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피츠버그의 중국인
사이훙은 리와 함께 6번가 교각 위에 서 있었다. 그의 발 밑에는 한 도시의 거대한 야경을 담은 앨리게이니 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사이훙의 등뒤로 빽빽이 들어선 낡은 벽돌 건물들이 보였다. 둥근 교각의 아치 너머로 크고 작은 차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얼마전 내린 눈은 지나가는 차들의 바퀴자국과 배기 가스로 인해 쳐다보기 민망할 정도로 더러워져 있었다. 얼굴이 땡길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양 다리에 잔뜩 힘을 준 사이훙은 들고 있던 가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장갑은 끼고 있었지만 식료품이 잔뜩 든 가방은 손가락을 잘라 낼 듯 무거웠다. 그의 친구 리가 도와주려 했지만 사이훙은 그만두라고 했다. 그들이 일과 후에 함께 집으로 가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리는 이십대의 호리호리한 남자였다. 그의 중국 이름은 리 싼(李三)이었는데, 이는 그가 형제 중 세 번째라는 뜻이었다. 그는 미국에 와서도 중국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리는 목도리를 단단히 고쳐 맸다.
「미국 온 지 얼마나 되었어?」
싼이 물었다.
「이 년쯤 되지.」
사이훙이 대답했다.
「그 동안 이 나라에서 많은 경험을 했겠구나?」
사이훙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니, 난 이 나라에 전혀 적응할 수가 없어. 어떤 사람들은 일단 사귀기만 하면 잘 대해 주지만 대부분은 심술궂은 것 같아. 여기서는 모든 것이 낯설어.」
사이훙은 아직도 당황스럽고 고독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많은 말을 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건 사실이야. 여기서의 삶은 투쟁이야. 쉽게 살 수가 없어. 하지만 한번 살아 보는 거야. 나는 이제 겨우 언덕 농장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지. 삼촌이 신원을 보증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여태 행상이나 하고 다녔을 거야.」
사이훙은 오래 전부터 자신의 과거는 드러내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나도 그랬어. 위씨 아저씨 부부가 신원 보증을 해주었지. 지금은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그분들에게 진 빚을 갚고 도와주기 위해 일하고 있는 거야. 그분들은 너무 늙었고 또 아무도 돌봐 줄 사람도 없어.」
「위씨라고? 우리는 그들과 친하지 않아.」
리가 입가에 슬픈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분들은 진짜 친척이 아니야. 하지만 나도 위씨와 리씨가 철천지원수 사이라는 건 알고 있어.」
「아, 왜 두 가문은 서로 으르렁거리는 걸까? 나는 단지 우리 할아버지가 위씨들을 무척 증오하셨다는 것만 알고 있어. 아무도 그 불화의 원인이 뭔지는 모르고 있어.」
「여기는 미국이야. 여기까지 와서 그래야 할 필요는 없잖아?」
「그래. 그런 불화는 고국에서의 일일 뿐이야. 그리고 고국은 여기서 수만 리나 떨어져 있잖아?」
리가 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야기 했다.
두 사람은 황록색의 현수교 가장 높은 아치 밑에서 잠시 멈춰섰다. 리는 밤거리에서 고독에 젖은 사이훙이 침묵을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들의 거처가 있는 노스 쇼어를 향해 걸어가면서 사이훙은 리가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아까부터 고국을 생각하며 추억에 젖어 있었다.
물끄러미 강물을 바라보고 있던 사이훙은 가슴이 터져라 울고 싶어졌다. 아득히 멀리 있는 고향 하늘을 향해 북받치는 설움을 마음껏 토해 내고 싶었다. 사이훙은 화산이라는 천국에서 내쫓겨 낯선 이 미국 땅에 오게 되었다. 사이훙은 자신이 불행하고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운명을 찾아, 방랑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스승인 대사부의 지중한 명령이었다. 그 명령은 사이훙으로부터 축복과 즐거움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다.
사이훙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그의 눈앞에서 한 조각 구름 덩어리로 변했다. 사부로부터 어떤 설명이나 가르침도 받지 못하고 미국으로 추방당한지 벌써 이 년이 되었다. 그는 대사부를 처음 만나던 장면을 떠올렸다.
「이 아이의 정신은 먼지로 뒤덮인 속세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는 한 가지 임무가 주어지죠. 만약 이 아이가 자신의 과업을 완성하려고 한다면, 오랜 시간 훈련을 받아야 할 겁니다.」
사이훙을 처음 보았을 때 대사부는 이렇게 예언했었다.
그러나 사이훙은 자신이 받은 교육으로는 자신의 사명이 무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으며 미국 사회에 적응하기조차 힘들었다. 언젠가 사부는 사이훙에게, 만나는 모든 고통받는 중생들을 다 도와줘야 한다고 말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이훙은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설사 그것이 사명이라 하더라도 자신조차 먹고 살기 힘든 웨이터로서 그런 사명을 수행해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양 장군을 생각하고 있어?」
리가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사이훙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지나가는 자동차 전조등에 비친 리의 홀쭉한 얼굴에는 창백하고 어두운 모습이 수시로 교차되고 있었다. 그들이 함께 일하는 중국인 요리사 양 장군은 접시닦이인 사이훙과 리를 서로 인사시켜 주었다.
「아, 고향의 다리도 이렇게 생겼는데······. 이 다리처럼 고국의 다리도 초승달 모양이었지. 나는 다리 위를 걷는 게 참 좋았어. 특히 어릴 때는······. 어른들은 유령은 강물을 건너지 못한다고 들려줬지. 나는 그 말을 잊지 않고 있어. 하지만 그 말은 거짓말일 거야. 그렇지?」
「왜 그런 말을 해?」
리는 약간 겁에 질린 듯하면서도 동정적인 표정으로 사이훙을 쳐다보았다.
「소식 못 들었어? 양 장군이 어젯밤 자살했단 말이야. 바로 이 다리에서 뛰어내렸대. 머리가 강바닥에 부딪쳐 죽었어.」
사이훙은 아찔했다.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이훙은 멍한 눈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강바닥의 흙을 퍼내는 준설선이 미끄러지듯 지나가고 있었다. 다리는 강 수면에서 그다지 높지 않았다. 사이훙은 리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목이 메는 그 소식을 침묵 속에 받아들이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어. 어제까지 멀쩡했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세상을 뜨다니······. 거짓말 같은 일이야.」
사이훙은 앨리게이니 강과 오하이오 강이 합류하는 곳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말했다.
사이훙은 군시절을 못 잊어하던 양 장군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마치 전투를 지휘하는 장군처럼 식당을 왔다갔다하곤 했다.
잠시 묵상에 잠겨 있던 사이훙이 입을 열었다.
「그는 너무 많은 걸 잃었어. 그는 국민당 정부에 신뢰와 직위를 빼앗겼지. 아내마저 잃은 그는 오로지 도박과 아들에게 미쳐 버렸지. 한 번은 그가 이런 말을 했어.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기가 있다고 했어. 자신이 꼭 해야 될 사명 같은 것 말이지. 그에게 있어선 가족이 바로 사명이었어. 국가와 운명이 그를 외면할 때도 가족만은 그에게 이 세상을 계속 살아야 할 가치를 준다고 했지.」
「그는 아들 때문에 죽은 거야.」
리는 사이훙이 말을 마치자 이렇게 말해 주었다. 사이훙은 스무살 때 찍었다는 양 장군의 아들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의 아들은 결핵에 걸려 있었어. 병원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되었지. 양씨의 소원은 아들과 결합하는 것뿐이었어. 그래서 몇 년을 계속해서 열심히 돈을 벌었지만 그 돈으로 병원비를 댈 수는 없었어.」
「왜 내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마치 부자처럼 말하는군. 그는 우리들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어야 했어. 그리고 그는 자존심이 강해서 누구에게도 손을 벌리지 않았어.」
리는 슬픈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사이훙은 궁금한 듯 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물었다.
「도박에 손을 댔지.」
리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맙소사!」
사이훙은 이제야 뭔가 알 것 같았다.
「도박······. 그는 지난밤에도 밤새도록 도박을 했어. 가진 걸 거의 다 잃게 되자 남은 돈을 몽땅 걸고 마지막 한 판에 생명을 건거야. 하지만 그 판에서도 지고 말았어. 절망에 빠진 양씨는 딜러에게 돈을 꿔달라고 사정했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도박꾼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열해. 결국 양씨는 오늘 아침 이 강에서 시체로 발견된 거야. 친척들이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어.」
「조금 일찍 알았으면······. 돈만 있었다면 두 사람 모두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사이훙은 비통한 어조로 말했다.
「사람들은 꼭 그렇게만은 생각하지 않아.」
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두 사람은 철길 지하도를 지나 이스트 오하이오가 귀퉁이에 있는 샌드스키가를 건넜다. 한쪽 모퉁이에는 병사들의 기념비가 있었고 대리석 밑에는 꽃다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대부분의 꽃다발은 조화였고 그 옆에는 너덜너덜해진 성조기가 깔려 있었다. 사이훙은 마치 그곳이 중국의 사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곳은 찾을 수 없었다. 사이훙은 이스트 오하이오가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은 동네 사람들이 쇼핑갈 때 이용하는 길이었다. 1880년대 지어진 벽돌 건물 사이로 난 그 길은 상당히 어두웠다. 건물들도 빅토리아 시대의 고딕 양식으로 지어져 비좁고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낡고 초라한 건물 정면을 차양으로 덮어 버린 건물들은 어딘가 축 늘어진 느낌을 주었다. 대부분의 건물은 화려한 로마네스크풍의 장식물로 치장되어 있었는데 그것도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옛날의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까부터 양씨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웠던 사이훙은 어느새 샌드스키 공원에 다다랐다. 두 블록 정도 크기의 샌드스키 공원에는 군데군데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햇빛이 좋은 날에는 종종 양씨와 함께 여기에 왔었다. 공원에는 벤치와 잔디, 나무들뿐이었지만 두 사람은 요란한 소음으로 가득 찬 도로를 벗어난 이곳에서 마음의 평정을 되찾곤 했었다.
중심가에서 이 공원을 거쳐 가면 가장 빨리 집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사이훙은 아직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리가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사이훙, 이야기할 것이 있는데······.」
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이훙에게 말을 건넸다.
「해봐.」
「매일 밤 이 공원에서부터 나를 쫓아오는 놈들이 있어. 놈들은 폭력을 휘둘러, 나는 막 집으로 달려와서는 현관문을 걸어잠그곤 해. 놈들은 우리 집 창문을 페인트로 칠해 놓고는 내 아내까지 위협하고 있어.」
「진정해. 나는 아직 아무도 보지 못했어. 두 사람이 있으면 오지 못할 거야.」
사이훙은 불안에 떠는 리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그랬으면 좋으련만······.」
리는 여전히 불안에 떨며 담배를 꺼내 피웠다.
벌거벗은 키 큰 나무들이 분위기를 더 음산하게 만들었다. 자동차들이 분주히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공원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을 것이다.
리가 염려한 대로 세 명의 건달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이훙은 지나가는 차의 불빛에 비친 놈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한 놈은 큰 키에 우람한 체구를 갖고 있었고, 가운데 서 있는 놈은 큰 키에다 가슴과 어깨 주변에 두툼한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다. 세 번째 놈은 몸은 호리호리한 편이었으나 셋 중에서 가장 잔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원래 사이훙의 싸움 방식은 장황한 말이나 주먹 교환 이전에 상대방이 자기보다 약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야, 클링크(동전을 뜻하는 미국의 속어)! 친구를 데리고 왔어?」
키 큰 놈이 머리를 삐딱하게 세우고 빈정거리며 말을 걸어 왔다.
사이훙은 가만히 있었다. 그는 리가 놈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놈들의 위협적인 태도만으로도 리는 훨씬 겁을 먹는 것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클링크? 고양이가 혀를 물어 가기라도 한 거야?」
뚱뚱한 놈이 거들었다.
「저 멍청한 놈이 네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애. 쳉쳉쳉딩동아라고 해봐.」
키 큰 놈의 말에 그들은 한바탕 웃어댔다.
「이리 와, 중국 놈아!」
키 큰 놈이 리의 멱살을 잡으면서 말했다.
「그만두지 못해!」
사이훙이 쇼핑백을 내려놓으면서 소릴 질렀다.
「넌 가만있어, 똥구멍 같은 새끼야! 넌 다음 차례야.」
「무슨 말인지 잘 안 들려.」
사이훙은 이렇게 내뱉으며 키 큰 놈 앞으로 다가섰다. 사이훙은 원래 상대의 코앞에 바짝 맞서기를 좋아했다.
「예수 같은 놈! 이 머저리 같은 녀석이 일찍 황천에 가보고 싶은 게로군.」
키 큰 놈은 리를 잡았던 손을 놓고는 사이훙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쳤다. 사이훙은 재빨리 놈의 손을 쳐서 피하고는 손목으로 상대방의 어깨를 내리쳤다. 웬만한 무술인이면 한 번의 접촉으로도 상대편의 기량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꽤 대담한데?」
놈이 소리쳤다.
사이훙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이훙의 얼굴은 뒤쪽도 경계하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 표정은 변하고 있었다. 마치 먹이를 본 호랑이 같았다.
「야, 이 똥구멍 같은 자식아, 꿀 먹었냐? 네 얼간이 같은 얼굴을 갈아 줄 테다.」
키 큰 놈은 계속 을러댔다.
「그렇게는 안 될걸.」
사이훙의 두 눈은 이미 공격의 열기로 빛나고 있었다.
놈의 움직임을 알아챈 순간 사이훙은 오른손으로 놈의 배를 세차게 가격했다. 일격을 당한 놈은 신음소리와 함께 몸을 구부리고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사이훙은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놈의 목을 다시 힘차게 내리쳤다. 놈은 비틀거리며 몇 발자국 걸어가다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두 번째 뚱보 놈이 공격을 해왔다. 사이훙은 쓰러진 놈을 일으켜 세워 방패로 사용했다. 사이훙은 방패가 된 첫번째 놈이 뚱보의 주먹과 발길질에 무수히 당하게 한 뒤에 바닥에 던져 버렸다.
사이훙은 무릎으로 뚱보의 사타구니를 올려찬 다음 가슴에 주먹을 날려 순식간에 또 한 놈을 처치해 버렸다. 사이훙의 온몸에서 전율과 넘치는 힘이 물결쳐 나왔다. 두 놈을 처리하고 잠시 숨을 돌리는 동안 세 번째 놈이 주먹을 휘두르며 공격해 왔다. 사이훙은 놈의 정면으로 다가서면서 팔꿈치로 공격을 막아내는 동시에 갈빗대를 힘차게 가격하였다. 사이훙은 바로 뒤돌아서서 팔꿈치를 휘둘러 재차 공격을 가하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은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곧 몸을 일으켜 세운 놈은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죽이고 말 거야!」
「잘 들어라. 나는 네가 일어설 때까지 그냥 놔두었는데, 이것은 오늘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러나 두번 다시 공격해 올 때는 황천길로 보내 주겠어.」
사이훙은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이렇게 말했다.
「망할 놈의 자식!」
뚱뚱한 놈은 헤딩으로 재차 공격해 왔다. 그러나 옆걸음으로 살짝 피한 사이훙은 팔꿈치로 놈의 목을 가격한 다음 얼어붙은 시멘트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사이훙이 발길질을 힘차게 휘두르자 갈빗대 부러지는 소리가 뚝 하며 들려 왔다.
이때 기절했다 깨어난 키 큰 놈이 막대기를 휘두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사이훙은 슬쩍 방향을 바꾸며 하박(下膊)을 들어 놈의 공격을 막은 다음 무릎으로 놈의 급소와 얼굴에 일격을 가하였다. 두번의 연속 공격에 이빨이 부러진 놈은 붉은 피를 낭자하게 쏟아댔다. 숨을 헐떡거리며 신음소리를 내면서도 놈은 결사적으로 사이훙을 끌어안으려고 하였다. 사이훙은 가볍게 이를 피하면서 놈이 시멘트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열 번 이상 쉬지 않고 주먹세례를 퍼부었다. 그는 마치 무의식 상태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사이훙의 손놀림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숙련되고 강한 파괴력을 지닌 그의 동작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다. 놈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서야 사이훙은 숨을 돌렸으며 긴장으로 굳었던 턱의 근육도 풀어졌다. 사이훙의 옷 소매는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 사이훙은 갑자기 머리가 무거워졌다. 10년 전 중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사이훙은 놈을 잘못 구워진 도자기처럼 이 세상에서 제거해 버렸을 것이다.
사이훙은 비교적 어린 나이 때부터 결투를 벌여 왔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의 영혼에 그만한 응보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사이훙은 이에 괘념치 않았다. 그는 여자와 아이들과 조국을 위해서 기꺼이 전투에 지원했으며 그로 인한 인과응보는 달게 받겠다는 마음 자세가 되어 있었다.
무술 결투를 벌일 때는 두 사람 사이에 죽음도 인정하겠다는 묵시적인 합의가 따른다. 그러한 결투에는 고상한 기품과 명예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의 괴팍한 행동과 잔인함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이훙은 그들을 경멸했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아무런 영광도 주지 못했다. 사이훙은 놈을 길바닥에 던져 버리고는 창백한 얼굴로 떨고 있는 리를 쳐다보았다.
「오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는 거야, 알겠지?」
사이훙이 말했다.
「그래, 알았어. 나는 오늘이 마지막인 줄 알았어. 네가 그렇게 잘 싸울 줄은 미처 몰랐어.」
리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잊어버려. 자기 전에 하는 약간의 운동은 건강에 아주 좋지.」
사이훙은 당당하게 말했다.
리를 집까지 바래다 주고 사이훙은 세 블록을 더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싸움의 열기는 다 식었지만 사이훙은 여전히 조금 전의 결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아까의 그 결투는 어떤 영웅적인 명예나 원칙도 없는 것이었다. 사이훙은 적의 마음을 돌려놓지도 못했으며 누구를 치료해 주지도 않았다. 오로지 야만적인 자기 주장의 확인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싸움에 대한 후회보다 더 사이훙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경전과 사부, 대학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 여러 문제에 닥칠 때마다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화산에 있을 때 사이훙은 스스로 무슨 결정을 내린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또 그것이 편하고 좋았다. 사부들이 내린 결정을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그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을 떠난 후부터는 이전에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는 모든 문제에 대해 스스로의 힘으로 결정을 짓고 판단을 내려야 했다.
사이훙은 식료품을 사러 차이나차운에 가는 길에 어제 그 샌드스키 공원에 들러 보았다. 어젯밤에 싸웠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두어 명의 부인이 따뜻하게 차려 입은 어린애들을 공원 안에 있는 시민문화회관까지 바래다 주고는 곧장 다리 쪽으로 가버렸다. 상업지역을 지나 남쪽으로 걸어가던 사이훙은 작은 직사각형 블록의 남쪽과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건물들 앞에 멈춰섰다. 3번가를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건물은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그랜트 빌딩에 가가 죽은 모습이었다. 빌딩 몇 개가 4번가를 끼고 우뚝 서 있었고 모농가헬라 강은 V자 고속도로 진입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유일한 중국식 건물은 평화화합노동기구 본부가 있는 3층 건물이었는데 중국 광둥성의 건축 양식을 본따 기와지붕과 나무로 만든 발코니를 가지고 있었다. 1층에는 〈차이나타운의 선술집 - 일류요리〉라는 간판을 붙인 중국 레스토랑이 있었다.
거기서 두어 집을 지나면 19세기에 지어진 4층짜리 벽돌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에는 리 부인이 가게와 독신 남성을 위한 주택이 딸려 있었다. 리 부인의 가게인 〈새 지평선〉은 주로 중국에서 건너온 건어물이나 식용 식물, 절인 음식 등을 취급하고 있었다. 리 부인은 뉴욕을 통해 중국 야채를 수입했는데, 맛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입맛을 만족시켜 주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그것들은 운송용 상자에 담긴 그대로 점포에 진열되어 있었다. 사이훙은 철제 선반에서 갈색 종이가방 두 개를 집어 들고 완두콩과 양배추를 담기 시작했다.
점포 입구에는 계산대가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구와 희끗희끗한 머리에 안경을 낀 리씨가 계산대에 앉아 있었다. 항상 추상적인 생각에 몰두해 있는 그는 언제나 느릿느릿 움직였다. 학자였던 그는 여전히 사람들과 고전에 대해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의사가 된 아들, 시집간 딸을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그는 학교에 다니는 애들에 대해서도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늘어놓곤 했다. 과거에 매달려 있는 그는 학자에게 장사라는 직업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좀 낭만적인 관념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계산을 정확히 하지 못했다. 사이훙이 점포 안에 들어온 것을 본 리 부인은 약삭빠르게 다가와 사이훙의 시중을 들었다. 그녀는 남편이 할까 봐 항상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리 부인은 분명히 차이나타운의 여왕이었다. 피부는 희었지만 좀 뚱뚱한 편인 그 여자가 미소를 지으면 금빛이 새어 나왔다. 고의로 그랬는지, 충치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모든 이는 순금으로 되어 있었다. 번쩍이는 금니는 진홍색의 입술 화장에 더욱 돋보였다. 리 부인의 머리는 언제나 물결치는 퍼머넌트를 하고 있었다. 그 여자의 친구들은 일주일이 멀다하고 찾아와서는 온갖 칭찬과 아양을 떨었으며 건강 문제까지 조언을 해주곤 하였다. 그러나 리 부인은 언제나 자신이 뚱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녀가 좀 뚱뚱하게 보이는 것은 행운과 재복의 상징이라고 추켜세워 주었다. 리 부인은 안주인에다 사장이었으며 어머니이자 가족의 구세주였다. 물론 그녀는 차이나타운 최고의 수다쟁이였다.
피츠버그에 신의 계시를 받는 지성소가 있을 리 만무했으나 리 부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결혼, 출산, 이런저런 세상사, 죽음, 숨겨진 비밀 등 그 여자의 입에서 다뤄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가게 의자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노파들과 쉴새 없이 떠들어댔다. 겨울이 되면 노파들은 난로 옆에서 몸을 데웠으며 여름에는 독수리 날개로 만든 부채를 부쳐대며 더위를 식혔다. 그들의 이야기는 대개 교포사회에서 일어난 화젯거리에 끊임없이 새로운 주석을 다는 것이었다.
물건을 고르면서 사이훙은 리 부인과 그 노파들이 하고 있는 얘기들을 주워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본국에서 어머니를 강간하고 추방당해 차이나타운에서 세탁업을 하고 있는 위씨, 양팔을 포개고 의자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노학자 유씨, 최근 미 정부가 샌드시키가의 아편소국을 급습했다는 이야기, 많은 중국인 젊은이들이 금발처녀들과 동반도주하여 결혼을 한다는 이야기.
「불쌍한 중국인 학생이 같은 대학에 다니는 백인 급우들의 손에 익사했다는 소식 들었어?」
한 여인이 동료에게 하는 소리가 사이훙의 귀에 들려 왔다.
「물론 들었지. 죽은 애는 리오의 아들이야. 정말 끔찍한 사건이지!」
한 노파가 대답했다.
「그 아이는 공업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고 있던 수재였어. 다른 애들이 질투심을 가지게 된 건 당연한 일이야.」
리 부인은 사이훙이 들고 온 야채를 저울에 달다가 말고 이렇게 물었다.
「누가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
「미국 경찰은 백인들을 피의자로 하는 중국인의 신고는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잠자코 있던 사이훙이 말했다.
「그 말이 옳군, 황소 보이!」
리 부인은 교포사회에서 근육형의 사이훙에게 붙여준 별명을 부르며 대답했다.
「하지만 너무 슬픈 일이야. 그 학생은 앞길이 유망했는데······. 여러 회사에서 그를 졸업하자마자 데려가려 했어. 그는 전문 기술인이 될 애였어.」
「하지만 그는 이미 죽었는걸.」
한 노파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리석은 녀석이지. 백인 애들이 야외놀이에 초대했을 때 흥분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 헤엄도 못 치는 녀석이 보트 놀이에 끼다니, 바보 같은 놈이지.」
리 부인은 다시 저울을 재며 말했다.
「슬픈 일이야, 너무너무 슬픈 일이야!」
그 여자는 사이훙이 산 물건을 모두 종이 가방에 넣은 다음 사이훙을 쳐다보았다.
「넌 참 믿음직스럽게 보여.」
「난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사이훙이 대답했다.
「그래? 우리는 이미 다 들어서 알고 있단다.」
리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네가 접시닦이 리 싼을 구해주었다는 걸 우린 벌써 다 알고 있어.」
리 부인은 존경스러운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제발 그 일에 대해선 말하지 말아요!」
사이훙은 얼굴을 붉히며 쏘아붙였다.
「원, 겸손하기도 하지!」
리 부인은 사이훙의 팔을 찰싹 때리며 아양을 떨었다. 사이훙은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건달패들을 때려눕히는 것과 수다스러운 리 부인을 상대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사이훙은 점포를 나섰다. 사람들은 누구나 무술가를 영웅으로 생각했다. 어린애들은 무술가를 흉내내고 싶어했으며 나이 먹은 사람들은 무술가가 대의명분을 위해 싸우는 기사인 줄 착각했다. 그러나 무술가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이훙은 그동안 많은 상처를 입었다. 한 방 얻어맞을 때는 몸이 뒤틀리는 고통을 느꼈으며 한 번 결투를 하고 나면 영혼까지 피곤해지는 걸 느꼈다. 공원에서의 한바탕 결투가 대수롭지 않은 싸움이 되기까지 그가 치른 대가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6번가 다리를 향해 걷고 있었다. 저녁이 다 되어서 쌀쌀한 냉기가 감돌았다. 먼지와 석탄가루, 공장의 굴뚝에서 나는 연기와 자동차 배기 가스로 인하여 대기는 언제나 회색빛을 띠고 있었으며 노스 쇼어에 있는 하인즈 57 공장에서 나오는 케첩 냄새까지 대기오염에 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선로에 남아 있는 눈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지만 땅 위에 내린 눈은 이미 다 녹아 지저분할 뿐이었다. 녹슨 가로등에서는 아직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사이훙은 지방법원 벽의 청동판에 새겨져 있는 〈충성의 맹세〉를 기울어 가는 석양의 도움을 받아 읽고 있었다. 미헌법, 독립선언문, 충성의 맹세, 남북전쟁의 역사 등은 사이훙이 미국으로 건너올 때 그에게 영향을 준 것들이었다. 그는 해변가까지 뻗어 있는 울창한 수풀과 하는 높이 치솟은 웅장한 산들을 그려 보곤 했다. 최신 복장과 함께 식민지 시대의 의상을 입고 있는 다양한 종족의 원주민들의 모습도 그려 보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사이훙이 보았던 영화에서 받은 이미지에 불과했다. (수세기 동안 중국에서는 의상의 변화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으며 일부 소수 민족들은 그들의 전통 복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사이훙은 〈충성의 맹세〉 마지막 줄을 읽고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공원에서의 폭행 사건과 한 중국인 학생의 익사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이훙은 자신이 미국에 온 것이 잘못된 결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제철공장의 소음과 배기가스가 진동하고,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 옆을 걸으며, 아연 파이프와 전선이 이리저리 얽힌 사각형 건물 속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이 거대하고 냉혹한 도시에서는 비취색 비단 옷을 입고 다닐 공간도, 은은한 꾸지뽕나무에 대해 쓴 책도, 붓글씨가 적힌 부채도, 잘생긴 준마(俊馬)도, 대나무로 만든 자줏빛 피리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가슴속에서, 집에 놓아둔 트렁크 속에서나 만날 수 있었고, 몇몇 친지들하고만 나눌 수 있는 기쁨에 불과했다.
이스트 오하이오 거리를 걸어 사이훙은 어느새 로마네스크풍의 기둥과 아치를 세워 놓은 아파트 정문에 이르렀다. 계단을 올라가 이 층의 조그만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비닐로 칸을 막은 방 두 개와 식당차 모양의 간이 식당, 그리고 탁자와 등받이 없는 의자 몇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탁자 귀퉁이와 의자 다리는 크롬 도금이 벗겨져 여러 군데 비닐 테이프로 땜질을 해놓았다. 오래된 시계는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사이훙의 집에는 손님이 없었다.
50대의 땅딸막한 사내가 사이훙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융통성 있고 나긋나긋하다는 말은 펭 아저씨에게는 어울리는 표현이 아니었다. 그는 움직이는 쇠망치 같은 사람이었다. 굵고 뻣뻣한 목은 그의 얼굴과 대머리를 잘 지탱해 주고 있었다. 그는 반소매의 하얀 주방옷을 입고 있었는데 뭉툭한 팔뚝과 굵은 손가락에는 무수한 칼자국과 화상이 나 있었다.
펭 아저씨는 사이훙의 친척은 아니었다. 아저씨란 단순히 나이 많은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사이훙은 〈새 지평선〉의 수다쟁이 리 부인과 같이 있으면 어쩐지 불안했지만, 투박한 이 남자와는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권투선수였던 펭 아저씨는 지금 레스토랑의 주인이었다.
「이봐, 황소 보이! 날이 아주 춥지?」
펭 아저씨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네, 상당히 추워요.」
사이훙은 이렇게 사소한 것들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중국인의 인사법이라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어서 들어와서 외투를 벗어.」
펭 아저씨는 부엌으로 다시 들어가며 말했다. 사이훙의 귀에 뭔가 지글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사이훙은 사슴뿔같이 생긴 금속제 옷걸이에 외투를 벗어 걸고는 그 위에 모자를 얹었다.
「노 풍은 항상 늦는단 말이야. 그놈은 제때 오는 적이 없어. 그건 그렇고, 지금 맛있는 중국 요리를 만드는 중이야. 여길 보라구. 아, 그리고 여기 야채 좀 썰어 줘.」
펭 아저씨의 부탁대로 사이훙은 부억칼을 들고 통나무를 잘라 만든 도마 옆에 앉아 당근과 셀러리, 양배추, 근대 등을 썰기 시작했다. 펭 아저씨는 불길을 더욱 세게 높여 가며 요리를 계속하였다. 펭 아저씨는 주걱을 쥐고 철판 위에서 빠르게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뜨거운 기름 위에 물방울을 떨어뜨리자 팬 속의 야채는 폭죽 터지는 소리를 내면서 진동하였다. 기름과 포도주, 간장은 그가 즐겨 쓰는 조미료였다. 이윽고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훌륭한 음식이 요리되어 들어왔다.
약 20분 동안 두 사람은 검정콩과 같이 삶은 메기 요리와 바삭바삭한 통닭 튀김, 야채 튀김, 그리고 돼지고기와 밥을 맛있게 먹었다. 사이훙은 다른 건 다 맛있게 먹었지만 돼지고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펭 아저씨는 언제나 여기에 대해 설교를 늘어놓았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야!」
구수한 음식을 가득 채운 사이훙은 어깨만 으쓱해 보일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이훙이 도인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이훙은 자신이 구속된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를 누구에게도 밝힌 적이 없었다.
펭 아저씨는 조니 워커를 잔에 가득 따라 붓고는 사이훙에게도 잔을 권했다.
「저는 술을 못 합니다.」
사이훙은 멋적은 듯이 말했다.
「이런 애송이 같은 놈!」
펭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좋아. 그럼 나하고 노 풍이 대신 마셔 주지.」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건 틀림없이 노 풍이 오는 소리일 거야, 밉살스러운 놈!」
펭의 얼굴은 술기운으로 불그스레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내가 오기도 전에 먼저 시작하는 거야?」
현관 쪽에서 노 풍 아저씨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려 왔다.
「넌 영원히 우리와 같이 먹지 못할 놈이야!」
펭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약간 섞여 있었다.
「허, 그 말은 내가 즐겨 쓰는 말인데.」
노 풍의 목소리와 함께 자전거를 뒤로 제쳐 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풍 아저씨의 모습이 현관에 나타났다. 머리가 하얗게 센 풍 아저씨는 6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힘이 흘러 넘쳤으며, 등은 전혀 굽지 않았다. 선원이었던 풍 아저씨는 언제나 차렷자세를 취하듯 우람한 팔을 양옆에 꼭 붙이고 다녔다. 거의 평생을 바다에서 보낸 풍 아저씨는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해결하는 해결사였다. 바로 이 점이 그를 피츠버그의 중국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로 만들어 주었다. 중국으로 박스나 트렁크를 보낼 때에도 그것들을 마닐라 로프로 묶어주는 사람은 언제나 풍 아저씨였다. 사이훙도 풍 아저씨가 스티머 트렁크를 등에 지고 운반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풍 아저씨가 로프와 지렛대, 그리고 완력으로 운반하지 못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
가난한 풍 아저씨는 언제나 똑같은 옷만 입고 다녔다. 그가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사시사철 입고 다니는 순모 외투에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주머니 속에는 종이쪽지, 실타래, 어쩌다가 동전 한 닢 정도가 들어 있었는데, 아무것도 없는 때가 더 많았다.
풍 아저씨는 식탁으로 와서 외투를 뒤로 젖히고 앉았다. 근육질의 탄탄한 몸이 눈에 들어왔다. 코끼리 두개골만한 머리를 가진 그는 햇볕에 그은 갈색의 단단한 피부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의 입은 그런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자그마했으며 넓은 얼굴에 가느다란 금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냐?」
펭 아저씨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손을 들고 있었어.」
풍이 영어로 대답했다.
「손을 들고 뭘 했는데요?」
사이훙이 궁금한 듯 끼여들었다.
「뭘 한 게 아니라 손을 들고 있어야만 했어.」
「강도를 만났다는 말이에요?」
사이훙은 호기심이 생겨 다시 한번 물었다.
「그래, 맞았어!」
풍 아저씨는 펭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내며 흥분한 듯 큰소리로 소리쳤다.
「어쨌든 나는 늙었고 황인종이란 말이야. 미국 놈들은 내가 손쉬운 사냥감이라고 생각한 거야.」
사이훙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듣고 있었다. 그는 풍 아저씨가 부둣가 싸움판의 베테랑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좀 떠벌리기 좋아하는 성격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사이훙은 자상하게 물었다.
「놈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나를 막아 세우고는 돈을 요구했지. 칼을 들이대면서 말이야.」
「바보 같은 녀석.」
펭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나는 양팔을 벌리고 서 있었지. 그 멍청한 놈은 내 호주머니를 모조리 뒤지는 거야. 나도 몇 개인지 모르는 그 많은 주머니를 죄다 뒤지더라고.」
풍 아저씨는 두 사람에게 주머니 개수를 머릿속으로 헤아릴 시간을 주려는 듯 잠시 뜸을 들였다.
「그놈은 주머니를 다 뒤지고 나더니 멍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더군. 그 순간 내가 그놈을 쳐서 때려눕혔지.」
그는 대장간의 모루만한 주먹을 내보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펭 아저씨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치과의사 돈 좀 벌게 해줬지.」
풍 아저씨는 주방으로 걸어가며 얘기를 마무리지었다.
사이훙과 펭 아저씨는 풍이 버너를 켜는 것을 보고 다시 식사를 계속했다. 풍은 먹는 습관이 좀 유별났다. 그는 중국에서는 좀처럼 먹지 않는 티본 스테이크를 좋아했다. 풍은 연기가 나도록 철판을 달군 다음 재빨리 기름을 붓고는 생고기를 덩어리째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열을 최대한으로 가하여 고기를 살짝 익힌 다음 재빨리 뒤집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풍 아저씨는 지글거리는 스테이크와 밥, 야채를 들고 식탁에 앉았다. 그는 케첩과 스테이크 소스를 친 다음 칼과 포크로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뜨거운 피가 접시 위에 흘러내려 밥에 스며들었다. 고기가 덜 익혀졌던 것이다. 겉은 익었지만 속은 날고기였다.
「야만인 같으니라구.」
펭이 혐오스러운 듯 쏘아붙였다.
「위스키나 따라, 구두쇠 영감탱이야!」
펭은 풍의 잔에 술을 따른 다음 자기 잔에도 술을 채웠다.
「늦게 와서 못 마신 것까지 다 마실 거야.」
풍이 욕심을 내며 잔을 들이켰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황소 보이 몫까지 먹을 수 있을 테니까.」
풍은 정말 식성 좋게 스테이크를 먹어대고 있었다.
「아! 불고기 때문에라도 포산에 돌아가고 싶구나. 오, 정말 포산의 음식 맛이란 기가 차지. 황소 보이야, 넌 그런 맛있는 음식은 여태 먹어 보지 못했을 거야.」
풍 아저씨가 고국이 그리운 듯 말했다.
펭 아저씨도 풍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사이훙은 백단향으로 꾸민 큰 방에서 셀 수 없이 자주 열렸던 각종 잔치를 생각해 보았다. 그래, 광둥성의 음식은 맛이 유별나게 좋았지. 사이훙은 그 말을 인정해 주었다. 건륭제(乾隆帝)는 평민으로 변장까지 하고 와서 남쪽 요리를 즐기지 않았다던가?
「맞았어!」
풍 아저씨는 사이훙이 황제의 이름까지 들먹이자 더욱 열광적으로 맞장구쳤다.
「그 황제는 멋쟁이였어. 훌륭한 무사이기도 했고 말이야!」
「그러나 좀 무자비했어. 그는 소림사를 불태웠잖아!」
펭이 풍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달마대사를 통해 선종 사상이 처음 전파된 곳이자 후에 중국 무술의 본산이 된 소림사를 말하는 것이다. 소림사는 18세기 모반세력의 실질적 중심지가 되었다. 건륭제는 소림사에 군대를 보내어 많은 우국지사들을 잡아 죽였다. 그 시대에는 쟁쟁한 무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유난히 절과 시(詩)가 많았던 중국, 한 사람, 한 장수의 손에서 수백 년의 역사가 탄생과 죽음을 맞이했던 중국. 사이훙의 눈에는 기라성 같은 무림의 고수들이 하나 둘 스쳐 지나갔다. 여승무사였던 워 메이와 백미 도인이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영웅이었다. 황궁에서도 귀하게 다루었던 국보급 도자기와 그림, 연회용 최고급 접시 등은 대개 그 당시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사이훙은 두 노인이 술을 마시는 동안 온갖 상념에 젖어 들었다. 희귀한 구경거리와 아름다움을 지녔던 중국은 어디에 있는가? 그의 스승과 절, 동료들은 어디에 있는가? 역사적인 사연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명소들을 방랑하며 자신이 가고자 했던 삶은 어디에 있는가? 중국 곳곳에는 신화와 설화를 간직한 곳이 수없이 많았다. 우정과 유명한 결투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 신이 지상에 강림했던 장소, 두 연인이 사랑을 나눈 애틋한 사연이 묻혀 있는 곳, 천 년 묵은 용이 영겁의 세월을 잠자며 승천의 때를 기다렸던 강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2백 년도 채 안되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업적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젖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 사이훙은 와 있는 것이다. 모든 지방마다 특색 있는 요리 솜씨를 자랑하는 대신 어느 곳이나 핫도그와 스테이크, 프라이드 치킨을 먹는 나라, 자연의 멋을 즐길 수 있는 고요함 대신에 하늘 높이 솟은 빌딩과 기차, 비행기, 자동차의 홍수를 자랑하는 나라 미국, 사이훙은 이런 미국에서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펭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늙었어. 그러나 갈 수만 있으면 고국으로 돌아가야겠어.」
「난 안 가. 난 중국에 가면 여기서보다 더 가난하게 될 거야.」
풍 아저씨는 단호하게 말했다.
「사이훙, 너는 어떡할거야?」
펭 아저씨가 물었다.
「난 아직 생각 안 해봤어요.」
어떻게 그들에게 자신은 완성해야 할 과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너무나 먼 나라 이야기 같은 스승의 명령을 어떻게 그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가?
「왜 너는 고국에 돌아가서 결혼할 생각이 없는 거야?」
「결혼요? 난 그런 거하곤 거리가 멀어요.」
「모든 사람들이 그런 걸 하며 살고 있는데도?」
펭은 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그야 그렇지만 두 분도 독신이잖아요?」
사이훙이 두 사람의 아픈 곳을 찌르며 되물었다.
「그건 아무렇지도 않아. 우린 너무 늙었고, 너무 가난해. 지지리도 못생겼고. 우린 혼자 먹고 살 정도만 벌면 그것으로 만족이야. 하지만 부자가 되면 사정이 다르지. 아무리 못생긴 남자라도 돈만 있으면 신부를 돈으로 살 수가 있단 말이야. 놈들은 우릴 보고 이렇게 말하지.」
풍 아저씨는 영어로 말을 바꾸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넌 끝났어.」
세 사람은 한바탕 큰소리로 웃어댔다.
「그러니 너는 우리처럼 되지 말고 열심히 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야 해.」
펭은 사이훙을 그윽한 눈길로 쳐다보며 말했다.
「글쎄, 내가 미국을 돌아보며 느낀 건 좀 다른데요.」
사이훙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르다구? 뭐가?」
펭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나는 미국 헌법과 독립선언서를 읽은 적이 있어요. 나는 미국이 훌륭한 나라라고 생각해요.」
「너는 멍청한 책벌레에다 공상주의자라구!」
펭은 저주에 찬 독설을 퍼부었다.
풍 아저씨는 술잔을 쭉 들이켜고 나서 한마디 거들었다.
「난 말이야, 네 머리통에서 그 따위 생각들을 다 끄집어내었으면 좋겠어!」
「이봐, 넌 취했어!」
펭은 풍에게 경고했다.
「난 취하지 않았어. 그리고 취했다고 치자. 그게 내가 하는 말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야? 난 옳은 말을 하고 있는 거야.」
풍은 대들듯이 말했다.
「황소 보이는 감수성이 뛰어난데다 이상주의자라구. 왜 그걸 망치려 들어?」
펭이 대꾸했다.
「사이훙은 공부는 많이 한 것 같지만, 나는 그에게 산 교육을 시키고 있는 거라구.」
풍은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옷이나 입어.」
펭은 톡 쏘아붙이듯 내뱉었다.
「난 그릇을 씻으러 가야겠어.」
풍 아저씨는 술의 향기를 음미하려는 듯 몸을 식탁으로 내밀면서 소리쳤다.
「내가 한마디 하겠는데 말이야, 젊은 친구, 백인들이 내게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풍 아저씨의 말에는 강한 힘이 들어 있었다.
「중국 놈 열명 있어도 깜둥이 하나만 못 하다는 거야! 그놈들이 흑인을 어떻게 대하는지 너도 잘 알 거야. 더 이상 말하지 않겠어. 혼자 잘 생각해 봐!」
사이훙은 웃으며 풍 아저씨의 술잔에 위스키를 따라 주었다. 술좌석은 언제나 끝이 안 좋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면서 사이훙은 그릇들을 집어 펭에게 건네주었다. 밤 공기는 얼어붙을 듯이 차가웠다. 사이훙은 아직은 풍의 말을 웃어 넘길 만큼 젊었다.
사이훙의 집은 펭 아저씨가 사는 포랜드가로부터 두어 블록 떨어져 있었다. 그는 위씨 아저씨 부부와 복식 아파트에서 같이 살고 있었는데 그 동쪽의 반을 사이훙이 쓰고 있었다. 2층으로 된 복식 아파트는 가운데가 조금 축 처져 있었다. 남북 전쟁 직후에 지어진 이 건물은 지을 때 외벽에 노란색과 녹색 페인트를 칠한 후로는 한 번도 다시 칠을 하지 않았다. 몇 단의 계단을 걸어 올라간 사이훙은 거의 있으나마나한 잠금 장치에 열쇠를 넣어 돌렸다. 어두운 마루로부터 흘러 나온 따뜻한 공기가 그의 몸 전체를 감싸 주었다. 사이훙은 은퇴한 노인들과 같이 사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늘 집을 안락한 온도로 유지시켜 주었다.
사이훙은 외투를 벗어 걸고 소리나지 않게 마루를 걸어갔다. 아저씨네는 아래층 침실을 사용했다. 위층에는 관음보살을 모신 작은 사당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 이 집은 방 하나 높이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나중에 주위 건축물과의 조화를 무시한 채 여러번에 걸쳐 증축한 것이다.
사이훙은 부엌으로 걸어갔다. 자상하게도 아주머니는 식탁 램프를 켜두었다. 사이훙은 조금 열려진 방문 사이로 흘러 나온 노란 불빛을 따라 고개를 들이밀고 방 안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두 노인은 언제나 활동의 종류와 전기료와의 관계에 대해 확신에 찬 논쟁을 벌이곤 했다. 사이훙은 그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몇 번에 걸쳐 보수를 한 부엌 벽은 회 반죽을 바른 위에 노란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바닥에는 흰 에나멜 칠을 한 커다란 유선형 난로와 냉장고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분홍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선반 위에는 밀가루와 차, 그 외 식품들이 들어 있는 통들이 널려 있었으며 리놀륨을 깐 부엌 바닥의 한쪽 구석에는 백리터들이 쌀통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난로 위에 끓일 물을 올려놓은 사이훙은 파랗게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끓는 물 소리가 노인 내외를 깨우지 않도록 사이훙은 솥에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사이훙은 크롬 도금한 다리를 가진 포마이카 테이블로 돌아서는 순간 편지 한 통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봉투를 뜯어 보니 그 속에 얇은 편지가 한 장 들어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편지를 읽었다.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식탁의자는 크롬 도금한 S자형 파이프에다 붉은 비닐 커버를 입힌 합판을 댄 것이었다. 지그재그로 흔들리는 그 의자에 앉을 땐 상당한 주의가 필요했다.
사이훙은 언제나 이 의자에 앉을 땐 뒤로 넘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나는 화산을 떠나려 한다.
너의 도움이 필요하니 속히 돌아오거라.〉
마지막 글씨 위에는 화산 장문인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사이훙은 편지를 내려놓았다. 사부의 붓글씨는 언제 보아도 아름다웠다. 그는 이 편지를 읽고는 아무런 감명도 받을 수 없었다. 편지를 읽고 난 직후 그의 마음속에는 서둘러 가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다음 순간 왜 내가 가야 되는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어쨌거나 그는 실질적으로 화산에서 추방당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그 앙금이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자기를 키워 주었으나 가장 지도를 필요로 했을 때는 무자비하게 쫓아 버리지 않았는가? 사부의 시자들과 다른 동료들이 장생불사의 비법을 열심히 배우고 있을 동안 자기는 잡채 가게에서 접시닦이나 하고 있다는 생각에 질투심과 의혹을 지울 수 없었다.
사이훙은 다시 편지를 읽었다. 지구의 반대편으로 이동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시간도 꽤 걸리는 일이다. 또한 이번의 만남이 행복한 재회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사이훙은 화단으로 나가는 뒷문을 열고 캄캄한 계단으로 내려섰다. 이웃집의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밝은 달빛이 초라한 현관에도 살며시 내려앉고 있었다. 이 집은 수십 년 동안 슬픔과 우울함만 간직해 온 것 같았다. 그는 부서지고 깨어져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듯한 계단을 밟고 내려섰다.
깊은 밤의 추위가 옷 속을 파고들었다. 추위에 놀란 피부는 반사적으로 수축되었고 그의 몸이 체온을 유지하려 애쓰는 사이 두 뺨은 빨갛게 상기되었다. 눈이 쌓인 땅엔 사이훙이 내딛는 걸음이 만든 깊은 발자국이 남겨져 있었다.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 깊숙이 찔렀다.
복식 아파트에다 되는 대로 증축을 하고 남은 자투리땅에 만든 정원은 큰 편은 아니었다. 남쪽으로 앞이 훤히 뚫린 정원은 여름이면 푸른 잔디로 뒤덮였지만 지금은 하얀 눈만이 덮여 있었다. 정원 한복판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복숭아 나무가 하나 서 있었다. 그것은 사이훙이 이 도시에 처음 와서 심은 것이다. 이제 겨우 묘목의 단계를 벗어난 나무는 눈 속에서도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조금은 외로워 보였다.
배나무는 잎사귀 한 잎 찾아볼 수 없었다. 겉만 보아서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추위에 시들어 죽은 것처럼 보였다. 어린눈 하나 찾아볼 수 없었고 헐벗은 가지 위로는 벌레 한 마리 기어다니지 않았다. 이번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도 알수 없었다. 봄이 와도 죽은 채 이대로 내버려져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이 나무에 새 잎이 다시 나온다면 그것은 이 식물에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의식이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신념, 따뜻한 햇빛이 찾아올 것을 예견할 수 있는 이 나무가 갖고 있을까?
사이훙은 중국으로 돌아가야 할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사이훙은 인민공화정부가 들어서기 전에는 점쟁이에게 물어 보거나 시초를 던져 주역점을 쳐보았다. 그러나 지금 그에겐 시초 같은 것도 없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어릴 때부터 스승들이 가르쳐 주었던 대로 자연의 법칙을 읽고 스스로 해답을 구하는 길뿐이다. 나무는 한 곳에 뿌리를 박고 서 있다. 가지들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형태를 이루어 간다. 그것들은 대기중에 자신의 위치를 찾아 뻗어 나간다. 이렇게 해서 그 형태가 갖추어지면 우리는 그것을 「나무」라고 부른다.
사이훙은 희미한 달빛 가운데 서 있었다. 그는 화산에서 떨어져 나온 자신의 비참한 신세와 그로 인해 응어리진 분노의 마음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레스토랑에서 천한 일을 하고, 건달들의 공격을 받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 이 미친 짓 어딘가에는 자신의 의문에 대한 해답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헤쳐 나가야 하는 이 모든 삶의 투쟁을 환히 비추어 줄 어떤 진리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사이훙은 공원에서 있었던 결투에 다시 생각이 미쳤다. 그는 자신이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하게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술 마시고, 도박을 즐기고, 결혼도 하는 사람들같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협박하고 공격하다가 마침내 강한 자에게 걸려 호되게 당하는 사람들 같이, 사이훙은 부와 영성을 갖고 태어났으며 궁극적 목표가 있는 교육을 받고 자라왔다. 그러나 그런 것마저도 자신이 점잖게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사이훙은 철학을 배웠고 전문적인 영적 지도를 받았으며 신의 음성이 속삭이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런 것들은 마음의 상처와 함께 어디론가 쓸려가 버렸다. 가장 많은 특권을 누리고, 가장 운이 좋았으며 용기와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었던 그가 지금에 와선 여느 사람과 똑같은 가엷은 존재가 되어 있는 것이다. 화산의 도관에서 받았던 가르침도, 성서로운 맹세를 하였던 것도 지금 자신이 받고 있는 경제적 고통과 인종적 차별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사이훙은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만져 보았다. 그는 아주 어린 나무였던 자신에게 거름과 사랑을 주고 가지를 쳐주던 바로 그 사부가 자기를 세상에 내보낸 일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사이훙은 경전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큰 나무 그늘 밑에 있는 작은 나무는 크게 자라지 못한다.〉
사이훙은 마침내 상념에서 깨어나 실내로 다시 들어왔다. 개 짖는 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불을 끄고 자기 방으로 올라온 사이훙은 샤워를 하고 상고머리오 깎은 짧은 머리를 감았다.
잠자리를 챙긴 뒤 사이훙은 다시 한번 편지를 읽어 보았다.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을 얻으러 가는 길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단지 심부름 가는 것이었다. 자신을 이 방랑 생활로 내몰았던 사부에 대한 감정의 응어리가 반도 안 풀렸지만 그는 사부를 도우러 가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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