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낙하산1 - 절박한 무기 개발
1971년 3월24일
주한미군 사령부는
'미 7사단을 일주일 안으로 한국에서 철수할 계획' 이라고 발표했다.
한국 주둔 26년 4개월만의 철수였다.
국방과학연구소(ADD) 는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국산 무기를 하루 빨리 개발해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내게 낙하산 개발 명령이 떨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당시 나는 국방부에 설치된 '컴퓨터 전쟁 게임팀' 에
기술자문역으로 차출되어, 파견 근무중이었다.
이 '컴퓨터 전쟁 게임팀'을 만든 목적은
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
한국군이 북한군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컴퓨터 가상 게임을 통해 미국에 보여주려는 데 있었다.
총지휘는 김재명(金在明.68.) 육군대령이 맡았고
전군에서 50명이 동원됐다.
작업은 홍릉에 있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에서 했다.
그시절 대형 컴퓨터,
그것도 딱 1대를 보유하고 있는 곳은
그나마 여기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기계를 다룰 줄 아는 사람도 이용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당시 과학기술연구소 전산부장(성기수.65.엘렉스컴퓨터 고문)은
"컴퓨터를 놀리는 게 아까우니 활용 좀 해 달라" 며
내게 청탁(?) 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면서 컴퓨터 사용법도 좀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컴퓨터 전쟁 게임을 해 보자고 맨먼저 주장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나는 KIST에서 컴퓨터 기술 자문과 강의를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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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낙하산2 - 낙하산 개발 특명
그러던 어느날 오후
신응균(申應均.작고) 국방과학연구소장이
급히 나를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서둘러 연구소로 향했다.
申소장은 나를 보자마자 엉뚱한 질문을 했다.
"韓박사, 낙하산 타 봤어?"
전혀 뜻밖이었다.
"한번도 타 보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만져본 적도 없습니다."
申소장이 나를 힐끗 쳐다봤다.
현역 공군 중령이
낙하산 한 번 타 보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다는 듯한 눈치였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韓 박사, 낙하산 좀 만들어 봐!" 하는 것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
나는 단호하게
"비록 공군 장교지만
낙하산에 대해서는 전혀 모를 뿐더러
적임자도 아니다" 고 대답했다.
그러자 申소장도 물러서지 않았다.
"韓박사는 이론물리를 했잖아.
그래서 그걸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전공에 딱 맞는 사업이 없단 말이지.
연구소 사정을 잘 알 잖아.
지금 맡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네.
국방부의 지시니만큼 무조건 韓박사가 맡아 주게.
이건 명령이야!"
'명령' 이란 말이 확성기처럼 크게 들렸다.
군인이란 명령 하나에 죽고 사는 존재가 아닌가.
할 수 없이 "명령이라면 맡겠다" 고 대답했다.
하지만 너무 막막했다.
'국방부 지침이 뭐냐' 고 물었더니
申소장이 저간의 사정을 설명해 줬다.
1969년 여름 한강에서 국산 낙하산 실험을 하던중
바클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군인 한 명이 강물에 익사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바클은 낙하산이 지상에 떨어졌을 때
사람을 낙하산으로부터 빠져 나오게 하는 핵심 부품이었다.
그러니 바클 개발에 역점을 두라는 것이었다.
낙하산 개발비는 고작 1백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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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낙하산3 - 소장의 고민
국방부는 국방과학연구소 창설 즉시
낙하산을 국산화하라고 지시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申소장은
연구소 내 전문가들과 여러 차례 논의를 해 봤지만
결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연구소가 이제 막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직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방부의 태도는 단호했다.
군 출신 박사들을 모아 연구소를 만들었으니
무조건 만들어 내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申소장은
낙하산 개발을 둘러싸고 국방부와 옥신각신했다는 것이다.
申소장의 고충을 이해할만 했다.
申소장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포병이지만 그보다도 선배였다.
또 국방차관과 KIST 초대 부소장을 지낸 실력가로
매우 양심적인 분이었다.
그런 분의 고충을 덜어주고 싶었다.
일단 결심이 서자 내 머리 속은 벌써 낙하산 생각으로 가득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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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낙하산4 - 우주선에서 찾은 자료
낙하산 개발은 無에서 有를 창조하는 작업이었다.
낙하산에 관한 기본 데이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관련 자료도 다 조사해 봤지만 헛수고였다.
처음부터 벽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그러던 1971년 4월 중순 어느날,
머리를 식힐 겸, 한 과학잡지를 뒤적거렸다.
마침 인류 최초로 달을 정복한
아폴로 11호 우주선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1969년 7월 우주 정복의 새 장을 연 쾌거였다.
이 가운데 한 장의 사진이 내 눈길을 끌었다.
우주선이 낙하산을 활짝 펼치고 태평양 상공에 떨어지는 장면이었다.
순간 섬광처럼 내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바로 이거다.
우주선 귀환(歸還) 자료에서 낙하산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겠구나…"
한 가닥 희망이 보였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서둘러 우주선에 관한 자료들을 모두 입수한 끝에
내가 원하던 정보를 찾아냈다.
물론 그것만으로 충분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황무지에서 '노다지' 를 캐 낸 기분이었다.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병참물자 개발실 연구원들과 함께 자료들을 꼼꼼히 분석했다.
먼저 바클 개발이 가능한지 여부를 검토했다.
낙하산이 지상에 떨어질 때
사람이 낙하산으로부터 빠져 나오려면
무엇보다 바클이 제대로 작동해야 했다.
신응균(申應均.작고) 국방과학연구소장이 가장 강조한 사항이었다.
그러나 결론은 '불가능' 으로 나타났다.
즉각 申소장에게 이를 보고했다.
"소장님, 바클 개발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예산은 고작 1백만원인데
설사 2억원을 들인다 해도 바클은 개발할 수 없습니다. "
순간 申소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 말을 '낙하산 개발이 불가능하다' 는 것으로 오해한 듯 했다.
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금속공업이 발달해야 바클을 만들 수 있는데
우리나라 금속공업은 대장간 수준 밖에 안됩니다. "
당시는 포항제철이 생기기 전이어서
제대로 된 제철공장은 국내에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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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낙하산5 - 겁없는 도전정신
申소장은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韓박사, 그렇다면 낙하산 개발은 불가능한가. "
나는 그제서야 申소장의 의중을 알아 차렸다.
그래서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바클은 개발할 수 없어도 낙하산은 만들 수 있습니다.
방향만 바꾸면 됩니다."
그의 표정이 금새 밝아졌다.
나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바클이 낙하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불과 20% 밖에 안 되고
나머지 80%는 시스템입니다.
바클은 하나의 부품에 불과하며 부품은 신뢰성이 제일 중요합니다.
'탁' 누를 때 '탁' 열려서 정확하게 작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기술이 없습니다. "
단숨에 여기까지 설명을 했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申소장의 표정은 진지했다.
나는 일단 심호흡을 한 뒤 이렇게 말했다.
"바클은 외국에서 수입해 와야 합니다.
그대신 나머지 80%는 자신있게 국산화하겠습니다. "
속이 다 후련했다.
그러자 申소장이 침묵을 깨며 결의에 찬 어조로 말했다.
"좋아, 그렇게 하지. "
그날부터 철야작업이 시작됐다.
마치 험준한 산을 오르기 위해 베이스 캠프를 차린 심정이었다.
우리 연구원들은 늦은 밤 라면으로 출출한 배를 채우기 일쑤였다.
낙하산 설계는 오인식(吳仁植) 육군소령과 함께 작업했다.
吳소령은 육사(16기) 를 나와 서울대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했다.
꼼꼼하고 손재간이 뛰어났다.
나는 吳소령에게 설계이론을 가르쳤다.
매일 과제를 주고 다음날 아침 어제 내 준 과제를 발표하게 했다.
내가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때 하던 방식이었다.
과제를 하느라 충분히 잠을 못잔 탓에
그의 눈은 항상 충혈돼 있었지만 의욕만은 넘쳤다.
나는 나대로 낙하산 컴퓨터 설계에 매달렸다.
정확한 데이터를 입력하는 게 가장 큰 관건이었고
바로 그 데이터를 찾는 게 우리의 과제였다.
매일 吳소령과 토론을 벌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데이터를 입력해 나갔다.
마치 암벽을 타는 산악인의 심정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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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낙하산6 - 드디어 만든 낙하산
낙하산을 만드는데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 무게
▶ 공기 투과도(透過度)
▶ 최적속도 등 세 가지였다.
예컨대 낙하산에 매다는 물체의 무게에 따라,
낙하산의 폭을 조절해야 했다.
그런가 하면
낙하산의 공기가 너무 많이 빠지면 낙하속도가 빨라지고
공기가 잘 안 빠지면 그 속도가 느려진다.
그래서 너무 빨리 떨어져도 안되고 늦게 떨어져도 안된다.
마치 빗방울이 일정한 속도로 떨어지듯
최적 속도를 유지해야 했다.
이같은 요소들을 수차례 바꿔가며 그 결과를 컴퓨터에 입력했다.
이어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컴퓨터 모의 실험을 반복했다.
매일 컴퓨터와 씨름하다 보니
나중에는 눈이 시큰거려 눈물이 나곤 했다.
아내는 "눈을 너무 혹사시킨다" 며
안약과 함께 시력에 좋다는 소(牛) 간을 식탁에 올려주곤 했다.
작업 시작 5개월후 마침내 낙하산 컴퓨터 설계를 끝냈다.
1971년 9월 중순이었다.
긴 터널을 빠져나온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직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설계대로 낙하산을 만들기란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설사 만든다 해도 현장실험을 거쳐야 했다.
여기까지 성공해야 작업이 일단락되는 것이었다.
낙하산 제작은 오인식(吳仁植) 육군소령이 맡았다.
그는 부리부리한 눈에 호방한 성격이었지만
일처리만큼은 빈틈이 없었다.
워낙 적은 예산 탓인지라 그는 경비도 철저히 아꼈다.
재료 구입도 꼭 필요한 것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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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낙하산7 - 한번에 'OK'
1971년 9월 하순 어느날 오후
우리는 낙하산 실험을 위해 김포평야로 갔다.
정해일(丁海一.62.한국전광 감사) 공군소령, 吳소령,
그리고 영화감독(이름 기억 안남) 한 사람도 동참했다.
실험에서 영화감독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낙하산이 떨어지는 모든 과정을
초(秒) 단위로 순식간에 찍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국방과학연구소의 홍보영화를 전담하고 있었다.
통상 영화 필름의 경우 1초에 20번 화면이 바뀐다.
그래야 우리 눈에 연속 동작으로 보인다.
바로 그런 성질을 이용해
낙하산의 움직임을 1초에 20번 찍을 계획이었다.
그러면 1/20초마다 낙하산의 현위치를 포착할 수 있었다.
위치를 알면 시간 경과에 따른 거리 계산이 가능하고,
거리를 알면 낙하산이 펴지면서 받을 충격도 알아낼 수 있다.
그래서 미국제 16㎜ 짜리 고속 카메라를 가져갔다.
비행기는 육군의 협조를 얻어 군용 수송기 한 대를 동원했다.
수송기에는 조종사와 부조종사 두 명만 탑승했다.
우리는 김포평야 근처에 있는 한 야산으로 올라갔다.
3백미터는 족히 돼 보였다.
그날따라 날씨가 어찌나 맑은지 낙하산 촬영에는 그만이었다.
실험은 1㎞ 상공에서 했다.
실험 시간은 불과 5분.
낙하산을 어느 지점에 떨어뜨릴 것인지 조종사와 미리 약속했다.
낙하산에는 사람 대신 60kg짜리 모래 주머니를 매달았다.
당시 한국군의 평균 체중이 그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오후 3시.
약속 시간에 맞춰 군용 수송기가 나타났다.
잠시후 낙하산이 허공을 힘차게 가르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직접 낙하산을 만든 吳소령도 몹시 감격스런 표정이었다.
가슴이 졸였다.
낙하산이 펴질 때 찢어지지 않을까 염려했다.
또 원하는 지점에 떨어질 수 있을 지 아무도 자신할 수 없었다.
불과 5분 밖에 안되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그러나 낙하산이 지상에 가까와 질수록
그것은 기우(杞憂) 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낙하산이 목표지점을 향해 정확히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낙하 시간은 당초 예상했던 5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모두들 기뻐 어쩔줄 몰랐다.
나는 옆에 있는 吳소령을 힘껏 껴안았다.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丁소령도 吳소령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했다.
병참물자 개발실로 돌아와 찍은 필름을 현상,
吳소령과 함께 꼼꼼히 분석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단 한번의 실험으로 성공한 것이다.
이 사실을 즉각 국방부에 보고했다.
낙하산 국산화의 기초는 이렇게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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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석유군복1 - 정부의 고민
국방과학연구소(ADD) 병참물자 개발실에서 개발한 것이
모두 빛을 본 것은 아니었다.
폴리프로필렌(pp) 으로 만든 예비군 전투복이 대표적인 경우다.
1972년 10월 어느날 아침
오원철(吳源哲.71) 청와대 경제2수석이 전화를 걸었다.
"韓박사, 상의할 게 있어. 청와대로 급히 좀 들어오게. "
평소 괄괄하던 그의 목소리가 이날따라 왠지 힘이 없어 보였다.
느낌이 이상했다.
청와대로 가면서도 계속 궁금했다.
吳수석은 전에 없이 반기는 표정을 지으며
"韓박사, 이걸로 예비군 전투복 좀 만들어 봐"
하며 내게 뭔가를 건네 줬다.
'물건' 을 찬찬히 들여다 보니
늘상 보던 솜(綿) 이었다.
吳수석이 특유의 큰 목소리로
"그것 몰라? 그게 바로 폴리프로필렌이란 거야" 하는 것이었다.
吳수석은 그제서야 내게 고민을 털어놨다.
1971년 중반부터
울산 공업단지에 석유화학 공장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듬해 6월에는 ㈜대한유화 폴리프로필렌 공장이 완공됐다.
폴리프로필렌은 일종의 섬유 재료인데
당시 대량 생산으로 값은 매우 쌌지만 판로(販路) 가 문제였다.
그런데다 용도 또한 어망(魚網) 외에는 달리 쓰일 데가 없었다.
吳수석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폴리프로필렌은 쏟아져 나오는데
이걸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면 큰 낭패였다.
석유화학 공업은 당시 국력을 쏟아 부은 산업이었다.
어떻게든 이를 살리는 것이 吳수석의 최대 과제였다.
吳수석은 자문위원회를 구성,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었다.
학계 인사.섬유업체 사장 등 모두 6명이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어망의 재료로는 예비군 전투복을 절대 만들 수 없다" 고 주장했다.
깔깔해서 피부에 안 좋다는 것이었다.
吳수석은 낙심했다.
그러나 쉽게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고민끝에 결국 해결사로 나를 선택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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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석유군복2 - 혼방으로 하면 된다
나는 이 작업을
병참물자 개발실 이대규(李大揆) 연구원에게 맡겼다.
李씨는 국방과학연구소의 전신인
육군기술연구소.연구발전사령부 출신이었다.
이름만 바뀌었 뿐 한 연구소에서 20년간 근무한 셈이다.
그것도 섬유만 연구해온 섬유 권위자였다.
과묵.성실한데다
일단 연구에 몰입하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거의 두 달간 밤샘 작업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12월 중순이었다.
출근해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있는데
李씨가 밝은 표정으로 내 방에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李씨의 목소리는 약간 들떠 있었다.
"실장님!
면(綿) 과 폴리프로필렌을 섞어 혼방(混紡)으로 하면 됩니다.
몸 쪽에 면이 닿도록 하고
바깥 쪽에 폴리프로필렌이 나오게 하면
촉감 문제가 해결됩니다. "
순간 내 무릎을 탁 쳤다.
듣고 보니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았다.
李씨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방직공장만 정해지면 기술지도는 제가 하겠습니다. "
그러나 의외로 일이 꼬였다.
섬유업체들이 모두 비협조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예비군 전투복을 만들려면
먼저 방직공장에서 폴리프로필렌으로 천을 짜줘야 했다.
그런데 너나 할 것 없이 거절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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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석유군복3 - 섬유과장의 위력
吳수석에게 사정을 얘기했더니
'상공부 섬유과장을 만나 보라' 는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섬유과장을 찾아갔더니
그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몇시간씩 밖에서 기다리게 했다.
잠깐 시간을 내 주긴 했지만 내 말에는 건성이었다.
곧바로 청와대에 들어가 吳수석에게 이를 그대로 전했다.
화가 난 吳수석이 전화로 섬유과장을 다그쳤다.
아니나 다를까. 약발이 통한 모양이었다.
다음날 오후 상공부로 들어 오라는 연락을 받고 갔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국내의 '내노라' 하는 섬유업체 사장들이
전부 나와 있는 게 아닌가!
섬유과장의 위세를 처음으로 실감했다.
나같은 공군 중령을 하찮게 여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당시 섬유제품은 우리나라의 주력 수출품이었는데,
수출용 원자재 구입 등과 같은
섬유업체의 '목줄' 을 바로 섬유과장이 쥐고 있었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섬유업체 사장들은 잔뜩 긴장된 모습이었다.
상공부 섬유과장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청와대 지시입니다.
폴리프로필렌(pp)으로 예비군 전투복을 만들어야 합니다.
어느 업체가 하겠습니까. "
'청와대 지시' 라는 말에
모두 움찔해 하면서도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섬유과장이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이거 안 하면 안됩니다.
저도 여러분도 곤란해져요. "
강제로 떠 맡기는 분위기여서.
마지못해 겨우 한 업체 사장이 자원을 했지만
썩 흔쾌한 결심은 아닌듯 보였다.
섬유업체 사장들이 꺼려하는 이유가 있었다.
새 원료로 천을 짜려면
기존의 원료를 기계에서 말끔히 제거해야 했다.
이 작업에만 꼬박 이틀이 걸렸다.
게다가 새 원료를 설치하는 등 작업준비에 닷새가 걸렸다.
그런데 예비군 전투복 만드는 건 고작 하루면 족하다.
결국 하루 동안의 작업을 위해
일주일이나 가동을 중지해야 하는 셈이었다.
당연히 꺼릴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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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석유군복4 - 성공한 '특수군복'
일주일 후 병참물자개발실의 이대규(李大揆) 연구원이
현장에 나가 기술 지도를 했다.
면(綿) 과 폴리프로필렌을 섞어 천을 짜는 방법을 자세히 가르쳤다.
안 쪽에 면이, 바깥 쪽에는 폴리프로필렌이 나오도록 했다.
李씨는 기계를 일일이 점검하며 꼼꼼하게 작업을 챙겼다.
1972년 12월말 수백 벌의 예비군 전투복이 만들어졌다.
먼저 경기도 xx부대 군인들에게 시험삼아 입혀 봤다.
가장 우려했던 게 바로 촉감 문제였는데
'대체로 좋다' 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도 '불에 약하다' 는 지적이 나왔다.
폴리프로필렌의 어쩔 수 없는 재질상의 한계로
담배불을 대면 곧바로 녹아 버렸다.
이듬해 1월초 결과 보고차 청와대로 들어갔다.
오원철(吳源哲.71) 경제2수석은
폴리프로필렌으로 만든 예비군 전투복을 찬찬히 훑어 보더니
아주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어망(魚網) 재료인 폴리프로필렌으로는 의복을 만들 수 없다' 는
전문가들의 주장을
보란듯이 뒤집어 엎었다는 승리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나를 격려해 줬다.
"韓박사, 수고했어.
뭐든지 韓박사한테 맡기면 일이 된단 말이야.
이런 걸 가지고 안된다고 그러니 사람들 원….
아무튼 석유화학공업은 이제 살았어.
오늘은 내가 두 다리 쭉 뻗고 잠 좀 잘 수 있겠네. "
나는 '이 때다' 싶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
吳수석은 궁금하다는듯 나를 쳐다봤다.
"폴리프로필렌은 재질상 불에 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담배불이 닿으면 금방 녹습니다. "
吳수석이 언짢다는듯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韓박사.
담배불에 녹지 않는 옷감이 어디 있어.
중요한 건
폴리프로필렌으로 훌륭한 전투복을 만들 수 있다는 거 아닌가."
吳수석의 언성이 갑자기 높아졌다.
그의 심정을 이해할만 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폴리프로필렌의 판로(販路)를 어떻게든 만들어 내야만 했다.
그래야만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석유화학공업을 살릴 수 있었다.
나 역시 그 정도의 단점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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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석유군복5 - 물거품된 '특수군복'
吳수석은 이 사실을 즉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도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
이제 막 생산을 시작한 석유화학 제품이
방위산업에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고무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국방부는
폴리프로필렌 전투복 사용을 끝까지 반대했다.
역시 담배불에 약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전투시 만약 화염방사기 같은 무기를 사용할 경우
낭패 보기 십상이라는 것이었다.
폴리프로필렌의 약점을 최대한 물고 늘어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면 수입상들의 집요한 반대 로비 때문이었다.
당시 군복은 1백% 수입한 면으로 사용했다.
폴리프로필렌으로 전투복을 만들 경우
이들이 받을 타격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니 가만 있을 리 없었다.
로비가 얼마나 집요했던지 朴대통령도 어쩌질 못했다.
애써 개발한 전투복은 결국 빛을 보지도 못하고
창고 속에 쳐박히는 신세가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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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방패막이1 - 소장 교체
1970년 8월에 설립된 국방과학연구소,
초대 소장은 신응균 박사였는데,
이 초대 申소장은 1년 6개월만에 물러나고 말았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1971년 11월 '기본화기 국산화 사업'(번개사업)을 시작할 때
박정희 대통령은 '한 달 안에 무기를 만들어 내라' 고
申소장을 재촉했다.
그러자 申소장은
"우리 실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고 반발했다.
朴대통령은 다시 다그쳤고
申소장은 결국 사표를 던지고 말았다.
그만큼 申소장은 합리적이었고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일 처리도 꼼꼼하고 세심했다.
1972년 2월말,
국방과학연구소 2대 소장으로 심문택(沈汶澤) 박사가 취임했다.
후임 沈소장은 전임 신소장과는 달리
통이 크고 괄괄한 스타일로
풍류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1948년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1956년 美 인디애나대에서 물리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과학자로서는 리더쉽도 뛰어났다.
그는 소장에 취임하자마자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과학자들을 대거 유치,
국방과학연구소를 키우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朴대통령의 신임도 대단해서
박대통령이 사망후 신군부의 압력이 있을 때까지,
자그마치 8년간 최장수 소장을 지냈다.
이 기간에 그는
국방과학연구소가 발전할 수 있는 기틀과 함께
새로운 중흥기(中興期)를 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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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방패막이2 - 사표 받아 내시오
그런데, 1972년 2월말,
국방과학연구소 2대 소장에 갓 취임한 심문택(沈汶澤) 박사가
급히 나를 불렀다.
하기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듯 웬지 분위기가 무거웠다.
"韓박사, 병참물자개발실 연구원들 말이야…
대부분 연구발전사령부 출신들이지?"
나는 엉겹결에 "예,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무슨 얘기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연구발전사령부는 국방과학연구소의 전신(前身) 이었다.
沈소장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뭔가 결심한 듯
"아무래도 내 보내야겠어. 사표를 받게" 하는 것이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내 수족과도 같은 사람들의 사표를 받아 내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다시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소장님,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
沈소장은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사표를 받아내라고 그랬네. "
나는 완강히 반대했다.
"그건 안됩니다.
그 사람들은 제 명령에 따라 열심히 일한 죄 밖에 없습니다.
밤샘을 밥 먹듯 해가며 11가지 사업을 다 성공시켰는데
포상은 못할망정 왜 사표를 받습니까. "
11가지 사업이란
1971년 한 해 동안 병참물자개발실이 개발해 낸
수류탄, 방탄헬멧, 낙하산, 가스마스크, 전투식량
등을 국산화한 사업이었다.
고작 9백70만원의 예산으로 이룩한 업적이었다.
하지만 소장도 단호했다.
"그들은 구시대 연구원들이야.
더이상 쓸모가 없으니 사표를 받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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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방패막이3 - 설움받는 백전노장들
사실 병참물자개발실 연구원들은
국방과학연구소가 만들어질 때부터
소위 '물갈이' 대상에 올라 있었다.
이들은 1950년 6월 창설된 국방과학기술연구소 시절부터
육군기술연구소→연구발전사령부→국방과학연구소로
조직 이름이 바뀌는 동안
한 곳에서 20년 가까이 근무해 온 사람들이었다.
실무에서는 백전노장(百戰老將) 들이었지만
석사·박사 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꽤나 설움을 받았다.
그러나 극심한 취업난으로 쉽게 사표를 던질 수도 없었다.
결국 믿을 사람이라곤 나 밖에 없었고
실장인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고분고분했다.
그런 가운데
이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 하며
11가지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환경 때문이었다.
나는 이들의 방패막이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장님, 굳이 사표를 받아야 한다면 제 것부터 받으십시오."
내 태도가 단호하게 느껴졌던지 沈소장은 한 발 물러섰다.
"韓박사, 그러면 한 명이라도 사표를 받지. "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것도 저는 못받겠습니다.
실패한 사업이 한 가지라도 있다면
제가 군복을 벗겠습니다."
沈소장도 어쩔 수 없다는듯 껄껄 웃었다.
"韓박사 고집 세구만. 알겠네 알겠어. "
초대 신응균(申應均.전 국방차관.작고) 소장만 해도
병참물자개발실 연구원들의 노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후임 沈소장은 그런 전후 사정을 잘 알지 못했다.
'사표 해프닝' 이 이를 잘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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