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잠이 깼다. 얼마나 잤는지는 몰랐다. 졸음이 완전히 달아났고 정신은 맑았다.
도대체 몇 시나 됐기에 이럴까? 리나는 두 주먹을 쥔 상태로 옆에서 자고 있었다.
아내는 늘 그렇게 잔다…….
다시 자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벌써 새벽 5시는 된 것 같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시계를 봤다. 아니, 겨우 오전 12시 30분이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잠이 깬 적은 별로 없었다.
잠옷을 벗고 바지와 셔츠로 갈아입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책상으로 가서 종이 한 장과 볼펜을 집어든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그러고는 글을 쓰는 나 자신의 모습을 쳐다봤다. 마치 내 손이 어떤 생각을 갖고 스스로 움직이는 듯 했다.
‘여보, 10일 정도 어디 갔다 오겠소. 절대로 걱정하지 말아요.’
종이쪽지를 전화기 옆에 놓아두고 거실 창문을 지나 베란다로 나갔다. 베란다 탁자 위에는 전날 밤에 뒀던 체스 판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화이트 킹이 외통수인 상태였다. 탁자를 지나 정원으로 나가는 문을 조용히 열었다.
그날 밤은 이상하게도 밝았다. 별빛 때문은 아니었다. 달이 떠오를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달의 형태를 짐작해보려 했다. 내가 살고 있는 호주 동북부에서는 대체로 밤하늘이 청명하다.
외부 계단을 내려가 판다누스 나무쪽으로 걸어갔다. 대개 이 시간에는 개구리와 귀뚜라미의 멋진 합창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진다. 그러나 그날따라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몇 걸음 정도 떼었을 때 갑자기 필로덴드론(상록 덩굴 식물의 일종)의 색상이 변하는 모습이 보였다. 집의 담벼락과 판다누스 나무의 색깔도 변했다. 만물이 푸르스름한 빛 같은 것에 휩싸였다. 발밑의 잔디밭이 물결치듯 흔들리고, 판다누스 나무 아래의 땅도 요동쳤다. 필로덴드론들이 뒤틀리고, 담벼락은 바람결의 종이처럼 부르르 떨었다(저자는 공개강연에서 ‘아지랑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외부 계단을 내려가 판다누스 나무쪽으로 걸어갔다.
대개 이 시간에는 개구리와 귀뚜라미의 멋진 합창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진다.
그러나 그날따라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몸 상태가 안 좋아서 그러려니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그 순간 내 몸이 아주 천천히 공중으로 들리는 게 느껴졌다. 처음엔 서서히 필로덴드론 위로 떠오르다가, 그 뒤부터는 좀 더 빨라졌다. 그러면서 점점 작아지는 내 집이 발밑으로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너무 당황한 내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었다.
“이제 괜찮아요, 미셸.”
나는 꿈을 꾸는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내 앞에는 키가 엄청나게 큰 사람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여성’ 은 상 · 하의가 하나로 된 옷과 완전히 투명한 헬멧을 착용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당신은 꿈을 꾸는 게 아니에요.” 그녀가 내 마음속의 질문에 대해 답변했다.
“맞소.” 내가 응수했다. “하지만 꿈은 늘 이런 식으로 시작되지요. 그러다가 침대에서 떨어져 이마에 혹이 생겨야 꿈이란 걸 알게 되지요!" 그녀는 미소를 머금었다. “게다가,” 나는 말을 계속했다. “우리는 지금 호주에 있는데도 당신은 내게 나의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말하고 있지 않소. 나도 영어를 할 수 있다고요!"
“나도 그래요.”
“틀림없이 꿈이야. 흔히 꾸는 그 황당무계한 꿈 말이야. 이게 꿈이 아니라면, 도대체 당신은 내 소유지에서 뭘 하는 거요?"
“우리는 당신 소유지에 있지 않고 그 상공에 있어요.”
“아! 악몽이구만. 봐요, 내 말이 맞았지. 내 몸을 꼬집어봐야지.” 나는 그 말을 실행에 옮겼다. “아야!"
그녀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만족하나요, 미셸?"
“하지만 이게 꿈이 아니라면 왜 내가 이 바위 위에 앉아 있나요? 그리고 저쪽에 지난세기의 옷을 입고 있는 저 사람들은 누구죠?"
나는 유백색의 빛 속에서 말하고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식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신은 누구요? 체구가 왜 비정상적으로 큰 거요?”
“나는 정상이에요, 미셸. 내가 사는 행성에서는 모두 체구가 이래요.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거예요, 친구여. 당신을 그렇게 불러도 괜찮겠지요? 우리가 이미 좋은 친구 사이가 아니라면 머지않아 그렇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그녀는 내 앞에 서 있었다. 미소 띤 얼굴에선 지성이 배어 나왔고, 몸 전체에서는 선량한 기운이 번져 나왔다. 그녀만큼 편안함을 주는 사람을 만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럼요, 원하는 대로 부르시오. 그런데 당신 이름은?"
“내 이름은 타오에요. 하지만 먼저, 이것은 꿈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어요. 꿈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나중에 알게 될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당신은 어떤 여행을 하도록 선택됐어요. 특히 최근 들어선 극소수 지구인들만이 체험한 여행이지요. 지금 이 순간, 당신과 나는 지구가 속한 우주와 평행하는 우주 속에 들어와 있어요. 당신을 데리고 들어오기 위해 우리는 일종의 ‘에어 로크’ (우주선이나 잠수함 등의 기밀식 출입구)를 이용했어요.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시간은 멈췄어요. 그리고 당신은 이곳에서 20년 혹은 50년 동안 머물다가 돌아가도 지구에서의 시간은 전혀 변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의 물질적 신체는 전혀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거요?"
“그들은 무한정 존재할 수 있어요. 당신도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이곳의 인구 밀도는 매우 낮아요. 죽음은 자살이나 사고로만 발생합니다. 시간은 정지돼 있어요. 이곳에는 일부 동물을 포함해 남성과 여성도 있어요. 그들은 지구 나이로 30,000~50,000년, 혹은 그 이상 됐어요.”
“왜 저들이 여기에 있지요, 어떻게 여기에 왔나요? 어디서 태어났나요?”
“지구에서요……. 그들은 모두 우연히 이곳에 왔어요.”
“우연히? 그게 무슨 뜻이요?"
“아주 간단해요. ‘버뮤다 삼각지대’ 라는 말을 들어봤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히 말해서, 그곳에서, 그리고 별로 알려지지 않은 다른 장소들에서, 이 평행우주(parallel universe: ‘쌍둥이 우주’라고도 한다)가 당신네 우주와 겹쳐지면서 자연스럽게 워프(warp: 초광속 우주여행이 가능한 시공간 왜곡지대)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워프에 너무 근접한 사람이나 동물, 물체들은 글자 그대로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예컨대 거대한 선단(船團)도 몇 초 만에 통째로 사라지기도 합니다. 때론 몇 시간이나 며칠, 혹은 몇 년 뒤에 다시 당신네 우주로 돌아가게 되는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결코 돌아가지 못합니다. 혹시 지구로 돌아간 사람이 자신의 체험을 얘기하면,대다수 사람은 믿지 않습니다. 그 얘기가 진실이라고 우기면 그는 ‘미친 사람’ 으로 취급되지요. 지구로 되돌아간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아무 말도 안합니다. 동료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알기 때문이죠. 때론 기억상실증에 걸리기도 해요. 부분적으로 기억을 회복한다 해도 그것은 평행우주에서 일어난 일에 관한 내용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 주제에 관해 아무런 얘기도 못합니다..”
“북아메리카에는,” 타오가 말을 이었다. “평행우주로 들어가는 통로에 관한 대표적인 사건이 있어요. 한 청년이 집에서 몇 백m 떨어진 곳의 우물로 물을 길러 갔다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어요. 한 시간쯤 지난 뒤 가족과 친구들이 그를 찾아 나섰어요. 그동안 내린 눈이 20cm 정도 쌓였으므로 찾는 일은 간단했을 겁니다. 그 청년의 발자국만 따라가면 됐지요. 하지만 벌판의 한가운데에서 발자국이 끊겼어요. 주변에는 그가 뛰어오를 만한 바위나 나무가 없었어요. 이상하거나 별다른 흔적도 없이 발자국이 그냥 사라진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그 청년이 우주선에 납치됐다고 믿었어요. 하지만 당신도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그건 아니었어요. 그 불쌍한 청년은 단순히 평행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겁니다.”
“기억이 납니다.” 내가 말했다. “나도 그 사건에 관해 들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그 사건을 그토록 잘 아나요?"
“그것은 나중에 알게 됩니다.” 그녀는 수수께끼를 말하듯이 대답했다.
우리의 대화는 갑자기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중단됐다. 그들은 너무 기괴한 모습이어서 나는 다시 이 모든 일이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가 있는 장소에서 100m 쯤 떨어진 곳에 바위들이 쌓여있었는데 그 뒤에서 여자처럼 생긴 사람과 12명 정도의 남자가 함께 나타났다.
그들의 생김새는 참으로 이상했다. 마치 선사 시대를 다룬 역사책 속에서 막 걸어 나온 사람들 같았다. 현대인이라면 들어 올리지 못할 거대한 몽둥이를 휘두르며 고릴라처럼 걸었다. 그 무시무시한 생물체들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우리를 향해 곧바로 다가왔다. 내가 뒤로 물러나려고 하자 타오는 두려워하지 말고 그냥 있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허리벨트의 버클에 손을 얹고는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딸깍딸깍 하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그들 무리 중 가장 힘세게 보이는 남자 다섯이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무리의 나머지는 걸음을 멈췄고 곧이어 구슬픈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풀이 죽은 채 우리 앞에 엎드렸다.
나는 다시 타오를 쳐다봤다. 그녀는 얼굴을 움직이지 않은 채 조각상처럼 서 있었다. 최면을 걸려는 듯 그녀의 눈은 그들에게 고정돼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녀는 그들 무리의 여성에게 텔레파시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 여성이 일어나 쉰 목소리로 무리에게 말하는 모습이 무슨 명령을 내리는 듯했다. 그러자 무리는 쓰러진 동료들을 등에 업고 앞서 말한 바위 무더기 쪽으로 데려갔다.
“저들이 뭐 하는 거죠?" 내가 물었다.
“죽은 자들을 돌덩이들로 덮을 겁니다.”
“저들을 죽였소?"
“어쩔 수 없었어요.”
“무슨 말인가요? 우리가 정말로 위험에 처해 있었나요?"
“물론이죠. 저들은 1만 년 동안이나 이곳에 존재해 왔어요. 1만 5천년이든가? 뭐, 그 기간을 정확히 알려고 애쓸 시간은 지금 없어요. 게다가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저들의 존재는 조금 전에 당신에게 설명해주던 문제의 좋은 사례에요. 저들은 어떤 시점에서 이쪽 우주로 넘어왔고, 그때 이후로 줄곧 여기에서 살아왔어요."
“끔찍하군요!"
“동감이에요. 하지만 그것은 자연 법칙, 우주 법칙의 일부에요. 게다가 저들은 위험해요. 인간보다는 야수처럼 행동하니까요. 우리와 저들 사이에 대화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이쪽 우주에 사는 대다수 다른 존재들과 저들 사이의 대화가 불가능하듯이 말이죠. 우선 저들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없어요. 게다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진짜 위험에 처했었고 그런 상황에서 나는 그들을 해방시켜주는 호의를 베푼 거지요.”
“해방?"
“그렇게 놀란 표정 짓지 말아요. 미셸. 내 말 뜻을 잘 알잖아요. 그들은 물질적 신체에서 해방됐고, 이제 다른 모든 생명체들처럼 정상적인 과정에 따라 자신들의 윤회를 계속할 수 있게 됐어요.”
그렇다면,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이 평행우주는 저주받은 곳이네요? 지옥이나 연옥처럼.”
“미셸, 당신이 종교적인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
“단지 내가 이해하려 애쓴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그런 비유를 했을 뿐이오.” 내가 대답했다. 내가 종교적인지 여부를 그녀가 어떻게 알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알아요, 미셸. 그냥 농담으로 한 말이에요. 그것을 일종의 연옥에 비유한 것은 적절했어요. 하지만 평행우주는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에요. 자연계의 몇몇 우연 중 하나지요. 알비노(albino: 동물의 백색 변종)는 우연이에요. 네잎 클로버도 우연으로 볼 수 있어요. 당신의 맹장 역시 우연이지요. 지구의 의사들은 맹장이 인체에서 가질 수 있는 용도가 무엇일지를 아직도 궁금해 합니다.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게 정답이에요. 대체로 자연계의 만물은 모두 분명한 존재 이유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맹장을 자연계의 ‘우연’ 에 포함시켜요.
이쪽 우주에 사는 사람들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 않죠. 예를 들어 내가 당신을 때려도 당신은 고통을 못 느껴요. 하지만 너무 세게 때리면 고통은 없을지라도 죽을 가능성이 있어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사실이 그래요. 이곳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내가 방금 당신에게 설명한 내용을 전혀 몰라요. 오히려 다행이지요. 그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자살유혹을 느낄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곳에서도 자살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들은 무엇을 먹나요?"
“그들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요. 그럴 욕구를 못 느끼기 때문이에요. 여기에서는 시간이 멈췄다는 점을 잊지 마세요. 시체가 썩지도 않아요.”
“끔찍하구먼! 그들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서비스는 그들을 죽이는 것이겠네요!"
“중요한 점을 제기했어요. 사실 그것은 두 가지 해결책 중 하나에요.”
“다른 해결책은 무엇인가요?"
“그들을 온 곳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해요. 우리는 워프를 이용할 수 있으므로 그들을 자기네 우주로 돌려보낼 수도 있어요. 다시 말해 그들을 해방시키는 거지요. 하지만 그럴 경우 그들 대다수에게 일어날 엄청난 문제들을 당신도 알 거예요. 이미 말했지만 저들은 이곳에서 수천 년이나 살아왔어요. 그토록 오래 전에 떠나온 우주로 되돌아갈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마 미치겠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타오는 나의 단정적인 대답에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당신은 정말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행동하는 사람’ 이군요, 미셸. 하지만 성급히 결론짓진 마세요. 앞으로 봐야할 게 아주 많아요.”
그녀는 한 손을 내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기 위해선 몸을 약간 숙여야 했다. 당시엔 몰랐지만, 타오의 키는 290cm나 됐다. 인간으로선 엄청나게 큰 키였다.
“우리가 당신을 선택한 것은 올바른 결정이었음을 내 눈으로 확인했어요. 당신은 이해력이 빨라요. 하지만 지금은 두 가지 이유에서 당신에게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어요."
“예를 들면?"
“첫째, 그런 설명을 하기엔 아직 너무 일러요. 당신이 몇 가지 점에 관해 좀 더 알아야 한다는 뜻이에요.”
“알겠어요. 두 번째는 뭐죠?"
“두 번째 이유는,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그녀는 가벼운 손짓으로 나를 돌아서게 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내 눈은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졌다. 100m 쯤 떨어진 곳에 푸르스름한 빛이 퍼져 나오는 거대한 구체(球體)가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구체는 직경이 70m나 됐다. 그 빛은 일정하지 않고 진동하듯 흔들거렸다. 마치 한여름 태양열에 달궈진 모래밭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멀리서 보는 듯했다.
그 거대한 구체는 지상에서 10m 쯤 떠있는 상태로 ‘흔들거렸다.’ 창문, 출입구, 계단도 없었고 표면은 달걀 껍데기처럼 매끄러웠다.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타오와 함께 그 기계 장치를 향해 걸어갔다. 지금도 그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구체에 다가가던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너무 흥분해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빨리 감기’ 모드로 비디오를 보듯 마음속에선 온갖 영상들이 끊임없이 스쳐지나갔다. 가족에게 이 모험담을 얘기해 주는 내 모습이 보였고, 미확인 비행물체(UFO)에 관해 읽었던 신문기사들도 떠올랐다. 사랑하는 가족 생각이 떠오를 때면 슬픔이 북받쳤다. 함정에 빠진 것처럼 내 자신이 붙잡혀있고 다시는 가족을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세요, 미셀.” 타오가 말했다. “저를 믿으세요. 머지않아 건강한 모습으로 가족을 다시 만날 테니까요.”
내가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타오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지구인들한테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고운 선율 같은 웃음소리였다. 그녀가 나의 생각을 읽은 두 번째 경우였다. 첫 번째는 우연의 일치였을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구체에 다다르자 타오는 나를 1m 정도 떨어져 마주본 채 서있게 했다.
“어떤 이유에서도,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를 만지면 안돼요, 미셀. 어떤 이유에서도……. 아시겠죠?"
정색을 한 명령에 나는 상당히 놀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왼쪽 가슴 높이에 ‘부착돼있는’ 일종의 ‘대형 메달’ 위에 한쪽 손을 얹고, 다른 손으론 허리벨트에서 끌러낸 대형 볼펜 같은 것을 쥐었다.
그리고는 우리 머리 위로 그 ‘볼펜’을 들어 올려 구체 쪽으로 겨누었다. ‘볼펜’ 에서 녹색 빛줄기가 번쩍이는 듯했는데, 확실치는 않았다. 그런 후 타오는 ‘볼펜’ 으로 나를 가리켰다. 다른 손은 여전히 ‘메달’ 위에 얹어놓은 채였다. 그러자 우리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떠오르더니 그 기계장치를 향해 날아갔다. ‘우리 몸이 그것과 충돌하는구나. 라고 생각한 순간, 구체 표면의 일부가 거대한 실린더 속의 피스톤처럼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높이가 3m쯤 되는 타원형 입구가 나타났다.
타오와 나는 마치 착륙하듯 그 비행체 내부로 들어갔다. 그녀는 ‘메달’ 에서 손을 떼고 자주 해본 듯한 민첩한 동작으로 ‘볼펜’을 다시 벨트에 갖다 끼웠다.
“가요. 이제는 서로를 만져도 됩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내 어깨를 붙들고 파란색 계열의 작은 발광체 쪽으로 데려갔다. 불빛이 너무 강렬해 나는 눈을 절반쯤 감아야 했다. 지구에서는 본 적이 없는 빛깔이었다. 발광체 아래까지 다가가자 발광체가 붙어있던 벽면이 ‘우리를 통과시켰다.’ 그렇게 밖에는 묘사할 길이 없다. 타오가 나를 데려가는 방식으로 볼 때 내 이마에는 큼직한 혹이 났어야 했지만 우리는 마치 유령처럼 벽을 통과했다! 타오는 나의 놀란 표정을 보고는 크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긴장이 풀렸다. 지금도 그 웃음이 생각난다. 상쾌한 산들바람 같았다고나 할까. 불안해하던 나를 안심시켜 주는 웃음이었다.
나는 ‘비행접시’ 에 관해 친구들과 자주 얘기를 했었고, 그것이 실재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 실재와 대면하게 되자 머릿속은 온갖 의문들로 가득 차 터질 것만 같았다. 물론 마음속으론 무척 기뻤다. 타오가 나를 대하는 방식으로 보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동료들은 어떤 존재들일까. 나는 그 모험의 매력에 푹 빠져있긴 했지만 가족을 다시 못 만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몇 분 전만 해도 내 집 정원에 있었지만, 이제는 가족들과 너무도 멀리 떨어진 듯했다.
우리는 터널 모양의 복도 바닥을 ‘미끄러지듯 이동해’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벽면은 노란 빛깔이었는데 너무 강렬해 눈을 감아야 했다. 벽면은 아치형으로 돼 있었는데, 마치 엎어놓은 사발 속에 우리가 들어가 있는 듯했다.
타오는 투명한 재질의 헬멧을 내 머리에 씌웠다. 덕분에 나는 그 빛을 견뎌낼 수 있었다.
“좀 어때요?" 그녀가 물었다.
“한결 낫군요. 고맙소. 그런데 저 빛 말이에요. 당신은 어떻게 견뎌내죠?"
“빛이 아니에요. 이 방 벽면의 현재 빛깔일 뿐이죠.”
“‘현재’ 라! 그렇다면 벽에 페인트칠을 다시 하려고 나를 데려왔소?" 내가 농담을 던졌다.
“페인트는 없어요. 진동만이 있을 뿐이에요, 미셸. 아직도 당신이 지구가 속한 우주에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지금 광속의 여러 배로 여행할 수 있는 장거리 우주선 안에 있어요. 당신이 이 침대에 누우면 곧 출발 할 겁니다.”
방 한가운데에는 뚜껑 없는 관(棺)처럼 생긴 커다란 상자가 두 개 있었다. 나는 그 중 하나에 들어가 팔다리를 뻗고 누웠고, 타오도 나머지 하나에 들어갔다. 그녀가 낯설지만 매우 조화로운 목소리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을 약간 들어 올리려 했지만 마음대로 안 됐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 때문에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벽면의 노란색이 점차 엷어지면서 점차 푸른색으로 대체되었다. 푸른색 역시 강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페인트 작업’ 이 끝난 셈이다.
방의 3분의 1이 갑자기 깜깜해지면서 먼 곳의 별들처럼 반짝이는 미세한 불빛들이 보였다.
타오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들렸다. “저것은 별들이에요, 미셸. 우리는 방금 지구를 떠났어요. 지구는 점 점 멀어지고, 당신은 내가 속한 우주로 갈 겁니다. 이번 여행에 큰 기대를 가질 테지만, 출발 과정에도 관심이 있을 거예요. 그래서 당신을 위해 출발 속도를 상당히 늦췄어요. 앞에 있는 화면을 통해 볼 수 있어요.”
“지구가 어디 있나요?"
“아직은 볼 수 없어요. 우주선이 지구 위로 상승 중이거든요. 약 10,000m 고도에서…….”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몇 분 전 타오가 사용한 언어와 같은 듯했다. 타오는 간략하게 응답했다. 그러자 그 목소리가 내게 ‘프랑스어’ 로 그것도 유창한 프랑스어로 탑승을 환영한다고 말했다(억양은 일반적인 경우보다 좀 더 선율적이었다). 여객기를 탈 때 나오는 ‘탑승 환영’ 기내 방송과 흡사했다. 내가 처해있는 희한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매우 즐거워했던 게 기억난다.
그 순간 실내 공기의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지면서 에어컨을 켠 듯 시원해졌다. 그리고 상황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화면에 태양일 수밖에 없는 별이 나타났다. 그 별은 처음엔 지구의 가장자리, 나중에 알았지만 좀 더 정확히는 남아메리카 지역에 닿아있는 듯이 보였다.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시각이 지날수록 아메리카 대륙이 작아졌다. 호주는 햇빛이 아직 닿지 않아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지구의 윤곽이 뚜렷해졌다. 우주선은 지구둘레를 돌아 북극 상공의 한 지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서 방향을 바꿔 놀라운 속도로 지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불쌍한 지구는 농구공 크기로 작아졌다가 다시 당구공만 해지더니 마침내 화면에서 거의 사라졌다. 그 대신 나의 시야는 검푸른 우주공간으로 가득 찼다. 추가적인 설명을 듣고 싶어 타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니까 어때요?"
“놀랍소. 하지만 너무 빨라요. 이렇게 빠른 속도로 여행하는 게 가능한가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미셸. 우리는 아주 천천히 ‘이륙’ 했어요. 이제야 최고 속도로 날아가는 거지요.”
“얼마나 빠른가요?" 내가 말을 가로막고 물었다.
“광속의 여러 배 정도.”
“광속의? 정확히 몇 배지요? 믿기 어렵소. ‘광속 장벽’ (light barrier: 질량이 있는 물체는 광속 이상의 속도를 내지 못한다는 개념)은 어쩌고요?"
“믿기 어렵겠지요. 당신네 지구의 전문가들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이에요.”
“광속의 여러 배라고 했는데 정확히 몇 배인가요?"
“미셸, 이번 여행에서 많은 것을 알려줄 겁니다. 정말로 많은 것을. 하지만 당신에게 자세히 알려줘선 안 되는 것들도 있어요. 우리 우주선의 정확한 속도가 그런 것들에 속해요. 미안해요. 당신의 모든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실망스럽겠지요. 하지만 그런 것들 외에 앞으로 보고 배우게 될 새롭고 흥미로운 것이 많아요. 그러니 특정 정보를 알 수 없다고 해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의 태도로 보아 그 문제는 종결된 것이었고, 나도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계속 거론하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 될 듯했다.
“저기 보세요." 그녀가 내게 말했다. 화면상에 색상 있는 점이 나타나더니 급속도로 커졌다.
“뭐죠?”
“토성이에요."
당시 상황에 관한 나의 묘사가 불충분하다고 느끼는 독자들에게는 양해를 구한다. 내 자신이 아직 정상적인 감각을 충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너무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경험을 하다 보니 다소‘어리둥절한 상태’였다.
우주선이 접근하면서 그 유명한 토성이 화면 위에서 급격히 커졌다. 토성의 색상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지구상의 어떤 것도 비교가 안됐다. 노랑, 빨강, 녹색, 파랑, 오렌지색……. 각각의 색상 안에서도 무수히 많은 미세한 색조의 차이가 있어 서로 섞이고 나뉘는가 하면 강렬해지다 묽어지면서 그 유명한 고리들을 만들어냈다.
그 놀라운 장관은 화면을 더욱 가득 메웠다.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던 보이지 않는 포스 필드(force field : 보이지 않는 힘의 場)가 사라졌다. 나는 토성의 색깔들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마스크(앞서 말한 헬멧으로 이마부터 코 밑까지를 덮는다)를 벗으려 했다. 하지만 타오는 어떤 행동도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토성의 위성들은 어디 있나요?" 내가 물었다.
“화면 오른쪽에서 나란히 있는 두 개를 볼 수 있어요.”
“우리가 얼마나 멀리 있죠?"
“약 600만km, 혹은 그 이상일 거예요. 조종실에 있는 사람들은 정확히 알아요. 하지만 당신에게 좀 더 정확한 수치를 알려주려면 우리 ‘카메라’ 의 줌 렌즈가 최대치로 조정돼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 봐야 해요."
토성이 신속히 왼쪽으로 사라져 가면서 화면은 다시 우주의 ‘색깔’로 채워졌다.
기분이 한껏 고양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전에는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내가 엄청난 모험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왜 나일까? 나는 그런 모험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럴 가능성을 상상한 적도 없었다(누군들 그런 생각을 해봤겠는가?).
타오가 일어섰다. “당신도 이제는 일어나도 돼요, 미셸.” 나는 타오의 말대로 했다. 선실의 한가운데에 나란히 있는 우리의 모습이 다시 보였다. 나는 그 때서야 타오가 더 이상 헬멧을 착용하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설명해 줄래요?" 내가 물었다. “내가 헬멧 없이 따라다니는 동안에는 당신이 헬멧을 쓰고 있었는데, 지금은 내가 쓰고 있고, 당신은 안 쓰고 있네요. 왜죠?”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죠. 나는 세균학적으로 지구와는 다른 행성에서 왔어요. 우리에게 지구는 세균 배양기나 다름없어요. 따라서 당신과 접촉하기 위해선 기본적인 예방 조치를 취해야 했어요. 당신은 내게는 위험한 존재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이 선실에 들어왔을 때, 벽면의 빛깔이 당신에게는 너무 강렬했지요. 그래서 헬멧을 줬어요. 지금 당신이 쓰고 있는 것 말이에요. 당신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헬멧이에요.사실 우리는 당신의 반응을 예상했어요. 선실이 노란색이었다가 파란색으로 변하던 짧은 시간 동안 당신 몸에 있는 위험한 세균의 80%가 제거됐어요. 그 후 당신은 에어컨 바람 같은 시원한 것을 느꼈을 겁니다. 또 다른 형태의 살균 과정이었지요.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일종의 방사선 소독이라고나 할까. 지구의 언어로는 번역되지 않는 것이에요. 그런 방식으로 나는 100% 살균됐지만, 당신은 여전히 우리에게 치명적일 만큼의 세균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알약 두 개를 줄 겁니다. 그걸 먹으면 세 시간 동안은 우리들처럼 ‘순수한’ 존재가 될 수 있어요.”
타오는 자신의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상자에서 알약을 꺼내 내게 주었다. 물처럼 보이는 액체가 담긴 시험관도 건네줬다. 나는 안면 마스크처럼 생긴 헬멧의 아랫부분을 들어 올린 다음 알약을 모두 삼켰다. 그 뒤부터……. 뭐라고 할까, 만사가 매우 빠르게 진행됐고, 더욱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타오가 두 팔로 나를 들어 올려 침대 위에 올려놓고 마스크를 벗겼다. 나는 그 장면을 내 몸으로부터 2-3m 떨어진 곳에서 지켜봤다!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는 독자들에게는 이 책의 어떤 대목들이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일정 거리 떨어진 위치에서 내 모습을 봤고, 단지 생각만으로 실내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타오가 말했다. “미셀, 당신은 내 모습을 보고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나는 당신을 볼 수 없어요. 당신에게 말할 때 당신을 쳐다보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당신의 아스트랄체(Astral body[being]: 성기체[星氣體],영체[靈體], 혼체[魂體]가 육체를 떠났지요. 위험하진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에게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처음이죠. 어떤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히기도 해요…….당신이 먹은 알약 중 하나는 우리에게 위험한 세균을 당신 몸에서 제거하는 약이에요. 다른 하나는 당신의 성기체를 몸에서 떠나게 만드는 약이지요. 약효는 3시간 정도 지속될 거예요. 당신 몸을 정화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죠. 그렇게 하면 우리를 감염시킬 위험 없이, 또 시간 낭비 없이 우리 우주선에 들어올 수 있어요.”
이상하게도 이 모든 게 매우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타오를 따라갔다. 정말로 흥미진진했다. 그녀가 어느 벽면 앞에 이르자 벽면이 미끄러지듯 열리면서 우리를 통과시켰다. 몇 개의 방을 지나갔다. 나는 약간 뒤처진 채로 따라갔는데, 내가 다가갔을 때 벽면이 다시 이미 닫혔다 해도 나는 그냥 ‘통과’했다.
마침내 우리는 직경 20m 가량의 둥근 방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적어도 12명의 ‘우주 비행사’ 가 있었다. 모두 여성이고 타오의 체구와 비슷했다. 타오는 4명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둥글게 배치돼 있는 대형 안락의자에 각자 앉아 있었다. 타오가 빈 의자에 앉자 그들 네 사람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일부러 뜸을 들이는 듯 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는 다시 그들의 목소리에 매료됐다. 그들 음성의 유운(類韻: 모음만의 압운[押韻])은 매우 생소했다. 억양도 너무 조화로워 마치 노래를 부르는 듯했다. 그들은 모두 타오의 보고에 큰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나에 관한 얘기였으리라 짐작했다. 그들이 맡은 임무의 주된 대상이 나였다는 판단은 옳았다.
타오의 보고가 끝나자, 질문들이 쏟아졌다. 다른 2명의 승무원이 대화에 합류했다. 토론이 무르익으면서 분위기도 고조됐다.
그들의 대화 내용을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하자 나의 관심은 다른 데로 쏠렸다. 처음 이 방에 들어올 때 생생한 색상의 3차원 영상을 보여주는 화면 앞에 세 명의 승무원이 앉아있는 것을 봤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이곳이 우주선의 조종실임이 분명해졌다. 나의 몸이 안 보인다는 사실은 재미를 배가시켰다. 승무원들은 나의 존재로 인해 방해받거나 산만해지는 일 없이 제 임무를 수행했다.
가장 큰 화면에서는 각종 점들을 식별할 수 있었다. 다른 점들보다 크거나 더 밝은 것들도 있었다. 점들은 정해진 방향으로 서서히 움직였다. 몇 개는 화면의 왼쪽으로, 몇 개는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화면상에서 점들의 크기가 커지면서 속도도 빨라졌다. 그리고 마침내는 화면을 벗어났다. 점들의 색깔은 찬란하고 매우 아름다웠다. 미묘한 색조부터 햇빛처럼 눈부신 노란색까지 다양했다.
나는 곧 그 점들이 행성과 항성들임을 깨달았다. 우주선은 그 별들 사이를 항해하고 있었다. 화면을 가로질러 조용히 이동하는 별들의 모습에 나는 넋을 잃었다. 정신없이 별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낯선 소리가 선실에 울렸다. 부드러우면서도 주의를 끄는 소리였고 동시에 섬광 신호가 번득였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타오와 대화하던 승무원들이 조종대로 모여 각자의 의자에 앉았다. 모두 화면을 주시했다.
대형 모니터 화면의 중앙에 무언가 거대한 덩어리가 나타났다. 둥근 형태에 청회색의 그 물체는 모든 화면의 중앙에 정지해 있었다.
선실 안의 모든 사람이 조용했다. 컴퓨터를 닮은 장방형의 장비를 다루는 세 명의 승무원들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갑자기, 놀랍게도 선실 벽면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뉴욕시의 이미지가 나타났다. 아니 시드니였던가. 하지만 하버 브릿지의 모양이 아닌데…….
“그것이 다리였나요?" 너무 놀란 내가 옆에 있는 타오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육체’ 를 떠나있으며 따라서 내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은 질문이었다. 타오와 승무원들이 그 이미지에 관해 언급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타오가 내게 거짓말을 했을 리 없고, 따라서 우리는 이미 지구를 멀리 떠나왔다고 확신했다. 타오는 우리가 광속의 여러 배로 여행 중이라고 설명했었고 나는 스쳐 지나가는 토성을 비롯해 여러 행성과 항성들을 봤다. 그런데 우리가 돌아왔다면, 이유가 뭘까?
타오가 큰 소리로, 그리고 프랑스어로 말하기 시작하자, 모두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셀, 우리는 지금 ‘아레모 X3’ 행성의 상공에 정박해 있어요. 지구 크기의 두 배 정도 되는 행성이에요. 화면에서 보듯이 당신네 지구와 흡사하게 생겼죠. 다른 임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길게 설명하지 못해요. 하지만 나중에 자세히 설명할게요. 이해를 돕기 위해 말하자면, 우리 임무는 원자폭탄 방사능과 관련이 있어요.”
승무원들은 모두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각자 무엇을, 언제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우주선은 멈춘 상태였다. 대형 패널판이 도시 중심부 영상을 투사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자면, 이 대형 패널판은 사실상 거대한 텔레비전 화면이었다. 거기에 나오는 입체 영상은 너무도 실제와 똑같아 우리는 어느 고층 건물 안에 들어가 창문 밖으로 내다볼 수 도 있었다.
두 명의 ‘여승무원’ 이 지켜보는 작은 화면에도 나의 관심이 쏠렸다. 그 화면에서는 우리의 우주선이 보였다. 평행우주에서 이미 봤던 우주선이었다. 지켜보는 동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주선의 중간 부분 밑으로 마치 암탉이 알을 낳듯 작은 구체가 빠져나갔다. 일단 모선에서 분리되자 그 소형 구체는 아래쪽 행성을 향해 속도를 내어 날아갔다. 그것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또 다른 구체가 같은 방식으로 날아갔고, 곧이어 세 번째 구체도 나타났다. 각각의 구체는 별개의 화면에서 별도의 승무원들이 관찰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 대형 화면에서도 구체들의 하강을 쉽게 추적할 수 있었다. 구체들은 너무 먼 거리를 날아간 만큼 화면에서 사라질 만도 했지만 여전히 보였다. 카메라의 ‘줌’ 렌즈 능력이 엄청나게 강력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줌 렌즈의 능력은 첫 번째 구체가 화면의 오른쪽으로, 두 번째 구체가 화면의 왼쪽으로 사라질 정도로 강력했다. 이제 우리는 가운데에 있는 구체만 볼 수 있었고, 그것이 지상에 도달하기까지 명확하게 추적했다. 그 구체는 아파트 건물들 사이의 드넓은 광장 한가운데에서 지상 몇m 공중에 뜬 채로 정지했다. 다른 구체들의 움직임도 세밀하게 관찰됐다. 한 구체는 도시를 관류하는 하천의 상공에, 또 다른 구체는 도시 외곽의 낮은 산위에서 선회했다.
갑자기 화면에 새로운 영상이 비쳤다. 나는 이제 아파트 건물의 출입문을 명확히 볼 수 있었다. 아니, 출입구라고 해야 할까. 왜냐하면 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크게 벌어진 틈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순간까지도 이 도시가 얼마나 이상한지를 눈치 채지 못했다.
움직이는 물체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외계문명 > 9일간의 우주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4장 황금빛 행성 (0) | 2020.01.18 |
---|---|
3장 지구 최초의 인간 (0) | 2020.01.03 |
2장 핵전쟁과 파멸 (0) | 2020.01.02 |
서문 (0) | 2019.12.25 |
티아우바(Thiaoouba) 행성 (0) | 2019.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