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영주/누구나 아름다운 영혼을 지니고 있다

6. 누구에게나 천운은 주어진다

기른장 2020. 6. 28. 20:46

태어나자마자 굶어 죽는 삶을 선택하는 영혼과 신체기관을 전부 갖추지 않고 태어나거나, 전쟁 중에 태어나거나, 폭력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왜 그런가 하는 것이다. 일부 무속이나 일부 종교에서는 전생이나 그 이전의 삶에서부터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현생에서의 삶이 그렇게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전생에 마음을 갈고 닦으면서 공덕을 쌓았더라면 현생에서의 삶이 그렇게 모질지는 않을 거라는 그럴듯한 훈계까지 덧붙여 말이다.

 

이런 주장을 대할 때마다 나는 종종 언성을 높이곤 한다. 그들의 말이 전혀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말속에는 사람의 일생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라는 비관적인 운명론의 그림자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할까? 육신의 생명을 얻은 순간에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어서, 사람이 일생을 산다는 것은 다만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이는 배우에 불과한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영과 육으로 이루어진 사람에게 있어서 영혼은 생전에 주어진 것이지만 육체는 부단히 진보한다. 여기서 육체는 부단히 진보한다는 말은 종의 진화를 뜻하기도 하지만 인간에게는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이 내재해 있다는 뜻이 더 강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 중에서 선조들의 축적된 지혜를 이용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새로운 문명을 창조해 나간 유일한 생명체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의 의식은 끊임없이 진보하며 과거를 되돌아 보면서 동시에 미래를 열어간다. 단 한번도 인간의 의식이 진보를 멈춘적은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이 진보한다는 것은 주어진 프로그램대로 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간은 닥쳐오는 위험이나 난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며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인간의 영이 기본적으로 신성(神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주어진 조건에서 생존에만 매달리는 다른 짐승과 그렇지 않은 인간을 구분해주는 가장 큰 기준이다. 

 

그런데도 내가 알고 있는 불자들 중에는 자신에게 닥치는 불행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는 사람들이 많다. 꽤 신심이 있는 사람들조차도 입버릇처럼 자신이 전생에 지은 업 때문에 지금 자신이 고통받는 것을 너무도 당연시하는 것이다.

 

정말 인간의 삶이 그저 업이나 팔자에 얽매여 한치도 벗어날 수 없다면 나부터도 별로 이 세상을 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관점으로 보면 나도 팔자가 꽤 드센 편이다. 내 나이 여섯 살이 되던 무렵 부모님께서 한달 간격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고아로 자랐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했지만 10년을 겨우 채우고는 이혼을 하고 두딸을 혼자서 키웠으니 지금까지의 내 삶도 그리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내 삶이 그렇게 굴곡진 게 다 운명이고 전생으로부터의 업이었다면 나는 지금도 그렇게 허덕이며 살고 있어야 한다. 아니, 직선적인 내 성격상 이미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산다는 게 너무 어렵기만 하던 시절 나는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던 내가 버젓이 살아 있다는 건 무슨 의미이겠는가.

 

잘난 사람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늘상 양지에만 있고 지지리도 재수가 없는 사람은 언제나 그늘에서 웅크리고 살아야 한다면 뭣하러 알량한 목숨을 부지하고 있겠는가 말이다. 

 

자기에게 닥친 불행의 원인을 스스로 분석해서 다음에 있을 일에 대비하는 것은 육신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이성과 의지로 능히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최선을 다해도 안되는 일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러기도 전에 자신의 운명이나 업을 들어가며 한탄만 하는 사람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진인사하고 대천명하라는 말은 그래서 더욱 값진 경우가 아닌가. 태어날 때부터 현생의 삶은 크게 행복한 삶과 불행한 삶으로 나누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 넉넉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궁핍하기 짝이 없는 출생환경 때문에 평생을 허덕이며 사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은 출생할 때의 환경과 생을 마감할 때의 환경이 아주 다르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제 손으로 삶의 목표들을 성취해 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사주팔자라는 것도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근심반, 호기심반으로 사주팔자를 보러 다니지만 한 사람의 모든 것이 사주팔자에 의해 운명지어 지지는 않는다.

 

사람에게는 사주팔자 외에 천운이라는 우주의 섭리가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에 아무리 비참하게 목숨을 연명해 가는 사람이라도 돌이켜보면 지금보다 좋았던 시절이 반드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평생을 유복하고 부유하게 살았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곤란한 지경을 당했던 과거가 있기 마련이다. 

 

왜 그런가?
사주팔자가 아무리 나쁜 사람에게도 천운은 반드시 좋은 시절을 주게 되고,
사주팔자가 더없이 좋은 사람에게도 반드시 곤란을 겪는 시절이 주어진다.
이것은 우주의 섭리이다.
누구에게나 한때 잘나가던 시절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든 이 천운이 주어진 기간은 대개 20년 정도이다. 문제는 이 기간을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느냐에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미 그 기간을 그냥 흘려 보낸 경우도 있을 것이고, 이제야 그 운이 열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리 준비하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천운도 아무 소용이 없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인생은 단 한번의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현생에 태어나고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는 일회적인 목숨이 아니다.
삶은 다시 반복되며 이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바로 이 순간 우리는 우리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현생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개척하지 않는 사람이 내세에 성실히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의 조건과 환경은 주어지지만,
삶을 영위해 나가는 조건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