕생활을 한 덕에 기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으며 피나는 수련을 계속한 탓에 여러 가지 무예도 시간이 갈수록 나아졌다. 사이훙은 무시무시한 전사가 되었다. 손과 발을 한 차례만 휘두르면 적군이 죽어 넘어졌고, 목을 비틀어 적군을 죽이기란 식은 죽 먹기였다.

 

날이 가고 달이 지남에 따라 사이훙은 여지껏 품어 온 이상이 사라지는 대신 증오심이 커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처참한 전쟁 속에서 지성은 마비되고, 동정심은 철저히 상실되었다. 사이훙은 화산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일본군의 잔혹성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 그는 사람을 증오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적들이 유린한 마을에 들어설 때마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의 극한을 낭자한 선혈과 함께 목격했다. 찢겨진 시체, 강간당한 여자들, 호되게 구타당한 육신, 총검에 찔린 어린아이들, 사지가 달아난 소년들, 성기에 말뚝이 박히고 불살라진 몸뚱어리. 사이훙은 신물이 날 정도로 그런 끔찍한 장면들을 보았다. 잔인한 죽음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사이훙은 증오심을 키웠으며 예리한 칼날을 곧추세웠다. 전쟁의 잔혹상은 동료들의 감성도 모두 마비시켜 버렸다. 그들은 단호하고 냉정해졌다. 사이훙은 아직 그러질 못했다. 명분을 따르느냐, 들뜬 광기를 따르느냐를 놓고 갈팡질팡했다.

계속된 전투로 정신이 흔들렸다. 전쟁터의 폭음과 비명소리에 몸과 마음은 상처를 입었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전쟁 소리와 마주쳤다. 폭탄의 불길한 굉음, 자동 소총의 미칠 듯한 소리, 심지어는 자신의 칼날이 살점을 도려낼 때 나는 희미한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이훙의 영혼을 직접 파고든 것은 인간의 소리였다. 갈피를 못 잡고 공포에 질린 어린아이의 흐느낌, 죽어 가는 동료의 비명, 적의 마지막 신음······. 그 속에서 사이훙은 〈왜?〉라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사이훙은 전쟁터가 잠잠해지는 그런 순간을 동경했다. 파괴의 불협화음이 잠잠해지면 사이훙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이제껏 배워 온 것과 실제 전쟁 사이의 기묘한 딜레마를 해결해 보려고 했다.

엄격하고 절대적인 금욕에 초점을 둔 화산의 순결성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기회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화산에서는 죄를 지을 만한 유혹이 없었다. 그곳은 헌신적인 인간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였다. 도인이든 견습생이든 모두가 영적인 상태로 몰입하기 위해 힘을 썼다. 화산에서 가장 싫었던 것은 지겹도록 규칙적인 금욕 생활뿐이었다.

 

화산은 전쟁터의 더러움과 타락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전쟁터에서는 산과 천국이 너무 멀어 닿을 수 없는 곳처럼 보였다. 이제 사이훙은 분노로 인해 살인과 모함을 일삼는 망가진 생활을 하고 있었다. 훔칠 수 있는 건 뭐든지 훔쳐 먹어야 했으며, 생물을 죽이기 위해 덫을 설치하는 일에 온갖 머리를 다 써야 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영적인 모습은 완전히 제쳐두어야 했다. 옛 도인들의 말이 옳았다. 속세에 뒤엉키지 않고 살아가는 일은 정말 어렵고도 순결한 일이었다.

사이훙은 세상사에 완전히 얽혀 들었다. 까마귀 밥이 되어버린 썩은 육신을 볼 때마다 그는 복수의 열정에 사로잡혔다. 전쟁터의 비명 속에서는 경전의 속삭임도 덧없는 일이었다. 격분은 이제 일상사가 되어 인내심을 밀어냈다. 사이훙은 백성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다. 어린 시절부터 살생은 영원한 천벌을 가져온다고 배웠다. 그는 그 교훈을 받아들였다. 후회 없이 지옥에 갈 것이다.

화산에 대한 생각도 점점 씁쓸하고 냉소적인 것으로 변해 갔다. 도인들이 그토록 위대하다면 그들은 왜 전쟁을 중단시키지 못하는가? 물론 대답은 있었다.

〈도인들은 속세와 인연을 끊은 사람들이다.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이 아닌가? 그들은 중국인이 아닌가? 그들은 왜 그들의 특별한 능력으로 무의미한 침략 행위를 중지시킬 수 없는가? 문답 끝에 사이훙은 도인들이 할 수 있다 해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는 사실을 명료하게 깨달았다. 누구나 자신의 운명이 있고, 선과 악을 어차피 선택해야 했다. 전쟁은 운명이고, 운명은 신으로서도 어찌해 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영혼은 분명한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 영혼은 인간의 열망이 구체화된 것이지만 그것이 기적을 낳지는 않는다.〉

도교도들도 결국 인간이라는 점을 사이훙은 슬픈 마음으로 깨달았다. 평범한 인간······.

흔히 사람들은 도교도를 일컬어 자기파괴적이고 자기몰입적이라고 한다. 물론 도교도들이 타인의 비극에 등을 돌렸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도교의 길을 걷는 사람은 자신의 완성을 모색하는 동시에 타인의 완성을 위해서도 모든 것을 다한다. 문제는 인간 사회가 각각의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고, 개인들은 고상한 의식을 위해 희생할 것이냐 타락의 길로 빠져들 것이냐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의지와 기회를 갖추고 태어났다는 점이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의무이자 인간이라는 사실의 의미이다. 악이 없다면, 결과도 선택도 없을 것이다. 인간성에는 늘 선택이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는 꾸준하고 지속적인 노력으로만 얻을 수 있다. 도교도들이 나라 전체와 지구 전체를 구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그런 행위는 최상의 자비 행위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그런 일은 옥황 상제의 능력도 벗어난 영역일 것이다.

사이훙은 명상을 통해 통찰력을 얻었다. 인간의 생활은 고상한 의식과 막연한 느낌의 중간이다. 인간은 아직 진화 단계상의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했다. 진화 단계의 한 순간에 일어난 전쟁이 사이훙에게 갑자기 하찮고 의미없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런 철학적 비약이 불행하게도 전쟁터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사이훙은 그곳에 있었다. 그를 둘러싼 현실적 죽음과, 철학적 고뇌는 그곳에서는 해결될 수 없었다. 싸움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는 죽고 싶지 않았고 살해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이훙은 화산과 신과 인간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한 뒤에 결론은 아주 단순하게 내렸다. 자기를 죽이려는 자는 누구라도 죽일 것이라고. 그렇게 하는 것만이 현재 자신의 임무를 다할 수 있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