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BOOK/도인(道人)

도인(道人) 1 - 25. 귀향

기른장 2025. 3. 23. 17:23

25. 귀향

전사로서 생활하는 동안 항상 끔찍스러운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쟁중 사이훙은 베이징(北京)에서 광둥(廣東)으로, 허난(河南)에서 쓰촨(四川)으로 중국 전역을 돌아다녔다. 전쟁의 참화도 중국의 장엄한 경치와 황홀한 아름다움을 가리지는 못했다.

지인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었다. 다른 부대가 지나가거나 부대가 서로 합치게 되면 사이훙은 친구들을 찾았으며, 두 명의 사형과 재회하는 기쁨도 누렸다. 운이 엄청나게 좋은 날 이따금 보게 되는 닭 한 마리도 전쟁터에서는 행복이었다. 닭이 보이면 사이훙과 동지들은 행복한 미소를 짓고는 닭에 진흙을 발라 굽는 〈거지식 닭구이〉요리를 했다. 그렇게 만들어 먹는 음식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 준 성찬이었으며, 그렇게 먹는 물 한 모금은 천 년된 포도주보다도 달콤했다.

언제나 일본군을 죽이는 일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 번은 사이훙과 부하들에게 같은 편인 장 제스(蔣介石: 장개석) 사령관 집에 침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장 제스는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장군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거나 징계를 주어야 할 경우, 인질을 잡아 가두는 방법을 즐겨 사용했다.

시안 사건(군벌 장 쉐량(張學良)이 마오 쩌둥(毛澤東: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과의 합작을 종용하기 위해 시안에 들른 장 제스를 감금한 일) 후, 장 제스는 북로군을 이끌고 있는 장군의 열 살 먹은 손자를 인질로 자신의 집에 데려다 놓았다. 사이훙 부대의 사령관인 차이 딩지에는 이 일에 크게 분개했다. 내전이 다시 벌어지려 했고 북로군은 국민당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분열을 막고자 하는 차이 딩지에가 사이훙에게 내린 명령은 난징으로 가 인질을 구출해 오는 일이었다. 물론 그 계획은 총사령관에 대한 반항이자 모반이었지만 차이 딩지에는 사이훙이 일을 잘 처리하리라 믿고 있었다.

 

사이훙은 난징에 도착하자마자 지하 스파이를 통해 장 제스가 살고있는 집의 도면을 입수했다. 장 제스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의 저택에는 높은 담이 둘러쳐져 있었고, 군인들과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스파이는 그 집의 도면을 주면서, 경계를 뚫고 잠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총사령관 장 제스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도전이었고, 사이훙은 언제나 도전을 좋아했다. 사이훙은 초승달이 뜨는 날을 잠입 날짜로 잡고 부하들과 함께 작전을 세웠다.

그날이 되자 사이훙은 부하 한 명과 함께 어린 인질이 갇혀 있는 건물 바깥의 수풀 사이에 미리 몸을 숨겼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사이훙의 다른 부하들은 정원의 맞은편에서 짐짓 취한 체하고 싸움을 벌였다. 밖이 웅성거리자 많은 경호원들이 소리나는 쪽으로 모여들었고 사이훙은 소란을 틈타 담을 넘어 정원으로 잠입했다. 바깥에서는 싸우는 소리가 한층 더 커지고 있었다.

건물 입구에 두 명의 보초가 보였다. 사이훙은 나무 틈을 살며시 헤치고 나가 보초들이 그를 발견하기도 전에 둘의 혈도를 눌렀다. 보초들이 거꾸러지자 사이훙은 그들에게서 열쇠를 꺼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안에는 보초가 몇이나 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두 사람은 융단이 깔린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멀리 복도 끝에 보이는 전등빛으로 보아 안에 두 명의 경호원이 더 있는 것 같았다.

사이훙이 들어온 문은 자물쇠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보초들은 그쪽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도 없이 접근한 사이훙은 단 두 주먹으로 보초들의 급소를 찔렀다. 보초들이 쓰러지자 사이훙의 부하가 문을 부수었다. 안에는 소년이 잠들어 있었다.

 

시안에 돌아온 사이훙은 소년을 아버지에게 보냈고 북로군은 다시 사기를 되찾았다. 장 제스로서는 빼앗긴 인질을 다시 데려올 방법이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겠지만 자존심 강한 장 제스는 인질을 놓쳤다는 사실을 떠벌일 형편도 아니었다. 더욱이 일본에 전면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내전을 그치겠다던 장 제스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북로군 사람들은 활기를 되찾아갔다.


끔찍스런 2년 동안의 전쟁은 사이훙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화산에서 받은 수련과 후천적으로 길러진 무자비함으로 살아 남을 수는 있었지만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사이훙은 사태를 가늠해 보고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1939년경 진격하는 일본군에 쫓겨 내륙으로 들어간 군대가 야산과 계곡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자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부대훈련도 시키고 위협도 할 겸 방어선 지대에서 소규모 전투만을 계속 벌였다. 그들은 전선 깊숙이 침투했다가 퇴각하면서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중국군은 그런 소규모 전투에서 언제나 물러섰고, 퇴각하는 일본군을 괴롭히는 정도의 대응밖에 하지 못했다. 철통 같은 일본군 진지는 물론이고 양 진영 사이에 넓게 자리한 대치공간도 그들에게는 넘지 못할 벽으로 자리잡았다. 일본군은 시도 때도 없이 방어선 주변에 출몰했다. 도시들이 하나씩 파괴되어 갔으며 농부들은 수천 명씩 죽어 갔다. 황폐한 대지는 흥건한 그들의 피로 마를 날이 없었다.

사이훙은 지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개인참호 속에서 무감각하게 다음 공격을 기다리며 상처를 치료했다. 열병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전쟁은 점점 의미를 잃어 갔다. 사이훙은 그제야 전쟁과 무관한 세상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곳이야말로 아직도 배울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허(黃河)가 바다와 만나는 산둥(山東)의 끝자락에서 사이훙은 자신이 이끌던 유격부대를 해체했다. 화산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사이훙의 마음 뒤켠에는 산에 돌아가도 환영받지 못하리라라는 불안감이 있었다. 도량을 뛰쳐나올 때 사부는 다시 돌아올 생각은 말라고 했었다. 재입산이 허락될지 의심스러웠다.

화산으로 가는 길에 관가보에 들렀다. 조부모님들은 전쟁 직후 화산으로 피난을 가셨으며, 지금은 벌목꾼의 오두막에 두 분 다 몸져 누워 계시다는 걸 알았다. 사이훙의 아버지는 아직도 전장에 있었고, 다른 가족들은 내륙 깊숙이 피난을 떠나고 없었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린 것이다. 사이훙은 저택을 버리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그는 선조들이 살아 온 집에 도착했다. 그를 맞이해 주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이훙이었지만 폐허가 돼버린 집을 보니 애절한 슬픔이 밀려왔다. 넓은 대지, 정원, 장려한 건물로 우뚝 섰던 관가보는 불에 탄 채 잔해만이 산산이 흩어져 있었다. 관가보는 관씨 4대가 영화를 꽃피웠던 곳이었다.

일본 군대가 저택을 습격했던 게 확실했다. 총탄 구멍이 나무벽 군데군데 시커먼 흉터를 남겨 놓았고, 포탄에 맞아 생긴 구멍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수려했던 격자무늬 창살은 격렬한 총격으로 산산조각이 났으며, 정자와 고목들은 이미 불에 타버리고 없었다. 냇물과 우물은 독약이 뿌려져 폐쇄돼 있었고, 사당은 마굿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부귀영화의 상징이던 예술품들도 모두 약탈되었거나 부서져 있었다.

 

부서진 벽의 틈새로 새어 나온 희미한 불빛이 마당에 널려 있는 수십 구의 시체를 비춰 주었다. 일본군과 중국군의 시체도 더러 보였지만, 대부분은 집에 있던 종들이었다. 그들은 사지가 뒤틀린 채 죽어 있었다. 몇몇은 사이훙이 어렸을 때부터 잘 아는 이들이었다. 한쪽 그늘에 널브러져 있는 강간당한 소녀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허리 부위에 피가 그대로 응고되어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이가 부러졌으며, 벌거벗은 다리를 쭉 뻗고 있었다. 사이훙에게 말 타는 법을 일러주던 나이 든 마부는 서까래에 매달려 있었다. 살점이 거의 없어 몽둥이를 끈으로 매달아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모든 시체의 얼굴에 죽음의 공포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자신들의 마지막 순간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사이훙은 천천히 정원을 거닐며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 보려고 애를 썼다. 소용없었다. 살 썩는 냄새가 가족들이 거닐던 뜰의 재스민 향과 맑은 공기의 추억을 압도했다. 다채로운 색으로 치장된 날렵한 기둥들 대신 까맣게 그을은 채 뼈만 남은 폐허만이 한때 영화롭던 관가보의 멸망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곳에는 생명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산다면 아무런 도움도, 아무런 동정도 받지 못한 채 이 가련한 시체들의 썩는 냄새만을 맡아야 할 것이다.

사이훙은 정자가 있던 곳으로 갔다. 할아버지가 피리를 불던 장소였다. 독약이 뿌려진 연못에는 죽은 물고기들만이 허연 배를 하늘로 드러낸 채 둥둥 떠 있었다. 그의 가족이 살던 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사이훙은 발길을 돌려 그곳을 떠났다. 울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하늘의 뜻이었다.

 

 

사이훙은 화산에 이르는 가파른 길을 올라갔다. 바람은 잔잔하고 공기는 신선했다. 햇빛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화산은 얼마나 성스러운가! 화산의 엄숙한 고요와 전쟁터의 추악한 더러움이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사이훙은 산을 오르는 동안 시냇물에서 두번이나 몸을 씻었지만 참담하고 씁쓸한 마음까지 씻어 내기는 힘들었다. 오히려 산의 성스러움을 더럽히는 느낌이었다.

사이훙은 비감한 마음으로 산길을 올랐다. 전에는 화산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꾐에 빠져 그곳에 갔었다. 다음에는 그곳을 지긋지긋한 기숙학교처럼 여겼다. 나중에는 조금 동기를 찾긴 했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신념이었다. 사이훙의 마음속엔 언제나 의심이 가득 차 있었다. 이제야 사이훙은 엄숙함과 깨달음에 헌신할 준비를 하고 돌아올 결심을 한 것이다. 손에 피를 묻히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의지할 곳을 찾아 온 것이다. 화산만은 그를 받아줄 것 같았다.

몇몇 수련생들이 먼 발치서 사이훙을 발견하고 그를 맞기 위해 다가왔다. 사형과 사제들은 기뻐하며 사이훙과 자신들의 경험담을 나눴다. 몇몇은 자신들의 맹세 때문에 산을 내려가지 않았었다. 또 몇 명은 치료를 위해서, 혹은 싸우기 위해서 산을 떠났었다. 사이훙은 사부의 안부를 물었다. 사부의 분노가 단순히 형식적이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런 얘기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도량의 나이 든 주방장이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분도 자주 모습을 감추셨어. 가시는 곳은 말하지 않고 항상 〈일이 있네.〉라는 말씀뿐이셨지. 그리고 몇 달 동안 나타나시지도 않았네. 하지만 나는 그분이 종종 산 밖으로 나가 싸움에 참가하셨다는 걸 알고있지.」

「그걸 어떻게 아시죠?」

사이훙이 노인에게 물었다.

 

「매달 올라오는 신문에 지팡이를 든 도인에 관한 기사가 주기적으로 실렸거든. 대사님만이 그런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시지. 그 기사에 대해 대사님께 물어본 적도 있었는걸. 물론 그분은 모든 것을 부인하셨지만.」

「그 기사에 뭐라고 씌어 있던가요?」

「일본 무사들의 도전을 받기 위해 상하이(上海)와 베이징(北京)을 가셨다고 나와 있었네. 마지막 기사가 난 게 1936년이었지.」

「전 그때 여기에 있었는데 왜 절 데려가지 않았을까요?」

「자네의 고약한 성깔 때문에 자네가 직접 링에 뛰어올라가 죽게 될까 봐 그러셨던 게지.」

「아하.」

「일본놈들이 우리를 동양의 환자라고 불렀다네. 그래서 대사께서 그들의 도전을 받아들이기 위해 가신거고. 그분은 두 손가락만으로 황소처럼 커다란 스모 선수의 목을 공격해서 쓰러뜨리셨지. 베이징 시합에서는 손목과 손바닥만을 사용하셨어. 그때는 가라테 유단자 두 명, 검도 사범 한 명, 그리고 유도 사범들이 한꺼번에 공격을 했는데 말이야.」

「그렇다면 사부께서도 몸소 싸움판에 끼여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지 않으신 거네요!」

사이훙이 소리쳤다.

「분명히 그렇지. 그런데 또 다른 시기에 똑같은 도인이 쓰촨(四川)에 나타났어.」

「쓰촨에? 우리 사부님이오? 그분이 거기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같은 일이지. 그곳에 일본 군대가 점령한 찻집이 있었네. 그들의 사령관이란 작자는 가라테 4단으로 알려져 있었고. 사령관은 찻집에 있었고 대사께서 곧장 안으로 들어가서 차를 마시기 위해 점잖게 자리를 잡고 앉으셨지. 중국인이 들어왔으니 큰일 났다며 겁에 질린 채 종업원들은 차를 대접했네. 그 사령관은 자신의 기술을 뽐냈고 중국 무인을 경멸하고 얕잡아 보았지. 그때 대사께서는 찻잔을 내려놓고 가소롭다는 웃음을 날렸네. 그러자 사령관이 대사님을 공격했지. 하지만 대사님은 한 손으로 그를 던져 버렸네. 아주 큰 싸움이 벌어졌어. 물론 그 찻집을 걸어 나온 사람은 대사님뿐이었다지만.」

「나쁜 노인네 같으니라구. 그랬으면서 나한테는 그 난리를 쳤단 말이에요? 가서 앙갚음을 해야겠어요.」

사이훙은 짐짓 화가 난 듯 대꾸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사이훙. 자네가 가서 싸워 봐야 최후의 승리자는 언제나 대사님이시니까.」

노인은 낄낄거렸다.

「그건 사실이에요. 이번에도 확실히 그분이 이기셨으니까.」

사이훙은 미소지으며 그 말에 수긍했다.

 

그들은 남봉 사원에 당도했다. 수도승들이 그를 안으로 인도했다. 사이훙은 서재에 있는 사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부는 그를 무덤덤하게 내려다 보았다. 사부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깜박거림 없이 차분하게 주시하는 눈,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과 수염, 똑바른 자세가 전과 다름이 없었다. 사이훙은 사부의 말을 기다렸다.

「그래. 돌아왔느냐?」

사부가 조용히 물었다.

「그렇습니다, 사부님.」

「왔으면 다시 수련을 해야지.」

그게 다였다. 사부는 돌아온 제자를 받아들였고 부드러운 미소로 지난 일을 용서했음을 알렸다.

- 4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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